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광주 강의(05. 3. 24) 13-2강의고린도전서

Re..광주 강의(05. 3. 24) 13-2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13-2

두 번째 시간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1절을 봅시다.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바가 아니로라”

여기 ‘사단’이란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이방종교를 지칭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를 향해 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안에 사단이 활동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를 장악하고 있던 목사를 향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사단의 일군’이라고 합니다. 15절에 나오지요? ‘너희들이 잘도 속는구나, 이 바보들아. 사단의 종과 주님의 종을 그렇게도 구분 못하느냐?’ 라고 말하지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2장에 나오는 ‘근심 한다’는 말이 뭔가 하면, 사도바울이 상당히 불쾌하단 말이지요. 내가 전에 편지에서(고린도전서)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했는데,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 넘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근심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나의 근심은 약간 보류하고 두 번째 편지를 줄 텐데 이 편지를 봐도 정신 못 차리는 자는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시 2장 11절로 가서, ‘사단의 궤계를 알지 못하는바가 아니로라’는 말은 ‘안다’는 것이지요. 사단의 궤계를 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사단의 궤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단(악마)은 자기 마음대로 활동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원칙에 따라서만 활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원칙이 뭐냐 하면, 악마는 하나님의 아들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대 예수님이 뭐라고 했지요? 가룟 유다에게 떡을 주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얘야, 너 할 일 해야지.’ 라고 했는데,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 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단에게 한 말입니다.

마귀가 없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있어야 예수님의 사랑의 가치가 비로소 드러납니다. 주님이 날 사랑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악마와의 싸움에서 이미 악마를 이겼구나 하는 그 증거물이 내 속에 들어올 때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두 번 다시 악마의 술책을, 궤계를 모른다든지 넘어간다든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단의 궤계가 뭔가를 알게 되면 사단에게 고개 숙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사단의 궤계가 뭔가 하면,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싸움을 붙여 주셨어요. 이것이 붙이시는 전쟁인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싸움을 통해 일을 진행시키십니다. 이 싸움에 들러리로 동원된 자가 누구인가 하면, 쟁반을 예로 들겠습니다. 제가 아침 운동 갔다가 조금 늦게 오면, 아내나 딸이 다 나가야하니까 바빠요. 제가 우리 딸 진주에게 밥하고 국, 그리고 물을 달라고 하면 손이 모자라요. 이때 이것들을 접시에 담으면 한꺼번에 가지고 올 수 있지요. 동시에 이동이 가능하지요.

이처럼 동시에 이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에 보면,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악마도 있고 예수님도 있고.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옮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대마다 접시는 바뀌지만 접시의 원칙은 창세기 3장 15절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뱀의 역할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일을 해야 하고,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남자와 여자의 운명은 고생가운데서 예수님 바라보면서 소망을 갖게 되는 이러한 들러리 역할 하라고 같이 이동중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지 않고, 지금은 메시아라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 이름을 설명하려고 하면 굉장히 복잡한데, 이것은 지난 월요일 대구강의에서 했는데 들어보셨습니까? 못 들어보셨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요.

이름이란 것은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종속됩니다. 복도에서 ‘야, 김 과장!’ 하고 이름을 부를 때, 김 과장은 사장에게 종속됩니다. 학교 복도에서 ‘김 군’하고 선생님이 학생을 부를 때는 학생은 선생님께 복속이 돼요. 이름을 불러줄 때 불러준 사람에 의해서 의미가 담겨집니다.

왜 불렀습니까? 일 시키려고 불렀지.
하나님이 이름을 부를 때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아담아!” 하고 불렀지요. 이름을 아담이라고 불렀잖아요. 아담의 이름은 나중에 흙이 됩니다. 흙이 되게 하기 위해 불러낸 것입니다. 그냥 흙이 되면 좋겠는데 그것이 아니고,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고생하면서 흙이 되어가는 과정을 밟습니다.

이 세상에 고생이 많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담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고생은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흙으로 분해 되는 과정이 쓰리고 아파요.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 이름을 그렇게 불러주었기 때문에.

김군, 최군이 아니고 흙군. 저요? 그래 흙군 너 말이야. 왜요? 너는 흙이 되어야지.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부를 때는 이 이름이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 110편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호와께서 누구에게요? 내 주에게. 여기에 하나님이 두 분이 등장해요. 이것은 바로 창세기 3장 15절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기에서 할 일이 뭡니까? 불러놓고 하나님의 원수 마귀를 완전히 정복하고 밟을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는 말 아닙니까?

