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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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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20060404 부산강의-화이트헤드(1)

이름 : 한윤범(IP:)

20060404 부산강의-화이트헤드(1)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화이트헤드에 대해서 이야기합시다.

화이트헤드를 김용옥 교수는 백두선생이라고 이야기해요. 머리가 하얀. 백두선생이라고 이렇게 놀렸는데 화이트헤드의 신학을 공부를 많이 한 철학자들이 선호하는 이유는 더 이상 화이트헤드가 신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전부다 해결을 지었다 이거에요. 지금 철학의 수천 년 역사 가운데에서 화이트헤드가 그걸 완전히 최종 마감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철학이란 것이 나올 의미가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그렇게 좋아합니다.

현재 물리계에서 문제점이 뭐냐 하면, 더 이상 아인슈타인 이후에 물리학이 정체 상태에 있습니다. 발전이 안 돼요. 뉴턴 이후에 아인슈타인, 거기서 스톱이 되고 말았어요. 뭔가 학문이라는 것이 발전을 해야 하는데 전혀 발전이 안 돼요. 중력이 뭐냐 하는 것도 해결되지 않고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어요. 단지 과학이라 하는 게 쫀쫀한 기술문제, 배아줄기세포, 어떻게 편리 하느냐? 그 문제인데 그것은 기술에 관한 문제지 과학은 아닙니다.

과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게 과학이지, 현재 아는 것 가지고 어떻게 활용하느냐 그런 것은 과학에서는 시시하게 여기거든요. 그것은 경험에 의해서 하면 되니까. 휴대폰에서 TV 나오게 한다? 이런 것은 기술에 관한 문제지, 인간의 사고방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사고방식을 바뀔 수 있는 하이스탠스, 과학이 멈추고 난 뒤에는 이제는 아인슈타인, 거기까지 화이트헤드가 이미 정복을 해버리고 말았거든요.

그러니까 과학자도 화이트헤드, 신학자도 화이트헤드, 철학자도 화이트헤드. 화이트헤드를 더 이상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최종적인 그러한 철학체계를 갖추었다 이렇게 봅니다. 물론 화이트헤드 이후에 들뢰즈이라든지, 여러 가지 철학자들, 라캉이라든지, 타자의 철학을 구사한 레비나스, 이런 철학자들이 있습니다만 그 사람은 제가 아까 이야기한 과학과 기술의 차이, 이미 범주로 다 정해놓고 소소한 것,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 이 점에 대해서 이 안에서 어떻게 유용하게 하느냐, 의미를 찾느냐 하는 것이지 그 틀은 화이트헤드에서 그냥 중단이 되고 말았어요.

왜 그러냐 하면, 너무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알았다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담아버렸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 두 시간 동안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어떤 철학인지 한번 해보겠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시시하게 인간의 행복이 뭐냐? 의미가 뭐냐? 어떻게 하면 이 시대에서 우리가 바르게 사느냐? 그런 문제를 다루는 게 아니고, 화이트헤드는 신을 정복하는 겁니다. 신에 대해서 완벽하게 파악을 하는 그런 작업을 했고, 나름대로 저쪽 세계에서는 더 이상 바랄 나위 없이 완벽하게 성공했다. 이렇게 결론을 짓는 학자입니다.

왜 신에 대해서 거론해야 되느냐?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거론하는 우리한테도 중요하지만 중요한건데. 왜냐하면, 신을 안다고 한다면, 나머지 이 세상에 불쑥불쑥 보이는 것도 자기가 알고 있는 신과 영광성에 있어서 해명이 다 돼야 돼요. 이 해명해주는 이걸 가지고 목회라고 하잖아요.

목사님, 몸이 아픈데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그것은 신과 연관해서 설명해 달라는 거죠. 교회 잘 다니는데 왜 우리 애가 삼수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도 전부다 신과 연관해서 설명해야 돼요. 복음을 전하는데 교회가 왜 부흥이 안 됩니까? 이것도 신과 연관해서 설명이 돼야 돼요. 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교회가 차타고 야외에 가는데 뒤집어져서 왜 8명이 죽습니까? 이런 것. 불교 사찰에서 놀러 가면 안 뒤집어지는데 왜 교회 가면 뒤집어지느냐?

세상 우리의 모든 고민 문제가 신과 연관해서 해명을 해 줄 때 그때 비로소 신이 신답다 이 말입니다. 신이 신다운 거예요. 신은 모든 것을 총괄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옆에 일어난 사건이나 이웃에 일어난 사건, 또 자기한테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자기가 믿고 있는 신에 의해서 속 시원하게 해명이 될 때 해명이 된다면 비로소 나는 지금 이 신을 제대로 잘 믿고 있다는 것이 확인이 되고, 만약에 내가 어떤 신을 신은 이런 신이다,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다 믿고, 확정 짓고 믿었는데 자기에게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서 전혀 설명이 안 될 때에는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내가 현재 믿고 있는 하나님이 지금 잘못된 하나님이고, 있지도 않은 하나님이고, 엉터리 하나님을 믿고 있구나. 라고 그것이 점점 더 확인이 오지요.

