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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20060307 부산강의-화이트헤드강의[신학]

Re..20060307 부산강의-화이트헤드

이름 : 한윤범(IP:)

20060307 부산강의-화이트헤드
(강사:이근호 목사)

화이트헤드가 베르그송의 뒤를 이어서 세상에 지금까지 내려왔던 존재 중심의 신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다시 한번 해볼게요. 뭐가 문제인지 한번 보세요. 뭣 때문에 시비 거는지.

신이 존재한다면, 존재자라면, 이거는 어떤 분이죠. 어떤 대상이 되는 겁니다. 대상이 돼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이 신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 대상의 객체가 돼버리고 말아요. 그렇다면 이 객체와 대상 사이에 아무리 간격을 좁혀도 좁힐 수가 없겠지요. 좁혀지질 않는 걸 가지고 좁혀진다고 거짓말이 여기에 유통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무슨 신이 아픈 신이 다 있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무슨 신이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그런 신이 다 있겠습니까? 그러니 인간이 아무리해도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몸이 아프고 날씨가 점점 봄 되면 쳐지는데 뭐, 이런 신이 다 있어요. 몸 쳐져서 일 못하는 신이, 기억력 떨어지는 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신들께 올라가도 다시 내려오듯이 올라가고 내려오고, 올라가고 내려오고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계속 신이 구체적으로 잡히질 않는 겁니다. 누가 가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신을 거론하니까 어떤 의심이 드느냐 하면, 신을 핑계 삼아 자기 야욕을 챙기는 게 아닌가? 뭔가 신은 들러리고, 하나의 그림의 배경에 불과하고, 사진 찍을 때 원래 배경 근사하게 하고 가상으로 그림을 그려놓고 그 안에 폼 잡고 있는 건 자기잖아요. 어디 배경 그림 찍으려고 사진사가 찍는 것 아니잖아요. 어디 비껴보소. 이렇게 찍는 건 아니란 말이죠.

결국 인간이 신을 걸쳐 놓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지금 허하니까 지가 보기도 별 자기가 마음에 안 들어. 신을 배경으로 깔아 놓으면 신과 가까이 한다는 그걸 핑계 삼아 자기의 가치를 높이려는 그러한 헛된 짓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느냐 하는 의심들이 확~악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텐데. 그럼 신이라는 것이 그동안 쭉 내려왔던 신의 개념이 뭐냐? 라고 이렇게 많은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검토해 보니까, 신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무한의 무한, 계속 무한 가운데 또 무한이 있겠지요. 무한의 무한으로 그걸 총 마지막으로 도착 지점으로 생각하는 것이 신, 또는 신의 세계, 또는 신성이라 이렇게 보는 겁니다.

특히 1859년에 다윈의 진화론이 히트를 칠 때 상대적으로 누가 위축되었느냐 하면, 철학계가 위축이 되고 말았습니다. 과학은 한 건수 올리는데 철학은 뭐하고 있노?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철학 계에서 다윈의 진화설이 뭐냐 하면, 모든 자연물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돌연변이, 과거에 있던 종류들에서 돌발적으로 새로운 종이 튀어나온다. 이걸 다윈이 여행을 하면서 갈라파고스 섬에 가서 자료를 해서 그런 가설을, 아마 이렇게 될 걸, 했단 말이에요.

이러한 진화론의 가설에 의하면 뭐가 필요하냐면, 신이 새삼스럽게 활동할 필요가 없어요. 신은 뉴턴 이후에 신은 그냥 한가하게 높은 천국에서 그냥 산보나 하시면 되는 어른이십니다. 이제 이 지상의 문제는 신이 일단 만들어 놓은 것이 저절로 굴러가는 체제다, 시스템이다 이렇게 봤지, 신이 새삼스럽게 분주하게 또 새로운 종을 만들고 이러질 않고 이왕 만든 종에서 새로운 종을 만드는 것이 세상 일어난 모든 것을 그렇게 신을 젖혀놓고 인간이 이런 걸 알았다는 말은 결국 진짜 인간은 자연의 왕 노릇을 제자리를 찾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이 왕.

