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서울 경기(의존교회) 중생, 칭의1-4
Re..서울 경기(의존교회) 중생, 칭의1-4
이름 : 이장우(IP:)
05 서울 경기(의존교회) 중생, 칭의1-4
05. 11. 14 강의 이근호목사
오늘 이 시간은 칭의에 대하여 하겠습니다.
칭의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해 주신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아무나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의롭다고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 하여 주시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증거 한다는 것은, 내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증거 할 때는 반드시 성경 전체를 증거 하여야 합니다. 성경에는 나를 의롭다 하는 것이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 이근호를 의롭게 한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중에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에 보면 있습니다. 그러나 나 이근호를 의롭다고 해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증거 하려면 성경 전체를 증거 하여야 하는데 성경 중에서 자기가 얻은 것만 챙겨서 증거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큰일 납니다. 그것은 반칙입니다.
심지어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마귀가 증거 하기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사람은 따로 있더라고 마귀도 증거 해야 됩니다. 결국 증거 하게 되지만, 본인은 구원받지도 못하지만 성경 내용은 성경내용대로 이 우주에 증거 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실수란 게 없습니다. 전혀 실수라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이 성경대로 증거 되어야 할 텐데 항상 나라는 것을 집어넣어서 나라는 것을 통해서 나의 경험 나의 체험 나의 얻은 것 이런 것들을 가지고 성경을 증거 하게 되면 이것은 자칫하면 이단 되고 교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도를 할 때에, 전도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상대방이 공격할 때에 너는 뭐 잘났는데? 하는 소리가 나오도록 전도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래 너 믿음은 최고고 내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하면서 직접 반발이 나오도록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상대방이 오해해서 그런 것은 어쩔 수가 없겠지만, 성경이 그러하더냐? 이런 식으로 반박이 되어야지, 그래 너는 잘났고 다른 사람은 다 못났다는 말이냐는 식으로 직접 반발이 나오게 하는 빌미를 주면 곤란합니다.
이 칭의 문제 구원론문제 할 때에 제일 주의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어떤 사람은 의롭다고 해 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롭다고 해 주는 나머지 사람은 무어냐?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기의 권한으로 해 주는 것이지 그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해서 해 준다는 이런 것도 성경에 없는 것입니다.
방금 한 이야기를 성경에 들어가서 쉽게 이야기 해 봅시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의롭다고 해 준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은 이 사람이 어떤 의로운 행동을 하였기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럴 때에 반드시 이렇게 답해야 합니다. 나중에 강의 끝날 때에 물어볼 것입니다. 안 물어볼 수도 있고 그것은 내 마음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의롭다고 하실 때에는 그 사람의 착함의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 예수님과 인간하고 대비가 되면서 인간이 의롭다고 되는 것은 이 사람의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주셔야 합니다. 약간 복잡하지요!
그런데 현재 교회에서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성경에서 자기로 바뀌어버립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해주는가 하면 아브라함처럼 믿으니까 의롭다고 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만 믿느냐 나도 믿는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을 의롭다 하는데 실지로는 성경을 이야기 하면서 지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야기는 자신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믿음은 최고이고 나의 믿음은 믿음도 아니냐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들처럼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그 믿음이 무엇인지 측정을 해야 하고 믿음이 무엇인지 탐색에 나서야 하고 수색하고 점검해서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따져야 되고,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따지는 그 자는 누가 아는 것입니까?
칭의라는 것이 성경 말씀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이 따로 존재 한다는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이 의롭다 함을 가지고 이야기 할 때는 실제로 이 세상의 교회에서는 문제점이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부디 이번 강의에서 그 혼잡함이 싹 가셔지기를 바랍니다.
싹 가시는 방법은 제가 차근차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드려야 속이 시원하겠기에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롭다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때문이라는 단어를 고상하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예수 안, 예수님 안이라는 이 박사학위 논문보다 더 어려운 내용이 바울서신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확 다가오는 것은 너의 마음가짐이나 행동이나 태도에 관계없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나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 말고 예수님과 거래해서 그 결과의 열매를 우리 것으로 주신다는 이 말입니다. 시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을 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고 한다면, 그 믿음이 어제의 믿음이 오늘의 믿음까지 이어지려면 여러분들이 분투노력을 해야 하고, 분투노력을 한다고 해도 잠시 자기애가 떠들고 그러면 그것이 또 신경질 나고 화를 내면 그 순간만은 또 하나님의 의를 스스로 잊어버렸다고 착각 할 수가 있습니다.
