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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요한계시록 1:16-20 (계 1:16)『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설교요한계시록

Re..계 1:16-20(주님앞에서의 교회)

이름 : 이근호(IP:)

주님 앞에서의 교회

2006년 3월 26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1:16-20

(계 1:16)『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계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계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죽어있다고 간주해서는 아니됩니다. 더나아가서 예수님께서 그냥 살아계신 것이 아니라 뭔가 부지런히 활동을 벌리시면서 살아계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무슨 일을 하실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열쇠’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주님은 음부와 사망의 굴레 안에 마냥 갇혀있는 자기 백성을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음부와 사망의 굴레’라는 말이 우리 인간들이 듣기에 기분 나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부터를 죽음이라고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계신 그 영생의 세계가 아니라 모조리 죽음의 굴레로 보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계시는 그 세계로 자기 백성을 이끌고자 하시는 겁니다.

사람이란 이유도 모르는채 기분에 좌우된채 평생을 억지로 삽니다. 이 세상을 억지로 살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치고 힘든 육체가 결국 평생 짊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기분에 농락당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리 반듯하게 살고자해도 기분이 처져버리면 만사가 귀찮아지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무엇이 옳고, 무엇을 해야한다고 하지만 기분이 처지면 입가에 미소가 없어진채 일을 억지로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기분이라는 것이 자신의 육체가 약해지만 점점 더 신경질을 나는 양상이 됩니다. 결국 죽음이라는 것이 평생 인간을 떠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험난한 인생을 예수님도 실제로 지나왔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부활의 능력으로 그 죽음의 세계 안에 갇혀있는 자기 백성을 열쇠로 열어제쳐서 건져내시는 일을 벌리십니다. 그러다 보니 과연 죽음의 세력이 이 열쇠의 능력까지 잠식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성립될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신뢰한다면 아무리해도 자신의 죽음성향에서 자신을 구출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53-58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자신의 육신을 갖고 자기 기분에 따라 그 무슨 일을 했다할지라도 구원과 무관합니다. 구원이란 오로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사람은 평생을 두고서 실수와 오류와 죄를 되풀이합니다. 따라서 그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열쇠 역할을 해낼 수는 없습니다. 열쇠는 따로 존재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였습니다.

이로서 교회는 이미 있게 된 처지입니다. 새삼스럽게 교회를 우리 인간이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는 채로 말입니다. 언어의 문법에서 부정사(不定詞) 용법이라는게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으로 그대로 유지됨”입니다. ‘-가고 있다’면 부정사로 고치면 ‘감’이 됩니다. ‘-을 먹을 것이다’라는 것을 부정사 용법에서는 ‘먹음’입니다.

이 부정사 용법 안에서 시간이라는 없습니다. 이미 ‘완련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인간이 이 인생 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예수님의 손 안에서는 이미 완료된 것만 나옵니다. 어떤 식으로 나옵니까? 어떤 모습을 띠고 나옵니까? 오로지 ‘사건’으로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것은 두 종류가 있는 하나는, ‘형식 구조’로서의 교회요 다른 하나는 ‘사건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사람이란 늘 자신의 정체와 주체를 찾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합니다. 타인이 불러줄 때만 비로서 자아가 성립됩니다. 집에서 자식이 ‘아빠’라고 불러줄 때면 그 사람은 아버지로서 살아야 할 주체성이 조성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어이 학생”이라고 불러줄 때면, 비로소 그 사람은 학교에서 학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요구받는 주체성을 갖추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누가 불러주느냐에 따라 비로소 의미가 생기고 그 불러주는 그 사람에게 종속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주체성을 갖게 되면 타인과 자기 사이에 ‘경계’를 만들어서 오로지 자기 자신을 더욱더 강하게 다져나가려고 합니다. 즉 ‘너는 나고 나는 나다’라는 식으로 살려고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버릇은 결국 하나님까지도 타인으로 간주시키고 맙니다. 하나님을 마치 이웃 사람 대하듯이 자기 밖의 타인으로 머물러 두므로서 생긴 오류가 바로 사도행전 5장에 나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부사이 인에 둘 다 의론해서 성령님께서 정해놓은 헌금을 다 드리지 않고 얼마를 빼돌렸습니다.

