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계 2:12-13 (버가모 교회)
Re..계 2:12-13 (버가모 교회)
이름 : 이근호(IP:)
버가모 교회
2006년 5월 7일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2:12-13
(계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죄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계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아신 바 되었다는 말은 곧 진짜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주목받는 참된 자기 백성도 엄연히 이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말도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 너는 참 좋겠다는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 확실히 눈 도장 찍어놓은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신수가 훤하고 만사형통하겠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에 의해서 확실하게 아신 바 되었다는 그 사람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몰라서 그런 자리까지 내몰았을까요?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벨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처음 인간 이후에 나오는 첫 성도입니다. 하지만 그는 첫 순교자입니다. 하나님께서의 그의 죽음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도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마치 방치하다시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원래 피조물이라는 것이 창조주되시는 분의 영광과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생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디바라는 사람도, 이 땅에 사단이 존재함을 외부로 보이기 위한 일생을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악마나 모두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동시에 다들 인간들의 눈에 숨어있는 양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아예 ‘그런 존재들이 없다’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일생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피조물인 인간, 특히 성도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 땅에 출현한 자들이 아닙니다.
즉 눈에 보이는대로 살다가 눈에 보이는대로 죽는 식으로 성도로 하여금 살지 않게 합니다. 피조물이란 이유와 목적도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이 세상은 다른 존재들에게 지배받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이 세상은 오직 인간들과 인간들만의 노고와 지혜로 문명이 발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 외에 그 어떤 영물에 대해서도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9:15-1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라는 인간을 이미 귀신도 알고 있다는 겁니다.
즉 악귀는 분명히 있고 또한 그 악귀는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을 실제로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관찰을 유심히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뿐만아니라 누가복음 8:29-33에 보면,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멀쩡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 사람을 멀쩡하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 사람을 통해 귀신의 존재를 외부로 발췌해내기 위함입니다. 구약 다니엘서에 나오는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분들은 바벨론 나라에게 고급 공무원들입니다. 법을 집행하는데 술선수범해야 될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금신상에 절하라는 나랏법을 거부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 12절에 나오는 안디바처럼 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즉 구약 다니엘서의 핵심은 다니엘 12:1-2의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부활’입니다.
다니엘서에서 성도 외에는 부활의 세계를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끝나는 인생을 삽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도들은 자신의 목숨이 빼앗기는 순교에 대해서 아쉬워하지 않을까요? 아쉬워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데살로니가후서 2:9-10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은 반드시 악마가 제공하는 기적에 현혹당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절대로 지상에서 인간들이 제조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도는 결코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들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양심적인 것과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모든 선행과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사수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무엇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행함을 보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시고 싶어서 그냥 선물로 주시는 형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갖고 계시는 ‘날 선 섬’은 바로 성도의 순교를 통해서 들통난 그 악마를 처벌하기 위한 용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존재 이유가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알기 위함인 것을 잊지 않고 저희들 자체가 영물처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1-03-22 06:35
012강-계2장12-13(버가모 교회)-rev060514
설교:이근호 목사님
녹취:박온정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12-13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400페이지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아멘.
오늘 본문에 ‘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아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거 맞죠? 하나님께서는 살아 게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다는 말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한 가지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이 아시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 움직임을 다 아시지만 하나님께서 콕 찍어서 ‘내가 너를 안다’ 콕 찍어서 안다는 대상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어느 정도 아시냐 하면 이름도 아십니다. 그 이름이 ‘안디바’라는 사람입니다. 이 안디바라는 사람을 우리 주님께서 아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바 된 안디바 같으면 우리 상식으로는 ‘안디바는 이제 형편 폈다’ ‘만사형통하다’ ‘안디바는 좋겠다.’ 하나님이 지목해서 아신바 되었으니까 안디바는 이제 훤히 신세 폈겠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딱 찍어서 한 안디바가 제 명에 못 죽고 순교 당했습니다.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봐서는 하나님이 아신다는 게 별 효력이 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아신다면서 순교 당하는, 방치하는 그것은 도대체 뭐냐 말이죠. 아신다면서.
창세기4장에 보면 최초로 등장하는 신앙인이 최초로 순교 당하게 됩니다.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신바 된 성도는 이땅에 밥이나 먹고 살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뭔가 목적과 사명이 함유된 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 하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는 그 뜻. 일종의 학교에서는 ‘당번’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당번...
