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41011 부산강의-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
Re..20041011 부산강의-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
이름 : 한윤범(IP:)
20041011 부산강의-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
95페이지. 13세기, 14세기 보니벤투라 조금만 하고, 오늘 토마스 아퀴나스로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95페이지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중간에 보면, [보나벤투라는 이성과 신앙의 문제를 창조 신학의 관점에서 통합하려고 했다.]
여기서 창조신학의 관점이, 이점을 여러분들이 유념을 해줘야 하는데, 창조신학의 관점으로 통합하는 것 하고 복음으로 통합하는 것 하고 달라요. 창조신학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보시면 되지요. 박용기 목사, 강남노회. 그 사람의 신학이 창조신학적 관점입니다.
창조신학적 관점이 되면 복음은 뭐냐 하면, 최종 목적이 복음이 아니고, 복음은 그냥 거치고 지나가는 지점에 지나지 않아요. 또는 입구내지는 지점. 그냥 통과해야 될 머무르면 안 되고 그냥 쉭- 통과해야 될 그냥 거기에 해당되지요.
그러니까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뭘 맡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세상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우리 인간이 여기 있다면, 하나님의 창조신학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 길 밖에 없다는 주장이에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창조했다. 인간은 이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못 나가지요. 못 나가지요. 왜냐하면 못 나갈 수밖에 없는 게, 창조했으니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지 않고, 에베소서나 빌립보서, 골로새서에 누구하고 해요? 예수님하고 연관되어 있는데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의 뭐로? 십자가로 가로막고 있는 상태에 있단 말이죠.
창조했으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로막고 있는 상태인데,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간다? 제가 방금 예수님 십자가를 이야기 안 할 때는 마치 맞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죠? 하나님께서 이 천지 창조했다. 우리는 결국 궁극적으로 창조신학을 통과해서 창조신학의 그걸 거쳐서 그 다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그럴싸하게 보이죠.
그런데 창조가 성경을 통해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게 되어 있고, 예수님은 모든 비밀은 마지막 때 십자가를 통해서 감추어진 모든 비밀을 십자가를 통해서 이야기하거든요. 이 창조신학을 구성했으면 이 창조신학은 어디에다 검증을 받아야 됩니까? 반드시 십자가 복음의 검증을 받아야 되는데 그게 옳은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창조신학을 건설하기 위해서 중간 과정으로 뭘 필요로 하느냐 하면, 십자가를 거쳐서 창조신학으로 간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십자가를 거쳐서 창조신학하고 십자가를 갖다 버리고, 이것만, 이게 최종적이니까 이것은 하나의 사다리에 불과하니까 올라가면 사다리는 거둬 치워버려야 되지요. 거둬 치우고 창조신학 건설하고 그 다음에 십자가, 바로 하나님. 이렇게 된다 말이죠.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박용기 측 주장을 제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박용기 측 주장은 창세기 3장 15절 있잖아요. 뱀의 후손하고 여자의 후손하고 싸우지요. 이렇게 싸우는 것이 창세기 3장의 이야기지, 창세기 1장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그러니까 창세기 3장은 어디까지나 창세기 1장 이후에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창세기 1장에 뭐라고 되어 있든가요? 하나님께서 모든 걸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는데 그 제대로 된 인간에게 된 제대로 복이 뭐냐 하면, 창세기 1장 28절에 다스리고 만물을 통치하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창세전부터 뜻이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뭐는 뜻은 아니었다? 창세기 3장 15절은 뜻이 아니에요. 뜻이 아니고 뭐가 뜻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놓고 번성하고 다스리고 그게 본래의 뜻이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마귀가 개입해서 잘 안됐잖아. 안 됐으니까 인간은 해결책이 없으니까 해결책까지 하나님께서 뭘 줍니까? 해결책을 넌지시 해결책까지 줘서 죄 문제, 마귀 문제 해결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숨쉬면서 본래 원했던 창세기 1장 28절 다스리고, 그걸 이제는 제대로 그들을 통해서 제대로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래 뜻이 아닌가? 이렇게 주장한다 이 말입니다.
반박해 보세요. 반박해 보라고. 그렇게 생각들하고 계신 게 아니에요? 그게 맞잖아요.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게 맞잖아요.
신약이 없다면 맞아요. 십자가 없으면 맞아요. 다 맞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유대교 신학 같은 경우에 창세기 3장 15절에 의하면 거기에 여자의 후손은 누가 되죠? 유대교 자기 민족이 되겠지요. 이스라엘민족. 그리고 또 메시야가 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뭘 기다립니까? 어서 메시야가 오셔서 악마 조지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했던 본래의 틀, 하나님께서 원래 기획했던 프로젝트대로.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길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작품을 만들어 놨는데 그 작품이 이렇게 훼손 되었으니까 우리를 가지고 뭘? 예수님을 보내서 다시 이 작품을 회복하면 이건 떼어 버려야지요. 회복했으니까 떼어버리고 이 둘 사이의 완전히 관계가 정상적으로 된다. 이걸 가지고 하나님의 뜻, 기독교의 본질, 변호의 핵심,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라고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이죠. 이게 맞아요. 그래?
그러니까 참, 유대교도 모르고, 유대교를 모른다는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도 모르고, 죄도 모르고, 십자가도 모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체를 모를 때는 인간적인 상식에서 성경 들여다보면 이렇게 된다 말이죠. 창세기 1장이 3장 보다 앞서니까 1장을 더 우선적으로 봐야지, 더 뒤에 나오는 3장이 걸치느냐 이렇게 나올 수 있는 거예요. 1장의 횡포지요. 3장에 대한. 선배다 이거지요. 바로 그런 것 때문에 예수님이 하는 말이 전혀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돼요. 그런 것 때문에.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형상 되었잖아요. 하나님의 형상부터 잘못 되었어요. 창세기 1장, 아니 성경 전체는 누구를 겨냥하는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다윗의 시편에 나오는 그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겨냥해서 창세기 1장 28절을 했다는 것을 왜 그들은 몰라? 그들은 왜 모르냐 말이에요. 그들은 창세기 1장 28절을 예수님을 집어넣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독으로 어떻게 해결될 문제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인간이 죄 짓고 안 되니까 예수님이 대타로 잠시 들어갔다가 할 뿐인데 빠져 나온 거지요.
창세기 1장 28절의 그 말씀이 깨졌다, 훼손됐다 말하면 안돼요. 그 말씀은 처음부터 그것은 누굴 이야기한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하고 한 이야기인데 그게 어떻게 깨지고 훼손될 수가 있습니까? 거 뭐, 인간은 안 되니까 우회로 예수님을 동원해서 이건 엉뚱한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제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처음부터 자기 아들이, 재벌 회장님이 계신데, 회장님 아들이 바깥에 있어요. 여기 회사 안에 있는 게 아니고. 그래서 회장님이 하루는 직원들 다 모아놓고,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렇게 훈시를 했다고. 똑바로 하란 말이야, 제대로 하란 말이야. 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이야기는 회장님은 사실은 건물 바깥에 있는 아들 보여 이야기한 건데, 여기 직원들은 마치 누구보고? 자기들 보고 이야기한 것처럼 해서 자기들이 난리야. 야, 똑바로 하란 말을 우리보고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똑바로 하지. 바르게 해 볼까.