애가 공부를 못해서 내가 성질이 나서 내가 잠시 10초 동안 잠시 혼동 속에 있었구나! 그 10초 동안 믿음이 정전이 되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 행동할 그때에 예수님이 재림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괴상한 의문이 들기로 할 텐데 이 의존교회 성도들은 지금 몇 달이 되었죠? 오랫동안 말씀을 들어서 어렴풋이 라도 믿음이 그런 쪽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성경을 증거 할 때에 절대로 나를 집어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나라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 이근호는 없습니다. 인터넷에 이근호는 뜨지만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대로 증거 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있었던 그 약속과 맹세가 이렇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통보해줍니다.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성령님이 임재 해야 믿어지고 그렇게 안 믿어지는 것 조차도 이것이 성경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일가친척 중에 안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약속의 성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믿는다고 할 때에 자기 좋은 것만 믿지 말고, 저러면 안돼! 저러면 안돼! 하는 것도 성경에 있거들랑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내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이기에 내가 거기에 가타부타 건방지게 우리의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설명하는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머리에서 정리가 안 되시는 것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마땅히 당연하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방금 이야기한 이런 것이 잘 정리가 됩니다. 그런데 방금 이렇게 한 이야기를 가지고, 목사님 그렇게 이야기 한 것으로 나에게 오는 이익이 무엇입니까? 라면서 자기의 이익을 묻는다면 그 분은 순종하는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이든 누구든 내 중심으로 살려고 하니 정리가 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 것이, 비록 한국인 4천 8백만이 다 안 믿는다고 하여도 인간이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당연히 할 일을 했다고 해서 무슨 상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슨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모여서 말씀을 공부하는 것,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 해도 되는데 오늘 목사님 보고 참석해 주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곤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 강의, 하나님의 의를 강의 하면서 여러 번 이야기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강의할 때에 무엇이 마음에 가장 강하게 반발이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이 의롭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그냥 순하게 받아들이면 될 텐데, 하나님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내가 세상에 나가서 어떤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계산하면서 따진다고 하신다면 그것을 강의 끝날 때까지 하나님의 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람 속에 항상 착한 마음 악한 마음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착한 마음임을 찾기 위하여 성경을 펼치는데 그렇게 되면 성경말씀이 순하게 우리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나에게 들어와 어떻게 멋진 사람이 되는가가 아니라 그냥 피조물이라면,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듯이 그냥 주님을 향하는 곳에 눈길을 보내는 것으로 대 만족을 해야 합니다. 다른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그것으로만 크게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 강의하는 것이 순하게 넘어올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가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가 서로 다르기에 충돌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물어봅니다. 속으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의롭다 하면 기분이 상쾌하여 집니까? 그것이 희한한 일이지요!
돈을 주는 것도 기분이 좋지만 그러나 그것은 무언가 천박한 기분이 들지만 그러나 당신은 참 의롭습니다. 정의롭습니다. 훌륭합니다. 어떤 힘을 쓴다는 것보다 참 착합니다. 이런 말이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야구선수 이승엽 선수에게 홈런을 잘 칩니다하면 그것이 기분이 좋겠지만 더 기분이 좋은 것은 정말 착하십니다. 하면 정말 기분이 상쾌하여 지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착하다는 말에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갑자기 반응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소리 들으면 기분이 좋으면서 그것이 우리 자신이며 그 인간이면서 우리 자신이 왜 의롭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지를 스스로 연구하고 탐색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나의 이야기이고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인데 깊이 한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왜 의롭다 하고, 정직하고 훌륭하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지를 흔히들 성경에서 내리는 결론을 보면, 이렇게 정의를 내리는 사람도 드뭅니다마는,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선과 지식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성경 창세기 3장에 나오니까 우리는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선과 악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되는데, 선과 악을 가지고 있습니다하면 기분이 별로인데 왜 갑자기 대단히 선하십니다. 하면 기분이 좋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누구를 만났는가 하면 아담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기에서 선악을 아는 지식만이 아니라 부끄러움, 수치라는 말이 나오고 그 다음에 피하여 숨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선악의 지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선악과가 우리 몸에 무슨 약물처럼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데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가 하면, 왠지 오늘은 무언가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이것이 우리의 최초의 조상인 아담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피하여 가리고 숨는다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면 당당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한 동네가 어느 동네인가 하면 가인의 후예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이 계시는 그 땅을 떠나서 하나님을 모르는 세계로 가서 누가 힘이 센가 하면서 힘을 겨루는 가인의 도시를 건설합니다.
