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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5월 15일 지옥의 하나님 p033강의-

대구 5월 15일 지옥의 하나님 p033

이름 : 이근호(IP:)

우리교회(IP:220.♡.176.141)

07-12-30 15:07

daegu060515

06 대구강의 6 - 지옥의 하나님 9
06,05,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또 다시 '존재의 함성' !!

오늘은 교재 33페이지를 할 차례인데, 지난 시간에는 알랭 바디우가 들뢰즈를 비판한 '존재의 함성'을 언급하면서, 그의 철학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그의 철학에서 존재라는 것은 "부분+부분=전체" 라는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전체+알파(α)"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알파(α)'를 '존재의 초과' 라고 하는데, 이렇게 부분과 부분을 다 더하더라고 전체보다 더 크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만약에 물질이나 사물 같으면 부분을 모두 더하면 전체가 되겠지만, 그러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이 존재를 쳐다보고 있는 인간자체가 이 존재에 포함이 되면서도 이 존재전체를 규명할 수 있기 때문에, 즉 인간은 존재에 속하면서도 전체를 다 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우주에 속하는데, 그러니 지구는 우주보다 작은데 그런데 이 작은 지구에 사는 인간의 그 작은 머리 속에 우주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이 들어있다고 한다면, 인간의 정신세계라는 것은, 부분 부분과 전체로 그렇게 기호로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적인 개념으로 말이다.

◈ '초과'가 새로운 의미를 날마다 창조 !!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것이 '초과' 인데 이 초과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데, 이것을 없는 데서 창조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날마다 새롭게 생성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생성된다는 것은 존재보다 크다는 것이고, 그런데 이 존재 중에 포함되는 것이 자아인데, 이렇게 자아, 신, 예수, 성령, 그리고 교회 등도 여기에 다 포함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예수, 성령, 교회보다도 생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자아는 규정을 지어봐야 내일이 되면 또 다시 새로운 개념이 생성되니, 즉 더 크니까, 즉 더 초과되니까, 그렇게 해서 "이 분이 예수님이다" 라고 개념을 잡아도, 또 그 다음 날에 새롭게 생성되는 개념에 의해서, "아니냐, 그것 말고 또 다른 것이 있어" 라고 하는 것이 또 새롭게 튀어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알랭 바디우 - 존재가 아니고 생성이자 사건 !!

이러한 알랭 바디우의 철학은 무엇인고 하니, 존재가 아니고 생성인데, 즉 사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말하지 못하는데, 그냥 "존재가 뭉치면 새로운 사건이 생성된다" 라고 하는데, 이렇게 존재가 있으면 항상 초과분이 나오게, 즉 새로운 사건들이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르겠다고, 본인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 알랭 바디우 - 신도 역시 인간의 존재 개념에서 !!

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까, 만약에 이 새로운 사건들이 "신에게서 나온다" 라고 했다면,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인데, 하지만 알랭 바디우는 그런 주장을 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신이란 인간의 존재개념으로, 즉 특정하게 규정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신이 존재개념이라면, 그 존재를 바라보는 인간 자신도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존재가 존재를 바라보면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가 변하면 객체가 변하고, 또 객체가 변하면 주체도 변하고, 그러니 둘 중에 어느 것이 진리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진리이다" 라고 하면, 자기가 진리라고 보는 객체는 그 객체 안에서, 즉 그 시점에서는 진리가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생성이 되어서 새롭게 더 커지게 되면, 자기가 그만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존재란 사건을 만나면 항상 생성으로 나가니 말이다.

만약에 내일 새로운 사건을 만나게 되면 어제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생성되어서 확정지어지기 때문에, 어제 생각한 그 '나', 그리고 그 '나'가 설명한 신도 내일이 되면 모두다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디서 어떻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 현대철학 - 인간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라 !!

바로 이러한 현대철학의 노리는 바는, 기존의 중세철학에서 내려오는 신과, 이 신에서 나온 것이 종교인데, 이러한 것들을 다 제거해버리려고 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신이 인간의 상위개념이니, 인간 위에 이렇게 신이 있으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역량과 능력을 위에서 제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 제한에 대해서 억압에 들어가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소위 자기가 믿는 종교에 의해서 억제되고 삭제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미래를 마음껏 펼칠 수가 없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이 과거에만 종속되어야 되는데, 개방성이 있는 미래에까지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함성' 인데, 이 '존재' 라고 하는 것은, 그게 하나님이든지 예수님이든지 누군가가 억누른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놈들, 즉 그런 존재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뭔가 함성을 질러서, 즉 '와아~' 라고 고함을 마구 지른다는 것이다.

◈ 예배를 드려도 머리 속에는 온통 야구가 !!

