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60404 부산강의-화이트헤드(2)
Re..20060404 부산강의-화이트헤드(2)
이름 : 한윤범(IP:)
20060404 부산강의-화이트헤드(2)
(강의: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두 번째 시간에서는 기존의 신학이 다 깨집니다. 다 깨진 이유가 뭐냐 하면, 기존의 신학이 무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왜 무능하냐 하면,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신이란 것은 세상에 일어난 일을 해명을 다 해 줘야 돼요. 이 세상 일어날 일을 다 해명을 해 줄 때 그 신을 소개하는 목회자가 일반 교인들이 어떤 질문을 해도 아, 이것은 하나님이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했습니다. 해명이 되는데 아까 같이 하나님이 이성으로서 자꾸 이성으로 해버리면 자꾸 자투리를 버리게 되는 거예요.
김밥 말고 반듯한 놈은 팔고 자투리는 다 버리잖아요. 자꾸 버리는 것은 잊어놓고 이것만 따로 챙겨 놓고 이것만 신의 뜻이다 한다면, 그러면 버려진 것에 대한 신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그걸 해명을 해줘야 되는데 만약에 반듯하게 이성적으로, 이성적은 다른 말로 윤리적 아닙니까? 윤리적으로 만약에 반듯하게 규명을 해버리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감정이라 하는 것은 윤리와 이성적으로 따질 수 없는 감정이 오히려 더 많아요.
오후 2시에 예배 시간인데 왜 이승엽이 야구한다고 예배 참석 안하냐 말이죠. 물론 세계야구대회에. 젖힙시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오늘 한일전 하는데 젖힙시다.
참, 화이트헤드가 똑똑한 게요. 컴퓨터가 없었을 때에 컴퓨터 때문에 고민한 적 있습니까? 그럼 컴퓨터를 있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게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화이트헤드가 따져보자는 거죠. 컴퓨터를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그러면 컴퓨터를 없었을 시기에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습니까? 모르잖아요. 컴퓨터가 나오고 난 뒤에 아아, 이런 에러가 생기고 바이러스가 있고 여러 가지 새로운 지혜가 기술이 있잖아요.
그러면 컴퓨터 있고 난 뒤에 나오는 기술을 참으로 옛날 토마스 아퀴나스나 어거스틴 시대에 이미 그것도 컴퓨터 나올 때 있다, 이야기해 주어야 할 텐데 그때는 21세기가 아니라서 몰랐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몰랐으면 그것은 결국 불완전한 신이 되는 거예요. 이런 김밥하고 잘라둔 게 있단 말이죠. 잘라둔 거니까 이건 나쁜 거라고 그건 하나님이라고 보여줄 수 없는 거라고 그냥 시답지 않게 버렸던 그것이 우리의 거짓된 신을 고발하는 재료들이 된다 말입니다. 증거물이 된단 이 말이죠.
그 세계야구대회라는 것이 없었으면 오후 2시에 예배드린다는 것은 이것은 뻔한 것이고, 이것은 하늘이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오후 2시에 예배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협잡을 해서 세계야구대회 만들어서 그것도 중계 방송하는 돌발사태가 벌어지고 나니까, 갑자기 청년들이 목사님, 예배시간 좀 늦게 합시다. 지금 7회인데 안됩니다. 갑자기 이런 발상이 떠오른다면 그건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전에 야구를 있게 한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목사뿐만 아니고 일반교인들에게도, 특히 청소년들한테도 점점 더 나이가 많아서 나중에 교회도 안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새롭게 추가된 그 경험을 가지고 기존에 내가 목사한테 배운 것 하고 서로 해명이 안 되니까, 나는 그런 하나님 같으면 신뢰성이 없다는 겁니다. 신뢰성이 없는 하나님 같으면 나중에 늙어서 오겠다는 겁니다. 지금은 안 오겠다는 겁니다. 지금은 나한테 인생의 반려자로서 인생의 인도자로서 별 신뢰성을 못 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 안 나오는 거예요. 딴 게 더 바쁘다 이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이냐? 화이트헤드는 아주 기가 찬 예를 들지요. 아이가 젖을 달라고 합니다. 그럼 엄마가 젖을 줍니다. 아이가 이것이 적응이 되어서 시도 때도 없이 젖을 달라고 합니다. 엄마가 안 줍니다. 아이는 앵앵 울지요. 젖 달라고. 그런데 안 줍니다. 아이가 뭘 깨닫느냐 하면, 아, 젖을 달라는 시점이 따로 존재한다는 하나의 페이드인, 인식의 업그레이드되지요. 인식이 성숙되지요. 자기 뜻대로 다 해줄 때에는 애가 천하에 모든 것이 절대적인 신인 줄 알았는데 잘 들어 보세요. 절대적인 뭔 줄 알았다고요? 신인 줄 알았는데 유형적인 뭔가 자기 이성적인 배고프니까 젖 달라고 분명히 올바르게 요구했는데 그게 사태가 안 될 때에는 기존의 자기가 절대적인 신이 이다, 아니다? 아니고, 어머니가 나보다 더 높은 절대적인 신이란 것을 아는 계기가 되지요.