이것은 생물학에서 있어서의 진화뿐만 아니고 그동안 하나님 몫으로 여겼던 사회발전, 건전한 사회, 더 나은 유토피아 건설, 인간들의 사랑으로 더욱더 사랑이 흐르고 넘치는 그러한 사회구성, 이런 것도 진화하는 인식을 갖고 있는 인간에 의해서 발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신의 능력은 신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일단 어디에 거치느냐 하면, 인간의 내부에 와서 인간의 내부에서 잠재력으로 가능성을 발휘하면 그게 곧 사회발전인 동시에 신의 발전이죠. 신께서 원하시는 유토피아 세계를 연다 말이죠.

이렇게 신의 주신 이것을 인간 속에 내재하는 것을 우리가 공부했듯이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이성이라고 합니다. 이성이란 쉽게 말하면, 똑똑함, 명철함, 명석함, 지혜로움, 합리적인 것, 논리가 딱딱 서는 것, 논리가 빈틈이 없는 것. 이러한 이성에 눈을 떴다고.

이걸 계몽이라고 하는데 이성을 눈을 뜨는 걸 칸트인데 이렇게 이성에 눈을 뜨고 시작하고 난 뒤부터는 이게 기독교만 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전부터 이성이 신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신의 형상이 우리 속에 있다. 영혼이 이성적으로 하게 돼있다. 그 영혼이 이성적으로 흘러가는 이유가 신이 이성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플라톤 같은 철학자 경우에 신은 어디에 포진하냐면, 이념의 세계, 이데아 세계, 이것은 사본이 아니고 본질이에요. 원판이고 원본이에요. 플라톤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것에 대한 하나의 모방이고 그림자에 불과한 겁니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와 약간 다르긴 달라요. 아리스토텔레스와 비슷한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림자의 원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가운데 원본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개념적으로 원본이 있다. 이런 차이점이 있는데 이거나 저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쨌거나 여기에 선배들, 이 사람은 기독교 나오기 500년 전에 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기독교와 상관없습니다. 기독교와 상관없이 신학은 뭐가 돼요? 인간학이 되는 거예요. 신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이, 인간의 자기 능력을 자기한테 최면을 걸고, 나는 하면 된다, 하면 된다. 이것이 뭘 대신하냐 하면, 해주세요, 해주세요. 기도한 것을 대신하는, 대체하는 겁니다. 기도 한번 해주세요. 라고 해주세요라고 의존할 필요 없이 네가 하면 될 것 아니냐? 마치 오병이어 같아요. 네가 가진 것은 네가 하면 안 되겠냐? 이미 내가 가진, 사람들은 그동안 이 사람들을 비웃지요. 옛날 사람들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신을 찾느냐 하면, 자기 속에 엄청난 것이 들어 있는 것도 모르고 자꾸 외부의 엄청난 전능하신, 자기가 전능한 걸 모르고 외부에 전능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는 뭐냐 하면, 외부의 전능하심과 나의 전능함이 결합될 때 전능하심은 곱빼기가 된다. 이게 설교의 요지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나의 전능하심이 같이 아다리가 잘 되면 그때는 놀라만한 축복을, 놀라운 능력이 등장한단 말이지요. 여러분 희망을 가지세요.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고, 그런데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는데 내가 가만있으면 희망 안 되고 하나님이 희망 주신데서 내가 희망을 가지고 접수해 나가면 그 희망과 희망이 맞아 떨어지면, 아이고, 착하다. 이제 네가 야망을 가지는구나. 그러면 야망대로 될지어다. 이렇게 돼서 이제 네가 날 믿는구나. 나의 능력을 믿는구나. 이래서 놀라운 일종의 자기 최면, 집단최면에 빠지는 거지요. 그것 가지고 장사해 먹는 건데. 참, 상품 없이 장사해 먹는 거죠.

사람 속에 있는 자기 욕심을, 욕망을 들추어준다는 그걸 대가로 돈을 받는, 그게 한국교회지. 악마의 종이죠. 아주 완벽하게 악마의 종이 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아주 악마를 좋아하니까.

철학자의 선배들이 이성에 대해서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이런데서 기독교를 거론하지 않고도 다 해왔더란 말이죠. 이성의 잠재력을 발휘하는데 자,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여기 과거에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의 원칙이 성경처럼 확장한 게 있어요. 모순율, 배중률, 그 다음에 동일률 하는 게 있는데.

