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41018 부산강의-13, 14세기 신학
Re..20041018 부산강의-13, 14세기 신학
이름 : 한윤범(IP:)
20041018 부산강의-13, 14세기 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철학을 하면서 늘 우리에게 스스로 묻는 질문들이 있지요. 철학해서 뭐 하는데? 우리의 사명은 철학을 알리는 것이 아니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데 철학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냐? 이렇게들 생각이, 물음이, 제가 수시로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럽게 또 세월 지나면 또 다시 되묻게 되고.
여러분들도 교인들하고 이렇게 같이 신앙생활하면서 분명히 몇 주 전에 설교시간에 이야기했는데도 그 다음에 몇 주 후에 와서 설교시간에, 문제 답까지 알려줬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요구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지요.
이게 뭐냐 하면, 복음의 세계가 너무나 넓기 때문에 들을 때 이쪽은 다 제해버리고 자기가 관심 있는 것 듣다가 그 다음에 또 새로운 우발적인 경험을 하게 될 때는 복음적인 해답이 선뜻 나오지 않을 때에는 또 묻게 되고, 그러면 물으면 거기에 대해서 답변하면, 이것 다음엔 또 이쪽을 전에 알았던 것까지 놓쳐버리고. 그래서 아마 90살까지 사는 것 같아요. 누구나 그렇게 가는 겁니다.
그래서 뭐, 설교 맨 날 되풀이 되고 똑같은 이야기냐 하지만 이게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에요. 듣는 사람에 따라서 듣는 뉘앙스가 다 다르기 때문에 항상 설교할 때는 지금까지 알았던 신앙, 복음 다 때려치워버리고 이제 방금 세상살이하다가 전혀 복음도 모르고 방금 앉아있다는 교인들을 그렇게 보고, 자, 새로 오셨지요. 복음이 뭡니까? 그 본문, 준비된 본문 가지고 다시 또 시작하는 거예요.
시작하다보면, 물론 지난 걸 되풀이하진 않아요. 하다보면 지난 것은 간단하게 간추려 지나가고 오늘 말씀을 통해 들어있는 또 다른 복음의 다른 면을 이야기해 버리면, ( 6초간 정지 ) 또 정리되고 그 정리된 상태에서 그 맥락을, 현실과 어떻게 되느냐 맥락을 알 수 있죠.
50인의 신학자, 책 중에서 우리들이 보기 외면하고 싶은 그 대목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지나갈 적에 핵심만 알면 그렇게 막 읽기에 괴로운 것도 아니에요. 약간에 ( 2분 10초 정도 끊김 )
신체 고치는 것은 누가합니까? 이건 의사가 하지만, 영혼 고치는 건 누가 해요? 이것은 영혼의 아버지가 보호자가 되는 성직자들에 의해서 영혼이 고쳐져야 되고, 영혼을 만약에 안 고치면 이 신체는, 상식적으로 알다시피 이 신체는 뭐로 돌아갑니까?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거는 말짱 도루묵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목사인데 뭐 하려고 철학을 공부합니까? 하는데, 그 당시 철학이 딴 철학이 아니고 이 선한 행동, 윤리적인 행동을 이걸 유발시키려면 영혼을 어떤 식으로 조립해 나가면 되느냐에 여기에 관점이 있기 때문에 그 당시는 이런 방법과 수단과 그러한 그 당시에 목회하는 모든 것이 여기 영혼을 어떻게 아름답게 장식할 것인가? 아름답게 조절할 것인가? 관리할 것인가? 여기에 관한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과 관계없는 게 아니죠.
오늘날 교회가 말이 개신교지 개신교가 아닙니다. 진짜 '개' 같은 신교가 될 수 있어요. 새로운 신교가 되는데. 개신교라는 말이 있지, 사실 개신교가 아니고 이걸 주장하면 천주교보다 더 천주교죠. 복음적 행동이라 하면 말만 껍데기만 복음적 행동이지 사실은 복음적 행동이 아니고 윤리적 행동이에요. 윤리적 행동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윤리적 행동, 거기다 더 플러스 한다면 종교적 행동.
그래서 그 당시 성직자들은 그러면 영혼을, 육체를 다루는 것은 뭐로 하느냐 하면, 양심. 떡이나 밥이나 먹여주면 되지만, 영혼을 다루는 것은 뭘 먹여 줘야 하냐면,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먹여 줘야 돼요. 그러니 요새 목회하는 것하고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요.
그러면 말씀을 먹이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여기에 지정의를 영혼을 새로 구분해요. 영혼의 작용, 영혼의 기능, 구분되는데 이게 지정의 아닙니까? 지정의니까 지에서 정으로 정에서 의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지는 지식 아닙니까? 지식하기 위해서 말씀을 가르치게 돼요. 그러면 말씀으로 가르치면 지식이 늘어나지요.
지식이 늘어나면 따라서 뭐도 늘어나겠습니까? 신에 대한 감정도 종교적으로 변하겠지요. 아, 뜨거웠다든지,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뜨겁지 아니하더냐? 감정이 되면 그 다음에 뭐가 나와야 돼요? 이제는 교회에 대한 봉사, 사회에 대한 자기 책임, 가정에 대한 술 끊고, 담배 끊는 자기 행동을 고치는 것, 의지가 나오겠지요.
지식과 감정과 의지, 요거를 관찰해서 지식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감정으로, 감정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교회봉사하고 헌금할 수 있도록 의지를 촉구할 수 있는 하나의 교육시스템이 되는 거예요. 지금 이런 이야기하면 복음 모르는 목사들은 되게 좋아할 거예요. 딱이네. 뭐. 끝나버렸네. 뭐.
지식에서 감정, 감정에서 의지 있는데 일단 일반 교인들은, 지식에 대해서 그들이 세상적 지식은 과학 지식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씀 전문가, 신학교를 안 나왔기 때문에 말씀에 에스겔이 어디 박혀 있고 미가서가 어디 있고, 출애굽기에 모세가 왜 불려나왔고 그러한 용어 문제들, 가룟 유다가 왜 지옥 가면서 예수님 제자가 되었나 하는 그런 문제들, 그런 문제를 그들이 전공을 안 했잖아요. 그런 것을 탐색하는 그러한 특정한 토론의 장에 그들이 참여한 바가 없잖아요.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신학교 배웠던 그것을 지식을 가르쳐주는데 여기에 동원하는 것이 뭐냐? 사람을 조절하는 조직신학이 동원돼요. 조직신학을 동원할 때마다 이거 성직자들은 신바람을 불지요. 이게, 아마추어들이 까불어! 얼마나 고생했다고. 공납급도 못 내고 권사한테 빌리고. 조직신학을 배운 이것에 대해서 여기는 뭐냐? 정당성, 신학교 했다는 정당성, 정당함. 교수, 장로 이리 와라. 너거들 뭘 알아? 신학을 알아? 조직신학을 아냐? 조직신학을 말만 들어도 교인들은 워매, 기죽어. 기가 푹 죽어버려요. 조직신학을 가르쳐 줌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생긴 현상이 뭐냐?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종속되겠지요.
