Re..20041101 부산강의-종교개혁
Re..20041101 부산강의-종교개혁
이름 : 한윤범(IP:)
20041101 부산강의-종교개혁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오늘 드디어 대망의 종교개혁에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알지도 못하는 것에 헤맨다고 고생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종교개혁부터는 자신 있는데 그 이전 것은 자신 없어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공부한 것에 대해서 너무 기초부터 탐색을 안했다는 증거가 되죠.
그동안의 기초가 뭐냐 하면, 중간은 다 생략하고 어거스틴에서 붕~ 스파이더맨처럼 붕~ 날아서 바로 루터, 칼빈과 통하는 것처럼 그렇게 잘못 가르쳤던 신학교의 교수들, 그 사람들 퇴장해야 됩니다. 사기성이 너무너무 농후해요.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지. 어디서 세상에 그런 게 어거스틴에서 붕 날아서 이까지 오는 게 어디 있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그러한 주장을 그동안 해 왔었습니다.
종교개혁의 기본적인 모든 사상은 이미 중간에 천주교에서 나왔다하는 거죠. 문제제기는 이미 해왔다는 거죠. 이걸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뾰루지 하나 난 거예요. 종기 하나 올라온 거예요. 종교개혁이. 다 동의하는데 뾰루지 하나 올라온 거죠. 이 뾰루지, 종기 하나 올라온 것이 이것이 그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거죠. 왜냐하면 이건 완벽하거든요. 완벽한 신학체제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러 시간 동안 완벽한 신학체제가 뭔가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는 안 들어갔습니다만 대충은 그걸 정립을 했습니다.
완벽한 신학체제가 뭐냐 하면, 바로 신의 존재에 의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이 과정이지요. 신이 있기에 우리가 있고, 신과 우리의 연관성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러한 계통을 통해서 했기 때문에 형상은 결국 우리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법을 요구하지요. 지난 시간에 했지요.
성경은 우선 법 아닙니까? 성경책이 법이잖아요. 그들 눈에는. 법이 뭡니까? '하라'하는 거죠. ‘하라’가 법이잖아요. 법대로 그냥 순종하면 되고, 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은 신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현재 존재하는 걸 미루어봐서 역시 신이 존재하고, 우리는 신에서 아니면 딴 데 나올 데 없으니까. 우리가 존재하면 신이 존재하고, 그리고 우리가 이미 신을 안다는 그 자체도 이미 우리가 하나님 형상을 받았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믿게 되고, 그냥 믿습니다만 되는 게 아니라 그 신으로부터 주어진 게 있죠. 이게 성경책이잖아요.
그 성경책은 어떤 형식으로 주어졌다? 법이라는 형식으로 주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이 법이라는 것을 지키면 결국은 우리는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완벽해요. 퍼펙트하지요. 그렇다면 그 법 중에 하나 법이 예수 믿기. 예수 믿어라 이 법이지요. 예수 믿어라가 법이 되는 겁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완벽한 퍼펙트한 신학체제가 이걸 누가 그대로 답습하고 계속 반복, 되풀이했냐 하면, 루터가 답습하고 되풀이해 왔었어요. 그런데 이 루터가 친구가 벼락 맞고 하는 어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무슨 계기를 통했는지 모르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말이지요. 루터가 무슨 바람이 불었든지 무슨 계기가 되었든지, 이 전체하고 십자가하고는 안 바꾸란다. 이렇게 나왔다 말입니다.
십자가가, 그전까지의 십자가는 어디에 파묻혔느냐 하면, 십자가를 여러분, 안셀무스의 속죄론 있잖아요. 안셀무스의 속죄론 있듯이 십자가라 하는 것은, 법을 우리에게 지켜야 될 법 한 항목을 우리한테 던져준 것에 불과해요. 여러 가지 믿는데 그중에 하나 더 뭘 믿어라? 십자가의 속죄함도 믿으면 돼. 그러니까 여러 가지 출제 문제가 가운데서 그 출제 문제 가운데 한 문제가 십자가 믿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딴 것도 다 들어있고. 그래서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가 툭 튀어나오면 안 되고, 전부다 균등하게 동일한 미리 지켜야 될 항목들로 쫙 카페트처럼 쭉 평평하게 깔려 있는 거예요. 중간에 툭 튀어나오면 안돼요. 전부다 동일한 귀한 법이에요.
그런데 루터가 그 많은 것 중에서 십자가를 하나 쏙 내밀면서 십자가 이것으로 나머지 모든 것은 무용지물, 소용이 없게 됐다. 이렇게 주장하고 등장해 버렸다 말이에요. 그러니 하나님한테 단단히 지키려고 애썼던 동료들, 루터의 신학교 동료들 있을 것 아닙니까? 신부들, 동기들 있을 것 아닙니까? 이런 사람들이 무던히 루터를 달래려고 애를 썼겠지요. 그래, 그래 니 말 맞다. 우리 교회가 너무 타락했다. 사람들 돈 먹으려면 할 수 없지 뭐. 변두리, 핵심이 아니고 엉뚱한 것 가지고 달래주려고 애를 썼겠지요. 많은 사람이 그렇게 또 권세 있는 사람들이 루터보고 타협을 하려고 제안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지금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근본적으로 십자가만 있으면 나머지는 몽땅 다 필요치 않다. 라고 하니까 결국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기존의 완벽한 신학체제에서 왔던 기존의 모든 교회는 결국 교회도 아니고 그거는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 돼버리고 또 하나 십자가를 루터의 말을 루터의 주장을 따르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 돼버린 거예요. 루터의 말에 따르는 길이. 왜냐하면 그 당시에 루터 이외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엘리야냐 뭐, 850 대 1이냐 할 정도로 지금까지 우리고 알고 있던 모든 것이냐, 루터 혼자 말이 옳으냐? 하는 거죠. 꼭 한국정치와 좀 비슷하죠. 노무현 말을 할 것이냐, 대다수 국민들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 기 싸움, 힘 싸움, 외로운 힘 싸움 벌이듯이. 그렇게 된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루터한테 뭘 요구하겠어요? 그래. 니, 잘났다. 잘났는데 얼마나 잘났는데 니, 신학체제를 한번 펼쳐봐라. 이렇게 나올 거 아닙니까? 그때부터 루터의 신학체제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십자가 중심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데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놀랍게도 예정론이에요.
왜 예정론이 제일 먼저 나와야 되느냐 하면, 지금 문제가 터진 게 뭐냐 하면, 기존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되어 버렸거든요. 그러면 프로들, 그 당시 신부들 같으면 루터가 무슨 차원에서 저런 그딴 소리 하는가 아는데 일반 대중들은 지금 신학이 문제가 아니고 살아서 복 받고, 죽어서 천당 가야 되는 그게 심급한 문제지, 저거들끼리 신학논쟁 그것은 자기한테는 마음에 와 닫질 않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 구원되느냐? 구원되는 방법 내놔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그들은 시키는 대로 할 사람이기에 법이라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할 사람이다 이 말이지요. 믿을 수 있는 것 내놔라. 일단 기존의 교회는 믿지 마세요. 그러면 교회 안 믿고 뭘 믿으란 말입니까? 성경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연적으로 나온 게 성경중심주의 나오죠. 성경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기존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쳤느냐? 안 가르쳤죠.