모순율은 A는 결코 A 아닌 것이 아니다. 그 다음 두 번째가 A는 A와 같지 않다. A는 A다. 따져보면 전부다 세 가지 같은 이야기에요. 배중이라 함은 배척한다 말이에요. A가 A 아닌 것을 배척한다. 모순율이라 하는 것은 A가 A 아닌 것과 같을 수가 없다. 는 겁니다. A는 A다. 이 말이죠. 따져보면 다 같은 이야기인데 왜 이걸 모순율, 배척하는 배중률, 동일률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를 끌고 가느냐 하면, 가장 확실한 게 뭐냐? A는 A다.

A에다가 그럼 뭘 집어넣느냐? '참'을 '진리'를 넣어 보세요. 그러면 진리는 비진리와 같지 않지요. 모순율이 됩니다. 진리는 진리를 배척하지요. 배중률. 진리는 오직 진리뿐이다. 이게 동일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고 철학자 아닙니까? 신을 형이상학이라 하니까 신을 하나의 객체라 보고 또 자기를 주체라 보니까 마치 이러한 율, A는 A고, 신은 신이고, 나는 나다. 이렇게 되는 것 같은데. 복잡해지기 시작하는데. 칸트도 그걸 발견했는데요. 만약에 주체가 객체 속에 있다면, A가 A 아닌 것이 될 수가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그레타 섬에 사람은, 에피베네테스가 그런 얘기했어요. 그레타 사람들은 거짓말 장이다. 라고 했을 때, 한번 적어 볼게요. 그레타 섬사람은 거짓말 장이들이다. 라고 했을 때, 이것이 자기는 누구냐 하면, 그레타 사람이에요. 이것이 만약에 진리 같으면 그레타 사람은 전부다 거짓말 장이이기 때문에 자기는 지금 거짓말로 진리를 이야기하는 게 돼요. 다시 말해서 거짓말로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건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말하나 마나에요. 거짓말이라고 했으면 자기가 빠져야 되는데 자기는 거짓말장에 자기가 포함되니까 이 철학자가 그레타 사람이라니까요. 마치 중이 남의 머리 깎으면서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와 똑같은 거예요. 그럼 지는 중 아니란 말인가요? 지, 중인데.

다시 할게요. 그레타 사람은 거짓말 장이다. 했을 적에 이 말이 진리가 된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냐 하면, 그레타 사람이 거짓말 장이라고 하는 당신은 누구냐? 나, 그레타 사람이다. 그 사람 맞거든요. 그레타 사람이 그럼 거짓말 장이라고 하는 것이 거짓말이 돼버렸어요. 다 거짓말하고 한 사람만 있다 이렇게 돼야 된다고요. 거짓말됐다고요. 그러면 그레타 사람이 거짓말을 잘한다 하면, 그레타 사람은 거짓말한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고, 자기만 거짓말 장이고 자기 빼놓고 나머지는 전부다 거짓말 모르는 사람이 돼버려요.

이것은 뭐냐?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주체와 객체가 끊어진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이게 맞아요. A는 A 맞는데, 주체가 객체에 어떤 식으로 관여가 된다면 자기가 자기를 욕하는 셈이 된다고.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평가가 불가능해져 버려요.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평가가 불가능한데 무슨, 불가능하다는 나도 내 모른다니까. 내가 나를 모르는 이 마당에 무슨 진리를 외치고, 거짓을 이야기하느냐 이 말이에요. 내가 다 모르는 상태에서. 그렇다면 그가 신은 무한의 최고의 자리에. 라는 그것이 거짓말일 수가 있다는 말이에요.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자기 자신이 모르는 내가 내뱉는 신이라는 개념이 그게 옳을 수가 있습니까? 거짓말이 되지. 고민이다. 이게 큰 문제가 됐어요.

또 한 가지가 뭐냐 하면, 몇 가지 예를 들면, 내가 빨강색을 좋아한다. 할 때 빨강색 전부가 자기에게 종속됩니까, 포섭됩니까? 하는 문제가 생겨요. 이것 이야기하기 전에 이건 더 어려운 문제인데 쉬운 문제가 있어요. 쉬운 문제라는 게 이거에요.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죠. 그렇다면 인간이 죄를 짓는데 대해서 신이 책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쉬운 문제에 속하는 거예요.

