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광주 강의(06. 4. 21) 14-1
Re..광주 강의(06. 4. 21) 14-1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06. 4. 21) 14-1
오늘은 고린도후서 4장부터 해봅시다.
고린도후서 3장이든 4장이든 이 성경이 문자가 아니고 영으로 기록했다고 했지요. 문자는 안 움직이고 그냥 박혀 있지만 영은 자유롭게 활동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깨닫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문자를 본인이 읽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영이 성경을 가지고 자유롭게 활동해서 그래서 영이 와 닿은 사람이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영과 문자로 나누는 이것이 결국은 사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앙생활 하면서 제일 말하기 곤란한 것이 ‘종자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씨가 달라요. 신자와 불신자는 사람 자체가 달라요.
그런데 성도가 신앙생활 하면서 성도 본인도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르긴 뭐가 달라. 다 같은 사람이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현상적으로 보면 똑같습니다. 다 성깔이 있고 그래서 신경질 내고 별 차이를 모릅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펴서 이해하는 것을 보면 한쪽은 영에 속한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육에 속한 사람이지요.
고린도전서 2장에 나와 있지요? 영에 속한 사람이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이 있다고. 종자가 서로 다른 것이지요. 종족이 달라요. 사람이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오늘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것부터 우리가 확실히 압시다. 성도는 성도 아닌 사람과 완전히 딴사람이란 사실을 본인들이 수용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달라요. 성도는 이 우주보다 더 귀하고 세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 귀한 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다른 사람은 썩어질 씨지만 우리는 썩지 아니할 영생의 씨앗을 가졌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국 뭐냐 하면,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 달라. 전혀 다른 사람이야’ 라는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아!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구나.’라는 그런 자긍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제발 영에 속한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을 납득시키려고 애쓸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이 와서 영의 사람이 되었는데 육의 사람을 설득시키려 한다면 이것은 자신이 영에 속하게 된 것을 본인이 가벼이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을 볼 때는 사람들이 눈이 있기 때문에 너도 보고 나도 보고 다같이 본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을 성경 자체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눈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고, 영의 사람이 성경 보는 것과 육의 사람이 성경 보는 것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것은 사람 자체가 너 따로 나 따로 하나님에 의해서 분류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 처음에 강조한 것은, 제발 하나님에 의해서 분류되었다는 그 사실을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관리되고 분류를 당했는데 우리가 세상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과 내가 똑같네.’ 라고 여긴다면 하나님이 섭섭하게 생각하시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부지런히 나눠 놓았는데, 천국 가는 영의 사람이 된 자가 불신자를 보면서 ‘저 사람과 내가 똑같네.’ 라고 하면 안 되지요. 뭐가 같습니까? 사람이 전혀 다른데.
다르다는 데서 오는 자부심을 성도는 가져야 합니다.
분류하기 위해서 성경책이 있습니다. 이제 이해되지요?
성경책이 왜 있는가? 불신자와 신자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책이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국어책은 안 그래요. 이것은 분류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같이 배워서 학년이 점차 올라가도록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책은 다같이 진급시키는 것이 아니고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은 떨어지고 천국에 올려 보낼 사람만 올려 보내기 위해서 성경책이 있는 것입니다.
목적이 뭔가 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떼어놓기 위해서, 분류시키기 위해서, 분리하기 위해서 성경책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책이 여기 있다면 성령은 뭐라고 했습니까? 자유롭게 활동하고, 문자는 그냥 박혀 있다고 했지요. 자유롭게 활동하는 영께서 어떤 사람에게 역사해서 성경이 읽혀지면 이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 되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경을 문자로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분류를 안 합니다. 내가 읽어서 내가 알았듯이 저 사람도 읽으면 얼마든지 읽고 이해해서 구원 받는다. 문자는 독해력이 있으면 누구나 다 본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래서 이런 사람은 인간의 능력으로 문자를 해독하는 것뿐이지, 자유롭게 활동하는 성령이 임한 영의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아도 영의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영에 속한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이 주인공은 아니고 성령이 주인공이고 이 사람은 영에 종속된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있어요. 성경이 있다고 하면 있는 줄 알아야 돼요.
육에 속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육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육이라는 체제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그 안에서 자라고 그 안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뿐입니다. 영에 속하든지 혹은 육에 속하든지 이 두 종류에 속하지 제 3의 중립지역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전에 이미 나는 세상 사람과는 다른 이미 딴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완전히 영에 의해서 분류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보라고 하셨다. 이런 마음을 좀 가져달라는 것이지요.
같은 광주 시내에 산다고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사람 자체가 다릅니다.