그 때 하나님에 의해서 창세기 3장 15절을 이루기 위해서 불러주는 이름이 ‘하나님 이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름은 항상 창세기 3장 15절,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고 승리하는 기능을 하는 하나님이 ‘하나님 이름’입니다.

이 ‘하나님 이름’이 신약에는 ‘주’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앞에 뭘 붙입니까? 주 예수여! 할 때 ‘주’의 의미가 뭔가 하면, ‘창세기 3장 15절대로 다 이루신 우리 예수님’ 다른 이름은 안 되고, 다른 이름으로는 우리에게 구원을 줄 이름이 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으면 창세기 3장 15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다 이루면 우리는 뭡니까? 비록 고생은 하지만 예수님이 승리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구원을 받지요. 왜냐하면 한 접시에서 이동하는 중이니까. 이해되십니까?

여기에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고 했지요. 창세기 3장 15절에 예수님과 동승한 남자와 여자는 그냥 남자, 여자가 아니고 여자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하고,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 것처럼 사랑하라. 라는 이 기능을 줌으로써 현재 예수님과 악마의 싸움을 다시 재현해 보이는 그런 기능을 하면서 한 접시로 세대별로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지난 주 요한계시록 설교에서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아하, 성경의 구조가 의외로 간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요.

고린도후서 2장을 다시 봅시다.
17절입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 되어 있고, 12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혼잡하지 않을 수 있는 방식은 뭐 밖에 없습니까? 신, 구약 전체가 굉장히 혼잡하지만 이것을 단촐하게 매듭을 짓는 매듭에 해당되는 것이 뭐냔 말이지요. 그것이 12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라는 분이 행하신 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모든 말씀은 거기에 다 집중되어 있으면서 다 해결점이 나더란 말이지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니까 11절에 보면,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렇게 해도 제가 안심되지 못하는 것이, 갑자기 집안에 우환이 있고 자기 몸에 병이 생기면 사단이 역사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실컷 이렇게 광주에서 말씀을 가지고 같이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가 혼잡해 지는 거예요. 내가 기도를 얼마나 더 열심히 하면 사단이 떠나겠는가? 헌금을 얼마나 더 하면 사단이 떠나겠는가? 전도를 더 열심히 하면 사단이 떠날까? 이렇게 또 말씀이 혼잡해 지고해요. 이것이 바로 마귀의 궤계입니다.

마귀의 궤계를 간단히 물리칠 수 있는 것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지요. 예수의 복음인데, 사단도 이것을 알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멀어지면 이것은 사단의 궤계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단촐하고 간단한 것인데, 모든 것이 이미 해결 된 것인데,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요. 이렇게 되면 말씀이 혼잡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대신 나의 복음, 나의 행함, 나의 절제된 생활, 나의 신앙심 --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쪽으로 와 버려요.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사람들이 제일 잘 속아 넘어가는 대목이 뭔가 하면, 착한 일 했을 때가 아니라 나쁜 짓을 했을 때 마귀의 궤계에 전부 빠집니다. ‘바보같이, 내가 그 때 그런 짓 안 했으면 좋았을 걸.’ 왜 자책합니까? 반성하면 마귀가 떠납니까? ‘주여 잘못되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마귀가 떠나는 줄 알아요?

사람들이 말이나 행동에서 실수를 했을 때 가장 마귀에게 농락당하는 위험한 순간입니다. 인간은 원래 실수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신체가 허약해지면 어쩔 수 없이 실수합니다. 제가 설교할 때도 본문이 그 구절이 아닌데, 요한복음을 맨날 로마서라고 하고, 로마서 3장인데 로마서 8장이라고 하고, 이럴 경우에 주의해야 합니다. 제가 틀린 것은 맞는데, 이것은 나이 탓인데, 이것을 마치 내가 나쁜 짓 했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떠나, ‘너 앞으로 잘 해야지.’ 쪽으로 기울어진다면 그 사람은 사단으로부터 농락당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창세기 3장 15절이라는 접시에 있다가 폴짝 뛰어내려서 스스로 악마와 싸워 이기려는 어리석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냥 접시에 올라타세요. 접시 안에서 똥을 싸든 오줌을 싸든 거기에 누우세요. 창세기 3장 15절에서 다 이루었다고 해야지,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구원 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창세기 3장 15절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구원 받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옥에 가두고 죽였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 받았습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택한 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의 철학이나 과학이나 경제학 이런 것 가지고 접근이 안 됩니다. 접근을 해봐야 형식구조 밖에 나오는 것이 없어요.

