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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광주 강의 12-2강의고린도후서

Re..광주 강의 12-2

이름 : 서경수(IP:)

광주강의 (12-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다른 사람”이라고 했지요. 어느 정도 다른가 하면 세상 사람들과 비교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세상 불신자들과 비교할 쨉이 안 됩니다. 레벨이 안 돼요.

우리가 고린도후서를 공부한다면 사도바울이 편지를 쓴 심정을 알아야 고린도후서가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고린도후서를 해석하려면 우리도 사도바울이 갖고 있던 성도라는 자의식이 얼마나 세상 사람과는 다른가를 같이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첫째 시간에 ‘어떻게 다른가?’에서, 원한과 복수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이런 것이 다 해결된다고 했고,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과 쓸데없이 비교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 세상 전체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겠지요? 하나님의 약속이.

사도바울의 심정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이 세상에 성취되고 있음이 눈으로 보이는데 왜 내가 세상 사람들과 불필요한 경쟁을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데, 이 약속이 우선이지 다른 것이 우선될 수는 없습니다. 약속대로 이 세상이 불바다가 되어 사라져도 세상 걱정보다 약속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약속대로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약속이 뭔가? 그것은 바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싸움이 그 약속이고, 그것이 한 인물로써 구체화된 것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 내려갈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에, “나는 네게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했습니다. 답변이 상당히 이상하지요? 그냥 “예수”라고 하지 않고, 너 때문에 너무너무 괴롭힘을 당한 자란 식으로 말씀했지요.

과거 사울의 관점으로 보면 주님께서는 계속 배척당해야 할 인물에 불과하단 말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분이 이제 너에게 나타났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부끄럽고,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뿐이지요.

“왜 내게는 남들처럼 안 해 줍니까?” 하는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나 때문에 고난당하고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서. 이런 세상적인 분노와 원한 때문에 주님께서 고통 받으시면서 십자가 지셨는데. 이 십자가를 지신체로 나타나셨는데 “왜 나에게는 고급 아파트를 안 주시고, 좋은 직장을 안 주십니까?” 라는 원망이 통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실제적으로 인간들에게 주어지는가? 그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인간 속에서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 하면 두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약속은 하나입니까, 두개입니까? 약속은 하나예요. 그런데 나타날 때는 두개로 분리되어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두개가 합쳐져야 온전한 약속이 돼요. 선악과는 마귀고 생명나무는 예수님이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선악과 생명나무 다 합쳐야 예수님입니다. 나타날 때는 선악과 생명나무 분리되어 나타나고.

하나의 약속이 두 개의 언약으로 나타나지요. 두 개의 언약을 갈라디아서 4장 21절 이하에는 [율법]이라 했어요. 이것은 모세 언약이 되겠지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성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약속이 나타날 때는 율법이라는 배경 하에서 성령으로 주어집니다. 이렇게 나타난다고 말하는 이것조차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생뚱 맞는 소리가 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내가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복 주면 되지, 뭐 때문에 이런 원칙 같은 것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고 나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사도바울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릅니다.” 라고 말해줘야지요.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만났던 그 하나님은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산 밑에서 인간들이 자기 욕망에 따라 만들어 낸 상징이고, 사도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은 진짜 살아계셔서 약속에 따라 일하시는 분입니다.

갈 4:22 이후에 보면, 종에 속한 자의 특징을 나타낼 때 율법이라는 언약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계집 종에게서 태어난 자라고 했지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진짜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면, 인간 세상을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하면서 일하십니다. 하나는 종에 속한 사람을 만드시고, 또 다른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 속한 자식으로. 이 두 종류 외에는 다른 류는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갈4:24에 나오지요? 이것을 보면서, 신자든 불신자든 언약이 먼저 있고난 후에 그 다음에 발생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먼저가 아니고, 사람 살리려고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 살리기 위해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불신자들의 생각과 너무 다르지요?