왜 그러냐 하면, 그거는 신부들이 게을러서도 그렇지만 일반 대중들이 성경을 받을 필요 없잖아요. 신부가 주는 떡이나 카스테라라든지 그 포도주 먹으면 되지, 뭐 하려고 골치 아프게 성경 알아서 뭐 할 건데. 간단하게 이래 먹고 성찬식 참석하고 그리고 집에 가면 천당 가는데 뭐. 때에 따라 세례 받고, 때에 따라 고해성사하고 이렇게 하면 간단한 문젤 가지고 거기서 신학공부하고 할 필요 없잖아요.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칼빈이 나와서 교회를 대체할 만한 걸 내놔야 돼. 그게 종교개혁입니다. 교회 대체물이 뭐였습니까? 성경이었다고요. 이 사실을 오늘날 개신교들이 교인들에게 이야기를 안 해 줘요. 첫째는 종교개혁이 뭔지도 모르고. 두 번째, 그들이 성경을 모르고. 세 번째, 교회 대신 성경 속에 있는 복음을 전해야 구원받는다는 그걸 본인이 안 믿고. 모르고 알고 간에 본인이 믿질 안 해요. 본인이 믿질 않으니까.
그래서 종교개혁 주간되면, 종교개혁주간 다 지나갔습니까? 지나게 되면, 주로 한국교회의 개혁될 요소들, 사회적으로 뭐, 되도 않은 변죽에 해당하는 그런 것들 건드리고 핵심은 전혀 건드리지 않지요. 교회가 아니고 성경입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교회가 아니고 성경이라 할 때에 그때부터는 직접 성도들이 성경을 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때 틴델의 성경 해 가지고 성경번역이 그전부터 있었어요.
그전에 루터 말고도 교회가 아니고 성경입니다. 라고 외치다가 죽은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약간은 그런 낌새는 챘다만 그러면 성경을 배울 수 있는 자격자가 신부가 아니라도 되느냐, 성직자가 아니라도 되느냐? 하는 문제. 된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모든 것은 기존의 교회를 없애 버렸으니까 교회 없애 버렸다는 말은 뭐도 없애버렸습니까? 그전에 교회에서 가르친 전통도 없애버려야 된다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루터가 드디어 반발을 사게 됩니다. 거기서 상당히 반발을 느껴요.
기존의 전통을 다 버리라 하는 것은 루터는 자기가 뭔가 아니까 되는데 일반대중들은 그냥 따라갔던 사람이잖아요. 따라갔던 사람에게 다 버리라 하면 그 다 버린 빈 공간을 채울 만한 내놓을 게 전혀 없다 말이죠. 복음 아는 사람이 목사님 보고 교인들이 하는 소리가 뭐라 합니까?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면 뭐 합니까? 맨 그 이야기죠. 그래서 루터는 조정하게 됩니다. 다 버리라 했다가 그 다음부터는 야, 버린 자체가 핵심이 아니구나. 십자가가 핵심이지, 다 버릴 게 아니고, 버리든 안 버리든 그들이 십자가 차원에서 재해석해주는 그게 오히려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 모습에 접근하기 가깝다 하는 그러한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러면 여기서 루터가 다 이걸 버리라 할 때 이게 어려운데 뭐냐 하면, 일반대중들이나 루터의 그런 외침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슨 인식을 갖게 되느냐 하면, 무엇이 참이며 무엇이 거짓인가에 대해서 그들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일단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두 번째는 그걸 결정하는 기준이 아까 뭐라 했습니까? 기준이 성경이라 하는 그 점에 대해서 일단 그들이 형성되었죠.
이렇게 되니까 결국 뭣에 대해서 반발입니까? 기존의 교회에 대한 반발심이 확대 되겠지요. 뭐, 성경이 뭔지도 모르고 하여튼 교회는 아니란다, 아니란다, 아니란다가 펴져서 무조건 돈 내라하는 교회에 대한 반발심은 대충 퍼지게 되었어요. 그 중에 한 사람이 칼빈이고, 그 중에 많은 개혁자들이 나온 거지요.
사람이요, 군에서 그런 게 있잖아요. 참, 계급이 더러워서 나이도 적은 놈한테 명령 받고 지시 받으면 상당히 기분 나쁘잖아요. 군대기 때문에 더러워서 참아주고 뭐, 예예 해주고 참지만, 언제 뭐 하나 일 터지면 대번에 억눌렸던 것이 용수철처럼 되 터져 나와서 대들잖아요.
루터가 외치는 내용도 뭔지 모르고 뭐만 확산되었어요? 이 반발의식은 퍼진 거예요. 이것이 루터가 이야기한 종교개혁 쪽이 아니고, 인문주의 쪽으로 에라스무스, 그런 쪽으로 굉장히 또 퍼져 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뭐의 빌미가 되냐 하면, 교회로 하여금 루터를 압박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지요. 사회질서 꼬라지 말도 안 된다 이 말이지요.
지나 개나 농민들 되도 않는 인간들 다 들고 나오니까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도 튀어나오니까 이래서는 사회 꼴이 말이 안 되거든요. 꼭 데모할 때 데모하는 몇 사람은 취지를 아는데 그 뒤에는 데모가 취지도 모르고 그냥 뒤에서 뭐, 으싸으싸 해 쌌고, 와 카는데? 몰라. 앞에 가면 따라가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게 사회적으로 있어요.
그래서 뭔가 이건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교회는 교인수가 한 아홉 명 되는데 한국교회에 있을 수 있는 사항은 다 경험해 보는 교인수 아홉 명이나 여덟 명되는 교회. 그러니까 자유주의면 자유주의 문제점, 보수주의면 보수주의 문제점, 이런 모든 문제점이 교인들 하나하나 그 속에 다 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루터가 나중에 루터의 외침과 전혀 성격과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루터교가 번집니다. 지금 오늘날 한국에 들어온 루터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개판이지요. 복음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그거 교인들 돈 뜯어먹는 단체에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왜냐하면 그 루터교 성직자 되려면 예수 믿으면 안돼요. 하나님 믿고 예수 믿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이 시대에 하나님 믿고 예수를 믿어 버리면 일반인과 대화가 안 되고, 대화가 안 되면 그 사람을 교회로 포섭을 못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성직자들은 뭐하는 사람이냐? 공부는 좀 했거든요. 기독교가 이런 기다. 알았나? 돈 줘. 이런 교리가 있는데 잘 들었지요? 돈 주세요. 예수님은 이렇게 사랑을 베풀라 했는데 잘 들었지요? 돈 주세요. 그 차이점이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본인이 안 믿어요. 본인은 놀러 가기 바빠요. 골프치고 놀러가기 바쁘고. 원래 소규모 교단들이 그런 현상이 많아요. 돈 있고 소규모 교단들, 그런 현상이 많아요.
이것들이 공부는 많이 하고 인텔리가 되니까 전혀 믿지를 안지요. 교인들도 전부 인텔리니까. 대신 구제해 주고, 대신 봉사해 줄 테니까 돈 내놔라. 하는 그런 단체로. 봉사 중개 단체. 구제 중간 단체. 그리고 루터교는 사회정치운동. 성공회와 비슷해요. 성공회하고 같은 류다 보면 돼요. 저희끼리 대화 잘 통해요. 민주화운동하는 거 있잖아요. 민주화운동 벌이고 민주화운동 대신 해 줄 테니까 돈 내놔라. 그 교단은 뭐, 예수님이 어떻고 이러면 그거는 성직자들이 왕따 시켜버립니다.