신은 인간이 신이 아님을 까발리는 쪽으로 사건을 일으킨다는 게 화이트헤드의 이론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만약에 인간이 기도해서 그냥 전지전능하다며 아부를 떨면서 주는 전지전능하십니다.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만약에 차곡차곡 다 돼버리면 만약에 10번을 들어줬는데 11번 째 안 들어주면 그 신을 내가 버리게 되면 누가 계속 신이 돼요? 내가 계속 신이 돼요. 또 내 소원 들어주는 어떤 교회 없나? 또 교회 찾아가는 거예요. 자기 소원 들어주는 곳을 찾아간다고.
그런데 이 세상은, 인간은 뭘 갖고 있다고 했어요? 처음에 이성적이지요. 인간의 행동은 나는 나니까, 본인은 본인이야, 전두환 대통령. 나는 나니까. 나는 나라고 구별할 때는 누가 있다 했습니까? 아까 한 것, 복습해 봅시다. 복습해야 기억나니까. 누가 있다 했습니까? 객체와 내가 끊어져야 되지요. 그러면 나는 객체로 있음으로서 나는 절대적인 자아가 주체가 되지요. 그런데 주체가 내가 절대자이기 때문에 나의 이성도 뭐가 됩니까? 절대적이 되지요. 그런데 이성적으로 행하면 이게 돼요, 안 돼요? 안 된다 이 말이죠. 물건 하나 못 팔아요. 이래 가지고. 때로는 아부를 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교회 조 장로님은 교사 출신이라 그런지, 굉장히 바른 소리를 잘 하세요. 하여튼 들어보면 빈틈이 없어요. 그러니까 조 장로님의 뜻은 이거에요. 왜 내가 바른 소리하고 성경에 어긋남도 없고, 바른 소리하는데 왜 안 따라주느냐? 이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에게는 상대방이 옳은 소리한다고 호응해 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 옳은 소리하네. 하고 외면할 수 있는 자유가 있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옳은 소리하는데 왜 동조 안 합니까? 라고 할 때에 글쎄요, 옳은 소리하는 줄은 이해하는데 별로 동조하고 싶지는 않네요. 왜 그런데요? 내 기분입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인간은 이성, 이성 하지만 그건 핑계고 결국 사람들은 기분 따라 삽니다. 누구든지 기분 따라 살아요. 기분 따라 산다는 말은, 결국 인생을 사람들은 억지로 삽니다. 왜? 사람 기분 같으면 일하기 싫어요. 에덴동산이고 싶어요. 일은 안 하는데 돈 많고, 먹을 것 많고, 원하는 것 갖고 싶고, 이게 에덴동산이거든요. 그러니까 세상은 기분 따라 가면 상당히 살짝 기분 나쁜 게 세상이야. 제대로 짜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짜증난다는 말은, 짜증나면서 살아야 되니까 결국 결론이 뭐냐 하면, 인생은 억지로 사는 거예요. 애들도 억지로 살고, 시험도 치기 싫은데 억지로 쳐야 돼요.
그리고 사람들이 학교 학생들만 시험 친다고 한다는데 목사도 매주 설교시간에 시험 치는 시간이에요. 그것도 안 보고. 그러니까 안 보고 시험 치는 게 힘들 때는 어떤 목사들은 다 적어서 읽기만 하잖아요. 큰 교회 목사들. 여러 번 해야 되니까 귀찮아서 읽기만 하는데 그 시험은 시험이 아니지요. 적어 논 거 녹음기처럼 되풀이 하면 되지요. 중들은 시험을 안 쳐요. 녹음기 있으니까. 그냥 녹음기 틀어놓고 확성기 틀어놓고 온 손님한테 염불만 하면 되는데 목사는 설교를 하는데 준비는 하지만 이걸 거의 안 보고 하니까 혹시 틀리면 나중에 반발 들어오고 시험 치는 시간이라. 그래서 목사는 설교하고 난 뒤에 스트레스 받아서 아무 이야기하기 싫어요. 밥맛도 뚝 떨어지고, 점심 먹으면 소화 안 되고 그래요. 그렇지요? 이상원 목사님.
사람은 억지로 살아요. 억지로 살면서도 기존의 신학대로 한다면 억지로 살면서도 이래서는 안돼. 나의 이성과 윤리는 건전해. 하나님이여, 영광 돌립니다. 본인은 억지로 살면서, 주께 찬양합니다. 미쳤나. 그런 신은 때려 치워라! 하는 것이 화이트헤드에요. 본인은 억지로 살면서 감사의 척을 하고, 기뻐하는 척을 하고, 복음이 그렇게 좋다면 왜 오후 2시를 10분 늦추느냐 말이에요. 이거 말이 안 되거든요. 야구 안 나왔으면 야구 이전에는 복음이 좋았지. 그럼 야구 되고 난 뒤에는 야구가 더 좋은 거예요. 이게 무슨. 앞으로 월드컵 보세요. 월드컵 비상입니다. 월드컵 날 교회 안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것까지 종속이 아니고 포섭할 수 있으려면, 바로 이렇게 신의 어떤 이성에 반발하는 요소가 어디 안에 있다? 오늘 제 강의 제일 중요한 순간이에요. 잘 들어보세요. 인간의 이성에 반발하는 요소가 어디 안에 있다? 인간에게 있다. 인간에게 있는 이 요소가 신과의 포섭적 관계라면, 신은 이성적인 신이 아닙니다. 라는 게 화이트헤드의 신관입니다. 신은 이성적 요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성적 하나님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게 화이트헤드의 하나님이에요. 이성적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첫 번째 강의에서 A는 A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이건 이성에서 나오는 거예요. A는 B가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A가 B 될 수 있고, B가 A 될 수 있고. 한 마디로 종잡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이걸 화이트헤드는 겸손이라고 합니다. 신에 대한 겸손이다.