신은 나를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불신자들입니다. 신자는 ‘나는 언약을 구현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사고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종에 속한 사람을 설명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돼요. 이쪽은 자유하는 자이니까. 종이 뭐냐를 설명하게 되면 그 다음에 자유가 뭐라는 것은 해명이 됩니다. 종을 옭아매는 거기에 포함되지 아니하면 그곳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에서 자유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하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종이 어디에 얽매였는가를 설명해서, 종이 매인 곳에서 안 매였으면 그 사람은 자유인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러면 종은 어디에 매여 있는가? 그들은 율법에 매여 있습니다.
제가 첫째시간에 법을 이야기했지요? 법은 뭘 요구합니까? 정당성을 요구합니다. 옳았느냐, 잘못 되었느냐를 따집니다. 그러기에 법에 매어있다는 말은 옳았다고 해서 자유하는 것도 아니고, 나쁘다고 해서 영영 종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옳았느냐, 나빴느냐?’를 따지는 그 자체가 이미 종에 속했다는 말입니다. 참 어렵지요?

제가 그런 예를 들었지요.
아버지가 밤 11시 이전에 집에 들어와야 한다는 법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옆집 아이가 밤 11시 10분에 귀가 했어요. 얘는 나쁜 놈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그 앞집에 있는 아이가 10시 50분에 들어오면 착한 아이입니까? 착한 것이 아니지요?

‘저 사람은 참 착해’ 이것도 문제가 있어요. 착하다고 규정하는 그 법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저쪽 아파트에 있는 애는 착하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자유하지요. 우리 아버지의 법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자유라는 것은 ‘나쁜 놈이냐, 착한 놈이냐?’ 라는 규정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특이한 인종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만 만들어 냅니다. 이런 사람들은 창세전에 하나님이 택하셔서 성령으로 만들어내는데 이런 사람들만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특별과외를 받고 알게 된 사실입니다. 기가 막힐 내용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내가 나쁜 짓 하면 벌 받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착한 일 하는데 왜 저 사람보다 더 잘살지 못해? 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나 저러나 그것은 성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데, 구원은 아예 그런 법에 저촉 안 된 상태에서 이미 구원 되었는데, 마치 자신은 하나님 법대로 깨끗이 살면 그것으로 구원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법대로 살면 구원 되는 줄 알았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대표적인 율법에 속한 자들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배경 하에서 함께 나옵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의 배경을 깔고 예수님의 산성수훈이 비로소 나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율법에 속했다가 자유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씨가 달라요. 이쪽 씨와 저쪽 씨가 달라요. 하나님께서 다르게 창조했어요. 우리는 습관상 저쪽 분위기에 따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성령이 오면 저쪽 계열, 율법에 속한 종의 자식이 아니고 그 종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의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지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율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에서 어려운 이야기가 뭔가 하면, 이 율법에 속한 것을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범위를 확산시킵니다. 이것을 가지고 ‘육체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 율법에 속한 자를 다른 말로 육체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법에 신경 쓰는 사람을 가지고 육체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육체에 속했다고 하니까 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해요. 육체의 특징은 번식에 있습니다. 갈4장 2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잉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여자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잉태치 못한 것과 잉태할 수 있는 것과를 비교합니다. 잉태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두 자녀 이스마엘과 이삭 중에서, 이스마엘은 뭘 보여줍니까? 종의 자식이고 잉태가 가능했던 자식입니다. 인간 육체의 힘으로 태어났는데 이런 자는 태어나자마자 어디에 매여 있다? 율법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여! 당신들이 성도 된 것은 육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할 때 했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라고. 그런데 그 뒷부분에 보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러기에 베드로는 특이한 존재입니다.
이제부터는 베드로는 세상에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어도 괜찮아요. 왜? 너무 특이하기 때문에. 그래서 베드로가 죽었다는 것은 세상 역사책에 안 나오지요? 별로 중요하게 안 다루지요? 왜냐하면 있으나 마나한 존재이기 때문에. 바울이 언제 어떻게 죽었다는 것은 세상 역사책에 안 나옵니다.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큰 교회 장로가 죽었다는 소식은 신문 부고란에 광고가 되지요.

