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계 2:10-11 (둘째 사망)
Re..계 2:10-11 (둘째 사망)
이름 : 이근호(IP:)
둘째 사망
2006년 4월 30일 설교 말씀: 요한계시록 2:10-11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성경은 나름대로 복음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심’입니다. 로마서 4:5에 나오는 이 말씀에 대해서 막상 사회에 나가면 찌든 때와 같은 인간들의 의식들이 덮쳐지고 또 덮쳐져서 나중에 거의 보이지 않게 됩니다. 사회의 원리는 이것입니다. ‘날로 발전하라’입니다.
즉 ‘네가 위대해지는만큼 사람 대접 받는다’입니다. 뭐든지 열심히하고 잘 할 때, 비로소 남들이 알아준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예수님이 고생해서 형성해놓은 기쁜 소식이 나중에 보면 별반 신통치도 않는 지나쳐도 무방한 위로의 말 정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성경은 말씀은 또다시 그런 묵은 때를 털어내는 방식으로 작용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딛고 서 있는 실상을 드러내는 겁니다.
살아있는 사람보고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실례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란 사는 것을 목표로해서 결코 죽는 것을 목표로해서 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들의 이러한 마음을 고려해주지 않고 실제상황을 그대로 폭로합니다. 모든 것의 근원과 뿌리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마치 아파트 바닥 공사를 하는 것과 같은 공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보통 가정에서 바닥은 화려한 카페트가 깔려있고, 애들 낙서도 해놓고, 음식물 국물도 쏟아져 있어 얼룩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바닥 공사를 개시하게 되면 그런 것은 다 무시됩니다. 그 밑바닥의 실상만 드러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류의 밑바닥은 ‘둘 째 사망’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 둘째 사망이 내뿜는 저주로 인해 그 위에 건설해있는 모든 인류의 운명이 결정지어졌습니다. 사망이라는 단어 앞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차별이 없습니다. 마치 무채색과 같습니다. 아무리 호사로운 각종 색깔로 치장해 놓아도, 검은 색으로 그 위에 덧칠해 버리면 모든 것은 무거운 검은색 아래로 사라져버리고 그 어떤 차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은 인류에 대해 차등없이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마가복음 10:46에 보면, ‘바디매오’라는 이름을 밝힌 소경 걸인이 한 사람 나옵니다. 왜 이 사람의 이야기가 성경에 박혀 있어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분인가는 이 바디매오의 입장 서봐야 안다는 겁니다.
거지란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게다가 소경입니다. 신으로부터 저주를 흠뻑받은 몰골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부르면서 다가오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왜냐하면 고상한 예수님을 대하기에 바디매오가 너무나도 수준이 낮아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주위 사람들의 그 어떤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바디매오에서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의 조롱과 만류가 그는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에 보면, ‘마지막 아담, 즉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자신의 뿌리가 죽음과 저주에 놓여 있음을 아는 자에게는 앞 뒤 돌아볼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소중한 분으로 다가오는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키 작은 삭개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가 현재 어떤 처지에 있는 가를 우리의 밑바닥을 통해서 분명히 해두시고자 하십니다. 모두들 스스로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분위기에 속에서 더 살고자 예수님을 찾는 식이라면 소경 바디매오는 삭개오는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살 가치도 없이 저주만을 받아야 될 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목숨을 바칠 마음이 없는 고백은 고백도 아닙니다. 적어도 고백이라면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죽도록 충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신에게만 존경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철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벌려나가시는 전체 일의 내막을 알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창세기부터 봐서도 거기에 에덴동산이 나오는데, 그 동산의 유지 원리는 ‘살려주는 식’입니다. 즉 피조물이 스스로 사는 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려내는 식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원리가 적용되는 세계입니다. 그 증거는 바로 강물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강물이 발원지를 가지고 흐릅니다.
