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60321 부산강의-포이에르바하
Re..20060321 부산강의-포이에르바하
이름 : 한윤범(IP:)
20060321 부산강의-포이에르바하
(강사:이근호 목사)
오늘 강의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포이에르바하라는 사람입니다. 이 포이에르바하라는 사람은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냐 하면, 현재 기독교라는 것은 신이 있어서 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다. 라는 것을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을 기독교에 종사하는 사람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신이 만든 것이라고 왜 자꾸 거짓말하느냐, 우기느냐? 여기에 굉장히 반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기독교의 모든 것을 까발리겠다. 모든 치부와 모든 것을 까발리겠다는 겁니다.
얼른 들어보면 포이에르바하라는 사람은 기독교교회 성직자들의 비리라든지 교인들의 위선, 그런 것들을 끄집어 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정말 하나님께 헌신하고 아무런 어떤 개인적인 욕심도 없이 순수하게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그 사람들의 그 위선, 그 사람들의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그런 것을 전부다 공격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것은 저절로 날아가 버리죠. 그런 것은. 최고 정결하고 순결하다는 그것마저 인간이 만약에 조작한 것이라고 밝혀진다면 나머지 어중이떠중이 교회에 붙어 있는 사람은 완전히 논할 대상도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기독교를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가? 우선 신이 있어야 기독교가 성립되거든요. 신이 있어야 기독교가 성립되기 때문에 이 신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조사해 보면, 신을 부술 수가 있는 겁니다. 신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 사람의 첫 번째 아이디어는 뭐냐 하면, 신과 인간과 유사성이 있다는 겁니다. 신과 인간이 닮았다는 그 점에 착안해서 신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그러한 결과가 바로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같은 본질 같으면 서로 공통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원체 다르다면 아예 구상하지도 않을 거란 말입니다. 정말 다르다면. 사람이 베트남 말 압니까? 모르잖아요. 베트남 사람하고 가도 말 한 마디 못하는 거예요. 말이 안 통하니까.
그런데 신과 인간이 통한다는 말은 결국은 본질을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고 인간의 본질과 신의 본질이 유사성이 있다는 말은 인간의 본질에서 이걸 확장시키면 뭐에 도착할 수 있느냐? 신이라는 것이 이게 구성이 된다고. 같은 동네기 때문에. 같은 한 마당, 집안이기 때문에.
그러면 어떤 유사성이 있는가? 유사성을 찾아내면 되는 거예요. 신이 인간에서 나왔다는 것을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기독교는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다 깨지는 겁니다.
어떻게 인간이 신을 만드는가? 지성이라는 걸 수거해요. 지성, 이성적인 것, 저 사람 지성적이다 말을 할 때 뭔가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잘 따지는 것, 지성이다 이 말이죠. 박지성이와 상관없습니다. 신은 상당히 냉정하고 냉혹하게도 지성적이다. 어떻게 지성적이냐 하면, 이 지성 안에는 무슨 속성이 들어 있느냐 하면, 신은 무한하다, 신은 전능하다, 신은 무소부재하다, 없는 곳이 없다 이 말이에요. 신은 무소부재하다, 전능하다, 무한하다.
자, 이렇게 되니까 그러면 인간은 여기서 뭐가 되겠어요? 인간은 유한하다, 인간은 한계가 있다, 인간은 제한적이다. 생각하는 것,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내일 일을 몰라요. 오늘 일도 몰라요. 그저 지나간 과거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 대충 모아서 과거라는 현재라는 것을 구축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유한하고 뭐 하니까 인간은 지성이 있는데 이 지성이라 하는 것은 항상 따지거든요. 따지다 보면 계속 끝장을 보고자 합니다.
예를 들면 너 어디서 태어났어? 우리 아버지. 네 아버지는 어디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 네 할아버지는 어디서 태어났는데?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러면 최초의 인간은 어디서 만들었나? 신이 만들었다. 신은 누가 만들었는데? 신은 누가 만들었냐는 거예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냐? 끝장을 보는 거예요. 이게 지성의 특징입니다. 계속 끝장 가는 거예요.
저 나무는 아름답다. 그런데 저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뭡니까? 저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뭡니까? 계속해서 지성의 끝을 확장을 보는 거예요. 그 마지막의 확장된 것이 뭐냐 하면, 현재 지금 유한하다는 유한을 느낀다는 말은, 잘 들어보세요. 자기가 유한을 느낀다는 말 자체가 무엇을 뜻하나 하면, 이미 무한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만 사람은 무한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한계가 있다, 내가 부족하다 느끼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다 전제로 해서 내가 부족함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나는 무한하다는 동시에 자기는 뭘 발생시킵니까? 무한하지 않은 나는 유한하다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뭘 느끼느냐 하면, 무한하신 어떤 분을 딱 그걸 설정하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은 누가 만들어요? 인간이 만들어요. 인간이 자신의 유한과 자신의 한계와 자신의 부족함을 그걸 느끼는 그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 자체가 신이라는 것이 이미 성립이 되는 겁니다. 대립이죠.
그렇다면 신을 섬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신을 섬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야 되죠. 한없이 낮추면 낮출수록 신은 또렷해지는 겁니다. 뚜렷하게 등장해요. 자기가 부족한 것을 한없이 느끼면 느낄수록 전혀 부족하지 않은 신은 점점 더 크게 자기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지성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의 대립구조를 통해서 시작과 끝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약하다, 약하다는 말은 뭣을 뜻하나 하면, 강한 쪽이 저 맞은편에 있다는 말 아닙니까? 약하다는 말 자체가 이미 대립돼 있잖아요. 강한 것이 없으면 약한 게 없잖아요. 나는 약하다, 나는 전지전능하다는 그 순간부터 강함은 이미 나의 도달 목표로서 설정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을 신을 알기 위해서는 이 대립을 더욱더 굳혀 버리면 된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나약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이미 신을 믿고 있는 거예요. 신의 소재를 아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 하냐면, 내가 안다는 것, 내가 안다는 것을 인하여 반드시 뭔가 존재해야 된다는 겁니다. 신이 안다는 것에서 출발해서 결국 뭐라고 하냐면, 그러니까 신은 있는 거야. 라고 말도 안 되게 우기는 짓들을 하고 있다. 누가? 기독교가, 교회가 그렇다. 신을 알기 때문에 꼭 있어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나 귀신을 느껴. 느끼면 있어야 되느냐 말이죠. 있다는 것은 보여야 있는 건데 보이지도 않는 것을 내가 지금 안다는 것 때문에 마치 아니까 무조건 있어야 되는 것처럼 우기는 경우가 많이 있는 거예요. 실생활에 보면.
이미 죽어버린 아들이 있다면 죽어버린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을 내가 안다고 해서 사람들은 자꾸 자식이 살아 돌아다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는 뭐냐? 인간이 신을 믿는다는 것은 착각이라는 겁니다.