그런데 거기에 마귀가 득세했지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 그러니까 이 동네는 엉망진창 되어 버렸어. 그런데 회장님 입장에선 엉망진창 된 적도 없어요. 원래부터 인간 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건물 바깥에 있는 예수님 보고 이야기한 건데요.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 들어왔다고요. 들어와서 마귀들 쫓아내고 했다고요. 들어오니까 여기 직원들이 오해하기를 원래 이 분 보고 한 건줄 모르고 아, 바깥에서 우리 구세주 왔구나. 좀 도와주소. 야, 됐네. 이제 나가주세요. 이제 누구하고 상관하겠다? 자기하고 직접 상관하겠다. 이겁니다. 이해되십니까? 뭐, 믿고 안 믿고는 마음대로고 이해는 되시냐 이 말이죠.
처음부터 모든 성경은 예수님, 나를 위하여 썼다는 이 말은 대단히 무시한 거예요. 사람보고 하다가 안 되니까 예수님 보고 하라고 업무를 밀어준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은 예수님이 해야 될 예수님의 자기 숙제고 자기 몫이에요.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한 자기를 부인해야만 나올 수 있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 해놓고 맨 날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지금보다 향상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돋보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예수님을 동원시킨 것밖에 안돼요.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또 좇을 거야. 분명히.
인간은 지 잘되는 것에서는 아주 물불을 안 가리죠. 지가 될 수 있다 하면 다 동원시킬 거예요. 지가 할 수만 있다면. 그런데 백 날 해봐도 인간은 가능성을 뽐내 봐도 하나님께서 일말의 가치를 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착한 것, 골라골라 나쁜 짓 했지만 그래도 착한 짓 한 것 있지 않겠느냐? 다 수집하고 모아 보세요. 그것 인정받는가? 안 받습니다.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았어요.
가림을 받는 자 복이 있다 했어요. 경건치도 않는 자에게 복을 주어서 경건하다고 하고 의롭다 한 거예요. 그걸 보여주는 최초의 인물이 아브라함 아닙니까?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 보여 줬습니다.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그냥 의인 되는 거예요.
거기서 마지막 때 숨겨진 비밀이 나오는데 그게 뭐냐? 그리스도의 의. 그게 두 자로 복음이다. 복음 안에 깨 보면 우리 도움 주려는 게 없어요. 복음 안의 내용은 뭐냐 하면, 처음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은 예수님 보고 다 일을 처리하도록 치르도록 그렇게 작정하고 예정되었고 그전에 있었던 이 인간들은 인간의 죄가 무엇이냐? 그리고 배후의 영적 악마가 무얼 노리느냐? 그걸 보여주기 위한 시청각 교재로서 동원된 것 뿐이에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니까 자기를 겸손하고 이게 아니라 하여튼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그거하고 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주님께서는 반영을 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그걸 고려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참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보고 우리를 그냥 구원하신 거예요. 뭐하라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뽑아 세운 거예요.
가덕도 그 사람이 왜 뭣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예수 믿읍시다. 하면 끝나는 건데. 설교를 너무 길게 했던 모양이야. 예수 믿읍시다. 잘 됩니다. 잘 되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랬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건데. 평소에는 고기나 잡고. 몇 마디 해보고, 안 되는 게 뻔한데 뭐.
그 사람이 좋은 경험을 했을 거예요. 좋은 경험이 뭐냐 하면, 사람은 말씀에 의지하는 게 아니고, 자기의 과거 전통에 의지 한다는 것, 자기의 과거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과거에 의존한다는 것이 문제에요. 사람이 과거에 의존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알아요? 죄책감을 크게 느껴지게 됩니다. 오바해서. 문제에요.
자기가 차를 운전하다가 박았잖아요. 박았으면 물어주면 그만 이에요. 그런데 과거에 내가 목사인데 차 박아서 했으니까 이거 뭐, 과거에 나는 박은 것이 없는데 왜 박았을까? 하고 과거하고 비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죄 짓고 죄 짓는다는 느낌이 들 때는 과거를 잊어버리면 아무 문제 안 되고요. 또 내일이 없어요. 내가 이렇게 벌금 물어주고 사진 찍혀 버리면 교인들이 뭐라겠노. 또 내일까지 걱정하는 거예요. 내일까지 걱정하면 모든 것이 마귀의 시험에 빠져버립니다. 그게 뭐냐? 시간의 족쇄가 채워져요. 시간에 종속되어 버려요. 그런데 시간에 종속되면, 시간이라는 것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면, 자기가 상상한 자아가 들어있어요.
나중에 혹시 여러분들이 공부할 때 있으면, 주체와 자아가 달라요. 자아와 주체를 구분 못하는 인간들이 맨 날 이근호 목사는 주체도 모른다고 하는데, 자아와 주체를 구분을 못하는 거예요. 자아라 하는 것은 원래 있는 그 주체를 형성되는 거예요. 변동되는 거예요. 변화되는 거예요. 뭐에 의해서? 객체에 의해서. 변동된다고. 그 변화시키는 매체가 뭐냐? 의식이라는 겁니다. 의식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보고 들은 경험에서 나온 겁니다. 이 경험은 우발성입니다.
차사고 나고 싶어서 차사고 나는 사람은 없어요. 자기는 깨끗하게 살고 싶어요. 차사고 박는데 우에 하겠습니까? 우발성이죠. 이 우발성에 대해서 기분 나쁘게 여기면,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자아가 부인 안 된 거예요. 그런데 우발성 자체를 뭐로 본다? 하나님의 은혜로 본 사람은 평소부터 자아에 대해서 부인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돼요. 자아를 없애라는 말이 아니고 부인하라 이 말이에요. 그 차이도 잘 알아야 돼요. 그런 차이점, 그런 것, 여러 가지 교인들이 그런 것을 의심 두고 그런 것을 궁금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어려운 공부를 해야 되는 겁니다. 그냥 게시판에 나온 것만 보지 말고, 어려운 공부를 해야 돼요. 게시판도 이해를 못 하지요.
여기 나오는 보나벤투라 이런 사람이나 뒤에 나오는 토마스 아퀴나스, 오늘 우리가 하려고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이 사람들이 그냥 장난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온갖 인생 경험, 고민 다 했던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후배들을 위해서 결론은 이거다. 하나님 뜻은 이거다 하고 자신만만하게 내 놓았다 이 말이지요.
따라서 이런 공부를 만약에 소홀히 해 버리면 자기 딴엔 잘한다고 보는데, 나중에 보니까 나중에 인생을 살면서 누가 질문 받고 누가 도전 받으면, 자기가 무식한 게 드러나면, 그 다음부터는 뭐가 되냐 하면, 틀린 것도 우기게 돼요. 자기 자존심 때문에 과거의 자존심 챙기기 때문에 과거 때문에 우기다 보면 점점 교주가 돼버려요. 자기 부인이 안돼.
많이 알아야 돼요. 많이 알아야 되는 이유가, 우리가 언젠가 당해야 될 여러 가지 일들을 미리 앞당겨서 다 만났기 때문에 미리 댕겨서 다 선취해서 아신다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보나벤투라, 95페이지 중간에. [신앙의 문제를 창조 신학의 관점에서 통합하려 한다.] 이제 이해되시죠.
