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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광주 강의(05. 3. 24) 13-3강의고린도후서

Re..광주 강의(05. 3. 24) 13-3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13-3

오늘은 좀 어렵지만 끝까지 어렵게 가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넘어가면 말씀이 인간의 육신과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과 만날 수 있는가? 불가능합니다. 육신이 말씀을 만나면 말씀을 거부하고 배척해 버립니다. 또 의미를 다르게 왜곡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왜 주는가? 말씀을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 육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말씀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을 보면,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무엇과 무엇을 대비시키는가 하면, 문자(의문)와 영을 대비시키지요.

그러니까 육신이 볼 때 말씀을 뭘로 보는가 하면 문자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문자로 보게 되면 문자 해독이 일어나지요. 그렇게 되면 육신은 자체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이것이 결국은 뭔가 하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 해석이 가능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는가? 해석되지 않는 원인이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해석이 제대로 되었어요. 말씀은 영에서 해석이 잘 되었어요. 그런데 해석이 안 되는 것은 너의 육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씀을 가지고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감당하는 것이 아무에게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일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육신으로 가능하단 말입니까, 안 된단 말입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육은 말씀을 문자로 밖에 해석할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어요. 아무리 철학을 공부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어도 인간은 문자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문자로 해석하는 것이 뭐가 나쁜데? 라고 나오는데, 과연 말씀이 문자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아니요. 영으로 해석되어야 이해됩니다. 그런데 우리 육신으로서는 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수완이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돌비에 새겨지지 않고 우리 마음에 새겼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3절에 보세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편지가 우리 마음에 새겨질 때 우리 능력으로 새겨집니까? 그리스도의 편지를 볼 때 그 편지를 우리 마음에 새길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냐는 것입니다. 없지요. 그냥 없다고 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것을 뭘로 보는가 하면, 문자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육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속까지 그리스도의 편지가 박혔다면 이것은 결코 우리 육의 솜씨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라고 하면 보통 신비적이고 기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고,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었다면 그보다 더 큰 기적과 능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기적을 받아놓고 뭘 더 원해?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면 영으로 해석한다고 했으니까 영으로 해석해 봅시다.
영으로 해석할 때는 그냥 영으로 해석한다고 하면 안 되고,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 ‘육 때문에 방해 받음. 아픔을 당함’ 이러한 쪽으로 해석이 주어집니다.

영이 우리에게 해석할 때는 그냥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해석하는 해석자 되시는 분이 우리의 완악한 육 때문에 상처 입은 그런 모습으로 해석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눈 감고 성경 어디를 펼쳐도 거기에서 십자가의 아픔이 나오는데, 이렇게 되어야 영적인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논리가 이렇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이 해석할 때는 그냥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육신은 자꾸 문자로 보기 때문에 문자로 보면 육신의 능력이 나오지요. 육신의 능력으로 성경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적인 해석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런 방해 없이 영이 오지는 않는단 것입니다. 꼭 영이 해석할 때는 우리에게 이런 방해를 거쳐서, 쉽게 말해서 상처와 고난을 받으면서 영적으로 해석이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한 것이 신약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구약 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 모세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수건을 썼지요. 그 수건 덮어 쓴 것이 괴로웠겠습니까, 신났겠습니까? 괴로운 거예요. 왜 괴로운가 하면, 모세는 영적인 사람인데 산 밑에 있는 사람들은 우상이나 좋아하고 우상같은 하나님이라야 납득이 되는 전혀 산 위에 있는 영적인 하나님을 이해 못하는 그런 사람들과 만날 때 결국 중간 매개체로 수건을 덮어 써야 대화가 될 정도로 너무나 추잡하고 더러운 놈들이란 것입니다. 모세는 너무나 거룩하고 고상하고.

그 거룩함에 의해서 저쪽 더러운 놈들은 자칫하면 죽게 돼요. 그러니까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썼지요.

