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40531 부산강의-어거스틴
Re..20040531 부산강의-어거스틴
이름 : 한윤범(IP:)
20040531 부산강의-어거스틴
(강사:이근호 목사)
68페이지, 어거스틴부터 하겠습니다.
구득영 목사님은 차분하게 이 책을 다 교정보신다고 힘든 작업을 하시면서 하나하나 봤기 때문에 대충 흐름이라든지 내용에 대해서 짐작을 하시겠습니다만 이 책을 한번 보게 되면, 사람이 공부를 안 하면 자꾸 좁게 생각해요. 자기 코앞에 있는 거, 눈앞에 있는 거, 그것에 매이게 되고, 그것에 매이게 되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느냐 하면, 조그만 자기 소망이 잘 안되면 자기가 자기를 실패자로 간주하고 무가치한 자로 간주하고 뭐, 신앙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 뜻대로, 원대로 안 된다고 짜증을 내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이런 책들을 쭉 보면, 사적인 문제가 참으로 말 그대로 사사로운 문제입니다. 여기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이러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은 사적인 개인의 영달이나 개인이 얼마나 뭘 가질 것이냐, 획득할 것이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 받은 것처럼. 마귀는 예수님의 사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너 죽는 데이! 굶어 죽는다 말이야. 예수님은 아버지의 넓은 뜻을 생각하고 사적인 문제와 넓은 뜻에 관한 문제에요. 너, 탐 안나나? 세상 부귀영화 탐나잖아. 사람들의 인기 좋잖아. 왜 그걸 외면해. 마귀는 작은 문제, 사적인 문제를 거론하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변함없는 뜻을 이루기 위해서 거기에 관심을 두고.
그래서 이런 공부를 미리 하게 되면,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이 사람들이 개인적인 건강 문제라든지, 지위 문제라든지, 남들한테 어떤 인기 영합하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어떻게 대중들에게 설파하느냐, 그걸 어떻게 알리느냐 거기에 치중을 하죠. 굉장히 넓게 살았죠. 넓게 산다는 것은 작은 변화에 대해서 마음 조아린다든지, 그것 가지고 깜짝깜짝 놀랜다든지, 조바심을 낸다든지 그런 식으로 자기 마음을 황폐화시키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대가들, 공부를 그 당시에 많이 했던 사람들, 토마스 아퀴나스 이런 사람들이 지금은 인기 좋죠. 그 당시엔 인기 좋은 사람 아니었어요. 항상 권력 밖에서, 공부란 것은 권력과 관계없이 해야 돼요. 권력과 관계있다 보니까 권력자들이 가만 두질 않지요. 그러한 수모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진리에 대해서 어떻게 정립을 해나갈 것인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68페이지부터 교재가 있으니까 우리가 한번 봅시다. [중세철학의 참에 해당되는, 진리에 해당되는 형이상학적 실재가 신으로 표상되었다면 신과 세계의 관계]
이게 문제에요. 진실은, 진리는 신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가 이 세상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펼쳐지느냐 그 문제에요. 진리는, 신이 진리이고, 신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다 알지만 그것이 어떻게 지상의 진리로서 땅의 진리로서 어떻게 흐르고 있느냐 말이죠. 그 과정이 무엇이냐? 거기에 대한 논쟁들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사실은 이 궁금증은 오늘날 교회에서 여전합니다. 신을 믿는다고 모인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고 해놓고는 자신들의 모든 행동이 성경과 위반, 위배되는 그런 걸 했을 때에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왜곡된, 어떤 과정들을 거쳤기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저런 진리들이 나오는가?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고방식이 행여 우리도 그걸 갖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지요.
여기 68페이지 중간에 보면, [신이란 피조물의 영원이 찾고 있는 행복의 원천이란 것이다.]
상당히 대중들을 감안했죠. 대중들에게 신이란 무엇인가 관심이 없거든요. 대중들은 신을 찾는 것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찾기 때문에 행복도 신이 보장해 준다는 것을 그것을 하나의 상품으로 어거스틴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변화하는 가시적 세계의 아름다움은 불변하는 미에 대한 창조이고 반영임을 감각물들이 고백하고 있다.]
행복이란 것은 어떤 때 행복하냐 하면, 아름다울 때 행복하다. 라는 것은 헬라 철학에서 이미 나왔다 말이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왔던 거예요. 아름다운 걸 볼 때에 행복하다 이 말이죠.
행복이라 하는 것은 돈을 가질 때 행복이라 하지만 그 정도는 그것을 하나의 탐욕이라 하는 것을 그 당시에 상식으로 아니까. 진정한 행복이란 아름다운 마음씨,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육체, 얼짱, 몸짱, 그런 걸 갖고 있을 때 아름답다고 하잖아요. 배 불룩 튀어나온 아줌마들 걸음걸이를 보고서 야, 아름다워라. 오늘 왜 이렇게 행복하노. 이런 사람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는 것은 뭔가 남한테 보여줄 아름다운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밥 퍼주는 사람, 얼마나 아름다운 요소꺼리가 되잖아요. 꽃동네, 아름다운 요소가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가려고 하는 것은 이 한국 땅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이 먹혀들지 않을 때 자기 존재가치가 사라지고, 자기 존재가치가 사라지면 자신의 장점을 안 알아 줬을 때는 스스로 불행을 비극을 느끼고 그 비극을 모면하고 행복을 찾기 위해서 자기가 환영해 줄 그러한 대상을 찾아 먼 타국으로 갑니다. 바로 그러한 과정을 그들은 어디다 핑계를 대느냐 하면, 신의 뜻이다.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름답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참혹하지 아름답지 않지요. 십자가가 아름답게 보인다? 그거 좀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돼요. 만약에 돌 뿌리에 팍 엎어져서 코피 나고 이빨 깨져 보세요. 피범벅 돼 보세요. 그게 아름답습니까? 흉측하지요. 십자가는 흉측하지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것이 흠모할 것이 없어요.
그리고 그 십자가 사형 틀을 통해서 사람들은 뭘 느끼느냐 하면, 권력의 실제를 느끼지요. 아하, 까불면 맞는구나. 이 사회가 지가 성질난다고 이야기 다 내뱉어서는 안 되겠구나. 이 사회가 그냥 텅텅 빈 공간의 사회가 아니라 막강한 권력이 꽉 들어차 있는 그러한 세상이구나. 아아, 행동에 말에 좀 조심해야 되겠다. 까불다간 예수라는 청년처럼 그렇게 완전히 참혹하게 당한다. 그런 것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그 당시 제사장들은 그런 것을 대중들에게 암시하는 그 의도로서 본때를 보인 거지요. 요새는 노회하는 사람들 마찬가지로. 단 칼에 잘라버림으로서 질서를 회복하는 거지요. 거기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습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준 것은 뭐냐 하면, 하늘의 진정한 진리의 아름다움은 이 땅에 전혀 아름답지 않아요. 괜히 낭만적인 생각을 하지 마세요. 제가 크로스빌리지에 글을 쓴 것처럼 이 땅에서 지옥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천국 백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는데 그 고난이 흘러 들어왔으면 뭔가 모든 인식 자체가 180도 달라져야 됩니다.
여기 68페이지에 밑에서 열 번째 줄에 보면 나오지요. [이처럼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을 명확하게 구별하기보다는 전자는 후자의 관계에서 그리고 후자를 통해서 완성된다.]