정진석 주교가 추기경이 되었다는 소식은 신문에 나오지만, 어떤 자가 성도로 등장했다. 우리나라에도 약속의 사람이 등장했다. 이런 내용은 신문에 안 나옵니다. 이런 것은 있으나 마나한 이야기입니다. 마치 오늘날 예수님이 있으나 마나한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그들도 있으나 마나한 존재들입니다.

아무 힘도 권력도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의 문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은 권력도 힘도 안 되는데, 그들은 권력과 힘이 되도록 사기를 쳤다는 것입니다.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의 제국을 만드는 거예요. 그것이 천주교입니다. 최고 오야붕이 교황이고 그 밑에 추기경들이고. 그래서 추기경은 가는 곳마다 VIP대우 받고.

사도바울과 같은 세상관을 가질 때 고린도후서가 비로소 해석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4장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빗방울이 쏟아지듯이 모든 인간은 종이기 때문에, 종은 주인이 있지요? 주인은 무서운 법이 주인입니다. 법이 주인이기 때문에 종은 어디를 가도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쏟아져요. 이래서 되겠는냐? 겨우 이정도이냐? 법이 마구 쏟아집니다.

그런데 이런 종족이 있는 반면에, 법이 청명한 하늘이라. 법이 안 쏟아지는 거예요. 다만 본인은 저쪽 남 얻어맞으니까 자기도 겁나서 움츠리는 것이지요. 학교에서 숙제 안 한 아이를 너무 심하게 때리면 숙제한 아이도 겁나서 벌벌 떨지요. 자기는 숙제해서 안 맞을 것인데, 숙제 안 한 아이 맞는 것 보면서 벌벌 떠는 것처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용서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벌벌 떨고 있습니다. 지옥 갈까봐. 이게 너무나 세상과 친숙해 져서 그래요. 자기의 너무나 귀한 위상과 신분을 존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세상 누가 어떤 법 지켜서 복 받았다고 하면 그것이 부러워지고, 자신도 그런 방법으로 복 받고 싶고. 그것이 마음이 편해요. 습관상 익숙해 진 것이지요.

세상은 법이 막 쏟아집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심지어는 죽은 후라도 주님은 법대로 처리합니다. 산자나 죽은 자나 심판하십니다. 지옥가도 거기 주님 계십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자유자입니다.
자유자. 이들은 어디에는 해당 안 됩니까? 종의 자식이 아닌 자, 법의 자식은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체로 태어난 자식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버지 목사라고 자신이 성도되고 이런 것은 없단 말이지요. 이것은 분명히 혈육으로 된 것도 아니고,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된 것도 아니고 -- 그래서 아주 특별한 자입니다. 달라도 보통 다른 자가 아닙니다.

이 자유자는 법에 해당 안 되는 자유자인데, 그러면 이 자유자의 대표적인 사람은 누구냐? 갈4장에서는 이것을 [이삭]으로 봅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이스마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삭이란 것입니다. 그러면 이삭의 운명은, 이삭이 약속된 자식이라면 이삭 속에 약속이라는 운명이 담깁니다. 약속이라는 운명이 담기면 이삭은 출생부터 자기 원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그의 한평생은 약속을 증거하는, 약속을 방출하는 그러한 운명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이것을 환란이라고 하고 고난이라고 합니다.

욥은 가만히 있다가 아프고, 가만히 있다가 마누라 도망가고, 가만히 있다가 자식들 다 죽고.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있다가 아내 생기고, 아름다운 자녀 생기고, 풍족한 재산도 받고. 이것은 아마 천국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땅에서 땅으로 보상해 줍니다. 잠언에 나와요. (3:16)오른손에는 장수요 왼손에는 부귀라. 이것이 신약에 오면 골로새서 3장 2절에 오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해요.