지난 WBC 야구대회에서 그것을 우리가 똑똑히 보았는데, 그런데 목사가 "그런 야구를 보지 마시고 교회에 나오세요" 라고 해봤자, 교회에 나와서도 머리 속에는 야구장이 잔뜩 그려져 있는데 그것이 예배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고, 다 보고 예배를 드립시다" 라고 해서, 야구가 끝나고 예배를 드린 교회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의 개념으로 존재의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야구대회는 무엇에 해당하는가? 사건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사건이 임하니, 속마음은 주님을 따르고자 하지만, 새로운 법이 또 자기를 사로잡는데, 로마서 7장에 있는 것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구원할꼬" 라고 말이다. 그런데 또 새로운 사건이 다가오는데, 월드컵이란 사건 말이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제 교재 33페이지를 보자.

** 율법에 갇혀있는 인간이 절대적인 신을 대할 때 갖는 태도를 이것보다 (엘리야를 공격하려고 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행동을 말함) 더 명확하게 보여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인간의 신체 속 활동이나 인간들의 사회에서도 이런 '되먹임' 현상은 항상 그리고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인간은 이 사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거울과 같이 반사하고 반사 받는 입장에 있다.

◈ 되먹임 현상 -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서 재구성되는 것 !!

여기 '되먹임' 현상이란 용어가 나오는데, 이 되먹임 현상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서 서로가 재구성되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어서, 젊은 남녀가 만나서 결혼하게 되면, 결혼을 하기 이전에는 "나는 이렇다. 너는 이렇다" 라고 하다가, 막상 결혼을 해서 서로 부딪치며 살다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서, 처녀총각 때의 자아상이 변화를 일으키는데, 이것이 곧 되먹임 현상이란 말이다.

지금부터 좀 어려운 내용을 하겠는데, 물론 이전부터 어려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시간은 좀 어렵게 가겠는데, 다시 예를 들어서,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하는 말씀이 있으면, 이렇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데서 무엇이 형성되는고 하니까, 새로운 주체관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 주여, 원수를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다시 말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듣기 이전까지는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듣는 인간이 갑자기 원수마저도 사랑하는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나' 라는 인간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원수마저도 사랑하는, 그런 자아상을 구상하게 되고, 바로 그런 구상과 현재의 자기가 겹치게 되면서, 일치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치가 되지 않을 때는 강제로 밀어 넣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도'와 '간구' 라는 것이다. "주여, 원수를 사랑하게 하소서" 라고 말이다. 그렇게 기도를 한 5시간 정도 하게 되면, 그야말로 수천 번을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데,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나면, 원수를 사랑하는 자아상과 얼주(?) 겹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하고 기도원에서 내려와서 집으로 가는데 앞에 차가 물을 튀기면서 추월하면 "저런 싸가지 없는 놈이" 라고 하면서 욕이 튀어나오는데, 즉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더라면, 앞에 차가 물을 튀기고 추월해가서 욕을 바가지로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런데 자기는 지금 기도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도를 5시간이나 하고 내려오는 길에서 그런 사건을 만나게 되니까, 그만 갈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나서 나름대로 원수를 사랑하는 자가 되었는데, 그런데 도대체 욕을 하는 되먹지 못한 모습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 예수님이 일부러 혼선을 조성 !!

따로 어디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이 원래 자기 모습이라는 것이다. 원래 인간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런 분위기를 누가 조성했느냐는 것이다. 누가 자기를 혼란스럽게 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일부러 혼선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지킬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니까, 마치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처럼, 즉 그 말씀에 합당한 인간이나 된 것처럼, 아니라면 무슨 귀신에 홀린 것처럼, 그렇게 잠시 잠깐 동안 혼선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왜 그런 버릇이 있는고 하니, 사람이 평소에 되먹임 현상, 즉 "저 사람에게서 내가 배우고, 나에게서 저 사람이 배우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서 배우는 버릇이 있는데, 이런 버릇을 건방지게 예수님 앞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베드로처럼 "제가 죽기까지 주를 버리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되먹임 현상이라는 것이다.

제자훈련 때 흔히 써먹는 것이 무엇인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3년 동안 훈련을 잘 받았는데, 그러니 여러분도 열심히 저에게 훈련을 받으세요" 라는 것이다. 저는 총신을 다니면서 이런 종류의 책들을 수없이 보았는데, 그때는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꼭 집어서 찾아내지를 못했는데, 분명히 사기성이 농후한데도 그 출발점을 제대로 몰랐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 와서는 생성과 사건을 통해서 모두 밝혀지는데 말이다.

◈ 왜 예수님에게는 되먹임 현상이 통하지 않는가?

아무튼 예수님에게서는 이 되먹임이 통하지 않는데,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이미 추방된 인간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고 이 되먹임 현상이 마구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재에서는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라고 되어있고 말이다.

교재 33페이지를 계속해서 보자.

** 사실 인간의 신체 속 활동이나 인간들의 사회에서도 이런 '되먹임' 현상은 항상 그리고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인간은 이 사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거울과 같이 반사하고 반사 받는 입장에 있다.

◈ 캠퍼스의 어느 여학생 이야기 !!