그렇다면 신에 대해서 어떤 신이 올바른 신이고 바른 신이냐를 안다는 것은, 결국 어떤 무모한 작업을 해야 되느냐 하면, 지상에서 앞으로 미래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내가 봤던 이 신의 활동에서 안 벗어날 정도로 완벽한 신일 때 그게 지금 제대로 신일 수 있잖아요. 과거에 했던 것만 대충 추려서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고 만약에 안심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이탈하고 있는 그 범주에서 벗어난 어떤 돌발적인 사태가 벌어질 때는 어어, 옛날에 믿던 하나님이 그 범주에 포함 안 되었으니까 수정해야 된다 말이죠. 그 수정을 하게 된다면 기존 것을 버려야 된다니까, 이것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목회자들 가운데서 흔히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옛날에 성서유니온의 그 사람 누굽니까? 윤종하, 그분도 마찬가지지만, 옛날에 예정론 믿었지만 지금은 안 믿는다. 이렇게 하거든요. 옛날에 자기가 구축한 신학체제에서 도대체 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 이제 더 이상 예정론이 안 믿는다고 발언할 수밖에 없는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느냐 이 말입니다.

저는 어떤 사건이 있어 그렇다고 보지 않고, 옛날에 자기가 갖고 있던 자기에 대한 인식이 자기 자신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서 1/3 쯤 나는 이런 인간이라고 알고 1/3에서 걸 맞는 거기에 합당한 하나의 신을 갖고 있다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2/3 쯤, 3/4 쯤 점점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았잖아요. 아니까 이것까지 포함해서 전에 믿던 신하고 해명하려고 하니까 이게 잘 틀이 안 맞는 거예요. 틀이 안 맞으니까 수정해서 아예 예정론 없다, 예정론 없는 신일 때 이 부분의 것과 설명이 된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 사람 앞으로 8/9 쯤 되면 어떻게 바뀔 지요?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렇게 때마다 신이 바뀌었다고 봅니까? 물론 핸더슨 같은 사람은 사도 바울의 신이 바뀌었다고 보지요. 처음에는 예수님 재림, 곧 할 줄 알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안 오니까 교회 감독과 집사 세워서 이제 행함으로 나가야 된다. 이렇게 하나님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관이 처음과 끝이 바뀌었다는 말은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우리도 수시로 바꾸자하는 이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그렇다면 싱긋이 웃고 있는 쪽은 누구냐 하면, 불교 쪽이죠. 이게 인간들이 도를 더 닦아야겠구먼. 이게 달마를 몰라. 불교 쪽으로 가보면, 그래서 한신 쪽이나 감리교 쪽에서 또는 통합 쪽에서 불교를 공부해 보니까, 세상에 내가 아직까지 1/3만 알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길은 없고 오직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우겼더니만 이제 2/3를 알고 보니까, 그러니까 불교에 대한 지식을 접하고 보니까 아아,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초대 교회 사도들이 아직 인식이 부족해서 제대로 세상 파악 못해서 성급한 결론을 내린 건데 우리가 거기에 동조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 말이죠.

그들은 그렇게 하지요. 사도 바울이 불교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 이 말이에요. 심지어 예수란 그 양반도 그저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적인 풍토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저 구약 성경 그 정도만 알지 예수란 작자가 인도에 갔다 오고 난 뒤에는 이제는 영지주의로 변했다는 거예요. 사람이 경험을 좀 해 보면 독설에서 이제 벗어날 수 있는 철이 드는 그런 시점이 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럴 가능성을 다 파악해서 신은 이렇다고 최종 결론을 내린 사람이 화이트헤드이기에 이 분에게 모든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여기에 목매이고 형님하고, 졌습니다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도대체 화이트헤드가 어떤 철학체제를 구축했기에 그 잘 나가던 신학, 폴틸리히라든지 이런 유명한 신학자도 형님하고 무릎을 꿇고 저, 한 수 배우겠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역시 형님이 많이 아시는군요. 위대하십니다. 라고 굴복하게 만든 화이트헤드의 체제를 두 시간에 걸쳐서 우리가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러면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직접 들어가면 어려우니까 어디에서 기존의 신학과 철학의 허점을 꿰뚫어 봤느냐 하면, 바로 이원론이죠. 이원론 중에도 여러 가지 이원론이 있습니다만 화이트헤드가 공격을 하고자 표적으로 삼았던 이원론이 뭐냐 하면, 신은 인간과 초월해 있다. 단절돼 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노닐고 계신다. 라는 것이 전통적인 신학이었고 철학이었습니다.

