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안산나라장로교회 요한복음 050711 강의
Re..안산나라장로교회 요한복음 050711 강의
이름 : 오용익(IP:)
요한복음 안산강의(2005년 7월 11일, 이근호목사, 안산나라장로교회)
요한복음 16:13절입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우리가 벌여 놓은 일도 아니고 우리가 계획한 것도 아닌데 예수님의 자기 사업의 일환으로서 벌이는 일이라는 겁니다. 이점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당황스러워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요청한적이 없는데 우리의 일상속에 그냥 침범해 버립니다. 여기에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곳 안산에서 나름대로 일을 벌인 송목사님께서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개입한다면 제입장에서는 매우 황당할것입니다. 우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시간에 우리는 쉬고 있어야 하는데 성경공부를 한다고 이러고 있습니다.
이 일이 돈되는 일도 아니기에 이런 상황이 바로 충돌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6:13에 따르면 성령은 우리속에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는일의 무가치와 무의미를 고발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영은 “진리의 영”입니다. 즉 진리의 영이 오지 않았는데도 진리를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성철스님이 진리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사기이고, 맹자가 안다고 해도 거짓말입니다.
“네가 하는 일이 진리가 아니고 진리는 이것이다” 는 식으로 우리를 밀어 부칠때 비로서 생겨나는 그런 체험과 경험이 있을때만 진리에 접촉을 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부적으로 갈등이 생기게 되면서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그문제가 어려우니 쉬운것부터 해봅시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방금 우리가 읽은 이 계획은 누가 짜서 누가 시행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4:36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으면서 37절에는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내민 카드는 완전히 거부당합니다.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 아주 기초적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와서 예배드리오니 구원해달라는 것은 안됩니다. 구원문제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계획해서 본인이 성취하실 사항이지 사람쪽에서 부족하지만 채워달라는 양으로 내밀어서 개시될 일이 아닙니다.
사람쪽에서 내민 카드는 베드로의 경우처럼 주님이 찢어 버립니다. 우리가 목숨바친다고 해서 천국가는 일이 성사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목숨바쳐서 천국간다면 목숨이라도 바칠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안됩니다. 천국을 만드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만의 문제이며 제삼자인 인간이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2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소를 마련하면 데려가겠다”는 제안도 요청하는 차원이 아니고, 예언대로 진행하겠다는 통보일뿐입니다. 제자들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우리쪽에서 천국에 가겠다고 애쓴 것은 다 부질없는 짓임과 아울러서 내가 원치 않는 그 길로 가게 되는 그길이 바로 천국가는 길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허락을 받지 않은채 주님께서 밀어붙이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직업이 있고 그 직업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밥벌이고 구원문제는 주님의 소관입니다. 밥벌이를 잘하는 것과 구원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우리쪽에서 내민 카드는 부도수표와 같은 것으로서 하늘나라에서 유통될수 없는 것이기에 오늘날 교회는 완벽한 사기집단입니다. 놀자고 모인 단체에 불과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 하는 것은 최근의 신학계에서조차 정리가 전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오시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요한복음 14부터 16장까지를 통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14:18에 보면 우리를 고아로 간주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올수 있는 바탕을 우리쪽에서 만들 수 없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의 한계이고 교회의 한계입니다. 그럴싸하게 품위를 갖추면 성령이 마구 쏟아질것이라고 여기는데 그것은 기분상 그러하며 자기를 스스로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종교분위기나 연출하는 것은 되지만 성령을 유인할만한 장치를 인간쪽에서는 만들 수 없습니다. 20절을 보시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성부계시고 성부안에 성자계시고 그 안 곧 성자안에 성도가 있고 그 성도 안에 또 성자가 계신다고 합니다. 매우 복잡합니다. 그 날이 성령이 오시는 날입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성부안에 예수님 계신것과 그 성자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그 성도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믿어지는 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올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나게 불가능한 일입니까? 제가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하냐고 도리에 제가 질문을 당할까봐서 겁이 납니다. 이런 것이 신학적으로 제대로 규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이 믿으려고 애쓰고, 결의하고, 애쓴다고 순순히 믿어질 일입니까? 이런 상태가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되면 원래 안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인간이 못하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다는 식으로 교육받았기에, 교회에서도 가만히 있으면 지옥간다고 알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아무것도 안했는데도 뭔가 되는 일이 일상생활 속에서 없습니까?