자유자란 의미가 왜 자유자냐 하는 것입니다.
자유자니까 육체에 얽매이지 않지요. 갈라디아서 전체 뭐냐 하면, 율법을 사람이 행함으로 지켜서 의롭게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자 같은 경우에는 육체에 해당되지 않고 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이미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출생부터가 이미 의인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 사람이 바르게 산다는 뜻이 아니고,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의가 잠입되어 있다.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가서 이 자유자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한 바대로 운전대를 잡고 주님께서 그 인생을 몰고 가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을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하지요.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행함과 반대되는 것이지 주님의 행함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행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행함을 믿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니까 아무것도 안 행하려고 하는데, 왜 그 사람 껍데기만 보느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하고 싶더라도 그 사람 속에 있는 주님께서 일하면 일하는 대로 움직여야지 뭘 아무것도 안 합니까?

여하간 신학에 문제예요. 모든 가능성을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요.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될 텐데 믿음 없는 인간들이 신학을 만들어서 그렇게 되었어요. 믿음이 없으니까 주님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부터 시작을 합니다. 내가 뭘 하면 주님 기쁘시게 할까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 모르는 목사들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듣기 역겹습니다. 그래도 듣는 것은 하나라도 힌트를 얻을 것이 있을까 싶어서 듣기는 들어요.

자유자의 특징은 인간의 어떤 시도를 통해서도 자유자를 만들어 낼 수 없고 주도권이 어머니에게 있어요(갈4:26). 어머니가 하는 일이 뭡니까? 애 낳잖아요.

제가 어렵게 강의한다고 저를 원망하지 마세요. 사도바울이 어렵게 써 놓았어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세상에! 잉태치 못한 자에게 무슨 애가 있습니까? 그런데 잉태치 못한 자의 자식이 잉태한 자의 자식보다 많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숫적으로 많다는 뜻이 아니고, 너희는 잉태치 못했으니까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없다고 생각했는데 있게 되니까 이것을 많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특이하게 발생한 자의 특징이 뭔가 하면 자유가 뭔지를 아는 것입니다. 법 자체로부터, 온갖 쏟아지는 모든 법으로부터 우리는 벗어난 신분이란 것을 아는 거지요.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좀 힘들더라도 참으세요.
이 육체에서부터 육체에 속하지 않고 성령에 속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다음에 이야기하는 것이 뭔가 하면, 이미 우리는 육체에 대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육체에 대해서 죽었고 성령에 대해서 산자라고 했어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철학적으로 봐서 인간은 하나의 신체를 갖고 있고, 이 신체는 살았느냐 죽었느냐 둘 중 하나이지, ‘죽었으나 살았고, 살았으나 죽었다’ 이 말은 붙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포가 활동하면 산 것이고 세포가 활동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고 그렇습니다. 하나의 개체가 죽었으면 죽은 것이고 살았으면 산 것이지, 죽었는데 살았다 살았는데 죽었다는 소리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의 시체를 보고 죽었다고 보는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육체에 속한 과학적인 인식에 불과하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따지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은 성경대로, 약속대로 사람을 볼 줄 알아야 그것이 사람을 보는 것이지, 너희들의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사람을 봐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이미 어디에서 죽었고 어디에서 살았느냐 그렇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이것도 우리가 과학적인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육체에 대해서는 죽었고 성령에 대해서는 살았다. 라고 이야기를 해야 한단 말이지요. 성도에 대해서는.

루터가 이것을 못 풀었어요. ‘죽었는데 살았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쪽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맞추려 하다보니까 어려운 거예요. 그게 맞춰 집니까? 안 되지요.

