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광주 강의 12-3
Re..광주 강의 12-3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12-3
고린도후서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얘기한 것은, 사도바울의 심정이 되어서 같이 성경을 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울은 완전히, 세상을 정말 엉뚱하게, 사람들이 도무지 생각지도 못한, 세상 적으로 말하면 천재적이지요.
바울은 예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봐야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다룰까 라는 식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시간에는 ‘왜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환란이 우리에게 미치게 하고, 또 위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는데, 두 번째 시간에 얘기한 것은 우리 속에 누가 들어온다고 했습니까? 허락도 없이 우리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약속을 펼친다고 했지요.
약속을 펼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나는 육체에 속한 죄인으로 드러나고, 그러니까 자신이 육체에 속한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은 이런 것을 몰라요.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은 매일 반성은 하지요. 이렇게 반성을 하면 조금씩 나아질 거예요. 사람이 좀더 나아진다는 것을 기대하게 되면, 점점 더 나아지기를 바라겠지요.
포인트 A라는 지점에 내가 있다면, A라는 지점에 도착하면 사람은 반드시 상상을 합니다. 뭐냐 하면, 포인트 B라는 지점에 내가 가면 어떻게 될까를 또 상상합니다. 나는 이렇게 되어야지 하고 반드시 상상하게 마련입니다.
왜 나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생각하는가? 사실 성도에게는 이게 없어요. 성도는 그냥 반복만 있을 뿐입니다. 성도는 자기 역사가 없습니다. 현재의 반복이에요.
그래도 인간들은 매일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하지요. 이런 것을 기대한다는 자체는 과거의 일 중에서 자신이 선하다고 여기는 것, 옳았다고 여기는 것을 자꾸 되풀이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 중 좋았다고 여기는 것을 취사선택해서 선택한 것 중에 되풀이해서 더 나은 삶을 만들고, 이것이 자신의 미래상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짜 성도는 자신의 과거 중 좋았던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있는 그것을 주께서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그것이 미래에 까지 이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위대하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10년 전 일을 생각해 보세요.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나는 죄인일 뿐이고,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는 이것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그런데 뭘 더 나아질까? 무안에서 목회하지 말고 안산에서 하면 어떨까? 안산을 가든 무안을 가든 그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늘 생각한다는 것이 ‘어제보다는 더 나은 내일’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상은 뭐냐 하면, 과거 중에서 괜찮은 것을 골라 그것이 미래에도 되풀이되기를 원하지요.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과거의 산물입니다.
과거 중에서 안 좋은 것들을 빼고, 나쁜 것은 삭제된 채 좋은 것만 골라서 그것이 미래에도 계속 반복해서 행복을 누리고 싶은 것이 육체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이런 육체가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나는 늘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는 사실을 되풀이 하는 이 노선이 성도 안에는 같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왜 성도에게 환란을 주시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약속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24절을 봅시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여기에 보면, ‘너희가 믿음에 섰다’고 되어 있습니다. 선 이유가 21-22절에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약속은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쉽게 말해서 전쟁입니다. 우리를 전쟁터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오는 약속입니다.
이 전쟁이 어떤 전쟁인가 하면, 우리 자력으로 뭔가 할 수 없는 나약한 자로 만들어서 그런 채로 전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로 만들어요.
예를 들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가 산 위에서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었지요. 그 때 백성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다만 여호수아와 몇몇 군사들만 나가서 싸웠지 나머지 백성들은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산 위에 있는 모세의 손이 내려오니까 이스라엘이 밀리고, 손이 올라가니까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러니까 이 전쟁은 인간에게 속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전쟁입니다. 어떤 바보들은 모세에게 속한 전쟁이라고 하는데, 지팡이를 잡고 했으니까 하나님께 속한 전쟁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은, 우리는 약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야만 하는데, 그래야만 전쟁 승리에 대해 감히 우리가 금방지게 우리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런 내용이 고린도후서 끝에 보면 나옵니다. ‘내가 자랑하는 것은 나의 약함 뿐이다. 너희들은 내가 강하다가 생각하는데, 나는 약하기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넘쳐난다.’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서 전쟁에 나가게 하십니다.
여리고 성 전쟁에서도 인간의 힘을 전혀 동원하지 않지요. 그냥 성을 매일 빙빙 돌도록 하셨어요. 이렇게 돌고 도니까 그냥 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을 차지하게 되었기에 인간은 여리고 성에 들어가서 어떤 전리품도 취해서는 안 돼요. 내 능력으로 빼앗은 성이라면 내가 취할 수 있는데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것이기에 모든 것은 주님의 전리품이지 나의 전리품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간이란 놈은 그 전리품 중에 외투 한벌과 은, 금을 챙기다가 나중에 작은 아이성 전투에서 작살이 나지요.