그래서 동산 구석구석을 젖게 하십니다. 이 생명수로 인해 에덴동산은 최고로 행복한 동산이 되고 생명이 충만한 동산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보면, 인간은 그 동산에서 추방당합니다. 추방당한 세상의 특징은, ‘살려주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본인의 애씀과 노고와 힘듬으로 인하여 겨우 살아가는 원리가 적용됩니다.
이 노고를 더욱 힘들게 하는 저주의 숨들이 땅에서부터 뿜어져 나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 힘이 빠지면 결국 도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닌 것이 인간입니다. 땅의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이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팔자입니다. 에덴 동산과 참으로 대조가 되는 세상입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고 하나님의 신으로 지은 성전이 나옵니다. 이것은 새성전인데 이 새성전이 완공되면 그 성전의 문지방에서 세상을 젖게 할 생명수가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오다가 점차 깊어져서 무릅과 허리보다 더 깊게 차서 나중에는 인간의 모든 것을 덮고도 충만해지는 생명수가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변의 황무지가 모두 옥토가 되고 물고기도 생기를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 배에서 생수를 흘러 넘쳐나온다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어린 양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그 물로 인해 온통 생명나무 과실로 가득찬 세계를 천국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성경적 원칙이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그 원리입니다.
개인적으로 훌륭해서가 아니라 성도가 속해있는 큰 창고 같은 영역이 계속해서 생명수를 뿌려주기에 ‘경건치 않는 자도 의롭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구원이라는 것도 어떤 창고인 것처럼,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도 악의 큰 창고 안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바르게 살고 싶어도 악에게서 퍼부어지는 폭풍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바디매오처럼 곱게 죽어가면서 오로지 예수님의 생명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일 전체를 알지 못해 자신의 자존심을 염두에 둔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1-03-10 15:57
011강-요한계시록2장10-11(둘 째 사망)-rev060430
설교: 이근호 목사님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10절-1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400페이지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아멘.
성경의 이야기를 듣고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차이가 많이 납니다. 성경이야기가 옳은데 바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경이야기를 덮어씌우는 찌든 때 같은 것들이에요. 바깥세상을 살면서 때가 붙어가지고 성경에서 하는 말씀이 잘 분간이 되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장로님도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만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다.’로마서 4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다, 이게 성경의 핵심이라면 교회에서는 그게 또렷하게 들리고 또렷하게 느껴지고 또렷하게 믿어지는데 바깥세상에 나오면 네가 실제를 살아야 인간 값을 한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네가 선한 일을 해야 하나님이 있다면 복이라도 주는 거지, 나쁜 짓만 했는데 무슨 복이 오느냐 이 바보야!(ㅋ 그려, 나 바보다) 이런 통념이 더덕더덕 때처럼 붙게 만들어요. 목욕탕에 가봤자 우리의 육체의 때만 씻겨지지 우리 정신에 묻어 있는 세속적인 사고방식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때를 붙이다 보니까 우리는 바짝 긴장을 하면서 ‘그래, 잘나야 돼’ 세상에서 발자국 옮길 때마다 ‘그래, 나 잘나야 돼’ ‘남에게 허점을 보이면 나만 손해지,’ ‘나는 약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 돼야 돼 그래야 그게 나에게 힘이 돼’ 스트레스를 받치는 쪽으로 긴장하면서 산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약속하시기를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축복이 달리 축복이냐,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보다 더 큰 복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이런 식으로 교회에서는 따끈하게 얘기하는데 세상에서 나 잘나야 돼, 뛰어나야 돼, 완벽해야 돼, 허점이 없어야 돼, 약점을 죽여야 돼(혹시 목사님께서?), 이렇게 되면 기쁨이 몽땅 달아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닌데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이기는 자에게는 둘 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다.」돼 있어요. 성경에서 ‘사망’이라는 말을 은근슬쩍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사망이라 하는 것은 장례식 할 때 흘깃 느껴보는 것이지 평소에는 사망이라는 짙은 어두운 그림자가 집구석에 들어올까 싶어서 겁을 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는 아예, 둘 째 사망이라고 들이대고 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기초를 세상적인 찌든 때를 덮어씌웠기 때문에 그것을 뜯어내는 작업을 주께서 하십니다. 오래된 아파트 입주할 때 보일러가 신통치 않으면 바닥을 뜯어내잖아요. 바닥에 보면 애들 낙서도 있고 우유 쏟은 거 커피 쏟은 거 찌든 때가 있더라도 바닥을 뜯어내버리면 세상적인 때가 와작 다 뜯기죠?