그런데 신에 대한 겸손을 하지 않고 인간들은 뭐냐 하면, 제가 강의 처음 한 것, 잊어버렸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줬다? 로고스를 준 거예요. 로고스가 뭐가 됐습니까? 율법이 된 거죠. 하나님은 법을 줘서 그 법을 지킬만한 이성까지 우리에게 줬기 때문에 그 법을 잘 분석하면 그걸 지키게 될 수 있고, 지키면 말씀을 지켰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공식이 기존의 신학체제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그냥 노니시고, 인간은 여기서 억지로 살고, 다만 그 경계선에 뭐만 있다? 이성적인 법만 있으면 이것이 참된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 이성적인 신 가운데 뭐가 있냐 하면, 흔히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성육신.
성육신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으로 따져보니까 법에 의해서 죄인이 되니까, 이 죄인이 돼버리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의롭게 만들었지요. 그런데 인간은 죄를 졌잖아요. 뭔가 보충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보충하기 위해서 뭐로 보충하느냐 하면, 인간이 행할 의로움을 법을 다 이루시고, 그 다 이루신 그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보충하게 되면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인간도 의롭고 로마서 3장에 나오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하나다. 이게 전통신학이라는 겁니다.
가만 들어보면 은혜로운데 그런데 화이트헤드가 이 신학에 대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게 되면 사랑이라는 것이 뭐가 되냐? 로고스가 하나의 경계를 짓게 되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이 성육신했지요. 그러면 석가모니는 성육신 안 했잖아요. 석가모니 믿으면 안 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사랑을 보여줘서 우리가 구원받자 해버리면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 예수라는 것이 이게 한계 지어져요. 이게 경계 아닙니까? 석가모니는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이라 하면 이게 뭐가 되냐 하면, 객체가 돼버립니다. 객체가 된다면 이 객체와 뚝 떨어진 주체가 따로 형성되지요. 아까 했잖아요. 이제는 제가 여러분한테 요구하고 싶지 않아요. 나도 화나서. 객체가 있다면 주체 사이에 이게 연결이 안돼.
그렇다면 주님을 믿을 때 누가 믿는 믿음이어야 믿음이고, 누가 사랑한다는 사랑을 동일하게 가져야 사랑이냐를 새로 정의해야 돼. 그 정의하면 여기 중간 단계 있을 게 아닙니까? 토마스 아킨파스라든지, 루터가 믿는 믿음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러면 루터는 객체지요. 루터가 믿는 믿음이 십자가 믿음이라면 나와 루터 사이에 또 뭐가 있어야 돼요? 루터까지는 안 되지만 뭐, 주기철 목사라든지, 안 그러면 이근호 목사라든지 이게 아니고, 와 이카노. 뭔가 이상한 중간에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근호 여기 옵니까? 하나의 객체라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라니까.
예를 들어서 목사님이, 목사 상담 중에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목사님, 상담 있습니다. 예. 저는 왜 목사님처럼 믿음이 없습니까? 상담해 주세요. 이게 제일 힘든 상담이거든요. 목사님은 믿음 좋아서 그렇게 설교도 잘 하시고, 기쁩니다. 이렇게 하는데 저는 목사님 설교 들어도 안 기쁜데, 목사님처럼 기쁘게 해 주세요. 결국 뭐냐?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 말이죠. 너와 나 사이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그걸 지라드라 하는 사람은 모방, 모방만 할 뿐이지 동일성은 없다는 겁니다. 모방이라는 말은 뭔 뜻입니까? 절대로 때려 죽여도 동일하지 않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모방만 한다면 결국은 뭐가 문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게 되면, 때려 죽여도 예수와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손성식 목사님이 그 책을 추천해서 제가 읽어보고 있는데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화라는 것은 핑계에요. 신화라는 자체가 핑계거든요. 신화라는 말을 해도 되지만 다른 말로 하면 요즘 말로 하면 상징입니다. 상징은 상징으로 남지, 상징은 항상 허구로서 떠돌아다녀요. 언어 자체가 상징이니까. 언어 자체가 어떤 능력이 안 나와요. 그래서 거기서 속죄양 해도 속죄양,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고 허구에 불과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예리하게 그 점을 파고드는 거예요.