특히 그 교단이 중요시 여기는 것은 뭐냐? 성경도 아니고 교리도 아니에요. 뭐가 중요하냐 하면, 역사성입니다. 역사성. 현재 총신도 이렇게 변합니다. 장신은 이미 변했고. 역사성이에요 역사성. 이번에 책 썼는데 역사성을 박살낼 참이에요. 역사라는 게 인간에게 조작된 만들어 낸 거예요. 이 시대에 역사가 신은 우리를 부른다. 이렇게 하고 있어요. 왜 역사를 주장하느냐 하면, 역사를 주장해야 본인이 믿음 없음이 전혀 안 들키거든요. 굉장히 사명감이 넘치는 사람으로 비치지, 본인이 전혀 믿음 없다는 것을 들키지 않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요.
만약에 역사성을 주장하지 않고 주여, 주여 부르고 이러면 이건 개코도 믿음 없는 게 기도하려니 얼마나 힘듭니까? 지가 선창해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야 되는데 새벽엔 일어나기도 싫은데 새벽기도 어떻게 해요? 믿음이 없으면 믿음 없는 쪽으로 이렇게 주장하는 쪽이 역사 주장이에요. 그저 신문사설 놓고 그것 토론하다 설교시간 다 때워버리고. 그리고 그럴수록 더욱 더 의식을 강조해서 교인들로 하여금 뭔가 의식에 참여하면 구원되는 그러한 안도감으로 줄라 하고. 그래서 루터교 같은 것 보면, 휘장 바꾸는 걸 진짜 잘 바꿔요. 날짜 맞춰 휘장 바꿔요. 오늘은 보라색으로, 빨강색으로. 무슨 신앙이 그런 짓이 다 있어요. 전례, 전례. 이것 짜고 연구하고 대가리 모아 이것 연구해요. 루터가 이렇게 됐습니다.
그들이 루터에 대해서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루터는 그 당시의 루터고, 지금의 루터는 아니다. 루터의 정신은 뭐냐? 그거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옹호다. 지 마음대로 해석해요. 그래서 이 자유를 억압하는 정부는 물러가라. 이따위 소리하고.
지금의 교회가 전 세계 분위가 뭐냐 하면, 초국가주의로 나가서 국가 자체를 하나의 적으로 간주해서 국가가 특히 강대국가가 선진국가가 인민들을 억압하는 쪽으로 가서 소위 시민운동에 합세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돈이 그쪽에서 흘러가거든요. 돈 따라 가거든요. 그러니까 국가간의 경계 없는 그런 것, 국경없는 의사회, 이런 것. 유엔활동. 거기에 동조함으로서 교회가 마치 국가를 초월한다는 이미지를 남겨서 좋은 인상을 남기죠. 참, 그러니까 결국은 전부다 이거는 사기라고 볼 수밖에 없지요.
루터가 성경을 주장하고 난 뒤에 그래, 성경이 뭔데? 라고 했을 때 루터는 예정론부터 시작했습니다. 예정론과 뭐와 연결시키느냐 하면, 십자가와 연관시켰습니다. 십자가가 뭐냐? 아, 정말 이게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면서도 언뜻 답변하기가 잘 안 떠오르지요. 십자가는 인간의 행함을 중단시키는 거예요. 절단시키는 게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뭐냐 할 때는, 이렇게 하면 정답이 되겠지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왜 하나님의 의면 의지 왜 인간의 모든 행위를 중단시키느냐? 이거는 인간의 행위 안에서 자기 의가 나오거든요. 십자가라는 것은 인간의 자기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죽임을 당했던 사건으로서 이로써 현재 인간들의 세계와 예수님의 십자가 안의 세계와 아담 안과 예수님 안이 확연하게 절단되어 있다. 끊어져 있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대표적인 근거가 갈라디아 6장에 나오지요. 십자가는 일종의 거울이에요. 분명히 거울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지요. 분명히 거울 속에 만져보고 있는데 양쪽 다 거울 만져보고 있는데 손을 잡을 수는 없지요. 만져보고 뻔히 보고 잇는데 대화도 안 통하고. 왜냐하면 거울 속에 인물을 누가 만집니까? 이게 안 만져지잖아요. 거울 속에 들어 앉아 있는데. 얼음 속에 있으면 얼음을 깨면 되잖아요. 거울 속에 있는 게 어떻게 만져집니까? 안 되잖아요. 도저히 거기에 그 자리 할 수 없게 만드는 새로운 영역의 세계가 십자가 안이라는 모습으로 등장한 거예요. 십자가 안에는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갔던 사람은 십자가 바깥으로 나올 수도 없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희귀한 현상입니까? 이 마지막 종말 때에.
십자가는 믿을 수가 없어요. 인간의 능력으로 믿을 수가 없어요. 다만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안에 들여다보는 사람은 십자가 안에 갇히게 되고 그 사람은 두 번 다시 십자가 밖으로 못 나옵니다. 이로써 같은 인간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지만, 한 사람은 십자가라는 거울 안에 갇혀 살고 한 쪽은 그 밖에 살면서 둘 다 뻔히 보면서도 둘 다 전혀 모든 일상적인 문제에서 대화가 되질 않아요.
제가 이야기한 것에서 중요한 것은 일상적인 문제에서 대화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에 대해서만 대화가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 안에 있는 새로운 일상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 바깥에 있는 일상과 일상적인 문제도 대화가 안돼요.
예를 들어서 어머니 이번에 추도예배인데 니, 올래? 안 갈랍니다. 야, 와 안 갈라카노? 가기 싫네요. 대화가 안 되죠. 니는 뭐, 우리도 교회 다니고 하는데 니, 무슨 별난 교회 다 다니는 모양이네. 추도예배도 마다카노? 안 갈랍니다. 어머니 추도예배 없애 버리소. 나는 니하고 대화가 안 된다. 안되지요. 그 속에 있으니까. 이게 십자가라는 교리문제에서 대화가 안되는 게 아니고, 거기서 파생된 모든 일상적인 문제, 국가에 대해서, 니, 노무현이 지지하나, 뭐, 한나라당 지지하나? 거, 뭐, 작은 문제입니다. 아이, 니하고는 대화가 안 된다.
그 일상적인 문제, 퍼뜨리는 일을 누가 하나? 여러분들이 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교회 와서 성경 한 수 배우려고 하거든요. 일상은 빼돌려 놨어. 일상은 목사도 손대지 마라.
오늘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세상에 어느 교인이 교회 오기 전에 주님, 보고 싶어! 이렇게 교회는 오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교회 왔음. 이번 주 복 둬. 안 주면 주님, 하나님 그러지, 내가 교회 왔잖아. 차 밀리는데 교회 왔잖아. 내가 교회 왔으니까 복 내놔. 뭐, 당당해요. 당당해. 내가 오늘 빠지려고 했는데 억지로 왔다고. 복 내놔. 이렇게 교회 오지, 주님 보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이렇게 오는 교인 어느 있어요.