사도행전을 봐도 고넬료와 베드로가 만날 때 그냥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열심히 기도해서 성도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울같은 인간이 예수 믿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수를 잡아 죽이는 일의 선봉에 선 사람인데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약한 자를 들어서 주님이 이 전쟁에서 홀로 다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 중에 빠진 것이 있습니다. 이 전쟁을 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되는데, 이 약속은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것이 ‘예’가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누가 방해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성도라고 하는 우리가 자꾸 방해를 합니다. ‘나도 한 몫 했습니다. 주님 일 하는데 내가 도움이 되었으니 주님도 제가 원하는 것을 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는 아직 스스로를 나약한 자가 아니라 강자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전에 말씀 드렸지요. 포인트 A에서 B로 옮겨지기를 원하는 인간에 대해서.
지금은 비록 이정도 이지만 나중에는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이렇게 강자가 되고 싶은 심보가 우리 안에 계속 있습니다. 약자에서 강자로 바뀌기를.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강자가 되려고 하는 이 자체를 꺾어버리면서 일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환란을 당해야 합니다. 고난당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제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 이제는 끝났구나.’ 이것이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이것이 가능하던가요? 사람이 마지막 믿는 것이 자기 자신인데. 자기를 믿을 때 반성하고 회개하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지금은 못했지만 앞으로는 잘 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자기에 대한 기대, 믿음. 끝까지 자기를 신뢰하는 모습입니다. 자기 포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 해야 주님도 잘 된다. 우리교회도 내가 잘 해야 부흥시킨다.’ 목사에게 이런 것은 치명적인 독소조항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목회를 못한 것은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 이런 것. 갈라디아서에 어떻게 되어 있던가요. 우리는 이미 자유자입니다. 이런 자인데 실은 우리는 우리 육체만 신뢰하고 의지하는 종노릇 하는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제발 너 힘 좀 빼라.’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입니까? 힘 빼라는 말은 아무 것도 하지 말란 말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주인이신 예수님이 계시는데 우리는 뭐든지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는데 어떻게 한다고요? 스펀지에 물이 쓰며들어 있듯이, 성도는 뭘 해도 은혜가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딱딱해 지면 은혜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때는 실수했는데 다시는 실수 안 해야지. 이렇게 자꾸 자기반성을 해서 반성하는 자기는 더 위대한 사람이 되고, 그 위대한 것이 주의 일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성화론의 근본적인 나쁜 점입니다. 그래서 나는 개혁주의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을 불신자로 봅니다.
본인들은 기절초풍할 이야기지만 개혁주의가 왜 문제인가 하면, 자꾸 개혁해야 된데요. 무슨 주님의 교회가 개혁해야 할 교회가 있습니까? 처음부터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데 어머니를 개혁하겠다? ‘어머니 좀 개혁하세요.’ 이게 말이 됩니까?
요한복음 17장 15-16절을 보겠습니다.
하여튼 신자라는 자들에 제일 예수를 모독해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뭘 보여주는가 하면, 우리가 그렇게 극심한 환란 속에서 짓밟히고 찢기고 죽임당해도 여전히 예수님이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어렵고 살 소망까지 끊어져도 그 속에서 은혜가 나오고 감사가 나오니까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예수님의 인도하심인 것입니다.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들을 데려가지 않고,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있게 하십니다.
전쟁의 승리는 누가하신다? 예수님, 주의 이름으로 이루지 인간의 능력이 포한된 승리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나약한 인간으로 만듭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로.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교회는 사람이 많이 모여서 예배당이 비좁아서 새로 옮기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고 나오고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정판옥 목사님이 ‘왜 우리교회는 점점 사람이 모여듭니까? 뭔가 좀 이상한 것 아닙니까?’ 하고 물어요.
시장에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 내 사람이 아닙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모여서 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모여서 숫자 세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3명이냐 88명이냐 100명이 넘었느냐 이것 세면 문제입니다. 수가 많아서 헤아린다는 것은 자체가 힘이 생겼다는 말이고, 3명 뿐이라는 것은 힘이 없다는 말이거든요.