그러나 그 앞의 이야기 가인도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 튕겨버리시니 안색이 변하여 동생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껍데기가 인간이라고 해서 인간으로 보지 말고 보지 말고 그 껍데기 안에 어떤 알맹이가 들어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이런 알맹이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부끄러워하고 피하여 숨는 그러한 본심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이 죄인 된 인간들의 대대로 내려오는 본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해서 방금 이야기한 이 전체를 한마디로 하면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언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어 보아도 정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시면 무서워서 다 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타고 재림하실 때에 그들은 바위틈에 숨고 두려워서 어찌할 줄 모르게 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그들은 대처할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자기를 숨길 수 있는 방주는 이미 문이 닫히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달랑 여덟 사람, 한 가정만 태우고 방주는 떠나버리고 나머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자기를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마지막 때에 복음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않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방주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인간은 어린애나 어른이나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이란 나쁜 것만 매일 생각한다는 뜻에서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것을 피하여 도망치는 그러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보면 등록했다가 안 나오는 사람이 삼분의 일이 넘습니다. 장로님이 주소록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끝 페이지에 따로 모아두었는데 교회에 등록을 했다가 안 나오는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다. 우리교회가 복음을 전하다가 복음 아닌 다른 것을 전하여 그런 것이 아니고 , 그 사람들이 다른 교회에 복음 있다고 해서 간 것도 아니고, 그냥 안 나오는 것입니다.
피하자는 것입니다. 대다수가 가는 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앞에 서면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발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정상이 아닌 것이 발각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마음 편하게, 남이 짐승이라고 하든 무어라고 하든,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 나가고 월급타고 아이들 피아노 시키고 공부시키고 TV좀 보다가 밤 되면 자고, 노는 날은 가족들 깨워서 가족들 위로한다고 낚시도 가고 등산도 가고 먼 여행도 가는 것입니다. 그동안 못 만난 친구들 만나서 잡답도 하고 그렇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며 의미가 무엇인지 그런 소리도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직장 나가서 월급타서 토끼 같은 애들 키우고 자기 아내 있고, 집안의 경조사 있으면 도와주고 너 없으면 일이 안된다는 말을 듣고, 벌초도 하면서 집안 어른들에게 눈도장 받아 칭찬을 듣고, 며느리 같으면 노는 날마다 잡채 같은 것 해가서 효부소리 듣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아들이나 딸보다 낫다는 그런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다가, 교회 와서 들어보니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된 것인 줄을 안 들었으면 몰랐을 텐데 듣게 되니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창세기 1장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인간을 만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앞서서 일하셨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분명히 있고 지금 있는 것들은 날아가 버리는데, 중요한 것은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만한 새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인데, 그런 소리 안 들으려고 교회도 안 가고 성경도 덮어버리면 그런 일은 없는 것이 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그게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못 들었는데요! 그러는 것입니다.
이 앞의 길에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이 많이 있습니다. 길을 건너다가 사고가 많이 나기에 동에서 육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육교로 다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나는 귀가 어두워서 못 들었다고 하면서 자신은 육교로 건너지 않고 길로 건너면 차가 스톱해 줍니까? 아니지요!