뭐냐 하면, 알기 때문에 있어야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걸 기실감이라고 하지요.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이미 죽었는데 죽은 자식이 어디선가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 유령이 되어서. 그것을 기실감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신의 결핍이죠. 자신의 욕망의 결핍이 생기니까 그 결핍을 메워 주기 위해서 신이라는 걸 통해서 그걸 메우지 아니하면 자기가 견딜 수가 없어. 자기 욕망을 신이 있어서 날마다 메워 준다는 그런 것이 있어야 자기 마음이 편해져요. 이것이 바로 지성적으로 다가온 신의 존재입니다.
특히 어떤 때 신이 가장 지성적이냐 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죽일 때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다는 이 말은 이건 아주 냉혹한 짓이거든요. 그럴 때 그러면서도 그걸 인정한다는 말은 이것은 감정이라든지 의지 차원은 버리고 오직 뭐만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지성적으로 법적으로 그래야 된다는 지성만 남을 때만 가능한 사태다, 가능한 일이다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포이에르바하의 주장을 다시 처음부터 보면, 신이 인간을 닮았다는 그 자체가 수상하기 이를 데 없다는 거예요. 아주 수상하다는 거예요. 신이 인간을 닮았다는 것은 필히 그 신은 누가 만들어냈냐 하면, 인간이 신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신은 인간을 닮을 수밖에 없는 거다 말이죠. 인간이 신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만들어냈기 대문에 유사성이기 때문에 서로 통하지요. 만약에 전혀 다른 차원이라면 아예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계시,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통해야 된다는 이 탐욕이 유발한 또 하나의 착각이라는 겁니다. 통해야 된다는 자기 욕구, 뭔가 신의 말씀이 소통된다는 자기 욕망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특별히 유발시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사람마다 통하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에 성경적으로는 동의해도 사람마다 통하는 게 다 다르잖아요.
나는 앞자리에 앉아야 은혜 받는 다라든지, 나는 어느 기도원에 가니까 기도가 잘 된다 라든지 사람마다 신과 통하는 방식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신이라는 것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사람마다 각자의 소통하는 계시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신을 제작해 냈다고 단언할 수 있다는 것이 포이에르바하의 주장입니다. 사람마다 신을 따로 만든다. 이것을 유사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지성적이고.
지성적으로 나가면 뭐가 부족하냐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신과 이랬을 때 굉장히 신을 높이기 위해서 한없이 자기를 낮추어요. 한없이 낮추면서도 자신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서 신의 자리에 자기 자리가 있기를 열망합니다.
인간은, 포이에르바하는 신이 없으니까 신은 인간이 투사한 거예요. 신은 없는데 인간이 가상적인 신을 자꾸 만들어내요. 인간이 신을 만들어내는 것은 신 안에서 자기가 있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자기가 결핍이 이니까. 신은 무한하고 자기는 유한하니까 그만큼 모자라잖아요. 보충돼야 될 것 아니에요. 보충되지 않으면 자기 욕망이 허락을 안 하니까. 그 무한한 신의 자리에 유한한 자기 자리를 따로 마련하려고 합니다.
마련하는데 신은 상당히 지성적이에요. 굉장히 냉철한 지성을 갖고 있습니다. 지성적이라서 이렇게 신의 안에다가 자기 자리를 마련해 주게 되면 이 인간은, 신은 보편성이기 때문에 자기에게만 사랑하지 않아요.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합니다. 이게 사람은 견디질 못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결핍이 생기면 그 결핍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이 결핍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유형의 신으로 만족하려 하는데 그런데 신 자체의 이성적인 지성적인 냉철에 의하면 신은 누구나 사랑하거든요. 누구나 사랑하는데 인간은 뭐냐 하면, 누구나 사랑하면 싫어요. 나만 사랑해야 돼.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누가 사랑해 보세요. 나는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교회에서 제일 큰 문제가 이것 아닙니까? 목사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좋은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까지 편드느냐 이 말이죠. 견딜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힘들여 신을 믿는 이유는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신을 믿는데 그 신이 오히려 내 욕망을 빼앗아 가는 나쁜 놈도 사랑해줘 버리면 나만의 신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거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죄를 느낍니다. 놀랍게도 죄를 느껴요. 내가 욕심이 많구나. 내가 욕심이 많구나. 나는 나밖에 모르는구나. 냉철하게 신을 설정해 놓고 그 신의 특징은 누구를 사랑한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김정일도 사랑하고 세상의 모든 자를 다 사랑하니까 거기서 누구 자리가 없다? 나만의 신, 나만의 자리가 생기지 않잖아요. 이 포이에르바하가 지금 이야기한 거예요. 나만의 자리가 생기지 않잖아요. 그러면 나에게 맞춤 신이 되지 못한다 말이에요. 나만을 집중적으로 하고 차별적으로 나의 적을 같이 미워하는 그런 차별적인 신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기는 뭐냐 하면, 자신의 죄를 발견해요. 신은 왜 모든 이를 사랑하는데 왜 나는 원수를 미워하고 나만 사랑하느냐? 나는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라고 자기를 치면서 거기서 죄를 느끼는 겁니다. 그 죄를 느끼면서 두 번째 나오는 게 의지의 하나님을 만들어요. 이게 바로 개신교 개혁주의에요.
중세철학은 지성적인 신이에요. 존재의 끝을 보는 거예요. 존재, 존재, 존재, 존재, 그 존재의 끝을 보면, 그 존재의 끝에 존재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신이 있기에 신은 존재한다. 안셀무스의 유명한 존재론 아닙니까? 신이 있다, 신은 왜 있느냐? 우리 인간도, 잘 들어보세요. 우리 인간도 존재한다는 속성이 있는데 이 존재한다는 속성은 반드시 뭐가 있었기에 나에게 내가 존재한다는 속성이 '나'가 있잖아 이 말입니다.
여기에 물이 있지요. 어렵지요. 물이 있다 할 때 무엇이 하여금 물이 있게 했습니까? 목사님께서 마트에서 사왔잖아요. 그죠? 마트의 물은 누가 있게 했습니까? 공장에서 배송하겠지요. 그럼 그 사람 물은 어디서 생깁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항상 있는 것은 없음에서 나올 리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저는 삼다수 공장 어딘지 몰라요. 없지만 없어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건 뭐냐? 지성적으로. 내가 모르지만 현재 있다는 것만 알아도 이걸 있게 한 것은 존재한다는 건 안다 이 말입니다. 이게 있다는 것만 눈치 채도 이걸 있게 한 것은 반드시 배후에 그전에 누가 있다 하는 것은 이미 안다. 아니까 있잖아. 하는 것이 바로 중세철학, 신의 존재 증명입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이 발생 됐다 이 말이죠. 신이 믿는다는 것이 있잖아요. 신을 믿게 한 누가 있으니까 신을 믿잖아요. 그래서 신이 있다는 것이 지성적인 신이다 이 말입니다. 이게 포이에르바하가 공격하는 겁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 때문에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존재케 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내가 괴로워. 내가 괴로우니까 신이라는 것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게 기독교의 신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그 기독교의 신이 너무나 냉정하기 때문에 나는 그 신의 사랑을 받고 싶지만 너무나 냉정하기 때문에 신에 근접할 수 없어서 신과 나 사이에 거리가 멀어진다는 게 아까는 유한하다, 나는 부족하다 이랬죠. 이제는 뭐냐 하면, 나밖에 모르는 것을 가지고 뭐라 하냐면, 죄라 합니다. 이제는 죄에 들어갑니다. 죄를 느끼게 되는 거예요.
