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강의-

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 강영안 저 문학과 지성사(서울:2005)철학으로 과연 복음을 해명해 낼 수 있을까?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메시야상을 소개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교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로서 복음은 철학적으로 는 도저히 이해 못할 걸림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누구에게나 같이 경험하게 되는 윤리적 요청이 된다. 그의 주장은 기존 철학계의 존재론에 대한 수정에서 비롯된다.서양 철학은 전통적으로 ‘자아론’이었다. 초월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를 향한 초월이며 안으로 향한 초월일 뿐 외재성이 자리할 여지가 거의 없다. 기어이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만 벌릴 뿐이다.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 가운데서 자신을 인식하고 파악하며 자신을 확인한다. 여기서 ‘자기성’이 성립된다.자기 자신 속에서 자신만 관계함으로써 인간은 타인과 바꿀 수 없는 자기 고유의 내면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역사적 과정으로 이어져 끊임없이 자기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제로 주어진다. 여기서 자유는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할 과제이다. 나는 나와 나 사이의 거리, 나에 대한 나의 결핍을 통해 내 자신으로 향한 욕망을 지닌다. 나 중심적으로 세계를 기획하고 관리고 나의 것으로 삼아 지배함으로써 나 자신의 존재를 실현한다. 이것이 ‘자아의 전체성’이다.이런 노력을 한마디로 말해서 ‘자율성’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나는 타자를 나에게로 환원하고 나뿐만 아니라 타자에게 법으로 군림한다. 여기서 나의 자유가 성립한다. 나는 세계와 타인으로부터 나 자신을 분리하여 홀로 세계 안에 섬으로써 나 자신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이 독립성으로부터 타자의 지배를 시도한다.그런데 이러한 독립과 자유가 함몰되는 순간이 찾아든다. 그것은 죽음의 순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죽음에 직면해 있다. 죽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에 기초한 주체는 이 죽음에 직면 하여 그 타당성을 상실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 고통 속에서 죽음과 갖는 관계는 경험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인식, 빛, 주도권을 뜻하기 때문이다.경험 속에서 수동성은 항상 능동성으로 바뀌고 주체는 경험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과 직면해서 주체는 자신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님을, 존재의 주인이 아님을 경험한다. 죽음은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다. 죽음에 대항해서 인간은 그가 가진 주도권을 모두 상실한다.사실 그동안 인간은 세계 안에서 향유하고 있었다. 물고기가 물을 삶의 ‘요소’로 체험하듯 세계는 사람에게 ‘요소’요 터전이다. 우리는 요소 속에서 살 뿐만 아니라 요소를 먹고 마시고 살고 있다. 마시는 물, 들이켜는 공기, 우리를 에워싼 따뜻함과 차가움 등으로 우리는 삶을 지탱한다.향유를 통해 자아는 삶과 활동의 중심이 된다. 향유는 자기의 응축이고 자신에게로 복귀 활동이다. 향유를 통해 내면성이 형성되고 내면성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 사이의 분리가 출현한다. 따라서 향유를 통해 자아가 비로소 출현한다. 향유는 ‘자신에 대한’ 향유이다. 자신에 대한 향유는 자기반성 또는 자기의식으로서 자신에 대한 관계(대자적)도 아니며 자신의 존재를 위한 것도 아니다. ‘자신에 대한 향유’는 마치 배고픈 사람이 자신의 배고픔만을 생각하듯 그런 의미에서 ‘각자 자신을 위해’ 누리는 행복이다. 향유는 다른 누구에게도 환원할 수 없는 개체의 고유한 행위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은 줄 수 있지만 그를 대신해서 먹어주는 못한다. 이처럼 아무도 개인의 내면을 투명하게 볼 수 없으며 개인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다. 개인은 저마다 향유의 주체로서 신비를 지니고 있다. 개인은 종족으로, 혈통으로, 또는 사회 집단으로 또는 누구와의 관계로 환원할 수 없다. 이처럼 향유는 자신 안으로 물러남’이고 자신으로의 귀환이다. 향유는 자아의 자기성을 형성한다.그런데 이런 자아에게 죽음이 찾아드는 것이다. 죽음은 일종의 살인이요 가해이며 폭력이다. 죽음은 주체가 존재를 가지듯 그렇게 존재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알려져 있지 않고 또 알 수도 없다. 죽음에는 나와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존재 기반이 없다. 그것은 나와 교류할 수 있다는 다른 자아가 아니다.여기에는 인간의 존재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한다. 존재란 ‘홀로 서기’이다. 익명적인 존재 사건으로부터 홀로서는 존재자가 출현된다. ‘홀로 서기’ 이전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냥 우발적인 사건일 뿐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주체없는 존재로부터 존재이며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인격이 그곳에는 없다. 