그러니까 차라리 기존교회 가서 신은 계시는데 바치면 복주고 정성 바치면 복주는 그런 하나님, 기도하면 다 주신다고 하는 그런 것은 나에게 직접 간섭을 안 하니 내가 아쉬울 때만 가면 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가면 내가 아쉬운지 아니 아쉬운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근본과 뿌리와 사람의 목적과 어디서 출생했으며 하나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쏘아 붙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니까! 그것은 엑스레이 찍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이런 뜻입니다. 말기 위암환자라면 그 위암을 안고 장렬하게 폭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위암 고칠 생각 안하고 의사 필요 없다면서 나 그냥 죽을게 하는 것입니다. 내 하나 죽으면 그만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기에게 마음 편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꾸만 거부하고 토해내고 무언가 안 듣고 싶어 하는 그러한 세력이 있습니다. 무슨 복음적으로 보면 악마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마귀인줄 모르고 어쨌든 간에 이 하나님의 소식에 대하여서는 나에게 좀 안 들려오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교회 없는데 예수님이 눈에 안 뛰는 곳에 절만 수두룩하게 있는 데, 만나는 사람도 예수 안 믿는 사람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 자기보다 더 천박하게 사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놀라운 것은 남이 나를 보고 착합니다. 하면 기분이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방금 길게 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그 자체의 상태에서도 내 자신이 의롭게 되고 싶은 그러한 충동, 이왕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된 이상, 이 인간으로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것이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고자 한 그 처음의 품성이 녹록하게 살아있어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불신자 이야기를 쭉 이야기 하였지만 소위 교회 다니는 신자라는 사람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도 다 그런 품성과 본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방법상 세상 사람들이 나를 훌륭하다는 그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리는 것처럼, 소위 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여주는 것이 기분 좋게 될 때에 그것이 성경적이냐고 따지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상당히 어렵게 되어버리지요!
방금 불신자들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는 판정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관계를 끊어놓고서 그 상태에서 나는 의롭고 훌륭하고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불신자에게 있다고 하였지요!
그러면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 불신자들보다 낫습니까?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의롭다고 하여주는 것이 기분이 좋은 것처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그 소리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고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그 소리가 썩 기분이 좋게 신나게 들리는 그런 어떤 욕구가 있다면 성경적으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 말은! 제가 너무 기를 죽이는 것 같아서 살짝 미안합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왜 사람은 죽는 주제에 의롭다 하는 것은 왜 그렇게 고대하고 기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주제와 분수도 모르는 체 자꾸 의롭다 하는 그것을 좋아하느냐는 것입니다.
쉽게 해 봅시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예수님에게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아부했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 옆에서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신 약속을 그 사람은 믿고 있었습니다. 자기 하나 의롭게 되고자 하는 탐욕이 발생하여 잠시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 의롭게 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냉정하게, 단출하게, 딴 생각하지 말고 나를 거기에 집어넣어 의롭게 되고 싶다는 그런 욕망을 집어넣지 말고 성경 그대로 증거 하라고 했지요! 성경 그대로 증거 하면 무엇이 있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해줄 인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성경의 말씀을 나의 욕망과 결부시키지 말고 그대로 믿고 증거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감이 오십니까? 제가 처음에 이야기 하였습니다. 성경 읽고 그것에서 나에게 무슨 이득이 올까 그것을 챙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렇게 보면 성경의 본 뜻이 훼손이 됩니다. 그것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의 통로 파이프에 불과한 것입니다. 파이프가 물을 잡아두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대로 흘러가게 두어야 합니다. 성경이라는 뜻이 나라는 파이프를 통하여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요것이 내 것이라고 잡지 마시고!
아 누가 나를 의롭다 해주면 좋겠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것은 욕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용하려고 마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를 통하여 그냥 흘려보내시면, 그것이 바로 하나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소리다. 무슨 소리? 예수님의 말씀을 통과시키는 소리다! 하나의 메가폰이라는 것입니다. 영화 찍을 때 레디고 하는 그런 메가폰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이런 메가폰 알지요! 소리 크게 하는 메가폰!
우리는 예수님의 메가폰으로서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확산되고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중간에 잡아채서 자기 의로움으로 고착시키려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위주로 왜곡되어서 증거 됩니다. 이것 아주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자기를 사랑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어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상태 자기를 부인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꾸만 누구 편을 들면 함께 그 사람의 영광을 같이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싫어하십니다.
나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나에게 무엇을 줄 것입니까? 나를 의롭다고 해 주시겠습니까? 신난다. 이런 것을 자꾸 계산에 넣으시면 하나님의 의가 순수하게 증거 되지 못합니다.