보세요. 어거스틴은 자연신학와 계시신학을 하나로 통합을 시도한 겁니다. 통합을 시도해야 신이 신답지요. 신은 노는 분이 아니잖아요. 신은 일 하잖아요. 어디 안에서? 자연 안에서. 자연 안에서 신이 일한다는 말은, 어디 나무를 구원하거나, 물고기를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점유하고 있는 인간의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신의 살아계심과 그의 일하심이 어떤 계시로서 우리에게 작용하느냐? 그걸 파악할 수 있어야 신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방금 본 것에서 위로 올라가 봅시다. 여기 어거스틴은 [신이 창조하여 보존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새로 증명할 필요 없다.]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플라톤 사상이기 때문에 새로 증명할 필요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신앙인들에게 알려주느냐?
[이런 태도는 신앙우선주의 입장을 따라 호교론에서부터 예견되었고 초대 교부들은 문화적 계보의 차이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지녔던 태도였다. 그런데 신은 이미 존재할 뿐 아니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장 크고 높은 존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냐?]
가장 크고 높은 존재라는 것이 신은 가장 크고 높은 존재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야? 그게 우리한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그걸 아는 것이 행복이다. 이 말입니다. 내가 신을 알기 전까지는 행복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신을 알고부터 비로소 내 영혼은 안식했다. 어거스틴이 많이 수상하지요.
여기 밑에 내려가 봅시다. 찾아보세요. 가장 크고 높은 존재를 행복의 원천, 거기 나오지요. 그 밑에, 밑에, 밑에. [가장 크고 높은 존재를 행복의 원천으로 삼고 싶어 하는 인간의 종교적 욕망에 대한 재평가해야 한다.] 이렇게 나오지요.
최고의 복이 뭐냐? 완전성, 영원성, 무한성. 그러니까 제가 여러 번 부산강의를 통해서 이야기했잖아요. 이 삼위일체도 그렇고 중세철학도 그렇고 항상 출발점을 어디서 합니까? 인간이 이미 은근히 원하고 있던 신성, 인간 속에 신을 향한 신성이죠. 신을 향한 염원이 있어요. 그 염원을 누가? 누가 들어줘요? 신학자들이 잘 구슬리고 그들에게 원하는 모든 논리를 제공해 줄 때 그들은 자기 속에 신이 있고 내가 신을 안다는 행복감에 젖을 수 있겠죠.
그리고 왜 신을 아는 게 행복이냐 하면, 신을 뭐로 보냐 하면, 지복. 지극히 큰 복으로 이미 간주했잖아요. 지극히 큰 복으로 안다는 말은, 신을 안다는 말은 이미 그 복을 따먹을 수 있다는 이 말이거든요.
쉽게 이야기합시다. 왜 신을 믿습니까? 최고의 행복이기 때문에. 왜 신이 최고의 행복입니까? 신 안에서 내 영혼의 안식을 얻기 때문에. 신을 생각할 때 나는 행복하기 그지없다. 라는 인간의 본래적 심성을 이제부터는 어떤 작업에 들어 가냐 하면, 그걸 논리적으로 정리해서 되돌려주는 작업을 누가 한다? 신학자들이 함으로써 소비자와 생산자가 딱딱 생각이 맞지요. 그래서 참, 이게 뭡니까? 도대체 둘이 죽이 잘 맞지요.
신이라 하는 것은 로마서 1장에 의하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신의 존재에 대해서 다 알고 있고. 신의 존재만 아는 게 아니라 신은 나의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구약에 보면 뭐라고? 이방민족들이 갖고 있는 우상입니다. 지금 우상을 척결해야 될 책임에 있는 자들이 우상을 아주 멋들어지게 화려한 개념적 장식을 더해서 데코레이션 해서 민중들에게 훌륭하십니다. 장하십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다니. 아이고, 대단합니다. 착하십니다. 아주 좋은 상품 만들어 되돌려 준다 말입니다.
여기 69페이지 봅시다. 새 책 나오니 이렇게 기분 좋은 걸. 척척 넘어가는데. 위에서 다섯 번째, 네 번째 줄. [즉 철학과 신학이 공유하고 있는 전제인 본질의 선재성이 그 자체에서의 신에 ‘있음’ 뿐만 아니라 세계 창조에서의 신의 앎에 대해서 여지없이 확실하게 적용한다.]
신의 존재하는 신은 그분은 어떤 분이냐 까지 알려줌으로서 확실하게 대중들에게 민중들에게 당신은 신의 자녀입니다. 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새길 수 있는 그러한 작업에 종사한 자들이 바로 신학자들이요, 그 당시의 중세철학자들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대했는가? 그게 신 존재 증명이에요. 신 존재 증명을 신학자들이 안셀무스 같은 사람, 어거스틴, 플라톤, 토마스 아퀴나스를 제시함으로 말미암아 그 논쟁을 따라 가면 결국 어디에 도착합니까? 신의 나라에 도착하기 때문에 얼마나 이게 기분 좋은 발걸음이에요.
신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이 존재는 다 아는 거고, 문제가 뭘 몰라요? 신의 앎에 대해선 논리적으로 증명이 안 되잖아요. 알긴 아는데. 그걸 신학자들이 수고를 해서 그 논리적 단계, 3단계를 깔아 놓으면 해결할 필요도 없어. 성령 받을 필요도 없고. 그들이 말하는 논리를 지상에서 하늘까지 차곡차곡 밟아나가면 결국 어디에 도착합니까? 신학자들이 알고 있는 신학자들은 신을 증명해 내버렸으니까. 소위 말하는 별 따고 달 따서 그들이 갖고 있으니까. 신학자들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거기 어디에 도착합니까? 신의 나라에 천국에 도착하는 거예요.
오늘날 부흥사, 목사들과 똑같아요. 목사, 부흥사들이 하는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해서 삶은 이렇습니다. 이야기해야지. 나를 따라와 봐봐. 나 따라 해보면 오지. 그걸 누가 못해요.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하고 누가 못해요. 그걸 누가 못해요. 다하지.
믿음이라하는 것은 논리가 끊어졌다는, 다리가 끊어졌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만약에 다리가 이어졌다면 그건 믿습니다, 믿습니다, 백날 이어져도 그건 행함이에요. 믿음이라하는 것은 완전히 다리가 끊어진 거예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또 나와요.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 보면, 어거스틴은 대중들의, 인간의 행복은 어디 있다? 신을 존재하는 것에서 멈추면 행복이 없고, 어디 까지 나와야 된다? 신을 아는 데까지 나오는데 그 신을 아는 것에 대해서는 자기가 한 지식하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주기 위해서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거예요.
69페이지 밑에서 12번째 줄에, 그 위에 봅시다. 플로티누스라는 사람과 어거스틴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플로티누스는 뭐냐 하면, 세계창조는 없는 데서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는 데서 있는 것이 돼버려요. 이게 지금에 와서는 플로티누스가 우세인데요. 없는 데서는 있는 것이 안 생기지요. 없는 데서는 있는 것이 생길 수가 없지요. 뭔가 있어야 뭐가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신의 있음이 있음에 해당되는 거지요. 아시겠습니까? 없는 것에서 있어 버리면 그 논리적 고리를 지금 연결시켜 줘야 되는데 그 연결이 어떻게 돼요? 끊어지잖아요. 있는 데서 있는 것이 출발해야 되는데 그 있음에 대해서 플로티누스라는 철학자는 현재 자연 있음, 이걸 가지고 있음으로 봤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계심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출발한 겁니다. 하나님이 계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셨는데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무에서 창조했다. 자, 이렇게 돼버리면 신은 어디에서 빠져버립니까? 피조세계에서 빠져버리죠. 피조물에서 빠져 버리면서 피조세계와 창조주와 확연하게 쫙 갈라지겠죠. 서로 대치하면서 갈라지겠죠. 그런데 앞에 있는 헬라철학자들은 뭡니까? 자연 그것 자체가 신이고 신과 자연은 하나가 되어 있어요. 쫙 갈라진 게 아니에요.