이것은 자신네들이 결정권을 유감없이 타인에게 발휘한 셈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타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들의 행위는 사도인 나를 속임이 아니라 성령님을 속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길로 그 부부는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교회란 한 통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체입니다. 이 동일한 한 몸에 같이 소속되어 있기에 예수님의 부활과 용서의 효력이 같은 몸의 지체인 자기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의 아담에 속한 겉사람은 흙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롭습니다. 바로 이러한 작업을 우리 주님께서 교회의 사자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교회의 사자는 우리 인간에게 소속되어 있는 피조물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님에게 소속된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 인간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형식 구조와 우리 자신이 몰두하는 일로 인하여 스스로 파멸을 자초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로서 주어진 참된 교회의 지체들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주체성으로 인해 예수님을 타인으로 세워놓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1-02-07 18:14

006강-계1장16-20(주님 앞에서의 교회)-rev060326

설교:이근호 목사님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1:16-20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399페이지입니다.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지난 시간부터 계속 말씀드린 것은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돌아가신 부친이나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살아있다, 해봤자 뒷방 구석이나 차지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살아있으면 그 예수님께서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라 예수님이 진짜 살아있다면 그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을 차질 없이 그대로 밀어붙이십니다.

예수님이 안 살아있으면 우리는 뭐 해야 되는데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면 아무 일도 않고 가만히 숨만 쉬고 살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쉬지도 않고 부지런하게 자신의 계획대로 모든 일을 밀어붙이시는 분이기 때문에 만약에 예수님이 살아있고, 활동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의 활동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은 무엇으로 간주되느냐 하며는,

예수님은 살아있지 아니하며, 이미 과거에 살았던 한물 간 과거의 인물이라고 예수님의 살아있음을 부정하는 그런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만약에 받아들이신다면 오늘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활동도 여러분들이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활동을 하셨냐 하면 오늘 본문에 보니까, 「사망과 음부의 열쇄를 가졌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있다면 살아있는 분으로서의 일을 하시는데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며는, 열쇄를 쥐고 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열쇄라 하는 것은 잠긴 것을 여는데 필요한 도구죠? 열쇄를 쥐고 잠근 것을 여는 일을 하시는 활동을 하시는 겁니다. 무엇의 세계의 열쇄를 여느냐 하며는, 사망과 음부의 열쇄를 가졌다 했습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쇄를 가졌다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여는 세상만이 사망이 아니고 음부가 아니고 부활의 세계며, 예수님이 계시는 곳 말고 피조세계, 이 피조세계는 너희들이 아무리 우기더라도 음부와 사망에 갇혀있는 세계라는 겁니다. 들어보면, 우리보고,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음의 늪에 빠져있는 죽은 자에 해당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되요. 듣는 오빠 기분 나쁘죠? 우리가 살아있고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보고 죽었대요.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며는, ‘우리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시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자꾸 내 앞에서 살았다 소리 하지 마라’ 이거예요. 네가 과학을 하든, 철학을 하든, 설교를 하든, 뭘 하든 자꾸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의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지금 죽음의 티를 내고 있으면서 자꾸 왜 살았다고 우기느냐’ 라는 식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부터 이미 죽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목젖에 손대면 목젖이 뛰고 가슴이 뜁니다. 맥을 짚어보면 맥박도 뛰지요? 맥박이 뛰니깐 자꾸 살아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언젠가는 그게 정지되는데, 언젠가는 정지되는 고장 난 시계잖아요. 고장 난 기계라고요. 죽기 전에, 목숨 끊어지기 전에 살아있다고 간주해주세요, 말 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의 세계는 이게 안 죽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입장에서 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천 년 백 년 살아도 언젠가는 우리 시계가 멈춘다면 이거는 고장 난 것이고 주님 것이라고 간주하시는 거예요. 누가요? 예수님이…살아계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간주한다 그 말이죠. 복음이라는 것은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을 교회 나오게 하는 게 복음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처해 있는 세계 속에 들어갈 때까지 인도해주는 게 복음이에요.