그렇다면 수건은 무엇을 감당하는 것입니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악성과 무지함과 오류를 수건이 담당하는 조건 하에 모세와 백성과의 대화가 가능합니다. 수건을 벗어버리면 대화가 안 되고 두려워서 도망가야 하는 처지게 되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누가 그 수건의 역할을 해야 하는가?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간단히 표현하면 ‘성령’인데, 성령을 표시할 때 그리스도의 영으로 표시하면서 이것을 모세의 수건 역할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수건을 쓸 필요 없이 벗겨도 감당하는 이유가 그리스도의 영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7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 되어 있지요.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완전히 제거되어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것 까지는 이해되지요? 이해되었다고 간주하고.
지금 문제가 뭔가 하면, 편지만 주면 안 되잖아요. 그리스도의 편지를 해석할 수 있는 지침서도 같이 주어야지요. 그 지침서로 뭘 줬습니까? ‘문자로는 보지 말라.’

문자라는 것이 뭐냐 하면, 언어입니다. 언어란 것은 실재 사물과 일치 됩니까, 안 됩니까? 일치되지 않아요. 일치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중세에 ‘유명론’ ‘실제론’ 이런 철학이 나옵니다.

‘개’라는 개념과 진짜 사물의 개하고 같습니까? 다르지요. 개라는 것은 발발이, 세퍼트, 진돗개 이런 것을 합쳐서 관념적으로 총칭할 때 ‘개’라고 하지요. ‘개’는 없어요. 발발이가 있고 세퍼트가 있지요.

‘사람’은 없어요. 철수, 영희, 영자가 있지요. ‘너 누구야!’ 라고 하면, ‘사람이야.’ 전도환은 ‘본인은 본인이야’ 이거는 말이 안 됩니다. 보편적인 속성을 개별자에 같다 붙입니까? 네가 ‘본인은 본인이야’ 라고 하면 나도 ‘본인은 본인이야’ 라고 하면 둘이 똑같습니까?

‘사람’은 없어요. 다만 직립 보행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지각을 가지고 있고 등등의 것을 총체적으로 묶어서 ‘사람’이라고 개념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자’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철수’하고 철수라는 사람하고 같습니까? 아니에요. 그냥 이름을 같다 붙인 것 뿐이에요. 그러니까 언어는 붕 떠 있는 거예요.

‘구름’이란 문자를 분해해 봐야,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기억(ㄱ) 밑에 모음 우(ㅜ)를 붙이고 ‘름’을 붙인 것뿐이지, 수증기 덩어리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문자는 허구지요.

문자는 허구에 불구하지요. 그렇지만 문자(언어)를 사용하는데, 허구와 허구가 만나서 형식 논리가 나옵니다. 형식 구조가 나와요.

이미 인간에게는 따로 ‘신’개념이 있어요. 따로 ‘신’개념이 있으니까 뭘 붙입니까? ‘신’ 혹은 ‘하나님’이란 이름을 붙여 놓았어요. 그 ‘하나님’을 가지고 성경에 문자로 기록된 ‘하나님’에게로 가져갑니다. 빈손으로 가지는 않아요. 맨 마음으로 성경을 읽지는 않는다고요.

‘여호와’같으면 이미 ‘여호와’ 개념이 따로 챙겨져 있어요. 선입견 또는 선관념을 가지고 간다고요. 예를 들어 ‘사랑’이라고 한다면,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이란 개념을 가지고 가요.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성경을 보니까 ‘사랑’이란 말이 나와요. 같은 문자니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라고 일방적으로 채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포이에르바하는 ‘투사’라고 합니다. 인간이 신을 믿을 때는 그 신이라는 것은, 신과 인간 사이에는 인간은 자기와 자기의 본질을 쭉 잡아당기는 버릇이 있어요. 이렇게 쭉 잡아당겨서 신까지 당겨요. 그래서 신과 인간이 통하니까. 나는 부족하고, 한계가 있고, 실수가 많다. 이런 제한된 나를 늘여보면 신은 완전하고, 무한하고, 모든 것을 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무한하고, 전능한 것을 신이라고 잡아놓고, 자기를 낮추면 그것이 신에게 영광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투사’입니다.