이러한 예는 깜깜하게 어두운 밤과 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분명히 깨어있다는 의식은 있으나 분별하는 인식은 허락되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순간을 절단할 수 없다. 시작과 끝, 순간과 순간의 연속, 시간의 교차는 ‘그저 있음’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신체’로서만 자신을 느낄 뿐이다. 이로서 신체란 의식 이전의 의미부여의 기초가 된다.주체가 발생된다는 것은 곧 익명적인 존재의 속성에서 ‘존재’ 그 자체를 자신의 속성으로 만들 때 출현된다. 주체는 먼저 밖에서 안으로의 운동이다. 안으로 운동, 내재성의 성립이 선행된 다음, 안에서 밖으로의 초월이 가능하다. 이렇게해서 주체란 밖으로 초월하려는 성향을 멈출 수 없다.그런데 이러한 능동성이 고통과 죽음을 관련해서는 그 능동적 힘을 상실한다. 죽음은 나에게 내가 지배할 수 없는 미래가 있음을 통고한다. 이로서 주체는 죽음을 통해 다시 ‘홀로 서기’가 유발시킨 존재사건으로 이전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된다. 진정한 존재가 죽음과 함께 깨어난다는 말이다.죽음은 ‘절대 타자’ 나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 있음을 보여주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존재 가짐’을 통해 홀로 선 주체의 고독, 존재의 전체성은 고통 속에 다가온 죽음을 통해 드디어 틈이 생긴다. 인간에게 미래를 열어준다. 원래 ‘홀로 서기’의 주체는 오직 현재 순간을 자기 것으로 장악하고 자신의 존재를 실현할 뿐이었다.홀로 서기 자체에는 미래가 없다. 기대할 수 있고,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미래는 진정한 미래가 아니다. 참된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다. 그 미래는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 그것이 다가온다는 사실로 인해 시간의 공간적 외재성 하고는 다르다. 고통과 죽음의 경험을 갖기 전에 주체는 어떤 다른 것을 통해서,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로서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게 된다.주체는 단순한 존재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존재자이다. 여기에 타인이 죽음과 함께 다가온다. 타인은 주체의 자기 동일성 바깥의 존재하는 세계에 속한다. 절대로 인간은 타인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알 수 없는 타인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은 나의 얼굴이 아니다. 따라서 내게 속한 세계에서는 항상 낯선 경험으로 느끼게 된다.인간은 그동안 자기를 실현하고 있었다. 잠을 자고 집을 짓고 그 가운데 거주함으로써 존재의 익명성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성, 자립성 혹은 주체성을 확립한다. 이것을 통해 주변의 사물을 즐기며 이것이 위협받을 때 노동과 인식을 통해 사물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한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를 실현하는 가운데 타인들을 만난다.그런데 이 타인은 누구인가? 거주하고 잠자고 먹고 노동하고 즐기는 것은 나의 삶으로서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타인의 존재는 나에게 무엇인가? 타인은 무한자의 계시요 전혀 새로운 세계의 차원을 열어준다. ‘무한자’의 이념은 나에게서 비롯된 이념이 아니라 바깥에서 내 안으로 들어온 이념이다. 무한자의 이념은 따라서 나의 주도권과 무관하게 나에게 일종의 계시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무한자의 이념은 나의 생각을 항상 초과하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이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부딪힐 때 우리 의식을 초월해 있는 현실과의 관계를 표현해 주는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을 회의하게 만든다. 타인이란 바로 무한자의 이념으로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면서 초월하고 우리를 비판하고 문제삼고 질책한다. 역사란 결코 최종 단어일 수 없다. 무한자의 이념은 영원한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역사의 부당함과 나의 책임을 보게 한다.타인의 얼굴로서의 무한자는 역사적 진보의 강요를 깨뜨리는 역사적 사건이요 이 존재에 속하지 않는 존재이다. 타인은 전적으로 나에게 의존하지 않은채 다가온다. 타인은 단순히 나와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나와 다른 타자가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타인’의 출현으로 인해서 충격을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타인은 어떤 종족이나 가족, 어떤 민족도 초월한다. 타인은 그야말로 ‘자기 자신에 의한 현현’이며, ‘맥락없는 의미화’요, ‘전체성의 깨뜨림’이다. 타인은 단적으로 나에게 ‘낯선 이’이다.타인의 말 건네 옴은 단순한 대화 차원의 말 건넴이 아니다. 그것은 “너는 살인하지 말지어다”라는 명령이다. 타인의 얼굴은 시선을 던지면서 다가선다. 시선은 내가 그를 보는 시선이 아니라 그가 나를 보는 시선이다. 즉 그의 봄이다. 그의 시선은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형식을 뚫는다. 나를 쳐다보는 눈은 얼굴 가운데서도 보호막이 없이 나에게 곧장 드러난 부분이다. 그러므로 나를 보는 시선은 타인이 아무 매개없이 직접 나에게 드러낸다. 이것은 곧 ‘계시’다.