신은 참되고, 인간은 거짓 된다고 이렇게 주체, 객체를 나눠버리면 뭐가 문제냐 하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자기가 만들어내면 그것은 지 잘못이 되겠는데, 인간이란 존재도 자기가 만든 게 아니고 자유의지도 자기가 만든 게 아니에요. 어떤 식으로도 신이 이 일에, 작업에 관여를 하게 되었다 말이지요.

그런데 인간과 자유의지가 죄가 된다면 결국 신은 어떤 의도이든 죄와 관련이 있고 죄의 책임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신은 죄악된 신이 돼버려요. 신은 죄악이 된다고. 신 자체가 죄짓는 신이 된다고. 그런데 동일률에 의하면 죄와 의는 같을 수가 없어요. 죄이면서 의고, 의이면서 죄고. 이건 말도 안돼요. 사과인데 바나나, 바나나인데 사과. 그거는 시장에서 아줌마, 바나나 주소. 아, 사과 말입니까? 사과 말고 바나나. 분명하게 잘라야 돼요. 사과는 사과고, 바나나는 바나나란 말이죠. 신이면 신이고, 이거는 인간인데. 하나의 사물에 관해서는 그게 구분이 되는 것처럼 보여요. 나중에는 그것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게 사람의 사고에는 생각에는 사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라든지, 행복 이런 것도 포함되고, 거짓말 이런 것도 포함된다고요. 이런 것도 포함되고 여자, 남자도 포함된다 이 말이죠. 그럴 경우에 ( )같은 경우에 내 속에 여성성이 있다면, 내가 여성성이 있다면 내가 어떻게 여자라고 공격하는 것은 곧 나를 공격하는 것. 나는 여자는 싫어! 라는 것은 그건 내가 나 싫다는 뜻이고, 여자 싫어하는 나는 싫다. 이런 뜻이에요. 그럼 나는 여자 싫어하는 것은 거짓말 장이고, 나는 여자 좋아. 하는 뜻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여자 안 좋아하는데 우에하노. 실제 마음은.

한 가지 예를 들면, 이게 가만히 따져보면, 뭔가 사람들은 그냥 대충 넘어가요. 따져보면 문제 안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뭔가 다 엉터리에요. 시간 같은 개념도 그런데.

특히 여기 물이 있잖아요. 물을 놓게 되면 이 탁자는 물 놓은 탁자가 돼요. 그런데 물이 안 나오면 이것은 탁자가 있는 줄 몰라요. 물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탁자와 물의 경계가 발생됩니다. 경계가 발생됨으로서 말미암아 이것은 물이고 이것은 물이 아닌 물을 놓은 탁자다. 라는 새로운 경계가 발견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물은 이해하기 쉽지요. 아, 물이 오기 전까지는 탁자가 있는 줄 몰랐는데 물, 어디다 놓지. 탁자에 놔야겠다. 라고부터 탁자가 발견되는 겁니다. 아, 물 놓을 만한 탁자가 있네. 라고 비로소 탁자가 눈에 띠는 겁니다. 내가 물이 있음으로서 물이 없을 때는 탁자라는 게 의미가 없어요.

내가 없을 때도 있겠지요. 내가 지금 여기 부산에 있을 때 대구에 무슨 사건이 벌어집니다. 대전에 어떤 차사고 박을 수도 있고. 차사고 박든 안 박든 간에 그게 나한테는 의미가 없다니까, 의미가. 의미가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길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 하면, 그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 같으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가 없는 것은 그 사람 없는 거예요.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없음이라는 용어입니다. 성경에서 없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의미 없다는 말이에요. 이거 성경해석 처음부터 다시 다 해야 돼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사건화 되지 않은 겁니다.

제가 또한 예를 들게요. 이건 좀 어렵더라도 분명히 해야 되니까 어렵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엉덩이에 종기가 안 나았거든요. 그런데 종기 안 난 것에 대해서는 나한테 의미가 안 되고, 사건이 안돼요. 그런데 어느 날 아프단 말이에요. 종기가 났단 말이죠. 종기가 난 것부터 시작해서 종기 나기 전의 고마움과 종기 난 후의 괴로움의 경계가 발생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동안 나에게 종기 안 난 은혜를 주셨잖아요. 주셨지만 나는 그걸 은혜로 보지 않고 왜 나는 수입이 500만원 안 되느냐? 이것만 자꾸 따지는 거예요. 신이시여, 500만원 주옵소서. 그러니까 주님께서 은혜라는 사건을 계속 왔는데 백날해도 내 마음은 교만해서 종기 안 난 것은 500만원짜리 가치가 없어. 종기야, 종기약 붙이면 얼마 됩니까?