그러니 이걸 교회 목사는 믿든 안 믿든 그건 자기 책임이지만 이걸 확산을 시켜줘야 되는 거예요. 교회 오는 마음가짐부터 해서 전부다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가지고 말씀 밑에 십자가 깔려 있잖아요.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퍼내서 십자가의 그 은혜를 가지고 그들의 일상적인 모든 분야, 사업하는 애 가정교육, 부모에 대한 효도, 교회 오는 태도, 평소에 신문에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는 그런 해석, 드라마를 볼 때 어떤 마음가짐, 이것이 점차점차 전체로 확산할 수 있도록 목사가 그것을 언급을 해줘야 됩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되게 어려워요. 설교 하면, 여기 본문이 있잖아요. 본문이 있고, 본문 배후에는 안 들켜요. 십자가는 안 들키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본문 볼 때 오늘 목사님이 이 본문 가지고 무슨 설교하는지 한번 기대해보자. 지난 시간에 한 것 또 하면 난 잘 거야. 하고 있는데 이 본문을 이야기하면서 십자가와 연결시켜서 해야 될 건 빼돌려 놨는데 지금 교인들이 본문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되어 있어요. 아, 본문은 이런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은 뻔한 내용인데 우리 목사님 성향 같으면 이렇게, 이렇게 할 걸 라고 생각했는데, 어, 이 본문을 가지고 이것이 다 부서지고 십자가가 등장하면서 십자가를 가지고 새로운 일상적인 생활은 어떻게 되는가? 이 본문에 비춰서 다시 나오더라 말이죠.
그렇게 될 때 그들은 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일상에다가 십자가만 더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이걸 공격하는구나.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현재 일상으로 느꼈던 이것은 십자가 밖에서 통용되는 것이었지, 결국 십자가 안에 있는 주님의 뜻하고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 때 그것이 바로 회개로 이어지죠. 운다는 뜻이 아니고 나중에 설교 끝나고 점심 먹을 때 좀 행동이 달라져 있죠. 조심하고, 잘난 척하던 사람은 수그러들고, 그런 느낌이 들어요. 주님 찬양합니다. 이런 약간 이상한 사람은 믿을 것도 못되고. 그저 교회 뭐 하나 티 잡으려고 왔다가 쑥 들어가 버리고 입 다물고. 이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한테 문제가 있었구나 하고 자기 반성하는 모습이 역력히 보이거든요.
이렇게 되려면 목사가 죽어나는 거지요. 그거 얼마나 힘든 것인 줄 몰라요. 그럴 때는 어떻게 방법이 하나 있는데 한 놈만 족지는 거예요. 설교 준비 다 해놨잖아요. 그럼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든, 있는 사람보다 오늘 안 오는 사람 가운데서 안온 이유가 여러 가지 있죠. 오다가 밧데리 떨어졌다든지. 하여튼 안 온 사람을 그걸 하나의 예상 잡아서 그 사람을 일부러 조작해 내는 거예요.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교회 안 왔다는 것 조작해내면 화딱지 나잖아요. 그걸 공격해버리면 그것하고 설교가 맞아버리면 이게 술술 풀린다고요.
사람이 말이야. 그 사람한테 이렇게 복음을 해도 모르더란 말이죠. 괜히 안온 그 사람보고 이야기했는데 주눅 들기는 밑에 온 사람들이 다 주눅 들어 버리죠. 한 놈만 조져야 돼요. 여러 사람 하면 설교가 다 분산되어서 설교가 뒤죽박죽 되어서 체계가 안 잡힙니다. 딱 한 놈만 잡아 가지고 그 놈만 공격하는 거예요. 뭐, 이런 소리하는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하면서 괜히 안온 사람 붙들고 하는 거예요. 그거 하다가 나중에 한 10분 뒤에 오면 미안하다면서 그때 말을 바꿔야 돼요. 그런데 ... 하면서. 그게 설교가 수월해요.
그냥 정형된 설교하면 다 자 버립니다. 하나의 신학논문 발표가 되서 전혀 생명도 없고, 활기도 없고. 저쪽부터 앞쪽부터 잘 시간이다, 다 자버려요. 안다, 안다 하다 다 자버려요. 당신들 논리 뻔한 것, 내 뻔히 안다. 그런데 한 놈만 조져버리면 이건 생소하잖아요. 생소하면서도 속에 감추었던 것이 다 드러나잖아요. 그러니까 설교는 공격용입니다. 그들은 교인들은 수비하기 위해서 교회 온 거예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지금 시간까지 한 강의를 사실은 다른 목사님들이나 또는 교회에서 해 보세요. 전부다 다 걸리게 돼 있어요. 교회 와서 우리가 뭐 아나?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그저 법만 알지. 복음 아나. 이게 종교개혁이란 강의를 하면서 다 칠 수가 있어요. 한 놈만 잡으라카이. 한 놈만 잡아 치면 결국 같은 인간이라서 다 통하게 돼 있어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결국 루터가 십자가라 할 때 자기 의를 이야기 할 때, 루터의 책에 보면 자기 의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 줄 알아요? 자기 의가 기존의 교회에 순종하는 일반인까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신부들만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일반대중들을 향하여 공격하는 거예요.
다시 할게요. 이 기존의 십자가가 뭘 공격한다? 자기 의. 자기 의는 그 당시 뭘 공격했다? 교회의 모든 전례, 전통과 관습. 그런데 그거는 덩달아 뭘 의미한다? 그동안 자의든 타의든 간에 기존 교회에 그냥 기계적으로 동조했던 모든 인간에 대한 공격입니다. 쉽게 말해서 너거 당신들, 복 받으려고 교회 왔잖아. 그래 가지고 지옥 갑니다.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당신들, 교회 비판, 비판하지만 교회 비판하기 전에 그런 교회 비판하면서 다니는 이유가 뭐냐? 그거는 하나님 말씀은 관심이 없고, 교회 등록함으로서 구원되었다는 안도감, 자기 의, 이런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온 것이지요. 라고 루터가 신랄하게 공격합니다.
그때부터 루터는 드디어 신학이 확대가 돼요. 신학이 확산됩니다. 신학이 점점 더 확대되지요. 확대가 되면서 어느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느냐 하면, 십자가의 복음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 확산이 되지요. 종말론, 교회론, 구원론, 전부다. 성례론 전부다. 인간론, 신론, 창조론 거기서부터 전부다 확산이 되는 거지요. 십자가에서부터 확대돼요. 그래서 창조론을 건드려도 결국은 십자가로, 어디를 건드려도 십자가로 모아지는 그런 식으로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런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그러면 여기에 동조하려면 그럼 우리도 루터처럼 옆 친구가 벼락 맞아 죽어야 되느냐? 우리도 일단 무릎 꿇고 계단을 올라갔다가 야, 이건 아니다 하는 놀이동산 코스 밟듯이 코스를 한번 밟아야 비로소 루터와 동일한 십자가를 아느냐? 거기에 대해서 루터가 점점 더 그러한 잘못된 인식에서 탈피시키는 그런 체계 있는 신학을 펼쳤습니다. 그 신학이 바로 루터의 복음으로 나오지요.
이 루터의 복음에는 제일 먼저 건드리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거부지요. 자유의지에 대한 거부 속에는 결국은 자기가 경험했던 계단을 오르고 했던 여러 가지 모든 그런 문제가 같이 뭉개집니다. 그러면 자유의지가 뭉개지면 그러니까 복음을 가지고 뭉개지면 남는 게 뭐냐? 그 다음이 제일 어려운 거예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셔버리면 남는 게 뭐냐?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죠. 복음에서 나오는 복음의 능력이 인간을 구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복음의 능력을 아니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아니 받은 사람은 반드시 뭐 하게 돼있다? 지옥 가게 돼있다. 결국 여기서 뭡니까? 예정론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물론 그 당시는 예정론이라 안 하는데 이걸 가지고 섭리론이라 해요.