개혁주의 신학은 죄를 지적하는 신학이고 중세신학은 뭐냐? 존재를 이야기하는 신이에요. 그럼 내가 죄를 이야기한다는 말은, 그러면 하나님은 신은 뭐가 돼요? 그냥 무한한 존재가 아니고 무한하게 의롭고, 무한하게 거룩하고, 무한하게 선한 분이 되지요. 자, 그러니까 사람에게 비록 자기가 죄인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믿는 신이 무한하게 선이고, 무한하게 의로움이라면 그 죄는 이제는 없어질 수 있는 소망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개혁주의 루터, 칼빈은 뭐냐 하면, 바로 죄용서의 구원론에 중점을 두고 개혁주의가 생겼습니다. 그전에 중세철학은 뭐냐 하면, 왜 신의 존재를 안 믿느냐?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이쪽에 개신교는 뭐냐 하면, 자기 죄를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면 구원 받습니다. 된 거예요. 어쨌든 둘 다 공통점이 뭐냐 하면, 둘 다 인간의 욕구의 부족에 의해서 발생된 결과물일 뿐이다 말입니다. 기독교가 그게 중세철학이 됐든. 개신교가 기독교가 됐든 간에 인간이 결핍된 것을 보충해주는 차원에서 신의 존재도 있고 그 다음에 신은 그 죄를 용서하는 거예요.
우리 죄를 그 선하심으로써 용서를 하는데 용서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철저하게 우리 죄를 죄인으로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 개신교의 정책입니다. 루터, 칼빈에서. 철저하게 우리 죄를 죄인으로 자인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자인할 때만 그때 뭐가 빛나느냐 하면, 오, 그렇구나. 네가 죄인이야? 선한 분이 누구지? 오, 하나님. 그렇지. 하나님밖에 없지.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공의를 높여줌으로써 그걸로 인하여 자기가 신의 선함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구원을 받는 식이 바로 개신교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한없이 낮추고.
아까 첫 번째 지성적인 것은 내가 부족하다는 것 때문에, 내가 유한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일 때 되지만 개신교에서는 뭐냐? 나는 한없이 죄인이고 주님은 한없이 의인이라는 그 대립구조로 인하여 그들은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세 번째. 그럼 이걸로 기독교는 끝이냐? 아닙니다. 개신교에서 이 죄론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죄인인 걸 알았는데 죄인으로 선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없는 죄인을 향한 뭔가 선한 분의 선한 행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세 번째 감정적인 요소에요. 지성적인 요소는 아주 냉혹하게 신은 무한하다. 그리고 이 뒤로부터는 우리는 선할 게 없다. 죄밖에 안 나온다. 뭘 해도 죄밖에 안 나온다. 세 번째는 그 사이를 메꿀 수 있는 선한 분의 선한 행위가 있는데 그게 뭐냐? 그걸 사랑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걸 사랑인데 어떻게 사랑하느냐 하면,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신의 사랑이 아니에요. 인간의 사랑이라고 보는 겁니다. 포이에르바하는. 왜냐하면 신은 사랑이라 했지요. 이걸 뭐뭐는 뭣이다, 할 때 뒤에 나오는 것을 술부라고 하고 앞에 나오는 것은 주부, 또는 주어라고 합니다. 신은 사랑이라고 할 때 이 모든 언어에서는 이 술부에 주부가 종속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신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신으로 사람들이 이미 정해놓고 거기에다 신에다 사랑을 갖다 붙인 거예요. 상표를 갖다 붙인 거란 말이죠. 신이 있어서 사랑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용서해주면 곧 그것이 신인 양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인간에게는 누구나 한 테 있다.
그런데 이점에 대해서는 포이에르바하가 동의를 합니다. 어떤 점에서 동의 하냐? 사랑이 곧 신이라는 점에서는 동의를 해요. 신은 사랑이라는 동의는 아니지만 사랑이 곧 신이라는 것은 동의를 합니다.
여기서부터 포이에르바하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합니다. 사랑이 곧 신이잖아요. 그러면 사랑은 차별이 없지요? 차별이 없는데 기독교에서 뭐라고 하냐면,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만 신의 사랑이 온다고 했으니까 이것은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차별이 있지요. 신앙하는 사람만 사랑해줘 버리면, 무슨 뜻이냐 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사랑이 없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랑 없는 정도가 아니고 그 사람을 미워해야 되죠. 신앙 없는 사람을 미워하죠.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이냐 하면, 사랑 없는 사랑이에요.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에 근거해서만 사랑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고 기독교에서 나오는 사랑은 사랑 그 자체가 사랑이 아니고 폭력이다. 폭력. 증오죠.
기독교인들은 말하기를 신앙하는 사람,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사랑해준다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걸 노리느냐 하면, 신앙 없는 사람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혹독한 징벌을 받는 것을 보고 마음에 얼마나 흐뭇해하고 속에 기쁨을 느끼는지. 이러면서도 그들은 말하기를 그걸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고.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신을 만들어놨기 때문에 독점적인 신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독점적 신. 내가 싫어하는 쪽에는 완벽하게 저주를 해버릴 때 나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는 신일 때 그보다 더 신나는 신이 또 있을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지독하게 밟아 줌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는 하나님이야 말로 그보다 더 기쁜 신나는 하나님이 또 있느냐 말이에요. 이게 포이에르바하가 기독교 신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신을 뭐라 하냐 하면, 변덕쟁이 신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인간이 지성적으로서의 신은 모든 자를 사랑하는 모든 자를 다 보살피니까. 왜냐하면 코스모스고 코끼리고 산이고 전부다 은혜롭잖아요. 보편적이면서도. 갑자기 의지적인 죄관이 들어오게 되면, 이게 변덕을 부려서 특정 인간에게만 따로 사랑을 하고 구원을 해줘버림으로 말미암아 신이 변덕을 부려서 신앙인에게만 맞춤 신으로 전환 돼버린 겁니다. 맞춤 신.
