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35: 29-35 (긍휼에 의해서)
re..출 35: 29-35 (긍휼에 의해서)
이름 : 이근호(IP:)
긍휼에 의해서
2006년 3월 19일
설교 본문: 출애굽기 35:29-35
(출 35:29)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빙자하여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이러하였더라』
(출 35:30)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출 35:31)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출 35:32)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
(출 35:33)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가지 공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
(출 35:34)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출 35:35)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공교로운 일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수 놓은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공교로운 일을 연구하게 하셨나니』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도 일을 하십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어떤 태도로 임하게 될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작업이 그 사람 속에 먼저 작용하게 됩니다. 즉 그 사람은 ‘구원’을 느끼게 됩니다. 구원이란 ‘어디서부터 끄집어냄을 당하고’, ‘어디로 인도함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작업이 작용하는 사람은 ‘떠나야 될 세계’의 성격도 알고, 물론 ‘들어가야 될 세계’의 성격도 알게 됩니다.
사람의 일이란 구원의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야구 게임 같은 것은 인간들 끼리 모여서 자체적으로 임의로 정한 률을 만들어놓고 누가 누가 잘 던지고 잘치느냐 시합을 벌리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결코 ‘어디서부터 빠져나와’ ‘어디로 향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냥 정지된 상황에 집착하는 바가 됩니다.
또한 고층건물을 짓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누가 막대한 돈 대어주어서 누가 누가 제일 높은 빌딩을 건축하느냐에 관한 겁니다. 즉 정지된 세계에서, 자기네들이 임의로 만든 정지된 률 가지고 그 자리에서 성공과 실패를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하나님의 그런 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일입니다. 어디서부터 어디로 이동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멈출 이유도 없고. 또한 멈추어 서서 남들로부터 이렇다 저렇다 평가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어디로 가는 겁니까? 로마서 9장과 10장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설명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0:2-3에 보면,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겁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가한 일로 인하여 자신을 지옥에서 건져내어 천국 속에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즉 천국이라 곳이 죄인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들어간다는 점을 간파하여 자신을 의인으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겁니다. 달리 대책이 없으니 말입니다. 답답해도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의 열심은 반드시 자기 반성, 자기 회개를 수행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 자기 반성을 한다는 것조차 자신을 참으로 대견하게 평가하는 근거가 됩니다. 어쨌든 모든 인간은 자신이 자기에게 가한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해 자기가 의롭게 된다는 식으로 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보편적 행위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건져내실려고 하는 겁니다. 그 건지는 방식은 로마서 9:15-16에 나와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긍휼과 긍휼의 연속으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작업입니다. 인간들의 방식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들의 이성적인 타고난 반성력과 회개능력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이 주신 자비와 긍휼로만 구원하십니다. 그렇게해서 구원받게 된 세계로 오로지 긍휼과 자비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한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이 빠져나와야 될 세계의 성격과 자신이 들어가야 될 세계의 성경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는 이 두 가지의 상반된 것을 다 보여주게 됩니다. 즉 “나는 나의 열심히 구원받고 의롭다함을 얻고자 하는 세계를 거부하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에게만 혜택을 주는 그 세계를 고맙게 여기고 있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바를 ‘즐거이’ 드리는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바로 긍휼을 아는 자들이 만이 갖는 즐거움입니다. 즉 ‘아무 열심도 내지 않는 식으로 나 스스로를 구원시키겠다’가 아니라 ‘나는 즐거이 이동 중이다’라는 것을 즐거이 표현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브살렐과 오홀리압도 즐거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마련인데, 직접 법궤 제작에 나서는 이들이나 그들에게 법궤를 제작하도록 즐거이 바친 이들이나 무엇을 기대하면서 즐거운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부탁한 그 일이 어떤 결실로 맺어지는데 그 맺어진 결실이 다름이 아니라, 그 결실로 인해 자신들이 긍휼을 입고 있다는 것을 입증된다는 겁니다.
그 분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거룩한 일로 인하여 주의 백성들은 자기 열심히 아니라 긍휼을 입는 사람으로 간택되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긍휼을 입도록 하신 그 분을 증거하는데 뭘 주저하겠습니까. 한 예를 들면, 건축헌금을 하는데 한 사람을 10억을 낸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은 5000원을 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사실 사람들은 대다수 10억을 낸 사람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10억을 낸 사람이나 5000원을 낸 사람이나 모두 ‘결실’이라는 점을 주목하는데 있어 시험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긍휼을 주신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그 사실만 증거되기 위해서 헌금을 했는데, 흔히들 헌금한 그 당사자에게 시선이 모아진다면 이것은 잘못된 결실을 주목한 셈이 됩니다.
즉 자신들을 ‘인간의 열심’에서 ‘하나님의 긍휼의 세계’로 빼내지도 못할 자에게 헌금의 의의가 집중된다면 그것은 헌금을 잘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이 드렸다고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이란 오로지 주님만 의롭고 거룩하다는 점을 지시하는 방향으로 실시됩니다.
법궤를 만드는 공작기술은 자칫하면 성령을 받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흉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감히 거룩을 생산해내는 법궤 제작을 맡기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은 인간의 열심 이나 노동의 가치를 일절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뭔가 이동하는 의식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비난받기 쉽습니다. 즉 ‘왜 이 현실 세계를 무시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관심두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거룩한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긍휼에만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끄집어내어 주는 주님의 자비를 우리가 무시하지 않게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