전에도 이 이야기를 여러 번 했지 싶은데, 이런 예를 자꾸 드는 이유가 개인적으로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라서 그러한데,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 캠퍼스에 한 여학생이 있었는데, 옷을 그야말로 50년대 스타일로 주름치마 한복을 입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것도 옷이 한 벌밖에 없는지 오직 그것만 입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 모두가 아주 독특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전혀 유행을 따라 가지 않기에 말이다. 즉 되먹임 현상이 안 되더라는 것이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원불교를 믿는 여학생 정도로 여겨지는데,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CF에 나오는 것처럼 유행대로 입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교재에도 나와 있듯이, 이 사회가 거울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반사를 하고 반사를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기에 말이다.

◈ 언어 - 탕 ! 탕 ! 탕 !

이렇게 반사를 '탕, 탕, 탕' 하고 튕기는 것을 두고 '언어' 라고 하고, 그래서 가능한 것이 언어소통이라는 것이다. 이 언어소통은 다른 말로 사상소통이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이런 언어소통이 되지 않으면 그 사회에서 도태가 되고, 즉 화제(話題)에 참여되지 않는, 즉 그 당시 그 사회에서 유행하는 개그 등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으면 그들의 대화에 참석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주고받는 각자의 거울 중에서 무엇이 있는고 하니, 각자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예수님 개념, 성령의 개념, 그리고 삼위일체의 개념 등도,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을 '탕, 탕, 탕' 하고 튕기면서 하다가 보니까, 그것이 하나의 진리처럼 규정된다는 것이다.

어렵게 요약된 것을 먼저 읽고, 쉽게 한번 해보겠는데, 교재 34페이지를 보자.

** 인간은 이 사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거울과 같이 반사하고 반사 받는 입장에 있다. 이런 정보의 지속적이고 속도감 있는 교류가, 때로는 우발적인 변칙을 유발하여 생존에 더 적합하고 편리하며 유리한 변이를 가져오며, 인류 문명사의 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고 믿고 있다.

◈ 인류의 발전은 또라이에게 맡겨라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류의 역사는 서로가 서로에게 과거에 답습하던 방식으로 진행이 되는데,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인류의 역사가 발전을 하는가? 누군가에게서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게 되면, 그 아이디어에 의해서 사회는 그쪽으로 그야말로 우르르 몰려들어서 새로운 발전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이란 것인데, 그런 새로운 발견이나 아이디어는 새로운 발전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통의 것은 관습이고 전통으로 유지가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깨고 새로운 것이 나오면, 그리로 우르르 몰려가게 되고, 그 덕분에 사회가 발전한다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쉽게 풀이해놓은, 교재 124페이지를 보자.

** 예수를 모르는 즐거움 - 교회는 다수의 의견만이 진리이다. 대다수가 신의 존재만 인정하는데, 그것도 사람들마다 신에 대한 인상이 다르다. 서로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온 경험들이 다르기 때문에 제각기 정립한 신을 따로 신봉한다. 성경말씀을 들이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성경말씀은 기껏 자신이 신봉하는 신적 인상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 식의 리플에 불과하다. 무엇이 참된 신이냐 하는 것은, 그 교회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간이 주창하는 신의 인상에 표를 모아주면 ,그것이 그 교회의 명목상 잠정적인 신이 된다. 각자의 신은 따로 들키지 않고 숨겨놓고 있다. 이런 상황은 누구나 이해하기에 모임의 분위기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존재들에 대한 규정성은 항상 보류된다. 즉 신이라든지, 예수라든지, 성령이라든지 하는 대상의 규정성은 서로 묻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그 대신에 민감한 문제는 돈이기에 "어느 집사가 헌금을 얼마나 하고 전도사의 봉급은 얼마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항상 관심의 대상이다.

사람이 각자가 알고 있는 신이 따로 있는데,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누가 가장 영향력이 있는가? 물론 목사인데, 그러면 그 목사가 알고 있는 신에 대해서, 비록 잠정적이고 일시적으로지만 동의를 해주는 식으로 규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사건이 생겨서 삐치게 되면 교회에 안 나오는데, 그것은 자기 본색의 신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교재 34페이지를 보자.

** 그런데 이런 사회적 원칙을 그대로 확대시켜 신까지 포섭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우주를 인간과 신이 함께 공존하는 자체 순환적 세계로 인식하려고 했다. 즉 인간이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신을 부르면, 그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만들어놓은 신의 체면과 파트너십을 고려해서, 신께서 어느 정도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이다.

신이 말하기를, "아이쿠, 대견하구나. 내가 너를 도와줄 게" 라고 나와줄 때, 드디어 인간과 신과 세계가 하나로 융합되면서 세계는 인간을 통해서 더욱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34페이지를 보자.