그런데 이 조직신학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지금 이런 것들이 뭉쳐져서 조직신학이 된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 우리는 개신교 칼빈, 루터한테 베웠지, 우린 토마스 아퀴나스한테 안 배웠는데 그런 소리하지 말아요. 세상에 칼빈, 루터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않았어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적어도 어떤 사람이냐 하면, 교회에 머무는 체제만 세운 사람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 있는 모든 학문까지 범주를 넓혔던 사람이에요. 그게 토마스 아퀴나스에요. 나중에 나오는 쿠자누스 같은 사람은 이거는 교회가 우주를 능가해서 신의 체제까지 다 이야기한 사람이에요. 오늘 이거 다 떼려고 해요. 자든지 말든지 마음대로해요. 무조건 난 다 떼려니까. 교회가 우주의 범주를 더 너머까지 총괄해서 전부다 설명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범위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더 넓어요.
지난 시간에 잠깐 언급했는데 지난 시간에 시간 없어서 언급했는데 여기 잠깐 한번 봅시다. 이거 잠간 스톱하고요. 어디냐 하면, 여기 102페이지.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입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102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궁극적 기준은 신의 지혜와 동일한 신의 세계에 대한 기회와 통치를 표현하는 영원법이다. 모든 도덕적 법들은 그것에 기초하며 그것에서 유래된다.] 그러니까 영원법은 무슨 법은 아니에요? 도덕법은 아니고 도덕법에 기초하고 있는 도덕보다 더 위에 있는 법이죠.
[더 가까운 도덕의 기준은 영원법의 일부를 반영하는 자연법이다.] 이 자연법이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심지어 두더지까지, 개미까지 사회성을 갖고 있잖아요. 저희들끼리 무슨 법이 있잖아요. 자연 자체가 그냥 자연 자체가 자연이게 하는 자연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모든 법을 이게 자연법이에요.
자연법 위에 영원법 있고. 영원법은 하나님만 갖고 있고, 그건 천사와 하나님의 노는 동네가 윗동네에요. 우리 동네 아니에요. 그리고 그보다 아래 있는 것이 인간에게 있는 도덕법이고, 그 옆에 있는 것이 무슨 법이라 했습니까? 자연법이에요. 그 자연법이 요새 말하는 두 자로 이야기하면 뭐냐 하면, 과학이라 하는 거예요. 왜 태양은 지구를 도느냐? 왜 별은 반짝이느냐? 하는 전부다 자연법이에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단순히 그냥 성경 연구하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그 당시의 모든 인간의 사고 전체를 다 포괄한 거예요. 과학이든 철학이든 전부 포괄해서 그걸 신 아래에서 다 설명하는 거예요. 장점이 뭐냐? 장점은 이거지요. 교회 왔다? 목사한테 성경에 대해서 알았다. 그러면 세상 바깥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면 별을 바라보고 있는 어떤 연구원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다. 그러면 저 별을 바라보는 나의 의미는 뭐냐? 저 별이 반짝이는 그 진정한 형이상학적 의미는 뭐냐? 그런 것도 지금 목사들은 이야기를 못 하지만 그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 이야기해대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당신이 별을 바라보는 순간 시편 135편입니까? “별을 지으신 이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 그러니까 당신은 별을 하나님의 인자를 바라보는 겁니다. 뿅 가버리지, 뭐. 의사가 해부하면서도 거기 있는 그 모든 구조를 보면서도 거기다가 신의 창조성의 의미를 같이 결부해서 가르치고. 그래서 교회 밖이란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냐? 그러면 이렇게 살아야 자연에 합당하다. 자연에 합당한 것은 곧 어디에 합당하다? 영원한 법에 합당하고 그런 자만 신의 자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우리가 철학을 뭐 하는데 합니까? 뭐, 신학하고 성경만 가르치면 되지. 이런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은 목사가 그런 지식도 안 되고, 무식하고 그러니까 교회 와서 조직신학 가르쳐서, 조직신학이 무슨 신학이냐 하면, 교회를 위한 신학이에요. 이거는 조직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이기 때문에 뭐는 아니다? 교회 밖에 있는 단체, 주식회사나 그런데 위한 신학은 이다, 아니다? 아니죠.
그러면 교회와 다른 단체는 경쟁관계에 놓여 있죠. 자본주의 토대 위에서. 자금이 어느 쪽에 많이 쏠려 있느냐 경쟁관계에 놓여 있다 말이죠. 경제가 어려울 때 목사들의 설교가 하나로 모여들었어요. 지금 경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목사들의 설교는 하나뿐이에요. 어려울수록 돈 내라. 하나님이 시험하신다. 만약 이 시험을 견디지 못하면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여러분 견디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보여 주시옵소서. 어려울수록. 주여, 어려울수록 돈 더 내놓으소서.
IMF 터질 때 그런 설교 많이 나왔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자금이 어느 쪽으로 쏠리느냐의 경쟁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경제가 어려운 것도 전부다 그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은혜에 감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징벌을 받고 있는 건데 이 징벌을 깨닫지 못하는 바보들아. 눈을 떠라. 해 가면서 어려울수록 축복이 있는 기회라고 여겨라. 이런 식으로 하지요.
그러니까 조직신학이 교회를 위한 신학이거든요. 조직신학의 지식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교회에 충성을 노리고 있는 지식. 거기에 비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젠 교회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다 지우고 신과 인간의 관계인데, 인간이라는 말은, 신체는 사라져버리니까 그것은 사라져도 남는 것은 신체는 사라져도 불멸하는 것은 뭐다? 영혼. 그리고 하나님이 영혼 보시지, 우리 신체 보지 않는다. 철저한 영혼 위주의 신학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영혼은 뭣이냐? 중요한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영혼은 뭐냐? 무한이 유한에 담김. 무한이 유한 속에 담김. 이게 영혼이에요. 무한이 영혼 속에 담기는 것. 무한은 뭘 뜻한다고 했습니까? 신이죠. 신의 뜻, 신의 속성. 뭐, 하나님 하는 것. 유한은 뭡니까? 나지요. 나.
그러니까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중에 심판 받을 때 구원을 받고 싶은데 어떻게 구원받는 방법을 이제 성직자들이 알려 주는 거예요.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오도록 하면 되는 거예요. 무한이 신의 속성이 유한한 내 속에 들어오게 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끌어당기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끌어당기기만 하면 안 되지요. 유지를 해줘야 되지요. 무한이 유한 속에 끌어당겼잖아요. 일단 왔잖아요. 야, 너한테 못 당해. 내, 들어갈게, 들어갈게. 성령 들어갈게. 일단 성령이 왔잖아요. 오고 난 뒤엔 그건 뭡니까? 붙들어 지탱해야 되겠지요? 이 말은 소유입니다. 끌어당김. 끌어당기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일단 완전히 내 것으로 소유를 해야 돼요. 이제 하나님은 내 꺼에요.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은 내 꺼가 됐어요.
소유에서 끝나면 안돼요. 이제는 내가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과시하기 위해서 내 속의 유한은 감추고 무한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발산을 해야 되지요. 방출, 무한방출. 봐라! 내가 예수 믿기 전에는 이런 일 못했는데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이런 일 했잖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나의 신의 능력이야. 라고 자기 소유화된 신의 능력을 발산하고 방출하는 것.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가서 다시 그 유한을 통해서 방출할 때 그 인간은 누가 뭐래도 뭐다? 구원받은 영혼이다.
이거 이 이야기할 때 교인들이 그 당시, 할렐루야. 대낄이에요. 우리 신부님, 최고다. 왜? 나를 구원해줬고 동시에 나로 하여금 신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개조 만들어 줬기 때문에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감당할꼬? 거기에 대한 이야기에요.