복음을 아시는 목사님들의 어떤 설교나 이런 것을 계속 진행하다보면 애로사항이 한 가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가 구원받기 원하는데, 거기다 대고 면상 때리듯이 예정론을 외쳐버리면 노골적으로 이중에 구원받지 않은 사람 나가주세요. 이렇게 추방하는 것이 돼요. 다독거려 주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나가려면 나가라는 식으로 이렇게 돼버리면 뭐가 문제냐 하면, 주님의 은혜로 온 사람을 목사가 은혜를 무시하고 나가라 하기 때문에 여기서 모순이 생기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사람은 나가라 해도 괜찮지요. 나는 내 주님을 거부합니다. 나는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이렇게 외치면 거 뭐, 나가줄래요. 이러면 성립이 되는데, 그렇지 않고 내가 구원 받았을까 안 되었을까? 걱정하는 사람보고 자꾸 뭔가 나가라는 조로 이야기해 버리면 그 사람부터는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다음에 올 때는 예정론 가지고 당했을 때는 교회에 와야 되고, 만약 그 다음 교회 갈 시간 되서 예정 안 당하면 또 가봐야 티박 맞을 것 갈 필요 뭐 있나. 자기가 스스로 갈까 말까 목사 대신 본인이 아예 결정해 오는 오류가 생겨 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그건 바로 복음에 대한, 복음의 능력 이런 예정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거예요. 깊이가 없이 그냥 외쳐 버리면 결국 예정론이 나가라 듣는 사람도 문제지만 전하는 사람도 어떤 복음의 능력의 깊이와 이런 걸 알고 전하면 나가라 하는 것이 아니고, 나가라 안 나가라가 문제가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은혜에 관심을 돌리면 이거는 제대로 증거 하는데 이르는데, 그러면 나갈까요? 이렇게 나오면 그거는 이상스럽게 복음을 전파했는데 복음의 깊이가 얕아서 결국 은혜 쪽으로 안 가고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서 나중에 설교 끝나고 난 뒤에 기분 나빠 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어요. 물론 본인이 안 믿으면 할 수 없지만 기분 나빠 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내가 오게 된 것도 이러한 복음을 듣게 된 것도 다 주님의 은혜구나. 이렇게 돼야 되는데, 야, 나는 역시 똑똑해서 복음을 알아들었어. 이렇게 돼버리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잘못 전한 게 돼요. 나는 똑똑하고 나는 정말 성령 받았기 때문에 복음을 알아들었어. 야, 나는 니보다 낫다. 이렇게 쾌감이 돼버리면 이것은 복음 증거에 뭔가 도중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그게 들통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점에 대해서 루터는 어떤 식으로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가를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딜레마, 이러한 자기는 모순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모순이 없는 채로 전하는 복음과 이 세상 아닙니까? 세상 중에서 이쪽은 완벽하잖아요. 완전한 복음이자 십자가 복음이고, 다가서고 있고 이 정도 다가와 있는데 다가와 다가와서 짜자잔~ 하고 하나가 되면 참 좋겠는데 여기에 아무리 거리를 좁히고 좁혀 봐도 모순되고 또 모순을 해결해 봐도 또 마지막에 모순이 생기고 자꾸 뭔가 모순이 생기는 거예요. 완벽하게 화합되지 못한 그런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신학, 설교 계속하시는 분에게 문제가 된다 이 말이에요.
특히 복음을 아는 목사님들이 설교, 1개월째, 6개월째. 정판옥 목사님이 전에 교회 설립할 적에 제가 걱정했던 것은 교회를 시작하자 해놓고 6개월 만에 시작하면 되는데 1년 이상 끌었지요. 1년 이상 끌었다 하면 그만큼 설교를 했을 것 아닙니까? 설교를 했으면 교인들이 이런 마음 들어요. 아, 목사님 설교 이제 알았으니까, 우리는 꼭 저분 아니고 딴 분 해도 되네. 밑천 다 떨어졌지요. 이렇게 될 위험성이 있잖아요. 실컷 6개월 해주고 이제 막상 하려고 하니까, 더 나올 것 없으면 가세요, 하더란 말이죠. 그럴 위험성이 농후하단 말이죠.
특히 개척 교회하는 목사들 가운데 그런 두려움을 갖고 있어요. 목사들이 설교 계속하는데 밑천 떨어지는데 그 다음 무슨 말 할까 하는. 이것은 복음 자체가 그걸 능가하게 돼있고 그럴 위험성이 없게 되어 있는데 복음을 교회부흥을 위해서 잘못 활용한다고 생각한다면 계속 그런 모순점이 발생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루터가 어떤 식으로 갔는가를 보세요. 문제는 간단합니다. 굉장히 간단해요. 새로운 교회를 만들면 돼요.
기존의 교회와 복음을 기존 교회 있고 거기다 복음을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교인들이 자, 우리는 무식하게도 복음에 대해서 무식하지 교회에 대해서 제법 압니다. 교회법에 대해서 압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야기해봐. 이야기해봐.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봐. 아이고, 처음 듣는 이야기네. 3개월, 6개월 지나니까 좀 들었던 이야기네. 한 1년 지나니까 다 아는 이야기네. 그러면 이제 이만큼 알았으니까 교회 부흥시키는 목사나 초빙할까? 이렇게 된다 말이죠.
여기서 루터가 위대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만약에 지금 개혁한다 한다면 기존교회도 인정하고, 기존교회 썩었습니다. 대충 이렇게 하면 되는데, 루터 이 사람은 목숨 걸고 몽땅 다 아니고 새로 시작할 사람은 여기 붙어라. 교회 새로 시작할 사람. 근데 새로 시작하는 교회 특징이 뭐냐? 복음의 깊이가 날마다 더 알아가는 사람에 해당됨. 6개월하고 다 아는 사람이 아니고 1년하고 다 뗀 사람이 아니라 날이 갈수록 복음의 깊이를 아는데 이거는 처음에는 목사가 약간은 도와줘, 나중에는 본인이 스스로 알아서 복음의 깊이를 자기 삶 속에서 더 끄집어 낼 사람, 여기 모여. 그게 참된 교회라고 외쳐 버렸다고.
처음에 교인들이 루터 의지하다가 그 다음부터는 루터가 그런 조로 나가니까 어떻겠어요? 성령이 내주하니까 내가 성전이구나. 그러니까 누구 도와주세요. 누구 도와 줄 것이 아니고 알았으면 내가 성전 돼야지, 내 안에 누가 있다? 성령님이 계시고 내가 십자가의 주님과 함께 한다면, 이제 루터, 당신은 안 도와줘. 당신 사기꾼이야. 이럴 필요 없이 아아, 루터가 고맙구나. 그럼 루터를 통해서 더욱더 새로운 복음이 나오도록 우리 기도해 줘야 되고. 그걸 통해서 나도 또 점점 더 깊이 있는 복음에 들어가는데, 만약에 못 들어가면 루터 탓이 아니고 내 탓이고. 내가 인간 덜 됐고, 내가 주의 백성 안 되니까 문제지.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쉽게 이야기해서 내가 만약 루터교회라면, 지금 루터 선생님께서 목사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하자 하는데, 새로운 교회 책임자가 루터가 아니고, 루터한테 배웠거든요.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새로운 교회한다면 내가 만약에 새로운 교회에 대해서 좀 미진하다면 이건 내 책임이지, 내가 주님 앞에서 책임이지, 왜 가만있는 루터를 탓하느냐 말이죠. 당신이 설교 잘해서, 이럴 필요 없다 말이죠.