힘이 있고 없고와 하나님의 전쟁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여하에 따라 전쟁이 결정되지, 인간들이 내편 몇 명이고 우리교회가 몇 명인가에 따라 더 큰 힘이 되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교회에 10억대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 자꾸 온다. 얼마 전에 오신 분은 벤츠타고 다니고, 어떤 분은 오피로스 타시는 분인데 이렇게 고급 차를 타시는 분이 온단 말이지요. 이럴 때, 이렇게 모였을 때 이것을 스스로 포기하겠습니까?
벤츠 타다가 자전거 타고 오고, 승용차 타다가 걸어오고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사람 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지. 그렇지 않으면 주님만 바라보겠습니까? 어렵겠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힘들어도 좋으니까 그런 일이 한 번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되면 실제로 주의 일이 사람의 일로 바뀝니다.
사람 적으면 회의할 일 없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많이 모이면 회의를 해야 합니다. 회의를 하게 되면 정치적인 타협을 해야 하고, 법이 만들어지고, 2/3냐 과반수냐로 싸움을 합니다. 교회에 법이 있으면 안 됩니다.
혹시 장로 뽑는다면 저는 앞으로 이럴 예정입니다. 그냥 제 아이디어입니다. 보통 장로를 뽑으려면 후보자를 먼저 세워서 투표를 하는데, 입후보자를 세울 때 목사나 기존 장로의 입김이 가미되면 공정치 못합니다. 그래서 각자가 뽑고 싶은 사람이 10명이던 100명이던 다 이름을 적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중에서 한 과반수 된다 싶으면 몇 사람이 되든 다 뽑는 것이 안 좋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면 왜 하필 과반수냐? 과반수가 돼야 교회가 나눠질 때 깨끗하게 나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희생자가 희생 없는 자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희생을 생각하지 않고 자꾸 힘을 끌어 모으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전쟁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방해꾼이에요.
우리는 가진 힘을 빼야 돼요. 사람이 힘이 없을 때 원치 않은 희생자가 돼요. 힘이 있으면 그 힘을 사용해서 남을 이기려 하기 때문에 희생자가 아닌 가해자가 돼요. 그래서 예수님만 희생자입니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을 전부 다 빼앗아버리고, 이제는 살 소망까지 --
저는 전목사님 보면 살 소망이 있는가? 자녀가 3명이나 있으니 아직은 소망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살 소망이 없는, 이제 하나님이 저를 죽이셔도 하나님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이런 순간이 왜 빨리 안 오느냔 말이지요.
이것이 우리 구원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전쟁 중이기에, 우리가 원하는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 중에 우리가 백성으로 뽑혀왔기 때문에 환란을 통해서 살 소망이 없어져야 우리 자신을 의뢰하지 않습니다. 의뢰할 것이 있어야 의뢰하지요.
만약 교인 수가 늘어나면, 부자 교인이 오게 되면 이런 사람을 의지하려고 해요. 자연적으로 의지하려고 해요. 이것은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평소에 우리 마음속에 설마 내가 부자를 의지하겠는가? 부자가 와도 무시할 걸.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부자가 오면, 아이쿠 반가와라 하면서 반기지요. 어떻게 하든지 친해 보려고 아양을 떨고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하고 깨닫게 되지요. 우리에게 다 그런 마음이 있어요. 이런 기회를 못 만나서 아직 안 들키고 있는 것이지, 다 있는 것입니다. 육체이기 때문에 다 있어요. 남 욕할 것 없어요. 우리에게도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데리시고 우리의 그런 면을 들춰내면서 십자가의 은혜로 이끄십니다.
마귀는 나를 겁내지 않아요.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만 마귀가 겁을 냅니다.
마귀가 예수님과 처음 만날 때, 예수님이 의지할 만한 것들을 마귀가 다 이용했습니다. 돌이 떡이 되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천지가 빵 공장이에요. 얼마나 먹을 것이 많습니까. 이렇게 먹을 것이 풍부한데 무엇 때문에 기도하겠습니까? 기도라는 것은 자립심의 상실입니다. 언제 기도해서 은혜 받는가 하면 자기 자립심이 깨질 때입니다. 찬송을 고함치며 부른다고 해서 은혜 받는 것이 아니고 자립심이 깨질 때. 나는 이제 주님만 의지하겠습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마음이 들거든 더 이상 기도하지 말고 기도 끝났으니까 그냥 일어서세요. 그런 생각이 안 들거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이기면 하루가 즐거워져요. 기도에 은혜 받으면 하루가 행복해 집니다. 기도 중에 자기 자립심이 깨지니까 행복한데, 기도하지 않으면 항상 자신을 믿게 되고, 자기를 의뢰하기 때문에 불안, 공포, 두려움이 늘 찾아옵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를 신속하게 해 치웁니다. 그러나 기도는 내가 완전히 압수당할 때, 오늘 하루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끄셔도 아무 군소리하지 않고 완전히 주님께 맡겨졌을 때 기도가 응답된 것이기에 일어서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한 날은 늘 기쁘고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기도하지 않고 근성으로 ‘하나님 오늘 오후 2시에 빚쟁이가 찾아온다는데 제가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내 마음에 성령의 지혜를 주옵소서’ 이렇게 아무리 부르짖어도 빚쟁이에 대한 대처만 생각하지 아무 기도 응답이 안 돼요. 기쁨이 안 와요.