그러면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어떤 결론에 떨어지는가? [그에 의하면 만물은 영원한 신적 이데아를 통해 창조되기 때문에 창조물 속에는 신의 모습이 피조물의 특성을 따라 더 강하게, 혹은 덜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얼마나 이제 창조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은 뭐란 말입니까? 이 세상의 차등이 정당화 된다는 거예요. 차등함, 차별 둠, 계급 둠, 이것이 정당화 돼요. 창조신학으로 보게 되면. 동일하다는 게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성품이 덜 있는 사람, 더 있는 사람. 그러면 덜 있는 사람은 뭘 받아야 돼요? 교육을 받아야 수련을 쌓아야 아주 하나님의 형상이 더 있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러면 그 수련자가 누굽니까? 누가 돼야 돼요? 그 당시의 누가 돼야 됩니까? 목사, 신부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 직업이 정당화 되잖아요. 자기 가르침이 정당화 되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도대체 목사가 자기 부인이 되지 못하겠지요. 왜 가르치느냐? 창조신학에 근거해서. 니 뭔데? 덜 떨어진 놈, 높이기 위해서 질적 향상을 위해서. 그럼 이 교회 주인이 누고? 나한테 맡겨났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한테 맡겨 났다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 뒤에 보면 나옵니다. 그게 제1원인과 제2원인이에요. 절대적 원인과 두 번째 원인.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섭리하면서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이유가 뭐냐 하는 그 어려운 문제가 뒤에 나와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다 아시고, 작정하시고, 예정하시고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또 자유의지가 반드시 주어져야 된다는 그 논리적 고리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가 뒤에 나온다고.
그 다음에. [그에 의하면 만물이 창조주의 반영이요, 표현이요, 그림자요, 길이요, 발자취라고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만물이 어떤 식이든지 영원히 변치 않는 신의 이데아를 분유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물은 창조의 목적대로, 즉 창조주 안에서 완성되게끔, 모두 신께로 돌아갈 운명을 받았다.] 이게 바로 스토아 철학입니다.
제가 인간은 왜 행동하는가에서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 무지무지하게 쉽게 썼어요. 쉽던 가요? 더 이상 저에게 쉬운 걸 요구할 필요 없게 쉽게 썼어요.
스토아 철학을 보니까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예정론이 나오지요. 그래서 칼빈이 그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칼빈의 예정론이 결국 스토아 철학을 요약한 거예요. 왜냐하면 칼빈도 역시 십자가 중심이 아니고 무슨 중심? 결국은 창조 중심이지요. 창조 중심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다루다 보니까 예정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스토아 철학을 결정론 철학이라고 합니다. 결정론 철학에서 스토아철학 윤리가 뭡니까? 모든 것은 만사가 하나님의 뜻이니까 내버려두라 이거에요.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되게 어려울 것 없잖아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는 그 철학이 거기에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원래 로마서에는 그런 뜻이 아닌데. 칼빈의 신학에서 보면 스토아 철학인지 칼빈의 신학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것은 뭐냐? 이미 칼빈의 신학은 성경과는 동떨어진 신학이라 하는 것이 증명된다 이 말입니다.
그 칼빈의 신학을 교회론을 강조해서 칼빈의 신학에 의거해서 그러니까 교회는 있어야 되고 이 교회는 만물의 중심이며 교회가 있음으로서 비로소 창조신학은 빛을 발한다. 따라서 교회 있다는 것은 교회 안에 성찬식이 있다는 것이고, 성례식이 있다는 말은 성례식을 집행할 누다 있다? 신의 대리자가 있다는 말이고 그 사람들만 목사이어야 한다. 라는 그런 쪽으로 정리가 되니까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장로교에 목사의 권위도 살고 소위 개신교라는 입장도 산다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는 식으로 그게 번진다는 그 말입니다. 심지어 순복음도 칼빈주의라고 주장하는 판이에요.
그 다음에 봅시다. 밑에. 그러니까 창조가 완성됐건, 여기 참, 여러분들이 이해를 잘 해주셔야 돼요. 모든 게 신에게 돌아갈 운명에 있다면, 그 중간 중간에 있는 자, 보세요. 신이 이렇게 돌아간다면, 그 중간 중간에 있는 인물 하나하나가 필요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다 필요 있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뭐가 안돼요? 자기 부인이 안 돼지요.
내가 집사 같으면, 집사로서 까불지 마. 나, 집사다. 하고, 집사 위에 뭐가 있습니까? 장로. 왜 장로가 집사 위에 있느냐 하면, 집사를 거쳤기 때문에. 나, 장로다. 니, 장로 건드리면 신의 보상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나를 건드리는 것은 뭐를 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건드리는 것이다 말이죠. 그럼 어디서 건드리노, 튀어나와서. 목사 앞에서. 또 목사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창조신학에서 모든 위치, 배치 전체가 뭐가 됩니까? 하나하나 건드리면 안 되는 고유의 카리스마를 다 갖고,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이 말입니다. 이게 무슨 자기 부인이 됩니까? 자기 경쟁이죠. 권위죠. 그러니까 여자들도 뿔따구 나가지고 우리도 자리 달라고 해서 지도자, 권사 받아냈잖아요. 그래서 권사의 카리스마가 생겼죠. 그것도 싫다. 장로 도. 장로 싫다. 그럼 목사. 여자 목사.
전부다 뭐냐? 보나벤투라의 말대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뭘 하기 때문에? 신의 영원한 창조를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했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창조에 이르기 때문에 인간을 통한 인간을 통했다는 적어도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그걸 가치를 그 권위성과 가치성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그걸 무시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한다. 이렇게 되지요. 이게 바로 십자가 있기 전의 유대교와 일반 종교들의 특징 아닙니까?
그 다음에 여기에 근거해서 96페이지 봅시다. 중간에 보면, [둔스 스코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토마스와는 달리 유한자와 무한자 사이의 메워질 수 없는 틈을 강조한 반면에]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에 대해서 둔스 스코투스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어떻게 반대했을까요? 세상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게임이 안 되는데 그걸 연결하나 이 바보들아! 그래 이제 맞먹자, 맞먹어. 이게 존재의 유비라고 합니다. 존재의 유비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인간이 대신하기 때문에 인간이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그 성경에 보면 나타나는데, 그들의 주장입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흐릿하게나마 개연성이라 하는데 대충 얼기설기 연결시켜 놨다는 그게 뭐냐 하면, 왕과 신하 사이, 남편과 아내 사이, 아버지와 자식 사이, 그 다음에 더 무서운 것은 우리는 신부 사이.
그러니까 하나님 사귈 때 어떻게 사귀면 된다? 우리 집구석에 신랑, 신부 사귀듯이 사귀면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 아버지 사귀듯이 사귀면 된다는 거죠. 자기 나라에 왕 있듯이 왕 섬기듯이 하나님 사귀면 된다는 거죠. 더 웃기는 것은 뭡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친구니까 친구들끼리 맞먹는 사이로 하나님과 맞먹으면 된다는 거지요. 이게 창조신학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빠져요. 이거 보통 엉망진창이 아니에요.