예수님이 사랑을 했다. 믿어라. 누구처럼 믿을꼬? 답변이 없는 거예요. 화이트헤드 식으로 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면, 화이트헤드는 그걸 인정하지 않지만 만약에 그걸 인정한다면, 그 사랑이 아까 아기가 젖 달라고 할 때 아직 엄마는 몰라요. 자기만 알지요. 그런데 엄마 젖을 안 줌으로 말미암아 뭘 압니까? 엄마의 존재를 알지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랑을 사랑답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믿음이라 철썩 같이 믿던 것을 사건, 사건, 우발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걸 깨부수는 방법으로 그걸 접근해서 이제 알았느냐, 이놈아. 전에 믿었던 것은 사랑도 아니지. 이게 사랑이야. 라고 하는 방법으로 나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온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스무 살 때 믿음이 서른 살 때 되어서 엉터리 같은 것으로 알았다면, 그러면 사십이 될 때는 무슨 또 변동사항이 있을지 누가 장담하느냐 말이죠. 아직 인간은 아침저녁으로 헷가닥하는 게 인간인데.
그러니까 화이트헤드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그건 일리가 있지요. 우리가 사랑의 한 객체가 되어서 믿자, 믿자 해서 믿는 게 아니고 저쪽에서 가만있는 게 아니고 사랑이 쪼르르 와서 우리가 엉터리 같은 사랑을 내쫓고 참된 사랑을 깨닫게 하는 그런 사건, 사건들을 우리 내부에서 유발시키는 내재적인 하나님이 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종속이 아니고 포섭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 화이트헤드가 기존의 신에 대해서 이렇게 공격합니다. 기존의 신은 자존자, 독존자다.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다.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3장 16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스스로 있다는 말은 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창조의 배후를 캐내지 마라는 말이지요. 창조자가 되었다 이 말은 그 누구로부터 창조 받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옛날 중세철학에 나와요. 나도 그런 이야기했는데. 스스로 창조 받지 않은 거예요.
그렇다면 창조 받지 않았다면 그러면 창조자만 있지요. 그렇게 창조자가 돼버리면 여기서는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창조하신 분이 피조물 속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들어오게 되면 창조자는 그 틀이 깨져 버린다고. 피조물 속에 들어왔으니까 이제 피조물처럼 구니까 하나님을 뭐라 불러야 하냐면, 피조물로 불러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을 피조물로 봤습니다. 신을.
이걸 과정철학이라고 하는데,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따라가려고 애썼던 신학자들이 마지막 넘을까, 말까를 주춤거리게 만드는 문턱이에요. 하나님은 누구의 피조물이냐 하면, 스스로에게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이 말보다 화이트헤드의 하나님을 더 표현할 표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스스로 자기를 피조물로 만들어내시는 창조자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렇습니다. 화이트헤드의 말을 들어보세요. 이렇게 얘기했어요. 얼마나 예리한지. 사람이라 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 어려운 용어는 다 빼겠습니다. 과거의 사건이 없으면 현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다는 말은 사실 있다는 말이 아니고 잇따른다, 잇따르다, 계속 이어져서 나온다.
이걸 한번 쉽게 예를 들어야 되는데. 여러분들, 7080 노래 들어보면 옛날 생각나지요. 그러면 그 장소에 한번 가보세요. 재미 하나도 없어요. 옛날에 크라운 산도, 샌드도 아니고 산도, 오원짜리 산도, 그때 그렇게 맛있었거든요. 지금 그것보다 맛있는 크라운 산도 나왔는데 안 맛있어요. 왜 사람들은 이상하다. 과거를 생각하면 아름다운데 그 과거를 지금 재현하면 전혀 그 맛 안 나는 이유가 뭐냐? 맛있는 음식점, 소문나서 가보면 그때 그 맛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사람은 과거를 기초로 해서 현재를 만들기 때문에. 지금은 어디냐 하면, 그때 그 과거가 아니잖아요. 옛날 그때 현재라고 여겼던 그것이 이미 과거가 되어서 그 과거가 만드는 새로운 현재를 가지고 하니까, 그때 참 아름다웠지요. 그때 아름다운 이유는 그때 그 과거가 있음을 바탕 위에서 그때가 아름다웠는데 지금 바탕이 되는 과거가 속성이 다르고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지를 않아요. 그때만큼 아름답지를 않아요. 결국 이것은 뭐냐? 인간은 허무하다. 결국 아름다운 것은 계속해서 없어지고 그냥 아름답다는 생각만 남아요.
제가 어제 밤인가, 제 아내가 밤에 빨래 널면서 옥상에서 보니까 팔공산 기슭에 개나리하고 벚꽃 화~악 피는 게 그렇게 아름답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속으로 그랬어요. 그 밤에 피는 벚꽃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렇게 아름답게 보는 당신의 마음이 아름답다. 크아, 죽인다 이거. 왜냐하면 아름답다는 사실이 없어요. 개나리가 아름답다 하는 것은 백사람 물어봐도 다른 사람은 다 달라요. 다만 아름답게 본 사람끼리 모아보세요. 다 아름다워요.