이것은 원래 신이 그런 게 아니고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신을 용납을 못하는 거예요. 도대체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성질나서. 교회 안 나오는 사람에게 천국 보낸다면 성질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미쳤다고 교회 나가나. 교회 안 나와도 예수 안 믿어도 천당 가는데 사랑해줘서 천당 보낸다는데 내가 미쳤다고 교회 나와서 헌금하고 십일조해요. 돈이 어디 남아돕니까?
그래서 포이에르바하는 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굴러 먹다가 이런 게 이걸 가지고 그 사람은 파행이라고 합니다. 이런 파행적인 신이 어디서 툭 튀어나왔느냐? 따져 보니까 인간은 뭐냐? 불사의 존재. 불사의 존재를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흐름이거든요. 이게 참 어려워요.
인간의 의식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식에서 시간관이 나오는데 시간이 끊어지던가요? 여러분 현재가 몇 초 사이를 현재하고 합니까? 0.1초가 현재에요, 1초가 현재에요? 현재라 하는 것은 몇 초를 현재라 하느냐? 과거의식과 미래의식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 현재에요. 심지어 어떤 현재가 2시간 될 수도 있어요. 어떤 현재가 1초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자기가 의식하기 나름이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의식은 끊어지지 않지요? 이것 이해되지요. 의식은 끊어지지 않으니까 인간은 뭐가 되고 싶은가 하면, 불사의 존재,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하나씩 따져 보자 말이죠. 인간과 신이 끊어집니까? 이게 포이에르바하가 여기에다가 추궁을 들어가는 거예요. 인간의 의식은 끊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 인간은 무한히 멀어져서 단절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이어지지 원래는 단절되어 있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연약하다 이러거든요. 그게 거짓말이라니까, 거짓말. 의식이 따로 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그게 단절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불사의 불멸의 존재가 되는데 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뭐로 나오느냐 하면, 자기 긍정으로 나와요. 자기 인정, 자기 긍정, 자긍심으로 나와요. 나는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다. 이것 말이죠. 자기 긍정이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이게 기도로 이어집니다. 기도로 이어지면서 포이에르바하는 기도에 대해서 아주 박살을 냅니다. 기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하는 일에 자기가 억지로 개입하겠다는 짓거리밖에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분명히 지성적인 것은 뭡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인간은 나약하지요. 인간은 내일을 모르지요. 하나님은 내일을 알지요. 그렇다면 누가 누구한테 맡기게 됩니까? 진짜 지성적이라면 누가 누구에게 맡겨야 돼요? 인간이 하나님에게, 포이에르바하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신에게 그냥 맡겨야 될 문제를 그걸 맡기지 못하고 성질 더럽게 급해서 기도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앞의 지성적인 것을 거부하겠다는 말이에요. 내가 다루고 싶은 대로 다루겠다는 거예요. 포이에르바하가 아주 절묘하게 공격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신을 세 종류의 신을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다 갖고 있는 겁니다. 이성적일 때는 부족합니다. 이렇게 하다가 갑자기 의지적, 나는 죄인입니다. 하다가 갑자기 주님은 사랑인데 왜 안 들어줍니까? 이것은 자기 입맛대로 편리한 대로 골라골라, 골라잡아. 자기가 골라잡아 자기가 만든 신을 자기가 한 10개 만들어 10개 중에 그때그때 써먹는 이게 기독교의 신입니다.
거기에다가 기적이라는 것은 한번 봅시다. 기적이라는 것이 자기한테만 기적이에요. 남들은 평범한데 혼자 기적 받았대. 이게 무슨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짓입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는 그냥 늘 생길 수밖에 없는 현상이에요.
예를 들면, 어떤 권사님이 간증을 해요. 우리 딸애가 피아노를 얼마 안 쳤는데도 불구하고 반주자가 결석해서 고것이 반주를 했는데 아이고, 그렇게 반주가 되더라고. 그거 절에 가 보세요. 절에 가도 많이 돼요. 그리고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됩니다. 방언이라는 것들, 병 고침. 심지어 절에서는 병 고쳐서 낫게 된 간증집이 시리즈로 나와요. 책 두껍게 나와서 시리즈로 나온다고. 어떤 사람, 심지어 의사가 못 고치는 것, 보살님한테 빌어서 나았다. 이런 간증집이 시리즈로 나와요. 그런데 그거 다 보면, 심리적이거나 안 그러면 다 그걸 전부다 이미 남들이 한번씩 거쳐서 이제는 시큰둥한 거예요. 이제는 시시해서 그런 이야기 듣지도 않는데 자기가 처음 그런 경험해서 듣는 거예요.
그러니까 포이에르바하의 결론은 뭐냐 하면, 한 마디로 말해서 신은 경험이다. 신은 인간의 경험에서 발생된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기 경험을 극한까지 몰아넣는데 그 몰아가는 힘이 뭐라고 했습니까? 배웠으니까 이야기해야지. 그 몰아가는 힘이 끊어지지 않는 의식의 흐름. 인간의 의식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끝장을 볼 때까지 가는 거예요. 중간에 끊어지는 게 없어요. 끊어짐이 없으면서도 계속해서 끝장을 남기기 위해서는 반대로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춥니다.
나는 부족한테 하나님은 대단하십니다. 나는 유한한테 저는 무한하시고, 나는 모르는 게 많은데 전지전능하십니다. 뭔가 전지전능이라는 것과 나는 모른다는 사이에 중요한 것은 의식의 흐름으로 끈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인간은 안심합니다. 신을 믿는 기쁨을 가져요. 나 비록 부족하지만 전지전능하신 분을 이렇게 선이 닿았다는 거죠. 선이 닿았다는 이 선을 조사해 보니까 이게 인간에서 나온 인간과 같은 본질이라고. 인간에서 나온 본질을 자기가 믿는 신에게 있어요.
이게 구약성경에 보면 신이 마치 뭐와 같이 일합니까? 신과 인이 동형하잖아요. 같은 형이 있잖아요. 신인동형설. 신이 슬퍼하시고, 예수님이 우시고, 하나님도 짜증내시고. 그러니까 짜증이라는 속성이 신에게 있다는 말은 인간에게 있는 속성이 의식의 흐름을 타고 끝장을 보니까 이쪽의 짜증이 저쪽의 짜증으로 쭉 이어진 거예요. 그게 신이에요.
그래서 신을 믿는다는 말은 옳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믿는 신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이 말이죠. 신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상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신을, 제가 신을 의식의 흐름이라고 설명했는데 인간은 신을 만들지요. 이걸 뭐라 하냐면, 투사한다고 하지요. 인간이 신을 투사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주체가 되면 반드시 주체에 대립된 주체와는 단절된 객체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자아를 생각하면, 나라는 생각하는 동시에 여기서 경계가 생겨요. 경계성이 발생해요. 나는 아닌 뭐지요? 아아, 이것 하나 설명해야 됩니다. 어렵게 설명했는데 처음으로 쉽게 해봅시다. 쉽게 할 테니까 잘 들어 보세요.