뜯으면서 ‘바닥에 이런 게 있었나?’ 일꾼들이 망치로 바닥을 처가지고 뜯어낸다고요. 아무리 일을 맡겼지만 남의 집에 와서 행패부린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드는데 평소에 우리가 안 봤던 감추어진 부분들이 바닥 청소할 때는 다 뜯기죠. 뜯기면서 바닥의 보일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보인다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근원적으로 살려내기 위해서 우리가 평소에 억누르고 감추고 있던 바닥을 말씀이라는 걸 가지고 뜯어내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말씀을 가지고 뜯어내는 작업을 하게 되요. 따라서 ‘죽음’이란 이야기를 성경에서 했거든 도리어 섭섭하게 여기지 마시고 ‘속이 시원하다’ 이런 느낌을 가져야 됩니다.
세상에서는 성별의 차이, 직업의 차이 이런 차이에 따라 다른 대우를 합니다. 보통 인간의 윤리 도덕이란 게 있기 때문에. 그런데 아주 급한 일이 벌어질 때는 세상에서는 남녀 차이 이런 걸 두지를 않아요. 산에 가면 낙엽이 있는데 거기다 담배를 태운다든지 화기를 피우거나 하면 산불 방지 하는 사람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스렌지 등을 다 뺏어버립니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그리 나오나?’ 나이 많고 적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산불나면 큰 일 안거든요. 그래서 화기를 뺏어버린 것처럼 성경 앞에서는 남녀노소라는 게, 직업? 재산? 이런 모든 것의 차이를 없애버려요. 이걸 ‘무채색’이라 하는데 이런 겁니다. 무채색이란 노랑 빨강 알록달록 색깔이 많더라도 검댕이, 검정색으로 전체를 칠해버리면 전부 다 시커멓잖아요.
시커멓게 하시는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겁니다. 차이나 차별로서 자기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그것이 주님의 둘 째 사망이라는 그 표현 하나에 완전히 검은색으로 다 돌아 가버려요. 둘 째 사망에. 목사 장로 집사 차이도 없어요. 둘 째 사망 앞에서는 모조리 까맣게. 장판 밑바닥을 다 뜯어내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묻혔던 그 때들이 적어도 속 시원하게 말씀을 통해서 완전히 뜯김을 당하는 속 시원함으로 여러분들이 느끼셔야 됩니다.
그래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짜 진솔한, 하나님의 복음에서 ‘경건치 않은 자도 의롭다’ 해주시는, 그것도 돈도 안 받고 무상으로! 그 취지를 이제는 세상 어디에 나가도 우리는 버티고 있어야 됩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나오는 이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통 이름이 잘 등장하지 않는데 거기는 이름 한 사람 있습니다. 바디매오라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소경입니다. 옛날에 소경이라면 거지란 뜻이에요. 소경이 돼가지고 어디 가서 뭐하겠습니까. 그냥 구걸하고 사는데.