방금까지 말씀드린 이런 내용이 과연 그러한지를 창세기 15장을 봅니다. 제가 신신당부하는 이것도 힘들어요! 신신당부하면서 우리의 본성은 너무나 자기 절대화를 추구한다고 당부에 당부를 하지만 나중에 질문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꼭 자기를 개입시켜서 하는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창세기 15:6-7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게 이끌어낸 여호와 로라”고 되어 있지요! 갈라디아에서 이 대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인용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는가 하면 창세기 15:1절을 보면,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약속이 먼저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의인이 되었다고 단정 지을 때에 아브람이 무엇을 하였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서 앞으로 아브람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의인됨에 있어서 변경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주어진 그 의가 수정되거나 취소되는 일이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에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어떤 행위를 문제 삼지 않고 비록 자기 행위가 엉망진창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있어 계속하여 하나님의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수납하고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데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차를 몰고 가는데 오른쪽으로 가야하는데 잠시 착각하여 왼쪽 길로 가서 먼 길을 돌아가게 되었다면 운전하는 사람은 상당히 기분이 나쁘지요! 하나님 아버지 제가 운전 처음 할 때 기도했는데 왜 오늘 쪽 길로 안 가게하고 착각하게 해서 왼쪽 길로 가게 만드시는 것입니까? 하면서 식식거리면서 제가 이래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시간낭비 기름낭비하면서도 네가 나를 믿느냐? 네가 너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너를 향한 뜻은 변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네가 믿느냐고 요구하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 아니면 못 믿습니다. 진짜 신자가 아니면 못 믿습니다. 그런 중에서 아하! 하나님께서 나를 믿는지 안 믿는지 시험하시려고 오른 쪽으로 가야 하는데 왼 쪽 길로 가게 해서 나로 짜증이 나게 해서 틱틱거리며 가다가 이것을 깨닫고서 아하!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지 내가 잠시 그것을 잊었구나! 하면서 웃으면서 기쁨으로 할렐루야 하고 오다가 차를 박아 버린 것입니다.
안전거리 유지하지 않아서 사고를 내었습니다. 보험료 올리지, 미안하다 해야지, 한 30만원 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휘파람 불면서 할렐루야 하다가 차를 박아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 손해와 돈 손해까지 났습니다. 거기서 한 오 분 간 씩씩대다가 아하 이것도 시험이었구나! 내가 이런 것도 이길 수 있어야지 하면서 가다가 전봇대 받아서 옆의 아내가 죽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식이 죽지요! 사람은 자신의 극한을 모릅니다. 사람은 자기의 뿌리를 자기가 모릅니다. 자기의 뿌리를 모르기에 많은 사람과 어울려 대충 살려고 합니다. 교회는 나가지 않더라도 남에게 훌륭합니다. 착합니다. 그런 칭찬소리 들어가면서 직장 생활 충실하고, 아이들 공부 잘하고 피아노 학원 잘 보내고 과외 잘 시키고, 살림 잘 살고 시가집에 잘하고 친정에 잘하고 그것이 자기 속성에 맞는 것입니다.