만약에 철학가들이 어거스틴한테 이렇게 질문할 겁니다. 신이 천지를 없는데서 창조했다면서요? 창조했지요. 그러면 피조물이 없는 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있음은 다시 없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있음은 있음으로 끝나는 거지요.
지금 헬라철학은 전부가 있음이라는 한 세계 아래 아닙니까? 그런데 어거스틴은 하나님 세계 따로 있고 무슨 세계? 하나님에게서 만든 세계, 피조세계가 따로 있지요. 있음의 세계가 따로 있지요. 그러면 이 피조세계에서 이리로 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에서 나왔기 때문에 못 가잖아요.
가루를 아무리 빻아 봐야 가루되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 말이지요. 더 부수면 눈에 안 보이지 있기는 있다 말이지요. 이게 진정한 질량 불변의 법칙 아닙니까? 있는 것은 백날 흩어나 봐야 맨 있어요. 어디 흩어졌다 뿐이지. 있는 것은 없게 되지는 안는다 말이죠. 왜냐하면 이미 있기 때문에 어느 구석에 가도 연기가 돼든 불에 타든 항상 있어요. 그러면 이 세계에서 이리로 못 가지요. 이 세계로 못 간단 말은 이 세계에서 이리고 올 수도 없다는 이 말입니다. 왜? 떨어졌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해서 하나님이 없는 데서 세상을 만들었다는 이 자체는 논리로는 허락이 안 되지요. 불가요. 허락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이는 허락이 될 수 없지요. 이쪽에서 못 가면 이쪽에서 못 오는 게 마찬가지란 말이죠. 만약에 이쪽에 와 버리면 신은 뭡니까? 세계 속에 저거들 말에 의하면, 세계 안에 하나 되기 때문에 오히려 이쪽이 맞지요.
다같이 있는 세계에서 한 쪽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이해되는데 그러면 헬라철학처럼 이렇게 다같이 신과 자연이 한 세계였다, 한 세계였는데 신이 자연을 만들고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곧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왕 같이 한 식구기 때문에 인간이 추진해 나가면 어디에 도달할 수 있다? 신까지 도달할 수 있겠지요. 같은 있는 세계니까? 여기서 길이 나왔다 하면, 이 길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없는 데서 생겨 버리면 없는 놈이 생겨 버리니까 신에게 못 가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가 자기 스스로 자기 존재를 돌릴 수 있는 재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김용옥 교수는 모든 것이 변화할 뿐이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양태, 양태론이에요. 양태, 형태만 변화된다는 거죠. 뭐로? 기. 요즘 말로 에너지로 달라질 뿐이지, 형태가 달라질 뿐이지 그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옛날 헬라철학에서 천지를 창조할 때는 신이 어떻게 창조하느냐의 관점이 아니라 세상이라 하는 것은 물질만 있으면, 그걸 질료라 하는데, 왜 물질로 번역하지 않느냐? 물질로 해 버리면 옛날 사람들은 만져지는 이것만 물질이 아니고 영혼도 물질로 봤기 때문에 괜히 또 혼동되기 때문에 질료로 보세요. 질료인데, 기초가 되는 재료가 되는 물질이라 이 말이에요.
창조가 뭐냐 하면, 질료 그것은 창조가 아니에요. 질료를 변경을 줘서 규정, 형태로 다듬어 나가는 형상이 있을 때, 그때 이것을 가지고 창조로 본 겁니다. 왜 그렇게 보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뭐가 따지고 들 때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따지잖아요. 왜 나무는 불에 타는데 쇠 덩어리는 불에 안 타느냐? 나무로 만든 곰 조각하고 쇠로 만든 곰 조각인데 형태는 어때요? 형상은 똑같잖아요. 똑같은데 왜 하나는 불에 타고 하나는 불에 안 탑니까? 그것은 뭐가 달라서 그렇습니까? 질료가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요새는 돈 번다고 바쁘지만 옛날 사람들은, 옛날 철학자들은 그게 아니고 세상은 누가 만들었으며 어떻게 생겼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걸 깊이 사색을 했단 말입니다. 사색을 하다보니까 세상은 뭐로 되어 있어요? 세상은 형상과 질료로 두 가지로 되어 있는 거예요. 재료 되는 것을 물질이라 하고 재료는 물질에게 뭔가 모습을 만들어주는 형상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질료가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로 에피쿠로스학파 또는 스토아학파고, 형상이 우선이다, 형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질료가 있다, 그냥 질료가 있어 버리면 그게 뭐가 뭔지 물에 물탄 것처럼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이지요. 그렇게 주장한 것은 바로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렇게 나온 겁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점은, 플라톤은 형상은 따로 모여져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각 개체마다 형상은 따로따로 존재한다. 그런 차이가 있어요.
여기 69페이지 중간에 [여기서 질료란 무에서부터 창조가 함의하듯이 뜻을 평가하듯이 창조의 전제라기보다는 창조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어거스틴은 옛날에 헬라철학에서는 뭡니까? 뭐가 창조냐 하면, 그냥 질료만 있는 걸 가지고 형상을 입혀서 하나는 코끼리, 하나는 독수리, 이렇게 형상만 달라져, 하나는 인간, 하나는 코스모스 하는 것을 이거는 규정성, 그러니까 수제비할 때 덩어리에서 딱딱 떼면 하나씩 떨어져 나오죠.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오는 이걸 형상이라 본다 이 말이죠. 구별되게. 그런데 어거스틴은 뭐로 보느냐 하면, 질료 자체도 창조의 대상이 된다. 왜? 모든 것은 무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말하자면 어거스틴은 신이 형상 없는 제일 질료를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질료와 함께 형상과 함께 창조했다는 창조의 절대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이 후에 스콜라 철학에 이어져서 계속 나가는데.]
글자 틀린데 고치세요. 69페이지 위에서 두 번째인데 [해변의 모래밭에서 만난 늙은 현자의 생각의 물꼬를 터주는 것처럼, 영혼은 스스로에게서 이미 하나님 대한 직감을 소유하는 게 틀림없다.]
69페이지 밑에서 8번째 봅시다. 어거스틴이 전개한 신과 세계의 관계가 이러하다면 그러면 중요한 것은 인간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어거스틴은 플라톤한테 그대로 받았어요. 어떻게 받았느냐 하면, [영혼이 신적인 것과 유사하다, 근사하다, 유사하다는 표상과 그래서 영혼이 선재한다는 표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영혼이 선재한데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뒤에 나오는 사람, 몇 명 나와요. 아리스토텔레스도 거기서 반대하고.
플라톤은 영혼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아요. 이데아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세계에 따로 모이는 것이 아니고 개별자 안에 질료와 형상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죽으면 그 안에 있는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 죽으면 같이 다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다 없어져버리는 거예요.
인간의 영혼도 인간이 죽으면 다 사라진다 하는 것은 요새 말하는 여호와증인 주장하고 좀 비슷하지요. 그렇게 돼버리면 그야말로 막가파 아닙니까? 막가파 되면, 결국은 사람이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지막에 뭐가 나와야 됩니까? 윤리가 나와 줘야 도덕적인 가치 있는 게 나와 줄 때 그 도덕적 가치를 배태하는 갖가지 논리도 가치가 있고 의미 있는 것이 돼요.
