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알랭 바디우의 철학사상(1)
[일반] 알랭 바디우의 철학사상(1)
이름 : 이근호(IP:)
알랭 바디우의 철학
“왜 그 무엇이 도대체 없지 아니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존재를 중심으로해서 계속 있어 왔다. 있음에 대해서는 있음보다 더 상위의 근거란 잇을 수 없으며 있음 그 자체가 있음의 이유 또는 근거임을 지시한다. 말하자면 이유 없는 있음에 이유를 부여하는 것을 넘어서 있음 그 자체가 있음의 이유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있음이 있음 자체의 근거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있음이 있음으로 읽히게 되는 계기에 주목하자는 것인데 이 계기란 바로 ‘있었다고 없어지는 사건’ 즉 ‘없어짐의 체험’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만일 ‘없어짐’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있음은 경계지어질 것이 없는 전체여서 결코 ‘있음’으로 드러나거나 새삼 체험될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없어짐은 있음에서 없음으로의 이동으로서 있음과 없음을 서로 구별하게 하고 또한 서로 연관시키는 기제가 된다. 생명선의 견지에서 보자면, 있음의 이유가 있음 자체라는 것은 ‘없음이 있음을 삼켜버림’이라는 사건/체험, 즉 죽음의 도전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며, 따라서 없음이야말로 있음이 비로소 소중한 ‘있음’으로 읽히게 하는 결정적 계기이다.
무릇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러하지만 우리가 관심하려는 인간도 결국 ‘없어질 있음’을 잠시 영위할 뿐인데, 실상 ‘없어질 있음’만이 아니라 ‘없었던 적도 있는 있음’이기도 해서 결국 ‘잠시의 있음’의 앞 뒤로 없음이 철저히 에워싸고 있는 바 ‘없음’에 둘러싸인 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있음이 없음에 둘러싸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있음만큼은 확실히 있음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불가피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있음은 그 바깥에 없음으로 둘러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없음을 싸안고 있는 있음이기 때문이다.
즉 비록 있음이 진행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그 삶 안에 품고 있는 있음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없음’에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없음이 그 안에 드리워져 있는 있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디우에 따르면, 이러한 ‘있음의 존재론’은 있음을 없음과 대비시켜서 사유하기 때문에, 결코 존재로부터 존재와 다른 것을 연역해 낼 수 없다. 계속 존재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존재조차 없음을 낳기에 결국 ‘있음의 존재론’은 치명적으로 주체의 소멸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있음의 존재론에서는 주체의 모든 형태가 모든 존재자에게도 속하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을 과제로 삼고서 풀어 내야 할 그 숨겨짐도 없음에 의해서 애매하게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디우에 의하면 수학적인 존재론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수학적인 존재론은 우선적으로 있음의 존재론이 제시하는 존재의 개념을 포기하게 만들고, 그에 못지않게 주체의 실재적인 면이 드러나는 차원으로서의 사건의 가치를 드높이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수학적인 존재론을 따라서 형식적인 언어로 구성된 진술들로 질서있게 말해질 수 있다면, 자체적인 수학적 논리에 의해서 실재적인 존재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 즉, 주체적인 개입이 동반된 사건에 의해서 없음에 빨려들어가지 않는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있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느껴진다든지 또는 감지된다든지 하는 등이 이루어져아만 한다. 말하자면, 어떤 것이 자기 자신에 해당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구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흔히 있다고 고려되는 하나(1)란 무엇인가? 바디우에 따르면, 하나가 있다는 것은 아주 엄격하게 말해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즉 하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있는 근원적인 현존이 아니라 그 어떤 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그 어떤 것도 결코 스스로를 하나로서 나타내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고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또는 하나라는 것은 불안정한 다수를 안정적이게 하는 하나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있다고 고려되는 하나를 하나의 존재자로 취할 경우에는 그 하나의 실재성이 곧 구성상의 다수성이자 안정적인 다수성으로 나타나지만, 실재적인 존재의 관점에서 하나를 취할 경우에는 그것이 곧 불안정한 다수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는 그 자신이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다수를 안정적이게 하는 법칙일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진 대상 바로 그 자체 속에서 하나가 배제된 연속성을 직관할 수 있는 바, 이 직관은 곧 존재의 불안전성에 대한 직관, 즉 다수는 스스로를 다수화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하여 다수는 다수들의 다수이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 사실에 대한 직관과 다른 것이 아니다. 세계에 드리운 하나의 그 묵중한 현존이란 한마디로 말해 순수 다수성의 현시 위에 가해진 작용이요 법칙일 뿐이다.