성경에 나오는 부자지간, 부부지간, 친구지간, 성경에 나오는 그 왕과 신하의 관계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라도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게 마땅한데 지 목숨 바치는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잠언서에 보면 아버지는 자식을 뭐로 양육한다? 말씀으로 양육하는데 말씀으로 자식을 양육하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 있었습니까? 한 명도 없어요. 왜냐하면 지가 말씀이 뭔지도 모르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소유욕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그 모든 말씀은 누가 지킵니까? 예수님만이 지키는 것을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된 거예요. 창세전부터 그래요. 잠언서 한 말씀도 못 지켜요. 인간은. 전도서 한 말씀 못 지킵니다. 그 부자지간, 친구지간 뭐가 나와도 못 지킵니다. 인간은 못 지킵니다. 손도 못 대요. 왜? 하면 할수록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뭘 드러나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임이 드러나요. 어떤 인간이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못 지킵니다. 아가서 하나 못 지킵니다.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목숨을 바쳐서 하라. 그런 남자, 남편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없어요. 이 세상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 복종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남편 이용해 먹기나 하지. 복종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요. 없어요. 자기 소유물로 사랑할 때나 하지. 자기 소유물이라는 것은 인간 존재 자체가, 이게 존재권이라고 하는데, 존재 자체가 존재 자체권이 있고, 존재 소유권이 있어요. 무슨 뜻이야 하면,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가 내가 누구냐를 알릴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끌어 모아서 내 소유로 만들 때 비로소 내가 누구냐가 밝혀지는 거예요.
어떤 아가씨가 내가 누구냐를 알기 위해서 될 수 있는 데로 멋있는 남자들만 사귈 때 남자 하나 바뀔 때마다 나는 이 정도 괜찮은 여자야! 라는 것이 자꾸 바뀌겠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지리 못살게 강원도 골짜기에서 밥도 거의 못 먹고 가난하게 살아온 그 사람이 나이 60이 되도록 정말 도시 빈민층에서 가난하게 살아 아예 세상은 체념하듯이, 가난은 내 팔자로 여기듯이 그렇게 살았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루아침에 고급 아파트를 가지게 되면 마음이 달라져. 어떻게 달라지는지 아십니까? 이 아파트는 당연히 원래부터 내가 가져야만 마땅했던 아파트라고 여깁니다.
일반사람들도 여기 부산의 골짜기에 허름한 전세에 살다가 처음에 아파트 30평짜리 분양 받으면 처음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6개월 동안 살아가면 나라는 인간은 너보다 못지않아. 나도 이걸 살 수 있는 그런 처음부터 그런 자격자였었어. 하다가 그 사람이 나중에 한 50평짜리 아파트 살면, 나는 처음부터 너희들과 놀만한 자격자가 되었단 말이야. 라고 하는 거예요.
개척교회 하면서 교인 한 20명 오면, 처음에는 세상에 믿는 자가 20명 될 리가 없어. 이건 말도 안돼. 아마 2/3는 거짓말이나 사기꾼일걸. 이렇게 생각하다가 한 100명 되면, 나는 마땅히 100명 정도로 목회해야만... 이러다 천 명 되면, 천 명이 뭐 많노? 나는 이천 명은 될 수 있는데. 인간이 그 교회를 자기 소유화 시켜 버리면, 소유와 동시에 내가 그 소유에 합당한 존재자가 등장해버려요. 자기 부인되는 게 아니고. 그게 인간이에요.
그게 인간인데 그 인간이 어데 거룩한 말씀을 지가 지켜낸다고? 하나님하고 친구라 하니까 친구라고 맞먹는다고. 성경에 친구라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친구에요. 그게 요한복음인가? 그런 인간은 없다는 이야기에요. 결국. 예수님 빼고는 친구도 없고, 예수님 빼고는 신랑도 없고,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맞먹기는 뭘 맞먹어. 성경해석 개판 같이 개떡 같이 하고 있어. 전부다.
왜? 인간은 십자가 없고, 빠지고 그 자리에 창조신학이 있기 때문에. 자기 고유의 자리에 위에 위신을 차리기 위해서 제일 위에 신을, 신은 제일 높은 분이니까 대우한다고. 지가 넘버 3 쯤 될라고. 넘버 1을 대우해준다고? 대우해줌으로서 넘버 2, 3 로서 자기 위신을 지키는 거예요. 장로들이 목사 섬기는 이유가 목사 좋아서 섬기는 것이 아니고 목사 섬김으로서 지가 장로라는 이 자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 안 당하기 위한 하나의 수법으로 목사를 높이는 거예요. 목사를 높이듯이 장로를 높여라 이 말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둔스 스코투스는 참, 너희들, 너희가 하나님을 아나? 하나님과 연계 되어 있고. 연계 같은 소리하고 있네? 윌리암 오캄에 들어가면, 완전히 잘라 버려요. 신과 인간과 무슨 상관이 있나? 이 바보들아! 하나님하고 인간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걸 얼기설기 연결시켜서 뭐 보겠다고.
둔스 스코투스는 자연의 존재로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게 아니고 오직 계시의 길로만 그 틈을 잇는 다리가 놓을 수 있도록 갈파했다. 96페이지 밑에서 12번째 줄에 나오지요. [그는 오직 계시의 길을 통해서만 그 틈을 잇는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갈파했다.]
이것이 발전해서 나중에 종교개혁이 되거든요. 종교개혁이 되는데 이것 또 요상하네. 한번 보세요. 오직 계시의 길을 통해서만 그 틈에 있는 다리가 될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다리하니까 여러분 뭘 생각합니까? 4영리 생각나지요. 엑스폴로 생각나지요. 애들한테 전도하면서 예쁜 여학생들이 다리 같은 것 많이 그려 줬잖아요.
이 다리를 루터는 십자가가로 봤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칼빈도 십자가로 봤다 이 말이죠. 다리는 거기에 눌러 살라는 뜻입니까, 그것을 통과하라는 뜻입니까? 결국 통과하면 그만 이에요.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십자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등 처먹고 이용했다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다른 노림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계시만 잠시 십자가를 이용하고 십자가를 차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노린 게 뭘까요? 종교개혁자들이 노린 게 뭘까요? 그러면 십자가는 잠시 이용하고, 오직 계시는 십자가를 통해서. 라고 해 놓고 그 다음에 그들이 따로 챙기고자 하는 게 따로 있습니다. 그거 뭐냐?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미쳤나? 네가 구원 받을 자격이 되게. 그러니까 결국은 모든 종교는 뭐냐 하면,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되도 않는 고집인데, 구원받아야겠다는 고집에 대해서는 제가 화이트헤드의 글을 통해서 밝혔습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영원성을 이미 선배들, 존재의 영원성부터 이미 수입해서 또 후배들에게 그걸 남김으로서 지금 자기 존재를 긍정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화이트헤드까지 읽으라고 요구하고 싶지 않아요. 왜? 어려워요. 뭐 라이프니찌까지는 신의 주름이고 뭐, 신의 형상이니까 아는 용어인데 그 뒤에 자기 언급 나오고, 소유 자체권, 소유권 이렇게 나오면 만만치 않을 텐데. 그리고 됨과 과정, 있음, 움직임 이런 용어들 나오고 하면 조금 힘들 텐데. 봐야 됩니다. 사실 힘들게 보면 다른 것이 안 힘들어져요. 역도 힘든 것 들고 나면 지금까지 힘들다고 여겼던 역도는 가벼운 거예요. 그래서 이왕 쓴 거 힘들게 한번 보세요. 또 손 목사님 덜렁 들어서 따로 빼내기 전에 빨리 보세요. 들어가 보지 않았는데, 안 그러면 덜렁 빼버릴 텐데.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책이 있어요. 제목이 지옥의 하나님, 글 씁니다. 그것은 A4용지, 써보니까 현재 써 논 게 170매. 그러니까 왜 행동하는가, 이것은 오십 몇 매지요. 두 배 좀 넘어요. 지금 정리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정리하는데 많이 걸려요. 한 2주 이상 걸립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아마 그게 완성이 안 되겠나? 완성되면 또 올려 버립니다. 게시판에 올려 버립니다.