야야, 너 오늘 교회가 가서 뭐 배웠노? 목사님께서 무슨 말씀하시드노?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아아, 설교를 하되 결국은 너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그 이야기거든요. 마지막에 윤리가 나와요. 칸트의 철학도 마찬가지고. 마지막에 윤리가 나온다고.
현재 시중에 떠도는 모든 책들을 보세요. 전부 마지막에 윤리가 나오지요. 믿는 자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사람답게 살자. 전부다 그쪽이에요. 왜냐하면 윤리가 나올 때 그 윤리가 괜찮으면 앞의 주장도 같이 가치 있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강의할 때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떻다고요? 참혹하다고요. 거기에 십자가에 무슨 윤리가 있습니까? 십자가에 무슨 윤리가 있어요. 자빠지고, 엎어지고, 코 깨지고, 피 흘리는데 그게 무슨 윤리에요? 무슨 그런 윤리가 다 있습니까? 구태여 윤리를 끄집어내라면 우리는 엎어지고, 자빠지고, 십자가에 매달리자. 이렇게 되잖아요. 뭐 그런 윤리가 있어요. 그건 윤리라 할 수 없지요.
윤리라 하는 것은 현재 이 세계에서 가치 있을 만한 가치성을 갖고 있어야 윤리인데 이 세상이 악하다, 그래서 우리는 망했다. 이게 무슨 윤리입니까? 십자가에서 윤리가 안 나옵니다. 나오면 안돼요. 우리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끄집어내. 이게 무슨 되도 않는 작당들을 하고 있는지.
예수님의 십자가는, 잘 들어보세요. 윤리를 없애기 위해서예요. 윤리가 하는 것은 뭐냐? 죄가 있어서 그 죄를 개선하기 위한 조치로서 윤리가 있어요. 현대 사회가 부족하니까. 그 부족한 것을 개선하고 개량하기 위해서 윤리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뭐냐? 모든 죄를 다 가져가 버렸어요. 죄를 개선하고 보완하는 게 아니라 아예 다 가져가 버렸단 말이죠.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러버린 거예요. 아예 율법을 찢어버렸는데 십자가에서. 그런데 뭐가 개선하고 뭐가 달라질 필요가 있어요.
새로운 피조물은 윤리가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반대로 이야기해야 돼요. 윤리가 드디어 필요 없는 필드, 영역, 장, 그런 영향력 속에 놓이게 될 때 그게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사도바울을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내가 스스로 자책할 건 없지만 그러나 내가 완전하지 않다. 내가 이걸로 의로운 자가 되는 건 아니다 이 말이에요. 주님 보시기에 내가 흠이 많다고 했어요. 자책할 건 없지만 흠이 많다 말이죠.
사도바울이 그러면 자기의 흠을 찾아내서 그걸 고치려고 애를 썼습니까?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증거한 겁니다. 십자가에 나한테 어떤 흠이 있든지 어떤 오류가 있든지 관계없이 십자가의 능력은 그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리는 회수해 버리는 그러한 능력이 있음을 증거하는데 평생을 보낸 사람이지 자기 도 닦고, 자기 마음을 닦고. 뭐 마음수련회를 하라고요? 마음을 닦아라? 뭐로 닦아요? 수건도 더러운데.
여러분들이 이 책을 보면서 왜 이런 책을 봐야 돼야 하면, 지금 인간들의 심성 속의 종교성, 말이 종교성이지 우상입니다. 구약의 언약들을 보면, 언약들을 바라보게 되면 구약의 언약 이외는 전부다 우상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나타나시고 일하시고 홀로 열심내시는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지 언약과 무관한 것은, 우상이 뭔 질 알아요? 언약과 무관한 것은 다 우상이에요. 하나님의 맹세하지 않는 것은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지 않더라도 이방민족에서는 온 각 종류의 신들은 다 창안해냈어. 완전히 부페야, 부페. 잡채 있고, 팔보채 있고, 번데기까지 있어. 온갖 것을 다 끄집어냈어요. 세계 모든 종족을 보세요. 전부 다 신이 있지. 그 신이 왜 있습니까? 이것은 문화인류학자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것이 있어요. 모든 종족에 신이 있다는 말은, 그 신에 합당한 윤리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에요. 윤리를 얻기 위해서. 신으로 묶어 버린 거예요.
교회가 뭡니까? 예수 믿읍시다. 끝났잖아요. 그런데 가짜 교회가 뭡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특히 괜찮은 교회, 우리교회는 이러이러해서 모범을 보이자. 이건 뭡니까? 한 교회를 윤리라는 끈으로 묶어서 하나의 세력화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 배반자들 작살내 버리고, 조지고. 이것은 회사도 마찬가지고, 어느 단체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요식업협회도 마찬가지고, 택시운전기사도 마찬가지고, 협회도 마찬가지고, 노동조합도 마찬가지고, 자체 내 윤리가 있고 조폭이에요. 조직폭력배.
그 당시 중세는 전부다 신을 믿었기 때문에 신을 믿는 이 사람들에게 신을 믿는 나라로서 어떤 윤리가 요구되는가? 윤리라는 것은 강요가 아니고 납득이 되어야 돼요. 강요하는 윤리는 독재지요. 그런데 들어보니까 내 속에도 하나님의 심성이 있으니까 그걸 발휘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겠구나. 전부다 호응이 되도록 탄복하면서 수긍하면서 인정할 때 그 질서는 강요 안 해도 심성에서 심성으로 서로 엮어지는 게 되겠지요. 그럴 때 바로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경우에는 멋지단 말이지요.
하나님의 존재를 아십니까? 아이고, 그것 가지고 모자랍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알려드릴까요? 하나님의 영원한 형상이 여러분 속에 있는 걸 몰랐어요? 누구지 알아요? 여러분의 영혼입니다. 영혼을 갈고 닦으세요. 영혼을 갈고 닦지 않으면 당신은 짐승 됩니다.
이러한 그걸 신의 학문으로 규정해서 대중들에게 성당에 오는 사람들마다 가르치니 그게 바로 언약 밖에 있는 이방종교들의 본성이 아니고 뭐겠어요? 물론 다 지옥 갔다는 말을 제가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성경과 인간의 심성인 종교성을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야 될 건데 다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대중들을 민중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고 목사, 신부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어떻게 설득하느냐 쪽으로 이미 거기다 관심을 둔 이상은 할 수 없어요. 철학이란 것도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여기 71페이지 밑에서 일곱 번째, [어거스틴은 모든 것을 창조한 하나님이 역시 모든 인식을 불러 모으는 영의 빛이]
모든 그냥 영의 빛이 아니고 그 다음이 뭐라 되어 있지요? 모든 인식, 공통된 인식, 보편적 인식. 한 사람도 예외 됨이 없이 인식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덜 좋은 사람이 있을 뿐이지, 뭐는 없습니까? 완전하게 짐승 같은 사람은 없겠지요. 다만 교육을 못 받아서 짐승 같은 짓을 하고 있을 뿐이죠.
그렇게 되면 무엇의 존재가 가치가 있느냐 하면, 교회의 존재의 가치가 있겠죠. 이 사회에 교회는 뭐가 된다? 빛과 소금이다. 라는 이 말을 그들은 뭐로 보느냐? 훈육기관으로서 톡톡히 자기 몫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정당성을 부여받지요.