꼭 하시고자 하는 얘기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신다는 이야기를 남기면서 이 땅에 존재하게 한 겁니다. 안디바가 죽었는데요, 안디바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냥 헛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신바 된 안디바가 죽음으로써 사단의 정체를 노출시키는 그러한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 안디바를 죽이십니다.
사단이, 이땅의 악마가, 그런 영물이 악한 영물이 이 땅을 휘어잡고 있고 농락하고 있고 주관하고 있다는 감추어진 그 비밀을 바깥으로 노출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신바 된 안디바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12절에 보면 버가모 교회에 편지하시는 주님께서 여러 가지 다양한 특징들이 있어요.
특징들이 있는데 오늘 버가모 교회 특징이 뭐냐 하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라고 해서 예수님을 뭐라고 표현 하냐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분이라했어요. 이걸 ‘야인시대’에서는 이걸 뭐라 하냐면 ‘쌍칼’이라고 했어요. 김두한 시대 때 쌍칼이라고 했죠? 쌍칼 가지고 왔다는 말은 주님께서 쌍칼을 사용을 하시는데 어디를 향하여 쌍칼을 사용하시는가를 들추어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아신바 된 자기 성도를 보냅니다.
그 이름이 안디바인데요, 안디바가 주 예수의 복음을 굳게 믿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영물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죠. 그때 사용하시려고 쌍칼 갖고 계시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자기밖에 모르는 하나님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내 사정도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데 막상 성경을 펼치고 보면 하나님은 독단주의고 이기주의, 자기밖에 몰라요.
왜 하나님이 그래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피조물과 같지 않고 창조주가 되려면 피조물과의 사이에 뭔가 차이나는 점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선악과 따먹고 되지도 않는 창조자 행세를 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따라서 피조물은 철저하게 창조주에 의해서 농락 당해야 됩니다. 그걸 곱게 여겨야 되요. 우리가 이런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맞이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란 이름만 들어도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입니다.
어디서 하나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멀미나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밖에 없어요. 왜냐면 우리는 부모의 죄악 된 본성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바로 신이기 때문에 나 말고 다른 신을 거론한다는 것은 우리한테는 멀미날 정도입니다. 천리만리 하나님한테서 예수님한테서 도망치고 싶고 본성적으로 우리는 울렁증이 생기는, 근처도 가기 싫어하는 그런 본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있고 최후의 심판도 있고 지옥도 만들어놓고 우리가 이 땅에서 출발할 때부터 우리가 다른 정신 상태를 갖고 지금껏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우리 정체를 들추는 겁니다. 안디바가 순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켜서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안디바 순교할 때 몰랐다는 게 아니라 아시면서 의도적으로 순교케 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악마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기 위한 조치로서 희생타로 안디바를 사용했습니다. 라는 방금의 이야기가 주님께서 바라시기를 이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고 우리의 인생 되기를 소원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날 때부터 하나님, 예수님 소리만 들어도 도망치고 싶은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을 빤히 아시면서도 제발 이제는 이 땅에서 자칭 신이라는 행세를 내가 더 이상 두고는 못 보겠다, 중지해라, 너희는 어디까지나 피조물이야! 너의 자리 찾아가! 너희 자리 찾아가는 게 너에게 편해. 이제 하나님 행세 그만 좀 해! 교회 나오고 안 나오고 내가 결정할 거야,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마! 우리가 결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안디바 입장에서 봅시다. 순교했던 안디바가 우리 곁에 있다면 ‘안디바야! 너 하나님께 당했어, 하나님께서 일부러 너 죽게 했어.’ ‘너 하나님께 약 오르지 않아?’ 안디바는 굳게 믿는 복음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나는 내가 죽는다는 것보다도 나는 사랑을 받았어, 하나님이 아신다는 자체가 나에겐 사랑이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마귀가 아무리 이기려 해도 이길 수 없는 게 뭐냐면 ‘사랑’입니다. 주님 주신 사랑은 마귀가 아무리 침범해도 그것만은 끊을 수 없습니다. 환란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악마나 권세자나 모든 영물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주신 사랑을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했습니다.’ 라고 제가 여러분에게 얘기할 때 그 의미는 뭐냐, 제발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이 만들지 마세요. 라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들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윤리와 도덕을 총 집합해서, 그동안 하나님 말씀 지키는 거 총 집합해서 그동안 교회 봉사하고 충성하고 말씀 지킨 것을 다 집어넣어서 하나님 사랑 비스무리한 것을 우리가 만들려고 해요. 지어내려고 해요.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만든 것은 페기처분 해야 될 겁니다. 그게 선이 됐든 의로움이 됐든 훌륭한 교사가 됐든 뭐가 됐든 훌륭한 성경 지식이 됐든 주님의 사랑 앞에 이거는 흐물흐물해가지고 없어져야 되요. 순교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착했다, 이만큼 훌륭했다, 이만큼 충성했다는 생각이 주님의 사랑 앞에서는 그것이 사라져요.