타인의 얼굴은 한 존재자가 직설법으로서 아니라 명령법으로 나를 접촉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얼굴의 현현, 곧 얼굴의 자기 표현은 따라서 윤리적 의미를 띠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에게 얼굴의 나타남으로 명령하는 타자는 강자의 모습이 아니라 낯선 이방인의 모습으로, 비참한 이방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그는 이방인이고 배후에 아무런 보호자도 없이, 기득권도 없이 나타난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의 모습이다. 비참함에 처한 타인이 나에게 간정으로 호소해 올 때, 그 호소로 인해 나의 자유가 문제시될 때, 이 때 비로소 윤리적 관계가 등장된다.1인칭 관점에서의 타인에 대한 윤리나 책임론은 결국 나의 존재 유지의 연장으로밖에 볼 수 없다. 1인칭적인 삶에서는 ‘책임이란 주체의 자유성’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것은 나의 행위에 대해 내가 책임지려면 행위를 한 주체가 바로 나이며 내가 한 행위는 나의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으로 한 행위임이 확정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책임은 나의 삶을 내가 짊어진다는 의미에서 책임일 뿐 타인을 위한 책임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참다운 윤리란, 지금까지 제한 없이 자유를 행사하던 나에게 그 자유를 문제 삼으면서 시작이 된다. 타인은 나를 고발하고 나를 소환한다. 나는 타인에게 주격으로서가 아니라 목적격으로, 다시 말해 죄 있는 자로 고발된다.나는 타인에게 갇힌 자로, 타인에게 볼모로 붙잡힌다. 도망을 시도해도 불가능하다. 타인은 나를 끝까지 따라온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로부터 오는 윤리적 호소는 나에게 행복을 주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준다. 나만이 누리던 자유가 부당함을 일깨우고 티인을 수용하고, 내 것을 내어놓고 타인을 환대하도록 요구한다.응답을 요구하는 타인의 부름에 내가 ‘응답할 때’ 나를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세울 때 나는 비로소 ‘응답하는 자’로서 ‘책임적 존재’ 또는 윤리적 주체로 탄생한다. 타인을 위해, 타인에 의해 내가 책임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곧 내가 응답적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그 응답은 다름아닌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고백이다. 마치 외투 보관소에서 담당 직원이 “외투 여기 있습니다.” 말하면서 외투를 내어주는 것처럼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내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이사야 6:8의 표현대로 “여기 내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응답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처분을 기다림은 마음은 단지 타인의 요청에 따른 것이지 나의 선호도나 감정과 무관하다. 이것을 ‘나 안에 있는 타자’라고 부른다. 내 속에 있는 초월이다. 타자가 내 몸으로 육화되어 타인의 고통을 위해 나를 내어줄 수 있도록 노출시킨다.타인의 책임은, 내가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나서 전에, 나의 존재 이전에, 나의 의식 이전에, 벌써 나에게 침투했다. 신체적 불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일깨움으로 생긴 윤리적 불면은 나를 주목하게 만들고 나를 책임적 존재로 만든다. 그러므로 나의 책임은 타인으로부터 곧 2인칭으로부터 온 책임은 ‘타인에 의해’ 일깨움을 받은 책임이다.대속이란 타자에 의해 책임적 존재로 지정받은 내가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지는 모습이다. 대속은 문자 그대로 ‘자리 바꿔 세움받음’이다. 여기서 나의 위치가 수동적이라는 점이 주요하다. 내가 먼저 그렇게 세움받고 그 뒤, 그것을 나의 책임으로 개인적으로 수용하는 행위가 뒤따른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먼 과거에, 나의 의식과 나의 선택의 자유가 발동하기 이전에 벌써 타자에 의해서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움받았다.이렇게 세움받았다는 것은 내가 타인의 요구와 부름에 응답할 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 심지어 타인의 책임을 대신해 고통이나 처벌 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여기서 책임은 절대적 타율성이요 절대적 타율성으로서의 책임은 나의 자유의 한계를 초월한다. 나는 타인을 위한 인질로, 타인에 대한 대리자로 선택받았다. 이 선택은 나의 선택과 무관하며 나는 이 선택을 단지 망각할 수 있을 뿐 마치 요나가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없듯이 피할 수 없다.내가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나의 대속이 다른 어떤 타인이 대행할 수 없는 일임을 말해준다. 나는 타인을 대신할 수 있어도 아무도 내가 책임질 일을 대신 짊어질 수 없다. 나는 타인의 자리에, 타인에 대해서 타인을 대신해 책임지도록 세움받았다. 그러므로 타인의 부름에 바로 나 자신이 답해야 한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고 말이다.바로 이러한 책임에서 도피하는 것이 악이다. 타인에 대해 강한 주체성으로 인해 환대하지 못하는 것이 악이다. 자신을 주격으로 행세하는 것이 악이다. 참된 사랑에는 나의 계산이나 욕망이 개입될 수 없듯이 참된 줌에는 ‘존재 안에서의 결손’이고 시듦이며 어리석임이지만 존재를 넘어서는 탁월이며 높음이다.그렇다고 ‘자기 말살’이나 ‘자살’은 말이 되지 않는다. 자기 말살과 자기 부인은 구별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속적 책임을 지는 주체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지 말살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자아를 말살한다면 타인의 고통에 노출되고 타인을 환대해야 하는 나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야고보서 1:27의 말씀처럼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봄에 있다’는 것이다. 