예수 믿고 난 뒤에 건강이 좀 나아졌다, 이게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어디까지 도착이 가능해야 복음이냐 하며는 예수님이 영원히 죽지 않고 영혼이 펄쩍펄쩍 뛰며 영원히 천국 복락을 누리는 그 지점까지 효과를 줄 수 있어야 그게 기쁜 소식이에요. 인생은 마라톤이라 하지 않습니까? 출발할 때는 생생해요. 웃으면서…이야기 하면서, 걸어가며 농담하면서, 아침 햇살에 상쾌하죠. 나중에 결승지점에 엎어져서 50대 죽은 사람도 있어요.

나중에 결승지점에 가면 퍼렇게 맛이 가 비틀비틀하면서 들어오는 사람들 대부분입니다. 마라톤 전문가들이야 생생해가지고 들어오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기가 죽어 들어오는 사람 많아요. 교회 와서 복음 듣는다는 말은 하나님 힘 얻어서 사업 잘되고 그거와 상관없어요. 똑바로 아세요. 도착지점이 예수님이 계시는 곳까지입니다. 약간 컨디션 좋아지고 이거 아니에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쇼부 내기 위해서 교회 온 게 아닙니다! 주님 가신 그 세계에 합류되기 위해서 복음으로 불러주셔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왜 중간에 척척 쳐지려고 합니까? 봄 되면 처져요. 제가 그 이유를 알지요. 사람들이 왜 가다가 팍팍 풀리느냐 하며는, 평소에 사람 사는 게 기분 따라 살아요. 고상하게 말하면 이성과 의지보다 감정이 앞선다는 그런 이야기하는데

사람은 기분 따라 살기 때문에 기분이 조금 좋다싶으면 간 쓸개를 주님께 다 떼 내주지만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싶으면 그만 삐져가지고 없어져 눈에 보이지도 않아요.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복음이 아닙니다. 그거는, 향수 뿌리고 노래방 가서 노래 한 곡 부르면 기분 업 되요. 좋아집니다. 낯선 남자에게서 향기가 느껴진다? 사람들은 자기 기분에 따라서 향수 뿌리고 자기 기분에 따라서 시간 쪼개 여가 보내잖아요.

취미활동 하고. 나이스 샷! 하면서 골프 치는 거, 복음이 아니거든요. 기분 전환하려고 한번 치는 겁니다. 그렇죠? 기분 전환용이잖아요. 여기에 목숨 걸고 이러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교회는 기분 업 되라고 온 게 아닙니다. 우리 존재의 토대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 존재의 밑바닥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버렸다는 것이 우리 밑바닥에 깔려 있어요. 그걸 두 자로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의 막강한 힘이, 우리 기분에 따라서 울렁울렁 거리면서 파도치는 바다에서 배 타듯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까불대다가 우울하다가 다시 또 촐랑대다가 세월 보내면서, 이런 하나님의 아들 죽으심이 밑바닥에 깔려서 우리를 주님의 부활의 세계까지 끌고 가십니다. 인도하십니다. 자기의 밑둥치를 볼 줄 알아야 되요. 세례요한이 아주 과격한 표현을 했는데,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다 했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기 때문에 회개치 않은 자는 잘라버린다 할 때, 그 시대 그 현장에서 그 이야기 들은 사람은 갑자기 자기 발목이 근질근질 할 겁니다. 자기 밑둥치, 밑바닥에 누가 깔려있는가를 자꾸 봐야 될 텐데 자기 기분에 따라서, 자기감정에 따라서 너무 울렁거려요. 멀미가 날 지경이라.… 제가 인생을 몇 년 살지는 안 했습니다만, 살아보니까, 제가 내린 결론은 사람은 인생을 억지로 살아요. 모두 다 억지로 살아요.

보충 수업하는 고3학생도 억지로 공부하고, 판서 검사하는 사람도 억지로 하고 의사들도 하나의 기능인이 돼가지고 억지로 해요. 억지로.… 바로 그 이유가 죽음이라는 능력, 죽음이 우리를 계속 조여들어요. 우리 인생을 조이기 때문에 우리 기분 전환으로 그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뻐하세요. 열쇠… 열쇠라 하는 것은 풀어서 거기서 해방시켜주는 겁니다.