자기를 밑천 삼아 동정을 유발해서 구걸하고 사는데 그 마가복음 10장에서 그 바대매오를 왜 예수님께서 부각시키고 성경에서 그걸 드러내느냐 하면, 그게 재밌는 것이요, 바디매오가 예수님 앞에 다가올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메시아에 대해서 뭘 안다고, 네가 신학에 대해서 뭘 알아! 이 저주받은 인간아!’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바디매오라는 사람을 왜 부각을 시켰냐 하면,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말림에도 불구하고 이 바디매오라는 사람은 꿈쩍도 안 했어요. 이게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집어넣어준 믿음은 사람들의 편견과 핍박에도 아랑곳없이 자기 고집대로 밀어붙이는 믿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조금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전부 다 살고자하는 사람들이에요. 살고자 하는 사람만 살 가치가 있다. 이런 것이 쉽게 말하면 빨랑 노랑 파랑 초록 아름다운 색깔로 장식돼 있는 사회라면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바디매오라는 있으나마나하는, ‘저 인간 왜 사냐? 귀신은 안 데려가고 뭐하냐?’ 할 정도로 정말 무가치한, 사회발전에 전혀 도움 안 되는, 그런 죽음의 흔적을 갖고 있는 바디매오를 집어넣어서 신앙이라는 것이 더 잘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쪽이 신앙의 진수냐 아니면, 죽음의 짙은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는 그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그 쪽이 더 심플하게! 더 쿨 하게! 깔끔하게! 예수님의 예수님 됨을 더 시원하게 나타내느냐 그걸 한번 보라 이 말입니다.
죽어가는 저 저주받은 놈이 무슨 예수가 필요하냐! 라고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에이,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하겠지만 사실요, 교회 10년 20년 다니면서 제일 크게 오는 시험이 뭐냐 하면, 내가 사람들에게 밉상 받았는데 내가 뭣 하러 교회 나가냐? 하는 겁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인간취급도 못 받는데 무슨 재미로 예수를 믿냐, 예수 믿고 난 뒤에 계속 이 상태로 나가면 난 예수 포기하겠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때 예수든 누구든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야말로 이렇게 슬픔을 안겨다주는 그런 예수라면 믿으면 믿을수록 손해 아니냐 하는 본인도 마귀의 시험처럼 수시로 다가올 수가 있습니다. 수시로. 그런데 그 바디매오의 경로를 보세요. 그 사람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구걸을 좋아서 하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주님이 주신 신앙이 있기에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놀림에 끄떡도 않고 진정한 예수님의 예수님 됨이라하는 것을 죽음을 남들보다 더 짜릿하게 느끼는 자에게만 남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가까이 땡길 수 있다 이 말이죠. 이게 둘 째 사망이에요 이게.
이게 둘 째 사망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남에게 뽐내고 싶은 조건을 많이 얻기 위해서 교회 오는 게 아닙니다. 여기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했는데 제가 한 번씩 귀 있는지 조사해 봐야 됩니까? 다들 귀가 있어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밑바닥을 제대로 아냐 모르냐를 가지고 들을 귀가 있다, 들을 귀가 없다고 판정하는 겁니다.
둘 째 사망의 기초위에서 둘 째 사망이라는 배경과 환경을 잊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가라, 이 말입니다. 둘 째 사망을 잊지 말고, 놓지 말고 그 위에 살아가라 이 말입니다. 제가 수요일 날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자기 목숨과 바꿀 수 없는 고백이라면 그건 고백도 아닙니다. 3+4= 얼마냐? 7이다. 산수시간에, 수학시간에 미적분 풀고 방정식 풉니다.
여기 16번 문제 풀 사람 나와! 풉니다. 그런데 못 풀었다고 ‘죽여라’ 이런 건 아니거든요. 우리가 수학문제 푸는 것은 우리가 안 죽기 위해서 하는 거거든요. 안 죽기 위해서 한다는 것은 결국 뭐냐면, ‘나는 살아야 되겠다’ 하는 것이 밑바닥에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야 되겠다, 절규하고 호소를 하더라도 그 밑바닥은 애들 방바닥에 낙서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그 바닥마다 뜯어내야 됩니다.