2장 15절의 “망하는 자”에 대해 다시 해 봅시다.
망하는 자가 드러나기 위해서 성령이 역사하는 이유는 시편의 저주 시(詩)가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의 복음을 근거해서 복수극에 나섭니다. 영화 [올드 보이]처럼. “군만두 15년 동안 먹인 놈이 누구야.”

복수극에 나서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지옥의 존재가 합당함이 온 우주에 퍼집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통해서도 자신의 이름이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에게 처절하게 공격을 가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한 공격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에 의한 살벌한 공격이 감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를 앞장세워 지금도 무섭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시는 이유가 7절에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찌른 자”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올 때 어떤데 근거해서, 어떤 취지를 달성하기 위해서 구름 타고 오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찌른 자들도 본다는 말은 이들이 용서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이제 너희들도 한 번 당해 보라는 식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얍삽하지요. 얍삽하다는 말은 간교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아들을 연약한 모습으로 보내서, 누가 찔러도 쉽게 찌르도록 유도해 놓고, 이제 자기 아들이 찔린 것을 근거로 해서 본격적으로 대 토벌작전에 나서는 것이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한 번 봅시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참지 못하고 반발합니다. 반발하는 근거는 ‘왜 당신은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 중심으로 본다.’

결국 마지막 싸움은, 세상을 사람 중심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중심으로 볼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이 세상에 종교도 많고 교주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기독교인들만 신봉하는 예수 중심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가? 그 근거를 한 번 대 보라는 식으로 나올 것이 뻔하단 말이지요.

사람이 사람 중심으로 나간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호모 호모라고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 있지요. 호모 호모는 사람을 위한 사람. 사람 되기 위한 사람. 이것은 제가 번역하는 것인데요. 이것은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아니고, 사람이기에 사람으로 추앙받아야 한다는 뜻에서 사람 되기 위한 사람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 전에 먼저 존재하는 것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의하면. 지금 손수건이 있는데 이것은 그냥 손수건이 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손수건 누가 가져다 놓았나? 손수건이 있게 한 그 원인까지 추적하는 것이, 모든 존재를 볼 때는 그 원인까지를 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존재는 그 존재의 배후와 결부시켜서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선 볼 때, ‘아가씨. 결혼 안 했습니까? 그러면 결혼합시다.’ 이런 남자는 없어요. ‘아버지 뭐 하십니까? 학교를 어디까지 나왔습니까?’ 이런 것들을 묻지요. 이런 것들을 묻는 것은 당신이란 여자의 배후까지를 합해서 당신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정신병자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선이 깨지는 것이지요. 이런 배후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것 저것 묻는 거예요.

지금 이 존재라는 것이 사실 어떤 존재가 있기 때문에 손수건이 있는 거지요. 이것이 정당하다면, 손수건을 있게 한 그 존재는 어디서 왔느냐? ‘공장에서 만들었지.’ 그러면 ‘공장은 누가 만들었느냐?’ 이렇게 따져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존재를 존재케 하는 어떤 최초의 존재가 있겠지요? 이것이 모든 사물을 존재케 하는 ‘신’이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신’이 나를 만들었잖아요. 맞지요? 존재에서 존재가 나왔잖아요. 그러면 신은 어떤 신인가 하면, 나에게는 존재라는 속성이 있지요. 그렇다면 나를 존재케 한 하나님에게도 나와 동일한 존재라는 속성이 있단 말이지요. 하나님의 존재 속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 맞잖아요? 이것이 안셀무스의 존재론입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속성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존재의 속성이 있는데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기에 그것으로 끝납니다. 더 거슬러 올라갈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이 존재함으로 내가 존재한다면 결국은 존재라는 공동적인 유사성이 있지요. 이것을 ‘아날로기’라고 합니다. “유비, 유사성”입니다. 유사성이 있다는 말은 신과 내가 통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이지요.

공통점이 있다면 나라는 존재를 건드리는 것은 누구를 건드리는 것입니까? 신을 건드리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같은 존재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나를 부정할 리는 없고, 다만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신처럼 완전하지 못해서, 죄가 많고 실수가 많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라는 존재에게 죄는 용서해 주고, 실수는 줄이도록 하고, 아픈 몸은 낮게 하시는 그래서 신이 우리를 자녀로 용납하고 안아 줄 때, 이런 교리가 있을 때 인간이라면 이런 교리에 납득 안할 인간이 누가 있는가? 이것이 중세 철학입니다.

