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신학과 철학의 허상 시리즈(2)
[일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신학과 철학의 허상 시리즈(2)
이름 : 이근호(IP:)
스피노자가 행한 고유성들의 삼분할은 다음과 같은 전통적인 신의 속성들의 분류를 재생산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1) 상징적 명칭들, 형상들과 모습(형태)들, 기호와 의식(儀式)들, 감각적인 것의 신적인 것으로의 환유(換喩)들
2) 행위작용의 속성들
3) 본질의 속성들
다음과 같은 신적인 속성들의 일상적 목록들이 있다고 하자. 선, 본질, 이성, 생명, 예지, 지혜, 덕, 지복, 진리, 영원성 혹은 위대함(권세). 사랑, 평화, 통일성, 완전성 들. 사람들은 이 속성들이 신의 본질에 접합한지 어떤지, 그것들을 조건부 긍정들로 이해야 하는지 아니면 결성(缺性)의 제거만을 표시할 뿐인 부정들로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물음들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속성의 대부분이 엄밀한 의에서의 속성이 아니라 고유성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이성의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이로든 신의 본성의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는 신은 그것들에 의해 표현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 속에 감추어지지도 않는다.
고유성들은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으바, 칸트 식으로 말하면 무규정적인 부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본성을 고유성들과 혼동할 때, 신에 대해 그 자체 무규정적인 관념을 갖는 것을 불가피하다. 그 때 우리는 탁월성에 의한 부정 개념과 유비에 의한 긍정 개념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자체의 역동성 속에서 각각은 다른 것의 일부를 함축한다. 긍정되는 것 간에 유비가 도입되기 때문에 그릇된 부정 개념이 형성된다. 그러나 긍정은 일의적(一義的)이기를 멈추거나 그 대상들에 대해 형상적으로 긍정되기를 멈출 때 더 이상 긍정이 아니다.
신의 본성은 언제나 고유성들과 혼동되어 왔기 때문에 결코 정의된 적이 없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주요 테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 테제는 신학자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태도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신학을 추종해 왔다. 데카르트 자신은 신의 본성이 무한한 완전성에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무한한 완전성이란 신적인 본성을 구성하는 것(속성)의 한 양상일 뿐이다. 오직 그 말의 참된 의미에서 속성들, 즉 사유와 연장만이 신을 구성하는 요소들, 신의 구성적 표현들, 신의 긍정들, 신의 적극적․ 형상적 이유(근거)들, 한 마디로 신의 본성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이 속성들이 신학적인 소명(召命)에 비밀에 부쳐지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왜 무시되었으며, 왜 신은 변성되었고, 그에 대한 무규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그의 고유성들과 혼동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스피노자의 선행자들이 그들의 모든 재능에도 불구하고 왜 특성들에서 그치고 신의 본성을 발견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스피노자의 대답은 간단하다.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비판적이며 내적인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신성한 텍스트들의 기획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그 텍스트들을 신의 말씀, 신이 스스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간주했다.
그 텍스트들이 신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신에 의해 표현된 것으로 여겨졌고, 그 텍스트들이 말하지 않은 것은 표현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결코 다음과 같은 물음들은 제기되지 않았다. 즉 종교적 계시는 신의 본성을 대상으로 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신의 본성을 인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가? 그것은 신의 본성의 규정을 완성하기 위해 신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되는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취급들에 의존하는가?
사실 계시는 몇몇 고유성들에만 관련된다.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신적인 본성과 그의 속성들을 인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물론 성서의 소여들은 이질적이다, 어떤 때는 특수한 의례적 교시들이 주어지고, 어떤 때는 보편적인 도덕적 교시들이 주어지며, 또 어떤 때는 사변적 교시들(도덕적 교시에 필요한 사변의 최소치)까지도 주어진다.
그러나 신의 어떤 속성도 계시되지 않는다. 즉 믿게 하는 능력이 문자에서는 안 나온다는 말이다. 속성에서만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오직 신적인 계명을 보증하는 가변적 기도, 부대적 명칭만이 계시될 뿐이다. 기껏해야 도덕적 교시를 보증하는 신적인 실존, 통일성, 전지함, 편재함 같은 고유성들이 계시될 뿐이다.