살고자 해도 결국은 사망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은 그 밑바닥에 이미 죽도록 돼 있습니다. 죽도록 돼 있어요.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둘 째 사망이라는 용어를 과감히 사망하기 싫어하는 우리에게 집어넣어버립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둘 째 사망에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이걸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경이라는 것이 일반 사회생활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요. 둘 째 사망이라는 것을 기초로 했을 때, 그걸 알고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고린도전서 15장46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다.」이런 말씀이 있어요.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자기의 밑바닥을 본 것, 자기는 ‘죽어야 마땅한, 저주받아 소경된 것도 죽어 마땅한 거다,’ 느끼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이 ‘떴다!’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기 죽음을 기초로 했을 때 어떤 예수님과의 관계냐 하면 살려내는 영으로서의 예수를 본 겁니다. 예수님을 ‘살려내는 영이다’ 이 말은 바디매오 입장에서는 내가 내 스스로 살릴 때 내가 산다,는 생각을 포기한 거예요. 포기해버린 겁니다.
예수? 나를 살려내는 영이지! 주위에서 ‘바디매오가 왜 가느냐!’ ‘너희들이 아무리 방해한다 할지라도 나는 예수 포기 못한다.’ ‘ 저 분 아니면 내 인생 끝났다.’ 저 분은 살려내는 영이다, 이 말이죠. 이것보다 더 참신하고 깔끔한 신학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ㅋ)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경에 바디매오 이야기뿐만 아니고 삭개오 이야기도 마찬가지예요.
나무 위에 올라가서 보았다. 동네 약장수가 왔습니까? 아니, 그냥 삭개오가 어떤 취지에서 나무 위까지 올라갔는지는 누구만 아느냐 하면 예수님만 알아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예수님과 삭개오만, 지네들끼리만 아는 거예요. 말이 이상하지만... 「삭개오야 오늘 너희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이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이 삭개오에겐 없습니다.
오늘 너희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이 말을 여러분 듣고 싶어 하십니까? 그럼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느니라.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도 의롭다 해주신다는 그 이야기나 삭개오에게 너희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그 이야기나 같은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그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아직까지 목숨을 포기를 안 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아! 이게 골치꺼리입니다. 그 목숨 속에 자존심도 들어있고 온갖 것 다 들어있는데 여기 10절에 보면 뭐라고 들어 있느냐 하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돼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한테 충성하느냐 하면, ‘나’에게 충성해요. 나에게 충성한다고요! 날마다 자기 거울 앞에서 ‘충성!(경례붙이고)’ 이러고 있다 말이죠. 자가기 자기에게 충성하고 있는 거예요. 죽도록 충성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앞에서 충성하는 겁니다. 매일 아침 되풀이하면서.
지난 시간에는 이것이 왜 이렇게 안 되느냐, 그것은 주님의 미사일이 관통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제가 말씀드렸는데요, 그걸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왜 사람들이 죽도록 충성 않느냐 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꿰뚫은 미사일을 원대한 주님의 프로그램을, 그 핵심을 잡지 못해서 그렇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꿰뚫은 하나님의 전체 계획을 모르니까 우리가 목숨을 어디에 소비해야 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거예요. 주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떼 봅시다 그럼.’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이 나오는데 에덴동산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 구조를 보게 되면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만, 생명의 강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유브라데강. 유브라데 강이 에덴동산에서 발원하여서 에덴동산의 전부를 적십니다. (할렐루야!) 그 물이 없으면 에덴동산의 어떤 수목도 과실을 맺지를 못합니다. 사람도 살지 못합니다. 에덴동산의 특징은 생명을 제공하는 물줄기가 발원지로부터 흐르고 있고 그 발원지 중심으로 사람과 과실들이 배치돼 있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살려주신다는, 에덴동산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기 때문에 살아간다는 그러한 원리 원칙이 살아있는 동산, 이게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특징은 뭐냐, 창세기 3장에 보면 네가 수고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사는데, 그것도 한시적으로 살다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대조된 사회입니다. 원리 원칙이 달아요.