타인이란 존재 저편에, 저 너머에 오는 흔적이요 자취요 남은 자국이다. 하나님은 흔적으로서 고통 받은 자의 얼굴로 나타났다고 곧장 자신의 모습을 지워 버리신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계속해서 독립성을 가지면서도 하나님께 의존케 하기 위해서이다.(평가)복음적으로 봐서, 죄라는 것은 우리에게 책임을 물어서 우리가 지은 죄로 확정짓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 인물이신 나사렛 예수님의 규정으로 확정된다. 그 예로서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사울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의 답변은 오직 ‘나사렛 예수’라고 자신에게로 귀착시켜 버렸다.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인간으로서 예수님을 자신과 대비시킬 수 있는 상대자로 삼는 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구체적 인간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즉 공통적인 인간성으로 출발해서는 복음과 예수님의 말씀을 풀이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구체적인 인물인 예수님으로 출발하는 것 외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방식은 없다. 즉 예수님을 퍼담기 위한 범주를 인간들이 따로 만든다면 결국 그 범주 속으로 감히 인간들이 자신의 발을 들여놓으려고 시도하는 수법밖에 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배제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옛언약부터 언약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겨냥했음을 인정할 때뿐이다.네비나스는, 메시야와 인간, 양쪽을 함께 담을 수 있는 공통 영역을 구상하려 했는데 이러한 발상은, 인간의 윤리도 메시야가 원하는 윤리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대감은, 철저하게 예수님만 홀로 십자가가 올라가시도록 한 성령님의 언약적 조치를 거세게 모독하는 불신앙적 힘으로 작용하게 될 뿐이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50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2,417 강의 Re..광주 강의(05. 3. 24) 13-3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6-04-13
2,416 우리교회 Re..사 9: 13-17 (백성의 죄) 이사야 최고관리자 06-04-12
2,415 묻고답하기 세상 전체의 현실 - 최고관리자 06-04-12
2,414 강의 Re..20060404 부산강의-화이트헤드(2) 미가 최고관리자 06-04-12
2,413 강의 Re..20060404 부산강의-화이트헤드(1) 미가 최고관리자 06-04-12
2,412 묻고답하기 농촌의 현실 - 최고관리자 06-04-11
2,411 묻고답하기 Re..페미니즘(여성해방론)에 대한 글을...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6-04-11
2,410 강의 Re..광주 강의(05. 3. 24) 13-2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6-04-10
2,409 우리교회 Re..출 40: 34-38 ( 동 행 )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6-04-09
2,408 우리교회 Re..출 40: 34-38 ( 동 행 )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6-04-09
2,407 우리교회 [일반] Re..웅웅 거리는 이유 [일반] 최고관리자 06-04-09
2,406 설교 요한계시록 2:1-5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6-04-09
2,405 우리교회 Re..계 2: 1- 5 (에베소 교회)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6-04-09
열람 ➜ 강의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 최고관리자 06-04-08
2,403 우리교회 [일반] [타인의 얼굴 -네비나스의 철학] 신학과 철학의 허상 시리즈 [철학] 최고관리자 06-04-08
2,402 강의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다] - 최고관리자 06-04-05
2,401 우리교회 [일반]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다]-신학과 철학의 허상 사리즈 [철학] 최고관리자 06-04-05
2,400 우리교회 Re..사 9: 8-14 (징계의 원리) 이사야 최고관리자 06-04-05
2,399 묻고답하기 Re..빌1&58;18절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6-04-03
2,398 강의 [제국] - 최고관리자 06-04-03
2,397 우리교회 [일반] 철학과 신학의 허상 시리즈- [제국] [철학] 최고관리자 06-04-03
2,396 강의 Re..20040607 부산강의-중세철학 [철학] 최고관리자 06-04-03
2,395 강의 대구 4월 3일 지옥의 하나님 p026 법에 대해서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04-03
2,394 묻고답하기 빌1&58;18절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 최고관리자 06-04-02
2,393 우리교회 Re..출 40: 1- 4 (성막의 영광)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6-04-02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