내 팔 있지요. 다리 있고. 이쪽에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싸웁니다. 여기서 여기까지 1미터, 여기서 팔 끝까지 1미터 30센티. 이거 이해되지요. 정판옥 목사님, 이해되지요. 자, 1미터 30 끝에 있는 팔, 이것 누구 것입니까? A 것이지요. 1미터 42센티에 있는 이 팔은 누구 겁니까? B 것이지요. 왜 그러냐 말이지요. 거리가 얼마 안 되는데. 12센티 차이 밖에 안 나는데. 왜 이 손은 이 사람 것이 되고, 왜 같은 짧은 거리에 있는 손은 이 사람 것이 되느냐 말이죠.
이것은 뭐냐 하면, 비록 아무리 팔이 길어도 이것을 자기의 본부, 센터로 모으는 무엇이 있다 말이지요. 그 모으는 몸을 가지고 뭐라 하냐면, 몸 또는 이걸 자아라 하거든요. 그럼 자아가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자아가 없어요. 사람이 몸은, 신체는 팔, 다리, 간장, 머리, 손가락, 발가락 절단해서 모아 놓으면 되는데 끊어지고, 따박따박 끊어 놓고 모으면 사람이 되는데 아무리 팔이 길어도 되는데 이걸 모아서 만든 자아라는 게 어디 있느냐 말이죠. 내가 쉽게 한다고 해 놓고 어렵게 해버렸네. 도대체 자아가 어디 있어요? 이거 내 어깨라니까. 이거 내 머리고. 자아가 어디 있어요? 내 엉덩이지, 뭐. 자아가 없잖아요.
자아가 없으니까 이 없는 것을 만들어 낸 게 중세철학자는 영혼, 마음, 그 다음에 나가면 자아, 더 나가면 주체라 하는 겁니다. 영혼과 마음은 없어요. 없는데 단지 하나로 모아 놓는 통합 시스템. 팔, 다리, 이빨 그걸 모아 놓는 통합 시스템으로 보는데 이상스럽게 통합 시스템을 볼라 하면 어디 인 줄 모른데요. 왜? 없으니까. 없는 게 마치 있는 것처럼 행동해요. 없는 게.
너, 왜 내 손가락 대? 너, 왜 건드려. 나는 너를 건드린 게 아니고 손가락 건드렸죠. 내 손가락 건드렸는데 마치 나를, 자아를 건드린 게 된다고. 이거 분명히 내 손가락이에요. 자아는 없어요. 자아가 왜 없습니까? 있으면 내 놔봐. 있다고 우기는 사람, 자아 내 놔봐. 내 놀 자아가 없네? 이건 당신 엉덩이고. 자아를 내 놓으라니까. 자아를. 주체를 내 놓으라니까.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이게 영혼, 신체 문제에서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통합 시스템은 있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드웨어는 있는데 소프트웨어도 있다고 이야기해야 되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가 빠져버리면 소프트웨어는 날아가 버려요. 통합 시스템이 하나의 체계기 때문에. 그 체계는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는 외부에서 심어 주면 돼요. 그래서 중세철학에서는 뭐냐 하면, 인간이 신체를 자랑하는 소프트웨어, 영혼은 그 원판이 하나님께 있다 해서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해버리면 드디어 문제가 발생되죠. 왜냐하면 데카르트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서 왔느냐의 문제에요. 왜냐하면 형상 자체가 없는데 없는 것을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형상이 창조되었다면, 통합 시스템은 뭐와 같은가 하면, 부모 성질하고 자식 성질이 달라야 돼요. 그런데 부모의 통합시스템하고 영혼하고, 자식의 성질하고 성격하고 성질도 마찬가지에요. 성질이 어디 있습니까? 성질 없잖아요. 성질이 있잖아요. 이게 닮았다는 말은 이것이 유전되었다는 말 아닙니까? 유전되었다면 난자와 정자 사이에 어느 쪽인가를 규명해 주어야 돼요. 영혼이 난자에 있습니까, 정자에 있습니까?
그래서 중세에서는 그걸 해결 못해서 마리아를 무형처녀로 만들었습니다. 뭘 하기 위해서? 억지로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까지 유전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동정녀 마리아를 무형처녀로 만들었어요. 동정녀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죄가 아담에서 내려오다가 아담의 죄가 어디서 끊기냐 하면, 마리아에게서 일단 끊기게 되어 있어요. 마리아는 아담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도 아니고. 붕 떴어요. 그래서 이건 투톱이에요. 예수님, 마리아 투톱이에요. 이게 천주교입니다. 하나님 대변자 누구냐면, 예수님이고, 인간 대변자 누구냐면 마리아. 마리아 인간 다 섬겨야 돼요. 예수님의 인성 가지고는 부족해서 안돼. 예수님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서 실제 나타나는 구체적인 살과 피는 마리아의 살과 피가 더 신앙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반발하느냐 하면, 루터나 칼빈은 뭐로 보느냐 하면, 성령님께서 자의적인 창조역사에 따라서 그렇게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그렇게 했지요. 언제까지 그렇게 했냐 하면, 멘델의 유전법칙을 만들기 전까지는 이게 얼추 먹혀 들어갔습니다. 멘델의 유전법칙이 만들어지고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구조가 밝혀지면서부터 구아신, 시토신 이러한 4가지 염기에 의해서 DNA 구조가 되면서 그 다음에 DNA를 잘라내는 가위가 발명되었어요. DNA를 잘라서 그걸 조립하는 그러한 기술까지 생명공학이 발전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뇨병 환자들이 먹고 있는 인슐린, 그게 유전자 조작에 의해서 인간들이 실험실에서 만든 거예요. 자연에서 창조된 게 아니고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을 가지고 당뇨병 환자들이 인슐린 먹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서 만들어 내는가? DNA의 자체적인 DNA 가위가 있어서 그걸 끊어서 조립해서 아빠 DNA, 엄마 DNA 합쳐서 애 같은 DNA 생긴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자아는 어디 있습니까? DNA의 염기서열 안에 있지요. 정보 안에 있지요.
자, 여기서 한번 봅시다. 신이 인간의 자아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면, 인간 속에 신의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런데 신의 요소는 없고 신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다 인간에서 나온 요소들이 있다는 말은 그 신은 필연적으로 인간에서 자아가 의식이 흐르면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말이죠. 주체가 있음으로서 주체는 반드시 뭔가 객체가 있게 마련이에요.