아름다움이라 하는 것은 어떤 대상체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고, 그걸 보는 시각에서 아름다운 거예요. 왜 아내가 개나리가 아름다우냐 하면, 아내의 과거 속에 밤에 핀 벚꽃을 본 적이 없거든. 그런데 저는 그때 봤기 때문에 시큰둥한 거예요.
그래서 노래 있잖아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그러니까 제일 마지막 때에 꽃은 삼일 째에, 사람은 육일 째에. 그러니까 하나님은 꽃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나타나기를 바라지요. 사람의 영광은 효과가 있습니다. 마지막에 모든 피조물이 썩어지며 통곡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면 그 모든 것이 회복된다고 로마서 8장에 나온다고. 그러니까 사람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주님께선 코스모스를 위해서 피 흘린 것이 아니고 우리의 뇌 속에 흐르는 더러운 피를 위해서 주께서 피를 흘렸다는 거예요.
화이트헤드는 그 이론을 사람은 과거의 산물이라는 것은 어떤 일이 와도 진리라는 겁니다. 사람은 과거의 사람이다. 과거가 기초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럼 진리가 뭐냐? 진리는 과거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진리라고 하지, 만약에 그 과거가 사라지면 이 진리는 속히 진리에서 떠나야 돼요. 은퇴를 해야 돼요. 퇴진해야 됩니다.
참, 우리 사장님은 처음에 일 잘했어. 처음에 일 잘했지. 지금은 골프 치러 다니는데. 지금은 옳은 사람이 아니지. 우리 목사님, 복음 전하고. 지금 복음 전하지. 지금은 복음 들어주지도 안으니까, 에이, 네 마음대로 하소. 나는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그때 그 과거에 기준해서 아름답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미래를 이렇게 펼쳐 놓고 현재의 하나님. 과거에서 현재를 만들어내면서 점점점 미래를 지향해 가는, 이걸 가지고 생성, 이걸 또 다른 말로 과정, 과정 자체가 신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신의 위에 올라가면 종속이 되니까 안 돼요.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니까 개념은 추상에 불과하니까 이게 실제가 되려면 우리 속에 와야 됩니다.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인간은 신과 무슨 관계에 있다? 답변해 보세요. 포섭관계에 있다. 이 말은 인간과 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신이 어디 있느냐를 뭘 보면 돼요? 인간 속을 파악하면 되겠지요. 그런데 인간은 어디에 기초하고 있다? 과거에 기초하고 있지요. 그러면 현재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다? 과거를 통해서 나로 하여금 신이 어떤가를 날로 만들어가는 하나님이죠. 어떤 식으로냐 하면, 아기에게 젖을 안 줌으로 말미암아 아하, 엄마가 이제는 엄마에게 관심이 있고, 전에는 젖에 관심이 있었지만 점차점차 엄마의 존재, 왜 엄마가 나한테 젖을 안 줬을까를 엄마의 심정을 이해하는 그 엄마를 알아가는 점점 더 업그레이드되는 그런 하나님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 있어서 인간 속에 들어와서 내재해서 인간을 과거에서 현재를 현재에서 미래로 몰아넣는 그 신의 뜻은 뭡니까? 점차점차 바로 네 속에 나 있다. 네 속에 하나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걸 어렴풋이는 알지만 아직도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내 속에 하나님은 있지만 인간의 미래의 하나님은 생각 안 하고, 과거에 있던 내 속에 있던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과거에 내가 믿던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니까 아, 내가 과거에 알았던 하나님은 이것은 내가 철이 없어 그렇구나. 새로운 사건을 부딪치면서 아, 하나님을 새롭게 새록새록 알아가면서 과거와 현재에 차이 나는 하나님을 통해서 미래까지 인도하시고 승리하시고 보장하시는 미래까지 하나님을 알아버리면, 비록 인간은 과거의 산물이지만 놀랍게도 신에 포섭되고 우리 안에 신이 있기에 미래까지 보장해준다는 신의 미래성까지 미리 선취해서 가볼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 이 말이에요. 이게 화이트헤드에요.
화이트헤드의 주장이 빈틈이 없어요. 화이트헤드가 왜 이렇게 내재적인 하나님을 했냐 하면, 화이트헤드가 누굴 연구했냐 하면, 포이에르바하를 연구 많이 했어요. 지난 시간에 했지요. 포이에르바하가 뭐라 했습니까? 포이에르바하를 잊어버렸으니까 잠시 해도 괜찮겠지요. 이렇게 연관되니까. 포이에르바하를 할 때에 포이에르바하를 보고 사람들은 전부다 하나님 없다고 생각하고 말았어요. 역시 포이에르바하, 당신 최고, 당신 최고. 하나님은 없구나. 신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그 위에 화이트헤드가 와서 뭐라 합니까? 신은 있다 했거든요. 아니, 당신은 포이에르바하의 총명함을 모르느냐? 알지. 아는데 왜 포이에르바하를 감히 능가하느냐? 능가할 만하다. 이렇게 하거든요. 포이에르바하라 하는 것은 의식은 끊어집니까, 안 끊어집니까? 지난 시간에 했지만 한번 해봅시다. 의식은 안 끊어지지요. 그러면 아까 제가 말한 모방, 유사성이지요.