이렇게 사람 자체가 다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신은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신이 아닌 것, 혹은 거짓 신, 또는 가짜 신, 즉 유사품을 알려주는 이런 일도 하십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할 때, 신은 비 신을 노출시키는 그런 활동을 할 때 그것이 참 신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날 믿으라’가 아니고,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십계명 첫 번째에 나오지요. 이렇게 하므로 인간들로 하여금 참 신 따로 있고 거짓 신 따로 있는데 이 두 신의 차이점을 너희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뭘 보고 압니까? 성경을 보고 알아야 해요.
성경을 보기 전에는, 하나님은 절대자, 절대자는 유일한 분, 누구든지 이 신을 믿으면 다 신의 아들이지. 이렇게 간단해요. 길 가는 저 사람은 누가 만들었을까?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러면 신의 아들이지. 간단하지요.
그런데 성경을 펼치면 신의 아들 따로 있고, 하나님이 만들었지만 악마의 자식이 따로 있어요. 영에 속한 사람이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이 있고.
누가 이렇게 유도합니까? 바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면서 ‘이러이러한 신은 가짜 신이야’ 라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자기를 들어내십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쿠 할머니 하나님 믿습니까? 예. 그러면 구원 받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진짜 하나님을 소개하는 목사라면,
목사: 할머니 하나님 믿습니까?
할머니: 예.
목사: 그 하나님 한 번 소개해 보세요.
할머니: 왜 그것을 묻는데요?
목사: 혹시 가짜 신을 믿고 있는가 싶어서요.
할머니: 나는 하나님을 믿지 가짜 신은 몰라요.
목사: 죄송합니다. 육에 속했군요.’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진짜 하나님이 등장하면서 가짜 신은 이렇다고 이야기하면서 신이 아닌 것과 더불어서 참 신인 자신을 셋트로 해서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그대로 이어지면 ‘아, 인간 중에서도 지옥 갈 인간 따로 있고 천국 갈 인간 따로 있구나.’라는 식으로 접수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었고 ---’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천국 갈 인간이 있고 지옥 갈 인간이 따로 있고 ---’ 이런 식으로 인간을 이야기하는 분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거짓 신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이렇게 나오지만, 진짜 신은 반드시 지옥 갈 사람에 대해서 소개를 해요. ‘이런 인간은 꼭 지옥 갑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은 천국 갑니다.’ 라고 하면서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고 분류시키면서 행진하게 하지요.
최근에 FIFA(국제축구연맹)에서 그런 규정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수들에 경기장에 입장할 때 선수들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얘들 손잡고 나오지요. 그러나 어떤 관중도 그 아이들이 축구 경기에 뛸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지요.
이처럼 하나님이 인간을 설명할 때도 그냥 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영에 속한 인간은 이런 인간이고 거기에 대비해서 육에 속한 인간은 이렇다. 라는 식으로 인간을 소개합니다.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바로 고린도후서 4장 3절에 나옵니다. 누가 한 번 읽어 주실래요?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여기 용어 자체가 흥미롭지 않습니까? “망하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참 재미있는 것이, 만약에 인간적인 의미에서 자비로운 하나님 같으면 ‘망하는 자들’을 따로 분류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만약 사람들이 원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면 상대방에게 부담을 안 주는 취지에서 ‘여러분들의 하기에 따라 구원 받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동등한 위치에 있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날 믿으세요.’ 이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망하는 자들은 절대로 이 복음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를 구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망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고, 망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그 봐. 내가 망하는 자들도 있다고 했잖아.’ 라는 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확인시키는 차원에서 일하십니다. 이것을 복음에다 섞어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되면, 듣는 망하는 자들은 기분 나쁘지요? ‘그래, 나 한 번 망해 볼란다. 나도 곤조가 있지.’ ‘곤조’를 우리말로 뭐라고 합니다. ‘오기’ 혹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객기’ 이런 것이지요.
사람들이 좋게 이야기해도 이 영역으로 들어올지 말지 하는데 아예 망하는 자들이 있다고 나오면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서라도 일부러 망하고 싶은 오기가 발동하게 되어 있어요.