놀라우리만치 경솔하게 모든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인간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성경의 몇몇 구절들은 예언자들이 어떤 것들을 몰랐다는 것을 더없이 명료하게 우리에게 말해 주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어떤 것을 몰랐다는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이 그 구절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혹은 성서의 구절들을 왜곡해서 성서가 명시적으로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을 말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성서의 목적은 우리를 삶의 모델들에 따르게 하고, 우리를 복정시키며, 복종을 근거짓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인식이 계시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인식된 신적 본성이 어떻게 일상적 삶의 실천적 규칙 구실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계시가 신의 본성 혹은 본질의 무언가를 우리에게 인식시킨다고 믿는 것은 더더욱 부조리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부조리가 신학 전체를 관류한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신학이 철학 전체를 위태롭게 한다. 사람들은 어떤 때는 계시의 고유성들에 그것들과 이성과 화해시키는 특별한 취급을 가하고, 또 어떤 때는 계시의 고유성들과 구별되는 이성의 고유성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그들이 신학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신의 본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제는 특성들과 진정한 본성상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신이 갖지 않는 표현적 가치가 고유성들의 것으로 돌려지자마자 신적 실체가 역시 실체가 역시 갖지 않는 표현불가능한 본성이 신적 실체의 것으로 돌려지게 된다.
계시와 표현이라고 하는 두 영역을, 혹은 두 가지 이질적 관계인 기호-기호화된 것(기의)의 관계와 표현-표현된 것의 관계를 구별하려는 노력을 스피노자는 멀리까지 밀어붙인다. 기호는 언제나 하나의 고유성에 결부되고, 언제나 하나의 계명을 기호화하며, 우리의 복종을 근거짓는다. 표현은 언제나 하나의 속성에 관련되고 하나의 본질, 즉 본성을 부정법(不定法)으로 표현하며, 우리에게 그것을 인식시킨다.
그 결과 신의 말은 매우 다른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말이나 기호들은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신의 본질과 인간의 지성만을 필요로 하는 표현적인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기호와 계명에 의해 작동하는 감각인상적이고 명령적인 말씀이다.
이 후자의 말씀은 표현적인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에게 필연적인 순종을 부추기는 것이다. 적어도 계명이 신의 의지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의지를 신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예단(豫斷)하는 것, 즉 이성의 존재, 부대(附帶)적 규정을 신적인 속성으로 착각하는 것이리라.
두 영역을 뒤섞는 모든 혼동은 치명적이다. 기호를 표현으로 삼을 때마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무엇보다도 특히 성서 자체에서 신비를 본다. 모든 것이 아무 조건 없이 신을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그렇다. 그 때 그들은 신비적인 표현 개념을 형성한다. 이런 식의 표현은 우리에게는 그것이 표현하는 것을 드러내는 계시하는 만큼 그것을 감추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수께끼 ․ 잠언 ․ 상징 ․ 유비 ․ 환유들이 그런 식으로 드러내고 감추는 방식으로 순수한 표현의 합리적이고 확실한 적극적 질서를 교란한다. 사실 성서는 분명 신의 말씀이지만 계명의 말씀이다. 명령적인 그 말씀은 어떤 신적 속성도 인식시키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분석은 그 두 영역의 환원불가능성을 표시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분석은 기호들의 전개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환각의 발생과 같은 것이다. 각각의 사물이 신을 표현한다고 말하는 것을 사실 틀리지 않다. 전(全) 자연의 질서는 표현적이다. 그러나 자연법칙이 곡해되기만 하면 그것은 당장 명령 또는 계명으로 파악된다.
인간들은 수학에서 그 수들에 어떤 조작을 가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기호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 - ,×, ÷) 즉 법칙에 대한 적실한 인식이 없다면 모든 법칙은 ‘해야 한다’라는 도덕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기술적인 규칙들조차 우리가 그 의미를 모른 채 매달릴 때는 도덕적이 된다. 자연 법칙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신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는 것이 그에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계시하지만, 사물들의 구성 관계를 파악할 능력이 없는 아담은 이 자연 법칙을 그에게 과일을 먹는 것을 금하는 도덕 법칙으로, 신 자체를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자기를 벌하는 주권자로 상상한다.
기호는 예언자들의 것이지만 정확히 말해 예언자들은 강한 상상력과 약한 지성을 지니고 있다. 신의 표현은 결코 상상의 관할 하에 놓이지 않는다. 상상은 모든 것을 기호와 계명의 측면에서 파악한다.