보통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랑하는 자아가 더욱 더 뚜렷해집니다. 명확해져요.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한다’ 사람이 누구를 사랑할 때는 주체, 자기를 뚜렷하게, 굳건하게, 명확하게 하고 명백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주체는 ‘나’니까. 내가 사랑하니까. 그런데 ‘주님 사랑’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주님 사랑한다는 생각은 흐물해져 날아가 버려요.
2006년 5월 이 시간도 주님이 날 사랑한다. 주님이. 11시에 시작되는 예배시간도 내가 사랑한다가 아니라 주님이 사랑한다. 그 사랑에 이끌려서 교회 왔다. 그리고 그 사랑에 이끌려 얼굴과 얼굴 맞대며 주님과 천국에 간다. 라는 자기 생각이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없으면 주님께서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어요. 마음대로.(아멘)
순교를 하든 뭘 하든 하게 되는데,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뭐냐 하면, 주님의 사랑이 들어오면 ‘나’라는 의식이 없어지고 모든 게 사랑으로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그런 ‘나’가 없어진 상태에서 주님께서 마음대로 부려서 순교케 하실 겁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라는 게 뭐냐 하면, 사람이 죽어야 순교가 아니고 성도가 하는 모든 것이 ‘순교’라는 범위 안에 포함이 되고 절차로써 개입이 되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자기 목을 따야 순교가 아니라 소주 3병을 하던 사람이 예수 믿고 소주1병을 한다면 소주 3병 먹었을 때 만나는 친구가 2병분의 친구는 떠나기 마련이에요. 어렵게 얘기했습니까?
소주3병을 마시면 격에 맞는 친구를 만납니다. 1병마시면 친구와 결별이에요. ‘에이, 예수 잘 믿고 천당에 가라, 나는 소주 3병 먹겠다,’는 친구와는 결별하게 됩니다. 3병 먹는 친구가 떠날 때 아쉬울 때 왜 아쉽냐 하면, 내가 공들여서 친구를 만들었는데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친구가 떠나니까 주님 앞에 농락당한 거 아닌가 생각할 건데, 친구가 떠나든 뭐하든 간에 주님의 사랑이 더 크니까 소주3병에서 1병으로 줄게 하셨구나, 이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것도 순교다 이 말이죠. 술 3병에서 1병마시면 술 먹고 싶은 생각 들겠습니다만, 술 3병에서 1병으로 줄어드는 이것도 순교예요. 순교라는 범위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장하다 춤을 추자’ 이것이 아니라, 장하고 자시고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주님의 사랑으로 이끌림 받았다는 의식바까에 없다 말이죠.
제가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순교는 나도 모르게 하게 돼 있는 게 순교다 이 말입니다.(아멘) 자기가 알면서(의식적으로) 순교하는 것은 순교가 아니고 자기 자신이 뚜렷하고 자기가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건 자기 의로움이 되요. 이거는 주님의 사랑이 아니라 이거는 열광 내는 거예요.
찬양이라는 것은 은혜받은 게 자연스럽게 돼 있지, 손뼉치고 바닥치고 위로 치고 아래로 치고 하면 손바닥만 아프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얼마나 사랑을 몰랐으면 사랑을 자기라도 만들어내야 되니까, 이게 뭡니까~!(김형곤 버전) 자기가 만든 사랑은 페기처분 돼야 되요. 자기 의로움과 교회 잘 나오는 거 이거 폐기처분 돼야 됩니다. 성도는 내가 죽는 줄 모르고 죽게 돼 있어요.