신은 신의 세계에 있고, 인간은 인간의 세계에 있고. 그렇게 따로 떨어져 나오고 신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해 버리고 함께 있지 아니하시고, 추방해 버리고 함께 있지 아니하시고. 너는 고생을 해봐라. 이 말이죠. 그리고 고생을 하게 함으로서 고생시킨 분 따로 있고,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아 고생해야 될 인간은 따로 존재하고. 이게 전부다 따로따로 노는 그런 세계를 그동안 성경을 통해서 이것이 참된 진리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뭐냐 하면, 여기서 인간이 따로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신과 떨어진 세계기 때문에 신을 사모하면서도 기껏 받아 챙기는 게 뭐냐 하면, 신이 내린 법, 있잖아요. 신이 내린 율법, 그 법을 통해서 약간이나마 조금씩 조금씩 신을 알아가서 이 경계를 넘고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그런 방식을 채택했다는 겁니다.

이 율법을 가지고 고대 초대 신학에서는 로고스라고 합니다. 로고스라는 말은 법이라는 말도 되고, 이성이란 말이 되는데 그 뉘앙스가 어떤 뉘앙스냐 하면, 합리적으로 끊을 것은 탁탁 끊자는 이야기입니다. 구분을 짓자는 겁니다. 흐리멍텅이 아니고 구분을 짓자는 겁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처음에는 어둠 속에 혼돈 속에 있었지요. 혼돈에서 빛이 오니까 혼돈이 사라지고 구획이 되지요. 구획이 되면서 그때가 뭐냐 하면, 첫 날이고, 둘째 날이고, 셋째 날입니다. 둘째 날이 뭐냐 하면, 하늘에 있는 궁창과 땅에 있는 궁창이 서로 나눠지는 날이고, 셋째 날은 뭐냐 하면, 물이 한 곳에 모이면 바다가 되고, 물이 빠진 곳이 육지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빛이라는 개념이 단순이 밝다는 개념이 아니라 외형적으로는 영광스럽고 밝지만 그 내부적으로는 혼돈을 탁탁 두부 자르듯이 자르는 합리적인 어떤 구획하는 질서체제를 의미한다고 정통적인 신학에서는 그렇게 본 겁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에 더 나가면 넷째 날은 뭐냐? 텅텅 비어 있는 하늘의 궁창을 채우는 작업이죠. 그게 해와 달과 별. 다섯째 날은 뭐냐 하면, 육지와 연관된 궁창과 육지 속에 있는 텅텅 비어 있는 물속을 채우는 거예요. 물에는 물고기가 노닐고 하늘에는 새들이 있고. 새들이 있다고 해서 새들이 인공위성이 아닙니다. 지구의 궁창 밖으로 튀어나온 게 아니고 그저 놀아도, 아까 분리된 둘째 날에 분리된 땅위에 속한 궁창 안에서만 노니는 거예요. 이게 구획이죠. 새는 하늘에 살고, 물고기는 바다에 삶으로 말미암아 그 중간이 구획이 됩니다. 참 신기하죠.

저쪽은 하늘은 가라 이 말이에요. 물은 저쪽으로 가되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점점 창조의 목적이 점점 더 뚜렷하게 중간 지점을 향하여 시선을 모으죠. 시선을 모으면서 마지막 날이 하이라이트인데 마지막 날에 뭘 만드느냐 하면, 땅에서 땅이 비어 있으니까 땅을 채우는 짐승을 만들고, 셋째 날에 땅만 만든 게 아니고 셋째 날에 땅에서 초목이 나옵니다. 그러면 초목의 주인공이 여섯째 날이 되면 점점 더 뚜렷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구획과 질서를 갖추면서 단순한 구획과 질서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뭔가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달려간다는 인상을 주면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구획을 짓게 돼있습니다.

여섯째 날에 보면 여러 가지 땅의 짐승이 있지만 결국 하이라이트는 뭐냐?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등장해야 될 어떤 피조물, 그 피조물이 등장하고 난 뒤에 창조 끝. 드디어 하루를 정해서 휴식하면서 창세기 2장 1절에 보면 마지막 날, 그것도 마지막에 만든 인간에게 당부하는 조로 창조를 끝냅니다. 그 당부가 뭐냐 하면, 넷째 날에 만든 해와 달과 별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획 정해 준 시간 구획 있잖아요. 낮이 되고 밤이 되니 하루라. 하루라는 구획 시간 자체가 나름대로 목적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돌아오는 일곱 날마다 거룩한 날로 기억하고 지키라는 그 당부를 최종적으로 만들어낸 피조물, 그 이름이 누구겠어요? 아담이라는 그 인간이라는 이름에다가 부여하고 주님께서는 안식의 상태에 가버리죠. 이것이 정통적으로 신학에서 이야기한 피조세계의 근원이라. 근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하게 되면 신은 결국 나타나지 않아요. 이 세계에서. 다만 신이 이 땅에서 움직이는 것은 신이 내려주신 법이죠. 시편 119편에 나오는 "내가 주의 율례와 법도를 사랑하나이다" 그리고 시편에 보면 나오죠.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 말씀에 의해서 다 되어 가고 있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고.