왜 하나님께서 ‘망하는 자들’을 말씀하시는가 하면, 망하고 망하지 않고는 인간의 행위와 무관한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란 것을 알리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통보하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하든지 묻기도 전에, 내가 예수님을 받아드릴지 말지 결정하기도 전에 이미 확정된 채 와 버리면 어떤 인간이 이런 말 듣고 기분 안 나쁘겠습니까? 완전히 인간의 능력 자체를 무시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런 소리 듣고도 화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잘 하셨습니다.’ 라고 박수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망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어떤 학교에서 주판 시험을 앞두고 선생님이 하루 10시간씩 주판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시험 날짜가 왔습니다. 선생님이 ‘자, 시험시간이다.’ 라고 하니까 아이들이 모두 책상에 주판을 내 놓고 자신감에 차 있는데, 선생님이 ‘주판 다 거둬. 이번에는 컴퓨터 시험이다.’ 하니, 학생들이 화를 내면서 ‘선생님이 주판 시험 친다고 했잖아요.’ 라고 항의를 합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내 마음대로다 왜?’ 이렇게 나온다면 학생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 기분 나쁘다. 선생님 물러가라.’ 이렇게 대모 할 것이 분명합니다.
주판 시험 친다고 해 놓고 컴퓨터가 웬 말이냐고요. 실컷 주판 공부 해 놓았는데 엉뚱한 것으로 시험을 치면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니까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그 학급에 선생님 딸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딸은 (엄마)선생님을 향해 ‘선생님, 잘 하셨습니다.’하고 혼자 박수를 쳐요. 이런 자가 바로 망하지 않는 자입니다.
망하는 자들이 왜 망하느냐? 이것이 어려워요.
하나님이 망하는 자들과 망하지 않는 자들을 미리 선택했다는 것을 안 믿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사실을 믿는 자는 망하지 않을 자입니다. 논리가 아주 우습지요?
그리고 그 뒤에 단서를 붙입니다. 4절을 보면 ‘이 세상 신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이 사실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하지요.
이런 말씀에 대해 ‘하나님은 왜 그런 식으로 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은 그냥 ‘날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믿고 있는 가짜 신을 대동하고 오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다른 신을 섬기면 저주받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른 신이 바로 우리가 평소에 흠모하든 신이예요. 산타크로스를 보내주신 하나님이에요. 교회 부흥시키는 하나님이고, 정성 드리면 복 주시는 하나님이라. 구원이 결정된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선택을 잘 해서 내 하기에 따라 구원도 받고 저주도 받는 그런 하나님을 가짜 하나님으로 대동하고 등장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약 역사를 통해 이어져 옵니다.
구약 역사를 통해 그 실험을 되풀이 하면서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결국 하는 말이 ‘글쎄 너희들이 본 것이 육으로 본 것이야. 너희들이 구약을 열심히 읽고 달달 외운 것은 아는데, 글쎄 그것을 문자로 봤다니까.’
영으로 본 것은 신약 시대에 와야만 가능합니다. 구약에서는 없어요. 구약에는 특별한 사람이게만 영이 있었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약을 볼 때 문자로 본 거예요. 문자로 보니까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이 분류되지 않아요. 유보된 상태에요.
내가 문자에 기록된 대로 살면 영의 사람이고, 안 지키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해석하지, 처음부터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문자를 보고는 몰라요.
그런데 신약에서 영의 사람이 되면 같은 문자를 보더라도 ‘아하,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 되었구나. 이것이 참 하나님다운 행위다.’ 이렇게 믿어져요.
요한복음 3장 8절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거기에 보면 성령은 바람같이 분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육이 잡을 수가 없어요. 바람이 육을 덮치는 것은 있지만 육이 지나가는 바람을 잡을 수는 없어요. 지나가는 영을 잡아서 내 소유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육으로 시작한 것은 육으로 끝나고 영으로 시작한 것은 영으로 끝납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보면 ‘영으로 시작 했으니까 절대로 뭘로 끝나서는 안 된다? 육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영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영으로 가야해요. 처음부터 선택되어 구원 받았으면 끝까지 선택되어 구원 받는 것입니다. 내가 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처음이 선택이면 끝까지 선택입니다. 한 번 선택은 영원한 선택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저는 이 대목이 세계에서 제일 대범한 발언이라고 생각해요. 왜 그런가 하면, 내가 판사라도 피고 앞에 서면 저 사람이 얼마만큼 죄 지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얼마나 대범하게 이야기하는지, 죄를 조금 지었든 많이 지었든 그것은 불문에 붙이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 ‘죄 있다고 하지 않을게’ 라는 말입니다. ‘너 죄 있구나!’라는 말은 두 번 다시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자기 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입니다.
우리도 약속을 할 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엄지손가락 도장 찍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얼마나 자신만만했으면 자기 피를 쏟아서 맹세를 했겠습니까?
아까 식당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적어도 목사라면 진리에 대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고, 고물장수는 고물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고 했지요? 이처럼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해요.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고 했는데, ‘십일조를 안 했네, 교회 늦게 왔네, 식사 당번을 빼 먹었네’ 등등의 것을 가지고 목사가 죄를 씌우고 또 씌워서 누적시키면 이런 사람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누리지 못해요. 하나님이 맹세하신 “정죄함이 없나니”는 다 어디 날아가 버리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죄, 의를 자꾸 따집니다.
