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의 철학사상(2)
결국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들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고문서가 배제된 역사가 되지 않을까? 역사가들의 지식은 결코 재현되지 않으며 순수하게 벗어나는 사건들의 역사를 과연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바디우의 답변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사성을 유일하게 건설하는 사건의 진리와 오로지 진실성에 의거하여서만 말을 하는 지식을 엄격히 구분해야만 한다.들째, 특이한 항은 상황의 비정규적인 황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보아 특이성으로서의 사건은 상황에 귀속된 하나의 항이지, 결코 상황을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특이성 자체는 비정규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특이성이 경우나 필요에 따라 하나-로-셈하기 안에서 취해시는 것을 막지는 못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특이성은 정규화될 수 있기까지 하다.사건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은 종교적인, 특히 기독교적인 전통으로부터 유래되는 바, 이 같은 전통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사유자는 말할 것도 없이 신학자로서의 키에르케고르였다. 왜냐하면 현시되고 재현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유래하는 다양한 형태들에 맞서서, 따라서 전체성에 맞서서, 신앙의, 사랑의, 진리의 사건을 가장 극명하게 대립시킨 이가 바로 키에르케고르였기 때문이다.그에 따르면 사건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수형적인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절이자 수직적인 개입을 말한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바디우의 관점은 키에르케고르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바디우에 따르면, 사건은 상황에 대한 단절 또는 수직적인 개입이 아니라 상황에 귀속된 하나의 항이며, 또 궁극적인 의미에서 사건은 상황의 본래 모습에 다가가는 것이지 결코 상황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다.사건은 하나-로-셈하기를 취소시키는 항, 따라서 상황을 그 본래의 다수적인 상황으로 이끄는 항,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그곳에서 실재적인 것을 드러내 보이는 항일 뿐인 것이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사건이 전개되는 것은 결코 케에르케고르적 의미의 신학적 지평 위에 서 있는 개인과 우주 사이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과 법칙 사이에서, 즉 본래의 다수적인 상황으로서의 공백과 상상적이며 상징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로-셈하기 사이에서이다.결국 바디우는 실재적인 것과 법칙 사이의 간격으로 사유되는 둘의 힘을 가지고서 개인과 우주 사에서 고려되는 키에르케고르적 의미의 둘의 힘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바디우의 사건 개념에는 이처럼 일자의 현존이 아닌 둘(2)의 활짝 만개하는 활동성이 있다. 바디우는 이것을 ‘사건의 둘’을 이야기한다.한편 바디우는 사건의 둘과 더불어서 ‘자연의 둘(2)’을 이야기한다. 자연의 둘(2)이란 존재의 유일한 이름인 공백과 이 공백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각각의 복잡한 이름들로 이루어진 쌍,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로와 하나로 이루어진 쌍, 즉 자연적인 다수들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쌍을 말한다.따라서 사건의 둘(2)과 자연의 둘(2)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연의 둘은 존재를 정규화하지만, 반대로 사건의 둘은 바로 이 정규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바디우에게서 세 가지의 종류의 둘을 보게 된다.즉 자연의 이원성을 형식화한 자연의 둘, 그리고 사건의 간격을 유형화한 사건의 둘, 마지막으로 자연의 둘과 사건의 둘로 이루어진 쌍을 가리키는 존재와 사건의 둘이 그것이다.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바디우는 의외로 간단한 답변을 제시한다. 우리가 충실성의 공정 안에 머문다는 것은 상황의 항들과 그 상황 안에 개입이 유통시킨 사건의 이름과 함께 관찰하는 것, 그리하여 상황의 항들과 사건의 이름 간의 연결 또는 비연결들 각각을 하나의 검열(물론 연결은 긍정적인 검열을 그리고 비연결은 부정적인 검열을 가리킨다)라고 부른다.우리가 충실성을 공정에 의거하여서 상황의 항들을 사건의 이름과 관련지어 긍정적으로 검열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바로 이 긍정적인 검열을 통해서 얻게 될 모든 항들을 한 곳으로 다시 모은다는 것을 말하는 바, 바디우에 따르면 바로 이렇게 모여진 항들이 곧 하나의 진리를 이루기 때문이다.따라서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란, 그 자체가 곧 상황의 항들 중에서 사건의 이름과 관련하여 모여진 항들을 가리키는 한에 있어서. 상황의 한 부분, 그렇지만 사건의 이름, 충실성, 검열에 의거하여서 미래에 보게 될 한 부분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의된 진리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 것일까?이 문제는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건에 관련된 자리라는 점을 주목함으로써 풀린다. 즉 사건과 사건의 이름이 지니는 특징으로부터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의 특징을 연역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사건 그 자체는 공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 또는 초과와 방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사건의 이름 또한, 비록 그가 오로지 개입을 통해서만 상황 안에서 유통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사건과 마찬가지의 특징을 지닌다.