만약에 암에 걸렸다고 합시다. 암에 걸리면 500만원 획 날아가 버립니다. 한달에 500만원, 암에 걸리면 다 날아가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암에 안 걸리게 하신 은혜의 사건에 대해서는 그걸 은혜인 줄 몰라요. 그것은 당연지사인 줄 알고 딴 거 신경 쓴다고. 와, 우리 애, 서울대 안 보내주냐고. 이거만 신경 쓴다고. 마치 자기 암에 걸리니까 비로소 암에 걸리기 전과 암에 걸린 후가 자기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은혜를 안 주신 것이 아니고 은혜를 계속 주셔왔지만 우리는 그걸 사건화 못한 거예요. 그걸 하나의 은혜라는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짜증을 내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은혜인 줄 다 아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는 다 알아요.

에이, 이왕 이야기한 것, 더 어렵게 나가보자! 여러분들, 초등학교 때 소풍간 적 있지요. 초등학교 때 소풍을 어디로 갔습니까? 초등학교 한 2학년 때 계산하면 기억나지요. 2학년 때 대충 단골로 가니까. 여러분들이 잠시 사고 실험을 해보세요. 지금 여러분들 초등학교 2학년입니다. 선생님하고 같이 손잡고 하나, 둘 갔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앉았다 생각하고, 그러니까 지금 30년 후를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될까 생각해 보세요. 목사가 될 줄 알았습니까? 몰랐지요. 그런데 그때 소풍 갔던 자리가 지금 아파트가 돼있지요. 그런데 지금 혼자 미래 소년 코난이에요. 혼자는 지금 45, 50 된 이야기를 다 알아요. 그런데 다른 친구는 다 모르는 거예요. 애야, 여기 아파트 된다. 이러면 귀 싸대기 맞아. 저 선생님, 저거 몇 년 뒤에 죽어. 다 아니까. 옆에 애가 얘, 미쳤어요. 미쳤다고 할 것 아니냔 말이에요.

묵시세계는 예수님은 다 알아요. 다 알아서 베드로가 제가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까? 할 때 뭐라 했습니까? 닭 우는 것도 아시고,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는 것도 아시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인자가 고난을 받는 것도 아시고,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다시 되살아나는 것도 아시는 거예요. 다 아시는 상태에서 발언을 하시는 겁니다.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씀 속에 뭐가 있습니까? 미래까지 다 포함된 의미가 담겨 있고, 사건이 담겨 있지요. 이걸 예수님은 뭐라고 하냐? 이걸 은혜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나 제자들은 미래를 몰라요. 다만 자기가 꿈꾸는 미래상은 있을 거예요. 예수님 모시고 하늘나라 좌우편에 앉고, 뭐 어떻고, 지금 예수님께서 기적을 막 베풀어 주시면, 사람들은 예수님, 예수님, 하는데 베드로의 예상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는다는 것이 안 들어 있는 거예요.

지금 맞아요. 그걸 그대로 우리가 적용시켜 봅시다. 정판옥 목사님 안 오셨지만 정판옥 목사님, 너는 사람들에게 고난 받고 죽는다. 이렇게 하면 정판옥 목사님 환장할 거예요. 내가 왜 죽어. 내가 왜 죽어. 지금 애도, 애가 셋이지요? 내가 왜 죽어. 이럴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고 난 뒤에 부활까지 내다본다고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다 아시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죽는 것이 은혜인 줄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은혜고, 예수님 하는 모든 사건이 은혜인데 성도 같으면 그런데 성도라 자처하면서도 주장하면서도 성도 맞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죽는 것이 은혜인 줄 모르는 거예요. 사업이 망하는 것이 은혜인 줄 모르는 거예요. 안 망해야 되는 거예요. 왜? 자기 나름대로 따로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 소풍 간 얘기 해 봅시다. 애, 너희 아버지한테 이야기해서 이 땅 사놔라. 이거 10년 내에 100배 올라. 그 무슨 아파트인가? 아마 새 부산 아파트인가 있을 거야. 얘, 미쳤어요. 선생님 얘, 미쳤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뭡니까? 출생 전부터도 이미 은혜였고, 출생한 것도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것까지 비롯해서 마지막 하늘나라에서 면류관 반납 드리면서 찬양한 것까지 일괄해서 예수님이 전부다 스케줄 맞춰서 다 진행시킨 거예요. 우리 힘으로 자신의 주신 은혜를 변경할 수 없는 이유가 왜냐하면 우리는 변경하고 싶어도 주님 앞에는 그게 사건화, 의미 없는 거예요.