이 땅에서는, 추방된 세계에서는 저주가 내뿜는 뜨거운 기운을 마시면서 가시와 엉겅퀴, 치열한 경쟁, 돈 1억쯤 투자해서 치킨 집 차려놓으니까 앞, 옆, 저쪽 이쪽 생겨가지고 망해버렸어요.(ㅋㅋㅋ..완전 폭소하고 마는 녹취자) 그런데 저쪽에서는 천만 원 들여 인테리어 하고 나니까 또 장사 안 돼, 또 어떻게 해볼까 하는데 저쪽에서는 큰 메이커가 들어와.
이거는 병원이든 학교든 교회든 전부 다 마찬가지예요. 얼마 전 어느 대학교 총장이 학생이 없어가지고 중국에 있는 학생 모아 장사하려고 비자 만들어주는, 대학총장이 아니고 완전 셀러리맨이 되는. 제가 광주에 가서 들으니 요즘에 제일 좋은 직업이 고등학교 선생이래요. 그 사람들 모이면 골프 친대요.
‘공직’이란 이름의 귀족이죠. 이처럼 내가 살지 않으면, 내가 잠자고 있으면 안돼요, 누가 내 몸을 매로 후려치는 것 같아요. 일하라고 매우 매로 쳐서 부단히도 내쫓기는, 시달리는 그런 개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생명에 의해서 유지되는 세계라는 이런 말씀을 왜 제가 하냐면, 우리가 어떤 고생을 하는 것은 둘 째 치고라도 하나님께서는 일을 꾸미십니다. 어떤 일을 꾸미느냐 하면, 에덴동산과 똑 같은 원리와 같이 외부의 능력에 의해 살려내는 조건 하에서 살아가는 세계를 주님께서는 꾸미고 계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 47장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2장에서 붕~ 띄웠죠? 붕 띄워서 에스겔47장으로 날아갔습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성전이 지어집니다. 이것은 사람의 느이력에 의해서 지어진 성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지어진 성전이 있어요. 그 새 성전 동쪽 문에서 뭐가 나오느냐면 물이 졸졸 나와요.
물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물이 발목까지 나오고 난 뒤에 측량을 해봤어요. 300미터 측량해보니까 이번에는 발목이 아니고 무릎까지 올라오고, 무릎에서 온 몸이 잠기고, 나중에는 그 물에 의해서 목까지 다 잠기는 멈추지 않는 생수가 쏟아져 나오는 그런 성전이 새 성전이라는 겁니다. 마치 춘천에 가면 소양강 댐 같아요.
이걸 가지고 요한복음7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냐면 「나를 믿는 자는 내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리라」했습니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입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또 나오겠지만 에스겔 47장에서 제대로 된 성전 하나 있으니까, 제대로 된 성전 하나의 효과가, 생명수라는 에덴동산에서의 동일한 효과가 제대로 된 성전에서만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도 우리가 발목만 적시는 정도가 아니고 넘치고 넘쳐서 헤엄치도록 만드는 그러한 생명수로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다는 겁니다. 그 생명수에 의해서 에스겔서47장에 보니까 모든 물고기와 그 모든 넓은 황무지가 옥토로 변하는 기적이 등장한다고 돼 있어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왜 사람들은 죽도록 충성하지 않는가? 그거는 하나님의 계획을 전체 다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새 성전이 완공되었다면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와 같은 생명을 그리워한다면, 여러분들이 소경된 바디매오나 키가 작은 삭개오라 할지라도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거절하고 예수그리스도만 믿어야만 합니다.
다른 수가 없어요. 그거 포기 못합니다.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이 뭐냐, 우리가 얼마나 애쓰느냐 그것은 저리 치워버리고, 헌금 얼마 했습니다, 이런 거 다 치우고 어떤 장, 틀, 어떤 영역을 만들어요. 그 영역 속에 있다면 그 영역 속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안에서 넘치도록 생명을 부여받고, 생명에 젖는 일을 꾸미시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성경 몇 장 읽고...그게 아니에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죽은 나사로를 건져냈잖아요. 이것은 하나님만이 꾸민 어떤 영역이에요. 어떤 장이다 말이죠. 돈 몇 푼 벌겠다고 주님 버리고 그런 것은 너무나 철없는 짓입니다. 너무나 철이 없어요.
