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세권의 책 독후감(이광호 목사 저)2
[일반] 세권의 책 독후감(이광호 목사 저)2
이름 : 이근호(IP:)
그들의 노골성을 다음과 같이 까발리면 이렇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반가워한다.
그런데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의아해 한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버림을 외면해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가 버려지지 않는
그런 십자가이기를 원하면서 바울 서신의 모든 십자가와 복음에 관련된 구절을 해석한다.
그러니까 어떻게되었든 인간 존재의 가치에 ‘버림의 정신’이 포함되지 않고 빠지는 양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의도를 달리 묘사하면 이렇다.
즉 "예수야, 이제 내 앞에서 비켜서 한켠에 비켜 서 있어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 실천하지 못할 때 다시 부르마
네 사랑과 네 뜻을 내가 이제 알았으니 이제 직접 내가 하나님에게 나서겠다.
앞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답게, 성도답게 반듯하게 살아볼련다.
그러니 예수야.
제발 이제 십자가 가지고 그만 얼쩡거려라. 그것은 내가 불신자에서 신자 될 때 한번 적용했으면
그만이 아니냐. 이제 나도 너처럼 새사람되었단다.
하나님이 이제는 예수라는 너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새사람된 나)를 기다리고 고대한다.
그러니 이제 그만 십자가 이야기는 내 앞에서 사라져주었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건전한 내가 계속 존속해야지만 성경준수하기, 하나님 섬기기, 하나님 찬양하기가 성사된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복음의 능력이나 내용이란
새 사람되었다는 자신들의 지혜로 채워진다. 그리고 그들끼리 뭉쳐서 소위 ‘교회’라는 결사체를 꾸려가려고
한다.
그런데 성경대로 하면 진리란 예수님이시기에, 그 분이 살아있는 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의 능력도
계속 살아있다.
왜냐하면 ‘버림’의 능력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십자가란 마치 기계가 고장할 때 수리용으로 집어넣다 빼는 작동기계가 아니다.
도리어 십자가에서 쉬지 않고 계속 나오는 능력이란, 인간이고 뭐고 그들이 신봉하는 소위 삼위일체
신까지 지속적으로 박살내어버리는 그런 능력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십자가만 남는다.
왜냐하면 결국 그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수립된 천국과 지옥만 최종 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란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된 한시적 상황이다.
2. [구약 신학의 구속사적의 이해] 도서출판 칼뱅(서울:2006)
p59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유기하신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유기한 자들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는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라고 되어 있다.
즉 저자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에게는 ‘의도적’으로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지옥을 보내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의도적일 수’는 없고 적극적 관여가 안된다는 것이다. 왜 이런 논리를 전개해느냐 하면 그 이유는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란다.
즉 소위 성도라는 자들이 이번에서 하나님 구출작전에 나서는 것이다. 하나님을 ‘죄의 주동자’로 몰리는 것에 대해서 우리 성도들이 변호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똑같은 ‘죄’ 개념을 갖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자신들이 극복하지 못하니 하나님도 자기네들처럼 빠져나올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6:8에 보면, 성령님은 도리어 인간들의 그 잘못된 죄관을 공박하는 식으로 활동한다고 되어 있다. 그 근거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되어 있다.
즉 십자가 사건이 빠진 예수님은 곧 인간들이 예상한 메시야에 해당된다. “설마 하나님을 말씀을 존중하는 우리보고 뭐라하시겠느냐”하는 식에 기준에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기준점이 수립되는데, 이러한 아이디어는 비단 유대인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보편성을 말해준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오로지 예수님이 행할 수 있고, 뿐만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은 모든 이름으로 그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리기 위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즉 “나도 예수님처럼 압니다”라고 할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없게 만드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빌 2:9-11)
하나님의 영광이란 오직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양상에서만 생겨난다. 그런데 신체적인 무릎 꿇기가 아닌 이유는 그것은 ‘신체’라는 존재성의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의 ‘무릎 꿇기’란 존재하고 있는 신체에게 요구하는 바가 아니라 영적으로 벌리는 ‘사건’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죄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열심히 ‘지옥만들기’에 나서시는 그 활동을 마치 “예수님 활동을 그렇게 하시면 예수님께서 지옥만들기 위해 강제로 죄를 만드는 꼴이 되니 주의를 요합니다.”라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에 관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바로 그 건방진 태도가 곧 ‘죄’이다.
유대인들이 평소에 자신의 죄인이 아니라고 우겼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천하의 의인인줄 알았고, 부자 청년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여겼지만 요한복음 15:22의 말씀처럼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인간의 건전한 이성과 건전한 의지와 건전한 감정(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잠재된 하나님의 형상에서 회복된 그리스도의 형상’ p53) 자체가 곧 예수님을 죽이고 미워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기 존재를 기초로해서 거기에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성을 부가하여 웅장한 신학 체계를 구축하고 보다 완벽한 기하기 위한 신학적인 반성과 발전을 도모해 왔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누구보다도 도사 중에 도사, 천재 중의 천재가 사도 바울이었으며 그는 철통같이 믿은 바는, 하나님 있고, 성경이 있고 창세기 3;15의 약속대로 메시야가 오신다면 그것으로 부족한 점이 결코 없기에,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버림받는 나사렛 청년이 필요했겠느냐 하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충절을 극단으로 더욱 더 밀어붙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살해하고 체포했다. 그 천재라도 십자가의 ‘메시야 버려짐’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인간의 신학으로 알 수 없는 이런 죄악된 점을 오로지 십자가 사건으로만 근거해서 알려주기 위해 성령님을 활동하시는 것이다.