** 왜냐하면, 신은 인간과 상호연관 속에 놓여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설마 신이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외면하리라는 생각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창조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대체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하나님도 이제는 인간 없이는 외로워서 견디지 못한다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인간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원래 하나님께 영향을 받고 말이다. 마치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때 사이좋게 지내게 되고, 의사소통이 되는 것처럼, 그것을 하나님에게까지 '쭈욱' 끌어당기자는 것인데, 다시 말해, 하나님도 우리가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기도를 하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데, 그렇게 해서 이 세상 문명의 발전과 가정의 발전이 모두 다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으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신 개념이라는 말이다.

◈ 창조신앙에 대해서 !!

이것을 두고서 '창조신앙' 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좀 더 설명해보자면, 창조신앙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라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신앙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 창조의 원리가, 다시 하나님의 원래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중심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해서 이야기하는데, 이 창조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 어떤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귀속된다는 것이 바로 창조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종교와 차별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불교나 유교나 힌두교나 천주교나 기독교, 이렇게 물론 지금은 산밑에서(?) 차별이 있더라도, 점점 더 깊은 정신의 사유 세계로 올라가게 되면 차이가 점점 더 좁아지면서, 마지막에는 궁극적인 신이 계신 지점에 가면, 즉 출애굽기의 시내산 같은 곳에 말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차이는 다 없어지고, 또 신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창조했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다 형제니라. 지금 싸우는 것은 정신세계의 높은 곳에 올라오지 못해서 그렇다. 그러니 창조주 안에서 한 형제임을 깨닫도록 하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창조신앙이라는 것이다.

◈ 안 되는 것이 어디 있니 !!

이러한 창조신앙이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구체화되는 이유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사회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들끼리, 코미디 프로에도 나오는 유명한 대사인데, "안 되는 것이 어디 있니?" 라고 하는데, 즉 모든 것은 다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아니,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안 되는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되지 말이다. 이런 것이 바로 창조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신앙에 의하면, 결국에는 지옥도 없고 심판도 없다는 말이다.

교재 34페이지를 계속해서 보자.

** 즉 율법 아래서 인간이 마냥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 아래서 고생하는 그 인간을 신께서 자신의 창조성에 근거하여 우호적인 창조 파트너로 상대하려고 한다는 주장이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되나요? 비록 인간이 죄를 지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그 사랑은 남아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보다도, 창세기 1장의 창조가 먼저라는 것이다. 즉 성경이 창세기 1장부터 시작된 것이지 2장부터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하나님은 누가 뭐라고 해도 모나미 !!

그러므로 인간이 제 아무리 죄를 짓고 타락을 한다고 해도 창세기 1장이 꽉 잡고 있는 이상, 그들의 죄도 하나님이 다 책임지고 해결해주기 때문에, 결국은 모두 그런 사랑의 하나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조신앙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 얼마나 낙관적이고, 적극적이고, 우호적인가? 이러한 창조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신에 대해서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데, 즉 신을 겁을 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친구 정도로 여긴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자기도 인간들의 친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찾아가서 말하기를, "선생님, 지금 다니시는 교회가 이단 같은데요? - 아, 저는 그런 것하고는 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만 믿으면 그만이지, 이단인지 삼단인지 도대체 누가 압니까? 그냥 다니는데 계속 다니면 되지요"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하나님과 상당히 우호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창조물이 바로 자기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자기가 창조물이 되어서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이것보다 더 뛰어난 신앙이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보라는 것이다. 시골에서 교회에 다니는 할머니들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이렇게 보니, '지옥의 하나님'이 상당히 어려운 책인데, 여기서 교재 34페이지를 보자.

** 소위 창조신앙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존재성을 기반으로 해서 신의 존재와 성격을 규명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 하나님의 형상론에 대해서 !!

이것이 바로 중세철학인데, 즉 이렇게 창조신앙에 의해서 피조물이 존재해 있으니까, 피조물의 자기 존재를 통해서 창조주로 접근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하나님 쪽에서 허락했다는 것이다. 하나님 쪽에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론이라는 말이다.

지난 야외예배 때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자기 책을 선물로 주면서 신랄하게 비평을 해달라고 했는데, 그래서 제가 본인이 기대한 것보다 더 신랄하게 선물을 해드렸는데, 거기서 제가 언급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론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형상론에서, 그분이 자기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천주교 쪽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나님 형상론인데, 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서, 잠재태가 있는 것이 현실태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좀 더 깊이 있게 이야기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피조물인 인간의 존재함에 함께 담겨있는데, 이것은 플라톤에 의해서 주장된 것인데, 원본질은 그 모방하는 그 속에도 여전히 공통적인 요소로 담겨있다는 것이다. 즉 창조주의 솜씨가 창조물에 담겨있다는 말인데, 그래서 피조물을 분석해보면, 거기에 창조주의 본성과 본질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 에이, 이 짐승만도 못한 놈 !!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것은 개돼지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고 하니까, 인간과 개돼지를 비교해서, 그 차이점을 각각 골라 골라내게 되면, 그것이 곧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거 총신에서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존재에 대해서 꽉 잡고 있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거기에 앞서 플라톤의 철학은 하나의 존재에서 여러 가지 존재자들이 내려오지만, 모형과 원형으로 말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놀랍게도 다양성에서 하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철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성에서 하나를 추구하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앞서 말한 4가지의 원인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은 무엇인고 하니,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스승인 플라톤의 주장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주장을 이어받아서, 이 보이지 않는 잠재된 것이 현실태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숨어 있다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숨어 있다가 나타난 형상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하나님 형상론의 기본이 되는데, 그러므로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형상론은, 비록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 형상은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이다.