따라서 바디우는 우리가 하나(1)라는 함정 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황과 작용 간의 구분을 행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우선 다수로서 현시된 존재는 그 자체가 불안정적이다. 반면에 상황은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진 다수, 따라서 언제나 안정적인 다수를 말하며, 이때 작용은 상황을 자신의 안정성 안에서 현시되도록 하는 셈, 즉 ‘하나-로-셈하기’를 말한다.
따라서 만약 존재가 하나라는 가능성 안에서 현시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 하나-로- 셈하기라는 작용 덕분이다. 바디우가 상황 안에서 안정성을 누리는 합치는 그 어떤 작용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또는 합치는 그 어떤 구조 작용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또는 합치는 타성의 다수성을 불러오는 법칙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렇게 볼 때, 바디우는 이로부터 얻게 되는 존재론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자명해진다. 그것은 곧 존재와 다수의 등가화라는 가르침. 따라서 존재론은 그 모습 그대로인 한에 있어서는 불안정한 다수성들에 대한 이론일 수만 있다는 가르침이다.
존재는 그 어떤 기초도 그 어떤 의미도 지나지 않는 순수 다수성이다. 또는 오로지 다수성들로만 이루어진 평면만이 존재한다. 존재와 다수의 이 같은 등가화는 구체적으로 다음의 사실을 함축한다.
첫째, 존재에게 있어서 하나 또는 일자란 없다. 존재는 그 어떤 전체도, 그 어떤 전체성도 인내하지를 못한다. 달리 말하자면, 순수 다수성은 통합적인 다수성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정확하게 말해 상황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의 수준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다수가 어떤 조건들을 거쳐서 스스로를 다수로서 인지되도록 한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조건들의 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하나는 다수로 하여금 그의 순수한 현시를 포기하게끔 하는 작용이다. 하나는 다수로 불안정한 다수의 타자를 위한 존재인 것이다.
둘째,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사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순수 다수 또는 불안정한 다수에게는 결코 그 어떤 원자적인 실재성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존재라는 어휘를 빌려 표현하자만 존재는 차라리 존재자의 모든 현존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존재로서의 존재를 사유함에 있어서 하나 또는 일자의 실존을 긍정함으로부터 출발하는 일, 따라서 존재의 안정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일은 애초부터 배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존재에게 있어서 하나 또는 일자란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공백 또는 공집합으로서의 존재를 긍정해야만 하고, 따라서 존재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존재는 자신의 실존함이 실존치 않는 것, 즉 공백이요 공집합이기 때문에, 존재로서의 존재를 사유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그 어떤 실존함도 자신에게 속한다고 말해질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실존한다는 사실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것이다.
‘존재와 사건’이 지니는 가장 큰 힘은 존재를 공백으로서 또는 무한하며 불안정한 순수 다수로서 사유해야 함을 주장한 데 있다기보다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바로 이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보다 깊이 있게 사유했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결코 간단할 수 없는 이 작업을 바디우는 ‘어떻게 풀어 나가는 것일까?’
말 그대로 공백으로 정의된 존재를 또는 그냥 간단하게는 공백을 과연 그는 ‘어떻게’ 보다 더 깊이 있게 사유해 나가는 것일까? 바디우에 따르면 존재는 무한하며 불안정한 순수 다수이지 공백이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사유는 반드시 모든 강도나 질을 배제한 상태에서 오로지 다수만을 고려하는 사유이어야만 한다.