그런데 여기 102페이지에 영원법 했잖아요. 그런데 103페이지에 보면 우리가 지난 시간에 약간 봤습니다만, 103페이지 위에서 다시 봅시다. 중요하기 때문에 법이니까. 지난 시간에 중요한 것, 내가 이야기해도 오후 시간이 되니까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피곤해 하셔서 아주 중요한 것 나왔지요. 굉장히 중요한 것 나오거든요. 중요한 게 한두 개라야지. 이거 중요하고 저건 안 중요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지난 시간에 중요하게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잘 들어보세요. 이것하고 다 잊어버려도 좋아요. 이것만 기억하면 오늘 나머지 강의 다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무한이 유한으로 들어와서 유한 속에서 방출될 때는 반드시 법으로 온다 이 말이에요.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다 말이죠. 법으로 고친다. 전부다 법으로. 바리새인 뭐 달리 바리새인인 줄 압니까? 바리새인이 멀리 있는 거 아니에요. 전부다 법으로. 그러니까 이것은 바리새인도 그렇고 그 당시 중세의 성직자도 그렇고 뭘 파악했습니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법에 복종하는 속성을 이상스럽게 지니고 있더라 말이죠. 딴 거 잔소리해도 안 듣는데 법이라 하니까 다 고개 숙여.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도 뭐로 조종한다? 법으로 확정지어 버려요.
그래서 지금 토마스 아퀴나스, 이런 사람들은 지금 뭐 가지고 고민하느냐 하면, 왜 인간은 법에 민감하느냐? 이 문제. 여러분도 답변을 한번 구상해 보세요. 인간은 왜 법에 민감합니까? 법에 예민합니까?
정지선 지키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안전띠 매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대번 계몽기간 하고 있다가, 3만원 하니까 다 지켜버려요. 뭐 개혁하라! 한국교회 개혁하라! 노타이 목사들 나가라! 정치 목사꾼들 나가라! 이렇게 하다가 법이라 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노회법 동원해서 예. 다 숙여버려요. 도대체 법이 뭐기에 인간들이 법에 예민하느냐? 그거 무한과 유한으로 해결을 봐야 돼요.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 해결을 못 봤어요. 칼빈도 해결을 못 봤어요. 루터도 해결을 못 봤어요.
이걸 정답을 내리고자 시도한 사람이 누구냐? 그 유명한 칸트라는 사람.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자유스러움의 토대는 놀랍게도 그 자유가 자기에서 나온 게 아니고 법적인 신에 의해서 인간은 자유롭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데, 그 자유의지를 누가 준거냐? 칸트는 말하기를 신의 법에 의해서 줬다는 거죠.
그런데 말이 이상하죠. 신의 법에 의해서 자유가 주어져 버리면 그 자유는 뭡니까? 자유가 아니고 뭡니까? 어디에 예속 돼버려요? 신의 법이니까 이건 누구 말입니까?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똑같잖아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은 뭐라고? 무슨 법이라고? 영원한 법. 문제는 왜 그게 영원한 법이냐는 거죠. 왜 법으로 나타나느냐 말이죠.
이 법이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듯이 영원법, 그 다음에 영원법이 있고 나머지는 비영원법이고, 비영원법에는 자연법과 실정법으로 나누고 실정법은 인간적인 실정법과 신령한 실정법으로 나누잖아요. 계속 지금 나눠가도 끝가지 뭐는 따라 붙습니까? 계속 법법법법, 법은 계속 따라 붙지요. 마지막에 제일 밑바닥이 뭡니까? 예절법. 다시 말해서 도덕법, 예절법, 재판법, 그 다음에 인간적인 시민법, 국제법, 법법이다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해답은 간단합니다. 선악과 따먹어서 그래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선악과, 선악을 알게 한다는 이 말이 여러분들은 이 말 자체가 모순된다고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이상하다고 생각 안 듭니까? 보세요. 선만 알면 안돼요? 왜 선만 알면 과실을 안 따먹겠어요? 왜 선과 악은 함께 있는 겁니까? 그게 참 이상하잖아요. 선만 있으면 선만 있고 악을 모르면 어때요? 그게 이익 아닙니까? 어때요? 이창호 목사님. 악을 모르고 선만 알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선이 아니래요. 놀랍게도 대비돼요. 악이 없는 선은 선도 개뿔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악이 없는 선은, 선이 아니에요. 그리고 선이 없는 악은, 악이 아니잖아요. 선이 있어야 그게 대비돼서 악이 등장하잖아요.
결국 선악과 속에 뭐가 들어있다? 우주의 도발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표지요. 우주에 하나님께 대드는 세력이 들어있었음을 보여주는 증표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은 알 필요 없다. 알아서는 안 된다. 거기에 가담해서도 안 되고, 그 전쟁에는 누가 처리해야 됩니까? 오직 예수님만 처리해야 될 문제이지, 인간이 그 전쟁에 가담해 버리면, 선악을 선과 악을 악과 선을 그러니까 선만 알면 알 수가 없어요.
선은 반드시 악과 더불어 아는데 선과 악을 더불어 아는 그 순간부터 이미 인간됨을 포기한 겁니다. 인간됨이 포기되고 그게 뭐냐? 하나님에 대해서 공격 표적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악과를 누가 따먹었느냐? 아담이 따먹었는데 그 다음부터 인간은 어떤 규정 속에 들어가느냐? 아담 안.
그러니까 아담 안이니까 아담이 뭘 따먹었다? 선악을 따먹었기 때문에 이 아담 안데 속해 있는 모든 것은 선악에 의해서만 이해가 되고 지정의가 전부다 선악이 시키는 그 체계 아래서 움직이는 지정의에요. 그러니까 감정으로 신이시여, 하나님의 은혜여 하는 것도 전부다 악을 버리고 선을 지향하기 위한 그러한 기도죠. 전도하는 것도,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고, 지식도 될 수 있는 대로 선 쪽으로 가까이 가려는 하나의 몸부림이고 전부다 악과 선, 선과 악, 그 쪼여드는 그 틀 속에서 허덕이고 있어요.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우리가 흔히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들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법을 가지고. 법이 없으면 구원이라는 개념이 성립이 안 되거든요. 예를 들어서 어떤 교인이 와서, 예를 듭니다.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합시다.
어떤 교인이 와서 목사님, 예수 믿고 난 뒤에 몇 가지 고쳤습니다. 뭐 고쳤습니까? 도박, 화투치는 것 손 끊었고, 술 끊었습니다. 그런데 내 친구들은 도박 손대고 있고 술 마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낫지요. 라고 했을 때 두 가지 점에서, 딴 걸 몰라도 두 가지 점에서는 저 사람보다 선하지 않습니까? 라고 했을 때에, 요걸 그림으로 한번 그려 보겠습니다.
율법이 이렇게 있는데 율법의 지향점이 뭐냐 하면,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가지고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한테 온다는 자기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자기와 관련되어 있으니까 아까 그 사람은 몇 가지? 두 가지 선이고, 나머지는 개판이라 해도 두 가지는 낫잖아요. 율법에 의해서 나와 아까 술, 도박 못 끊은 친구보다 자기가 두 가지 점에서 더 낫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잖아요.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그대로 십자가 앞에 서 보세요. 누가 더 의인입니까? 둘 다 죄인이잖아요. 둘 다 죄인 되어 버리는 거예요. 이 사람은 뭘 오해했느냐 하면, 십자가는 지금 방향을 이렇게 틀고 있는데, 십자가는 지금 나한테 이렇게 오고 있다고 이렇게 연관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모질게 맞았잖아요. 예수님, 참, 모질게 맞았다고. 믿음이 뭐냐 하면, 모질게 맞는 주님과 끌어안는 게 믿음이에요. 주님께서 모질게 맞는 이유가 우리가 맞아야 될 죄를 대신 맞았기 때문에 모질게 맞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율법에 서면 주님처럼 모질게 맞아야 돼요. 이것은 너나 예외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질게 맞음으로 말미암아 옛날 아담 안에 있던 모든 죄는 없어지고, 택함에 의해서, 이제는 그리스도, 새사람, 두 번째 아담, 두 번째 아담으로부터 다시 등장하는 거죠.