전도하기 쉽겠지요? 이런 철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충분히 가능합니다. ‘당신의 존재 근원은 신이지요? 신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하면 끝입니다. 여기에 어려운 것이 있습니까?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받아주시는데 그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써 자기 아들을 대신 죽게 하셨다. 당신의 존재는 이미 하나님의 것이니까 당신이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그분의 자녀로써 천국 갑니다. 이것이 중세철학의 전도고, 오늘날의 교회가 전도하는 내용입니다.

납득이 되지요? 왜 그런가 하면 존재라는 보편성에서 출발을 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뭐가 빠졌습니까? 반드시 저주 받아야 하고 망해야 할 자는 망해야 하는데 이것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망하는 자를 만든다면 이것은 자기 존재를 자기가 부수는 것이 되지요. 하나님이 공들여 만든 인간을 스스로 짓밟을 수는 없고, 다만 지옥을 말하는 것은 적당히 겁을 줘서 나쁜 곳으로 빠지지 말고 내 사랑 안에 살라는 것이지 실재로 영원히 심판받는 지옥은 없다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지옥이야기는 말 안 하기. 지옥에 대해서는 입 다물기. 지옥 이야기하면 전도 안 되니까 입 다물기를 한 거지요.

그래서 제가 [지옥의 하나님]이란 책을 섰어요. 팔리지를 않지요. 전부 지옥에 대해서는 입 다물자고 했는데, 하나님이 지옥의 하나님이 아니면 그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적극적으로 지옥 만들기에 나서는 하나님을 안 믿으면 그 사람은 창세기 3장 15절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창세기에 나오는 참 하나님이 아닌 존재에서 나오는 엉뚱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요. 사건의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의 하나님.

자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망하는 자’가 재미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망할 자와 안 망할 자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첫째 방법(이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은, ‘내가 구분한다.’ 이렇게 인간들이 망할 자, 안 망할 자를 구분하면 이런 식으로 구분합니다. 나처럼 예수 믿으면 안 망하고, 나처럼 예수 안 믿으면 망한다. 이렇게 돼요.

십자가마을 홈페이지에 보면 송00 이란 사람이 이런 글을 썼어요. ‘왜 십자가마을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야기하지 않는가?’ 이것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모든 글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글에도 이런 것이 다 있다고요. 그런데 마치 그분의 글을 보면, 십자가마을에 글을 써는 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일부러 매도하기 위해서 그렇게 쓴 거예요. 미워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너희들이 안 알아주면 너희들은 망할 자라는 것입니다. ‘나 송00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따라서 내가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놈은 망할 자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처럼 망할 자, 안 망할 자를 우리가 기준을 정하게 되면, 반드시 내가 기준을 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특징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에게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결정해요. 망하는 자, 안 망할 자를.

이런 사람의 특징은 ‘나처럼 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엉터리지요.

이제 두 번째 구분은 바른 구분입니다.
십자가를 누가 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생산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누구에게 일임했습니까? 예수님께 일임했지 우리에게 일임하지 않았지요? 우리에게 일임을 하면 내가 잘났다고 나오니까요. ‘나처럼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인간에게 일임을 할 수가 없지요.

영생을 주는 살과 피는 누구에게 일임을 했습니까? 십자가 지신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짐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날마다 십자가 죽음에 넘기움을 당해야 해요.

고린도후서 4장 11절을 봅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예수 믿으면 내가 기준이 되면 안 됩니까? 참 이것이 한국교회의 문제인데, 예수님이 십자가 졌지요. 그리고 내가 예수 믿으면 구원 받잖아요. 그러면 나는 생생히 살아 있다. 이런 식으로 논리가 전개되지요. 그런데 이런 논리가 성경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기에 십자가는 인형 같은 십자가입니다.

내가 진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이 십자가가 그 믿는 자를 날마다 십자가에 죽도록 하는 그런 작용이 이뤄져야 십자가를 제대로 믿는 자입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나의 죽음을 넘기우는 사람에 한해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날마다 자기 죽음을 넘기우면 ‘나처럼 행하라’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될 수가 없지요. 자기는 날마다 죽는데.

그래서 제가 글을 쓸 때,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날마다 죽고, 우리는 늘 부족한 죄인이다. 이런 식으로 써니까, 복음 모르는 사람들이 ‘왜 당신은 주님 사랑을 말하지 않고 매일 십자가만 이야기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십자가 이야기 그만하고 ‘이제는 나 살았다. 나 사랑 받았다.’ 이런 이야기 하라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다 가짜들입니다.

