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7:54-60 (주님이 함께 하심)
Re..행 7:54-60 (주님이 함께 하심)
이름 : 이근호(IP:)
주님이 함께 하심-야외예배 (사도행전 7:54-60)
[ 주님이 함께 하심 ]
2006년 5월 7일 설교 본문: 사도행전 7:54-60
(행 7: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하는 세상 외곽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힘으로 그 세계에 침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힘으로 그 예수님을 포착이 잘 안된다고해서 마치 예수님은 아예 안 계신다고 자포자기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만나보겠다고 열심이 기도하고, 전도하고, 성경을 탐구하고, 헌신으로 이상적인 교회를 구축하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자신이 요구하는 시점에 예수님이 나타나 주신다는 느낌을 영 들지 않자, 아예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없다고 단정짓고 신앙생활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분명히 예수님은 스데반이 죽은 그 현장에 계시고 그 스집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다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 집사님이 목숨까지 잃는 것을 걱정하지 않으면서까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즉 돌에 맞아 처참하게 자신이 맞아 죽는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결코 안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는 죽든 말든 예수님은 우리 사는 세상에 외곽에 따로 자신만의 세계가 구성되어 있고 이 지상에서 일어난 일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 끝에서 하신 주님의 약속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이 사실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안심을 제공할까요?
한 예를 들겠습니다. 한기범이라는 농구선수가 있습니다. 한 때 유명했지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 앞에 나서서 하는 말이 “제가 세상 끝날까지 여러분과 함께 있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칩시다. 과연 이 선언이 우리에게 퍽이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빨리 저리 비키세요”라고 짜증을 낼 것입니다. 즉 ‘당신이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별 의미를 두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만 중요하고 늘 크게 부각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말고 딴 사람이 영원히 함께 있는다는 것에 우리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이와같은 논리에 의해서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즉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이 아무런 감흥이나 감동도 없이 시큰둥하게 받아드립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지 결코 예수님이 살아계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를 보세요. 스데반 집사님은 자신이 죽은 마당에서도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기에 자신은 기꺼이 그 살아계신 주님을 위한 일에 후회가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음으로 인해 어떤 현상이 발생되느냐 하면 심지어 자기 목숨이 잃는 경우가 이르더라도 결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그런 현상을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에 의해서 존재하는 사람만이 성도요 의인인데 이런 사람의 특징은 결코 ‘자기가 여기 있음보다’ ‘주님이 영원토록 살아계심’을 더 중요한 사실을 믿는다는 겁니다.
만약 자기 힘으로 예수님의 계심을 포착하려고 애쓴 사람 같으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면 자진해서 제풀에 예수님 믿기를 담박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동안 예수님께 죽도록 충성하려고 애를 썼지만 주님 쪽에서 전혀 도움을 주지 아니했다. 즉 주님께서 자신의 살아계심을 증거를 나에게 보여주지를 아니했다. 따라서 나로서는 주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끝날까지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은 곧, 참으로 이 약속에 전부를 거는 부류와 그렇지 않는 부류 사이를 분리하시는 작업을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실행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모든 인간을 자신을 믿게 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구원될 자에게만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 실효성 있는 약속으로서 살아계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구원될 자에게만 자신이 살아있음이 제일 중요한 사항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보다도 주님이 살아계심을 제일 중요한 진리가 인정합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은 죽음 앞에서도 까딱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시편 1:5-6에 보면,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있다고해서 늘 있는 자가 아니라 결국에는 보이지 않게 사라져야만 될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곧 어떤 사람들이 지금 그 사람들이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아부하거나 복종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분류작업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것입니다. 사람이란 있다가도 없어질 존재들입니다. 중요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에 자기 존재보다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더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이 사시는 그 외곽 세계에 합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편하게 신앙생활하려고 요령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자진해서 고생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보세요. 사람이 자꾸 고생을 피하려고 하면 고생은 꼬리처럼 세상 끝날까지 따라와서 계속 괴롭히게 됩니다. 고생을 피한다고 고생이 저만치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고생이 되는 쪽으로 신앙생활을 해버리면 거기서 자유를 만끽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고생이 되어서 고생이 아니라 고생을 안하려고 하는 나약한 마음으로 인해 고생이 아닌 것도 마음 고생으로 그동안 협박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노리개감이 되는 불쌍한 인생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님에게 마음 고생이라는 것은 도무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위협이나 협박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단지 중요한 것은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께서 자신이 그 세계를 들어오기를 반기고 있다는 그 엄연한 현실 뿐입니다. 기꺼이 그는 자신의 영혼을 살아계신 주님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는 자를 용서해 줍시사 기도합니다.
그에게 있어 주님이 영원토록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큼 더 중요한 현실을 또 없습니다. 환란 가운데 비로소 소망이 보이는 법입니다. 그 어떤 환란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웃으면서 자신을 맞이할 만반의 태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벌리시는 분류작업을 우리는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