어떤 분이 십일조에 대해 말해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말라기에 보면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십일조하면 하늘의 창고를 열고 차고 넘치게 주신다.’고 했잖아요. 그 말씀이 말라기에서는 십일조를 하면 그렇게 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믿기만 하면 교회 돈 한 푼도 안 내도 창고가 넘치도록 주십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완성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의가 됩니다. 의가 되면 의는 반드시 신명기에 보면 축복이 오게 되어 있어요. 의가 있는 곳에는 복이 오고, 죄가 있는 곳에는 저주가 오게 되어 있어요.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저주 아니면 축복이고, 축복 아니면 저주입니다. 어중간한 축복 이런 것은 없어요.
예수님의 맹세가 얼마나 확실했으면 자신의 살과 피를 여기에다 다 쏟아 부었습니다. 이것을 도박에서는 ‘올인’이라고 하지요.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나니’ 너희들 이것 안 믿나? 진짜 못 믿겠어? 나는 여기에 목숨 건다. 그래서 십자가 지시고 ‘다 이루었다’고 했어요.
이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고 또 성령을 보내셔요. 이 성령은 바람같이 불다가 자기 백성 찾아가서 ‘너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선포하셨다고요. 이렇게 성령이 찾아오시니까 예전에 그렇게 많이 보았던 로마서 8장 1절이 이것이 나에게 쏟아 부은 하나님의 자기 맹세 성취, 말씀 성취인 것을 알았어요.
그러면 자기는 졸지에 뭐가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성취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로서 증거물로서 이 세상을 활개 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이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종속된 사람이 아니고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영을 따르는 사람은 다시는 율법을 따를 필요가 없어요. 이것이 로마서 8장 3-4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인인줄 아시고 우리같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서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다시는 죄에 대해서는 묻지를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 피를 쏟고 자기 살을 찢어 주었어요.
제발 사기꾼 목사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 안 하면 저주 받는다. 저것 안 하면 저주 받는다.’라는 이런 소리에.
이것이 구약부터 내려온 가짜 신과 하나님을 대동하는 하나님의 일관된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3-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무슨 표현을 했는가 하면, ‘광채’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광채는 빛인데, 빛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에게서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빛은 저쪽에서 빛을 쏘고 나는 그 빛 앞에서 노출되어 온 몸으로 그 빛을 받는 거지요.
‘광채’라는 늬앙스가 뭐냐 하면, 너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냥 비춰 왔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에게 광채가 비쳤지요. 이것이 현실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은 윤리 도덕책이 아니고 놀라운 또 다른 세계가 우리 외곽에 상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 같으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살던 시절에는 교통수단이 별로 좋지 않았을 것인데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뜨거워서 어떻게 땄겠어요?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단백질로 되어 있어서 250도가 넘으면 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불로 만든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또 우끼는 것이, 당나귀가 말을 해요. “왜 때립니까?”하고. 그리고 사람이 물 위로 걸었데요. 베드로가. 그런데 베드로가 아래를 보는 순간 물에 빠졌다는 것도 우스워요.
이런 것을 우리보고 믿으래요.
놀라운 기적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내게서 일어난 기적이 최고의 기적이에요. ‘너는 이미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기적이 모여서 결국은 이 기적으로 모이지요.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뭐가 없다? 정죄함이 없다. 뭘로 보장할거요? 라고 한다면, 십자가 피를 봐라. 이 피가 흐른 동시에 너의 죄도 떠내려갔다. 그리고 이제는 무죄 상태가 아니라 의인이 되어버렸어요.
이것은 네가 몇 % 받아드리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하나의 약속이니까 반은 채택하고 반은 거부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약속이란 것은 잘라서 반만 믿으면 딴 약속이 되요. 약속은 몽땅 믿어야 합니다. 몽땅 믿는 것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란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가 덮친 사람은 더 이상 너의 구원문제에 있어서는 이미 해결 되었기에 걱정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또 성령으로 보증을 하셨기에 이제는 다 해결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느냐? 그 이유가 뭔가 하면, 망하는 자들을 따로 분류시키기 위해서 그 방법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게 아주 기발한 방법이지요. 망하는 자를 분류시키는 방법은 이 방법뿐이란 말이지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분류시키면 모든 인간이 다 지옥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 따로 선택하시는 그 방법 외에는 달리 구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편리에 따라 넓은 길로 가는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불러내지 아니하면 다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너나 나나 사람들은 다 똑같지. 아니에요. 영에 속한 사람이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이 있어요. 이렇게 나누는 것은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5절을 봅시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이것을 그림으로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우선 “---는 아니다” 라는 것을 그려볼게요. 어떤 것이 --냐 하면, 사도가 만약 자기 자신을 증거하게 되면, 누가 이 증거를 믿는다고 해도 이것은 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둘 다 육이기 때문에 육이 육을 증거하는 것은 ‘나도 너처럼 된다’는 가능성 때문에 이것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저 전하는 사람이 완벽하냐? 이런 것을 따지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입니다. 마귀는 자꾸 영의 하는 일을 사람이 하는 것으로 우겨요. 영이 했던 일을 인간이 했다고 우겨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면서 제일 큰 시험이 무엇이었나 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사가 했다고 사사를 붙들어요. 사사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사가 한 것으로 믿어요. 사사 본인은 알지요.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는 그냥 횃불과 항아리만 들었는데 적들이 다 죽었다는 사실을.
