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알랭 바디우의 철학사상(2)
[일반] 알랭 바디우의 철학사상(2)
이름 : 이근호(IP:)
즉 ,우리는 존재의 단순하면서도 유일한 이름인 공백으로부터 각각의 복잡한 이름들이 갈라져나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갈라져 나온 이름들에 의해서 상황들이 특징지어지게 된다. (모든 상황이 공백의 그 어떤 양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정확하게 말해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처럼 모든 상황이 공백으로부터 이끌어 내어지면서 새로운 다수들의 무제한적인 생산이 전개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공백과 상황 사이에 놓여 있는 근원적인 차이점을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상황은 자기에게 고유한 그 어떤 구조, 즉 그 어떤 안정성을 향유함에 반해서, 이와는 반대로 공백은 그 자체가 불안정한 다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바디우는 공백과 상황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론적 차이를 지적하는 바, 지금 여기에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존재론적인 차이가 상황 안에서 공백을 몰아내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지니는 상황의 상태를 필연적으로 도안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상황과 상황의 상태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틀 안에서 귀속과 포함을, 실존과 비실존을, 개인들과 계급을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상황의 부분들은 포함이라는 셈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존하지만 귀속이라는 셈의 입장에서 보자면 꼭 실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틀의 유형을 따라서 한쪽에서는 실존하는 것이 다른 한쪽에서는 비실존하는 것이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상황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가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초과점의 정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즉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지만 상황의 상태에 귀속하는 원소들이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
그에 따르면 상황에 귀속하는 항들이 그 상황에 의거하여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상황의 부분들 또는 부분집합들 역시 그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진다. 따라서 상황의 상태는 상황의 구조를 구조 짓는 작용을 하는 하나의 셈이며, 메타 구조라 불릴 수 있다.
특히 상황의 상태에 고유한 이러한 셈을, 바디우는 그것이 상황의 구조를 구조 짓고 있다는 의미에서 재현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하나의 항이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해당되는 상황 안에서 재현된다는 것은 그 항이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거나 또는 상황의 부분집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아울러 그 항이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기준으로 삼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들을 상정할 수 있게 된다. 첫째로, 상황 안에서 현시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상황 안에서 재현되는 항상, 따라서 상황에 귀속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상황에 포함된 항들, 그리하여 상황의 원소임과 동시에 상황의 부분을 이루는 항들이 있다.
바디우가 정규적인 황들이라고 부르는 이 항들은, 존재, 그 중에서도 특히 자연을 사유할 수 있는 한 범주를 이룬다. 둘째로, 상황 안에서 현시되지는 않지만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상황 안에서 재현되는 항들, 따라서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지만 상황에 포함되는 항들, 그리하여 상황의 원소는 아니지만 상황의 부분을 이루는 항들이 있다.
바디우가 돌출들이라고 부르는 이 항들은 우리가 방금 위에서 살펴보았던 항들, 즉 계급, 국가 등의 사회적인 조직들을 사유할 수 있는 한 범주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상황 현시되지만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상황 안에서 재현되지 않는 항들, 그리하여 상황의 원소이지만 상황의 부분을 이루지는 않는 항들이 있다. 바디우가 특이한 항들이라고 부르는 이 항들은, 정규적인 항들과 돌출들에 대립하는 역사적인 것들, 즉 사건을 사유할 수 있는 한 범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특이한 항들, 즉 상황의 상태에 의해서 상황에 재현됨이 없이 상황에 현시되는 항들은 무엇에 해당되는가? 본래 다수에 귀속은 하지만 그 다수에 포함되지는 않는 특이한 항들, 또는 상황적 원소이지만 상황 안의 그 많은 부분집합들로 구성된 집합의 원소는 아닌 그 특이한 항들을 바디우는 비정규적인 항들 또는 역사적인 것들이라고 부른다.
비정규적인 항들, 역사적인 것들이라는 명칭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여기에는 특이한 항들은 특히 자연의 정류적인 항들과 대비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실제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는 자연과 근본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는 자연적인 의존성 또는 비독립성으로 완전히 벗어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가 정규성이 전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자연으로 사유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제 특이성이 전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비정규적이며 비자연적으로 것으로, 즉 역사로 사유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다수 -형식이 정규적인 것의 안정성 안에 머무는 것과는 반대로 역사성이 보여주는 다수-형식은 상대방의 메타 구조에 의해서는 결코 취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다수-형식이 상태가 행하는 셈의 재보장으로부터 벗어나는 점을 가리킨다.