이 갈라디아서에서 성도는 너무나 특이한 존재이기에 이것을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육체에 대해서 이미 죽었다는 말은, 육체에 대해서 왜 죽었습니까? 육체에 대해서는 이미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 앞에서 살 자가 누가 있습니까? ‘오른손이 범죄하면 그 오른손을 잘라버려라’ 했을 때, 안 자르면 죄 짓는 거예요. ‘맹세하지 말라’고 했는데 늘 맹세해요.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지만 염려 안 할 수 있습니까?

만약 오락실에 가지 말라든지, 편의점에 가지 말라고 했다면 그것은 지킬 수 있는데,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불가능해요. 염려는 안 하고 싶어도 나오는 것이 염려입니다. 염려는 우리 말 안 듣습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된다면 걱정 없게요. 앞에 절벽이 있는데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 이것이 됩니까?

염려하는 것은 이미 우리 선을 떠난 거예요. 염려는 자연 발생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육체를 받았기 때문에 육체는 죄의 종으로써 그 습관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성도는 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육체로써 염려하지만 이 성령이 오게 되면, 1초 혹은 2초 정도의 짧은 순간이지만 염려하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그래, 염려한다는 자체가 내 신분을 망각한 거야. 죽어도 성령 안에서 이미 살았는데, 나는 이미 영생 얻었는데, 부활인데 왜 자꾸 육체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하고 생각하면 2초 지나갔어요. 그러나 또 2초 지나고 나면 또 염려가 되고 그래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24시간 염려하지 않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성경에 나오지요.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이 염려하지 않으니까 자신을 따라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뭔가 하는 것을 자꾸 이야기합니다. 약속이 이러하니까 그 약속이 지금 너에게 그 약속대로 성취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와 실제 그런 활동이 지금도 너를 향하여 임하고 있음을 너희들이 눈치 채라는 것입니다.

매일 세상 염려 때문에 벌벌 떨지 말고, 지금 하나님의 약속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염려할 것이 뭐가 있느냐 근심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1장의 내용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서론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길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1장 5절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보세요.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가 요청한 적이 있습니까? 이미 하늘에 있는 어머니가 나를 낳았으면 이제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어머니 소유예요. 그러면 성령 안에 누가 계십니까? 성령 안에 예수님이 계시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권한으로 우리 허락도 없어 그냥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와서 우리가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만 받는 것이 아니고,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라고 했지요. 이렇게 해서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하루하루 깨닫게 하는 그 일을 주님께서 지금 벌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가끔 그런 이야기합니다만 “예수 믿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데, 예수 안 믿는 것도 믿는 것 이상으로 힘듭니다.” 그래서 무안 교회 교인들은 참 힘들어요. 목사님 설교를 믿고 싶어요. 그런데 안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해요. 안 믿어지니까, 자기 존재를 공격하니까 원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원한은 어디에서 풀어야 합니까? 신에게 풀어야지요. 예수님께 풀어야지요. 풀면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정당하다. 그래서 목사 같으면 과연 정당한지 심방을 가고 이야기를 해 주란 말이지요.

그렇게 정당성에 대해 목사가 지적하면 그들은 또 뭐라고 합니까? ‘목사님처럼 믿은 좋은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믿음 없는 우리들은 어쩔 수 없는데--’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면 안 정당하네.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제가 신약성경 전체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이 사도서신에 되풀이 되어 젖어듭니다. 마5:11-12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으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이 8복 가운데 맨 마지막 복이지요. 핍박 이것이 복입니다.

신약에 보면 무엇이 복입니까?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복입니다.

우리가 사도서신을 빼버리면 어떻게 설교되는가 하면,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읍시다.’ 이렇게 나와요. 합시다. 이런 식으로 나와요. 이것은 엉터리 설교 아닙니까? 엉터리 설교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가 하면, “성경에 ‘사랑 합시다’해서 ‘우리도 사랑 합시다’라고 주장했는데 뭐가 나쁘냐?”는 것이지요.