나는 교회 안나오면 죽어. 왜요? 교회 와서 신부한테 교육받아야지. 교육받으면요? 잠자는 잠재성 있는 너의 심성을 깨워서 짐승 같은 생활을 끝내고 술, 담배 다 끊어버리고 이제는 신의 자녀가 되지. 이게 지금 뭐하냐 하면, 바로 양무리 그쪽에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교회,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나, 목사. 나한테 와서 배워라 이 말이에요. 마음수련회와 다른 게 뭐가 있어요? 똑같아요.
성질난 사람이 떡 먹어야겠다. 못 참겠다. 맛있네요.
영성수련기관하고 도대체 교회하고 차이점이 뭐예요. 지금은 영성수련기관에서 하는 걸 교회는 그대로 다 수입해서 간판은 교회고 안에는 수련장이고 그래요. 심신수련장. 마음수양장. 불교라니까. 절간이에요. 참선하는 선불교.
71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 보세요. [어거스틴의 경우에는 이성으로서의 인간영혼에 놓여 있는 무의식적 깨달음을 모든 경험에 앞서 있는 이 깨달음을 각성시키는 개념이 상기론] 이 상기론이 플라톤에서 나왔어요. 조명론. 조명알지요? 비추는 조명. 영화 찍을 때 하잖아요.
인간은 동물에 갇혀 있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아직 빛을 몰라요. 그런데 빛의 세계에서 쫘~악 조명을 비춰버립니다. 그때 인간은 잠자고 있던 영혼이 각성하면서, 각성이 뭐예요? 자극을 받고 아이고, 잘 잤다. 깨어나면서 눈을 활짝 열면서 그 다음에 뭡니까? 자기 속에 이미 신성이 들어 앉아 있음을 깨닫게 되는 그러한 역할을 한다 이 말입니다.
이 조명론이 어디서 나왔어요? 플라톤에서 나왔지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듯이 영원한 빛의 세계에서 어둠에 갇힌 우리들에게 빛을 비췸으로서 우리 영혼이 각성한다, 깨어난다. 이걸 어거스틴은 뭐로 비유했냐면, 성령에다 비유해 버렸어요. 요한복음의 성령에다 비유해 버렸다고. 그러니까 용어를 빌려온 거지요.
제가 아는 성령은 십자가의 영입니다. 단절이고 예정된 자만 구원받고 언약적인 영이에요. 그런데 어거스틴의 성령은 그게 아니라 언약적인 영이 아니라 이거는 새삼스럽게 달리 불러주듯이 단지 몰랐었는데 이제는 눈 뜨고 보니까 깨달았을 뿐이죠. 장소이동이 아니고.
그러니까 지금 어거스틴 신학의 제일 큰 문제점이 뭔 줄 알아요? 악마를 인정하지 않아요. 악마적인 것은 인정해요. 나쁜 것은 인정해요. 만약에 악마가 돼버리면 어거스틴은 마니교로 빠진다고 봤습니다.
마니교가 뭡니까? 세상은 두 개의 신이 있어서 두 개의 신의 대결로서 세상이 창조되었다. 세상 속에 악마도 있고, 선한 신도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마니교란 말이죠. 마니교 심취하다가 그게 아니다 하고 벗어났잖아요.
그러면 어거스틴이 말한 신이 뭡니까? 악은 무엇이 모자라는 것뿐이죠. 선이 모자란 거죠. 선이 많이 들어가면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밀고 댕긴다고. 한 영토에서 선이 많이 공격하면 악은 궁지에 몰리고, 선이 좀 긴장이 늦추어졌다면 악이 점령해서 선은 궁지에 몰리고. 날마다 큐티하고 선을 해서 선은 승리하고 악은 밀리도록 그렇게 열심히 분투노력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간의 모습이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이미 피타고라스학파, 플라톤, 그 많은 스토아학파 전부다 이야기한 거예요.
플로티누스 같은 경우에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가치의 정도, 가치의 함량 수준을 봐요. 존재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이 존재하는데 많이 존재하는 자와 적게 존재하는 자, 쉽게 이야기하면, 신의 모습을 많이 닮은 것은 존재성이 그냥 착한 사람이 아니라 플로티누스는 존재를 강하게 하고 있고, 신의 형상이 작은 것은 약하게 존재한다고 본 거에요. 약하게 존재하는 것은 돌멩이, 그리고 또 원생동물, 그때는 원생동물 그러면 모르지만, 나무 이런 것, 많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 더 많이 존재하면 천사, 존재의 경도라 하지요. 강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것이 인간에게 무슨 호소력으로? 윤리적 호소력으로 딱이다 이 말입니다. 사람이 누구와 대화할 때 탁 무릎을 치면서 맞다, 옳다, 동의를 받아낼 때 그 이론은 확산될 가능성이 많겠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으세요. 하면 전혀 안 먹혀 들어가는데 예수 믿게 되면 뭐가 된다? 착한 사람이 된다, 존재의 경도가 강화됩니다. 하면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지요. 예수는 들러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없고요. 십자가 진 예수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우리를 착하게 만드는 요인이지요. 그동안 내 힘으로 도를 닦다가 이젠 예수의 주신 능력으로 도의 속도를 배가 시키는 거지요.
왜 교회에서 찬송가 불려야 됩니까? 밖에 나가면 유행가 부르지만. 왜 불러야 됩니까? 교회가 수련장이잖아요. 수련장인데 바깥에 노래방 불려야 되겠습니까? 적어도 교회 나오는 하루만큼은 찬송가를 부르게 돼있는데 찬송가는 우리에게 수련의 도를 더 증가시키지요. 물론 월요일부터 유행가 부르면 다 꺼지지만. 꺼질 때 꺼지더라도 뭔가 채워 놓고 꺼지면 남는 게 있잖아요. 수련장이 그러할 때 교인들은 납득을 해요. 그렇다. 유행가 부르면 안돼. 가끔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송가 불려야 돼. 스스로 같이 동의를 받아낼 수 있는 여지가 많지요.
그런데 십자가는 안 그래도 세상 나가서 죽을 판인데 교회와도 죽으라고 하니. 십자가는 모든 걸 빼앗거든요. 내가 빼앗긴 것처럼 너도 빼앗겨라. 라고 요구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내가 죽은 것처럼 내가 이 땅에 죽은 것처럼 너도 이 땅에서 죽어서 자기의 죽음을 계속 반복하면서 날 따라오라 이거거든요.
고린도후서에 나오지요. 4장에. 날마다 예수 죽으심을 죽어짐은 나는 죽고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게 함이라. 그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설득이 안 되고 동의를 못 구하잖아요. 박영선 목사의 설교의 문제가 그 점 아닙니까? 왜 사람들은 박영선 목사의 설교의 허점을 왜 그렇게 몰라요.
지금 보니 문제가요, 어디를 손댈지 견적이 안 나오지요. 도대체 어디를 손댈지. 전부다 비언약이고, 우상적이며 이방종교성입니다.
그런데 영지주의 한번 봅시다. 70페이지. 야, 이런 식으로 강의하다가는 이 책 다 떼는데 예수님 재림하시겠다. 질리네요.
