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사 9: 1- 4 (빛과 어두움)
Re..사 9: 1- 4 (빛과 어두움)
이름 : 이근호(IP:)
029강-사9장,1-4,(빛과,어두움)-isa060322
빛과 어두움
2006년 3월 22일
설교 본문: 이사야 9:1-4
(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 9: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사 9:4)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세상의 가치를 하나로 본다면 우리가 구태여 긴장할 필요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두 개의 서로 반대되는 성질로 구분된다면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빛이 등장하고, 그 반대되는 성질인 어두움이 드러나 있습니다. 자, 과연 우리가 빛에 속한 자인가 아니면 어두움에 속한 자이냐가 관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면, 특정 개개인을 지목해서 어두움에 속했다고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지역 전체를 ‘어두움’에 속했다고 판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빛되신 분이 등장할 때만 특별하게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혹은 지역과 지역이 상호 경쟁해서 빛과 어두움을 구분짓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투입되는 빛되신 분에 의해서 특정 지역이 ‘어두움’에 속했다고 단정짓는 것을 봐서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자질을 문제 삼는 분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 자체에 대해서 속성상 어두움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는 나름대로 사람들을 놓고 가치를 평가할 때, 빛과 어두움으로 자체적으로 평가합니다. 어느 정도 인간답게 살게 되었으면 환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고, 참으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으면 칙칙하게 어두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분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들게 경쟁을 해서라도 어두운 생활을 빨리 청산해서 빛으로 대우받는 세계로 나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그야말로 전쟁터입니다. 생존을 노린 전쟁터입니다. 승리자는 ‘빛의 백성’이라는 영광을 누릴 것이고, 패배자는 ‘어두운 운명의 소지자’라는 낙인이 찍힐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간들 끼리 전쟁해서 나온 결과는 하나님에게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전쟁을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자체적으로 전쟁을 해서 승리자가 되어도 최후에는 필히 죽음 앞에 패배하도록 되어 있는 운명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처음과 나중도 늘 죽음의 그늘진 곳에 헤매고 몸부림치는 군상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도저히 ‘빛의 백성’이라고 불러 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유일한 빛이요 혼자 만의 빛이지 빛이 외부에서 이 어두움에 속한 이 세상에 등장해서 제대로 빛된 백성을 데려가기 위한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그 전쟁의 과정은 바로 예수님의 육신의 길이었습니다.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세상 전체가 달려들어 억눌러버린 그 죽음에서 보란듯이 사흘 만에 무덤을 박차고 승리하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빛 되심에 대해서 그 누구도 시비걸 수 없게 되었고, 또한 그 분의 빛된 활동에 대해서 그 누구도 방해자로 나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활의 능력이 죽음의 그늘진 곳에서 하염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자녀들을 포획하여 죽음의 세력이 아무리 붙들어도 소용없도록 만들어 버리십니다.
성도는 일종의 주님이 벌리신 전쟁터의 전리품인 셈입니다. 그 비유가 마태복음 12:28-29에 나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사람이 천국이 들어가는 것은 자기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두움의 권세에 눌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빛이 오게 되면 어두움은 더 이상 자기 어두움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잠이란 빛 앞에서 깨어나는 법입니다. 에베소서 5:14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빛의 자녀가 깨어나야 하는 그 영역은 바로 ‘죽은 자들’ 속입니다. 이것은 빛의 자녀가 된 자 빼놓고서는 나머지 그들은 모두 ‘죽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살아있어도 어두움에 그냥 묻혀 있는 삶이요 죽음 속에서 갇혀 있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5:8에 보면,“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빛의 자녀가 자랑할 것이라고는 외부의 빛이 자신에게 다가왔기에 비로서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고백 뿐입니다. 요한복음 3:21에 보면,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참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예수님만이 빛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찾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빛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빛으로 포획시키기 위해 주님은 어떤 전쟁을 어떤 식으로 벌리신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미디안의 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사시대 때,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들과 싸웠던 그 장면을 말씀하는 겁니다. 변변치 못한 평범한 사람 기드온이 어떻게해서 이스라엘을 진두지휘하는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막강한 미디안 군대를 물리쳤는지가 잘 나와있습니다.
그 때 기드온을 추종하는 소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디안과의 밤 중의 전쟁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외쳐야했습니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들이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은 칼이 아닙니다. 오로지 횃불과 항아리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기드온의 칼, 여호와의 칼“이라고 외쳐야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 행한 것도 없이 구원되었던 그들 본인들이 바로 여호와의 전쟁에서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무지, 즉 칼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은 그 자녀들의 존재 자체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나 하나님의 무기, 곧 칼이 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점을 모르고 따로 긴 칼이라도 차고 다녀야 하나님의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들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라고해도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라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겁니다. 자력이나 개인적인 자질과 무관합니다. 빛되시는 예수님의 활동을 막아 설 그 어떤 인위적 조건도 없음을 명심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생생하게 살아있고, 싱싱하게 살아있는 여호와의 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