주님이 의미 있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도 먹든지 마시든지 예수님이 은혜 주셨다는 게 의미 있지, 이거 하나해서 한 건수 올렸다, 돈 더 벌었다. 이건 의미가 없는데 우리는 내 의미를 내가 만들어 가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철학의 한계입니다. 이게 철학자들의 한계에요.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무엇까지 알았냐 하면, 시간이라는 것이 시간이 있어서 그 시간에 무엇을 시간 맞춰서 뭘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라 하는 것은 내 주체가 의미를 줄 때 나란 주체가 의미를 줄 때 그 의미 주는 것만, 그러니까 사건처럼 다가와요. 사실은 이 건물을 유지하는 것도 사건인데 이건 당연히 유지하기 때문에 사건화되질 않아요. 집에서 할머니가 방망이 가지고 빨래를 두드릴 때 이것은 툭탁툭탁 사건화되질 않아요.

그러니까 어떤 방망이에 이승엽이라는 사람이 방망이를 가지고 3월 5일 오후 8시 반에 8회초에 투수가 던진 공하고 방망이하고 물리적인 접촉이 있을 때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두 점 홈런이거든요. 그것도 황태자 앞에서. 일본은 쇼크에 빠져 버렸거든요. 분명히 그 사건은 주님한테 중요한 사건이 아니에요.

차범근 감독에겐 한 골 넣는 게 중요한 사건이지만 주님은 중요한 사건도 아니에요. 차범근이가 기도할 때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는 그것이 사건이에요. 왜? 평소에 숨쉬는 것도 사건이에요. 이게 주님의 은혜인데 내가 나 된 것이 은혜인데 그걸 모르고 한 골 넣어야 된다니까. 2:1로 일본에게 한 골 넣어 역전돼야지 사건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에게 기억을 한다는 게 뭐냐 하면, 기억을 해야 거기서 뭐냐 하면, 의미가 생기고, 사건 되거든요. 기억하는 것은, 기억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가 주체며 신이라 하는 것은 내가 만든다는 거예요. 여기에 포이에르바하가 나옵니다. 그래서 포이에르가 놀리는 거예요. 다 철학공부하고. 신이라는 것은 네가 만들었다.

예를 들면 신은 사랑이다 할 적에 신은 이거는 무한으로 넘겨 버리니까 나하고 상관없는 거고, 사랑은 내가 느끼는 거니까 이게 주어고 술어거든요. 술어 안에 주어가 포섭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신은 뭐냐? 사랑받고자 하는 내가 만들어낸 사랑신이에요. 왜냐하면 술어와 주어가 끊어질 수 없기 때문에. 둘은 같이 가야 돼요. 따로따로 갈 수가 없어요. 서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사랑인데 나는 내 사랑은 부족하니까 사랑한다 해놓고 화내니까. 사랑의 최고 사랑이 뭘까? 그땐 누굴 불러야 돼요? 이때는 관계없이 최고의 사랑이니까 신의 사랑을 불러와야 돼요. 그러니까 신의 사랑이라고 믿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내가 만든 의미화의 주체가 돼버려요. 그것 때문에 사건화시켜서 그래요. 이 사건이 괜찮은 사건 같으면 은혜고, 나쁜 사건 같으면 저주고.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이제는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그만 두세요. 라는 뜻이에요.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나니. 라는 것도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할 때에 자기는 십자가에 못 안 박혔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뭘 알았느냐 하면, 그 십자가 사건만이 모든 구약의 말씀이 집약했던 유일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거든요.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 백번 일어나도 그게 나한테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또 죽었네, 이럴 뿐이지, 사도 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자기로부터 이미 자기는 다메섹에서 죽은 자니까 저쪽으로 이동해 버리는 거예요. 이동하고 난 뒤부터는 최고의 사건은 십자가 사건뿐이지 내가 봉사하는 것은 사건 축에도 안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봉사되고 눈이 감기고, 내가 고난 받는 것도 의미 없는 건 아니에요. 이제부터 의미 있는데 어떤 의미냐 하면, 십자가를 증거하는 영광성 속에서의 의미라. 내가 매를 맞고, 고난 받고, 내가 수고하고,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고, 이렇게 하는 것도 십자가의 의미를 나의 인생 통해서 되새기는 것이에요.