인간은 의식의 흐름이 있으니까, 의식은 끊어집니까, 안 끊어집니까? 의식은 단절이 없습니다. 현재가 몇 초입니까? 현재는 몇 초가 없어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박혀 있는 것이 현재입니다. 책을 1시간 전부터 재미있게 읽고 있으면 1시간 동안이 현재입니다. 그러나 급해서 5분 만에 음식을 먹고 식당을 나가면 5분이 현재입니다. 이처럼 의식은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의식에서 하나님과 나 사이가 끊어집니까, 안 끊어집니까? 안 끊어집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오니 나를 용서해주시고 사랑해 주세요.’ 이것이 뭐냐 하면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라는 것입니다. 포이에르바하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은 포이에르바하가 인간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신을 믿는 것은 당연한데 다만 신이 살아 있다고는 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내가 뭔가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살아 있어야 합니까? 내가 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까?

애인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다. 죽었는데도 꼭 살아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애인이 살아 있습니까? 죽었잖아요. 이미 죽은 것이 애달프고 안타깝다 할지라도 살았다고 간주하지는 말자는 것이지요.

신이 나보다는 능력이 많고 훌륭하지만 그것이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포이에르바하는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기는 인간이 늘 가지고 있는 사기입니다. 안 해도 될 사기가 아니고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사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안 믿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다 믿는데 각자 만들어낸 신이라는 것입니다.

포에이르바하의 주장은 기독교만 구원 받는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만든 신에 의해서 다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지는 않지요. 다만 구원 받는다고 소망을 가지고 있지요. 신자이든 신자 아니든.

이런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에게 성경을 보면서 문자적 해석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멋진 예들이 철학에 가득 들어있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하면 여러분들이 걱정스런 눈으로 보는데, 방금 했잖아요. 영적인 것. 영적인 해석은 ---
문자적 해석이 뭔가 하면 선입견을 가지고 볼 수밖에 없더라. 그런데 선입관을 옹호하는 쪽으로 해석하면 그 해석은 나를 위대하게 만들기 때문에 다 엉터리 해석이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다윗처럼 바르게 살자’ 이런 것.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모든 말씀은 내게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말씀을 누구나 다 싫어해요. 예수님을 다 싫어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모든 인간들이 다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에. 로마서 3장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죽음의 티를 내기 때문에, 죽음의 티가 성경 말씀을 보면 볼수록 더욱 노골화 됩니다. 모든 말씀을 볼 때 자기를 옹호하는 쪽으로,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결국은 말씀을 잘못 해석했다는 죄목이 추가적으로 이뤄집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부자청년을 어릴 때부터 말씀을 지키고 경건하게 살았다고 해요. 이 자체가 뭡니까? 예수님을 자진해서 떠날 수밖에 없는 요인이었습니다. 자기는 십계명이란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은 정말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어요. 그런데 그 지킨다는 것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개입되지 않는 상태에서 지킨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입관으로 지켰다고 자기를 변호하는데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어떤 성경 말씀도 못 지킵니다. 어떤 말씀도 지킬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1,000번을 외쳐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0장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어요. 환장할 노릇이에요. 구원은 얻어야겠고. 예수 이름 불러도 그 예수가 아니고. 뭘 어쩌란 말입니까? 해도 안 되고, 안 해도 안 되고.

‘마음의 고백’이란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이 찾아와서 구원되었습니다. 라는 이 고백. 나로 하여금 죄인의 괴수로 만들고 그분만이 의인이며 자신의 의를 우리 의로 낚아챔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되었습니다. 라는 그 고백이 생겨나는 사람은 바로 영적으로 성령의 자유함으로써 용납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제 고린도후서 3장 자세히 들어가 봅시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피곤하신 것 같아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수건을 덮어 썼습니다. 그런데 이 수건은 거룩과 속됨을 완전히 드러내지요. 이 수건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들은 속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수건을 덮어 씀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거룩한 쪽이 되었어요.