상황 그 자체는 ‘존재는 그 어떤 전체성도 용납하지 않는 무한하며 불안정한 순수 다수이다’라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다수가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무엇인가?’ 또는 ‘어떤 다수의 존재함이 우리에게 확인된다는 것을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경우, 우리는 이에 대한 답변을 결코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 안에서는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는 그 어떤 전체도, 그 어떤 일자도, 그 어떤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의 불안정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우리는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에 의거하여서는 그의 존재함이 실질적으로 확인된 어떤 다수의 위치를 결코 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디우에 따르면 존재함이란 곧 ‘거기에 있음’, ‘거기에 위치 지정 되어 있음’을 말한다. 또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존재는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거기에 있는 존재’, 즉 현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난 어떤 다수의 위치지 지정을 위해 그 어떤 공간을 반드시 필요로 하게 되며,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위치 지정의 공간’ 즉 상황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존재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공정된 공간 또는 장소란 없으며 또 존재 그 자체는 모든 관계를 벗어난다. 이 점을 상황의 필연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디우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황에 귀속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이것을 집합이론의 형식주의에 의거하여 거ε∈S 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ε는 존재함이 확인된 어떤 다수를, 그리고 S는 상황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공백으로서의 존재로부터 그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을 끄집어낼 수 있으며 이때 이 집합들은 ‘공백의 양상들로서의 상황들’을 이룬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을 말해 준다. 즉 우리가 앞에서 존재의 사유 방식으로 제시한 명령(공백으로서의 존재를 긍정해야만 하고 또 공백으로서의 존재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은 오로지 공백 안에 머물면서 오로지 공백만을 거론하자는 말이 아니다. 차라리 이 말은, 마치 앞에서 우리가 하나 또는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그에 맞물려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이야기하였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상황과 더불어서 존재를 이야기하되 언제나 공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가야만 함을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공백으로 고려하는 한에 있어서 상황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공백에 대한 사유를 오로지 공백만을 가지고서 어떻게 진전시켜 나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공백의 양상으로서의 상황이란 무엇인가?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상황에 귀속하는 다수란 무엇인가?
또는 존재함이 확인된 다수, 그러면서도 모든 질과 강도 등이 배제된 다른 다수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수학적인 의미의 집합’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바디우가 수학적인 숙고 방식 중 특히 집합론에 의거하여서 공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사유를 전개시켜 나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바디우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무한한 다수로서의 존재의 본래 모습은 ‘초과’인 것이다.
수학적으로 볼 때 하나의 집합에는 두 개의 관계들이 공존한다. 원소와 집합의 관계에 해당되는 귀속과 부분들 또는 부분 집합들의 관계에 해당하는 포함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집합 a의 모든 부분집합들로 이루어진 집합 p(a)는 본래의 집합 a와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또 다른 하나의 집합임을 보게 된다.
귀속들 또는 원소들을 하나의 고려 아래 세는 집합 a와 포함들 또는 부분집합들을 하나의 고려 아래 세는 집합 p(a) 사이의 이런 ‘간격’을 바디우는 ‘존재의 막다른 골목이 자리 잡고 있는 점’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현시된 하나의 다수가 주어질 경우, 그의 부분집합들이 구성하는 하나- 다수는 최초의 다수보다 언제나 본질적으로 더 크다.
또는 상황이라는 어휘를 빌려 표현하자면,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는 언제는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 바디우가 ‘간격’ 또는 ‘존재의 막다른 골목이 자리 잡고 있는 점’이라는 표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귀속 위에서 보게 되는 포함의 초과‘가 바로 이것이다.
집합 a의 모든 부분집합들로 이루어진 집합 p(a)의 원소이되 본래의 집합 a의 원소는 아닌 집합이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또는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가 언제는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초과점의 정리는 철학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의미들을 지닌다.
먼저 초과점의 정리는 일자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재차 확인시켜 준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는 자신에게 포함되어 있되 자신에게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를, 따라서 하나 자신을 초과하는 다수를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다수도 그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를 행하는 상태 안에 있지 않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다음으로 초과점의 정리는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실존하는 것들, 그렇지만 그들이 구성하는 보편적인 것(예를 들어, 계급, 집단, 조직 등 )을 실재적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운 그런 실존하는 것들이 함축하는 역설적인 유형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은 분명히 상황에 귀속하지만, 그 상황에 귀속하는 개인 또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계급(즉 상황의 부분집합으로서의 계급)은 상황에 귀속하지 않는다. 계급은 귀속의 세계를 초과하는 것이다.
상황의 상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상황은 공백의 그 어떤 양상에 불과하다는 사실부터 인지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백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공백으로부터 그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 (물론 공백들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은 결과적으로 볼 때 공백을 유일한 원소로 지니는 집합, 즉 공집합으로 환원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백의 유일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공백 자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