그 지식이 뭐냐?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입니다. 나중에 말씀에 기초해서 언약이 나오죠. 왜냐하면 지키라 했던 것이 지킴의 내용이 추가되면서 이것도 지키고 저것도 지키고 제사법도 지키고 형제도 사랑하고 계속 지키는 것이 계속 추가되면서 나중에 마지막 신약에 오면 산상설교까지 올라가서 너희는 못 지킨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아무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어떤 인간도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영광의 코스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 주었다는 그 사실만 영광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 주었다는 그 사건이 있는 곳에만 영광이고 그 외에는 영광이 아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보통 전통 신학에서는.

그렇다면 이것을 철썩 같이 옳다고 믿었어요. 이렇게 둘로 이원론으로 분절되게 되면, 분절되는 이것이 인간의 현재 기본적인 이성에 합당하다고 본 겁니다. 여기서부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쉬웠는데. 제 말 잘 새겨 보세요.

이성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따지는 거예요. 따진다는 것은 이것과 저것을 경계를 짓는 겁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고. 이러한 것이 인간에게 기본적인 이성이 있고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이 이성에 부합되도록 법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법 안에 무슨 내용 있겠습니까? 이성이 납득할 수 있는 이성적인 요소가 있겠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따짐이 들어있겠지요. 하나님의 이성과 우리 인간의 이성이 서로 만나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이렇게 전통신학에서 본 겁니다.

이 이성을 가지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뭐로 보느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봤고, 하나님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사의 이성은 원본이죠. 하나님의 형상의 원형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의 모방판이, 복사판이 들어왔는데 문제는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이게 왜곡되어 있으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다시 이게 원상복귀가 되면서 제대로 하나님과 서로 의사소통이 되어서 이제 하나님께서 무슨 소리를 해도 납득이 되고 다 이해가 되는 다 받아주는 그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이 인간과 교류하고 소통한다. 이게 전통적인 신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화이트헤드가 위대한 점은 과연 이성이 그렇게 딱딱 부러지게 납득이 되느냐 하는 그 문제를 시비 걸고 넘어 온 거예요. 이게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일반인들은 다 이성을 갖고, 불교 신자도 인간으로 태어나면 이성이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를 드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A는 A고, A는 절대로 B가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에 A와 B가 같다면 A와 B라는 게 경계가 설정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냥 B도 A가 되면 그만이단 말이죠. 남자는 여자가 아니라는 게 맞는다면, 제가 어렵다고 했지요. 잘 들으세요. 남자가 여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남자는 어디까지나 남자고, 여자는 어디까지나 여자란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남자가 여자 되고, 여자가 남자 된다면 구태여 용어를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냥 같은 인간이라 하면 그만이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구분을 짓는다는 말은, 이것은 신에 의해서, 다른 말로 할까요?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다른 말로 할까요? 신이 이성을 가진 하나님이 이성을 지닌 피조물인 인간을 만들어서 이성적으로 살라고 요청한 그 정당성을 인하여 남자는 남자이여야 하고, 여자는 여자이여야 된다.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누구의 뜻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다. 왜? 하나님이 이성적이고 그 이성이 우리한테 내포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동일율, A는 B가 아니란 걸 모순율이라 합니다. 결국에 이것은 뭐냐 하면, A와 B 사이에 중간 해석 지점, 그러니까 까마면 까맣고, 하야면 하얗고, 흐리무리한 그런 건 없는 거예요.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이걸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이 인간이다. 이렇게 확정지어 온 것이 기존의 인간들이 이성적인 철학이었고, 신학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을 화이트헤드는 시비 걸고 있는 겁니다.