아벨은요 하나님 믿을 때, 제사 드릴 때, 심지어 아벨이 형한테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돌에 맞아 죽을 때, 주께서 아셨어요! 그걸 주님께서 아신다고요. ‘응, 네가 형한테 맞아 죽는구나,’ 죽고 난 뒤에 찾아가요. ‘가인아, 네 동생 어디 있느냐,’ ‘제가 압니까? 제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빤히 아셔요.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빤히 아시는 바 된 사람에게는 빤히 아시면서 묻습니다. ‘네가 현재 있는 위치는 내가 깔아놓은 돗자리 위에 존재한다.’ 그걸 깨우치기 위해서 찾아오시고 거기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너 자신에게 없고 너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숨어있는 영물, 숨어있는 하나님을 세상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아멘)
누가복음8장에 보면, 이런 사건이 나옵니다. 어떤 청년이 진짜 지랄발광을 해요. 사람들이 감당을 못합니다. 그래서 쇠사슬로 묶어놓고 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과는 ‘그 청년은 멀쩡했다.’ 이게 결과입니다. 그 청년은 지랄발광 않고 멀쩡한 사람 됐다고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 청년에게 수많은 귀신 졸개들을 들게 했느냐, 그 청년은 본의 아니게, 이 세상에 귀신이 있고 악마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청년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첨부터 멀쩡하게 해서 천당 보내야 될 문제를 귀신 들게 해가지고 주님 찾아오게 해서 귀신 쫓아내고 멀쩡하게 만들었다 말이죠.
귀신과 예수님의 만남이에요. 그런데 세상 사람은 예수님이 보이는 세계만 관여하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관여치 않는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 오셔서 경제가 회복되게 해주시고 남북동일 되게 해주시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서 도모하는 분으로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시거든요.
사람들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보이는 사람만 상대하는 게 문제점이에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배후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걸 성도한테만 알려줘요. 성도 아닌 사람에게는 만날 눈에 보이는 것만 보다가 죽을 때까지 눈에 보이는 걸로 끝내버립니다. 죽을 때 대리석 묘를 크게 해 이름만 남기고 죽을 때 관 크게 해가지고 뭐할 건데? 알파요 오메가라, 처음도 보이는 것, 끝도 보이는 것, 이것 불신의 세계입니다.
세상만사 인간하기 나름이다. 이게 불신의 세계예요. 영물, 마귀, 악마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들이 귀신 잘 쫓아내고 병을 고치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도 흉내 낸다고 폼을 잡아봤어요. 그러니까 귀신이 같잖아서 말이죠, 귀신이 같잖아서 하는 말이 ‘어이, 내가 예수도 알고 사도바울도 아는데 너는 어디서 온 뼈다귀야 도대체, 네가 왜 깝죽대느냐 말이죠. ’귀신을 물로 보냐?‘ 이런 뜻이거든요. 혼났어요 그 사람.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알려주는지 신문 지상이나 뉴스에 귀신이야기 안 나옵니다. 다 빠져있어요. 다만 이 세상의 복잡한 변화만 일어날 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구성된 세상만 전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진화론이고 과학이고 물리학이고 화학이고 문학이고 그런 겁니다.
귀신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신 바 된 순교자이신 성도를 보내서 성도 행위 하나하나를 통해서 귀신 정체로 드러나고 악마의 정체로 드러나고 이 세상을 배후조종하는 인물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런 도구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영젹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다니엘에 나옵니다. 다니엘 세 친구가 출세했다, 이거 빤하게 아는 이야기죠? 다니엘과 세 친구는 고급관료죠. 고급관료. 전문적으로 국가행정에 관여한 사람이죠. 고급 공무원이다 이 말이죠. 요즘 같으면 3급 4급 이상.
고급 공무원들은 국민들과 왕을 위하여 봉사해야 될 그런 임무가 있습니다. 국가가 있으면 임무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치안이고 하나는 세금 거두는 거, 세금 거두는 것과 치안이 생길 때 그때 국가라는 것이 성립 되는 겁니다.