루터는 하나님을 통해서 나를 도와주고, 문제는 내가 제대로 지금 신앙생활 못하고 내가 복음의 기쁨을 전처럼 느끼지 않다면 이건 어디까지나 나한테 문제에요. 그러면 루터보고 뭐라고 합니까? 더 때려주시고, 더 파내주시고, 더 설교를 통해서 내 죄를 더 들춰내셔서 내가 이런 문제기 때문에 아직도 내가 진짜 참된 성전으로서 삶을 못 사는 것을 책망 좀 해달라고 요청하게 될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 교회가 진짜 교회입니다. 라고 루터가 먼저 이야기를 던져버렸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6개월하고 설교 떨어지고, 이런 것이 아예 처음부터 날아가 버렸어요. 그만큼 루터는요 진짜로 그 사람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교회 뭐, 기존교회 뭐 아부해서 그런 것 없어요. 루터 제자들이 문제에요. 야, 거저 먹어주네. 안 되는 것 같은데 되네. 이상하게 되네. 안 될 것 같은데 되네. 그러면 고 되는 교회를 내가 해볼까? 이렇게 나오면 가짜에요.
그러려면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복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기 의를 깨는 겁니다. 라는 지식이 아니라 목사 본인이 자기 삶 속에서 날마다 복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 뭐 있어야 돼요. 그게 그 원칙을 하나 적어 드리겠습니다. 그 원칙이 중요한 원칙인데요. 이건 진짜 목사라고 하고 싶으면 평생 잊으면 안돼요.
자기 형편보다 복음이 더 중요함. 하나님 보시기에, 목사 형편보다 복음이 더 중요함. 이걸 잊으면 안 됩니다.
목사님이 복음 전해도 교인이 안 먹어주고 교회가 성그러면 대번에 화살이 자기한테 돌려요. 하나님, 내가 복음 위해서 이렇게 애쓰는데 내 형편 꼬라지가 이렇습니다. 내가 지금 복음 전할 용기가 납니까? 하나님도 한번 보세요. 제가 지금 복음 전한다고 이빨 다 빠지고, 복음 전하다가 머리 다 빠지고. 복음 전한다고 지금 굶기 직전인데 내 형편 꼬라지 말이 안 되는데 이래도 내보고 복음 전하라고 그렇게 닦달내시겠습니까? 주님도 양심이 있으면 내한테 그거 못 시킬 거야. 라고 관심사가 자기 형편 관리하기 자기 쭈그러진 것 펴기, 그런데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문제가 굉장히 커요. 대단히 복음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어이, 김 목사. 예. 지금 무슨 문제 있나? 내가 보기엔 네가 그런 형편에 있더라도 복음은 잘 돌아가고 있는데. 내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니 왜 옆에서 와카노? 궁시렁궁시렁 무슨 소리하고 있노. 지금 모든 게 이해가 되고 잘 돌아가고 있는데.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이랬습니까? 내가 이 돌까지 맞아가면서 꼭 전해야 되겠습니까? 이랬습니까?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야 돼요. 그리고 주님의 일은 하자가 없고 지금 잘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갇혀서 로마 갈 때 참 웃긴다고요. 그것 보면.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면서 그냥 풀어주는 게 아니고 그래, 내가 함께 있을 게. 무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뭔가 죄수를 풀어주든지, 전에처럼 옥에 갇힌 것 풀어주든지 조치를 안 하고, 그 죄수의 몸으로 배타고 풍랑 이는데, 두려워 말라. 내가 함께 있으리라. 너는 로마에 가서 증거 해야 돼.
지금 주님께서 사도 바울의 형편을 떼어내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기껏 생각하는 게 복음 전하는 것, 주님은 복음 전하는 것 밖에 몰라요. 기껏 하는 게 너보다 복음이 더 중요해. 니가 니 형편 돌아볼 여유가 없어. 니가 복음 전하느라고 야위었구나. 지금 그럴 형편이 안 돼. 야위어도 이장우 목사님, 요새 복음 전한다고 많이 야위었지. 그럴 때 주님께서 피식 웃고 있다니까.
그게 바로 루터입니다. 루터가 이런 상태에 있었어요. 루터의 근심은 하나밖에 없어요. 외부의 적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가 자기한테 형편을 돌아볼까봐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기도한 거예요. 그러니까 루터가 서너 시간 기도한 게 적들을 물리치라고 기도한 게 아니고, 도대체 내가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가 계속 진짜 복음을 전해야 되느냐? 세상에, 끝나고 나니까 루터가 유명해졌지요. 일이 안 풀렸습니다. 위기였어요. 위기. 뭐, 그냥 십자가 해도 이거는 흐지부지 될 공산이 더 많았던 거예요. 그것도 매일같이.
뭐, 3개월 유명했다. 그 다음 보장 못해요. 3개월 보장하고 민중들이 십자가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에이, 때려치워라. 3개월 뒤에 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루터야, 너한테 속았다. 그럴 수 있잖아요. 만약에 그렇게 될 때 돌아간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하는 일이 깨지는 게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복음 전하는 자기가 복음에 대해서 원망하고 복음을 알려준 하나님에 대해서 도전할 자기 자신이 될, 가룟 유다가 될 가능성이 많아요. 지금까지 내가 헌신했는데 주께서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이렇게 나올 가능성이 많아요.
루터가 간호사, 누구하고 결혼했습니까? 수녀하고 했지요. 루터가 수녀하고 한 것은 결혼식하고 싶어 환장해서 한 게 아닙니다. 결혼해야겠다는 분위기 때문에 그냥 한 거예요. 결혼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결혼이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일부러 결혼 안 할 필요가 없었다니까.
이게 중요해요. 사람이 복음에 대해서 알면, 어떤 행동을 할까, 말까가 이게 문제 거리가 안돼요. 이게 하면 될까 아닐까, 이걸 하면 복 더 줄까, 저주받을까, 그게 문제 거리가 된다는 자체가 그 사람은 복음에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그걸 해서 자기 이익 보려고 하는 거예요. 복음 이름으로.
우리가 루터 신학에 접하지도 않았는데,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들어가기 전에 그 수천 년 내려온 신학에 대해서 무슨 똥배짱입니까? 그게 다가 아니다. 도대체 지가 뭐 안다고. 그게 그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게 다가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뭣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그게 어디 배워서 되겠습니까? 십자가 영을 받았으니까 사도 바울처럼 내가 배설물 같은 것을 다 지고 있었구나. 모든 것을 똥으로 여기고, 오직 내가 알기는 십자가 밖에 없다. 그 이야기를 루터가 했는데 그 루터가 이야기하고 난 뒤에 너무 오래 됐어요. 몇 년 됐습니까? 497년. 너무 오래됐다. 물론 군데군데 십자가가 있었어요. 그런데 파묻혔어요. 왜 파묻혔는가? 파묻히는 게 주님에 합당하기 때문에 파묻히는 거예요.