그럼 이 두 사람이 뭘 오해한 겁니까? 둘 다 율법이라는 뚜껑, 이걸 뚜껑이라 보고, 이것은 하나의 병이라 보고, 둘 다 아담 안이라는 병 속에 있고, 뚜껑은 뭡니까? 율법이라는 뚜껑 안에서 율법은 결국 십자가를 지향하게 돼있는데 십자가 밑에서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가지고 니 잘났니, 내 잘났니. 이렇게 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이해되잖아요.
이것은 이해되면서 성화 이야기하면 거기도 또 동의한다고. 그러니까 앞뒤가 안 맞는. 무슨 나아지는 게 있습니까? 무슨 성화가 있어요? 점차 거룩해 지는 게 어디 있어요? 주님만 그리스도만 거룩한데. 이쪽은 아담은 하나도 거룩한 게 없어요. 이걸 소급해서 그대로 여기에 적용시켜 보자 이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어떤 강의에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이 사람이 낫다는 게 뭐냐 하면, 과거보다 자기가 현재 낫다는 것이죠. 그럼 과거, 현재라는 시간의식이 개입되지요. 그런데 십자가 속에는 과거 어떻든 현재 어떻든 간에 십자가는 시간이 블랙홀처럼 다 빨려 들어갑니다. 시간이고 공간이고 니가 어느 동네 어디서건 다 빨려 들어가요. 다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십자가 안에서는 모든 것이 죄로 등장하고 십자가에서 다시 죄로 등장, 시간, 공간 전부다 등장해서 다시 폭발해 버려요.
무슨 말이냐 하면, 구원 그 이후가 성립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자체가 시간 개념을 없앤 상태에서의 구원이란 이거에요. 십자가 앞에서의 구원이거든요. 십자가는 시간, 공간 개념 없이 십자가가 구원이라면 구원 그 이후란 말이 구원에는 해당이 안돼요. 결국 구원 그 이후란 말을 쓴다는 말은 십자가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법 앞에 서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은 지금. 구원 그 이후가 성립 안 된다는 거예요.
구원 자체가 이후, 이전 하는 자체를 완전히 폭발시킨 거예요. 블랙홀 속에 집어넣어서 완전히 없애 버린 거예요. 없애고 폭발시켜서 도로 튀어나온 게 뭐냐? 시간, 공간 없이 십자가 앞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 이게 구원이잖아요.
그런데 무슨 구원 그 이후가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 그 이후를 이상스럽게 선호하고 좋아하더라 이 말입니다. 그 원인이 뭐냐? 바로 율법이란 뚜껑 아래 밑에서 인간이거든요. 그 법아래 뚜껑이 이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안에는 선악적인 율법이 통일된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법이 통일되니까 토마스 아퀴나스가 처음부터 뭐? 영원한 법, 밑바닥에 무슨 법? 예절법, 시민법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국제법 막 나오는 거예요.
결국 모든 인간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어디에 갇혀 있다? 여전히 법아래 갇혀 있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개신교 목회의 모습이에요. 오늘날 천주교 목회의 모습이에요. 왜? 사람들이 법만이 납득이 가니까. 왜? 율법의 뚜껑 속에 있는 병 안에 들어있으니까. 이게 어떻게 철학이 신학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복음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철학공부가. 그렇게 무관한 게 아니에요. 별 걸 다 뒤졌어요. 공부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이 사람들이 이렇게 글을 어렵게 쓰고 이렇게 심오하게 쓰는 이유가 뭐냐? 이 사람 주장이 이겁니다. 은혜로 구원받고 난 뒤에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아까 이야기했지요. 그 문제에 대해서 성도가 어떻게 구원받는가는 이구동성으로 어느 인간이든 은혜로 구원받지, 세상에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한 적이 없어요. 어느 단체든. 천주교든. 개신교든.
그런데 구원 그 이후에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했지요. 첫째 뭐라고요? 무한은 당겨라. 두 번째, 무한을 소유하고 정착시켜라. 내 무한. 하나님 무한이 아니고 내 무한. 세 번째는 그걸 무한을 발산하라. 누굴 통해서? 예수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나를 통해서 발산하면 이걸 세 가지로 갖출 때 뭐로 본다? 이걸 신자로 본다 이 말이에요.
제가 십자가 이야기 안 하고 처음에 이 이야기할 때 여러분들이 아, 그러네. 하고 혹할 수도 있지요. 여기는 전혀 안 혹하겠지만. 이게 우리가 지금 이 강의시간에서는 안 혹하는데요. 여러분들이 실제로 개인적으로 상담한다든지 어느 모임에 간다든지 가보면, 맞아. 이근호 목사 복음도 맞고. 그건 구원받을 때 활용될 문제고. 구원받고 난 뒤에 성도가 어떻게 사는가? 요건 요게 도움 되겠네. 이렇게 생각될 공산이 크다 이 말입니다.
103페이지 위에서 12번째 줄 보세요. 13번째인가? [주목할 것은 자연법은 인간 이성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보세요. 얼마나 상당히 복음적으로 보입니까? 인간 이성으로 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한이니까 하나님이 주신 건데 인간 이성 안에 어데 있다? 인간 이성 안에 내재되어 있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이렇게 주장하는 동기를 알아야 돼요. 꼭 이렇게 고상하게 이야기 안 해도 일반교인들이 무식한 교인들이 와서 목사님, 하나님 성령이 내 안에 있으니까 이제는 내가 성령대로 하면. 이 말이나 요 말이나 같은 말이에요. 인간 이성 안에 내재 되어 있다는 이 말이 뭐예요? 두 번째 단계에요. 또는 정착 단계 또는 내가 그 무한을 소유한 단계.
그런데 제가 목사가 이렇게 가르쳤다가 했는데 사실 그 말도 약간 어폐가 있어요. 목사가 이렇게 가르친 게 아니고 일반인들이 요렇게 가르쳐 주기를 원해요. 일반교인들이. 그게 이유가 뭐냐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앞에 보면, 인간은 자립심이거든요. 전에 이거 이야기했지요. 이런 이야기 어려워서. 인간은 개별자고 자립심이거든요. 우리 아버지 목사라도 구원 못 받아요. 결국은 내 운명은 누구 손에 달려있다? 내 손에 달린 거예요.