신은 기호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지도 고유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출애굽기에 신이 아브라함 ․ 이삭 ․ 야곱에게 계시되지만, 여호와로서가 아니라 각인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샤다이(전능자 하나님)로서 계시된다는 대목을 읽을 때, 거기서 사람들은 네 글자의 신비라는 결론을 끌어내면서도, 그의 절대적 본성상에서 취해진 신의 초탁월성이라는 결론을 끌어내서도 안 된다.
그보다 계시가 신의 본성 혹은 본질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반면 자연적 인식은 신의 본질을 함축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본질을 실질적인 효과로 표현하는 속성들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에 신의 본질을 함축한다.
신은 그의 속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하며, 속서들은 그들에게 의존하는 양태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 바로 그런 식으로 자연의 질서는 신을 현시한다. 따라서 신의 표현적 이름들, 신적인 표현들만이 속성들, 즉 실체와 양태들에 대해 야기되는 공통 형상들이다. 그것들 중에서 두 가지만 인식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들은 연장의 한 양태와 사유의 한 양태에 의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두 속성들은 어떠한 계시도 가정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연의 빛에 준거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실체와 양태들에 공통적인 그들 존재상에서 신 안에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스피노자는 그가 일의성의 선언문으로 삼는 바울의 텍스트를 인용하면서 이 점을 강조한다. “세계 창조 이래로 은폐된 신적인 것들은 신의 피조물들의 지성에 의해 포착된다” (로마서 1:20)
속성들은 실체을 표현한다. 왜 신은 생산하는가? 신의 본성은 능산적 자연(자연 자체 속에 자연을 스스로 살아있게 하는 힘으로서의 자연)으로서, 그 자체로(그 자체 내에서) 표현적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신에게 본성적 혹은 본질적이어서, 그것은 기성(旣成)의 신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적인 것의 일종이 전개를, 신적 실체의 논리적이고 발생적인 구성을 형성한다.
각 속성은 하나의 형상적 본질을 표현한다. 속성들에 의해 표현되는 모든 형상적 본질들은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실존이 따라 나오는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실체의 절대적 본질로서 표현된다. 따라서 이 실존 자체는 속성들에 의해서 표현된다. 이 계시들은 실체의 진정한 계시들이다.
표현은 신 안에서는 신의 삶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세계나 우주나 소산적 자연(현재 눈에 보이는 대자연)을 생산한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충분 이유는 (―하기 위해서 신은 생산한다)라는 식의 모든 목적성 논의를 배제하면서 필연적이어야 하며, 뿐만 아니라 신은 그 자신 안에 그 자신의 본성 속에 그를 구성하는 속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
그는 아무 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생산할 필요가 전혀 없다. 생산되는 세계는 신의 본질에 아무 것도 보태지 않는다는 점을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예로서 소개한다.
예술가가 머리와 흉부를 조각하고 나서 흉부를 머리에 붙일 때, 이 더함(+)은 머리의 본질에 아무 것도 보태지 않는다. 머리는 동일한 본질, 동일한 표현을 견지한다. 만일 신이 그 자신 안에서 자신을 표현한다고 하면 우주는 두 번째 단계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실체는 능산적 자연을 구성하는 속성들 속에 이미 자신을 표현하지만, 속성들은 소산적 자연을 구성하는 양태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더더욱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왜 두 번째 층위인가? 왜 신은 양태적 우주를 생산하는가?
신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대로 활동(작용) 혹은 생산한다.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이해하므로 그는 필연적으로 활동한다. 신은 실존하는 대로 생산한다. 필연적으로 실존하므로서 그는 필연적으로 생산한다. 신이 활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내재성과 표현의 논리적 연결고리들은 어떤 것들인가? 모든 것은 플라톤의 분유(分有-나누어줌)의 문제와 함께 시작되는 것 같다. 플라톤은 가설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분유의 도식을 제시했다. 분유한다는 것, 그것은 부분으로 참여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모방하는 것이기도 하며, 또 다이몬(내심으로 속삭여 주는 영물)을 맞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이데아들 상호간의 분유를 다룰 때조차 그 분유에 상응하는 역능은 분유되는 역능이 아닌 분유하는 역능으로 파악된다.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이 미미한 쪽 (분유자 쪽)에서 분유를 보았다고 비난한다. 실은 분유되는 것이 분유자 속으로 옮겨가는 게 아니다. 분유되는 것은 자기 안에 머문다. 그것은 생산하는 한에서 분유되고, 증여하는 한에서 생산한다. 그러나 그것은 증여하거나 생산하기 위해서 자기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이러한 것이 플로티누스에 의해 공식화된 프로그램이다. 가장 높은 것에서 출발하는 것, 모방을 발생 혹은 생산에 종속시키는 것, 폭력의 관념을 증여물의 관념으로 대체하는 것, 분유되는 것은 분할되지도, 바깥으로부터 모방되지도, 그의 본성에 폭력을 가하는 중재자들에 의해 강제되지도 않는다. 분유는 질료적이지도, 모방적이지도, 다이몬적이기도 않다.