만약에 떴다하면, 계산을 분명이 또 이런 계산을 할 거예요. 아하, 십자가 하니까 뜨는구나. 십자가 전해서 떠볼까. 이런 놈 꼭 튀어나온다고. 진짜 십자가는 나중에 뜨고 안 뜨고 십자가 복음이 퍼져나가는 관심조차 없어요. 다만 뭐냐? 아닌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십자가뿐이다 이 말이죠. 그저 좇아내든지, 굶어 죽게 하든지 마음대로 해라. 하여튼 아닌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오직 십자가 능력으로 온 거예요. 그럼 증명해봐라. 증명이 안 되죠. 무슨 증명이 됩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이야기합시다. 이게 어려운데요. 십자가 능력을 우리가 뽑아 낼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십자가 능력을 갖기 위해서 모션 취할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그야말로 복음은 십자가 자기 마음대로 우발적인 능력으로 임해야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예정론이 퍼졌는데, 그러면 십자가의 능력이 있다, 없다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아, 이게 어려워요.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 사람이 십자가를 믿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아까 그 이야기하고 달라요. 아까 그 이야기하고 뉘앙스가 다른데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의 능력을 어떻게 내 힘으로 뽑아낼 수 있습니까? 하는 그 문제는 이건 답변이 없어요. 그건 답변 되면 오답이에요. 잘못된 거예요. 십자가의 능력은 자기 마음대로 하니까. 그런데 십자가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답변을 해줄 대상이 되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강의에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만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뭐로 증명합니까? 야, 이거 어려운 거예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자식이 서울에 있는데, 서울에 있는 자식이 늦게 와서, 아버지, 하고 엎어져 울더란 말이죠. 그때 엄마가 하는 말이, 애야, 너무 염려하지 마라. 아버지는 비록 돌아가셔도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있다. 라고 했을 때에, 자식이 벌떡 일어나서, 어머니, 그걸 증명해 보세요. 이렇게 한다 말이에요. 뭐라고 증명할 거예요?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게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다고 어머니가 위로조로 이야기했잖아요. 위로라 하는 것은, 이게 진실이 바탕이 될 때 위로라는 것이 확신이 오면 더 큰 위로가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자식이 하는 말이, 어머님, 아버지가 안 돌아가시고 있다. 실제로 우리와 함께 있다. 라는 것을 증명해 보세요. 증명해 달라고 할 때, 만약에 그 어머니가 진짜 굿이나 믿고, 귀신을 믿는 걸 뭐라 그랬습니까? 아마 영혼이란 논리를 가지고 할 거예요. 아버지가 네가 보기엔 돌아가셨지만, 우리 옛날 들은 이야기를 보면 혼이 지금 구천에 떠돈데. 해서 네가 서울에서 사업할 때마다 필요할 때마다 위기에서 위기상황에서 널 도와준데. 알겠나. 엄마, 나 위로돼. 그래, 너와 함께 계신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냥 자식이 너무 우니까 그 순간 잠시 때우기 위해서 위로한답시고 할 때는 뭐냐 하면, 애야, 아버지가 남긴 건 우리한테 있잖아. 남긴 게 뭐냐 하면, 냉장고, 가구 이런 거예요. 아버지는 돌아가셔도 아버지가 노동한 덕분에 집도 아파트도 한 채 있고 있는데 결국 아버지가 사준 아파트에 산고 있다는 말은 무슨 기운을 느낀다? 아버지의 업적과 은혜를 늘 누리며 살게 되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의 은혜와 더불어 사는 것이 된다. 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갔어도 아버지가 남긴 업적과 있다 말이죠.
그러니까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것이 실재론. 진짜 아버지는 영혼으로, 네가 서울 가면 서울에 사업할 때마다 위기 있을 때마다 교통사고 날 때마다 있다. 실재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거는 업적이죠. 업적에, 이름 붙이자면 혜택론이죠. 이미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그분이 남긴 혜택이 있죠.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어머니, 내가 서울에 가도 나쁜 짓 안 하겠어요. 왜?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나는 반듯하게 살 겁니다. 자,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명성과 위신과 체면을 위해서. 재는 자기 아버지가 누구래. 그걸 알고 있는 입장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명성에 실망시키지 않는, 아버지의 무형적인 후광이죠. 무형적인 후광을 입은 아버지가 나한테 기대했던 것. 내가 사창가 가려고 하니까,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서 이놈아, 네가 그런 데 가면 되나. 아이고,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또 내가 나쁜 길로 갈 뻔 했구나. 아버지의 가르친 교훈을 늘 함께 있을 때 그걸 함께 있다고 할 수 있잖아요. 아버지의 교훈이 있을 때요. 이거는 뭐냐?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러니까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명예에 종속되지요. 아버지의 명예를 계승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면 계승론이죠. 아버지의 명예,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단 말이죠.
지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당장에 교인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교인들은 이 셋 중에 어느 쪽을 잡을지 혼란이 일어납니다. 목사님, 목사님, 방금 이 셋 중에 어느 쪽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내가 나쁜 짓 하는데 주님께서 나한테 얼마나 섭섭하게 여기겠는가? 그래 내가 소위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이렇게 행동하면 안돼. 라고 한다면, 이거는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는 거죠.
이게 계승론에 입각한 책이 뭐냐? [두지평]입니다. 여러분 두지평이란 책, 들어본 적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런 거예요. 사도 바울은 개뿔도 신학도 몰라요. 그래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인간이 사도 바울이랍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이 두 종류라고 보는 거예요. 뭐냐 하면, 처음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다가, 예수님의 재림이 늦춰지니까 그 다음부터 어떻게 했느냐? 기간이 길어지니까 긴 기간만큼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아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그때를 대비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을 바꾸는 거예요.
처음에는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로마서 나오는 대로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대로 되지만, 나중에 보면 그게 아니라 행함을 강조해서 경건생활 해줘야 구원된다는 말을 바꿨다는 것이 오늘날 전 세계 신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이게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그러니까 개혁주의 신학은 정답이 없어요. 이리 치면 저리 넘어가고, 저리 치면 이리 넘어가고, 지 신학이 없어요.
그래서 두지평의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도 제대로 모르는데 우리가 무슨 진리를 알겠나? 이게 결론이에요.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두지평의 주제가 뭐냐 하면, 상황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상황에 맞는 그러한 논리와 계시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논리는 뭐냐? 그때 그 당시에 사도 바울도 상황 따라서 논리를 바꾼 것처럼 지금 이 시대의 교리는 이 시대에 맞는 신학을 해야 된다. 이것이 오늘날 정통개혁주의의 논조입니다. 아시겠어요? 안티십자가마을에서 주장하는 신학이 이 신학이에요.
상황 따라 신학을 바꿔야 되지, 십자가 이거만 주장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때그때마다, 이 밑바닥에 뭐가 있습니까? 신학이란 신학을 위한 신학이 아니고 교회를 위한 신학이에요. 여러분 신학교 때 많이 안 들었습니까? 교회를 위한 신학이다. 그래서 환경운동 할 때는 주일학교 아이들한테 뭘 가르쳤습니까? 환경운동 가르쳤지요. 기존 교단에서. 이게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완전히 배설물 같은 더러운 신학이에요.
그러니까 두지평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옛날 조상들이 옛날 초대교회 교인들이 갖고 있던 그 인식 있잖아요. 인식을 우리가 그대로 성경을 통해서 이미지를 받아서 우리가 알아서 처신하면 그것이 우리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고 예수님 명예를 이름을 드높인다는 거예요. 그게 신학의 끝이라는 겁니다.