정말 주님의 사랑을 받고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사도바울처럼 고백하지요. ‘나는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고 십자가만 드러나게 함이니라.’ 그래서 이름도 “십자가 마을”인데. 어쩌란 말입니까?

그쪽에서는 십자가만 이야기한다고 불만이에요. 내가 용서받았다는 그 이야기 좀 하게 해 달라는 거예요. 미쳤나? 그 이야기 하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달라요. 어제 오후 3시 40분에 안 십자가하고, 오늘 아침 7시 16분에 느끼는 십자가하고 달라요. 인간은 항상 형식구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어제 십자가는 내용이 있었는데 오늘 십자가는 형식만 남고 알맹이는 쏙 빠져버렸어. 십자가는 아는데 오늘 곗돈 타는 날이라. 십자가보다 곗돈 타는 것이 급한데. 곗돈 받아 가다가 불상사가 생기면 안 되는데. 그 돈으로 아이들 등록금 내야 하는데. 이 마음이 어제 오후 3시에는 없었어요. 주여, 등록금 없어도 십자가만 있으면 됩니다. 이런 마음이었는데, 같은 3시인데 오늘 3시에는 이런 사건이 안 벌어집니다. 어제와 같은 마음이 없어요.

제가 사건을 예로 들면서 산불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도 제가 산에 올라갔는데, 산불 난 흔적으로 재만 있어요. 불이 활활 탈 때의 그 산불은 없어요. 내가 성냥불을 켜도 이것은 오늘 내가 일으킨 산불이지 어제 어린아이가 낸 그 산불은 아니라니까요. 일회성입니다. 한 번 일어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없어요.

이처럼 내가 날마다 죽는 것도 저쪽에서 사건을 일으켜 줘야, 그 사건에 함몰 돼야 그때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는 말이 있지, 그렇지 않고 사건을 일으키지도 않았는데 이 말씀 외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형식으로 남는 거지요.

‘망하는 자’에 대해 더 생각해 봅시다. 이 정도로는 아직 미흡합니다.
망하는 자는 하나님의 엄중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지옥 만들기에 동원될 사람들로 이 땅에 창조된 자입니다. 그래서 이 망하는 자들은 교회로 몰려오고 기도하고 해도 그들은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있어요. 십자가 사건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아가 살아 있어요. 스스로 아무리 낮추고 금식하고 기도해도 여전히 금식한 나, 기도 많이 한 나, 심지어는 십자가 믿는 나, 이렇게 계속 ‘나’가 살아 있어요.

이런 ‘나’는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서만 구원 받지 내가 열심히 믿어서 구원 못 받는다는 말을 들으면 망할 자는 자기 본색을 드러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어려운 강의를 하는가 하면, 지금 고린도후서 본문에서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가 되는 그 악취의 내용이 어떤 것이기에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로 풍겨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단의 궤계를 안다고 하는데 우리는 멍청하게 사단의 궤계가 뭔데? 이러면 안 되지요. 그것은 망하는 자로 하여금 반드시 악취며 외면하도록 하는 그것입니다. 라는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구원 받은 우리가 착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나도 역시 외면할 수밖에 없는 망할 자이었는데 웬 은혜인지 나는 구원 받을 자로 작정되었기에 ‘너는 죽을 죄인이야’라는 말씀이 악취가 아닌 향기로 느껴져 ‘주여 옳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라는 이러한 진짜 겸손, 그리스도의 은총으로만 구원 받았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몇 초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되요.

이렇게 된다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어떤 곤고와 환란,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이 큰 문제 거리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이 땅에 나를 이렇게 살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망할 자에게 망하는 것이 무엇이며 구원 얻을 자에게 향기가 뭔가를 알려주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몇 초 안 갑니다. 아쉽지만. 만약 이것이 계속 지속된다면 또 형식논리가 되어서 2시간 동안 버티고 있다고 나올까 주의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심정이 바로 이런 심정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6절을 봅시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을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감당이 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말이지요. 감당할 수 없어요. 감당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요.

사람은 날 때부터 자아를 생각합니다. 자아가 있다는 말은 존재가 있다는 말이지요. 자아를 유지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힘을 모읍니다. 어릴 때는 부모의 힘, 청소년 때는 친구의 힘, 성인이 되면 애인 혹은 직장 동료가 힘이 됩니다.