◈ 낙태 - 하나님의 형상을 소멸시키는 살인죄 !!

그래서 천주교는 낙태를 강력하게 반대하는데, 아기가 생긴다는 것은 이미 존재의 등장을 의미하고, 그 존재 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 아이를 죽이면 그분의 형상을 말살시키는 것이기에, 그것은 살인죄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임신 몇 주부터 과연 그러하냐는 것인데, 그것은 그때그때 다르다는 것인데, 즉 미완의 결론으로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녀들은 왜 하지? 자기들은 치외법권인가?)

이것을 칼빈과 루터도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졌다고 하면,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또 나오겠는가? 이미 깨어졌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게 되는데,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유사성으로 말이다.

◈ 하나님의 형상은 회복될 수 있다 - 이성(천주교)!! 은혜(개신교)!!

사실 이것을 나누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아무튼 한 쪽은, 즉 형상은 완전히 깨어졌는데, 유사성은 완전히 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령의 도움으로 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개혁주의의 주장이고, 그리고 이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천주교라는 것이다. 천주교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이성과 양심은, 그 자체가 스스로 반성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회복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주장하기를,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고 오직 은혜로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아서 그러한데, 사실 이 어거스틴의 주장도 이상한 점이 많은데, 아무튼 칼빈과 루터는 이것을 이어받아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서 잠재되어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기지개를 펴고 깨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론이라는 말이다.

◈ 십자가의 핵심 - 버림받음 !!

그러나 이 하나님의 형상론에서 가장 비성경적이고 취약점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핵심을 뭐라고 보셨는고 하니, '인간의 버림받은 몸'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말이다.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렇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잠재태나 현실태와 같은 것들이 이 십자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버림을 받되 그야말로 와전히 버림을 받았기에 말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기는 했지만, 비록 타락하고 오염이 되었지만, 이 오염된 것을 수퍼하이타이로 깨끗하게 씻으면 회복이 된다는 것이다. 원판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마치 컴퓨터의 하드처럼, 내용물이 지워졌더라도 복구시키면 다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 왜 예수님이 직접 처소를 준비해야 하는가?

그러나 십자가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데, 십자가에 집어넣어 버리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도저히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아직도 그곳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 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것은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십자가에서 추구하는 것이 완전한 버림과 새로운 처소를 마련하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들이 개입할 사항이 아니고, 성부와 성자 사이의 계약인 새언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히 버려진 상태이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버려진 그대로 계속해서 둘 것인지 아닌지는, 그것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두 분만의 논의결과로 나오는 것이지, 이미 버려진 상태에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혀 그럴 권리가 없으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잠재태와 현실태의 이야기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었다고 하는데, 형상이 들었던지 뭐가 들었던지 간에, 깨어지던지 붙어있던지 간에, 그런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버려진 상태이니 말이다.

◈ 버림받았다 - 너희와 상대하지 않겠다 !!

이렇게 인간 자체가 버림을 받았기에, 이렇게 버렸다는 것은 다시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런데 거기서 뭔가를 주섬 주섬 주워서 일을 만들어보겠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십자가의 단절이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그들이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해서 말하지만, 십자가는 인간이 완전히 버림받았음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진 상태에서, 또한 버림받은 자들 중에서 택함을 받게 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인데, 즉 하나님의 형상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이근호 - 창조신앙이 아닌 십자가 신앙으로 !!

이것이 기존의 신학자들과 저 이근호의 차이점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일반 신학자들은 창조신앙에 바탕을 두는데, 왜냐하면, 천지창조가 나오는 창세기 1장이 인간의 범죄가 나오는 창세기 3장보다는 앞서니 말이다. 비록 인간들이 지옥 같은 이 세상에 버림을 받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그대로 이어져서, 즉 "아이쿠 불쌍해라. 내가 구해주러 가마"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보내어서 건졌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원래 하나님의 창조하신 원리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의 주장은 그것이 아니라, 즉 창조의 원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십자가을 예정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하시는데, 존재를 불쌍히 여기는 창조의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몸을 키우는(?) 식으로 구원을 하신다는 것이다.

◈ 골로새서 1장 15, 16절은 폼인가?

지금 동의를 전혀 하지 못하겠다는 분위기인데(ㅋㅋ), 아무튼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키우기(?) 위해서, 그 지체로서 오직 십자가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건지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데, 오직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뿐인데, 그를 위하여, 그로 말미암아,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높이 위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데, 하나님은 자기 존재를 우리 인간에게 불어넣는 것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그들을 예수님의 지체로서 세우기 위해서 뽑아낸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근호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이 !!