이런 주장에 대해 복음 아는 자들은,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주장과 같은 주장이다. 적어도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면, 당신 속에 진짜 그리스도가 있다면 성경에 ‘사랑 합시다’ 라는 말이 있기에 나도 목사 값 하느라 ‘사랑 합시다’ 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나는 이 말씀을 들을 때 목사의 입장에서 이런 고백이 되더라 하는 자기가 느꼈던 신앙적인 고백을 내 놓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나는 목사이고 너희들은 성도니까 내가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오지요. 성도 앞에 본인이 참된 신앙을 고백할 생각은 않고 금방지게 남들을 가르치려 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가르치게 되면 요일2:27의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고” 라는 말씀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나는 신앙생활 이렇게 합니다.’ 라고 고백해야 하는데 자꾸 가르치려 하는 거예요.

과거 저랑 같이 성경공부 했던 많은 분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그 사람들은 ‘하나님보시기에 정당하게 가르치는 것이 뭐가 있을까?’ 하면서 가르칠 내용을 얻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본인이 이 말씀 앞에 어떻게 살았는가는 이야기 안 하고, 나는 일단 목사니까 참 잘 가르친다는 소리 듣고 싶고, 이렇게 잘 가르치면 하나님이 교인들을 보내 주셔서 교회가 부흥되는 보너스까지 주시지 않겠느냐는 그런 기대를 하고 온 것입니다.

제가 전한 것은, 얼마나 잘 가르칠까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얼마나 낮아져야 하고, 죽어야 마땅한 죄인인 것을 깨닫기 위해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같이 공부하는 분들에게 수백번 했습니다. 들으면서 다들 ‘아멘’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딴 소리 합니다.

아마 오 목사님도 그 과정을 가고 있을지 몰라요. 그 사람들처럼 간다는 말이 아니고. 못 알아듣는 그 괴로움을 느끼는 길로 갈지도 몰라요. 이 말도 조심해야 되는데.

목사는 교인들에게 ‘우리 다같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라고 외쳤는데, 듣는 자들은 그것을 반기지 않고, 자신들이 훌륭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달라는 식으로 목사 설교를 기대하면 참 고란하지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그 이야기가 사도서신에서는 더 포괄적으로 더 구체적으로, 이제는 배경이 바리새인 배경이 아니고 모든 인류를 배경으로 ‘육체에 속한 자 나와라. 정체 그만 숨기고, 에서같은 인간은 빨리 에서라고 고백해. 그리고 야곱같은 택한 백성은 따로 있는거야.’ 라는 식으로 선포됩니다. 물론 성령이 배후에서 그렇게 역사하지요.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그대로를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성령하나님도 예수님께 종속되는데 감히 우리 인간이, 그것도 더러운 죄인이 가끔 예수님을 이탈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요?

5절을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 우리 허락 받고 고난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무작정 쳐들어 온 것입니다.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 이것도 우리 허락 받고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위로가 넘치는 사건들을 만나고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19-20절을 봅시다.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든지 ‘예’가 되는 경우가 누구 안에서 그렇습니까? 1) 내 안에서. 2) 예수님 안에서.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예’가 되지요. 모든 것이 실패가 없고, ‘아니오’가 없고 완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실수나 오류가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는데 누구 안에서만? 예수 안에서. 그런대 우리는 착각하기를 내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계시지요. 예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는데 우리 허락 받고 예수님이 들어왔습니까? 나에게서부터 하는 것이 되면 내가 하는 일이 예수님의 일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완전한 자입니다. 이런 논리가 됩니다.