문제는 거룩과 속됨이 만나면 속됨이 죽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죽게 되어 있어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수건을 쓰고 내려오고 난 후에는 법궤라는 것이 있어서 피 묻은 뚜껑으로 덮어 놓았기에 가능하지 만약 법궤에 손대든지 법궤를 열어 놓으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쏟아져서 다 죽어요.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장소에서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은 불로 향로불을 피우다가 그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만큼 위험해요.

모세가 수건을 덮어 썼다는 말은 결국 말씀에 대한 영의 해석과 문자의 해석인데, 문자의 해석을 하게 되면 사실은 그 말씀이 문자를 죽이는 거예요.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했어요. 이것은 뭔가 하면, 영은 죽어야 될 자를 살려내는 식으로 말씀이 해석되어야 참된 해석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말씀대로 하면 나는 죽어야 당연한데, 그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십자가의 보혈 피로 말미암아 이 말씀이 나로 하여금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말씀이기에 나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할 때, 이것을 우리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속된 자가 못 지킵니다. 속된 자가 거룩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속된 자는 속된 채로 남아 있어요. 중간에 영이 와서 개입해서 구원 받았지 내가 거룩한 사람으로 되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작년에도 돈을 사랑했고, 내년에도 사랑할 거예요. 계속 사랑할 거예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고 했는데, 나이 93세가 되어도 더 살고 싶어 합니다.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무리 연세가 많아도 더 살고 싶어 해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산 것은 다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못 지킵니다. 못 지키니까 그 말씀을 붙들고 어디로 달려가야 합니까? 십자가로 달려가야지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자만이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 이런 말씀들이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에 십자가만 기록하면 되지 다른 것이 기록되어 있는가? 십자가와 함께 우리의 속됨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기철학에서 제일 큰 문제가 뭔가 하면, 이성은 우리가 조절되는데 감정이 조절이 안 되서 문제예요. 그래서 초기철학에서는 이것은 신화로 정리했어요. 그러니까 윤리 도덕은 우리가 의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사랑한다든지 미움이 찾아온다든지 이런 감정은 우리 밖의 요소, 그러니까 신적인 요소지요. 신이 우리에게 준 감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신께 빌고 제사 드려야 할 문제지 내가 조절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왠지 사랑스럽고 왠지 미운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때는 반드시 원수가 발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없는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저놈이 미운데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셔서 봐준다. 이것은 원수가 아니지요. 적당히 미운 것이지요. 진짜 원수는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원수로 남아있어야 그것이 원수거든요. 이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우리는 결국 사랑 못합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가 없어요. 사랑하면 친구지 그게 무슨 원수이겠습니까?

성경에 이런 말씀이 굉장히 많아요.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는데,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많다면 그 길은 넓은 길입니다. 여럿이 가는 좁은 길이 어떻게 좁은 길입니까? 찾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이 어떻게 좁은 길입니까? 넓은 길이지.

우리의 문자 해석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 내 살과 피를 먹으면 그 속에 생명이 있다고 하면 있는 줄 알라는 말이지요. 성경 말씀을 지키니, 못 지키니 그것 때문에 아등바등할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의 살과 피가 너를 살렸다는 것이지요.

도마라는 제자가 뭘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예수님의 창자국보고 알았어요. 못자국보고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인 것을. 창자국, 못자국은 십자가입니다. 저분의 창자국, 못자국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 다 가져가버린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저분과 나의 관계가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고 나는 구원 받은 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그 다음 말씀 보는 것은 뭔가? 확인 작업입니다. 이래서 내가 죄인이구나. 이래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구나. 이 피를 증거하는 해석만이 참된 해석이다. 라는 것이 바로 영으로 하는 해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선입관을 믿을 것이 없는데, 우리는 사람들을 내편으로 만들 때 만족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이제는 항상 주님의 사건에 의해서 십자가 바라보도록 되어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증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감당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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