제 주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왜 지옥을 그렇게 집착하느냐? 이유. 하나님이 지옥에 집착하는 이유. 지옥을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시는 그 이유에 대해서. 그러니까 천국의 하나님이라는 책은 많이 나왔는데 지옥의 하나님은 내 생각에는 처음이지 싶어요. 지옥을 위해서라면, 그러니까 그 글에 이런 게 있어요. 하나님은 지옥을 만들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분이거든요. 그래서 모든 되어 가는 게 지옥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에요. 지옥을 보고도 영광을 받는 분이 하나님이거든요. 지옥을 만들어나서 너무나 보기 심히 좋았더라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왜 그 점을 놓쳐요? 지옥의 불구덩이에 고통 받는 걸 보고 아아, 심히 좋았더라고 외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사랑 없어요. 최고의 사랑입니다.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지옥 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부에요. 그건 사랑이 아니고 그 사람을 내 사람을 내 소유로 만들기 위한 아부라니까. 그렇게 보니까 가덕도 그 사람이 사랑을 많이 한 모양이에요. 그러면 사랑했으면 그것은 사랑한 걸로 족하면 됐네. 또 딴 사랑하기 위해서 개척했다니 반갑네. 얼마나 사랑했는지 나중에 만나서 들어봐야겠어요.
토마스 아퀴나스 봅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 밑에서 네 번째 줄에. 어거스틴과 현격한 그 다음에 뭐지요? 대조. 아시겠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떻다고요? 어거스틴과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어거스틴은 500년경, 토마스 아퀴나스는 1200년경, 700년 차이 나거든요. 700년 후에 어거스틴과 현격한 대조를 이루는 거예요. 왜 대조를 이룹니까? 어거스틴은 뭐 길래? 아우구스티누스와 어거스틴은 같은 사람인데 어거스틴은 뭘 주장했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주장했지요.
은총을 주장했는데 대조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뭘 이야기합니까? 은총이 아니고, 윤리적인 행함이죠. 여러분 은총이 좋습니까, 윤리적인 행함이 좋습니까? 은총이 되려면 우리는 뭣이 무시당합니까? 자신의 윤리적 행함은 개뿔도 완전히 모독당하지요. 그죠? 그런데 만약에 자기 자신이 윤리적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면 무엇의 필요성이 줄어듭니까? 은총의 필요성은 별로지요. 별로 안 중요하지요.
여기서 성경 한번 봅시다. 로마서 4장 한번 봅시다. 하여튼 문제가 뭐냐 하면, 그거에요. 기어이 구원받아 천당 가겠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하여간 내가 보기에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에요. 어데 그런 욕심을 내는지 세상에 예수쟁이는 욕심쟁이야. 하여튼. 그렇게 개떡 같이 살아서 죽어서 좋은 데 갈려 하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흥정이 어디 있어요.
로마서 4장 16절. 그러므로 후사가 된 이것이 무엇에 속하기 위해서 무엇으로 태어난다. 시험 문제를 내야 되겠어. 무엇에 속하기 위해서 무엇이 돼야 된다. 무엇이 아니고. 시험문제 멋지다. 무엇에 속하기 위해서 무엇이 아니고 무엇이어야 한다. 1번, 2번, 3번 뭘 집어넣어야 돼요? 처음에는 무엇에 속하기 위해서?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 뭐는 아니고? 행함은 아니고. 무엇에? 오직 믿음으로. 그러니까 믿음과 행함은 서로 반대 개념이 아닙니까?
이것 해서 그런가? 장하네. 그러면 그거는 복 받은 거고, 성령 있는 사람일 수가 있어요. 자칫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지옥에도 못 들어갈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지옥에 못 들어갈 수가 있다고. 그러니까 지옥, 한번도 경험 못하고 이 땅에서만 경험하고 죽어서는 천당만 경험해야 될 그런 사람이 될 수가 있어요. 그런 사람은 별로 드문데.
이미 사도 바울이 이걸 언급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등장한 이유는 뭐다? 요 문장을 실제로 이렇게 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누굴 등장시켰다? 아브라함을 등장시킨 거예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을 뭐라고 합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러면 후대에 오는 믿는 자는 요 문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없다? 벗어나면 안돼.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는 이것에서 벗어나면 안돼요. 예수 믿고 난 뒤에도 벗어나면 안돼요.
구원 이후란 말이 성립 안 됩니다. 어디 구원 이후가 있습니까? 구원이란 영역 개념인데. 대한민국, 그러니까 비행기 타고 일본에서 한국 오는데, 공간개념 같으면, 부산 들어오면 부산 그 이후, 이것은 말이 되는데, 부산 들어오자마자 이제부터 대한민국이다 하면, 대전 와도 대한민국이고, 서울 와도 대한민국이지, 무슨 대한민국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왜 그런 바탕이 있는 줄 알아요? 그것은 하나님이 하는 일을 자기 구원 받기 위해서 구원 용도로 개념을 정리하다 보니까 구원 이후가 성립되는 거예요. 구원 그 이후에는 행함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같은 구원 같으면, 구원 안에서는 어느 경우에나 행함이 중요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행함은 추방되어야 돼요. 행함을 강조하는 건 추방되어야 돼요. 그리고 거기서 행함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을 증거 하는 행함 외에는 다른 행함은 없습니다.
[이런 대조는 교회사적으로도 나타났는데 토마스로 대표되는 가톨릭주의가 자연과 초자연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이 고착했다면 종교개혁을 통해 어거스틴적 은총주의를 더욱 발전시킨 프로테스탄트주의는 선악 구별의 윤리적 이원론을 형성시켰다.] 그러니까 이 주장이 내가 보기는 안 맞지요. 토마스 아퀴나스를 주장하는 사람이 이래 썼어요.
어쨌든 97페이지 위에서 다섯 번째 줄에 봅시다. 지금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명에서 교부들, 오리겐이 이야기한 거예요. 오리겐은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1000년 전 사람 아닙니까? 오리겐이 인간의 선택적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오리겐은 인간의 선택적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신의 섭리의 직접적 적용을 배제했다.]