파르메니데스라는 철학자가 크레타 섬에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런 소리했어요. 크레타 섬에 사는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 라고 했습니다. 본인도 크레타 사람의 일부지요. 자,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파르메니데스의 그 주장은 맞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성에 의하면 참은 참이고, 거짓은 거짓이에요. 이건 동일율입니다. 그 다음에 참은 절대로 거짓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모순율입니다. 절대로 안 돼요. 그런데 만약에 이게 그냥 맞는다면, 그렇다면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하는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는 본인의 말은 거짓말이냐 하는 그 문제가 똑같은 이성을 사용하면서도 이게 해명이 됩니까, 안 됩니까? 해명이 안 되지요. 그런데 단순히 이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가 신학 속에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죄를 지었다 이 말이지요. 죄를 지었다 할 때 여기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이 독자적으로 죄를 지었느냐? 이게 첫 번째 문제. 두 번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인간을 시키든지, 안 그러면 인간을 가지고 죄를 만들든지 해서 인간을 이용해서 하나님이 죄를 지었든지 이렇게 해야 돼요. 두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죄 지었을 때 인간이 하나님 몰래 죄 지었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인간을 통해서 죄라는 걸 짓도록 부추겼느냐? 이 두 가지 문제 외에는 다른 문제가 없어요. 이 외에 제3의 경우는 없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첫 번째 경우든, 두 번째 경우든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답지 못한 그러한 존재로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답지 못해요. 원래 통치자가 자기 통치 밑에 어떤 짓을 하는지 빠삭하게 꿰뚫어 봐야 통치자의 값을 하는 건데 통 말로만 통치한다고 해놓고 자기가 만든 인간이 죄 짓는 것도 모르고, 죄 졌나? 아이고, 내 몰랐다. 이게 무슨 하나님이냔 말이에요. 그게 무슨 전지전능하냔 이 말이지요. 그래서 1번은 탈락이에요. 1분 만에.

두 번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죄 짓도록 부추겼다면, 결국은 죄는 인간이 진 게 아니고 그 배후에 더 고위층에서 저지른 짓이거든요. 인간의 고위층이 누굽니까? 하나님. 하나님은 죄를 짓는 분이니까 결국 하나님의 정의로움과 서로 모순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한테는 모순이 없거든요. 결국 모순이 없다는 것은 뭐냐 하면, A에는 A고, B는 B라는 이것이 어떻게 돼요. 깨어져야 돼요. 의로움은 곧 죄고, 죄는 의로움이다. 이게 성립돼야 되는데 이걸 주장한 사람이 윌리암 오캄입니다.

윌리암 오캄은 말하기를, 간음한 것은 절대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시킨 간음은 절대 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로움이라 하는 것은, 법에 의해서 간음하지 말라는 게 있죠. 간음하는 것에 저촉될 때 그게 죄가 되거든요. 그런데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는 문자에 의해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가 간음하지 마라에 따라서 죄가 되느냐, 의가 되느냐가 되는데, 하나님이 간음할 것을 시켰으면 그것은 율법을 제정하신 분이 시킨 것이고 그건 시킨 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건 결코 죄가 아니고 그건 의로운 것이라 했어요.

예를 들면 기생 라합이 거짓말했잖아요. 기생 라합을 거짓말 한 것을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걸 뭐냐 하면, 올바른 믿음에 따른 행함으로 본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식 이삭을 제물로서 가져다 죽인 것은 그것은 결국 죄로 살인자로 간주하지 않고 하나님이 시키고 하나님이 시킨 대로 했기 때문에 의로운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소위 인간이 집어넣은 이성에 따라서 바르게 A에 A고, B는 B는 깨져버리는 거예요. 이게 그동안 쉬쉬하면서 왔어요.

쉬쉬하면서 온 이유가 그동안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칼빈, 루터는 이걸 어떻게 해결했느냐 하면, 이렇게 해결했겠지요. 결론적으로 이건 신비다. 이건 하나님께 신비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가 인간에게 나타날 때는 신비가 탈락된 채 뚜렷한 인간의 죄악된 행위만 나타난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분명히 인간의 자유의지에선 나쁜 것이다. 하지만 이걸 신비라고 인간에게는 적용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걸 하나님 세계에 적용할 때는 이것은 신비로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 온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모르는 부분까지 아시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캐내려고 하지 말라 이 말이거든요. 인간은 하나님의 신비에 다 알 수 없고, 또 성경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가라는 데까지 가야지 더 가면 거기는 매 맞는다. 그런 식으로 협박을 가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선악과 따먹는 데서만 이러한 모순점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일어나는 모든 일상 세계에서 그러한 모든 일이 벌어지니까 이것은 더 이상 신비라고 믿어 줄 수가 없어요. 해결 지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걸 기존의 신학에서 어떻게 해명 했는가 차근차근 봅시다.

어거스틴 강의에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여튼 아담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봤어요. 아담에게만 자유의지가 있어요. 거기서부터 이미 아담과 우리는 차별화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아담의 속성을 안 받은 게 돼요. 아담에게 물려받은 속성이 아담이 속성 전부를 받아야 되는데 다만 이렇게 돼버리면 아담의 속성 가운데 뭐만 빠지게 돼요? 자유의지가 있다는 속성만 빠지고 나머지는 다 그대로 물려받은 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엄연히 말해서 아담의 자식이 아니에요. 아담의 자식이 안 되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의 문제가 될 뿐더러 아담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의적으로 했다. 이게 뭐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인간이 꾀를 내어서 죄를 지었다. 그 성경 말씀을 근거해서 이것은 아담이 죄 짓는 것은 하나님하고 끌어당기지 마라. 하나님하고 상관없이 인간들의 단독 범행이다. 괜히 마귀가 부추겼으니까 마귀한테 죄 돌리지 말고, 하나님한테 죄 돌리지 말고, 이건 인간의 죄로 그냥 묶어야 된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죄를 유발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는 뭐냐? 아담이 죄 진 것을 다 아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이 죄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나왔잖아 이 말이거든요.