포이에르바하가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있을 때만 성립한다. 그러면 삼위일체, 왜 하나님의 한 분이 아니고 세 분이냐 하면, 자기가 사랑의 대상을 찾다 보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신은 또 자존적이라서 스스로 완전해야 되기 때문에 스스로 찾는데 사랑의 대상을 인간에게 찾다 보면, 이것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신이 아닌 인간의 요소가 신속에 들어와 버리면 신의 그 완전한 틀이 깨져 버립니다. 완전함 속에 불완전이 들어와 버리면 신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그래서 신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사랑을 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뭔가 대상이 있어서 한다는 것 아닙니까? 저 혼자 밖에 없으면 무슨 사랑이 됩니까? 누구누구를 사랑한다는 대상도 있어야 되겠고, 그 대상을 신 자체적으로 충당하다 보니까 삼위일체가 생겼다 이렇게 봅니다. 이게 포이에르바하의 삼위일체에요.
그래서 삼위일체도 인간이 만든 거예요. 하여튼 죄라는 것도, 기지개라는 것도, 십자가로 용서받는 것도 전부다 이것은 인간이 자아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만약에 포이에르바하의 주장 같으면, 자아에서 안 만든 것이 신이라면 신의 이질적인 것이 인간 속에 있어야 돼요. 만약에 신의 이질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전될까요, 유전 안 될까요? 유전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인간이 새끼 쳐보면 전부다 아버지, 엄마의 있는 것 속에서 나온다고. 이질적인 것이 없이. 아버지, 엄마의 윗대의 있는 것이 그대로 자식에게 전달된다고. 그러면 신이 여기서 개입됩니까, 안 됩니까? 개입이 안 되잖아요. 안 되니까 인간이 신을 만들어낸 거지요.
신이 없다고 이야기해도 포이에르바하의 주장에 의하면, 신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는 이유가, 원래 인간의 자아라는 것도 만들어내기 나름이지 이게 자아가 없다고 해서 자아가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통합 시스템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나, 자아 없다. 숨바꼭질 하면서 숨지도 않으면서 나, 숨었다하면 이것은 눈 감았다고 하품하는 게 하품 아닙니까? 안 본다고 해도 하품했잖아요. 마찬가지로 나 자아 없다고 해도 자아 생겼잖아요. 신이 없다 해도 인간은 자기가 자아인 이상, 유한인 이상 무한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포이에르바하의 결론은 이겁니다. 기독교라든지 종교라든지 이 모든 것은 인본주의적인 인간이 자기 사랑의 하나의 양태, 하나의 표현이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자아가 있고 자아가 자아를 사랑하기 마련이에요. 왜냐하면 몸이 있고, 코가 있으면 누구나 이 자아도 만들지 말라고 나오고 그 자아가 자기 몸, 자기 손가락, 자기 사랑함, 이 사랑인데 자랑, 사랑, 성격, 성질 이것은 만들지 말라고 해도 만들어지는 것처럼 신이라는 것도 내가 내 사랑인데 다만 표현상 자기가 자기 사랑에 미흡하고, 또 뭐가 있습니까? 양심이 있잖아요. 양심의 가책이 되니까 양심의 가책은 뭔가 메워 줘야 풀려요.
이걸 포이에르바하는 그걸 가지고 만족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 만족하는 맛에 인생 살아가요. 자기 스스로 뭔가 만족해야 돼요. 욕망을 만족하는데. 그 만족하기 위해서 신이 주신 용서라는 것, 사랑으로서 만족하는 것을 지금 탓하는 게 아닙니다. 포이에르바하가 신을 믿는 걸 탓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 사랑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마치 자기 밖에 신이 있어서 그 신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여기면 그것은 차별적인 신이 된다는 거예요.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고. 그리고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사람마다 신이 천 개나 만 개 다 생긴다 이 말이죠. 지나 개나 신이 다 생긴다.
포이에르바하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랑이지 그냥 사랑하면 되는 것이지 나를 위한 하나님, 나만을 천당 보내는 하나님, 나만을 구원하는 하나님, 신앙 없는 사람은 죽어도 좋다, 이따위 식으로 차별적인 그런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의 화신에 불과하다. 너무나 자기 이기적인 욕망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포이에르바하의 주장을 듣고 여러분, 반박이 가능합니까? 한번 반박해 보세요. 뭘 가지고 반박하겠어요? 이 사람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나왔습니다. 니체가 포이에르바하에 적극 동의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동의했습니다.
포이에르바하의 결국 자기 철학의 주장은 뭐냐? 인간은 오직 인간을 위해서 사랑해야 된다. 그것만이 인간답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서 극도로 사랑해야 된다. 사랑해야 되는데 인간이 인간 사랑을 누가 막느냐? 소위 기독교가 막고 있다는 거예요. 왜? 차별적인 천당과 지옥을 이야기하면서 신앙이 있다는 사람에게만 천당 보내는 이러한 사랑 없는 사랑. 멋지지 않습니까? 진짜 사랑이 전혀 없으면서도 껍데기만 사랑한다는 그 사랑이 인류를 종교적인 차별과 종족적인 차별, 이런 차별로 몰아넣더라.
그렇다면 예수라든지, 선지자, 사도 바울의 주장은 뭐가 됩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철딱서니 없는. 정말 예수는 철딱서니 없는. 아마 포이에르바하는 이렇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자기 편가름, 자기 패거리 만들기. 자기 동조하는 사람에게 집단 최면, 교주. 이런 표현을 아마 예수님한테 할 것입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걸 어렵게 실존과 본질 사이, 그리고 가상과 현실 사이, 인간은 괴로워하는 거예요. 인간은 상상하는 것과 현실과 다르니까 그 괴리 사이를 메우기 위해서 신의 사랑을 논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현실감을 맞춤신이지요. 그러니까 자기 현실에 맞춤신인데 다른 사람한테는 적용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맞는 거예요. 옷이 다른 사람한테는 안 맞듯이 나를 위한 신이기 때문에 나한테 딱 맞춘 신이에요. 주여, 믿습니다. 할 때 나를 위한 신이에요. 나한테 맞춘 신이에요.
진정한, 그 사람은 신은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이 신이기 때문에 이 사랑 안에서 모든 개인적인 이러한 현실과 실존은 하나의 사랑으로서 서로 교제하고 유무상통함으로써 사도행전 2장에 나오죠. 서로 뭉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본래의 자기 모습,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른다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주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고 이게 자기가 그 시대 사람들에게 기독교인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이다.
너 꼬라지를 알라. 네 자신을 바로 알라. 네가 믿는 신은 너를 위한 편리한 신일뿐이다. 오직 나처럼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이 진정한 신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 위주의 진정한 신의 최종적이다. 그것이 포이에르바하의 외침입니다. 자기가 만든 신에게 자기를 가둬 놓는 그게 바로 너희들이 말하는 우상이 아니고 뭐냐?
이제 남은 시간에 포이에르바하를 반박해야 돼요. 그런데 반박을 이걸 알고 반박해야 되지, 사도 바울처럼 이미 율법에 대해서 알고 복음을 이야기해야지 율법도 모르면서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것은 정말 포이에르바하에게 걸리면 혼쭐나게 되어 있습니다.