바디우는 이처럼 역사를 특이성의 출현으로 정의한 이후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결과들을 끄집어 낸다. 첫째, 하나의 역사라고 고려되는 역사란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 위에 차곡차곡 가해지는 부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전체화도, 원소들과 상광들에 대한 하나-로- 셈하기도 아니다.
차라리 역사는 자신의 특이성들에 의거하여서 전체화로부터 하나의 장소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는 ‘기억’으로 고려되는 하나의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결국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들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고문서가 배제된 역사가 되지 않을까? 역사가들의 지식은 결코 재현되지 않으며 순수하게 벗어나는 사건들의 역사를 과연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바디우의 답변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사성을 유일하게 건설하는 사건의 진리와 오로지 진실성에 의거하여서만 말을 하는 지식을 엄격히 구분해야만 한다.
들째, 특이한 항은 상황의 비정규적인 황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보아 특이성으로서의 사건은 상황에 귀속된 하나의 항이지, 결코 상황을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특이성 자체는 비정규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특이성이 경우나 필요에 따라 하나-로-셈하기 안에서 취해시는 것을 막지는 못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특이성은 정규화될 수 있기까지 하다.
사건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은 종교적인, 특히 기독교적인 전통으로부터 유래되는 바, 이 같은 전통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사유자는 말할 것도 없이 신학자로서의 키에르케고르였다. 왜냐하면 현시되고 재현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유래하는 다양한 형태들에 맞서서, 따라서 전체성에 맞서서, 신앙의, 사랑의, 진리의 사건을 가장 극명하게 대립시킨 이가 바로 키에르케고르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사건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수형적인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절이자 수직적인 개입을 말한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바디우의 관점은 키에르케고르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바디우에 따르면, 사건은 상황에 대한 단절 또는 수직적인 개입이 아니라 상황에 귀속된 하나의 항이며, 또 궁극적인 의미에서 사건은 상황의 본래 모습에 다가가는 것이지 결코 상황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건은 하나-로-셈하기를 취소시키는 항, 따라서 상황을 그 본래의 다수적인 상황으로 이끄는 항,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그곳에서 실재적인 것을 드러내 보이는 항일 뿐인 것이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사건이 전개되는 것은 결코 케에르케고르적 의미의 신학적 지평 위에 서 있는 개인과 우주 사이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과 법칙 사이에서, 즉 본래의 다수적인 상황으로서의 공백과 상상적이며 상징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로-셈하기 사이에서이다.
결국 바디우는 실재적인 것과 법칙 사이의 간격으로 사유되는 둘의 힘을 가지고서 개인과 우주 사에서 고려되는 키에르케고르적 의미의 둘의 힘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바디우의 사건 개념에는 이처럼 일자의 현존이 아닌 둘(2)의 활짝 만개하는 활동성이 있다. 바디우는 이것을 ‘사건의 둘’을 이야기한다.
한편 바디우는 사건의 둘과 더불어서 ‘자연의 둘(2)’을 이야기한다. 자연의 둘(2)이란 존재의 유일한 이름인 공백과 이 공백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각각의 복잡한 이름들로 이루어진 쌍,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로와 하나로 이루어진 쌍, 즉 자연적인 다수들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쌍을 말한다.
따라서 사건의 둘(2)과 자연의 둘(2)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연의 둘은 존재를 정규화하지만, 반대로 사건의 둘은 바로 이 정규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바디우에게서 세 가지의 종류의 둘을 보게 된다.
즉 자연의 이원성을 형식화한 자연의 둘, 그리고 사건의 간격을 유형화한 사건의 둘, 마지막으로 자연의 둘과 사건의 둘로 이루어진 쌍을 가리키는 존재와 사건의 둘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바디우는 의외로 간단한 답변을 제시한다. 우리가 충실성의 공정 안에 머문다는 것은 상황의 항들과 그 상황 안에 개입이 유통시킨 사건의 이름과 함께 관찰하는 것, 그리하여 상황의 항들과 사건의 이름 간의 연결 또는 비연결들 각각을 하나의 검열(물론 연결은 긍정적인 검열을 그리고 비연결은 부정적인 검열을 가리킨다)라고 부른다.