포이에르바하는 하나님을 거론 할 때 유사성, 하나 가지고 끝내려고 합니다. 유사성이라 하는 것은 동일성 아닙니까? 그러면 인간이 유사성을 따라서 의식하지요. 계속 따라 의식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에게 현재 뭐가 있냐 하면, 유한이 있고, 무한을 느끼죠. 무한과 유한은 객체, 주체 사이니까. 지금 내가 부족하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잖아요. 무한, 유한 하지만 쉽게 이런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무한, 유한 있으니까 이 무한, 유한을 생각한다는 그 유사성을 따라서, 유사성이 무엇에 따라서?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나가죠. 나가고 보면 항상 끝을 생각하게 마련이지요. 끝은 뭐는 탈락되고? 유한성을 탈락되고 무한성은 남고. 그러면 이 무한성과 인간성과는 단절입니까, 단절 아닙니까? 단절 될 수가 없어요. 왜? 의식 자체는 단절은 없으니까. 지난 시간에 했잖습니까? 현재는 몇 초입니까? 몇 초가 없어요. 과거를 많이 생각하고 미래를 많이 생각하면 현재는 좁아지고.
예를 들어서 자기 애인하고 만나면서 이야기 속닥속닥하다 보니까, 아이고, 시간이 그만큼 되었나? 그러면 현재가 두 시간 될 수 있어요. 일어나야겠다. 하면 뭘 생각합니까? 미래 생각하지요. 아참, 아까 올 때 우산 나두고 왔지. 그럼 과거 생각하지요. 현재가 두 시간이 되는데 아아, 어떡하지? 초조해서 빨리빨리 뭘 해야 되는데 성경 공부하러 가야 하는데 또 전화 와서. 이럴 때는 현재가 짧아요. 그러면 이것은 제가 말하는 것은 말은 과거, 현재, 미래지만 이게 구분되지 않아요.
이게 베르그송이 말하는 의식의 흐름인 겁니다. 의식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으니까, 안 끊어진다는 말은 한 줄로 쭈욱 이어져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인간의 의식의 흐름은 단절입니까, 아닙니까? 단절이 아니지요. 인간의 의식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신이 있다는 것은 이건 형식구조 아닙니까, 형식논리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개념 아닙니까? 개념은 뭐로 채워야 됩니까? 내용으로 채워야 되지요. 이 내용을 의식의 흐름을 따라서 뭐가 와야 돼요? 누가 채워요? 내가 채워야지. 내가 부족한 것, 미래 예측 못한 것, 주식투자했는데 어떻게 될지, 땅 투기해 놨는데 땅값이 오를지, 빌어야 할 것 아닙니까? 빌 때 그 기도 내용은 누가 정합니까? 내가 정하잖아요. 우리 아들 서울대학 넣어주시고, 땅값 오르게 해 주시고, 땅값 올라야 팔아서 교회 짓습니다. 이것 전부 내가 정하잖아요. 그러니까 신은 인간 투사다 말이죠.
여기에 화이트헤드가 시비를 거는 겁니다. 누가 봐도 여기에 대해선 반박이 안 되지요. 예를 들어서 사랑이 부족하다. 시어머니한테 매 맞고, 남편한테 버림 받고, [이것이 인생이다]에 나오잖아요. 그렇다면 그 사랑을 어디가 보충해야 돼요? 신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충 받기 위해서 교회 가서 울고불고 난리치고.
그리고 난 또 의지적으로 봐서, 의지적으로 난 왜 죄를 짓는가? 양심이 고운 사람들. 왜 나는 죄를 짓는가? 죄를 지으면 의가 필요하잖아요. 의가 필요할 때는 뭡니까? 의지적으로 예수님의 의지, 십자가의 행위가 필요하죠. 그러니까 이것은 전부다 어디서 뭐에 따라서? 자기를 절대자로 해서 절대적이지만 유한하니까 부족하고 죄 많으니까 이걸 벌충하고 보충하기 위해서 자기의식의 흐름을 따라 신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투사인 종교다.