하나님이 선택하고 작정했는데 단 어디에 와서는 선택을, 하나님의 섭리가 약화되었다? 인간의 선택하는 거기에만 뺏다는 것이 오리겐의 주장입니다. 왜 그렇게 했냐 하면, 그래야 인간이 자기가 책임이 있고, 책임이 있어야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함의 취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이 뭐요? 묻는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이야기, 은총과 그리고 오리겐 이야기를 다 한꺼번에 통합하려는 게 토마스 아퀴나스에요. 통합시키는 거예요. 아이고, 통합이 잘 되겠습니까? 그 통합 안 될 텐데. 어떻게 통합시키는가가 궁금하지요. 그래서 한번 봅시다.
97페이지 열 번째 줄에. [몰리에는 인간의 선택의 의지만큼은 신에 대해서는 동의해야 된다.] 같은 이야기죠.
[근대의 라이프니찌는, 모든 사태가 그 자체로서는 신의 예정 조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만 우리에게는 우연적인 사태로 경험한다.] 우연적인 사태. 이게 우발성이거든요.
그러니까 라이프니찌의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에요.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 보기에는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만큼 지혜가 모자라니까 순간순간 닥치는 모든 사건과 경험들은 우발성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발성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뭘 알아야 절대적인데 알아야 순종 하겠나이다 하는데 모든 것이 우발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인간들은 그 사건에서 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데 그 반응이 자기 선택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인간의 자기 선택과 지금 모순됩니까, 모순 안 됩니까? 모순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라이프니찌가. 잘 못 들으셨나? 고함지른다고 이해되는 것 아니니까. 아시겠습니까? 하나님 편에서는 예정조화 하듯이 예정되어 있는 것 다 아는데, 인간은 꼴랑 아느냐 말이죠. 모를 때는 기껏 동원하는 게 뭐냐? 자기 성질대로 하는 거예요.
그걸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걸 가지고 욕동이라 하지요. 욕심대로 움직인다, 욕구대로 움직인다는 뜻이에요. 욕동이 처음부터 모난 속에 주름 잡혀 있다가, 그러니까 부정적으로 이렇게 하지 말고 부채라 하죠. 부채가 원래 접는 부채가 있지요. 부채가 살면서 열두 살, 열한 살 살면서 활짝 폈잖아요. 나중에 70 되면 더 펴져서 죽지만. 그 때는 이 안에 학이 들어있고 뭐가 들어있고 나오지요. 그런데 사실은 접혀지면 어릴 때부터 이미 여기에 예정조화, 주름져서 담겨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게 라이프니찌의 주장이다 이 말이죠. 그리고 여기에 담겨 있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신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형상이다 이래요.
반박해 보세요. 반박되는가? 뭔가 십자가도 안 들어가고, 뭔가 복음도 안 들어갔는데 반박이 안 돼요. 그만큼 우리가 공부를 안했다는 이야기에요. 십자가만 전하면 돼지. 백날 목사가 십자가만 전해도 교인들이 이것만 생각한다면 안 되지요.
자, 이왕 어렵게 한 것, 어려운 것 해봅시다. 그 밑에.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과 보에티우스의 방향에서 신의 전적인 지배 아래서도 필연적인 결정론에 빠지지 않고 이 세계가 어떻게 우연적이고 인간의 자유선택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해명한다.]
라이프니찌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훨씬 후에 사람이기 때문에 한 500년 뒤에 사람이기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 방법하고 달라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계의 목적적 질서에서 어떻게 제 1목적 안에서 모든 존재가 섭리적으로 규정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섭리가 왜 어떻게 제2원인자를 매개로 해서 실행되는가]
매개, 매개체. 원인자를 매개라 하는가? 이게 나중에 헤겔의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매개라 하는 것은 일종에 튜브, 파이프 또는 촉매,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요. 도구. 이렇게 되지요.
[이러한 제2원인자의 본질에 따른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사태가 발생하는데, 특히 이러한 우연적인 결과는 순전히 제2원인자의 산물인 뿐인가 아니면 이러한 우연적 결과까지도 신의 섭리 아래 규정되는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잖아요. 모든 걸 아니까 신이라는 명칭을 붙여 준 거예요. 신은 모든 걸 꿰뚫고 잇다는 뜻에서 신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에도 라고 하면, 신은 아니죠. 그러면 인간은 신 앞에서 뭐냐 말이죠. 존재 가치가 뭐가 되느냐 말이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신의 매개물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신의 매개물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로보트처럼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느냐? 그게 아니다. 그럼 우리 나름대로 자유가 있나? 자유가 있다. 결정적인, 하나님한테는 결정적이지만 우리한테는 결정적이 아니고 우연적이다. 어떻게 제일 원인자, 그러니까 하나님한테는 모든 게 결정적 되어 있으며, 제이 원인자 우리한테는 어떻게 우연적일 수 있느냐 이 말이죠. 그게 정리하면 그래요.
공장이 회장이 지시하면 지시대로 움직이잖아요. 우리가 기계 같으면. 그러면 사장님도 결정됐지만 따르는 우리도 결정적이어야지 어떻게 사장님을 결정됐다 해놓고는 우리는 결정 안 됐다, 비결정이다, 우연적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논리상 앞뒤가 안 맞잖아. 하는 거기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떻게 해결했느냐 하면,
[또한 제2원인자의 완전성에 따른 자유선택으로서의 우연적인 결과 역시 섭리에 의해서 성립된다면 이미 섭리적 차원에서 결정지어지므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의미가 상실되지 않는가?]
인간의 자유롭다는 그 자유의 범주가 어디까지 뻗어야 자유냐 이 말이에요. 지가 지옥 가고 싶으면 지옥 가는 것까지 다 자유에 포함되어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해야 된다는 그것도 따지고 보면 자유입니까, 자유 아닙니까? 그거 자유가 아니지요. 그것도. 기도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을 것이고, 기도하게 두 손 모으는 두 손 모아져 있을 것이고, 기도할 고요한 시간 그것도 줘야 할 것이고, 기도할 마음도 생겨나야 되고, 기도할만한 사건도 벌어져야 되고, 그것도 1시간 할 것이냐, 30분 할 것이냐 그것도 지 마음대로 결정되는 게 아니고 30분 하다보니 연탄불 갈아야 되서 30분 만에 끝지는 것도 있을 것이고, 그 어느 것, 도저히 그러면서도 기도를 한 시간 하겠다는 것은 그건 인간의 자유냐, 자유 아니냐 이 말이에요.
30분 만에 기도하는데 연탄불에 올려 논 라면 끊는 것을 미처 모르고 기도해서 10분도 안 되서 기도 끝마치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적어도 한 시간 기도하겠다는 마음은 안들 거 아니냔 말이죠. 한 시간 마음에 들고 기도하다 보니까 결국은 라면 때문에 10분 만에 끝났잖아요. 그때는 한 시간 동안 하겠다는 그 마음 결정은 자유냐, 자유 아니냐는 이런 말이 생긴다 이 말이에요. 그게 만약에 자유가 아니고 진짜 뜻이라면, 왜 10만에 끝질 자유를 왜 한 시간 동안 하게끔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의 실언이냐 이 말입니다.