죽음의 열쇠를 쥐신 분이 그 열쇠를 가지고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작업을 죽은 채로가 아니라 세세토록 살아 있으면서 열쇠가지고 열어 제치는 일들을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밑둥치에서 계속해서 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어떻게 그 열쇠로 열립니까? 저는 요한복음 6장53절,54절 말씀을 성경구절 가운데 젤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개인적인 취향이니까 동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요한복음 6장 53절, 54절을 제일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이유를 제가 말씀드릴게요. 먼저 읽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라고 독점적으로, 독불 적으로 경계를 쳐놓았어요. 왜 제가 이 말씀에 기분이 좋으냐 하며는, 저라는 인간이 평생을 살면서 어떤 잘못, 어떤 죄든 계속해서 짓거든요? 진도가 너무 빨리 나가는 것 같은데 여기뿐만 아닙니다. 많이 있는데 아까 읽은 요한복음 6장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이 말이 왜 고마우냐 하며는, 저는 하루 수십 번 수백 번 죄짓고 실수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생얻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왜? 독보적인 예수님은 다 자기 살이고 자기 피거든요. 이근호의 살과 피가 알아서 관리하여 구원받는다, 이게 아니다 말이죠. 제 살고 제 피가 아닙니다. 저 쪼개보면 살과 피밖에 안 나와요. 이 살과 피가 뭉쳐보면 온르도 실수하고 죄짓는 내가 또 됩니다.

하지만 나의 실수, 나의 죄가 결코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이게. 교회 십 분 나오고 십 분 안 나오고, 헌금 하고 않고 이게 내 운명을 결정한 게 아니에요. 우리 사람은 기분 따라 살기 때문에 기분 조금 좋았다 하면 착한 일 많이 해요. 그런데 기분이 나빠지면요, 일부러 하나님께 보란 듯이 죄짓고 이래요. 그거는 기분 따라 살다보니 그래요.

기분 따라. 기분 업 되면 신앙 좋아졌다가 다운되면 교회도 안 나오고 이럴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순간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나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미 이건 완료된 상태입니다. 문법에서 ‘부정사’라 하는 게 있어요. ‘to 부정사’ ‘~한다’라는 동사가 돼버리면 과거 현재 미래 시제를 받아요.

그러나 부정사가 되어버리면 놀랍게도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과거가 됐든지 현재가 됐든지 미래가 됐든지 간에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는 자를 영화롭다 하셨느니라」라고 시간을 작살내버리는 부정사로 써버렸으면 이것은 이미 완료된 것을 말합니다. 네가 완료 하려고 애를 쓰든지 말든지 간에, 이미 완료된 상태다 말이죠. 이게. 「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늘에 이미 앉히시니」

그런 용어들이 많이 나와요. 인자의 살과 피를 마시게 되면 이미 영생을 얻은 겁니다. 자기 행동의 미흡함 때문에 좌절할 필요조차 없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열쇠를 가지고 죽음과 음부에 있는 자를 끄집어내시는 이유를 알겠지요?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어떤 분이, 예수님이, 시간 따라서 분침을 반복하는 뜨거웠다가 차가웠다 하는 우리를 열쇠를 가지고 열어젖힘으로 말미암아

시간에 저촉 받지 않고 완료된 그분의 완료의 능력이 우리의 시간을, 우리의 인생을 이기는구나 하는 것을 믿게 하시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교회 있음’이에요. 오늘 눈을 뜨고 볼 게 뭐냐 하면, ‘이미 교회 있음’이에요. 또 완료입니다. 이미 교회가 있대요. 어디에 있냐? 주님의 손 안에 있대요.

주님의 오른 손에 뭐가 있냐면 주님의 손에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나오지요?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일곱 사자라 하는 것은 천사거든요. 교회 사자가 목사라고 일부 교회 목사들은 사기 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지만, 이건 천사입니다. 이 천사의 특징은 사람의 말을 안 들어요. 천사의 특징은 주님의 말만 듣는다는 것이 우리한테는 또 하나의 다행스러운 거예요.

이미 교회가 있고, 그 교회 관리자로서 천사가 심부름꾼으로 왕래하면서 교회마다 충고하고 통보해준다는 사실이 우리를 든든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말씀을 줘도 우리는 어디 속해 있느냐 하며는, 말씀대로 음부와 죽음에 시달리는 그런 쪽에 있기 때문에 죽음이 주는 압박감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내 인생을 어떻게 정리해야 될지를 모르고 우왕좌왕하죠.