하나님 손에 달린 것 아닙니까? 그거는 기본이고, 하나님 손에 달렸는데, 하나님 것을 구원을 빼내느냐, 마느냐 하는 누구 결단? 내 결단에. 내가 어떻게 교회에서 또 하나님에게 목사에게 어떻게 하기 나름에 내 구원은 내가 가진다는 거죠. 내 소유의 구원을 가진다는 겁니다. 그 내 소유의 구원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 전에 언급했죠. 인간의 존재라 하는 것은 뭐로 규정한다? 자기가 얼마나 많이 소유한 것을 통해서 나라는 것은, 지난주에 이야기했지요. 나는 이렇게 규정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만큼 가졌으니까 아까 이야기한 지식을 많이 확보하면 그만큼 내신등급이 올라가고, 그러면 많은 지식은 뭘 갖는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은혜를 많이 알아서 감정하고 거기서 멈추면 안 되고 어디까지? 교회에 대한 충성과 봉사, 하나님에 대한 의지가 드러나면 이렇게 될 때 나는 아, 구원 받았구나. 라고 확정짓고 싶다는 이 말이에요. 누가? 내가. 목사는 도와 달라 이 말입니다. 이게 무슨 자기 부인입니까? 이게 무슨 자기 부인이에요.
그래서 무조건 저건 아니다. 저건 복음적 아닌데. 이럴 게 아니라 그들 입장에서 따지고 들어가 보면, 따지고 들어가는 게 철학인데. 따지고 들어가 보니까 야, 이 인간들이 선악구조에서, 하여튼 이 벽을 깨든지 해놔야 돼. 다음에 벽 깨는 것, 이야기 해 줄게요. 율법으로 봉인된 이 병 안에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거예요. 인간이란 율법으로 봉인된.
그래서 제일 위에 무슨 법? 영원법부터 제일 밑바닥에 예절법까지 나오는 거예요. 신발 벗을 때 휙 던지지 말고. 신발 휙 던지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안 되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어디에 매여 있다? 법에 매여 있죠. 모든 법의 틀 안에. 여기서 영광 만들고, 여기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난리에요. 바빠요. 여기선 바쁘다고. 이 법 안에 갇혀서.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되는가? 성도는 탈출하는가? 탈출이 안 됩니다. 성도는 탈출이 안 되는데 이렇게 됩니다. 탈출이 안 되는데 어떻게 소위 구원이란 구출이란 말이 성립되느냐 하면, 그래 상당히 재미있는 게, 십자가가 이 안에 들어가요. 십자가가 이 안에 들어가 보니까 율법으로, 아까 율법은 뭐라 그랬어요? 선악이죠. 하여튼 법을 지키면 선이고, 안 지키면 악이니까. 율법이 여기 있는데 모세언약도 있고 다 있어요. 선악에 관해서 십자가가 들어와 보니까 선악관점에서 이미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라. 이게 해답이에요.
그러니까 살았다 해도 죽은 자에요.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에요. 십자가가 이 안에서 우리 보고 쿡 쑤시면서 죽은 자라고 호명을 불러요. 죽은 자라고 이야기해요. 요게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는데, 내가 십자가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나로 하여 죽은 자가 되고 나는 세상으로 하여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죽은 자로서 여기에 머물러 있어요.
그런데 이 안에 십자가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산 자가 있어요. 죽었는데 산 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이 안에는 뭐가 통용되는 게 아니고? 율법이 통용되는 게 아니고, 율법이라는 것은 율법과 신랑, 신부 맺는 게 아니고 이건 로마서 7장에 나오죠. 이제는 율법과 신랑, 신부 맺는 게 아니고 예수님과 결혼했죠. 예수님과 결혼했기 때문에 여기는 율법의 관계가 아니고 용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준다는 용서에 의해서 산 자가 되지요. 그러니까 이 율법 안에 같이 들어와 있으면서도 우리는 용서란 의미에서 이 선악을 성령의 용서에 의해서 날마다 극복이 되가는 거죠. 극복되는 식으로 가는 겁니다.
이거 다시 해 봅시다. 야, 오늘 쿠자누스까지 못 하겠네. 우리가 월요 모임한 것, 한번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누구나 경험이 다양하잖아요. 누구나 태어난 환경이 다르잖아요. 경험이 다르죠. 경험이 다르면 경험에서 뭘 하냐? 의미를 끄집어내요. 자기 경험한 걸, 이걸 경험을 손성식 목사는 뭐라고 하냐면, 이걸 우발성이라고.
우발적으로 당한 경험에 의해서, 예를 들어서 멀쩡한데 나가다가 교통사고 당했어요. 발이 잘렸어요. 발 두 개 다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전까지 장애자들이 말이야. 하면서 장애자를 비웃던 지가 막상 우발적으로 장애자 돼 보니까 비로소 장애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걸 비로소 알지요. 자기한테 의미가 돼요. 그전까지는 두 다리 없는 장애자가 자기한테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 장애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있어도 우리는 뭐기 때문에? 개별자기 때문에 나의 경험이 아니면 나의 의미가 되질 못해요.
금강산이 아무리 찬란해도 내가 눈으로 안 봤으면 아름다운 게 아니에요. 상상하는 의미거든요. 의미가 되면 이거는 기억 속에 들어갑니다. 의미 된 것은 기억에 꽂혀요. 기억이 되면 거기에는 시간 개념에 의해서 나의 역사가 만들어져요. 나의 인생관입니다. 기억을 한 것이 의미가 되고 의미한 것이 기억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 기억합니까? 아니요. 다 기억 못해요. 그런데 어떤 건 기억합니까? 아홉 살 때 엄마한테 뒈지게 맞은 것, 열다섯 살 때 자기 반 60명 중에서 60등 한 것. 이런 것 기억나잖아요. 충격적인 것. 그게 기억나면서 그걸 추려서 뭘 만드느냐 하면, 자기 역사를 만들어요. 나는 과거는 이랬고 현재는 이렇다. 그러면 미래는, 과거는 이랬고 현재는 이렇다 선 아닙니까?
미래는 뭡니까? 점선이죠. 과거는 이랬고 현재는 이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렇게 될 것이다. 어떤 보상을 기대하겠지요. 그 보상을 기대하는 역사가 만들어지고 이 역사가 미래의 신과 담판에 들어갑니다. 흥정에 들어갑니다. 내가 지난주에 교회 나왔기 때문에 이번 주 복 주소. 지난주 교회 나왔다는 것은 교회 나온 경험을 했죠. 교회 나온 경험했잖아요. 자기가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뭡니까?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이지요. 아, 내가 교회에 나온 건 중요한 기적이야. 그걸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기억에 남지요. 기억에 남으니까 자기 역사창고 속에 집어넣어 버리지요. 집어넣고 이랬으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이여, 미래여, 내가 쓸 수 있는 그걸 달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 역사성이 십자가 앞에서 전부다 이 경험 자체가 우발적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런 인생관 보니까 어릴 때부터 술 처먹고, 담배 피우는 저 놈은, 내 인생관을 보니까 저건 인간도 아니고 저건 말종이고 지옥 가야 돼. 라고 여겼던 이 모든 것이 십자가 앞에선 동등하게 전부다 뭐가 돼요? 죄인이 되고, 무의미, 의미 없음이 되죠. 그런데 이런 의미 없음을 믿는 자에게는 십자가로부터 뭐가 들어옵니까? 용서가 돼요. 이 전체가 죄가 되고, 이 전체를 용서해 줘 버리죠. 용서해 준다고요.