다시 강조하지만, 이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십자가는 버림과 예수님만이 다 이루었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이름이 십자가에서 그대로 꼽혀서, 그것을 그대로 결합되어서 그대로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 이름은 날마다 죽고, 즉 우리는 버림을 받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건졌다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이 이렇게 꼽혀있는 사람에게 부각이 되는 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창조신앙의 경우에, 역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신다고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그야말로 무슨 기계의 부속품과도 같은 역할을 하면 되고, 즉 이제는 십자가는 그 역할을 다 했으니 치우고(?) 하나님과 직접 대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창조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구원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 불교신자 - 어이 창조신앙, 우리는 형제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불교신자가 뭐라고 하겠는가? "만약 당신이 주장하는 그런 창조신앙이 맞다면, 그렇다면 나도 비록 불교신자이기는 하지만 인간이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러면 나도 하나님이 구원해주는 것이 맞지 않는가? 나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형제이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이다.

이것을 한번 반박해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바로 천주교 신학자인 칼 라너의 '익명적 그리스도인' 인데, 이것이 참으로 문제인데, 십자가가 빠진 하나님의 형상론이 되어버리면,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한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신앙이 바탕이 된 하나님의 형상론을 교회에다 그대로 적용시켜보면, 십자가 말고 말이다. 비록 그 사람이 십자가의 복음을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십자가를 아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교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형상론에 의하면 중간에 들어갔다가 빠져야 될 것이기에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에게 은총을 주기 위해서 개입되었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계속해서 남아있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남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인데, 왜냐하면 거룩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말이다.

◈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이다' 라는 의미는?

그렇다면 하나님의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들은 교회의 주인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성경에서는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점을 아시겠지요?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여기 이렇게 교회를 세웠는데 누구를 주인으로 모실까? 사람은 안 되고 그리스도를 모시자. 그래, 그렇게 하자" 라고 할 때는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사고방식이고,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곧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인이라고 따로 이야기할 필요조차도 없다는 말이다. 사업을 할 때나 주인이나 사장이 필요하지 말이다.

◈ 그들은 왜 거룩한 교회를 고집하는가?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고서는 교회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더라도 그리스도 몸밖에 있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교회를 계속해서 고집하겠다면, 자기들은 그것을 거룩한 성도들, 결국 사람들인데, 그렇게 되면 거룩한 사람들이 모인 회의, 교단 등, 또 그렇게 모이는 모든 행동 등이, 그렇게 거룩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까운을 입어야 하느냐 마느냐, 성만찬은 일년에 몇 번을 해야 하고, 부활절은 어떻게 해야 되고, 이런 모든 문제들이 거룩한 성도들의 거듭난 의지와 거듭난 이성과 거듭난 감정에 의해서, 아주 순수하게 기도를 통해서 얻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님 앞에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천주교의 재판이지 무슨 개혁주의냐는 것이다. 천주교가 왜 천주교인가? 하늘이 무너져도 교회는 영원하다는 것이 곧 천주교가 아닌가? 그 영원한 교회의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이 은총을 주신다고 해서, 즉 성만찬이 은총의 매개채, 즉 은총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 과연 은혜의 수단은?

물론 현재의 루터신학에서는 성만찬을 지워버리고 말씀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 이전의 종교개혁 당시의 루터나 칼빈은 둘 다 인정했다는 것이다. 은혜의 수단은 두 가지인데, 바로 말씀과 성만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 가지로 하면 문제가 되는 것이, 이 두 개가 서로 마찰이 일어날 때 어느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물론 침묵하지만 말이다. 두 개가 있으면 항상 순서가 있기 마련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35페이지를 보자.

** 신은 모든 것 속의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무한자로서 모든 것을 규정하지만, 스스로는 무규정자가 된다는 것이다. 신은 무한한 일자(一者)로서 전후, 본성, 지속, 위계에 있어서 모든 것을 앞서며, 모든 것을 만든 능동적 원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존재자가 신을 알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완성되는데, 물론 알 수 있다는 쪽으로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반발을 해서, 존재자는 신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지 존재자인 인간이 신의 원천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쿠자누스까지 연결되는데, 부르노, 쿠자누스, 윌이엄 오캄 등, 즉 루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반발을 했다는 것이다. 존재자는 존재자들 자기들끼리만 아는 것이지 결코 신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 인간의 학문세계에 자유를 !!

왜 이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 신이 내린 계시로부터 점점 더 탈피해서 인간이 자기 주제를 가지고서 독자적으로 어떤 새로운 학문을 하는 것은 신앙과는 상관없이 그런 논리적 작업을 해도 된다는 것을, 그런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 즉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쿠자누스 등이 말이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도 인간이 신을 자연적으로 안다고 하지는 않았는데, 다만 은총을 통해서 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35페이지를 보자.