자, 여기까지는 쉬웠는데 이 담부터 어렵습니다.(ㅋㅋ,,제발 어려워주세요.) 뭐가 어렵냐 하면, 하나님께서 제한 없이 생명을 무제한으로 넘치도록 생명을 주시는 것은 요한계시록 22장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생명수가 하나님 보좌에서 흐르는 물이 생명의 열 두 과실을 맺히게 하고, 요한계시록 22장이 하이라이트로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완전 대축제로 끝나버려요.
어린 양의 축제로 끝나버려요. 날마다 때마다 생명나무 과실을 마음껏 먹어라 말이죠. 그리고 영생 얻으라 하고 끝나버리는데 그렇게 끝나는 한편,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살려주는 영이 되기 위해서는 뭐냐, 잘 들어보세요. 이 중요한 대목에 졸리면 안 됩니다. 뭐냐면, 현재 우리가 아무리 살려고 애를 쓰는데 이것이 철없는 짓이다. 왜?!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영역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잘만 하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해도 ‘네가 속해있는 영역 때문에!!’ 너는(우리) 거기서 선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놓여있는 이 세상이 진실이에요. 여러분들 집에 선풍기 있거든 시험해보세요. 평소에 말을 똑똑하게 잘 하시더라도 크고 센 선풍기 앞에서 말을 하려고 해보세요. 선풍기 바람이 왱~~ 부는데 ‘나 당신을 사랑해~!’ ‘뭐라꼬?????’ 바람에 의해서 글자(말이겠지요. ㅋ) 다 깨져버려요.
지금 우리가 어떤 입장이냐 하면,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해봐야 세상의 역풍이라 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세상의 죄 속에 우리의 선 같은 이런 것은 다 깨지고 다 날아가 버려요. 산산조각 다 흩어지고 없습니다.
담배 끊으려하는 사람 사흘 가면 많이 간 거여요. 사흘 지나고 난 뒤에 ‘에이, 화딱질 난다이’ 이 세상은 왜 그리 화딱질나는 일이 많은지,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왜 그렇게 억울하다고 느껴지는지, 사람이 억울하다고 느껴지면 뭔가 풀어야 되요. 안 풀면 병 되니까. 푼다는 바로 그것이 죄악의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죠.
우리는 죄를 먹고 죄를 마시고 만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고 팔짜입니다. 고쳐지지를 않아요 이거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걸 아셔요! 우리가 모르지. 우리는 착하게 사는 것 따로 줄 세우고, 내가 나쁜 짓 하는 거 따로 줄 세워가지고 대차 대조표 해가지고 나쁜 일이 많나 착한 일이 많나 오늘은 착한 일 세 개하고 나쁜 일은 두 개 했으니까 주께서 한 개 남았으니 복 주겠지. 만날 이걸 대조한다고요. 그러한 시도가 이 세상의 사망 앞에서는 사망의 폭풍 앞에서는 다 유명무실합니다.
제 이야기는 그거예요. 이 세상은 죄 대가로 죽게 되니까 그냥 곱게 죽자고요! (ㅋㅋ) 그냥 죽으면 되요. 그게 편해요. 무거운 짐은 벗어버리는 겁니다. 사도바울 소원이 뭔 줄 알아요? 일찍 죽는 겁니다. ;‘나는 언제쯤 죽나,’ 이게 소원이에요. 언제쯤 죽나 그게 소원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삼층 천을 봤거든요.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말이죠.