그러니까 용서한다는 말은 훌륭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고 백날 경험해도, 예를 들어서 나는 이번에 주왕산 기도원에 기도하겠다. 기도하겠다고 갔는데 가다가 차 빵구났어요. 우발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기도 못했지요. 그런데 기도를 했는데 2시간 잡았는데 10시간했다. 이것도 우발적 경험이잖아요. 다른 사람은 경험을 () 이걸 의미 삼아서 이걸 기억에 담아서 이건 뭡니까? 역시 나는 믿음이 좋아. 또 이런 우발적인 짓들이 나오는 거예요. 이것 자체도 뭐가 된다? 죄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게 죄라고 아는 것은 주님의 용서하심이 다가올 때 이걸 알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런 경험, 의미할 때 이 의미 만드는데 기억하니까 전부다 하나하나 개입된 게 뭐냐 하면, 선악구조, 법이에요. 법. 특히 여기 법이 개입되는데 뭐냐 하면, 나쁜 유산 다 없애야 돼요. 나쁜 의미는 다 없애요. 무슨 의미만? 신에게 공헌한 의미만 다 집어넣어서 그래서 괜찮은 인간으로 만들어버려요. 이게 여기에 인간의 선악적인 인간의 사유가 여기 아주 작동해요. 그것은 아주 타고났어. 애들,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 관계없이 이거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타고난 거예요.
길에서 돈을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돈을 천만 원 주웠는데 자기는 수표 10장 십억하고 현금 천만 원 했는데 파출소에 수표 10억 갖다 주고 천만 원 떼먹었다. 당신 왜 천만 원 그렇게 도둑질 했습니까? 왜 안 갖다 줍니까? 그래도 10억이라는 수표 갖다 준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행동하면서 무슨 시스템이 작용한다고 밑에는? 선악이 항상 작용하면서 하는 거예요. 그게 제가 이번에 자기변명, 자기사수, 자기의. 철저하게 항상 자기 방어에 나서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 앞에서 갈라디아서 3장에 십자가 눈앞에 보이는 걸 누가 깨드냐? 사도 바울이 십자가만 안 게 아니고 딴 거 다 알았지만 십자가가 모든 게 마지막이에요. 모든 시간, 공간을 부셔버리는 게 십자가입니다. 모든 걸 녹아버려요. 들어가면 죄로 다 녹여져 나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앞에서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러한 것이 성령에 의해서 되풀이 되도록 아까 율법으로 봉인된 이 병 안에서 주께서 들어가서 이런 일들을 한 거예요. 그걸 가지고 요한복음 1장 16절에 보면 뭡니까? 율법은 모세로부터 왔지만 은혜는 독생자로부터 왔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게 뭐를 겨냥해서 뭐를 배경으로 한 겁니까? 율법에 갇혀 있음을 배경으로 할 때 비로소 뭐다? 은혜 위에 은혜다 이 말은 병 속에 누가 들어왔다? 내가 들어왔다. 이 법 속에 은혜가 들어왔다. 법 속에 은혜가 들어온 거예요. 완전히 우리가 알고 있던 사고방식하고는 도대체 천지차이에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라는 거예요. 이게 아무나 들리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이게 전부다 법 투성이기 때문에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 안 하는 것도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신다는 하나님 법칙에 의해서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뜻은 뭐냐 하면,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만 있고, 나머지는 가라는 거예요. 가는 사람 중에서 작정된 사람은 오라 부르고, 아무리 와도 니는 아닌데 자꾸 와서 덜렁 거리노. 가거라. 니는. 여기 있지 말고. 라고 내 보내지요. 추방성을 갖고 있어요. 십자가는 추방성을 갖고 있어요. 좇아냄을 갖고 있어요.
내 집을 채워라. 하는 것도 반드시 그전에 뭐가 있었습니까? 내 집을 채워라. 라는 것도 다 나가라. 다 나가라가 성립되기 때문에 내 집을 채워라가 있어요. 다 나가라. 하나님의 잔치를 원치 않는 자는 너희들 다 나가라. 뭐, 밭을 샀느니, 뭐, 소를 샀느니, 장가갔느니, 가, 가, 가. 다 나가라. 내 집을 채워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추방이 없이는 내 집을 채워라가 성립이 안 되지요. 반드시 추방됨을 병행해야 되죠.
또 추방될 게 뭐냐?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그 법이라는 게 추방돼야 돼요. 법이란 게 추방돼야 돼요. 법 때문에 선과 악이 생겼다는 거지요. 뭐만 없으면? 법만 없으면 선과 악도 사라진다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애초부터 왜 따먹었느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법은 법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좋은 것이라고 하면 안돼요. 그냥 사랑은 사랑이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좋고 나쁘고는 저쪽의 동네고. 사랑은 그냥 건져주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좋은 사랑 좋은 그냥 사랑이에요. 사랑으로 건지지 좋은 사랑이 건지는 게 아닙니다. 사랑을 받으면서 좋다, 나쁘다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냥 덮쳐서 구원된 거예요.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법 체제에 대해서 시비를 건 사람이 스코투스입니다. 진도 나가봅시다.
질문 : 목사님, 선악과를 법으로 규정하는 걸 찬성하시는 겁니까?
-->선악 자체는 법이 아니고 선악을 공격하기 위한 법이지요.
질문 : 아까 선악을 법으로 표현하시지 않았습니까?
-->선이 없으면 악이 없고, 악이 없으면 선이 없다.
질문 : 생명의 성령의 법 하기 전에 표현하셨죠. 목사님 견해입니까, 안 그러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입니까?
-->제 견해지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걸 알고 있어요. 아까 제가 이야기하듯이 이게 구원은 은혜로 구원받고, 제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이런 이야기하면 그건 다 알고, 구원받은 자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하겠지요. 그 사람들은.
그러니까 제가 이런 강의를 하면서 항상 뭐가 있다? 존재성. 존재성을 밑에 깔고 하는 거예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 이 문제가 있다고. 존재성 자체가 죽느냐, 사느냐 존재성이기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 이 문제에 그들은 집착하는 거예요. 저는 존재성 자체를 공격하는 거예요. 존재성을 두고 죽느냐, 사느냐를 따져 보면 결국 여기는 다시 선악체제가 동원될 수밖에 없어요. 율법이 동원될 수밖에 없어요. 율법이 죽으면 숨 끊어진 게 아니고 저주입니다. 지옥입니다.
질문 : 선악의 법에서 성령의 생명의 법이 선악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그 존재성 자체를 부정하는 쪽으로 살아가야 되는 그런 의문이 아닙니까?
-->존재성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고 존재성이라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거예요. 선악을 아는 아담 안에서 만들어 낸 것이지, 만들어 낸 그 자체를 부정해야 되지요.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죽으실 때 영혼이 떠나신다 했거든요. 영혼이 떠나신다 하는 말이, 영혼이란 말이 어디서 나왔냐 하면, 인간들이 만들어 낸 거예요. 그 만들어 낸 것을 부정하면 언어가 안 되지요. 언어란 모든 은유기 때문에. 언어가 그건 표현할 길이 없잖아요.
언어 자체를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고 거기에 의미를 두지 말자는 거지요.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된다 말이에요. 이 말은 인간의 존재에서 십자가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존재를 기본으로 해서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그 다음에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나의 규명을 하자. 출발점이 존재다 이 말이죠. 존재에 대해서 스코투스가 지금 반발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 질문 때문에 그 다음 못하고 있는데.
스코투스가 토마스의 존재론에 대해서 반박하고 나서는 거예요. 존재 자체에 대해서. 위에 것을 동의 안하는 게 아니고 동의하는데 그 기본이 되는 존재에 대해서 지금 스코투스가 107페이지부터 쫘~악 하는데. 거기 어려운 말이 106페이지 위에서 일곱 번째 줄에 나와요. 존재란 것은 보어다. 이런 어려운 말이 나와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쉽게 설명해 놨습니다. 위에서 열 번째 줄에.