그게 왠지 편한 것입니다. 교회 와서 목사 설교 듣는 것보다 집에서 연속극이나 보면서 친구나 동창생들과 보내는 것이 편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뿌리를 모릅니다. 그냥 세월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터넷이나 텔레비전 쇼핑몰 보면서 쇼핑하고 신문에 쿠폰 나오면 그것 오려서 살림에 보태고, 양말을 꿰매어 신고 콩나물 값 한 푼이라고 깎고 그래서 애 키우는 재미 남편 승진하는 재미, 이것은 인간이 왜 죽느냐? 예수님이 왜 구름타고 오시느냐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몸이 당기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편한 것입니다. 왜 라고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욕망이 가는대로 편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떤 어려움이 오게 되고 죽음의 위기가 오게 되면 다 남 탓이고 국가 탓이지 자기 탓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 탓으로 돌리자면 자기의 죄를 발견해야 하는데 그 동안 너무나 착실하게 살아왔기에 자기 죄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가 발견되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상사가 일어난 것은 국가를 탓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걸핏하면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거는 것입니다. 자기 돈 한 푼 안 내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그 아들이 연세대 본과 의대생인데 친구와 싸우다가 맞아서 즉사하였습니다. 연세대 의대생이면 얼마나 장래가 촉망이 됩니까? 그런데 그 가해자도 같은 연세대 학생인데 이미 죽은 자식인데 그 아이 고발해서 그 아이 장래를 망치기보다는 자기 아들이 목욕탕에서 넘어져서 사고로 죽은 것으로 해서 돈 한 푼 안받고 쉬쉬하면서 끝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연세대를 상대로 보상받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상주에서 밟혀죽은 자들에 대하여서도 보상 문제 나오겠지요! 요즈음은 돈벌이가 안 되니 보상으로 돈벌이 하려고 합니다. 여기 오다가 보니 재개발한다는 현수막이 붙어있던데 그럴 때에는 끝까지 나가지 않고 버티면 두 배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 개발됩니까? 예, 좋겠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ㅎㅎ
믿는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을 믿는 것이지 이 땅에서 나 중심으로 옳고 그름과 축복과 저주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큰 나라가 여로보암 2세 때였습니다. 엄청나게 커서 다윗 때보다 더 큰 나라가 되었지만 가장 부패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웃시야 시대나 아하시야 시대에 나라가 컸지만 엉망진창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솔로몬 때 나라가 그렇게 부강하였지요! 백성들을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부하시기를 너희가 가나안에 가서 잘 먹고 잘살아 배부르게 될 때에 나 여호와의 언약을 잊어버릴까봐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면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여기 길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붙들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아십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이 옆집에 한번 물어볼까요? 하나님의 새 언약에서 아십니까?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삽니까? 하고서 물어보면 그저 아침에 직장가고 저녁에 와서 밥 먹고 자고 그러는 것입니다. 인생의 뿌리를 모릅니다. 자기 자신 편한 것 밖에 모릅니다. 그러다가 일 터지면 다 하나님 탓이고 이웃 탓이고 남 탓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저나 여러분도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희한하게도 하나님의 맹세와 언약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모든 능력을 초월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하나님의 맹세가 아브라함에게 뒤집어 씌워지니까 아브라함이 그 맹세 안에서 끝까지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의가 되었다는 그 통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혀지는 것임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의 메가폰이라고 하였지요!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전달되면서 결국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예수님의 의가 되고 그 예수님의 의가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우리의 의로 전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렇게 많아도 하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오직 한 사람만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모든 맹세를 그분이 홀로 독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모든 자가 의인이 된다는 것이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아까 차를 모는 예를 들었지만 그런 예가 무언가 섬뜩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납득이 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예가 실제상황으로 나에게 일어난다면, 내가 운전하는데 나의 운전과실로 내 아내가 죽게 되었을 때에, 내가 과연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은 제가 첫 시간부터 누누이 강조한 성경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변개시키지 말아달라는 그 부탁에 또 저촉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죽었는데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나도 모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가 그 시점에 그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에 부닥칠 때 이렇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는 그런 방법의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쉬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고 아내 죽는 것도 하나님이고 거기서 아내가 죽더라고 예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기에 제가 그것을 어떻게 가타부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 당해봐야 아는데, 그렇다면 내가 그런 일을 당하여 다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노골적으로 배신한다면 성경에서 의롭다고 한 이야기가 헛소리가 되겠네요! 그다음부터 교회도 나오지 않고 아까 이야기한 세상 사람들처럼 직장 나가고 편안하게 살면서 남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나 들어가면서 살면서 끝났다면 나는 천당은 다 갔네요! 하면서 걱정을 하시는데, 아마 그런 걱정을 아브라함도 했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위로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걱정까지 아브라함이 했는데 그럴 때 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만약에 나에게 개입을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개입을 안 하면 할 수 없지요 뭐! 제가 개입하라고 압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약간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지옥 보내시겠다고 하시면 목사가 나서서 말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기분으로 목회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 듣기 싫다고 안 나오는 것에 대하여서는 목사가 어떻게 말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답답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기뻐하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렇게 저주하시는데 내가 같이 동조나 해 주어야지, 하나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데 하면서 제가 관여하고 싶지를 않습니다. 왜? 그것도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한 오 분 쉬면서 정신 가다듬어 봅시다. 녹취 060323 이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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