증여에 의한, 나아가 생산적 증여에 의한 인과성을, 진정한 능동(활동)성은 분유되는 것의 그것이다. 분유자는 결과일 뿐이며, 원인이 그에게 증여하는 것을 수령한다. 유출인은 증여하는 ‘원인’, 증여하는 ‘선’, 증여하는 ‘덕’이다.
분유되는 쪽에서 분유의 내적 원리를 찾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너머에서’ 혹은 ‘위에서’ 그것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분유를 가능케 하는 원리 자체가 분유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그 원리로부터 유출되며, 그 원리가 모든 것을 증여한다. 하지만 그 원리 자체는 분유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분유는 원리가 증여하는 것에 따라서면, 원리가 증여하는 것에게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프로클루스는 그의 심오한 ‘분유불가능자’ 이론을 구상했던 것이다. 그 자체는 분유불가능하지만 다른 것에게 분유할 것을 증여하는 원리에 의해서만 분유가 있다, 그리고 그전에 이미 플로트누스는 일자(一者)가 필연적으로 자신의 증여물보다 상위라는 것, 그는 자기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증여한다는 것, 혹은 그는 자기가 증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출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삼항일조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증여자, 증여되는 것, 수령하는 자. 분유한다는 것, 그것은 언제는 증여되는 것에 따라서 분유되는 것이 분유된다는 그 사실을 설명해 주는, 분유되는 것 자체의 발생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증여되는 것과 수령하는 자의 이중적 발생은 자기에게 증여되는 것을 온전하게 소유할 때, 자신의 실존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는 증여자에게 의뢰함으로써만 그것을 온전하게 소유한다. 증여자는 자기가 증여하는 것에 따라서는 분유가능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혹은 그- 자신에 따라서는 분유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로써 분유를 근거짓기 때문에 그의 생산물들로서의 그의 증여물보다 상위하다.
플로티누스에 따르면 모든 사물에 공통적인 형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유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목적성의 형상, ‘선’의 형상이다. 그것이 곧 선 자체는 아니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출은 그것의 순수한 상태에서는 존재보다 상위 ‘일자’의 체계와 분리될 수 없는바, 파르메니데스의 첫 번째 가설이 신플라톤주의 전체를 지배한다. 그리고 유출의 원리 혹은 원인의 탁월성을 존중하는 유비의 방법 혹은 부정 신학과도 분리될 수 없다. 프로클루스는 일자 자체의 경우에 일자가 증여하는 것과 일자로부터 발생되어 나오는 것에 적용되는 긍정들의 동력은 부정임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서 유출의 각 단계에서 사물들이 그로부터 발생되어 나와서 그것으로 귀일하는 분유불가능자의 현존을 인지해야 한다. 따라서 유출은 위계화된 우주의 원리 구실을 한다. 거기서 존재들 일반의 차이는 위계적 차이로 사고된다. 각 항은 그에 선행하는 상위 항의 상image과 같아서, 제1월인은 혹은 제1원리로부터 그것을 분리시키는 원격의 정도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유출인과 내재인 간의 두 번째 차이가 등장한다. 내재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순수 존재론, 즉 ‘일자’가 실체와 존재자의 특성일 뿐인 ‘존재’ 이론을 함축한다. 게다가 순수 상태의 내재성은 존재의 동등성 원리, 혹은 동등한- ‘존재’의 자리를 요한다.
존재는 자체 내에서 ‘자체로’ 동등할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 속에 동등하게 현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인은 어디든지 동등하게 가깝다. 원격 원인은 없다. 존재들은 위계상의 서열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즉 일자로부터 더 혹은 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오히려 각각은 존재의 동등성을 분유하므로, 다시 말해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자기 본질의 소질(유능성)에 따라 신으로부터 수령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직접 수령하므로 신에 직접 의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