즉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란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을 통해서 사건의 이름에 연결된 항들로서 산출된 사건적 진리이기 때문에, 그 역시 필연적으로 사건 그리고 사건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공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 초과와 방황을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언어가 되었든 셈이 되었든 상관없이 기존의 모든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따라서 진리는 기존의 모든 법칙에게 있어서 분간이 불가능하다. 진리는 결코 상황의 언어에 의해서 분간되고 분류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진리는 그 자체가 존재함의 그 어떤 유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체 상황의 진리이자, 상황의 존재에 대한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구성주의적인 사유에서 진실된 것의 반대가 허위의 것이었다면, 이제 진리로서의 참된 것의 반대는 존재치 않게 된다.그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오로지 참된 것의 산출적인 공정에 장애물이 되는 것만을 가리킨다. 바디우가 진리는 분간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는 백과사전 안에서 분류된 그 어떤 부분들 아래에도 놓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진리는 지식 안에 구멍을 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산출적인 사유는 초과와 방황을 제거하려고 모색하는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초과와 방황을 떠맡는 사유이며, 특히 산출적인 사유는 구성주의적인 사유와는 반대로 명명할 수 없거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이 존재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사유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산출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진리란 곧 언어를 통해서는 결코 분간할 수 없는 어떤 부분(구성주의적 사유에 대항하는 측면), 그러지만 비초월적인 어떤 부분(초월적인 사유에 대항하는 측면)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출적인 사유는 결국 바로 이 명명이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 안에서 진리의 장소를 발견하고 있다.즉 ‘진리의 모든 공정이 비롯되는 것은 그 어떤 정원외적인 비존재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 안에서’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산출적인 사유는 진리를 지식 안의 구멍으로 사유하고자 시도하는 독트린에 깊이 자리 잡은 존재론적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바디우는 플라톤으로부터 라캉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독트린의 많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이렇게 볼 때, 산출적인 사유의 독창성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곧 벗어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방금 산출적인 사유의 특징으로 제시한 ‘초과와 방황을 떠맡는’, ‘명명이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을 인정하는’, ‘명명이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 안에서 진리를 산출하는’ 등의 언급들은 다름 아닌 탈질서, 즉 질서로부터의 벗어남을 여러 각도에서 표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사실 산출적인 사유의 이러한 독창성은 산출적인 사유란 언제나 벗어나고 있는 사건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사유라는 사실로부터 자연스럽게 연역되어 나오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벗어남과 관련하여 그 어떤 순수하게 분간 가능한 것을 거론 거론하고 있는는 않는가?즉 질서로부터의 벗어남이란 질서 잡힌 우주로부터 자기를 분간하는 것 또는 질서 잡힌 우주에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것들로부터 자기의 주체를 분간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질서로부터의 벗어남은 필연적으로 사건을 그 어떤 일자의 재림 안으로 물고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바디우의 답변은 간단하면서도 분명하다.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건이란 한 상황을 벗어나서 이러저러한 원소를 분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분간되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다. 사실 분간이라는 것은 상황과 상황의 상태가 보여 주는 셈과 부분들의 과정 아래 놓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건은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의 상황을 이러한 정규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그리하여 그것을 분간 불가능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따라서 그 결과를 볼 때, 벗어남이란 상황 또는 질서를 벗어나서 어떤 형식으로든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황 또는 질서의 그 어떤 분간 불가능한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벗어남, 즉 산출적인 사유의 독창성이란 바로 이것이다.이러한 산출적인 사유는 우리를 바디우 고유의 주체의 개념으로 안내한다. 왜냐하면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는 산출적인 사유의 측을 이루는 개념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분명하게 말한다. “오로지 산출적인 공정의 개념만이, 대상이 배제된 후 -사건적 진리의 단순하고 유한한 단편으로서의 주체를 드러나게 하면서 진리의 탈대상화와 주체의 탈대상화를 포섭한다”. 