무슨 말이냐 하면, 어거스틴은 현재 아담에게 이런 결과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 결과를 할 때 행위로 나오죠. 그러면 행위로 나온 결과를 이 죄진 행위의 주체자, 행위의 노선에만 멈추어야지 아담의 존재는 누가 존재했느냐? 라고 끄집어 댕겨버리면, 행위 선에서 어디로 이탈하는 거예요? 반칙을 범해서 존재선에서 넘어가는 게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떤 아들이 가게에서 물건을 훔쳤어요. 그러면 감옥소는 누가 가야 됩니까? 아들만 가면 되는데 그 아들 누가 지었느냐, 누가 태어나게 했느냐? 자기 아버지까지 부를 순 없다 이 말이거든요. 그건 연좌제에 걸리잖아요. 그러한 논리로서 그동안 온 겁니다.

그러나 이 논리에 화이트헤드하고 많은 철학자들이 시비를 걸었어요. 라이프니찌도 마찬가지로 시비를 걸었는데 왜 그러냐 하면, 기존의 철학에 보면, 인간의 행함이 그냥 행함의 노선에 머물 수 없는 것이 그 행함의 원천은 존재의 속성에서 나온다고 그렇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것은 예수님 말씀에도 있어요. 그 사람의 나무의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좋다, 나쁘다 할 수 있다 이 말이지요. 나무 한번 그려 볼까요. 나무 열매가 어디 맺힙니까? 가지에 맺히지요. 그러면 만약에 아담이 죄 지었지, 하나님은 관여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열매는, 열매가 좋다, 나쁘다하는 열매내지는 열매가 붙은 이 가지만 나쁘고 가지에다 가위로 잘라버리면 나머지는 뿌리하고 본체 큰 줄기는 나쁜 게 아니다. 다만 가지만 나쁘지, 이것까지 이 열매만 자르면 그만이다 이 말이지요. 나머지는 괜찮다 이 말이거든요. 또 이러한 비슷한 말씀이 산상보훈에 나오지요. 네가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그 다음에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나머지를 가지고 불구자로 되어서 천국 가는 게 더 낫다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본문을 조각조각 끊어낼 수도 있고, 하나가 나쁘다고 해서 다 나쁜 게 아니고 잘라내 썩은 부분을 도려내면 나머지는 건전한 채로 천당 갈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한 겁니다. 도대체 예수님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예수님이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지금.

열매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 해놓고 여기는 잘라내라 하니까 나머지는 천당 가는 게 낫다 하니까 일관성이 없잖아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하면 재미있는 게 이 본문 할 때는 이 소리하고 저 본문 할 때는 저 소리한다고. 그러면 교인들도 따라서 아, 내 마음대로 살아, 내 마음대로 살아. 이제는 듣지도 않아. 무조건 내 마음대로 살아요.

이것을 1892년, 하이데 라는 철학자가 나타나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석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석을 했냐 하면, 어떤 대상이 생기면, 이 대상이 객체지요. 대상이 생겨 버리면 대상을 대상으로 만들었을 때 이걸 주체라 합니다. 객체가 없는 주체는 없어요. 주체가 하는 것은 나는 나다. 할 때는 반드시 저쪽에 뭔가 있을 때 네가 아닌 나가 될 때 나가 되는 겁니다. 반드시 대상이, 타자가 있기에 자아가 생기는 거예요. 안 그러면 대상이 없으면 자아란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자기만 있으니까.

그렇게 될 경우에 이 경우에는 뭐냐 하면, 이 대상과 주체 사이에는 종속이 아니고 포섭이 되는 겁니다. 포섭이라 하는 것은 둘 다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거 예를 들어야 쉬워요. 제가 지금 하얀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럼 이 옷의 빛깔은 뭡니까? 흰색이죠. 말씀하세요. 그럼 이 세상의 흰색은 다 내 것입니까? 아니잖아요. 다만 전체 흰색과 나라는 것이 흰색이라는 공통 범위를 잠시 공유하죠. 그게 포섭이라는 거예요. 포섭이라는 말을 이제 아시겠지요. 잠시 흰색이라는 범위에 들어가는 모든 흰색이 전부 내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이게 개념이 돼버리면, 개념이라 하는 것은 대상이 없는 거예요. 달. 그러면 달에 잇는 돌멩이는 어디에 속합니까? 달에 종속되지요. 달이 움직일 때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냥 달은 바위니까. 달 속에 있는 돌멩이는 달이 이동하면 같이 이동하니까 그건 종속이지요. 그런데 달을 볼 때 나하고 달하고 누구 종속돼요? 미쳤나 내가 달한테 종속되게. 그런데 달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그래서 푹 빠졌어요. 그러면 그 순간은 뭡니까? 나는 달에 종속되는 게 아니고 포섭되지요.