그전까지는 종족별로 추장별로 돼있지만 국가라는 법적 체제는 어디 있느냐 하면, 국가 모든 법은 어디 있느냐 하면 국가 내부의 치안과 바깥에 있는 국방을 담당하는 것 하나와 세금 거두는 것, 그래서 모든 공직자는 여기에 집중돼 있습니다. 집중돼 있는데 그러면 다니엘과 세 친구가 고급공무원이 됐으면 나라와 국민들에 충성한다는 선서를 했을 것이고 그 일만 하면 되요.
그 일의 최정점은 누가 있느냐, 느부갓네살 왕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짐이 곧 국가요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최고 권력은 왕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하급 공무원들은 왕의 말을 들어야 되고 그 당시 왕은 법을 제정해서 그 법대로 국민을 통치해야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 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에요.
다니엘이 법을 법대로 잘 정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라고 한다면 다니엘이 구속될 이유가 없고 다니엘이 수감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단단한 법치국가에 틈이 벌어집니다. 틈이 벌어지면서 왕이 말합니다. 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내가 사자굴에 집어넣는다. 법으로 정해졌어요. 법이 잘 지켜지는지 감찰기능도 있습니다.
법을 지켜야 될 사람이 공직자면 공직자가 솔선수범 법을 지켜야 될 테인데 소위, 공직자 되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승진을 시기했던 다른 사람의 투서가 들어오죠. ‘저렇게 해서 어떻게 기강이 잡히겠는가,’ 투서가 들어옵니다. 과연 조사해보니까 평소에 일을 잘하기 때문에 왕도 재능이 안타까워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만든 최고의 법에 따라 처리해라,’ 못합니다. 무슨 빽믿고 못하냐! 지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 빽 믿고 ‘못합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13절에 보세요. 「… 나를 믿는 믿음을 져버리지 아니하였도다.」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 믿고 ‘못합니다.’ 그 당시 사단의 위치라 하는 곳은 ‘황제 숭배’와 ‘여신 숭배’가 국가적 정책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슴에 손 올리고 ‘국가에 대한 맹세’와 똑 같다는 말이죠.
일본의 천황 섬기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틈이 벌어지면서 다니엘과 세친구와 같은 상황 속에 오늘날 성도 하나하나가 파견근무 하고 있다는 겁니다. 성도의 삶의 목적은 생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귀신이든지 하나님이든지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 그걸 노출시키기 위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겁니다.
‘ 못합니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법은 법이니까 집어넣자.’ 집어넣었죠. 세 사람 집어넣었는데 거기에 네 사람이 같이 놀고 있었습니다. 이 다니엘 사건을 어떻게 중심을 잡고 해석해야 되느냐 하면, 다니엘이 과연 국가 정책에 대해서만 한 것인가. 신자가 국가에 대해서 했더니만 국가에 복종하여 고급관료의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그 이야기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야기 하고 싶어서 다니엘과 세 친구 이야기를 했던가,
그걸 보기 위해서 다니엘 12장 1절과2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 이래 돼있습니다.
국가의 이야기, 공무원이야기, 어떤 사람이 왕에게 대들다가 불 속에 들어가고 사자 굴에 들어갔다는 그런 이야기, 그런 일상적인 정치권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만 다니엘 이야기는 그게 아니라, 언젠가는 사람이 죽으면 티끌이 되는데, 티끌 가운데서 영생을 얻을 자는 다시 부활된다는 그 이야기 하고 싶어서~! 다니엘과 세 친구가 미리 앞서서 바벨론 나라에 뽑힌 겁니다.