['물이 얼음이 되고'나 혹은 '그는 천재가 아니라'에서, '얼음이'나 '천재가'라는 단어는 '된다', '아니다'라는 서술어의 보어가 된다.] 이게 둔스 스코투스의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과 토마스 아퀴나스 주장의 차이점은 뭐고, 도대체 이렇게 주장하는 의도가 뭐냐? 무슨 논쟁을 벌이고 있느냐?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되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부터 먼저 할게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은 신에 대해서 모른다. 다만 자연물을 가지고 그걸 수집해 자연물을 관찰하면서 어렴풋이 신에 대해서 안다. 라고 하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에요. 거기에 대해서 둔스 스코투스는, 모르기는 뭘 몰라. 알 수 있다. 어째서? 자연물을 관찰해서 아는 게 아니고, 뭔가 있다. 존재가 있다. 존재 그 자체에서 이미 신의 존재가 있다. 하는 것도 이 존재성에 포함된다는 겁니다. 스코투스가.
그러면 제 이야기는 107페이지 위에서 보면 나옵니다. 위에서 4번째 줄에.
[토마스가 제시한 증명은 형이상학적이기보다는, '물리적', 즉 필연적 존재인 하나님을 우연적 존재로부터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우연적인 존재. 우연적인 존재가 보통 사물 아닙니까? 해바라기, 인간, 개구리, 토끼, 이런 거죠. 있다, 없다 이런 것.
따라서 이런 논쟁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스코투스가 반발하는 거예요.
[우연적인 '존재' 개념으로부터 필연적인 '존재' 개념으로 비약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위험하다.]
그래서 스코투스는, 밑에 내려가서.
[스코투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형이상학에 근거해서, 즉 존재 자체로부터 증명해 간다. 이 존재는 항상 단일의미적인 보어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존재는 피조물의 보어일 때나 하나님의 보어일 때에도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까 피조물이나 하나님이나 있음, 있다 또는 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서 이미 신과 인간은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왜 둔스 스코투스가 이런 조로 주장하느냐 하면, 현재 이 사물이, 우연적으로 보는 이 사물을 우연적으로 보지 말고 필연적으로 보자 이 말이에요. 필연적으로 보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이 시시한 것들 치우고 진짜 하나님 바라보자. 라고 말해선 안 되고, 이 시시한 것들 속에 하나님이 들어있는데 왜 그게 시시한 것이 아니고 그걸 연구해야지. 신을 찾기 위한 연구가 아니라 그 자체의 자립적인 가치를 위해서 연구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점점 더 과학적인 사고가 발달하게 돼요. 그걸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뒤에 나오는 윌리암 오캄이란 사람이에요.
여기 108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윌리암 오캄이 나와요. 108페이지 제 밑부분 보세요. [스코투스는 전적으로 어거스틴적인 전통에 입각해서 이성보다 의지의 우위성을 고수했다.]
여러분, 의지가 어디서 나옵니까? 개별자의 개별적인 산물에서 의지가 나와요. 의지가 나온다는 말은 곧 뭘 남긴다? 행동을 남긴다. 따라서 행동 하나하나에 거기에 가치를 둬야지, 이것은 다 시시한 것이고 신의 의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거기에 예속됐다. 이렇게 보지 말자는 거지요. 그래서 의지가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둔스 스코투스를 의지주의라고 합니다. 그 의지주의를 더 확실하게 밀어 붙인 사람이 윌리암 오캄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예 추상적인 것을 날려 버렸어요. 신이라 하는 것은 모른다. 신이라는 것은 존재를 안 한다 하다가 이제는 신을 모른다. 모르는 것을 자꾸 이야기하지 마라. 우리가 아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뿐이다. 신을 안 믿는다가 아니라 신을 아는 것은 오직 신앙으로 알지 이성으로는 모른다. 이게 윌리암 오캄의 유명한 주장입니다.
109페이지 제일 밑에.
[하나님의 존재와 영원의 불멸성은 모두 뭣에 의해서 안다? 신앙으로 안다.] 그러니까 신앙 따로, 이성 따로 주장한 거예요. 이것은 뭐로부터 독립입니까? 이것은 바로 교회나 신부로부터 성직자로부터 독립이죠.
그러니까 수학교수가 앉아 있으면 그래, 목사야, 신학은 네가 전공이니까 너한테 배우마. 하지만 뭣에 대해선 손대지 마라? 수학에 대해선 너 까불지 마라. 또 만약에 자갈치 시장 반디 장사하는 아줌마 있다면, 목사님, 나 천당 보내준 이야기하소. 하지만 나 반디 장사 얼마 남고, 이런 것은 나한테 이야기하지 마소. 이거는 내 일이다. 이렇게 되겠지요. 왜? 개별자니까. 철저히 개별자의 가치를 의미를 인정해 주죠.
개별자의 독자적인 의미를 정당화 해주는 것은 둔스 스코투스. 그걸 확실히 더 밀어 붙인 것은 윌리암 오캄.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계시 사물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신에 예속되어 있다. 그래서 신이 더 중요하다. 신의 법이 더 중요하다 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 아시겠죠?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칼빈을 생각을 해보세요. 칼빈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칼빈은, 뭐,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하는 말처럼, 시작은 윌리암 오캄에서 시작해서 나중에 뭐가 됩니까? 창대하기는 신의 예정론까지 창대했으니까 칼빈은 그러면 윌리암 오캄에서 시작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왜냐하면 모든 일반인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소명을 주장했잖아요. 그죠? 사명을 주장했잖아요. 그렇다면 칼빈은 윌리암 오캄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나갔다? 신의 영혼까지 나갔다고 우길 만 하죠. 자칭 우길 만 하지요.
그런데 칼빈의 약점은 뭡니까? 개별적으로 시작한 그것이 신의 일이라고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까 왜 그러냐 하면, 이해되는지 모르겠다. 이제 내 마음대로 한다. 소유된 무한을 방출하잖아요. 방출해서 이걸 칼빈은 뭡니까? 신의 영광.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 아닙니까? 그런데 이 무한은 어디서 무한입니까? 내가 끌어당겼잖아요. 왜냐하면 처음의 시작은 윌리암 오캄에서 시작되니까. 윌리암 오캄이 뭐라고요? 신은 신이고, 나는 나다. 개별자다 말이죠. 칼빈이 개인의 행동을 중요시 여겼잖아요. 그러니 윌리암 오캄 아닙니까? 신은 신이고, 나는 난데, 나중에는 뭘 한다? 모든 영역을 통해서 모든 방면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이건 뭐예요? 그러면 결국 밑에서부터 위로 쳐 올라가는 신학이죠. 한데 연결됩니까? 연결되겠어요? 연결됩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게 아니에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위에서부터 내려오죠. 토마스 아퀴나스는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거예요. 칼빈은 윌리암 오캄의 영향을 뭡니까? 밑에서부터 쳐 올라가는 거예요. 어느 쪽이, 내가 보기에는 둘 다 틀렸어요. 어느 쪽이 논리적으로 합치되겠어요? 논리적으로 고리가 연결되겠어요? 역시 토마스가 낫겠지요. 왜냐하면 신과 연결하려면 아무리 하나님 영광이라고 해도 그 영광과 신과 하는 일과 모순되고 엉켰을 때 해결 점이 없습니다. 그 해결점이 없다는 것이 다음 시간에 나오는 종교 신학개혁에서 할 건데.