그러니까 포이에르바하는 신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고 신은 있는데 인간이 만들었다 이 말이에요.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리고 신은 단절되어 있다면, 결국 이 신은 이 신과 충돌을 일으키겠지요. 끝에 가봐야 이 신은 바깥에 있기 때문에 결국 포이에르바하는 뭐냐 하면, 인간의 의식 바깥에 있는 신은, 있어도 없는 거와 동일하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있는지 없는지 의식으로 파악이 안 되니까. 있어도 파악이 안 된다는 말은 없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깨지는가 보세요. 이것 깨는 것 하고, 오늘 열광적인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뭐냐 하면, 존재에서 존재의 자체권과 존재 소유권을 화이트헤드는 나눠 버렸어요. 이건 뭐냐 하면, 존재를 그 당시 사람들은 존재를 존재 그걸로 끝나버리는데 존재를 분리해 보면 존재의 자체권과 존재 소유권이 있는데 존재 소유권은 점차점차 존재 자체권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존재 소유권이라 하는 것은 전에 이야기했는데, 존재 자체권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빈 주머니라고 하면, 존재 소유권은 그 안에 담고 있는 여러 가지의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육체와 영혼 사이에요. 영혼이라는 것은 육체라는 소유권이 없으면 영혼은 그냥 추상에 불과해요. 육체가 있으니까 영혼이 있는 거예요. 존재 자체권과 소유권은 항상 되는데 존재 자체권, 이것이 바로 신이라는 겁니다. 신이기 때문에 신이 신다우려면 존재 소유권으로 채워져야 되죠. 채워지는 이 과정이 현재 모든 인류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존재 자체권과 소유권을 만약에 하나로 봐 버리면, 예를 들어서 아까 포이에르바하 같은 경우에 신은 인간이 만든다고 하잖아요. 그것은 신의 존재의 소유권을 만들었죠. 무슨 말이냐 하면, 신이 만약에 그냥 존재한다면 이 존재는 증명을 해야 될 대상이 돼버립니다. 객체가 돼버려요. 신은 존재한다면 객체가 돼야 하는데 인간이 기껏 하는 것은 신의 자체권은 인간은 할 수 없어요. 뭐냐 하면, 신의 어떤 것만, 소유권만 자꾸 인간이 하는 거예요.
전선에 뭐가 흐릅니까? 전기가 흐르지요. 전선이라는 그 존재의 소유권이 녹이 슬어버리면 전기가 막히죠. 인간의 소유권이 결국 뭘 하냐 하면, 자체권을 자꾸 방해하고 가리는 겁니다. 포이에르바하가 실수한 게 그거에요. 인간이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은 맞아요. 인간이 그 내용을 채운다고 해서 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신의 소유권을 인간이 만든다고 해서 신의 자체권이 또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존재는 소유권과 자체권이 나눠져 있는데 포이에르바하, 너는 왜 자꾸 존재의 소유권만 시비 걸고 자체권이 있다는 것을 왜 생각 안하냐 이 말이죠. 그럼 자체권이라 하는 것은 소유권이 지향하는 그 무엇이에요. 그렇게 봐 버리면 소유권이라 하는 것은 인류역사를 통해서 점차점차 자체권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지요.
예를 들어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모르겠다, 인간 자체권이 있어요. 인간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 그런데 인간의 존재는 뭐냐 하면, 인간인 나는 공부를 해야겠다. 나는 석사학위 있다. 석사학위가 인간 자체권을 떳떳하게 만들지요. 왜냐 하면 새로운 내용물이 첨가되었기 때문에. 그러면 내가 도둑질해서 감옥소 간다. 나는 죄수다. 나는 죄수니까 죄수구나. 자기가 감옥소 갔던 경험이 나를 뭐로 만듭니까? 나의 자체권을 죄수로 만들어 버리지요. 그리고 딴 내용이 포함되면 또 딴 게 포함되죠.
이처럼 모든 존재는 존재의 자체권과 소유권을 나눠줘야 설명이 가능한데 왜 지금까지 철학들은 존재자만 덜렁 해 놓고 왜 안 나눴느냐 이 말이에요. 안 나누니까 존재 소유권만 가지고 자꾸 시비 거는 거예요. 신은 이렇다, 신은 저렇다. 신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신의 일시적인 지금의 소유권 가지고 시비 거는 것에 해당된다 이 말이에요. 그것은 신의 자체권은 아니고.
그러면 화이트헤드, 당신은 신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데 왜 그렇게 신을 인정해야 됩니까? 화이트헤드는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어디서 나왔느냐? 과거에 나가 나왔잖아요. 그러면 과거에 당신이 어디서 나왔느냐? 몰라. 세상에 몰라 하면 철학자가 할 말이 아니지. 아니, 모든지 알고 신은 없다. 이러면 말이 되는데, 자기 자신이 과거에 어디서 나왔느냐? 그것도 몰라. 흔히 어떤 사람은 나, 이제 교회 안 다닙니다. 난 예수 안 믿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서 나옵니까? 몰라. 모르는 게, 개뿔도 모르는 게 신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느냐 이 말이에요.
이게 화이트헤드가 신을 인지하는 방법입니다. 내 존재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면서, 신은 없다고, 어디서 그런 건방지게. 신이란 개념이 신이 있어서 신이 있다고 하면 화이트헤드가 반대하지요. 내가 어디서 나온 줄 모른다는 말은, 나로 하여금 나 되게 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모이면 개념상 뭐가 됩니까? 신 아닙니까? 신이라는 것이 전체의 집합체잖아요. 전체의 집합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 그러면 신이라 말하지 말고 그럼 전부라고 하면 돼요. 하여튼 전부는 있잖아요. 즉 모든 것을 되게 만든, 모든 부분들이 그것을 일자라 하는데.