그게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분명히 가서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된다는 걸 알면서도 보낼 때 곱게 보내지, 뭐 겁주는 것도 아니고 미쳤다고 성령 받은 어떤 딸래미 둘이서 성령 받은 계시라 해서 허리띠 두르고 와서 잡힌다는 이야기를 또 왜 합니까? 그러면. 그럼 가란 말입니까, 가지 말란 말입니까? 도대체.
개척 교회하는 목회자들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이런 이야기 굉장히 많거든요. 개척 교회한다고 목 좋다고 권리금 250만원 주고 소개한 사람은, 여기에 상가 됩니다. 사람들 많습니다. 하고 덜렁 해놨는데 지는 모르고 남들 다 아는데 6개월 뒤에 완전히 도시가 거덜 나서 이사가 버린다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주의 종으로 인정한다면 왜 거기에 계약하게 해서 생돈 수 천만 원 날리게 했느냐 이유가 뭐냐? 개척 교회하는 목사, 그 이야기나 그런 것을 일상적으로 당하는 일반교인들이 자기 사업하면서 당하는 그런 이야기나 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거기에 대해서 목회자가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언질을 준 적이 있어요? 예수 믿으라 하고 끝냈지 언제 언질 준 적이 있습니까? 교인들은 그게 답답해서 왜 내가 여기에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받아서 여기에 장사 시작했는데 장사 시작한지 한 달 만에 거덜 나서 완전히 상가가 폐쇄돼버리느냐 말이에요. 그럼 나는 따라가야 되느냐 하는 왜 시련 주십니까? 하고 그것 때문에 고민돼서 교회 왔는데, 목사는 엉뚱하게 예수 믿으라 하니 기가 찰 노릇이지. 말씀이 거래가 안 되잖아요. 그런 문제를 누가 당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다 당하는 거예요. 그런 문제.
97페이지 제일 밑에 봅시다. [즉 어떠한 존재도 제1원인자로서의 신의 원인성이 미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존재로 신으로서의 궁극적인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천주교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위에 있거든요. 천주교가 칼빈의 예정론하면 씩 웃습니다. 그거, 그것은 기본 아니냐? 기본. 다 아는 것을 왜 그렇게 하느냐? 너거들. 우리 천주교 가운데 안 믿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 믿는다, 믿어. 초짜가 어디서 까불고 있어. 우리 앞에. 초짜가. 기본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어디 있어? 그거 다 아는 거야. 칼빈의 예정론, 우리 다 알아. 우리 믿습니다. 그렇게 해요. 그런 것 가지고 천주교인에게 개신교인들 전도하지 마라. 다 아는 거다.
왜 우리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일 원인자, 제이 원인자 왜 구분하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윤리성 때문인데요. 윤리성이 있으려면 뭐가 성립되어 있어야 하느냐 하면, 법이 있어야 돼요. 미리 한번 봅시다. 할지 안 할지 몰라서. 103페이지 봅시다. 참, 이런 103페이지 이런 귀절 보면, 오늘날 목사들이 정말 신학도 없이 지 멋대로 입에 터져 나오는 대로 지 분풀이 하듯이 설교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법은 영원법과 비영원법으로 구분된다. 영원법은 세계를 통치하는 신성한 기획이다. 이 법은 신성한 이성 안에 있다. 비영원법은 자연법과 실정법으로 구분된다. 실정법은 인간적 실정법과 신성한 실정법으로 다시 구분된다. 인간적 실정법은 국제법과 시민법으로 나누어지며, 신성한 실정법은 모세 율법과 기독교법으로 나누어진다.]
자, 법, 법. 여러분들 이것 보니까 뭐 생각납니까? 노회에서 노회법, 교단에서 교단법, 교회에서 교회법, 그것 생각 안 납니까? 그들이 법 만들 때 그냥 법 만들었어요? 뭐한다고, 어떤 핑계대고 법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신성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런 법이 있어야 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은 지금도 뭐해야 된다? 모세 법을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어떤 근거에 의해서? 실정법인데 그냥 실정법이 아니고 신성한 실정법에 뭐가 있느냐? 신성한 실정법에 두 가지가 있지요. 그래프를 그려보죠. 법이 있는데 무슨 법이 있다? 영원한 법과 비영원한 법. 이 영원한 법을 가지고 아까 이야기한 제일 원인. 비영원한 법은 인간 우리세계. 비영원한 법에서 무슨 법요? 자연법과 실정법.
자연법은 칸트의 도덕법이에요. 인간은 아무것도 안 배우고, 그야말로 짐승이라 할지라고 그 속에 뭐가 있다? 윤리도덕이 들어있다. 일자무식자, 아무것도 없고, 조폭들, 그 속에게도 뭐가 있다? 의리가 있다. 이것은 신이 직접 넣어준 자연법. 이걸 자연법 또는 이성법. 그러니까 이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천이성에 의하면 이성인데, 이것은 뭐냐 하면, 무조건적인 도덕법, 명령, 무조건적인 도덕법.
그리고 자연법이 있고 여기에 뭐가 있다? 실정법. 실정법과 자연법의 차이점은 뭐냐? 자연법은 규칙으로 정할 필요가 없어요. 다 아니까. 너나 나나 다 아니까. 실정법은 뭡니까? 문자화돼야 돼요. 문자화돼야 된다 이 말은, 그 법을 진행해야 될 사람이 뭘 부여 받아요? 놀라운 신적인 카리스마를 지당하게 받아야 되겠지요. 그리고 타인과의 차별되게, 일반, 법을 지켜야 될 사람과 차별되게, 자기도 물론 준수하지만, 법의 제정자가 갖는 그 권위성. 권위성을 영원한 법으로부터 계통도에 따라서 실정법을 받는 권위성을 받아야 되겠지요.
이 법을 누가 만듭니까? 천주교에서는 교황, 대표자가 교황이고 그 밑에 추기경, 그 다음에 주교, 제일 말단 신부까지 이거에요. 결국은 그들의 천주교 법에 의하면 성당법은 지켜야 된다, 안 지켜야 된다? 성당법을 만약에 어기게 되면 뭘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의 계통도에 따라서 실정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고해성사를 해야 될 입장이죠.
그런데 그게 오늘날 천주교뿐만 아니고 어디도? 개신교도 해당되지요. 각 교회 정관, 규칙, 교회법 이런 것을 지켜야 돼. 왜? 안 지키면 그 법을 만드는 당사자가 자기 사적인 견해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어디로부터 권위를 부여 받아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에 대한 모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신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누굴 공격했다? 하나님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 법을 왠지 교인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 무척 좋아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면 싫어해요. 은혜를 싫어하고 윤리적인 표를 내기 위한 법을 지키는 꺼리가 나오면 그렇게 좋아해요. 아까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뭐라 했습니까? 어거스틴은 은총이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윤리라 했지요.
그러니까 이 실정법은 두 가지 있지요. 하나는 뭡니까? 모세법이죠. 또 하나는 뭡니까? 아니지, 아니지. 실정법에는 두 가지 있는데 신성한 인간들의 실정법. 이것은 뭡니까? 이것은 신성한 실정법인데 두 가지가 있죠. 하나는 모세법이고 하나는 교회법. 교회법은 인간들 속에 포함됩니까, 안 됩니까? 교회법은 인간들 법에 포함 안 되지요.