포이에르바하는 무서운 하나님의 선하심이 옴으로써 의지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꾸 죄를 지적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항상 죄인인 것을 알라. 오직 자기만 의존하도록 강하게 밀어붙인다는 거지요.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렇게 거룩하면서도 변덕을 부려서 사람으로 오히려 그 죄인을 용서한다는 것이 이것은 이성적으로 지성적으로 용납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이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죄인으로 몰아칠 때는 언제고, 그걸 용서할 때는 언제고 앞뒤가 자가당착, 자가 모순이 있다는 겁니다. 자가 모순이 있다는 것은 원래 신이 있어서 자가 모순이 아니고 인간이 하도 답답하니까 스스로 자가 모순된 그런 억지를 부리면서 자기가 자기를 사랑해 줄 만한 것을 원하니까 그런 것을 하다보니까 자기 복수심, 타에 대한 미움 그것도 다 용납해주는 그런 신을 만들다보니까 그 기독교 신이 자가 모순되는 그런 신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러한 포이에르바하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하느냐 하면, 있음에서 있음이 나온다는 이 자체가 문제가 돼요. 지금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에 뭐가 나왔다? 신이 나왔다 하거든요. 그런데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은 어디서 나왔느냐를 말을 안 해요. 다만 여기 인간의 있음에 있는 그 자체만 인정하자. 있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자.
그런데 포이에르바하가 이렇게 주장해 버리면 그건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말에 의하면 인간은 원천을 캐내는데 멈추지 않는 존재에요. 지금 돈 번다고 바빠서 그 생각 안하지 사람이 돈 좀 벌고 여유 있으면 인간은 어디서 왔느냐 그것 다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자신의 원천을 밑바닥이든 위든 간에 원천을 캐고야 마는 것이 인간 자체인데.
그리고 포이에르바하가 제일 먼저 모르는 건 언약을 모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다메섹에서 사도 바울이 무슨 기적을 받았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 할 때에 그때에 같이 갔던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했지요. 같이 갔던 사람은 우뢰를 쳤다고 했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같은 사건을 해도 어떤 사람은 삐딱하게 사선으로 보이게 해서 엉뚱한 인식이 되게 하고 자기의 택한 자에게는 정면으로 보게 해서 그 소리를 그대로 듣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고 긍휼 입을 자에게만 긍휼을 주는 특수한 하나님이에요. 이게 감추어진 하나님이에요. 사람들이 호통치고 불러낸다고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로마서 9장 한번 봅시다. 오늘 성경 처음 본다. 로마서 9장 15절에 보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것과 그 16절에 무엇과 연결시키는지 보세요.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라고 했지요.
이 말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하나님의 속성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구원론까지 연결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론과 연결될 때는 하나님의 속성이 언약의 하나님의 속성이라 할 때는 이게 구원론과 연결되는데 이 속성에서 이탈되지 않은 채 구원해요. 그렇다면 구원되고 안 되고는 누구 마음대로냐 하면, 긍휼히 여길 자들을 오직 언약의 하나님의 자기 맹세 여하에 따라서 구원되는 것이지 맹세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 같으면 절대로 구원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에 어긋나느냐 하면, 포이에르바하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속성에서 나왔다 하잖아요. 인간은 이런 속성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언약이라는 속성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체가 그 자체를 진리로 간주하기 때문에 따로 언약이라는 것을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아, 이게 좀 어렵나. 다시 설명할게요.
이 안경이 제 것이잖아요. 이 안경은 내꺼다 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언약 안에서만 내 것이라고 할 필요 없어요. 있는 자체가 내 것이에요. 만약에 일방적인 신 같으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내꺼다. 내가 다 구원할거다. 이게 인간이 원하는 속성에 맞는 신이에요. 그러니까 언약에서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긍휼할 입을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은 이건 언약하신 언약의 하나님께만 해당되지 인간의 속성이 확산돼서 나오는 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란 말이죠.
이런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착각했어요. 아브라함은 자기가 사랑한다 하니까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하나님이 자기가 아브라함이니까 만민의 조상이 되니까 자기 자식을 구원할 줄 알았어요. 하나님은 혈통으로 난 자식을 구원 안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만 사랑해요. 그게 이삭이고, 이스마엘의 DNA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아브라함의 DNA, 유전인자 들어 있잖아요. 이스마엘은 저주받아요. 이 말은 아브라함은 저주받아야 돼요.
다만 아브라함이 구원받는 것은 누구 때문에? 이삭 때문에 아브라함이 구원받습니다. 이삭이 제물로 들어가서 그 제물 받고 아브라함이 구원받아요. 이삭은 누굴 받고?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이삭이 구원받아요. 야곱은 누구 때문에? 요셉 때문에 살아요. 이렇게 연줄로 연줄로 가다보면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누가 등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의 제사 때문에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언약대로 구원받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도 나, 구원해 달라고 요청할 권리가 아무도 없어요. 왜? 육에 속했기 때문에 저주받아야 마땅한 거예요.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의 속성이 퍼져서 하나님의 속성이 된다고 하는데 원래 이스라엘에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의 속성과 전혀 연결점이 없습니다. 아주 독특해요. 심지어 아브라함도 이해 못했다니까요. 심지어 모세도 이해 못했어요.
하나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정도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냐 하면, 여러분들이 연세 지극하니까 이야기할게요. 옛날 졸업장 받고 졸업장 통 사죠. 권사님, 졸업장 통 알지요? 요새는 그런 것 없어요. 졸업식장에 상인들이 안 팝니까? 통 있습니다. 통 안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졸업장이 돌돌 말려 있겠지요.
이스라엘 나라가 같이 가요. 바깥에서는 역사고, 안에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하는 역사가 따로 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사건이 될 것이냐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졸업장 통이 아니고, 졸업장이라고 하는 그 사람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 곡해 받는 사람을 등장시켜서 이 전체가 뭐냐? 졸업장 통으로 만들어 버리고 여기서부터 새로 시작해요. 이 사건의, 사건의 연속성이 뭐냐? 이스라엘 역사에요.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언약을 이루는데 인간의 힘을 빌리질 않습니다. 나는 이제 언약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저한테 맡겨 놓으시면 일 잘 합니다. 라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신 적이 없어요. 항상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 줄 자에게 긍휼 주시기 때문에 한 번 긍휼 받은 사람은, 긍휼 받았으니까 우리 힘대로 살아야겠다, 이게 없고 매일 같이 긍휼 받아야 돼요.
매일 같이 긍휼 받아야 되지 이만큼 용서 받았으면 내가 착하니까 착한 내 식대로 한번 해보겠다. 이렇게 돼버리면 자기가 착해버리면 긍휼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긍휼을 배척하는 사람이 돼요. 그런데 그 사람은 긍휼 없는 사람이 되서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건을 일으키는데 어떤 사건을? 매일 같이 긍휼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죄인으로 만들어서 긍휼을 늘 쳐다보게 만듭니다. 그럴 때 아하,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구나. 왜냐? 하나님의 속성이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성이 그래요. 은혜 줄 자에게 은혜주고 은혜 안 줄 자에게 은혜 안주는 속성이에요.