화이트헤드가 일자와 다자를 안 봅니다(?). 다자가 다자 보고, 인간이 인간보고 이야기합니다. 너, 어디서 나왔어? 몰라. 니, 어디서 나왔어? 몰라. 다자는 다자를 몰라요. 그러면 우린 누구한테 물어보냐면, 다자 아닌 일자한테 물어봐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럼 일자가 뭐냐 하면, 신 아닙니까? 그런데 일자가 없는데 무슨 다자가 성립되느냐 말이죠.
나는 교회 안 나갈 거예요. 왜? 신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너 말고 저 사람 어디서 생겼는데? 몰라. 네가 만약에 일자라면 나, 교회 안 나가. 그건 말이 돼요. 저것 다 내 새끼거든. 이러면 되는데, 어떻게 이웃 사람이 자기 새끼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면 저 사람은 나에게서 안 나왔지요. 나에게서 안 나오면, 일자입니까, 다자입니까? 다자, 다양한 다자 아닙니까? 여럿 다자 아닙니까?
여럿 다자 같으면 어디에 물어야 돼요? 다자가 아닌 일자한테 물을 거란 말이에요. 일자가 있다는데 그걸 한 자로 뭐라 하냐면, 이게 신이란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신이 없다고 말을 하느냐 말이죠.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위장하고 있는 거지요. 다만 그 신이 있는데 그게 주체, 객체로 나뉘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내재된 그런 하나님이다 이 말입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이걸 반박을 해야 돼요. 여기에 소위 내노라하는 신학자들 여기 다 빠져 버렸습니다. 이걸 과정철학과 유사한 과정신학이라는 이름으로서 감리교, 통합측, 한신측 여기에 다 넘어갔어요. 왜냐하면 불교를 이길 수 있거든. 불교는 일자가 없어요. 일자가 없으면서 그냥 흐름이다. 베르그송과 같이 그냥 흐름이니까 어떻게 됩니까? 객체가 일자가 없으니까 어떤 흐름 속에 다자도 없어요. 그러니까 불교 속에 네가 나고, 내가 너다. 라고 합니다.
화이트헤드는 네 속에 신이 있다는 말은 했지만 네가 나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게 불교보다 뛰어난 점이지요. 어떻게 네 돈이 내 돈입니까?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불교에서는 딜레마가 석가모니의 딜레마가 이거에요. 네가 나고, 내가 너 같으면 경계가 구분이 안 되지요. 구분이 안 되면 현실적으로 안 맞잖아요.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안 맞는다는 말은 허구적인 추상에 불과한 거예요. 추상 가지고 들이대는 것은 이건 속이는 거죠. 화이트헤드는 그건 아니다, 이놈아. 그건 아니야. 다자를 서로 차이 난 게 있잖아. 인정해야지. 그런데 불교에서 인정하면 일자를 인정해야 되니까 하나의 존재의 근거로서.
그렇다면 이 화이트헤드에 대해서 반박을 해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한번, 화이트헤드에 대해서 반박을,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요?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상당히 뛰어나고 기존의 신학보다 월등한, 다자를 인정하고, 일자를 인정한, 내 속에 신이 있다, 그리고 내가 곧 신이다, 여러분들이 신입니다. 왜? 신에 포섭되어 있으니까.
화이트헤드의 문제점은 무라는 개념에서 유가 나왔다는 성경적 개념을 몰라요.
화이트헤드의 그 모든 방금한 논리가 그야말로 과정은 설명돼요. 과정은 설명되는데 실체가 분명치 않아요. 실체는 누굽니까?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존 인물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만난 사람은 그냥 신이 아니에요. 그냥 구체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내가 너 안에 네가 내 안에 있죠. 하나로 봤죠. 하나란 말이 나오잖아요. 너와 내가 하나였잖아요.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적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하나란 말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님이란 구체적 몸 안에서, 언약 안에서 하나가 돼요.
그러니까 화이트헤드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이방종교적인 그러한 유신론에 불과한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적이 아니다.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또는 너와 내가 하나다. 세상에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 언약의 구체적인 이것은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우리의 존재가 지금도 활동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우리가 우리 되게 한다는 뜻이지만, 여기에 성경에 보면, 언약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오늘날 우리로 은혜로 말미암아 은혜 되게 하고 우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게 함이죠.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언약은 빠져버리고 내 안에 신 있고, 신은 내 안에 있다. 그걸 증거하죠.
그러니까 화이트헤드를 따라 갔던 감리교, 한신에서는 누가 싫은 거예요? 예수님을 독보적인 존재로 보기가 평소에 싫은 거예요.
그런데 악마의 특징이 뭐냐? 악마는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 악마가 이런 화이트헤드의 모습으로서 그걸 뭉개 버린 겁니다. 예수만은 아니다 이 말이죠. 꼭 예수만이냐? 우리는 이런 화이트헤드의 이런 공부함으로서 진짜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준 적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기독교는 바로 예수 중심이지, 어떤 신론 중심이 아니라는 삼위일체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이 봤던 것은 추상적인 신이 아니고 구체적인 분,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예수님 하신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우리를 뽑아 주셨사오니 예수님을 싫어하는 악마적인 것과 영적 싸움에서 우리가 지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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