그래 성경을 왜 보느냐 하면, 성경은 좋은 교훈 책이에요. 공자, 맹자 책하고 똑같은 거예요. 보고 감동 받아서 옛날 초대교회처럼 우리도 그 감동을 유지해서 우리 이 시대의 교인들에게, 이 시대에 사회에게 바른 역할을 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는다는 그 논조입니다. 딴 거 뭐 있어요? 이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기껏 남는 실재론하는 게 뭐냐? 영육혼 갈라져서 지금 우리 하나님 형상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합쳐진다. 이따위 짓 하고 있다고. 이거 다 엉터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어떤 식으로 있느냐? 우리 능력으로 지금 우리가 십자가를 못 믿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너무 좋기 때문에. 우리는 신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 신체는 우리의 신체에서 우리 인상과 우리의 정신과 의식이 나옵니다. 신체는 연약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정신상태, 신앙상태 연약합니다. 헷가닥 헷가닥합니다. 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럽게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하여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그게 오직 널 위해서 기도하는 이 주님이다. 그 복음이 성경 내용이 믿어지더라 이 말입니다. 이것은 내 능력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우리 배고프면 교회 안 할 거예요. 만약 계속해서 교회 안 모인다면 목사 안 할 거야. 이게 우리 본심이에요. 우리의 본심이 뭐냐 하면, 아, 살고 싶다. 살고 싶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삼위일체 버리면 헌금 준다고 하면 버릴 용의가 되 잇는 사람이에요. 삼위일체가 뭐 중요합니까? 돈이 중요하지. 그럴 충분한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원이 되고 지옥과 천당 간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이것은 내 능력에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함께 있다는 증거다 이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분명히 타락하고 분명히 천 번도 더 타락했는데 심지어 그 타락의 자리까지 에서도 주여, 당신의 나라 갈 때 저를 생각해 달라고 이상스럽게 그런 고백이 나온다는 게, 강도가 지가 알아서 배워서 했습니까? 성령의 역사에서 나온 겁니다.
이게 성경에 보면 이렇습니다. 여기 한 50명 앉아 있는데 선생님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런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나한테 온 것은 떡 보고 온 것이다. 아버지가 보낸 자가 아니면 나한테 올 자가 없다. 이런 이야기하니까 뒤에서부터 다 나가버려요. 그거 당연한 거예요. 당연히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몇 명 남았다가 문제에요. 오히려 그게 더 문제에요. 너 가지, 왜 안 가냐? 이렇게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영생 말씀이 계신데 누가 가겠습니까? 그게 어떻게 자기 능력입니까? 똑같은 신체를 가지고 똑같이 배고프고 못 알아듣는 사람인데. 그러니까 바깥에 미리 나가있는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거저 스승하고 제자하고 같이 잘 논다. 웃기고 있다. 저거 둘이.
그러니까 그걸 듣고 베드로가, 예수님, 저 바깥의 사람들이 저거 둘이 저희끼리 잘 먹고 웃기고 있네. 이렇게 합디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러니까 아버지가 보낸 자가 아니면 나한테 올 자가 없지. 하니까 바깥에서 웃으면서, 병신, 지랄하고 있네. 빨리 나와. 베드로 임마.
문제는 인간의 능력으로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을 머리는 알고, 평생을 통해서 체험하지 않은 게 문제에요. 아무리 여러분이 사창가 백 번 타락해 보세요. 타락하는 순간에서도 십자가로 구원받습니다. 이게 지 능력이 아닙니다.
흔히 이렇게 하지요. 흔히 이단들이 이렇게 하지요. 성도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이게 바로 악마의 이야기입니다. 성도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없습니다. 선 자체가 없어요. 왜? 마음대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하지만 모든 것이 용납이 돼요. 이게 믿어집니까? 이게 믿어져요. 그리고 선도요, 인위적이에요. 인간들이 지 핑계 삼아 선을 그어요. 담배 하루에 두 갑 안 피운다. 해놓고 세 갑 피우면, 선을 이동합니다. 세 갑 안 넘는다. 네 갑 피우면, 네 갑 안 피운다.
세상에 선도 전부다 자기 의. 그러니까 루터는 뭡니까? 십자가는 그 자기 의를 공격하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의를 갖고 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을 공격하는 거예요. 세상에 자기 의를 공격하는 걸 믿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거는 주님과 함께 있다는 증거지요. 십자가의 능력이지요.
걱정되는 것은 목사님, 그래서 몇 명 남겠습니까?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으로 남았다. 지금 남은 사람이 내가 복음 전해서 남은 게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남은 거기 때문에 교회, 목사님, 안 믿겨 나가더라도 나가라 하지 말고, 당신이 그런 말 한 것도 능력이고, 오게 된 것도 능력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강요할 필요 없이 남겨두면, 교회는 주님이 교회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물론 목사님의 권위는 한 3초 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거 3초 밖에 안 가거든. 그러면 전화해서 왜 안 오고 있습니까? 전화하고 난리치죠. 그렇더라도 그게 용서받아. 내가 이번만 전화하고 전화 안 할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또 해야 돼. 안 오면 전화해서, 삐져서 안 올 사람, 한 사람 있어. 이러면서 또 전화하고 이래요. 그러면서도 그 목사가 그 전화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게 용납되면서, 용납되는 자체가 믿어진다는 거예요. 내가 목사가 무슨 짓을 해도. 15년 동안 목회 안 해도 구원 받는다는 사실.
이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능력이 아니고 뭡니까? 그 증거 있습니까? 있지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전부다. 세 번씩 저주하고 모른다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 뭐라 했습니까? 베드로야, 마귀가 너를 인수인계하려고 벼르고 있는데 내가 기도해서 너를 빼내 줬다. 베드로가 그 당시에 안 믿었어요. 나중에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믿어졌어요. 왜? 능력으로. 아니에요. 주님의 함께 하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게 이상스럽게 믿어지더란 말이죠. 그게 믿어지더라.
이렇게 보면 목회라는 것이 승산 없는 일이에요. 언제 바닥날지 모릅니다. 15년 6개월 교회 나왔다? 그 다음주 안 나올 수가 있어요. 교회다? 그 다음주에 해체될 수가 있습니다. 소유다? 어떻게 저 교회, 내 소유해야지. 그러면 교회 없어요. 내 소유 아닌데 이러면 교회 돼요. 교회가 보여요. 환장할 지경입니다. 저 교회 내걸 거야. 하면 내 교회 아니고. 나, 그 교회 내꺼 아니다 포기해 버리면, 주님이 교회 만들어내 버리고.
그러니 다시 이야기하지만 목회자에게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아까 이야기했지요. 하나님 앞에는 복음이 중요하지, 복음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고 이용할 뿐이지 내 형편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주님의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아픕니다. 아파라. 끝나버려요. 니 아파도 아무 지장 없던데, 이렇게 돼요. 그래서 야고보서에 주의 뜻이면, 내가 아프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네. 이것이 악한 것이 아니지. 뭐, 어느 구석에 가서 개척교회해서 부흥하리라. 어데 세상에, 내 목숨은 안개라 이 말이죠.
가만 보면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이 한 구절 다 뗐다 할 수 없어요. 새겨보고 새겨도 우리고 우려도 계속 나올 게 있습니다. 그 계속 나올 게 있는 것을 되풀이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목사가 느낀 것을 설교에서 이야기해버리면 교인들은 알고 있는 의미이면서도 교인들은 그걸 새롭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야, 또 몰랐구나. 또 몰랐어. 난 머리로만 알았네. 야, 저렇게 깊은 뜻이 있을 줄이야.
그러니까 이것은 목사가 교인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건방지기 짝이 없는 거예요. 가르치면 진도가 나가잖아요. 진도가 어디 있어요. 성경에 진도가 없어요. 있는 복음, 있는 말씀을 다같이 매일같이 풍덩 풍덩 빠져서 우리는 죄인밖에 안되며, 거기서 건져주시는 주님의 능력은 지금도 주님은 함께 해서 자기 백성은 자기가 알아서 건진다는 이 놀라운 하나의 능력이지요. 복음에서 나온 능력이지요. 십자가가 아직도 그 사람한테는 살아있어요.
그걸 가지고 아까 제가 성도는 어디 안에 있다? 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