파견근무, 침투조예요 침투 조. 침투조로 뽑힌 거예요. 사도행전19장 다시 해봅시다. 사도행전 19장에서 귀신이 말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 누구얏! 너는 아니야 영 아니야! 너는 현실주의자야 현실주의자! 눈에 보이는 것밖에 몰라 너는. 사도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말이죠. 귀신이 증거 하기를 사도바울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고 하나님의 아신 바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겁니다. 사도바울 자체가 영물 같아요. 영물 같아. 천사보다 더 위대해요. 우리 성도도 마찬가지지만. 그걸 오늘날 누구라고 하냐면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
참,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 교회라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불속에 들어갔던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 용광로 속이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교회’예요. 왜?! 보이지 않는 주님이 거기에 함께 계시므로. 원래 주님은 눈에 안 보입니다. 보이게 해줄 때만 보이는 거예요. 제가 엊그제 금요일 밤 열한 시 다 되어갈 시기에 서울에서 집회하면서 강의를 했는데 밤늦게 강의하니까 꾸벅꾸벅 조는 사람도 있어서 이런 문제를 던졌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잡히고 난 뒤에 제자들만 남았을 때, 그들이 무서워서 문을 꼭꼭 걸어 잠갔거든요. 그런데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타났습니다. 문제: 다음 중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타났는가? 1)문을 따고 들어왔다. 2) 창문 따고 들어왔다. 3)지붕 타고 들어왔다. 4) 원래 그 자리에 숨어있었다. 몇 번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실 수 있는 분이에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말은 인간이 창문 꼭꼭 닫는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이 침투 못하는 법은 없는 거예요. 정답을 이야기하면서 퀴즈를 얘기했는데 요한복음 1장15절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먼저 계셨음이라.」나보다 앞선 것은 ‘항상’ 계셨기 때문에. 항상 계신분이에요. 항상 계신 분. 주님은 항상 계신 분이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눈에 보이는 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항상 계셔서 항상 사랑을 주시고 십자가의 사랑으로서 ‘다 이루었다’고 깨닫게 하신 항상 계신분이 우리에게 항상 은총을 준 겁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일종의 ‘영물’이죠. 영물. 귀신같은 존재지요. 그래서 우리 성도가 천사도 재판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예요. 어제 어떤 분이 전화로 하소연을 해요. 자기는 침례교단에 속한 백 명 조금 안 되는 그런 교회인데 목사님 연세가 69이랍니다. 69인데 월급이야 많이 못 드리고 월급 년 6 천만 원 가져간대요.
많이 못 드리고 육천만원 가져가는데 얼마 전에 재직회를 했는데 월급 올려달란대요. 월급 올려달라는 이유가 뭐냐 하면, 80여명 밖에 안 된 교회, 자기 나이가 육십 아홉 아닙니까, 교회법에 의하면 70넘으면 못하니까 아들을 미국 침례신학교에 보내서 돈이 좀 들어간대요. 신학교 보내가지고 이 교회에 후계자로 집어넣어버렸어요. 1년 만에 휴학비까지 보충해서 … 그러니까 목사들이 ‘세사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교회가 당신네 부자 충성하라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길래,
교인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하니까 교인들은 말씀도 관계없고, 교인들은 뭣 때문에 오냐 하면, 상부조직 하기 위해서 모인답니다. 결혼식 할 때 부조하고 사교 단체가 돼버렸어요. 말씀이고 뭐고 교인들도 관심 없고 물론 목사도 관심도 없고, 목사가 말씀 가르칠 생각도 않고 교인들도 상부 조직하는 그 모임.
“그렇다면 3/2가 안 되겠네요.” “목사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3/2가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 교회 나오세요.” 왜냐면 3/2 안 되면 안 됩니다. 이단이든 삼단이든 3/2 찬성을 해야 교회 목사를 바꾸든지 해야 되지, 만약에 목사님이 집사님 싫어해가지고 나가라하면 그때 우세당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교회 나가세요. ‘안그래도 열명 씩 나갔습니다.’ ‘집사님도 나가시면 되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일종의 영물이에요. 영물. 교회 하나하나가 영적인 것과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마귀를 아는 영물이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끝으로 데살로니가후서 2장10절11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주님의 사랑.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인데 내가 안 만든, 주님이 그냥 주시는 끊어지지 않는 사랑. 어떠한 환란과 핍박에도 끊어지지 않는 그 사랑이 중요한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기적을 원해서 교회 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마귀가 기적을 더욱 부과해서 스스로 지치도록, 주님을 떠나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영적인 능력이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순교요? 하지 마세요!! 하게 하실 겁니다!! 언제?? 본인도 모르게!! (아멘) 소주를 3병에서 1병으로 줄이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분명히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따로 구원받아 내려고 주님에 대한 사랑을 운운하고 사랑 만들기를 하다 보면 마귀로부터 놀림당하고 피곤하고, 지치고 결국은 낙담하고 제풀에 주님으로부터 떨어지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저희들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끊어지지 않는 사랑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함을 지금도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하루하루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가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