이 말이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 달이 너무 아름답구나. 나는 달 보다 빠졌다. 그때 다른 사람이 놀리기를 너는 미쳤다고 종속되는가? 내가 미쳤다고 달에 종속됩니까? 달이 아름다워서 잠시 반해서 달의 아름다움에 포섭된 거지요. 왜냐하면 달과 내가 하나의 대상이 돼버리면 달은 아무튼 주체와 객체 관계가 될 경우에는 여기는 종속관계가 없어져 버려요.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포섭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걸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돼버리면 이런 현상이 이게 지금 우리의 상식하고 달라요.

여러분 지구하고 인간이 있다면, 누가 힘이 더 세요? 지구 힘이 댕기는 힘이 만유인력인데 누가 힘이 더 셉니까? 백이면 백, 지구 힘이 더 세다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 물리학자들은 환장합니다. 똑같은 거예요. 만유인력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뭡니까? 작용, 반작용은 힘이 똑같을 때 작용, 반작용이에요. 세상에 작용은 큰 힘이고, 반작용은 작은 힘 같으면, 그것은 상대가 뭔가 모자라요. 작용이 9고, 반작용이 3 같으면, 이 작용을 작용되기 위해서는 6개를 딴 데서 끌어와야 작용이 돼요. 오늘 강의 어렵다고 했잖아요. 화이트헤드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어려울 거예요.

아까 내가 나된다는 것은 뭐가 있어야 돼요? 바깥에 나와 다른 경계를 짓는 나와 다른 객체가 있을 때 타자가 있을 때 있잖아요. 작용이라는 말은 반작용이 없는 곳엔 작용이란 게 없어요. 반작용이 있을 때 있고, 그 작용은 반작용의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작용이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유인력이 뭐냐? 작용과 반작용, 이게 뉴턴의 제일 법칙이에요. 그렇다면 그 힘에 의해서, 지구가 사람을 당긴다 하잖아요. 아니에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지구를 당기고 있어요. 인간이 헤라클래스라. 지구도 당긴다니까. 지구가 딸려 와요. 딸려 와서 부셔지고 깨지는 거예요. 이게 너무 크게 딸려 와서 완전히 면상을 갈아 붙이는 거예요. 나무에서 인간이 떨어지면, 떨어지는 인간의 힘이 너무 세서 지구가 딸려 와서 나무에서 떨어지는 인간하고 지구와 박치기해서 면상 다 깨져버려요.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인간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a=F/m 가속도가 질량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어쨌든 힘은 동일한테 우리의 질량이 지구에 비해서 너무 작기 때문에 우리가 떨어지는 걸로 보인다 이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지구만큼 커 보세요. 막상막하지요. 같이 붙지요. 그래서 같은 급끼리 붙으면 같은 헤비급하고 붙으면 되는데 만약에 다른 플라이급하고 헤비급하고 붙으면 마치 누가 일방적으로 때리는 것처럼 보입니까? 헤비급이 플라이급을 막 때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플라이급이 헤비급한테 얻어맞으면서 힘을 가하지요. 얻어맞으면서 때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헤비급은 주먹으로 때리고 플라이급은 뺨으로 때리는 거예요. 그걸 흔히 우리는 뭐라 하냐면, 얻어맞는다고 하지요. 사실은 같이 때리는데. 질량의 차이 때문에.

이것은 바로 모든 것을 우리가 내 입장에서, 큰 것 입장에서, 주체와 객체를 나눴으면 객체를 잊어버리고 주체만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어떤 것도 종속되는 게 없어요. 서로서로 포섭을 하게 돼있다 이 말이지요.

자, 그렇게 돼버리면 여기에서 전체와 부분으로. 라이프니찌라는 철학자는, 화이트헤드 하기 전에 이런 여러 가지 철학자를 이야기해야 돼요. 부분 안에 전체가 다 들어있다는 것을 최초로 이야기한 철학자가 라이프니찌입니다.