나에게서부터 예수님께로 가면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내가 도적질해도 예수님이 도적질 하는 것이 되고, 내가 잘못하면 예수님이 잘못하는 것이 된단 말이지요. 그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논리가 예수님 쪽에서 나에게로 가게 되면, 약속이 배경을 깔아요. 무슨 배경? 육적인 배경을 깔고 그 다음에 약속이 나온단 말이지요. 이것이 분리돼요. 두 언약으로.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활동하는 순간순간 나는 죄인으로 드러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자기 약속을 자기가 이행하시므로 말미암아 덩달아 죄인이 날마다 용서받고 구원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에서 출발해서 나에게로 가야 이것이 옳은 신학이고 옳은 복음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옳은 설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보통의 경우는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아요. 나로부터 출발해요. 나는 거듭났다. 나는 새 사람 되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뭐가 됩니까? 나보고 죄인이란 소리 그만 하란 것이지요. 나는 이제 의인 되었다는 것이지요.

신학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신학을 전개하면 되겠네요?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문제를 출발하게 되면 그 신학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예수님과 내가 하나는 의인이고 하나는 죄인으로 갈라져서 계속 가야 합니다. 이것이 결합되면 안 돼요. 그러면 나는 예수님 앞에 죄인 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게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십자가 신학]입니다.

십자가 신학으로 출발해야만 하는 이유가 나는 십자가를 안 졌습니다. 나는 어린 양이 아닙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야 나는 죄인으로 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로 나오니까 불신자들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당신은 왜 십자가에서만 제자리 걸음을 하고, 그곳에서 왜 벗어나지 못하는가 하고 시비를 겁니다.

십자가로부터 출발하겠다고 낸 책이 뭐냐? 그 유명한 [복음의 회복]이란 책입니다. 죄를 아는 종말론, 죄를 아는 인간론, 죄를 아는 구원론 -- 이렇게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 십자가만 남은 그런 신학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신학이나 웨스트민스터 신학은 뭐냐 하면, 이제 거듭난 나, 거듭난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바른 행동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까? 나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나로부터 출발하면 여기서 남는 것이 뭐냐 하면, 반성이 나와요. 이것은 무식하게 철학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나옵니다. 모든 철학은 반성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반성하는 이성입니다.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반성하고 수정하고 이것이 인간의 타고난 이성입니다.

여기에서 이성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리고 이번 시간 마치겠습니다.

인간의 이성이란 무엇인가?
감정은 폭발적입니다. 혼돈이지요. 혼돈의 감정을 누르기 위해서 질서의 이성이 나옵니다. 혼돈에서 나오는 것을 미토스(Mythos)라고 해서 이것을 신화라 하고, 이성을 로고스라고 합니다. 체계적인 것, 앞 뒤가 딱딱 맞는 것, 이치에 맞는 것 이것이 이성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적인 사람은 양반이고, 감정에 속한 사람을 짐승같은 인간이고. 이것은 동.서양 모두 그렇습니다.
감정에 호소하는 종교를 디오니소스 종교라고 합니다. 이성적 종교를 올림푸스 종교라고 합니다. 올림푸스 종교는 법으로써 질서를 꽉 잡습니다. 그런데 이성이 질서를 잡는데 어떻게 잡는가 하면 균형과 정치적인 타협으로 나옵니다. 균형을 중국에서는 중용이라고 하지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중간쯤 하는 거예요.

앞차 깜박이 등이 고장 나서 뒤에서 박았다. 이 때 차간 거리를 유지하지 않았기에 뒷차가 책임이 커다. 그러나 앞차는 깜박이 등의 고장을 방치했기에 약간의 책임이 있다. 그래서 앞차 40%, 뒷차 60% 책임이다. 라고 법원에서 판결 할 때 이것이 판례가 되요. 이것이 균형이고 타협입니다.

올림푸스 종교는 원래 땅을 분배할 때, 똑같이 분배한 것이 아니고 착한 정도에 따라 분배합니다. 신께서는 선한 분이기에 선한 자에게는 많은 땅을 분배하고 덜 선한 자에게 좀 작은 땅을 분배합니다.