우리는 뭐냐,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은, 죽음 속에 있는 인간은 어떤 모습이냐를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죽음 속에 있는 인간은 누가 불러줘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뭐냐 하면, 학교 복도에서 ‘어이, 학생!’ 하고 교장선생님이 부르면 비로소 이 학생은 이 학교에서 내가 학생이라는 주체가 밝혀져요. 누가 나를 불러줄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꽃이라 부를 때 의미가 생긴다고 어떤 시인이(김춘수) 이야기했듯이 누가 불러줄 때 생기는 거예요. 병원에 가서 ‘환자분 오세요,’ 하면 내가 환자라는 것을 느낍니다. 의사 선생님이 환자라고 불러줄 때, 그때는 환자가 되는 거예요. 동일한 환자가 집에 가서 자식이 나를 ‘아버지,’ 라고 부르면 나는 가장이구나 라는 주체가 성립됩니다. 그러니까 이 주체라 하는 것은 내가 어느 장소에 있느냐, 어느 곳에 놓여 있느냐 에 따라서 자기의 주체가 왔다 갔다 해요.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그 공간에 따라서 결정되는 겁니다. 제가 군에서 겪은 이야기가 3년 보다 더 길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만큼 군에서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나와요. 저는 대구 50사단에 집합했는데, 훈련소가 50사단에 있습니다. 군에서 제가 제일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군에 오게 되면 머리를 깎이게 하고 그때부터는 훈련병으로 불러주죠. 불러 주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내가 만약에 대학생이었는데 군대 갔을 때, ‘더 이상 여기는 대학생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제일 견디기 어려운 거예요. 그동안 내가 구축해놓은 나의 주체성이, 군대 조식 속에서 나를 불러주는 상관에 의해서 내내 내 주체성을 허물어버리고 상관이 불러주는 거기에 맞추는 주체성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 그렇게 곤욕스러울 수가 없어요. ‘너는 전쟁 기계다’ 까라면 까야 된다는 말입니다.

기라면 기고 까라면 까고, 너는 시키면 시킨 대로 해야 된다 이거예요. 네가 어느 집안에서 네가 어느 대학을 나왔든 간에, 네가 어떻게 살았든 간에, 네가 얼마나 뽀샤시하게 하고 다녔거나 상관없이 군에 왔으면 지금까지의 모든 관계를 차단시켜버리는 겁니다. 사복도 우편으로 집에 보내버리고, 이제는 집에도 못가고, 하루 스케줄도 국방부장관이 다 짜버리고,

예전에 주체성에 의해서 행동하고 사고했던, 그리고 옛날에 있던 주체성에 의해 설계했던 그 미래마저,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그때는 군대서 사고 나도 군대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분 나쁘면 사람 죽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문제는 뭐냐면, ‘시킨 대로 다 할 테니 살려만 주이소,’라는 식으로 3년을 보내야 되요.

군에서 제대하고 난 뒤에는 ‘군대는 합법적인 폭력자’라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합법을 가장한 폭력이죠. 완전히 전쟁 기계를 만들어요. 총만 병기가 아니라 인간 자체도 병기로 만들어요. 그래야 전쟁에서 효율성을 나타냅니다. 명령체계가 매끄럽게 쫙쫙 빠져요. 장애물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소모품이죠. 병사들은 소모품이에요. 추상적인 명분은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지키리라는.

하지만 인간은 추상적인 것을 그걸 ‘형식구조’라고 합니다. 형식구조라는 것은 형식만 있을 뿐이지 내용은 없다는 거예요. 그저 누가 불러주느냐에 따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군대만 그러는 게 아니고 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청년회에서, 성가대에서, 하나는 바리톤 하나는 베이스로 노래할 때 같이 노래 부르고 목사님 설교할 때는 장난치고, 이런 식으로 청년 시절을 보냈던 청년들이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있다가 ‘삼성’에 한 명 구하는데 누가 갈꺼냐, 할 때 이제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거든요. 원수가 됩니다.