“전부 다 죠 뭐”(송목사님왈). 정답입니다. 목사님다운 놀라운 답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생각지도 않은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시편 136편 7,8절에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합니다. 하늘의 별은 우리가 만들었습니까? 하늘을 나는 공중의 새와 들풀을 우리가 디자인해서 만든것입니까? 마태복음 들풀이 입은 옷은 솔로몬의 것보다 더 아름답다고 했고, 하늘을 나는 새는 창고도 짓지 않고, 농산짓는 일도 하지 않지만, 지금도 잘 날고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마태복음 6장).
사람들이 자기일밖에 모르기에 진리에 대해서 너무나 모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라온 환경 예컨대 안산이야기, 살면서 사귄 몇몇 친구이야기, 신문에 나온 이야기등등 우리가 아는 80평생의 경험뿐입니다. 그것 가지고 전체 진리를 알고 세상의 끝을 다 아는 것은 있을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오시면 요한복음 14장 20절의 말씀과 같이 됩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성부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안에 성부가 계시고 성도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비로서 알게 되는 사항입니다. 이런 지식을 알게 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수 있겠습니까? 그 지식을 알고나서 우리는 단지 느끼는 것이 “우리힘으로는 아예 불가능합니다”라는 고백뿐입니다. “이것은 제노력과 제공로가 아닌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사람에게 성부안에 성자가 성자안에 성부가 성도안에 성자가 계시다는 사실은 성령님이 이미 왔기에 믿어지고 알아진 것 이라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세상은 둘로 나뉘게 됩니다. 한쪽은 성령이 와서 이렇게 된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성령이 와서야 비로서 알게 된 사실이라면,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것입니다. 그 사람은 무엇을 못받은 것입니까? 성령을 못받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라고 합니다. “너희”라고 해당되는 사람이 따로 있고, 성령을 안받은 사람은 너희라고 불리워진 사람들에 해당이 되지 않되는 겁니다.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구원받고 안받고는 세상의 인간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 손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교회와서 열심내서 전도, 기도, 봉사, 헌금---이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이 예수님의 맘대로 우리의 허락없이 오셔서 이렇게 알게 하신 사실이라면 성령이 안온사람은 아무리 백방으로 애쓰고 수고해도 결국 모를것이고 그렇게 진리의 영이 오지 않은 사람은 그냥 지옥 가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좀 섭섭하십니까? 신나고 박수치면서 춤출 이야기입니까? 왜 하필 저 사람에게는 안찾아 가시느냐고 따질 듯이 할 문제가 아니고 왜 하필 저를 찾아오셨느냐고 물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두 여자가 매를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마태 24:40,41). 이때 밭을 가는 두 사람중에 한 사람이 대충, 비뚤 비뚤 갈았기에 지옥가는 것입니까? 노동의 질과 아무런 관계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베드로가 구원받기 위해서 제시한 카드를 주님이 다 찢어 버렸습니다. 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노라는 그 비장한 베드로의 제안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요즘식으로 하면 제가 금식기도를 할것이고, 거듭난 제가 봉사를 할것이고, 구원받게 되면 온 재산을 다 바칠테니까 구원해 달라는 모든 제안에 대해서 주님은 일체를 거절하십니다.
요한복음 14:3절에 내가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했는데, 그 “너희”에 누가 해당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것은 주님만이 명단을 가지고 계시고 그 밖에는 아무도 모르는데 막상 와보니까 비로서 알게되는 사항입니다. 주님은 제대로 일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을 봅시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의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요청한일이 없는데도 우리의 허락없이 된일이리고 분명히 아까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되든 잘못되든 전혀 관계없이 된 일이라는 뜻입니다.