그래서 법이란 선한 자에게는 많은 것이 주어지고 악한 자에게는 적은 것이 주어지고 하는데, 사람들이 100% 선하거나 100% 악한 자가 없잖아요. 그래서 정치적인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되었으니까 법을 만들겠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검찰총장 후보에 올랐는데 A후보 B후보가 있다고 합시다. 둘 다 검찰에 큰 공로자예요. 그런데 한쪽은 전라도 출신이고 한쪽은 경상도 출신이다. 그러면 전두환이 경상도 출신이니까 전도로 민심을 얻기 위해 전라도 출신을 뽑았습니다. 자신은 여러 가지를 감안해서 공정하게 결정을 했습니다. 이것이 정치적인 타협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공정합니까? 안 공정합니까? 공정하지 않지요.

이유 없이 미운 사람이 있지요? 교실에 여러 학생이 있는데 이유 없이 미운 학생이 있어요. 이럴 경우에는 공정해야 할 올림푸스 신이 법을 깨버리지요. 그리니까 디오니소스 종교가 하는 말이, 너희들이 아무리 이성적으로 따져도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향은 다르기 때문에 공정하다고 해도 공적치 못하다. 그래서 돈 있는 놈은 교도소에서 빠져 나오고, 돈 없는 놈은 징역을 살고. 유전 무죄, 무전 유죄라. 돈 없으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돈 없음 자체가 죄가 되요. 왜 돈 없어. 돈 없이 가난한 자체가 죄인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가난 = 죄]가 됩니다.

그래서 가난의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학원 보내고, 어린 자녀를 유학 보내고 해서 어릴 때부터 의인되기 위해서 힘을 쏟지요. 그래서 디오니소스는, 왜 인간의 폭발하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데 왜 금방지게 억누르느냐. 차라리 감정대로 살아라.

예를 들면, 서울 법대 나온 대학생이 시골에서 온 술집여자와 연예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안 되잖아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되잖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사랑이란 것이 로고스로 됩니까? 이성으로 되는 거예요? 사랑은 기가 싹 빠지면서 잠을 못 이루게 하고, 지금쯤 자야하는데, 이성은 그렇게 말해도 이성은 감정을 못 이겨요.

그래서 프로이드는 인간의 이성이란 사실은 이성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감정이 있는데 이성이 중간에서 정치적으로 타협을 해서 양보를 많이 받아내서 나온 것입니다.
감정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디오니소스 종교의 특징이 뭐냐, 술 파티를 열어요. 파티에서 술에 취해 있을 때 그것이 현실이고, 다음날 술 깨서 젊잖게 행동하는데 이것을 환상으로 봅니다. 재미있지요?
디오니소스 종교에서는 감정에 충실한 것이 현실에 충실한 것이고, 감정을 억누르고 반듯하게 살아가는 것은 환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것은 행복은 이 땅에는 없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은 혼자 제 멋대로 살 수 없으니까 늘 억누르며 살다가 죽으면 로고스에서 벗어나니까 그 때 영원한 행복이 온다고 해요. 이것이 디오니소스 종교예요. 다만 미리 앞당겨 술의 제전을 벌여서 잠시 제재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이고 본 모습이고,

이에 반해서 기존의 종교는 뭡니까? 개판같이 노는 것은 짐승이고, 하늘의 형상을 입게 되면 반듯하게 사는 것이 신의 형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둘 중 누가 우세하겠습니까? 역시 로고스가 우세하지요. 왜? 땅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디오니소서 종교의 대표적인 사람은 디오게네스인데 이런 사람은 집도 없어요. 알렉산드 왕이 와서 너의 소원이 뭐냐고 물으니까 좀 비켜주세요. 햇볕 가리지 말고. 이것이 소원입니다.

땅은 너희들, 로고스가 차지해라. 나는 디오니소서 이것으로 족하다.
혹시 전 목사님도 이런 분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현실이란 바로 이렇게 자기의 감정이든 이성이든 자기한테 얽매이는데 비해서 성경은 약속이 우리를 데리고 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좀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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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