‘교수님, 저 보내주세요. 저 가정 형편이 어렵습니다.’ 그러면 먼저 서류를 내야 되는데 교수님이 ‘너 서류 안 갖춰져 있으니까 도장 갖고 와야 돼’ 도장 가지러 간 그 틈새에 다른 가까운 친구가 서류 밀어내버리고 자기 서류 집어넣어 삼성 가서 나중에 두 사람이 라이벌 되어 싸우게 됩니다. 이 인간 세상이라 하는 것은 삼성에 갔다면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가 너를 불러줄 때만 비로소 거기에 맞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해야 되요.

그때는 대학교 때 친구였다, 동창생이었다, 이거는 다 버리고, 이거는 옛날 주체성이었고 누가 나를 불러주느냐에 따라 거기에 맞추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장사를 한다면, 어떤 고객들이 오시는가, 그 고객들이 원하는 그러한 상품과 주인 노릇을 해야 되요. 거기에 맞추어야 되요. 누가 나를 불러주느냐에 따라서, 부름에 따라서 하나의 의미를 갖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 보시기에 예수님이 이 땅을 살아봤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이 땅에 살아보니까, 실제로 육신으로 오셔가지고 사람 사는 곳을 거니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고 보니까 최종적으로 불러준다는 것이 뭐냐, 역시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을, ‘너 그러면 죽는다’ 이것이 최종적인 음성으로서,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서, 죽음 속에서 못 빠지도록 하는 조치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음에서 탈출을 한 입장에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부활했다는 근거로서 부활을 줄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와 죽음에 얽매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음부의 열쇠를 열어제끼는 겁니다.

사람이 파멸의 길을 간다는 것이, 마약이나 도박이나 술이나 알콜 중독이나 이런 노숙자 생활 그런 것으로 파멸되는 게 아니에요. 그것도 파멸의 일종이긴 하지만 사람이 파멸되어 간다는 것은 자신의 일에 열중함으로써 파멸됩니다. 목사가 목사의 일을 열중함으로써 서서히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저 아니면 이런 말 할 사람 없어요. 목사는 목사의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지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있는 그 일이 자기로 하여금 예수님의 열쇠를 가로막는 구실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다 잊어버리셨죠?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릴까요?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데, 내가 목사기 때문에 내가 목사 일 열심히 다 해야 구원 얻는 것처럼 나의, 목사라는 직업이 예수님의 살과 피의 공로를 가로막는 짓들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자기가 하고 있는 일로 인하여!!

‘이것은 나의 주특기야’ ‘이것은 내가 전문가야’ ‘이거 내가 하면 똑 부러져’ ‘나는 이 일의 대가야’ 하는 그것이 자기를 망치는 거예요. 자기가 하는 그것은 죽음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유는 죽음을 통과해서 이은 것은, 예수님의 공로에 의지해야 예수님이 도착하신 부활세계에 갈 수 있는 것이지 자기가 재미있다고 하는 일에 열중낸다고 해서 그것으로 부활 받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실학자가 연구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주체성을 입혀주고, 불러주고, 우리교회는 ‘목사님’ 그러는데 다른 교회는 ‘목샤님’이라고 하니까 그 목샤님에 맞는 행동을 해야 된다고 상대방이 어떻게 불러주냐에 따라서 내 주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거예요. 주님께 종속된다 해놓고 사실은 교인들에게 종속되고, 주위 사람들에게 종속되고, 가족들에게 종속되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아까 장로님 기도한 것처럼 우리는 피조물이에요. 피조물은 누가 불러줄 때만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담’이라고 불러주는 순간부터 우리는 ‘아담’을 못 벗어나게 돼 있어요. 죽으나 사나 아담이에요. 아담이 영원화 될 수는 없는 겁니다. 아담이라는 운명을 쥐고 아담대로 가야되는 겁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 이스라엘 운명대로 가야 돼요.

야곱이 거기서 이탈하거나 도주하거나 탈출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 전체는 아담이기 때문에 우리 육체는 아무리 똑똑하고 명석해도 연세가 많으면 실수가 있게 되고, 자기가 보기에 자신이 치욕스럽게 느껴지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그거는 인수인계할 때 넘겨주는 겁니다. 「…우리의 육은 후패하나 우리는 날로 새롭도다. 고후4:16」성경에 그런 말씀이 왜 있겠습니까.