엘리야, 엘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한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엘리야, 엘리사가 한 것으로 생각해요.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전에는 예수님을 점선으로 그렸는데 이제는 그게 안 좋아요. 그래서 사도를 점선으로 그려요. 그리고 예수님을 실선으로 그려요. 그러면 사도 뒤에 누가 있습니까? 주님이 계시지요.
글자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오 오직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하지요? 그러면 진짜 망하지 않는 사람들은 뭘 보느냐 하면 점선을 보는 것이 아니고 실선을 보게 됩니다. ‘아하, 예수님께서 저 사람을 보냈구나!’
어떤 경우가 성령 받은 것인가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는 모습이 크게 보이고 사람은 작게 보일 때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덮치지요. 이렇게 예수가 덮쳐 와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뭐가 없다? 정죄함이 없습니다.
목사 안에 있다고 정죄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누구와 친하다고 정죄함이 없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고, 이 사람만이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두 종류가 있지요.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사람과 은혜로부터 출발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로부터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이것이 고전 15장 10절에 나오지요. 존재로부터는 뭐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해요. ‘내가 여기 있다.’ 데카르트처럼 아무리 내가 이것 저것을 부인해도 의심하면서 묻고 있는 당사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과학이란 것은 가장 확실한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가장 확실한 것이 뭔가? 사물에 대해 의심하는 나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다. 이것이 존재로부터의 출발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전부다 누구 좋으라고 하는가 하면, 나 좋으라고 믿을 때,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이 되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악이 되요. 그래서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육적 요소에요. 우리는 늘 나밖에 몰라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케네라는 사람이 있어요. 프랑스 학자인데 중농주의 - 농업을 중시하는 주의 - 1700여년 그 당시에는 중상주의, 상업을 중시해서 화패와 금을 끌어 모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농업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러면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하면, 어떤 기업이 물건을 많이 팔아서 돈을 벌었다면 그것은 본인이 부자가 된 것입니까, 나라가 부자가 된 것입니까? 본인이 부자 되었지요. 그런데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토지가 생산물을 내지요? 이렇게 되면 나라 전체가 부자가 되지요. 그렇잖아요?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래요.
자본주의 사회는 내가 돈 벌면 돈을 잃는 사람이 있어요. 햄버거 가계를 같이 차리면 내 집에 손님이 많이 왔다는 말은 옆집에는 손님이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전체 나라가 부해지지는 않아요.
선진국이 잘 사는 것은 못사는 나라가 있기 때문에 잘 사는 거예요. 자본주의 체제가 그래요. 이것을 제로섬의 원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 벌기를 원해요. 로토복권에 당첨되었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머니 돈 들여서 로토복권 산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들의 돈이 모아져서 당첨자인 자기한테 몰린 것이지요. 자기는 돈 벌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잃은 사람이 많지요. 그런데 사람은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복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아는 사람은 구원은 내가 요청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주어질 천국이 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정죄함이 없고 너는 의인 되었다고 하는 축복이 그냥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자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다른 종족이기 때문에 특별 혜택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인생을 살면서 어렵고 힘든 일이 왜 있는가? 네가 더 이상 존재에 속할 필요가 없고 이미 너는 은혜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사건과 사고가 자꾸 일어나요. 얘가 다친다든지 집이 경매에 넘어간다든지 하여튼 계속 어떤 사건 사고가 일어납니다.
이런 사건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은혜로 온 것이냐 아니면 나를 사수하기 위한 내 노력의 결실이냐 하는, 존재냐 은혜냐를 판독하라고, 가짜 신을 믿느냐 진짜 신을 믿느냐? 이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사건 사고가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셔야 합니다.
10분간 쉽시다.
(2006년 5월 8일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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