그걸 인간의 손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 누구냐? 가짜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제는 우리가 왕이 있기 때문에, 다윗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모세가 있기 때문에 붙잡으려고 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고난 받는 또 새로 어떤 사람을 더 보내서 그 사람이 붙잡는 사람한테 배척받는 형식으로 해서 또 그 사람을 통해서 또 새로운 노선으로 역사가 이어지게 하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발적이지요.
그런데 포이에르바하는 뭡니까? 인간의 존재자는 인간의 존재에서부터 시작했지요. 인간의 존재서부터 해서 존재의 하나님과 연결시켰잖아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묵시적 하나님이고 우발적인 사건으로서 등장하는 하나님인 것을 사람들은 포이에르바하는 모르고 있어요.
원래 천국이라는 것은 사건덩어리입니다. 사건이에요. 천국은 사건으로 오기 때문에 이 몸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사건 속으로 갈 수가 없어요.
제가 그런 예를 들었는데 산불 나 보세요. 우리교회 근처에 산불 났거든요. 팔공산 지묘동에. 뉴스 안 나왔습니까? 거기 가 보세요. 탄 새카만 재만 남아 있지 산불 없어요. 산불은 이미 지나가 버렸어요.
사건이 마주칠 때만 거기에 포착되어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몸 가지고 어디 영역이 있으면 이 몸 가지고 들어가면 되는데 천국 자체가 사건 덩어리기 때문에 그것도 사건을 만들어 줄 때만 포착이 되지, 내가 이 몸 가지고 어디에다 교회 앞자리 앉는다고 천당 가는 것 아니거든요.
우린 공간이 있고 육체가 있기 때문에 이것 가지고 우리가 만든 사건이 있어요. 그건 가짜입니다. 우리가 사건 만들고 우리가 기도하고 성경 읽고 이것은 전부다 내가 만든 사건이기 때문에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든 사건은 내 행위로 내 가능성으로 나가기 때문에 나의 속성이 들어가요. 이게 바로 포이에르바하가 공격하는 그겁니다. 내가 있기에, 내가 여기 존재하기에 존재는 뭐가 나옵니까? 행위가 나오죠. 행위는 뭐가 나옵니까? 사건 되잖아요. 이 사건 속에 나의 속성이 들어있어요. 나의 속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포이에르바하의 말이 맞아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 주기 때문에 은혜 줄 때마다 사건으로만 등장해요. 이게 오늘 강의에서 중요해요. 은혜 줄 자에게만 사건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자기가 긍휼하심을 받은 사람만이 알아요. 주여, 제가 또 주님의 용서를 시시하게 받습니다. 또 주님의 용서를 내가 알지 못하고 나의 완벽함을 추구하다가 이 꼴 되었습니다. 왜 나는 나의 완벽함을 추구할까? 주님의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이 어리석은 자들아, 주님의 십자가가 코앞에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게 십자가 사건, 천국은 항상 사건으로만 다가오게 되는데 우리는 몸 전체를 다 가져가려 하니까 내가 사건을 만들려고 해. 기도는 며칠 하면 됩니까? 금식을 며칠 하면 됩니까? 헌금을 얼마 하면 은혜 주겠습니까? 이것은 나의 속성이 들어있지요. 나의 탐욕과 욕구와 어떤 기적을 바라는 어떤 차별적인 대우를 바라는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이러한 이기주의, 이런 것들이 나의 사건을 만드는데 그게 기독교라면 그 기독교는 가짜지요.
그러니까 포이에르바하는 한번도 지금까지 천국이란 십자가 사건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를 공부를 해야 돼요. 공부를 해서 정말 십자가 앞에서 이유 없이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알게 된 그 사건을 이뤘다면 그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긍휼의 대상이 되었다는 선포입니다. 너는 이제부터 나의 긍휼의 자비의 대상이 돼라.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디에 살든지 간에 나의 긍휼이 끝까지 따라가요.
따라가서 완전케 하는 게 아니라 긍휼케 하지요. 늘 우리는 실수투성이고 부족하고 맨 날 포이에르바하 같은 이런 신앙심을 갖고 주여! 부르짖지만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만 포이에르바하 같은 이런 기독교를 믿는 우리한테도 사건만 터져 버리면 그것 자체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돌아감으로써 마음껏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속성을 마음껏 집어넣고 발휘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뭐, 주께서 구원해 주시데요. 끝난 거예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그냥 구원해 주시데요. 자기 십자가 피로. 저는 십자가 피만 믿습니다. 내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천당 가려고 환장한 것도 아닌데 십자가 피가 내 죄를 다 대신 했대요. 그러니까 나는 죄가 없대요. 이렇게 신날 수가, 하고 감사와 기쁨의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어요.
유도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존재가 원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나의 존재가 원하는 것은 십자가 피보다도 돈이 더 좋아요. 하지만 그런 마음도 있지만 주님 앞에 대할 때는 십자가의 피가 이런 죄까지 용서했다는 것이 더 근원적인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자, 이제 말을 마치면, 아까 인간의 속성 가운데 뭐가 들어와야 된다? 이질적인 것이 들어와야 구원받죠. 이질적인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 줄 자만 십자가 사건으로만 이질적으로 들어옵니다. 이게 유전됩니까, 유전 안 됩니까? 유전 안 되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신학교 가서 공부하고 자식을 위해서 신학교 가라고 기도해도 그 자식 구원받는 보장은 없어요. 하나님의 인격이 들어올 때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그 부모가 목사고, 아내가 사모라고 해서 자기 자식이 예수 믿고 하는 이런 법칙은 없습니다. 이런 법칙도 없는데 중세에서는 그걸 종교적으로 만들어서 했고, 개신교에 와서는 그것의 분위기로 성만찬으로 인위적인 윤리 도덕으로 죄를 회개하면 구원받는다고 이런 식으로 조작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이 포이에르바하를 볼 때마다 예뻐 죽겠어. 정말 잘 본 거예요. 악수하고 싶어요. 그래서 칼 바르트도 이 포이에르바하를 칭송하잖아요. 잘 했다고. 발표 참 잘 했다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가 얼마나 대단하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버리신 것이 우리 눈앞에 있는데 우리가 무슨 꿍꿍이를 또 따로 음침한 흑심을 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했다면 그 사랑이 이미 확정됐는데 우리가 다른 세속적인 욕망과 탐욕으로 주님 것을 탐을 내겠습니까? 우리 속성 사이에 춤추고 움직이는 주님의 용서와 주님의 사랑을 세상의 천하보다 귀한 걸로 여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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