그러니까 이런 아이디어가 오늘날 개신교에 얼마나 잘 먹혀 들어갑니까? 천주교가 아니고 개신교에 말이죠. 목사가 하는 짓이 법 만드는 짓 하잖아요. 40일 연속 새벽기도. 그거 어기면 뭐 돼요? 법을 어기게 되지요. 목사 자체가 신성한 권위, 일반적인 권위가 아니고 인간적인 권위가 아니고 신성한 권위를 부여 받기 때문에 목사가 하는 모든 짓거리는 전부다 뭐다? 신성하게 되는 거지요. 목사 만든 내뱉는 게 법이 되는 거지요.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좋아해요. 왜? 얻어맞는데서 쾌감을 느껴요. 어디 종속됨으로 쾌감을 느껴요. 그야말로 이런 아이디어는 무슨 아이디어? 악마의 선악체제에 의한 악마의 아이디어지요. 악마에요. 이 체제가. 말짱 다 없애 버려야 돼요. 전부다.
유대인들이 금식할 때 예수님은 어디가 있었습니까? 술집에 가서 술 먹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구원 받으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구원해 준 놈만 구원 된다. 끝. 왜? 모든 말씀은 예수님, 내가 지킬 몫이기 때문에. 구원 욕구가 강력함과 관계없이, 누구든지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지, 나쁜데 갈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거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냥 오라 하면 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온 사람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는 것. 그리고 내가 건강함 받는 것도, 의로움 받는 것도 나의 행함이 아니고 가림을 받았기 때문에 복이 있는 거고. 그러니까 이것이 나의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 행함이 아니고 오직 믿는 것이다.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 행함이 아니고 오직 믿음. 이게 믿는 게 어디 있어. 전부 다 행함이지.
인간적 실정법 또 두 가지 있죠. 하나는 뭡니까? 이야기해 보세요. 하나는 국제법, 또 하나는 시민법. 국제법, 시민법 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국가와 국가도 하나님 뜻이 있어서 제정했기 때문에 서로 서로 잘 먹고 잘 살라 이 말이에요. 잘 먹고 잘 살면 두 나라 붙어 전쟁하면 기도는 어느 쪽으로 해야 됩니까? 둘 다 사랑의 예수님 앞세워서 전쟁하는데 국제법이에요, 시민법이에요?
그래서 이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모세의 율법은 세 가지로 되어 있다는 그 아이디어가 여기서 나온 거예요. 모세의 율법이 하나는 시민법, 하나는 제사법, 또 하나는 정결법. 아니지 시민법, 하나는 정결법, 제사법 같은 것이고 하나는 도덕법. 개신교에서 뭐라 합니까? 개신교에서 하는 소리가 모세의 율법은 세 가지로 되어 있다. 하나는 뭐다? 시민법, 하나는 정결법 내지 제사법, 또 하나는 도덕법. 그러니까 정결법은 안 지켜도 되지만 시민법과 도덕법은 지켜야 된다. 이런 아이디어가 그 사람들,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부를 전혀 안 했어요. 그런 사고방식이 자연신학에 근거한다는 것을 몰라요. 그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치는 교수도 몰라요. 그 사람들은, 인간들이 요구하는 게 뭐냐? 착하면 천당 가겠지. 라는 그러한 희미한 종교심리를 그냥 이용해서 사람들만 그냥 예배당 채우면 그걸로 장사 끝나는 거예요.
오늘 낮에 대구에서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뭐든지 발전됐다, 크다, 이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왔느냐 이 말이죠. 발전됐다는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온 줄 알아요? 옛날에 동양철학에는 발전됐다는 상황이 없어요. 발전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동양에스는. 인간이면 다 발전이 나오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동양철학에는 여여사상이에요. 여여사상은 항상 동일하게, 동일하게가 돼요. 지난주와 동일하게, 오늘도 동일하게. 그러니까 죽은 귀신도 동일하게. 죽은 귀신도 동일하게 살아 있는 거예요. 발전이라는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발전이라는 게 어디서 나왔느냐? 근대사상에서 나왔다고. 왜냐하면 중학생 보세요. 야야, 너 컸네. 발전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키가 컸다는 거지요. 키가 컸다는 게 왜 발전입니까? 키 큰 게 뭔가? 이게 숫자가 크잖아요. 양적으로 많아진 걸 발전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잡을 때 발전하길 기다렸습니까? 키 크기를 기다렸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무슨 개념이 없어요? 발전 개념이 없지요. 키 크고, 내가 너무 어리니까 나이 많아 시건 없어 찾아볼까? 이런 개념이 없지요. 그렇다면 개척교회 하는 목사 보고, 요새 교회 주님께 영광 돌립니까? 이런 인사를 들어 본 적 없어요. 몇 명 모입니까? 몇 명 모이느냐를 묻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발전했느냐를 묻거든요.
그러니까 발전이라는 자체가 과연 어디서 나온 개념인가를 본인들이 몰라요. 소년 다윗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니까. 다시 말해서 성경 자체를 몰라요.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발전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에요.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건데. 평소에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인들이 교회에 와요. 다들 발전이니까 발전 자체가 뭐가 되어 있어요? 질적인 것은 다 빠져 버리고 양적이에요.
수천 명 모아 놔도 그것은 교회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으로만 모일 때만 교회지. 수만 명 떼거지로 모여도, 조용필 콘서트 보세요. 몇 만 명 모인다고. 브라질에 가면 세계에서 제일 큰 축구장에 무려 15만 명 모이는 축구장 있어요. 7만 명씩 모이는 축구장 있어요. 그거 모이면 교회입니까? 교회라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모이면 교회가 아니에요. 오직 복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올 때만 교회지, 교회 발전을 위해서 부흥을 위해서 모이면 교회가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날 복음을 아는 목회자의 제일 딜레마가 뭔 줄 알아요? 오늘날 복음을 아는 목회자, 설교자의 제일 딜레마가 뭔 줄 압니까? 관심 없는 걸 이야기해야 된다는 괴로움이에요. 전부 관심 두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다는 딜레마에요. 관심 없습니다. 퍽도 관심을 둬요? 기적적인 사람입니다. 관심 없어요. 전혀 관심 두지 않는 것에다가 이야기 해대는 거예요. 그게 목회 5년 한다고, 6년 한다고 나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줄어들지요.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사명이거든요.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아무나 하나. 사람들이 전혀 관심 두지 않는 것에 대해서 외쳐야 되는 그 사명을 누가 과연 감당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아야 된다는.
또 있다. 또 있다. 여기에. 신성한 실정법은 모세 율법과 기독교법으로 나뉘지요. 모세 율법은 다시 무슨 법, 무슨 법? 도덕법과 예절법과 그 다음에 재판법. 그러면 물어봅시다. 사람은 법을 몇 개 지켜야 됩니까? 그야말로 유대인들처럼 365가지 이상 될 거예요. 바로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죽은 이유를 알겠지요. 자진해서 이게 설득되는 걸 이야기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예수님 쪽에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어떻게 죄 있는 놈들이 법을 논하느냐 말이야. 어떻게 죄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