** 이렇게 되면 유한한 인간이 할 일은 신에 의해 만들어진 만물이 어떤 흔적이 남아있는지를 탐구해서 신과의 접촉을 시도하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여기 인간은 거듭난 인간을 말하는데, 결국 중세철학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신부님, 골치 아픈 이야기는 그만 하고, 딱 부러지게 우리는 뭐 하면 됩니까?" 라고 했을 때, 신부가 말하기를, "당신이 영세를 받고 했으니, 즉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당신의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면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수학교수라면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빠지게 되는가? 자기 부인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와이프 말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수학교수를 하면서 자기 죄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수학에 담겨있는 신의 오묘함을 알면, 그래서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 과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인가?

그러니 그렇게 되면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영광이 완전히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바로 그 영광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주장하기를, 오히려 자기가 열심히 하면 할수록 그 영광의 폭이 더욱더 넓어지고 많아진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창조신앙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천주교의 이런 주장이 너무 너무 마음에 와서 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맞는가?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계속해서 교재 35페이지를 보자.

** 신은 당연히 자신을 긍정으로 보시는 분이기에, 신이 스스로 만드시고 스스로 그 안에 내재되어있는 피조세계도 당연히 긍정적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 왜 신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여기서 "신은 당연히 자신을 긍정으로 보시는 분이기에" 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는 부정이 없다는 의미인데, 즉 이 세상에는 긍정도 있고 부정도 있지만, 그러나 그 긍정과 부정이 합쳐져서 순수한 부정이 된다는 것이다. '오리게나' 라고 하는 중세의 철학자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이 세상에는 긍정과 부정의 정(正)과 반(反)이 있지만, 그러나 신 앞에서는 합쳐져서 신에게는 모든 것이 긍정이라는 것이다.

오리게나가 하필이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까, 이렇게 신이 긍정으로 이야기해야 신이 악의 조성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을 만드는 원인 제공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런 긍정과 부정에 머물면 되지 않고, 그것을 초과하는 긍정이 될 때, 비로소 죄의 창조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아름다움이냐, 추함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그래서 그들은 악을 인정하지 않는데, 악을 선의 결핍정도로 여긴다는 것이다. 악은 나쁜 짓을 하는 적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추하다' 라는 차원정도로, 즉 "아아쿠, 사람이 무슨 개돼지도 아니고 도대체 그게 뭐꼬" 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도 그런 차원에 머물지 않고 아름다울 때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이냐 ,비진리이냐" 라는 차원을 넘어서, "아름다우냐, 추하냐" 라는 차원으로 모든 가치는 결정이 난다는 말이다. 즉 '진선미' 가운데서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본다는 것이다.

이게 동양철학도 그렇고 서양철학도 역시 그러한데, 그러니 사람이 살아가면서 추하게만 살지 않으면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되는데, 사람이 추하게 살다가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면 모두 해소가 되고, 즉 선이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사람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하면서 살았더라도 그 다음에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앞에 한 나쁜 일들은 다 그 뒤의 착한 일에 묻힌다는 것이다.

◈ 죄(罪)는 과연 실체인가, 아닌가?

이렇게 되니 십자가의 예수님 피라는 것은 그리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본인이 알아서 아브라함 쪽으로 가면 십자가의 피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죄가 실체라고 하면 죄가 남게 되지만, 그러나 죄를 선의 결핍으로 보게 되면 죄의 실체는 남아있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들어서, 여기에 '똥'이 있다면, 이 똥은 분명하게 실체인데, 그러나 여기에 비해서 '배고픔'은 어떠한가? 배고픔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밥을 먹으면 된다는 말이다. 즉 죄를 이런 똥과 같은 실체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이 죄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마치 밥을 먹으면 배고픔이 없어지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선이 실체이고, 이 죄는 실체가 되지 못한, 즉 실체를 몰라본 잠시 동안의 착각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죄가 실체라고 하면, 그렇게 되면 제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죄라는 덩어리는 그대로 남는다는 말이다. 그때는 다른 누군가가 와서 이 죄라는 실체의 덩어리를 녹여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죄로부터 구출하라 !!

이렇게 죄가 하나의 실체라면, 이 실체는 존재의 속성인데, 이렇게 죄가 존재한다면 모든 것의 최종 존재자는 누구인가? 모든 존재를 존재토록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가 뭐라고 해도 결국은 죄의 주동자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를 만들었으니, 하나님은 당연히 나쁜 자가 되는데, 그래서 인간들이 오히려 구원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거기서 구출해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그런 죄의 주동자로부터 말이다. 십자가를 빼버리고 신학을 하게 되면 이렇게 되는데, 이런 코미디 같은 일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제가 지금 목이 터지라고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것이 전혀 남의 동네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한국교회의 신학이 바로 이렇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개판이라는 것이다. 고객들의 입맛에 맞추다보니 완전히 엉망진창이라는 것이다. 무슨 식당도 아니고 말이다.

어느 정도 개판인지 이 교재에 나오는데, 여기서 145페이지를 보자.