성부는 성자안에 성자는 성부안에 성도는 성자안에 거한다는 이 사실이, 우리의 처지와 관계없이 즉 백수든 아니든, 결혼을 했는지 안했는지와 상관없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와야 비로서 이미 성자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뿐입니다. 제일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은 자신을 성자안에 넣어달라는 요구입니다. 이것은 요청자체가 안되는 요청을 목사에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 빽을 써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정립이 잘 안되는 점이라고 하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만 정리합시다. 성령께서 오시는 것은 우리가 요청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는데 이런 말씀은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이런 생각을 버려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이런 현상이 벌이지고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지킬 생각을 하지 마시고 이 약속은 예수님이 지켜 나간다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일기장 들고 본인이 지키겠다고 나대지 마시고 예수님의 일기장을 예수님이 지킨다고 보시기 바랍니다. 비유가 적당했지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는데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할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쉬운 것을 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행함없이도 이미 우리는 예수안에 있고 예수님안에 우리가 거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고 했으니 우리 밖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또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했으니 우리는 예수님의 안팎으로 포위되어 있습니다. 포위당하게 되면 예수님이 우리를 가지고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고발하고 책망하는 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무엇을 고발하고 무엇을 책망하는 겁니까? 예수님만이 해야하는 일을 가지고 인간들의 종교적 노력을 합쳐서 구원된다는 식으로 거짓말하느냐고 꾸중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고발에 따르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죄, 의, 심판이 따로 있고, 예수님이 생각하는 죄, 의, 심판이 따로 있습니다. 이미 성령이 온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죄를 가지고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예수님의 의를 가지고 인간의 의를 고발하고, 예수님의 심판을 가지고 인간의 심판을 책망하는 이런 일을 벌이시는 겁니다. 그것부터 질문해보겠습니다. 과연 이 일을 우리가 우리쪽에서 거부할수 있겠습니까? 거부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안에 놓이게 된 것이 우리가 한일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도 우리쪽에서 저항할수 없는 입장에 놓이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사항을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의 죄를 가지고 세상의 죄를 고발한다. 두 죄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설명하겠습니다. 세상의 죄란 자기의 지난 과거의 지식을 이성으로 반성해서 과거보다 더 진보된 지식 혹은 지혜를 갖으려고 할때 반성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반에서 15등을 하다가 그 다음에 18등으로 떨어지게 되면 부모의 꾸지람에 의해서 반성을 하게 되는데 죄를 찾아 내게 됩니다. 게임을 했느냐, 만화책을 봤느냐, 잠만 잤느냐, 여자친구를 사귀었느냐를 추궁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잘못한 것을 찾아 내서 그 다음에 개선하기 위함입니다. 회사가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양적으로 발전하지 아니하면 죄에 해당되는 나쁜짓을 한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좋다(like)와 선하다(good)가 다릅니다. 그런데 세상의 선이란 좋은 것이 선한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돌아가실 때 좋은 상태로 간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좋은 나라,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good”인데 세상에서는 건강한 것이 “good"이고 돈이 많은 것이 “good"입니다. 세상에서 여기는 선(good)이란, 자신이 좋다는 것(like)과 옳다는 것(good)을 같이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지녔기에 그 육체의 욕망을 달성하면 그것이 선한것(good)이고 “탱규”입니다.
어려운 예를 들었지만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실상입니다. 교회오는 사람들은 내몸의 좋은 것을 선이라고 일치시키고 옵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돈이 없느 사람은 부하게 하시는 것을 진리라고 간주합니다. 반대로 몸이 아프다든지, 돈이 날아갔다는 것을 죄로 간주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하는 소리란 몸이 아플때나, 일이 안풀려서 돈이 사라질때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머리둘곳도 없으셨던 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평소에 늘 살아가면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너무나도 대비된다는 것을 눈치채야 합니다. 낮시간에 한 서울 의존교회의 강의에서 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이 기적이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기적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다시 질문했습니다. 눈이 밝은 사람이 소경이 되는 것도 기적이냐고 물었습니다. 멀쩡한 눈이 소경되는 것은 저주받는 것이라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몸에 좋은 상태를 가지고서 진리인양 우기면서 그동안 살아왔는데 그것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이 이 세상에서 배척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안에 성부가 계시고 성부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안에 우리가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안에 우리가 있다면 우리의 잘못된 선입관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눈뜨게 됩니다. 눈뜨는 것은 축복이고 눈이 잘못되면 저주라는 그 잘못된 죄관이 내몸에 맞는 죄관이기에 잘못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이 모든 세상을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눈을 뜨건 눈이 감기건, 기적으로 눈을 떴는데 그 눈이 다시 도로 감겨서 소경이 되든 말든, 그런것과 아무런 관계없이 성부는 성자안에 성자는 성부안에 그리고 내안에 성자 계시고 성자안에 나 있는 것을 오직 성령이 와야 알게 되고 그 외에는 알수 없습니다.