그 앞에 있는 철학자가 스피노자인데 스피노자는 전체가 신인데 다만 부분은 그의 양태, 그의 모습들이 들어난다. 그러니까 인간, 개, 코끼리, 코스모스, 이런 것들이 전체가 신인데 전체가 약간 약간씩 신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니까 전체가 바다라면 바다의 팍팍 튀는 파도의 물방울, 그 물방울에 해당되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스피노자는 그렇게 봤습니다. 따라서 인간, 인간들이 모여서 전체의 신을 이룬다. 이렇게 봤는데, 라이프니찌는 거기서 더 나갔어요. 뭐냐 하면, 그 튀는 물방울 속에 바다 전체가 다 들어있다고. 부분 속에 전체가 들어있다는. 그럴 때 비로소 포섭이 되지요. 포섭,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으로 있으면 인간은 종속돼요. 왜냐? 하나님은 전체에게 종속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인간이 죄졌습니까, 하나님이 죄졌습니까? 이렇게 대상이 등장한다면 인간은 신에게 종속되는 게 아니고 포섭이 되는 겁니다. 포섭이 되면서 인간이 갖고 있는 자유의지는 신이 갖고 있는 자유의지와 공통성을 지닌 신적 요소기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그러한 냉혹한 결론에 나왔다 말이지요. 포섭이기 때문에.

포섭은 뭐라고요? 공통요소라고 했잖아요. 아까 내가 지금 무슨 옷을 입었다? 흰 옷을 입은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나는 같이 희다는 것에 공통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죄지은 것은 신이 내려주신 자유의지를 활용한 것에 해당된다는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신의 책임이 아니고 인간의 책임이며 다만 인간의 그 행동은 인간이 그런 행동했기 때문에 신이 인간에게 죄 지었다고 할 수도 없고, 다만 공통적인 속성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신은 인간이 죄 짓는데 거기에 책임이 없다 이 말입니다.

자, 이런 식으로 딱 돼버리면, 또 한번 해 봅시다. 인간의 이성은 A는 A이고, B는 B이다. 했지요. 그 이성은 누가 줬다고 했습니까? 신이 주신 거지요. 그러면 신이 줬다면, 신도 A는 A이고, B는 B이겠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그렇게 A는 A이고, B는 B이다. 라는 이성이 있다는 말은, 이성을 내려주신 분이 아까 창세기 1장에서 마지막 때에 인간을 만들었잖아요. 만들었으니까 A는 A이고, B는 B이다. 라는 말은 6일째 날은 날이고, 7일째 되는 날은 날이고, 그 7일째는 뭐 하라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안식해서 거룩히 지키라고 했잖아요. 그것은 인간에게 뭘 줬다? 따질 수 있는, 6일과 7일과 차이가 난다는 그 차이를 구획할 수 있는 이성을 줬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전통신학이라 했잖아요.

그렇다면 한번 봅시다. 그런데 지금 라이프니찌나 화이트헤드는 그걸 거부하는 거예요. 거부해서 뭐냐 하면, A와 B가 같다는 겁니다. 왜 같다고 하냐면, 서로 대상이 될 때는 A가 B에 종속되지 않고 포섭되니까 B 속에 뭐가 있냐면, A라는 요소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현대에 와서 이걸 어떻게 증명하느냐면, 점과 점을 이어진 것을 선이라 하고 끊어진 것을 선분이라고 합니다. 이 선분을 나눠 봤습니다. 나눠 보면 이 부분이 합쳐서 전체가 되지요. 그러면 이걸 또 나눠 보는 거예요. 또 나누면 이 부분, 이 부분 다 합쳐서 전체가 되지요. 그럼 또 나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선분이니까 무한한 선이 아니고, 선분에서 계속해서 끝없이 뭐가 나오느냐? 무한이 나오죠. 끊어졌다는 것은 유한이죠. 유한에서 무한의 법칙이 나온다 이 말이죠. 비록 공간적인 무한으로 봐선 다 차면 이 안에 들어가니까 이게 유한이 무한 되지만 이게 끊어진다는 무한적인 무한의 개념은 유한 속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한에 뭐가 들어있다? 무한의 개념이 나올 수가 있는 거예요. 끊어도 또 나오고 끊어도 또 나오고.

화이트헤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은 유한한테 인간이 인간보다 큰 우주를 생각한다. 그게 뭡니까? 인간은 인간이 속해 있는 우주보다 더 큰 것이 유한된 인간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우물 속의 개구리는 우물 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분명히 우주 속에 있으면서 우주 밖을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예요. 우주 밖에 뭐가 있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주 바깥에 있는 그러한 세계까지 이미 그 우주 안에 있는 작은 인간 속에 정신적으로 다 들어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거다 말이죠. 만약에 안 들어 있으면 우주 밖에 뭐가 있지? 라는 생각조차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냐? 유한 속에 무한이 담겨 있는 거예요. 이것은 종속입니까, 포섭입니까? 이것은 포섭된 거죠.

아까 몇 시부터 시작했습니까? 조금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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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5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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