** 이처럼 목회자의 본심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살고 싶은 것이다. 정말 죽기 싫다. 이대로 굶어죽을 수 없지 아니한가. 살고 싶은 이 본심에 대하여 이유를 묻지 마라. 지금 살아있으니 그냥 더 실고 싶을 뿐이다. 목사도 사람 아닌가? 어떤 철없는 자가 다음과 같은 말씀을 가지고 들이민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하지만 이 말씀은 이미 옛날 한때 이 땅에서 훌륭하게 살다가 지금은 일찌감치 과거 인물로 소멸되어버린 예수라는 분의 훌륭한 교훈에 불과하다.

계속해서 교재 146페이지를 보자.

** 교인들이 온갖 맛있는 것 먹고 값나가는 명품 차고 다닐 때, 자신도 그런 것을 소유하며 살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인간으로서 솔직한 심정이다. 따라서 무슨 요령을 다 동원해서든지 그들이 헌금을 하도록 하면 그만이다. 누가 자신을 먹여 살려준다면 그딴 삼위일체 교리나 개혁주의 신학도 단번에 다 버릴 용의가 있다. 어차피 신이란 인간이 만든 관념이라서 있는지 없는지 모호한 상태이고,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역시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몸짓이다.

그러니 삼위일체나 개혁주의는 장사에 도움이 되는 상품에 불과한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인간이 그 어떤 개념과 관념을 가지고 있더라도, 정말로 인간에게는 자기 몸뚱아리가 제일 소중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되먹임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무엇을 드릴까요?" 라고 하는 그런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신을 알아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이 실제로 와서 닿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잘못하면 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버려놓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이 대표로 모든 것을 다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말이다.

◈ 힘쓰는 일은 예수님께 맡기자 !!

그리고 나서 건짐을 받던지 받지 못하던지 하는 것은, 즉 모든 심판은 예수님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데,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지체되게 하기 위해서 뽑아내던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엉뚱한데 힘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압력을 넣는다고 해서 통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요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러한 하나님의 절차에 삼위일체이론이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이론을 분해해봐야, 모두가 다 '~은 아니고', '~은 아니고' 라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이야기하면서 '~은 아니고' 라는, 이런 부정적 용어를 사용할 뿐이지, '~은 이다' 라고 규정할 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분이면서도 세 분은 아니고 세 분이면서도 한 분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면서도 전적으로 사람은 아니고, 하나님이면서도 사람만은 아니고, 의지가 셋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이면서도 세 개의 인격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35페이지를 다시 보자.

** 신은 당연히 자신을 긍정으로 보시는 분이기에, 신이 스스로 만드시고 스스로 그 안에 내재되어있는 피조세계도 당연히 긍정적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다음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 다 거짓말이 된다.

(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여기 10절에 보면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라고 하면서 창조신앙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11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그것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하고 말이다. 그러니 멸망시키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옷과 같이 낡아져야 한다는 말이다. 모두가 다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창조신앙 안에 있으면 모르는데, 아마도 하나님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아니, 자기가 만들어놓고 부순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는 이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데, 이 세상의 모든 자연세계는 스스로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계속해서 교재 35페이지를 보자.

** 즉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한한 신의 존재성이나, 혹은 피조물이라는 인간의 존재성을 긍정하는 입장에서 세상을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라고 알려진 그분을 부각하기 위해서 자신의 계시하고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주와 그의 세계가 등장하면 기존의 모든 존재는 소멸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이 사실은 이미 천지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과 주님이 의논하신 바에 따른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17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것이 다른 민족들에게는 전혀 가르쳐주지 않고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허락하신 것인데, 그들은 창조신앙으로만 하나님을 알았지, 즉 주의 개념으로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 즉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인데, 다른 신들과는 다른 것이 여기에 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36페이지를 보자.

**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란 하나님도 아니고 여느 인간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상은 이분 중심으로 되어야 합당하다. 그러니까 성경은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책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선포하는 책이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여기서 세상이 그분 중심으로 되어야 합당하다는 것은, 이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무엇이든지 자기 중심으로 보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서는 항상 '내' 중심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터져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내교회', '내교단', '내국가'와 같은, 이런 것들이 깡그리 다 날아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것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현실이니까 말이다.

◈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교회가 !!

그런데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확대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그런 것을 포기하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교회를 만들어놓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만든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 십자가의 능력 - ① 버림 ② 구원 !!

다시 정리하면, 십자가의 능력이란, 첫째로 버림이고, 둘째가 예수님의 고난으로만 구원하심, 이러한 두 가지가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능력이 임한 사람은, 자기는 버림을 당해야 당연한데, 자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 때문에', '나를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기로 인한 모든 것은 다 버리게 되고,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렇게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 이라고 하는데, 즉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고 말이다.

이런 사람은 교회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릴 문제가 아니고, 그야말로 고고학에서 고대유물을 찾듯이 그렇게 발굴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사도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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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