이 강의를 기존교회에서 하면 충격받아서 교회 안나오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나올겁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죄를 가지고 인간의 죄를 고발했다면 두 번째는 예수님의 의를 가지고 인간의 의를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란 양심에서 나옵니다. 양심에 대해서 제가 연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저서중에 양심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인애지심, 시비지심 등이 맹자에 나오고, 우리나라의 성리학자 중에서 이퇴계도 사단칠정론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수오지심이란 사람이 수치스런짓을 하게될때 부끄러워하고 회개할줄 아는 마음은 천심이라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이란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그냥 안지나치는 그런 마음입니다. 비록 깡패라도 의리가 있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잘 도와주는 그런 마음입니다. 도둑놈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돕는다는 겁니다. 인예지심이란 예의를 차리는 마음입니다. 시비지심이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인데 이 네가지는 하늘에서 내려진 마음이기에 사람이 손댈수 없는 자연스런 것이라고 봅니다. 즉 양심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것이 인간속에 남아 있다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더러워도 인간속에는 여전히 거룩한 요소가 남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신께서 왜 거룩한 속성을 인간속에 남겨 두셨습니까? 아무리 인간이 나쁜짓을 한다 해도 그 속에 있는 양심에 집중하고 양심을 잘 개발하면 인간은 얼마든지 선해질수 있다는 표시로서 양심을 집어 넣어 주었다고 봅니다. 이것이 맹자의 성선설, 즉 태어날때부터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다는 이론입니다. 같은류의 이야기가 서양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서에게서도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를 알지 못해도 그런 소리들을 했습니다. 데모크리투스라는 사람도 그런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짧은 인생 살면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 바르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사람속에 있는 양심을 속일수 없기에 양심대로 살아야 한다” 기독교를 모르면서도 이런 소리들을 하는 것은, 인간이 짧게 살다 죽는다 할지라도 죽어서 좋은데 갈수 있다는 낙관적인 소망을 갖고 싶다는 뜻입니다. 김영님이라는 국악하는 분이 히트한 노래인 회심곡이 총 5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은 부모한테 효도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4장과 5장에 가면 죽어서 지옥으로 끌려가면 방마다 열어 보면서 효도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떤 벌을 받고 있는지가 나오고 또 극락에 가면 효도를 한 사람들이 어떤 복을 받는지가 나옵니다. 그런 노래만 봐도 인간이란 종교를 떠나서 기본 양심만 지니고 있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기본인데 어떻게 짐승처럼 살수 있겠는가 하면서 반성해서 인간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자기양심에 호소해서 법을 지켜서 바르게 살겠다는 사람중에서 전세계 최고 실력자가 누구겠습니까? 넉자입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완벽하게 사는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예수님조차 바리새인의 예를 들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0)고 했습니다. 그 말은 아무도 자기노력으로는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의가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기준에는 도달할수 없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보고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나니 인간의 의를 가지고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동행할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글자 “피”뿐입니다. 피가 있은즉 거룩하고 피가 없으면 죽습니다. 특히 아론 제사장은 완전히 피를 온몸에 뒤집어 쓰는 식으로 바릅니다. 피의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히브리서에서는 “율법을 좆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고 했습니다. 피만이 거룩을 통과하고 피가 없으면 천국에 못갑니다. 죄는 하늘의 피만이 씻어주지 인간의 자기피를 짜낸다고 해서 사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할때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서 성령 곧 십자가의 피를 적용시켜 줄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 피가 와서 죄를 씻어줄때, 예수안에 자기가 있고 자기안에 예수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공로가 피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와 인간의 양심에서 만들어진 의와 둘중에서 어느것이 의로우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나서야 비로서 밝혀진 사항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하는 이야기는 매우 추상적이지만 구약에서는 향로에 다른 불을 담아서 하나님께 드리면 실제로 저주의 불이 와서 타죽습니다. 레위기 10장에 있는대로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담아서 드리다가 불타죽은 사건은 이스라엘에게는 실제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피상적으로 이야기하니까 별로 느낌도 없지만 옛날 구약백성들은 피가 없으면 실제로 저주받고 죽었습니다. 진짜 홍해가 갈라졌고 진짜 요단강이 열렸습니다. 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것입니다. 이말은 오늘날 예수 피로 말미암아 진짜로 우리 죄가 사라지고 강도와 같이 하늘나라 간다는 것입니다. 실제이야기지 한번 믿어보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나서 성령이 오셔서 하는 말이 인간의 의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발 “이제부터 착하게 살겠습니다” 하는 말은 하지도 마세요. 인간은 착하게 살수가 없습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지금 믿고 있는 예수 앞으로도 계속 잘 믿을께요” 라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더 착해지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죄로 우리죄를 고발한다. 예수 안믿는 것이 바로 죄였다. 인간의 죄는 비극적으로 가는데 비극이든 희극이든 예수 안믿는 것이 죄였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의는 자기 피뿐인데 우리의는 양심에서 나오는데 그 양심은 썩어 빠진것입니다.