우리가 충실성을 공정에 의거하여서 상황의 항들을 사건의 이름과 관련지어 긍정적으로 검열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바로 이 긍정적인 검열을 통해서 얻게 될 모든 항들을 한 곳으로 다시 모은다는 것을 말하는 바, 바디우에 따르면 바로 이렇게 모여진 항들이 곧 하나의 진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란, 그 자체가 곧 상황의 항들 중에서 사건의 이름과 관련하여 모여진 항들을 가리키는 한에 있어서. 상황의 한 부분, 그렇지만 사건의 이름, 충실성, 검열에 의거하여서 미래에 보게 될 한 부분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의된 진리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 것일까?
이 문제는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건에 관련된 자리라는 점을 주목함으로써 풀린다. 즉 사건과 사건의 이름이 지니는 특징으로부터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의 특징을 연역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사건 그 자체는 공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 또는 초과와 방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사건의 이름 또한, 비록 그가 오로지 개입을 통해서만 상황 안에서 유통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사건과 마찬가지의 특징을 지닌다.
즉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란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을 통해서 사건의 이름에 연결된 항들로서 산출된 사건적 진리이기 때문에, 그 역시 필연적으로 사건 그리고 사건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공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 초과와 방황을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언어가 되었든 셈이 되었든 상관없이 기존의 모든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기존의 모든 법칙에게 있어서 분간이 불가능하다. 진리는 결코 상황의 언어에 의해서 분간되고 분류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진리는 그 자체가 존재함의 그 어떤 유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체 상황의 진리이자, 상황의 존재에 대한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구성주의적인 사유에서 진실된 것의 반대가 허위의 것이었다면, 이제 진리로서의 참된 것의 반대는 존재치 않게 된다.
그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오로지 참된 것의 산출적인 공정에 장애물이 되는 것만을 가리킨다. 바디우가 진리는 분간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는 백과사전 안에서 분류된 그 어떤 부분들 아래에도 놓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진리는 지식 안에 구멍을 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산출적인 사유는 초과와 방황을 제거하려고 모색하는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초과와 방황을 떠맡는 사유이며, 특히 산출적인 사유는 구성주의적인 사유와는 반대로 명명할 수 없거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이 존재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사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출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진리란 곧 언어를 통해서는 결코 분간할 수 없는 어떤 부분(구성주의적 사유에 대항하는 측면), 그러지만 비초월적인 어떤 부분(초월적인 사유에 대항하는 측면)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출적인 사유는 결국 바로 이 명명이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 안에서 진리의 장소를 발견하고 있다.
즉 ‘진리의 모든 공정이 비롯되는 것은 그 어떤 정원외적인 비존재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 안에서’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산출적인 사유는 진리를 지식 안의 구멍으로 사유하고자 시도하는 독트린에 깊이 자리 잡은 존재론적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바디우는 플라톤으로부터 라캉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독트린의 많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렇게 볼 때, 산출적인 사유의 독창성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곧 벗어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방금 산출적인 사유의 특징으로 제시한 ‘초과와 방황을 떠맡는’, ‘명명이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을 인정하는’, ‘명명이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 안에서 진리를 산출하는’ 등의 언급들은 다름 아닌 탈질서, 즉 질서로부터의 벗어남을 여러 각도에서 표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산출적인 사유의 이러한 독창성은 산출적인 사유란 언제나 벗어나고 있는 사건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사유라는 사실로부터 자연스럽게 연역되어 나오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벗어남과 관련하여 그 어떤 순수하게 분간 가능한 것을 거론 거론하고 있는는 않는가?
즉 질서로부터의 벗어남이란 질서 잡힌 우주로부터 자기를 분간하는 것 또는 질서 잡힌 우주에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것들로부터 자기의 주체를 분간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질서로부터의 벗어남은 필연적으로 사건을 그 어떤 일자의 재림 안으로 물고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바디우의 답변은 간단하면서도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