예를 들겠어요.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 세상에는 옳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닌 중립적인 일이 있다고. 이게 뭐냐 하면,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은 일이 늘 그 자리에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은 상태가 남아 있습니까? 그것도 누구한테나 보편적으로 누구한테나 그리합니까? 아니지요.
어떤 사람이 와서 이거 옳고 그른 것도 아니네. 나온다면 이건 옳은 거네. 어떤 사람은 이건 나쁜 거네. 개별적인 경험에 의해서 우발적인 경험에 의해서 사람들은 보는 관점이 다 다르다 말이죠. 제각기 제각기 영광 돌리겠다고 난리라. 그러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서 받겠습니까? 자기한테는 영광인데 이게 일관성이 없어요.
그래서 목사한테 대드는 교인이나, 그 교인 꾸짖는 목사나 전부다 영광이야. 둘 다. 둘 다 다 영광이야. 지금. 둘 다 영광 돌린다고 바빠. 개신교나 천주교나 지금 다 바빠요. 영광 돌린다고 되게 분주해.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럴 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와서 어이, 까불지 마. 모든 것은 법이 결정한다. 법이 뭡니까? 모세법, 시민법. 그 법이 결정한다. 하나님의 법, 법이 결정한다. 이렇게 나오죠. 모든 것은 법 안에 있다. 법으로 따지자. 이렇게 되지요.
그렇게 법으로 따진 사람이 누구냐? 바리새인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쳤던 사람. 그때 예수님께서 법 자체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게 십자가 아닙니까? 법 자체를 끝까지 밀고 나갔어요. 그들에게 그들의 책망 받을만한 글을 썼습니다. 쓰니까 그들이 자기가 잡은 돌을 사실은 누굴 던져야 돼요? 저 여자를 던지기 전에 자기가 그 돌 가지고 자기가 얻어맞아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다 도망가 버렸지요. 여인아, 너를 치던 자가 정죄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없나이다. 내가 널 용서해 줄게. 이거는 법의 세계가 아닙니다. 정말 낯선 세계에요. 예상치도 못한 세계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가 도저히 예상치도 못한 세계에요.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문제이지.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을까요? 이렇게 구원받을까요? 개인적으로 구원받을 문제가 되면 이렇게 돼요. 존재 문제에요. 존재 문제가 돼요. 내 존재를 어떻게 하면 연속할 수 있습니까? 이거는 아까 이야기가, 무한을 신으세요. 무한을 가지세요. 무한을 방출하세요. 맨 존재 문제로 하면 이리고 되돌아가요. 하나님의 형상을 얻으세요. 그걸 가지세요.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 주세요. 또또 되돌아가요.
결국 그 모든 논의가 뭐냐 하면, 나 어떻게 구원받을까? 또 나야. 또 나야.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는데. 또 나야. 그 나는 율법의 병 안에 들어있는 나에요. 되도 않는 나에요. 그렇게 구원받을 입장이 못 되고 죽어야 될 입장인데 죽을 생각을 안 하고 나, 어떻게 구원받지요? 정답은 이겁니다. 니 구원해 주고, 안 해 주고는 주님 소관이지 니 소관이 아니니까 주께서 불러주면 구원받고, 안 그러면 끝나는 거지. 간음했다고 다 용서받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간음했다고 용서받는 게 아니고 간음한 자 중에서 용서받는 자가 생겼다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예수님의 구원은 법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 여기에 110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한번 봅시다. 윌리암 오캄이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분 한번 보시고 제가 여러분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위에서 12번째 줄에.
[하나님께서 의지하셨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선이 된다. 예컨대 불륜은 악이지만, 그것이 악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불륜을 명령했다고 한다면 불륜조차 칭찬받을 만한 선이 되는 것이다.] 동의하십니까?
[단적으로 말한다면, 심지어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여 하나님을 미워하게 할 수도 있죠.] 그때 미워할 때 선이 되는 거죠. 안 미워하면 안돼요. 미워해야 돼요.
[오컴은 도덕적 의무를 약화시키거나 도덕률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자유와 전능을 들어 높이고 하나님의 전능에 의한 논리적인 결과라고 생각한 것을 끄집어내려는데 마음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것은 오직 아까 이야기한 오캄은 믿음으로만 이걸 안다 이 말이에요. 오캄의 말은 뭐냐? 믿는 자라면 내 말에 동의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상당히 충격적이지요. 지금 이런 이야기를 어느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한 적 있습니까? 봤습니까? 아마 불륜한 사람들은 좋아서 난리날 거예요.
이 오캄에 문제점이 있어요. 그 문제점을 찾아내야 됩니다. 오캄의 문제점이 뭡니까? 그것은 바로 신의 의지가 인간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한, 이게 잘못이에요. 신이 불륜을 명령했다? 한 적 없습니다. 그러면 뭘 명령하는가? 신은, 애, 너는 살아있지? 훌륭해. 라고 명령하는 게 아니고 신의 명령은 십자가로 통한다는 이야기를 십자가를 빼버렸어요. 제일 중요한 걸 빼먹었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모든 사람은 죽은 자다. 이걸 모르는 거예요. 이 사람은. 지금 뭔가 사람이 살아 있어야 명령을 하지, 죽은 놈 보고 무슨 명령을 합니까?
그리고 그걸 죽이기 위해서 이미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잖아요.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 가지고 죽일 수 있는데 거기다가 불륜을 행하라 말할 첨가할 필요 없잖아요. 칼 자기고 죽일 수 잇는데 거기다 확인사살 20발 왜 쏩니까? 그럴 필요 없잖아요.
그래 지금, 그러니까 여러분 보세요. 십자가 빼 놓고 이야기해 버리면, 하나님 우리보고 십자가 통해서 이야기하는데 십자가 빼 놓고 이야기해버리니까 결국 뭐가 되냐 하면, 명령 받는 나도 뭔가 살아있어야 명령 받을 수 있지, 하나님이 나한테 명령할 재미를 누리려면 나도 살려내 놔야 명령한 재미를 가질 게 아닌가? 꼭 자기 삶을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 삶을 긍정하는 쪽으로 항상 인간은 그걸 자기한테 해석을 돌려버립니다.
목회가 제일 쉬운 방법은 이거에요.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목회가 어려운 방법은 복음 전하고 그 대가를 바라는 거예요. 복음 전하고 결과를 안 보면 쉬운데 꼭 복음 전하고 결과를 얻으면 결과를 얻는 당신은 뭡니까? 결국 결과를 얻을 때까지 나는 살아있어야 돼. 나는 죽으면 안 되는 기라. 복음 전하고 결과가 좋을 때까지 나는 살아있어야 돼. 나 지금 하나님 나 죽이면 나 섭섭해. 이렇게 돼버려요. 지금 죽어도 할 말 없는 인간을 복음을 위해서 쓰임 받은 것뿐인데 마치 내가 복음을 증거 하는 주인공, 나 없이는 안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그게 자기 존재가 자기를 괴롭게 만들었어요. 자기 존재성이 자기를 괴롭게 만들었어요.
목사 사모들 쉬우려고 하면 쉽습니다. 뭐냐 하면, 되는 데로 그냥 사는 데로 살자하면 쉬운데, 남편의 훌륭함을 눈으로 확인해 보겠다. 확인을 왜 하는데? 남편의 훌륭함을 지가 확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