세 번째는 심판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한다는 것이 심판의 내용입니다. 인간은 다 구원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줄자에게만 은혜주고 은혜 안줄자에게는 안줍니다. 야곱과 에서는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지만 같은 날 태어났다고 해서 운명이 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사람은 지옥가고 한사람은 천국갑니다. 원래 한 사람은 지옥가라고 그렇게 태어나고, 또 한사람은 천국가라고 그렇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오고 나서야 알아지는 사항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할 때 이미 명단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만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가지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여기서 “창세 이후에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다음에 20:15에도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반발하겠습니까 안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심판이란 기회를 골고로 줄때 공평이란 것이 성립됩니다. 시험칠때도 균등하게 기회를 줘야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과녁을 쏘는데 한쪽은 눈가리고 쏘게 하고 한쪽은 눈을 열어놓고 쏘게 한다면 그것은 불공평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공평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 한해서만 천국에 가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바르게 살든 착하게 살든 불못에 들어가는 겁니다. 생명책에 기록이 안되어 있기에 그냥 가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예수님의 심판은 공평치 못한 심판이라는 식으로 불만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유가 있고 책임이 있어서 각기 자유를 가지고 책임있게 살았으면 천국에 가고 책임있게 살지 못했으면 지옥에 가는 것이 공평하다고 주님에게 한수 가르치는 식으로 대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일방적인 구원하심에 대해서 도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독하게 미워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나에게 올수 없다. 단 아버지가 나에게 보낸자만이 나에게 올수 있고 그들만이 구원받는다. 그런데 나에게 오고 안오고도 너희들이 결정할수 없고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자에 한해서 내게 온다”(요한복음 6:37,65)고 했기에 사람들은 매우 예수님을 싫어하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주장에 대해서 싫은 분이 계십니까? 이것이 따져서 이해될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이것이 따진다고 이해될 문제입니까?
문제는 예수님의 이런 주장이 자기 혼자서 하는 미친소리인지,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은 소리인지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난뒤에 부활하심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이 맞고 그동안 우리가 생각했던 사고방식, 즉 기회를 골고루 줘야 공평하다는 것은 잘못된 구원관이었고 잘못된 심판관이었다는 것이 발각되었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뭡니까? 세상은 예수님의 자기 맘대로입니다. 왜 예수님이 자기 맘대로 합니까? 예수님만이 세상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맘대로 해도 괞찮다는 말입니다.
어제 박주영선수가 세골을 넣었는데 왜 혼자서 세골이나 집어 넣는 겁니까? 박주영이 하는 말이 “내맘대로다”고 할것이 아닙니까? 축구를 워낙 잘하니까요. 예수님은 세상을 워낙 잘 아시니까 예수님의 천국만들기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만 데려가는 그 방법이 주님 보시기에 가장 합당하기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방법에 동의해 줘야 합니다. 주님의 실력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박주영이는 실력이 그러하니 “세골 넣을만해!” 라고 하듯이 주님께서 결정한 구원관이 맞다고 인정해 줄수 있어야 그 사람이 성령받아서 그 안에 예수가 있다고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동안 우리가 품고 있던 생각이 다 날아가 버리고 예수님이 품고 있던 생각이 그대로 우리 안에 안착이 됩니다. 그 생각은 상상도 못한 엉뚱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예수 안믿는 것이 죄가 되어서 지옥가는 겁니다. 테레사 수녀든, 밥퍼주는 사랑이든, 창녀든 강도든 아무리 무슨 짓을 다 해도 상관없이 예수 안믿는 그것이 죄가 되고 그 죄로 인해 지옥가는 겁니다. 두 번째는 인간이 양심상 아무리 착해도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화로다” 하면서 자기 추함을 발견하고 놀라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의가 진짜 의라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은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데려가고 나머지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엉뚱한 발상을 성령받은 사람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내가 나쁜인간입니다. 내가 못된 인간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고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요한복음 7장 19,20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중에 율법을 지키는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이것이 아주 생뚱맞은 이야기여서 그들이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보고 돌았다고 하고 귀신이 들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훨씬 전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의 결과를 보세요.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에게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속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란 사람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선입관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정말 성령받았고 여러분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도저히 남들은 납득이 안되고 나만이 믿어지고 아는 이런 이야기를 그냥 남들앞에 뇌까리고, 툭툭 던지면서 고백하고 그런가운데 남들에게 미움받는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성령으로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이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사람들이 도무지 생각도 못하는 그러한 사실이 성령을 통해서 믿어지기에 사람들과는 정반대되는 생각이 우리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환란과 핍박과 유혹이 와도 예수님만이 나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셨다는 사실, 몸이 좀 아프고, 삶에 힘든 상황이 찾아 온다할지라도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에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와서 구원하셨고 그것이 주님의 자기 숙제요 자기 과제였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얼토당토 안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혼자 일 다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사실을 우리보고 믿으라고 강요하고 요구하시는 주님, 우리 육으로는 도저히 안믿어지지만 성령이 오시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믿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조건 옳다고 믿어지고, 또 믿어진 그 주님께 평생토록 감사할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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