내 것 이라고 하는 것을 조립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따로 남겨두지 않았어요. 없애버렸어요! 지워버렸어요! 왜냐, 자신의 밑바닥은 항상 둘 째 사망이었기 때문에. 여기 첫 째 사망 둘 째 사망 나오는데 첫 째 사망은 우리 육체의 죽음이고 둘 째 사람이라는 것은 요한계시록21장에도 나오고 22장에서도 나오는데 마귀의 마귀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영역이 둘 째 사망이라는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은 둘 째 사망은 지옥이고 지옥은 둘 째 사망인데 지옥이라는 이름의 둘째 사망을 만든 이유는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가를 마귀를 하나의 빌미로 삼아서 마귀와 그에 추종하는 사람을 빌미로 삼아서 하나님이 이토록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역을 따로 만드는 겁니다.
대조적으로 에덴동산과 천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토록,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실 정도로 자비가 넘치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또 우리를 끄집어내시고 천사와 주님과 더불어서 따로 만든 것이 둘 째 부활이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죠? 하나님께서 일을 꾸미신 거라고. 하나님께서 일을 꾸미셨어요.
뭐냐 하면 자신의 속성을 모든 우주 속에 세기기 위해서 주님은 이렇게 사랑스럽고 천국. 주님은 이렇게 혹독하고 무서운 분이라고 지옥. 두 가지의 상반된 속성을 동시에 다 담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둘 째 사망이라 하는 것은 누구 잡아넣기 위해서 하는 것이냐 하면, 악마를 잡아넣기 위해서 만든 곳입니다. 거기에 왜 우리가 끼어듭니까! 그게 뭐가 좋은 곳이라고! (ㅋ) 거기를 그렇게 들어가려고 애를 씁니까!
주님의 저주를 받으면 이처럼 인정사정도 없이 혹독하다는 것을 모델로 삼아 보여주기 위해서 마귀도 지금도 열심히 활동을 해야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바디매오나 삭개오나 자신들에게 주는 사랑은 어떤 조건과 연결되지 않았고 우리의 주인공 되시는, 살려주시는 어떤 분, 살려내는데 주특기를 가진 분, 살려내는 게 전공이신 분. 자기 피로써 많은 사람을 대속하시는 데에 전문가이신 분,
그런 예수님의 살려내는 능력에 의해서 영생을 얻었다는 무리가 한쪽에 몰려있다는 것이 바로 천국이에요. 그러니까 결국,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보게 되면 뭐냐 하면, 영역입니다. 영역. 어느 영역의 저촉을 받고 있고 어느 영역의 효과를 받고 있느냐, 너는 어떤 창구에 들어앉아 있느냐 이 말입니다.
창구에 앉아가지고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느냐가 아니라 수학 몇 점 받고 영어 몇 점 받은 이게 아니라 어느 영역에 포함돼 있고 포섭돼 있고 종속돼 있느냐 그걸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겁니다.
그 천당에서 경건치 않은 자도 용서한다는 의로움의 약속이 계속 여러분의 어깨 위에 쏟아지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밑바닥이 사망이고 죽음인 것을 다 아시고. 우리 밑바닥이 어떤가를 아시고 그러니까 바디매오처럼 주님의 십자가의 피가 얼마나 귀한가를 대조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라 이 말입니다.
여기는 어떤 영역인데! 어떤 창고인데. 여기에 어떤 개인의 고집과 자존심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자존심 쎄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나도 한다면 하는 놈이다’ ‘많이 해라 그래 많이 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어차피 에덴동산 아니기는 마찬가지인데요. 비교하지 말고 경계하지 말고 세상에서 어떤 비난이 온다 할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주님의 약속을 놓치지 않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되지도 않는 상식가지고 주님의 그 귀한 능력을 욕되게 했는지 잡스러운 것을 섞어 넣었는지 주님의 고귀한 은혜와 사랑을 섞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되지도 않는 성화와 착한 것을 집어넣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미 복을 쏟아지게 받고 있으면서도 따로 복 달라고, 특별히 나에게만 복 달라고 우기는 자존심과 이기주의. 주여! 그것이 밑에서 올라오는 우리의 사망적인 속성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살려내는 주님의 그 특기를 우리가 존중할 수 있는, 주님께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는, 이런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진실한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