3. [에세이 산상수훈 ] 칼빈아카데미(서울:2005)
p221에 보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5절)
주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탓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본문에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조그만 티도 제거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빼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각이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앞서 말한 권징 사역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뺄 수 있는 목사가 누군가? 목사 개인인가 아니면 소위 당회라고 하는 장로 집단체인가? 그리고 그들의 눈의 티는 누가 빼는가?
그리고 일반 교인들에게는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티가 빠지지 않고 소위 교회 중직들의 잔소리와 권징을 들어야지만 눈에 티가 빠지는가?
즉 일반 교인들은 바로 성령에 의해서 티가 빠지지 않고 소위 교회 고위층이란 단계를 거쳐야만 눈에서 티가 빠지도록 우리 주님께서 조직틀을 확정지어놓으셨는가?
목사 장로의 눈의 티는 하나님이 관리하고 일반 교인들은 그 목사의 관리의 관리를 받도록 그렇게 법적으로 명시해 있는가? 과연 하나님께서 바로 교인들의 눈의 티를 빼는 것이 아니라 그 작업을 하시 전에 먼저 당회라는 것을 소집해서 그들이 훈계에 의해 눈의 티가 빠지도록 하시는가?
저자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교회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십자가 피의 활동의 결과와 열매로 보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히기 위한 중간 단계로 인간을 동업자 자격으로 직분을 주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소위 거듭난 자들의 은사 받은 솜씨를 어딘가를 써먹기 위해서 주님께서 은사를 주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은사란, 은사를 통해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주신 은사이다. 즉 “제 능력으로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기 위한 은사이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사도행전 3:11-12)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0-11)
즉 주님으로부터 권징을 받지 않는 성도는 아예 성도가 아닌 것이다.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 일서 2:27)
교회 내에서 참된 치리와 권징이란 항상 결과적인 고백으로만 등장되는 것이 성령님의 사역이다.
즉
“우리가 치리하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친히 치리하셔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하는 그런 고백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딤전 1:19-20)
사실 누구나 이렇게 치리를 받을 수 밖에(사단에게 물려 지옥갈 수밖에 ) 없는 존재들인데 오로지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롬 8:34/히 7:25) 버티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결 론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말 속에는, 인간들이 자기 구원에 대해서 그 어떤 개입도 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것은 ‘안된다’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다 이루었다’라는 점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성도에게 있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정말이지 빈말이 아니라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인간의 행함 속에서 여전히 그 어떤 ‘미흡함’에 메우려는 요소가 어떤 식으로 스며나오고 있느냐를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가짜로 거듭남을 내세우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여전히 고수하게 된다.
“정말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면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신의 완벽한 진리라는 뜻일진데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나는 여전히 내가 보기에도 밉고 부족하고 미흡하다. 따라서 비록 예수님은 ‘다 이루셨다’고 위로의 말씀을 주셨지만 나는 그럴수록 겸손하고 정신 바짝차리고 성령님의 도움심으로 날마다 증진 또 증진해서 나에게서 나오는 미흡함을 개선, 보완해서 날로 훌륭한 인격자,(즉 그리스도의 새사람, 새형상을 본받는 것) 나가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다. 성경 말씀은 폼으로 있는 게 아니고 또한 비록 율법은 끝났지만 율법의 의미는 남아 있으니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고 [예수님 생애 마지막 7일 p132]- 거룩한 주일도 성수하고 [예수님 생애 마지막 7일 p283] -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달성하면 (구약 성도들이 성령 못받아서 못한 것)비로소 하나님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믿게 된다.
그러니까 가짜 성도는 늘 미흡함에 시달린다. 이것은 시간 의식과 역사 의식의 틀 위에서 성경을 해석한 유대교의 시작의 연속성 상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성도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나는 미흡하고 날마다 죄를 짓는데 왜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까? 아아, 내가 버티고 있는 이 육체와 세상 전체가 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흙으로 되돌아갈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에 그 품고 있는 죄악성이 날마다 더욱 풍성하게 뿜어져나오기 때문이구나. 즉 주님께서는 오로지 십자가 중심으로만 일하시는 이유는,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 살고자한다든지 구원받고자 하는 그런 의지 밑바탕에 이미 악마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음을 ‘나’라는 인간을 통해 들추어내어 구원받는 자로 하여금 날마다 주님의 이름 앞에 자기 이름을 부정하기 위한 조치였구나, 그리고 평생 이 상태로 가겠구나”라는 고백이다.
바라기는 저자가 근원적으로 십자가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바란다. 거기에서 시간조차 박살내버리고 오로지 시간을 초월한 십자가의 묵시적 능력을 마지막 재림 이전에 미리 맛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