나중에 보니까, 주님이 ‘그 빚쟁이 내가 보냈는데.’
왜 보냈습니까? ‘너 힘 빼라고 내가 보냈다.’
학생들 시험 칠 때, 기도 많이 하는데 ‘3번에 정답은 몇 번입니까?’ 이런 기도 하지 말고, ‘어떤 모르는 문제가 나오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문제인줄 받아들이고, 나로 하여금 무식하고 게으른, 학생의 신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립심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몇 초 안 가지만, 이것이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을 봅시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해요. 예수님은 안 속했지만 나는 속했습니다. 자꾸 이렇게 주장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기도할 때 ‘너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야. 너는 이미 죽은 자야. 너는 자유인이야. 너 자신을 더 이상 신뢰하지 마라.’ 이것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기도하고, 말씀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힘을 축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재물이나 권력 이런 것으로 힘을 축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주님의 전쟁이지 나의 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전쟁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최상의 축복입니다. 어떤 것도 나의 전쟁은 없어요. 교회에서 진리를 전할 때에도 나의 전쟁이 되면 안 됩니다. 나의 싸움이 되면 본인만 피곤합니다. 잠도 안 오고 괴로워요.
주님께 속한 전쟁입니다. 주님의 전쟁에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힘을 빼는 역할을 합니다. 무능한 역할.
목사님이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나는 한 것 없습니다.
힘을 빼서 주님께서 어떻게 일 하시는가를 보니까, 지옥 갈 사람들은 기어이 예수 믿지 못하게 하시고, 천국 갈 사람들은 기어이 예수 믿게 하시는 힘이, 내 노력이 아니라 주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현장이 무안이 되고 광주가 되고 그런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을 육에 속했음이 드러나게 하시고,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사람, 성령에 속한 사람이 드러나게 하시는 일은 철저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언제 보입니까? 내가 모든 힘을 뺄 때.
그런데 만약 힘이 있다고 하면, 육에 속한 사람도 강제로 예수 믿게 만들려 하고, 우리교회 부흥되게 만들고, 마음도 없는 사람을 강제로 일하게 하고 --
얼마 전에 우리교회 온 사람인데 자꾸 장로님께서 목요일 성경공부 하러 오라고 요청을 하니까 그분이 부담스러워 해요. 장로님은 안타까워서 하나님 말씀 배우면 참 좋다고 권하지만. 성경공부도 우리교회 분위기가 어떻고, 교회 봉사는 어떻게 하고 이런 식으로 하면 주의 일이 아니고 교회 일이 됩니다.
광주 모임을 보면 주님의 일을 하는 것 같아요. 교회가 있어야 교회 일을 하지요. 교회도 없는데. 힘이 있어야 교회를 세우지요. 한 수십억 가졌습니까? 목사님 월급 200만원 주겠습니까? 없잖아요.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주의 일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서서히 교회가 되게 하셔서, 부자 보내셔서 교회 세우게 하시고, 광주 우리교회 세워가지고, 복음 전하는 교회가 되니까 사람들이 몇 만명 모여서 부흥을 했는데 담임 목사와 김을수 장로님이 싸움이 벌어져서 교회가 깨지고 --- 이것이 포인트 2입니다.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죽어서 만나면, 나는 죄인이며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우리가 교회 일을 하든 안 하든 간에 율법에 저촉 받지 않고, 오직 처음부터 자유인으로써 이 땅에 와서 이런 여러 가지 육체적인 믿음도 아닌 것을 보여주셔서 모든 공로가 주님 십자가에만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왜 성경을 안 믿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성경을 안 믿고 자신의 경험을 믿습니다. 뭔가 주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도 경험이고, 나의 야망과 야심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부터는 성경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신에게는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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