또는 “주체는 산출적인 공정의 유한한 순간이다.”.그렇다면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산출적인 공정이 있을 때, 우리는 이 공정에 의거해서 이러저러한 공정의 생산물인 유한한 국지적인 짜임새 하나하나가 곧 하나의 주체인 것이다. 이것은 ‘주체’라는 이름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그 어떤 절차, 말하자면 분간하는, 긁어모으는, 재취합하는 등의 절차, 즉 산출적인 공정이기도 하다.정리하면, 주체는 충실성에 바탕하여 검열을 행하는 공정, 따라서 사건을 보장하며 진리를 고려하는 공정이기도(산출적인 공정) 하지만, 이와 동시에 주체는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에 의거하여서 사건의 이름에 연결된 항들 중 이러저러한 항들로 짜여진 하나의 유한집합, 따라서 진리의 유한한 한 부분(산출적인 공적의 생산물)이기도 하다.그렇다면 우리는 이 같은 정의와 해석으로부터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의 성격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첫째 주체는 대상이 배제된 주체이다. 왜냐하면 주체는 검열을 행하는 공정이자 그 공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는 달리 표현하자면 주체는 작용이지 작용의 결과요, 생산이자 생산물이기 때문이다.주체는 둘의 시각에서 보자면 갈라진 간격에 대한 사유의 실행이자 그 실행의 결과인 것, 충실성과 검열의 시각에서 보자면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을 행하는 공정이자 그 공정의 결과인 것, 진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진리의 실존이 매번 동반하는 것으로서 진리의 생산이자 그 생산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바디우의 주체는 주체-대상이라는 상관관계 안에서 거론되는 대상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대상이 배제된 주체인 것이다. 둘째, 주체는 언제나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 있는 주체이다. 주체는 미래의 어떤 순간에 그와 더불어서 어떤 사건이나 진리가 있게 된다고 할 때의 바로 그것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주체는 사건 또는 진리의 부분이기도 한 것, 따라서 사건 또는 진리에 의존하는 것이기도 하다.주체는 결코 홀로 존재하는 그 무엇도, 사건이나 진리에 앞서서 미리 존재하는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서만 존재한다. 셋째, 주체는 분간이 불가능하다. 또는 주체는 분간이 불가능한 것을 행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진리는 그 자체가 분간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결국 진리의 유한한 한 부분으로서의 주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 있는 주체 역시 당연히 분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넷째, 주체는 그 정의상 국지적이다. 왜냐하면 주체란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에 의거하여서 사건의 이름에 연결된 항들 중 이러저러한 항들로 짜여진 하나의 ‘유한집합’. 따라서 진리의‘유한한 한 부분’을 말하기 때문이다.다섯째, 주체는 그 자체가 우연하며 희소하다. 바디우에 따르면 라캉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주체를 우리가 필히 가정해야만 하는 비어 있는 어떤 점으로 사유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라캉에게 있어서의 주체는 보편적으로 가정된 주체가 되고 만다. 하지만 만약 주체가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주체 역시 사건 또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우연하며 희소할 수 밖에 없다.여섯째, 주체는 언제나 전미래적이다. 왜냐하면 주체는 미래의 어떤 순간에 일어날 그 어떤 사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또는 바디우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주체는 하나의 산출적인 공정이 미래에 성취한다는 조건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주체에 대한 약식 정의 안에 있었던 표현 ‘후- 사건적’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주체의 성격이 남아 있다. 존재론을 근본적으로 개혁한 이후, 그리고 사건의 가치를 드높인 이후, 이제 마지막으로 사건적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는 것을 결정하는, 그리하여 사건적 진리를 존재론 안으로 들여오는 산출적인 주체의 이론을 전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존재와 사건 사이의 내재적인 통합을 성취하겠다는 것이다.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는 것을 주체는 과연 어떻게 결정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주체의 일곱 번째 성격이라 할 수 있는 언어적인 성격을 미리 숙지할 필요가 있다.주체는 이름들을 산출하며 더 나아가 진술들을 산출하는 주체이다. 왜냐하면 주체가 진리를 산출한다고 할 때의 산출은 언제나 개입을 동반한 산출이기 때문이다. 개입이란 사건을 지칭하거나 자격 짓기 위해서 사건적 장소의 현시되지 않는 어떤 원소에 대해 이름을 부여하는 일임을 상기하자그리고 주체가 이름들과 진술들을 산출하는 주체라는 사실은 곧 주체는 동시에 언어-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러한 이유에서 바디우는 주체와 더불어서 언어-주체를 언급한다.바디우는 우선 비록 사건적 진리는 분간이 불가능하며 질서를 벗어나고 있다 할지라도 어쨌든 그것은 그 정의상 상황의 한 부분에 해당한다는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즉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다(또는 백과사전 안에 등록되어 있는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또는 항들)이 사건적 진리에 (즉, 충실성에 바탕한 긍정적인 검열을 통해서 모여진 항들에) 귀속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가 그것이다.