[영지주의에 따르면 특히 발렌티누스의 영지주의에 따르면 프뉴마의 불꽃은 곧 영혼의 본성에 속한다. 물론 물질에 빠져든 정신적인 영혼과의 연결로부터 정화되어야 한다.] '빠져든'이 아니고, 물질에 '빠져버린'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71페이지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여기에 신비 언어라고 할 수, 71페이지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있지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기독교에서 참된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신비 언어라고 할 수 있지, ‘ㅅ’이 한 개인데 두 개로 고치세요. 목사님, 그거야 뭐. 아무것도 아니지만 찝찝하잖아요. 그리고 이왕에 나온 김에, 그건 다음에 합시다. 강의가 중요하니까.
발렌티누스는 물질에 빠져든 정신적인 영혼과 연결부터 정화되어야 된다. 그러니까 영지주의는 뭡니까? 물질은 더럽잖아요. 물질은 더러우니까 뭐만 쏙 빼내야 된다? 깨끗한 영혼을 빼내야 된다. 그런데 이것을 그 당시에는 바울주의라고 본 거에요. 바울의 고린도전서에 보면 육체에 따르는 삶과 영에 따르는 삶을 대치시켰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했죠. 육적인 삶과 영적인 삶. 이걸 영지주의는 뭐로, 영지주의는 구약은 버리고 뭐만 땄어요? 사도 바울의 서신서만 따 가지고 기독교라고 표명한 집단 아닙니까?
따라서 그들에게 뭐가 그들이 구미를 당겼느냐 하면, 그들이 뭐가 구미를 당겼느냐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들이 뭐가 일반대중들에게 호소할 수 있었느냐 하면, 일반대중들은 예수님께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내가 좀더 더 존재할 수 있느냐, 더 신적인 존재자로 변화될 수 있느냐, 변신할 수 있느냐? 여기에 초점이 있는데 발렌티누스의 주장이 먹어 주더란 말이죠. 그것도 거룩한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해 가면서.
따라서 두 종류의 인간 즉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 따로 있다 이 말이거든요. 말이야 맞죠. 사도 바울의 말이 맞는데. [오리겐은 인간을 두 영혼으로 구분한 게 아니고 단순히 육체적인 영혼으로 보았다.]
참, 보세요. 사도 바울이, 한 분의 사도 바울 말을 두고 이렇게 서로 상당히 자기 철학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이론이 막 전개 되지요. 차이가 뭐예요?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과 그렇게 구분한 것과 그 다음에 뭡니까? 육체적 영혼과 영적인 영혼, 라고 주장하는 두 이론의 차이점이 뭐예요? 뭣을 챙기고 뭐를 수긍하겠다는 뜻입니까? 이것은 바로 오리겐은 극단적인, 그 당시에는 영지주의가 번성했으니까, 영지주의처럼 극단적인 완전히 인간을 둘로 나눔을 버리고 영혼의 무슨 성? 단일성만 지켜내겠다는 거지요.
[플라톤과 달리 영혼이 몸에 얽매이게 되는 것은 선재적인 영혼의 죄로 의한 결과이지 프뉴마가 당해야만 하는 그 숙명은 아니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번 보세요. 오리겐은 뭐냐 하면, 속속 밑바닥으로 돌멩이처럼, 나무처럼, 인간이 짐승처럼 저렇게 전락하면, 영혼이 그렇게 전락한 것이라고 플라톤은 봤는데 오리겐은 그렇게 본 게 아니고 영혼이 전락한 것이 아니고 영혼이 때가 묻은 거. 아니, 영혼을 왜 그렇게 지키라고 하느냐? 영혼은 나중에 뭐이기 때문에? 영혼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영혼이 타락해 버리면 하나님이 타락한 것이 되니까 다만 영혼이 때가 묻은 거지. 그럼 때는 씻었으면 되지.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을 육적인 영혼과 영적인 영혼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오리겐이 주장했다. 어디에 반대해서? 영지주의에 반대해서.
후대에 이르러서 중요한 게 나오죠. [영혼이 옮겨 다닌다는 플라톤 학설뿐 아니라 그 영혼의 선재성마저 거부되었다.] 이건 아마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들어와서 그래요.
[영혼의 직접적인 신앙을 주장하는 유스티누스의 대안이 결국 프라토나즘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이것은 미래에 완성될 세계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직관할 수 있다는 것을 정의롭게 산 사람에게 주어진 값으로 보증된다는 이런 명제의 기초는 역시 '호모이오시스 테오'(하나님의 형상)라는 플라톤의 학설에 있다. 유스티누스에 의하면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능력은 인간 영혼의 본성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고 은총으로 말미암는다.] 야, 이거 어때요?
그러니까 오리겐은 뭣은 유지하려고 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것이니까 손대지 말자 했는데 유스티누스는 그렇게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이 뭔가를 만들어낸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말이에요.
여기에 71페이지에 보면, [인식 사건은 직관적이지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교육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고 직관적으로 되는데, 그 인식은 인간 이성의 본성을 통해서도 언제 어디서나 확실하게 영적인 시야를 열어주지 못하며,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인간의 수고에 의한 결과도 아니다. 인식은 '갑자기' 주어지는 시야로서 인간에게 주어진다. 유스티누스는 이런 영적인 시야를 '거룩한 영'이라고 피력했다.]
이런 사람도 있잖아요. 자, 이렇게 돼버리면 그 당시 교회가 환영했을까요, 환영할 수 없을까요? 환영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교회 신부, 성직자의 가르침이, 교육이 가르치는 가능성 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백날 가르쳐 봐야 저는 갑자기 안 왔는데요. 끝난 문제에요. 십년 동안 배웠는데도 갑자기 뭐 안 오는데요. 이렇게 하면 끝난. 모든 게 헛수고라. 인간의 수고에 의해 되는 것도 아니고. 이성을 아무리 인간의, 옛날 이성이라 하는 것이 영혼에서 나왔으니까 영혼의 작용이거든요.
옛날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에요. 보세요. 음식을 먹는 것은 손발 있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이라 하는 것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고 뭘 합니까? 생각을 하지요. 그러니까 생각을 하는 것은 밭에 밭 간다고 생각됩니까? 생각나요?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손 움직임과 상관없는 다른 루트, 다른 통로에 의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고 공상이 떠오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로 돼있다? 밥 먹고, 잠자고, 일하는 감각적인 요소가 있는 반면에 그게 육적인 요소인 반면에 사람의 사고를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왔다? 그건 어떤 다른 요소, 그걸 영혼이라 하자. 그 영혼이라는 요소에서 나왔다. 이 말이죠. 이 두 가지가 결합돼야 짐승이 아니고 인간이지. 만약에 발로 처먹고 돌아다니면 짐승이지. 인간이란 말이야.
따라서 그것은 누구에게든지 납득이 되잖아요. 누가 틀렸다고 해. 다 맞는 이야기지. 납득이 되니까 납득이 되는 쪽으로 거기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겠다는데 거기에 대해서 유스티누스는 어떻게 했다? 인간은 죽어도 안 된다 이거에요. 살아도 안 된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러면 교회 미쳤다고 교회 운영하나? 교역자 설교 왜 하는데 되지도 않은 설교 왜 하는데. 이런 결론이 나오지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는 기독교에서 참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조명 사건을 세례와 연관시켰습니다.]
이것은 아까 유스티누스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거지요. 왜냐하면 발전하면서도 참, 재미있는 게 발전하면서도 그 다음이 뭐가 됐어요? 사람이 잘하면 되겠네? 라는 가능성을 주지요. 왜냐하면 성령세례는 우리가 알다시피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성령세례를 요청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면서 상당히 성경적이면서도 세례 받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세례를 받게 되면 무슨 가능성이 있다? 성령도 아울러 받을 수 있는 가능성도 비취면 결국 교회에서 세례 준 행위는 사람을 구원하는 행위가 돼버리지요. 그죠?