흙에 속한 형상은 이게 와해돼가야 마땅해요. 우리가 속한 형상은 와해돼야 되고,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으리라. 그것은 주님께서 이미 부정사不定詞로 완료된 거예요. [ 부정사:영어(英語) 따위에서 인칭(人稱), 수, 시제 따위에 제한(制限)을 받지 않고 쓰이는 움직씨 형태(形態) ] ‘그렇게 되리라.’ 미래 같지만 이미 완료된 거예요. 그렇게 하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그 목표지점을 너는 실수해도 나는 실수가 없다는 겁니다. 환란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곤고나 어떠한 위험이 온다할지라도 너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도중에 취소되거나 파괴되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답답한 게, 한국교회가 이 요한계시록에서 제일 답답한 게, ‘교회가 되자’고 우기는 거예요. 교회가 되어서 구원받은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괜찮은 교회’ 그런 교회는 없어요.

교회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형식구조로서의 교회와 하나는 사건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여기서 말한 예수님의 교회는 우리에게 다가올 때, 형식구조로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다가와요. 사건으로. 무슨 사건? ‘이미 교회는 있단다.’ 교회가 있기 때문에 너희에게 십자가의 부활이라는 소망을 너희로 하여금 빋게 했지 교회가 없으면 믿었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며는,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형식을 갖거든요. 교회는 이러이러해야 된다는 형식이 있다고요. 이 형식을 우리는 평생 갖추고 살아갑니다. 형식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노는 백수라도 다 형식이 있어요. 우리가 자꾸 형식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뭐냐 하며는, 이거는 좀 어려운 이야기지만 이렇습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항상 타인을 생각해줘야 나라는 것이 비로소 밝혀지죠.

아까 제가 말한 것처럼 누가 불러줄 때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타인이 없을 때는 놀랍게도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타인이 주위에 깔리면 ‘아, 저 사람과 나와는 이런 점이 차이 난다’ 차이점을 가지고서 자기 나름대로의 형식구조를 갖추게 마련입니다. 한국교회가 썩었으니까 우리교회는 괜찮은 교회라는 것이 성립되지, 만약에 한국교회가 전부 다 훌륭한 교회라면 ‘우리교회’라는 독특한 이름을 붙일 수가 없잖아요.

사람은 항상 상대를 의식하면서 비로소 후차적으로, ‘나는 다른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라고 ‘자기정립’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 하냐면 ‘경계’라고 합니다. 경계선. 경계를 치거든요. 그런데 그 경계를 인간이 넘을 수는 없어요. 넘어버리면 타인과 나와 동일하게 되고 내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무서운 일이 되죠. 그래서 ‘나’라는 것을 떳떳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와 다르지? 나는 저 사람과 어떤 점이 다르지?

저 사람은 노란색을 좋아하는데 나는 파랑색을 좋아하는구나, 그러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야, 너는 저쪽 무협영화를 좋아하는데 나는 멜로물을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야. ‘나는 나야’ 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항상 너라는 것을 앞에 내세워야 되는 겁니다. 전두환 했다는 말 중에 감동받은 말이 있는데요, ‘본인은 본인이야~!’ 본인이 무슨 뜻이냐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이 남 앞장서서 하는 건 좋은데 하나님마저 타인으로, 하나의 개체로서 간주하니 이게 실수였어요. 이게 실수라고요. 하나님 저기 계세요, 제가 헌금하겠습니다. 하나님 저~기 계세요 제가 전도하겠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내 속에 역사해서 헌금하고 전도하고 이래요. 성령은 사건으로 보거든요. 사건으로 일해야 된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의 평소 버릇이 뭐냐 하면, ‘본인은 본인이야~!’ 이 버릇이라고요.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 버릇이 있다 보니까 누구와 그러냐면, ‘예수는 예수고 나는 나야!’ ‘내가 주면 감사해라’ 자꾸 자아를 강하게 굳히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 실수가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나와요. 초대교회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한 세트거든요. 부부다 말이죠.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재산 반을 내게 되어 있죠. 집에 오천 있는데 이천오백 내라 했다든지,