그런데 바디우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보게 되는 경우가 전자일 경우에는, 주체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를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도록 결정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이 애초의 상황과 사건적 진리에 동시에 귀속해 있는 경우에는, 양쪽에 공통적으로 귀속해 있는 이 항이 주체로 하여금 언어-주체의 진술을 위해서 진실성의 결정을 하도록 강제를 행하게 되고, 따라서 이제 그 결과로서 언어-주체의 진술이 새로운 상황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기 때문이다.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는 것을 주체가 결정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애초의 상황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성이나 예측이 완전히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주체에게 진실성의 결정을 강제하는 항, 즉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이 애초의 상황에 귀속은 오로지 그 자체가 벗어남을 가리키는 산출적인 공정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언어-주체의 진술이 그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상황 또는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그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 상황을 애초의 상황과 비교해서 새로운 상황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한편 위의 말을 뒤집어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만약 언어-주체의 진술이 새로운 상황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이 애초의 상황과 사건적 진리에 동시에 귀속하고 있었음을 뜻한다.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역으로 재구성된 문장으로부터, 언어-주체의 진술이 진실한 것으로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지 아니한가를 미리 판단해 보는 일의 가능성을 주장할 수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을 사건적 진리와 애초의 상황 안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하였다면, 이 확인은 곧 진실성의 결정을 주체에게 강제하는 될 항이 산출적이며 충실한 공정에 의해서 lal 만나지고 검열되었다는 것을, 따라서 언어-주체의 진술이 진실한 것으로 될 수 있는 기회를 이미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바디우는 이러한 기회 판단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때의 고정 관계, 즉 강압을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우연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산출적이며 충실한 공정을 통해서 강압이 미리 만나지고 검열된 이후에만 강압을 확인하는 일 자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우리는 존재를 명명, 분간하고 부분들을 분류하며 그들을 하나로 묶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하는 지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무한한 사건들에 의해 떠받쳐지는 무한한 진리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식과 진리를, 진실된 것과 참된 것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이제 산출적인 주체가 지식과 진리를, 진실된 것과 참된 것을 내재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 온다. 왜냐하면 산출적인 주체는 언어-주체의 진술을 새로운 상황 안에서 진실한 것이 되도록 (즉, 지식의 언어로 말해질 수 있도록) 결정하는 주체, 그리하여 사건의 분간불가능한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도록 결정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주체는 의식의 주체나 지식의 주체가 아니라. 그것은 분명 사건적인 진리의 주체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진리의 솟아남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주체. 오로지 사건적인 진리 안에만 머무는 주체가 아님 또한 분명하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자신의 언어에 의해서 지식과 진리의 교차에 위치하는 주체,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존재와 사건 사이의 내재적인 통합을 성취하는 주체인 것이다.(평가)알랭 바우디는, ‘자아’라는 주체개념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구출해내려고 한다. 주체를 구출하려면 그동안 주체를 대신해 왔던 신(일자)개념을 대신 부숴야만 했다. 신을 부수는 방식은 존재론을 부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곧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케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지 존재이기 때문이다.즉 ‘모든 것을 다 아는 위대한 존재자’를 제거하고 그 대신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들’끼리 만나서 나름대로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고 느껴졌던 그 의미들을 언어를 통해 상호 소통하는 것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나가는 이유로 삼고자 한다.문제는 알랭 바디우가 바로 그렇듯 상식화된 고요한 세상 한복판에 메시야가 출몰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겨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진리와 심판을 오로지 자신의 행하심으로 한데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시다. 알랭 바디우의 주장대로 사건으로 인한 ‘초과’로 인한 교회나 국가라는 의미가 새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말씀에 따라 세상의 운명은 결정 나 있는 처지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