그렇다면 침례교에서 상당히 중요시 하는 대중들 앞에 고백하세요. 물에 욕조에다 집어넣어서 집어 던지는 것이나 물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나 이렇게 해야 될 교회는 필히, 반드시 이 시대에 필요하고 그 일을 주관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목사는 반드시 있어야 되니까 목사한테 월급 줘.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지요.
보세요. 갑자기 우발성으로 등장해요. 우발성과 우연이 다릅니다. 우연이라 하는 것은 목적론 쪽에서 목적을 모를 때 우연이고, 우발성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무의미할 때 우발성이라고 해요. 우연이라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이 가는 길을 우리가 이렇게 알고 있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이 길을 가야 될 때 이걸 우연이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헬라철학에서 우연이라 하는데.
우발성은 달라요. 우발성이라 하는 것은 목적을 이루는데 목적과 상관없이 다른 쪽에서 툭 튀어나 버렸어요. 이 목적을 이루는데 코스가 이런 코스인데 아하, 이 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쪽 가도 터지더라. 이럴 때는 우연이 되지만 그러나 목적은 하나에요. 필연, 우연의 원인을 밝히면 그게 뭐가 됩니까? 우연이 곧장 뭐로 바꿔요? 필연으로 바뀌지요. 아아, 이런 원인은 반드시 이런 결과가 나와야 되는구나. 그러니까 필연, 우연, 우연, 필연, 이런 식으로 목적으로 가는데. 우발성이라 하는 것은 예상치도 않은 목적과 전혀 안 맞는 것이 툭툭 나왔을 때 그걸 우발성이라고 합니다.
손성식 목사님이 항상 이야기하는 게 뭐예요? 은혜의 우발성. 이 은혜의 우발성이라 하는 것을 손성식 목사님이 옳게 본 것이 뭐냐? 은혜의 우발성은 웬 떡이냐가 아니라, 너, 임마. 너 갖고 있는 목적이 잘못됐어. 라고 도리어 현재 갖고 있는 목적을 정죄하는 기능으로서 작용할 때 그게 십자가의 우발성이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 이만하면 나 착하지요. 라고 할 때 착하긴 네가 바로 죄인이야. 라고 나타날 때 그게 우발성이다 이 말입니다.
이사야 6장 같은 경우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우발성이에요. 언제? 내가 이사야 같으면, 나, 이사야 지금 성전에 들어간다. 들어갈 때 하나님 나타날 때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렇게 되면 그건 뭡니까? 그건 우발성이 아니지요. 지가 이미 사전에 알았던 거잖아요. 그럴 때 하나님 나타날 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래, 내가 지저 줄께. 제단불로. 역시 나는 참 똑똑해. 내가 성전 앞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어떻게 할 줄 알았어. 이렇게 되는데 이사야는 생각도 못했어. 자기가 죄인인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하고 같이 세리들과 함께 술 잡수실 때 유대인들은 금식하면서 주여,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하고 있다고. 그때 예수님께선 야, 술 먹으로 가자. 술 먹으로 갔거든. 어떻게 너희 스승은 우리들은 지금 금식하고 회개하고 있는데 너는 술 먹고 있느냐? 나는 우발성이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우발성을 믿어야 됩니다. 이 세상은 목사 손에 맡긴 것이 아니고 우리들 손에 맡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손댑니다. 직접 손대요. 재미있는 것은 목사가 설교 준비할 때 목적을 두고 설교하잖아요. 자기는 이 점이 중요하다고 큰 소리 치면서 이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큰 소리 쳤는데 나중에 설교에서 평가한 것을 보면, 목사님이 강조한 것은 전혀 감동이 없고 중간에 엉뚱한 소리한 것을 거기에 감동을 받아서 은혜 받아서 목사님이 착각한 거야. 내가 그때 고함을 참 잘 질렀지. 전혀 엉뚱한 건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우발성을 세례로 번역함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우발성은 뭐로 전환된다? 이제는 우발성이 아니라 필연으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다 바꿔버리고 또 사람들은 교회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부각되겠지요. 참.
그러면 은총은 뭐가 은총이다?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은총이 되겠지요. 은혜는 우발적으로 주는 게 아니라 이제는 사람이 달라하면 또 사람이 이벤트를 벌이면 이벤트 따라서 반드시 와야 하는 그런 은혜기 때문에 사람 손에 놀아나는 은혜겠지요. 이게 우상입니다. 우상은 인간이 자기 맹세를 거기다 집어넣기 때문에 거기에 자기 맹세에 놀아나 주는 신이야 말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이었어요.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신학을 쭉 해보면, 어거스틴의 신학을 보면 결국 뭐예요? 하나님이여, 꼼짝마라. 우리가 다루겠다. 이거에요. 우리가 다룰 수 있는 하나님. 하나님을 안다는 뭡니까? 우리 손에서 다룰 수 있는 하나님이에요.
만약에 노회에서 당신은 이단사설을 가르쳐서 면직시킨다. 그러면 나오면 돼요. 왜? 우발성이니까.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우발성이니까. 나오면 되는데 복직한다고 데모한다, 시위한다? 그것도 우발성인가? 십자가가 빠져버린 그냥의 신의 우발성, 이런 것은 그건 이방 종교적이다.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제가 강조합니다.
그 다음 72페이지 넘어갑시다. 서구 중세기 신학은, 교재가 있으니 이렇게 강의가 쉬울 줄이야. 얼마나 기쁜지. 글자,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 71페이지 중간에 글자 고칩시다. '어거스틴은' 하는 것이 중간에 두 개 나오지요. 찾았습니까? 밑의 [어거스틴은 모든 인식이 신적인 조명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영혼이 진리 자체인 성령의 붙임에서만 사물의 이데아를 인식한다.] 그렇게 고쳐주세요.
그 다음에 72페이지 봅시다. [서구 중세기 신학은 이러한 어거스틴의 기본 사상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서구의 중세기 신학은 플라톤 사상을 약간 받아들이고.
참, 여러분 이걸 알아차리면 쉽습니다. 플라톤 사상은 뭣을 강조하냐 하면, 흔들리지 않는 영원 고정된 이데아 세계, 신적 세계를 이야기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뭐냐 하면, 그래, 신인데 그게 인간 세상에 어떻게 적용되느냐? 적용분야에선 아리스토텔레스에요. 전체를 뭉치고 뭉치는 것은 플라톤이고, 그걸 개별화, 개체마다 이걸 분산시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꽉 잡았고 이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하나님의 이데아가 하나님의 데미우르고스라는 신이 어떻게 창조했느냐, 형상을 어떻게 보유했느냐 하는 것을 4가지 원인가지고 설명했어요. 운동인, 목적인, 형상인, 질료인 있어요. 4 가지 원인 가지고 쭉쭉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렇게 설명을 해 놓으면 아하, 이 세상이라는 것은 위대가리에서 안정되지요. 안정된 그러니까 문어지요. 문어있고 문어가 다리 몇 개인지 모르겠다만 다리 있잖아요. 지금 하나로 뭉치자. 이것은 플라톤이 꽉 잡았고. 어떻게 어떤 식으로 갈라지느냐? 이건 누가 잡았어요? 아리스토텔레스 잡은 거어요. 잡을 때 이게 범주화, 계층화, 계층이 생긴다 말이에요. 개별적으로. 그러니까 신학에서는 위대가리는 잡아 놨으니까, 삼위일체로 잡아 놨으니까, 플라톤 잡아 놨으니까, 밑에 민중들이 궁금해 하니까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는 그 분야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이지요.