만원 있는데서 오천 원 내라 이거는 되는데 30억 있는데서 15억 내라, 이거는 엄청나거든요. 실수할지 모르니까 성경 잘 봐야 됩니다. 재산 소유를 팔아서 얼마를 내라 하니까 성령을 속이고 얼마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얼마를 감추고 하나님이 지시한대로 다 내지 않은 모양이죠?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 부부가 교회를 볼 때 뭐냐 하면, 본인은 본인이고 타인은 타인이니까 경계를 긋고 자신의 거짓말이 눈치 챌 일이 없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바라볼 때, 평소에 자기가 교회를 하나의 타인으로 본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너희가 당회를 속이고, 성령님을 속이고 헌금을 이거밖에 안했는데 이거는 사도 나를 속임이 아니라 성령님을 속였다.’ 하는 평가와 함께 남편과 아내는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죽었다 하는 것에 애닳아 할 필요 없어요. 왜냐면 애초부터 우리는 음부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장차 올 죽음을 미리 앞당긴 것뿐이니까.

그 사람들이 그때 안 죽어도 결국 죽으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다른 것은 다 속이고, 다른 것은 다 너는 너고 나는 나야, 할 수 있더라도 제발 하나님한테는 그런 자세로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야, 라는 자세가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면 그분은 우리의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주님이고 나는 나야, 가 돼버리면 주님께서 열쇠를 열고 우리를 지옥에서 벗어나게 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성경에서 젤 중요한 게 예수님이 죽었는데 왜 내가 용서 받냐, 그 문제거든요? 예수님이 피를 흘렸는데 어떻게 내 죄를 다 씻어줄 수 있냐가 문젠데, ‘너는 너 나는 나’가 아니라 하나가 될 때는 주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주님의 백성에게 동일하게 효력이 전달하게 돼 있어요. 성경에서는 그 몸의 그 지체라고 이야기합니다. 머리가 아파도 손발이 저려요. 왜냐면 같은 통째로 한 통에 속했기 때문에.

따라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뭐로 보냐면 한 통으로 된 몸으로 보고, 우리는 ‘본인은 본인이야~!’ 해도 평소의 버릇처럼 예수는 예수고 나는 나지 뭐, 주님께서 도와주면 협조하고 나도 협조할게요. 이런 식으로 자꾸 자아가 공고히 되는 쪽으로 버릇이 들어서 그러는데 그건 첨에 얘기했듯이 기분 따라 살다보니까, 자기를 자꾸 불러주는 사람이 돈도 좀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불러주면 ‘아멘’ 하고 시시한 사람이 불러주면 ‘너는 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주님에 종속돼 있고 주님이 나를, 내 백성이다, ‘아담아!’ 불러주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꾸 두리번거리면서 어떤 인간이 나를 불러줄까, 나는 거기에 맞출 만반의 준비가 돼 있는데 … 이런 식으로 촐싹대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 말이죠.

물론 그게, 우리 인생을 한평생 억지로 살다보니까 그런 식으로도 버틸 수밖에 없어요. 세상 자체가 우리 맘대로 안돌아가거든요. 그러니까 남 도와줄 것 없이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한다는 거죠. 나부터 살고 봐야한다는 힘든 삶을 살다보니까, ‘누가 나를 불러다오, 나를 스카우트 해 달라’ 이것이 모든 병원, 군대, 교회 어디 할 것 없이 모두 퍼져있어요. 다 아십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가 바로 나에게 영생을 준다는 것. 이 세상 어느 구석에서 어떻게 세월을 억지로 보내든지 말든지 간에 이거 하나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를 구원하지, 내가 세상에서 해방선언하고 마귀하고 싸운다 해가지고 그 공로로 인정받고 훈장 받아서 천당 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는 육에 속해있기 때문에.

따라서 영이 와서 사건으로서 날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의 그 부활의 능력을 계속해서 제공해주는 한도 내에서 우리는 주님을 이만큼이라도 더 알아가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바라기는 제가 이 말씀 드리기 위해서 절대로 교회에서 내 자랑하지 말고, 교회란 이미 있어요. 우리는 그걸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형식 논리든 구조든 간에, 그저 복음만 …이미 교회잖아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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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5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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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