만약 보모가 사장님이라면 친구보다 부모를 의지합니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친구보다 더 큰 힘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은 과거 부모의 힘을 경험해 보았기에 그 힘은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수준을 알아요. 거기다가 더 추가해서 친구와 다른 아는 사람의 힘을 입어서 스스로 자아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집단에 소속하려 하고 집단화 시킵니다. 힘 있는 집단에 들어감으로 안심을 느낍니다.

노숙자도 혼자 노숙 생활하면 불안해요. 그러나 옆에 노숙하는 사람이 여러 명 있으면 용기가 생깁니다.

집단적인 힘이 바로 인류 역사상 등장합니다. 정치적 힘으로 작용해요.
교회에서 목사를 구하면서 이번에는 정말 복음을 아는 목사를 뽑아야 해. 하고 떠들어도 막상 부흥사가 오면 그쪽으로 마음이 쏠려요. 왜 그런가 하면 어느 쪽이 나에게 힘이 되는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아를 형성하고 난 이후에는(사실 이것은 허구인데) 자꾸 힘을 끌어 모으려고 합니다. 이런 힘을 좋아하는 사람이 망할 자, 안 망할 자를 구성할 때 뭘로 구성하겠습니까? 내 편이 되어주면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다.’하고, 내 편 아니면 ‘당신은 지옥 갈거야.’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도바울처럼, 창세기 3장 15절에 근거해서 세상을 볼 자가 과연 누구인가? 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바울처럼 하나님의 사건이 임해야 되는 것이지 인간은 이런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사단의 입장에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악마의 싸움을 전제로 하고 난 후에 그 다음에 십자가를 통해 다 이루었으니까 ‘내 살과 내 피가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사람은 아무리 힘이 세도 그것은 하나님의 힘이 되지 못하고, 비록 힘이 없더라도 예수님의 복음을 아는 사람은 우리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감당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럴 때는 좀 쉬어야지요. 10분 쉬겠습니다.

◁ 이전글

다음글 ▷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50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2,417 강의 Re..광주 강의(05. 3. 24) 13-3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6-04-13
2,416 우리교회 Re..사 9: 13-17 (백성의 죄) 이사야 최고관리자 06-04-12
2,415 묻고답하기 세상 전체의 현실 - 최고관리자 06-04-12
2,414 강의 Re..20060404 부산강의-화이트헤드(2) 미가 최고관리자 06-04-12
2,413 강의 Re..20060404 부산강의-화이트헤드(1) 미가 최고관리자 06-04-12
2,412 묻고답하기 농촌의 현실 - 최고관리자 06-04-11
2,411 묻고답하기 Re..페미니즘(여성해방론)에 대한 글을...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6-04-11
열람 ➜ 강의 Re..광주 강의(05. 3. 24) 13-2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6-04-10
2,409 우리교회 Re..출 40: 34-38 ( 동 행 )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6-04-09
2,408 우리교회 Re..출 40: 34-38 ( 동 행 )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6-04-09
2,407 우리교회 [일반] Re..웅웅 거리는 이유 [일반] 최고관리자 06-04-09
2,406 설교 요한계시록 2:1-5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6-04-09
2,405 우리교회 Re..계 2: 1- 5 (에베소 교회)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6-04-09
2,404 강의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 최고관리자 06-04-08
2,403 우리교회 [일반] [타인의 얼굴 -네비나스의 철학] 신학과 철학의 허상 시리즈 [철학] 최고관리자 06-04-08
2,402 강의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다] - 최고관리자 06-04-05
2,401 우리교회 [일반]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다]-신학과 철학의 허상 사리즈 [철학] 최고관리자 06-04-05
2,400 우리교회 Re..사 9: 8-14 (징계의 원리) 이사야 최고관리자 06-04-05
2,399 묻고답하기 Re..빌1&58;18절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6-04-03
2,398 강의 [제국] - 최고관리자 06-04-03
2,397 우리교회 [일반] 철학과 신학의 허상 시리즈- [제국] [철학] 최고관리자 06-04-03
2,396 강의 Re..20040607 부산강의-중세철학 [철학] 최고관리자 06-04-03
2,395 강의 대구 4월 3일 지옥의 하나님 p026 법에 대해서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04-03
2,394 묻고답하기 빌1&58;18절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 최고관리자 06-04-02
2,393 우리교회 Re..출 40: 1- 4 (성막의 영광)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6-04-02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