그 다음에 봅시다. [어거스틴의 조명론은 은혜로운 인식의 영역에 한정되었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의 조명론이 아니라면,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보느냐?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에는 세상의 어떤 움직이고 모든 변화는 반드시 원인을 찾아내야 된다. 원인이야 있지?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잖아. 그건 인정하는데 하나님의 섭리론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는 구체적으로 탐구를 해야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오면 무엇이 발달하겠습니까? 과학이, 논리가 발달하겠지요. 구체적으로.
돌담이 무너졌다. 누가 했노? 하나님이 했지. 아하, 그거 맞는데 도대체 담을 어떻게 쌓았기에 했는가? 하중은 얼마고, 깊이는 얼마 팠고, 돌을 몇 개 쌓게 했느냐? 앞으로 할 때는 돌을 몇 개 하지 말고 줄여라. 그것까지는 개별적인 거잖아요. 그것은 원인이죠. 4가지 원인 있잖아요. 4가지 원인에 맞춰서 연구를 하자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분명히 신은 인정하면서도 신은 이제 빠이빠이가 되겠지요. 그렇겠지요. 하나님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놓고 이제는 볼 일 보소. 형님, 이제 볼 일 봤고, 자, 이제 우리 손에서 처리하자 이렇게 되겠지요. 이건 마치 뭐와 같으냐면, 노회에서 다 예수 믿고 하나님 믿잖아요. 노회할 때 성만찬 하잖아요. 형님, 볼 일 보고, 이제는 정족수 ⅔로 할 것이냐, ⅓로 할 것이냐를 우리 선에서 하는 거예요. 이게 아리스토텔레스 신학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양쪽 다 뭐가 빠졌어요? 십자가가 빠져 있는 거예요. 양쪽 다 자기 의와 자기 정당성을 합리화하는 거지요. 그 다음부터는. 무엇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신학의 이름으로.
72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영혼은 어디서 오는가? 영혼은 신에게서 창조되었죠. 그런데 그 창조가 어느 순간에 과정을 거쳐서 여러 가지 되느냐 이 말이에요. 영혼은 최초에 창조 전에 먼저 있었다는 선재설이 플라톤에서 제기되었지요. 하늘나라에 영혼 창고가 있어서 각 영혼이 조금씩 떼어서 던져주면 그게 뭡니까? 형상 덩어리가 있고 그것이 하나의 질료, 인간의 육신이 하나 집어 갈 때마다 하나씩, 턱. 인간의 육신은 질료라니까 그죠? 질료는 사람이 아니에요. 뭐가 갈 때 영혼 창고가 있는데 영혼 하나가 턱 날아와서 뭐가 만난다? 질료가 만날 때 그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거예요. 이게 플라톤 사상이라니까.
안 어렵습니까? 되게 어려운데. 부흥사 같은데. 부흥사들이 하면 뿅 갈 건데 교인들. 여러분 오늘 시간에 배운 것, 신학교 3년 배운 거보다 더 낫습니다. 해 가면서. 이게 플라톤 사상이에요.
그 다음에 오리겐은 동조했잖아요. [출생을 통해 육체와 새로이 결합되면 전이된다는 전이설이 질료 형상론에 압권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지를 받았는데 터툴리안이나 니사의 그레고리가 이런 입장을 따랐으며, 이에 반해 클레멘트를 비롯한 초대 교부들 대부분은 영혼이 신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다는 창조설을 제시했다.]
이것도 골치 아프지요. 그럼 뭐는 없다는 말이에요. 영혼의 창고는 없다 이 말이죠. 사람이 될 때 영혼하고 육체하고 동시에 된다, 동시에. 이 취지를 여러분 아셔야 돼요. 지금 여러분들이 피곤하신데 내가 피곤해야 될 건데. 한번 보세요. 아까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어떤 아주머니가 밭에서 감자를 캐잖아요. 감자 캐면서 서울 간, 시집간 딸을 생각한단 말이지요. 보세요. 뭐가 사람입니까? 감자 캐는 그 모습이 사람입니까, 아니면 감자 캐면서 머리 속에 시집간 딸을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사람입니까? 둘 다가 모여야 사람이지요. 그냥 감자만 캐면 이건 완전히 개지, 뭐. 그러면 감자 캐는 것하고 딸을 생각하는 것하고 연관이 있어요, 없어요? 연관 없어요. 딸을 생각하는 것은 감자 캘 때 있고, 고구마 캘 때 있고, 잠자다가 할 때 있고. 그러니까 따로따로 노는 거죠. 따로따로 노니까 이분설이란 말이죠. 인간을.
자, 한번 보세요. 지금 이분설이잖아요. 지금 당장 30대 이분설이고, 40대, 50살 먹어도 이분설 아닙니까? 그럼 10대로 가 보세요. 맨 이분설이죠. 다섯 살로, 세 살로. 화이브, 훠, 쓰리, 투, 원. 여섯 살 때, 막 태어날 때 이분설이에요, 이분설 아니에요? 열 살 때 이분설 같으면 여섯 살 때 뭐 돼요? 이분설 돼야 되겠지요. 일분설 아닙니다. 이분설이죠.
그러면 영혼은 어디서 나왔어요? 골치 아픕니다. 장차 50 돼서 감자 캐면서 시집간 딸을 생각하는 그 의식하는 인간적 의식을 갖고, 그걸 잠재태거든요. 지금 아리스토텔레스 나오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든 뭐든 세상은 잠재태가 있고 잠재태를 나중에 가능태로 바꾸어요. 맨 같은 이야기인데 잠재태가 가능성인데. 모든 인간은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은 원인에 의해서 자극 받아서 열매를 맺는 거예요. 아, 이거 완전히 교회 영성훈련, 교회 주일학교 똑같은 거예요. 인간을 할 수 있는 거예요. 할 수 있는데 못 하겠다는 것 때문에 일이 안되는 거예요. 하면 된다. 군대에서 안 합니까? 까면 깐다고. 군대를 가봐야 알지. 방위로 빠져가지고. 까면 까게 돼 있다고 이게.
그러니까 신이 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뭐다? 신이 물론 했지. 했는데 그것은 플라톤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뭐예요? 우리 속에 있는 가능성을 우리가 어떤 계기나 원인이나 교육에 의해서 개발하면 뭐가 나온다? 놀라운 새로운 신이 주신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결국 이것은 뭡니까? 하나님 빠이빠이죠. 하나님 믿지요. 믿는데 믿으면서 빠이빠이죠.
그중에 하나가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고 톨스토이 그래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내 안의 무슨 가능성? 글 쓰는 가능성. 하나님이 주신 형상을 통해서 거듭났고, 나는 뭘 쓴다? 소설을 쓴다. 따라서 그 소설은 뭐가 되겠어요? 소설은 하나님의 일이 되겠지요.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바로 자기 정당성, 자기 의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가 개입될 여기 없어요. 십자가는 다 빠져 버렸어요. 어디에 그 경로에 십자가가 들어갑니까?
도스토예프키가 말하기를 신부, 목사들, 너희들 목회나 해라. 나는 소설 쓸게. 누가 하나님 영광 돌리나 보자! 톨스토이가 목사들이여, 신부들이여, 당신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자야. 그러면 이 정의를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