이렇게 고생해도 구원받네. 이렇게 고생해도 나는 천당 가는 건 지장 없어. 이렇게 고생해도 구원은 완료된 거야. 내 운명은. 너도 예수만 믿으면 네가 어떤 일이 발생해도 이미 완료된 신분이야.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로 하여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하의 자리에서, 최저의 자리에서 돌아다닌 사람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란 말이에요. 예수 십자가를 믿으란 말이죠.

그게 어떻게 인력으로 됩니까? 저쪽에서 자기를 버리고 건너가는 거예요. 십자가의 영이 와서 죽여 버려야 되지요. 그것도 매일 같이 죽이지 아니하면 매일 같이 주님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것을 생각하는 게 3초 지나면 또 헤헤. 또 나의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끝나고 나면 점심 먹어야지. 또 3초 지나면 .... 만약에 점심, 문 닫아버리면 아, 하나님 은혜 안 주신다. 은혜를 왜 안 줘? 지금 점심 먹으려 가는 그 발걸음에 힘주시는 것부터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는 것도 은혜인데. 공중의 새를 보란 말이죠.

공중의 새 한번 보세요. 새가 올라갈 때만 은혜입니까, 내려갈 때만 은혜입니까? 새가 올라갔다 내려가는 은혜 속에 헤엄치고 있고 은혜 속에서 창공을 날고 있어요. 백합을 보세요. 들풀을 보세요. 잎사귀만 은혜가 아니고 꽃만 은혜가 아니에요. 그 땅, 대지부터 해서 솟아오르는 물과 전부다 해서 심지어 내일 꺾여서 불쏘시개 되는 그런 운명까지라도 꽃은 다 은혜에요. 이걸 피조물들은 알아요. 날이 날더러 전하노라.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했습니다.

혼자 낑낑대는 인간만 몰라요. 인간의 이성이 악마의 이성으로 전환됐기 때문에. 악마는 신을 찾을 필요 없다. 네가 신인데 왜 또 병신 같이 신을 찾냐? 네가 신을 찾으면 신이 아니야. 그래 신을 찾아? 어떤 식으로. 너를 신 되게 하는 신. 그게 우상 아닙니까? 구약에.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있지 않는, 그러니까 돌발적인 언약이 들어있지 않는, 가능성에 의해서 만들어낸 시내산 밑에서 만들어낸 인간들의 이성과 지혜가 짜낸 그런 송아지 우상, 그 우상을 만들어낸 신 같으면, 그건 악마가 마음대로 소유하죠. 그리고 신의 자리에 악마가 앉아 있고, 교회의 자리에 악마가 앉아 있어요. 하면 된다고. 뭐 되는데?

그래서 철학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자기 속에 있는 신의 자질과 속성을 아직도 우려먹지도 안았는데 왜 신을 찾느냐? 옛날에는 그것도 알았어요. 옛날에는 자기도 신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아직 과학이 발달 안할 때 해명할 게 좀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도 외부 신과 자기 내부의 나아감이 걸림이 됐지만 이제 과학이 발달해 버리면 뉴턴에 의해서 모든 물체는, 원칙이 결정됐잖아요.

신한테 기도한다고 해서 목성이 안 돌고, 지구가 안 도는 것이 아니잖아요. 뭔가 이것은 법칙에 의해서 우주도 우주의 법칙이 내부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과 동일해요. 너와 나의 법칙이 만난 적이 있잖아요. 그 동일한 법칙이 인간 대 인간 사이에 상호적 법칙에도 동일한 법칙이 있어요. 너와 나는 서로 영향 주고 영향 받는 거예요. 서로서로 힘이 있는 거예요.

이 힘이 뭐냐? 사회적 영향을 받는 사회를 구성하는 결집력이 되는 겁니다. 이게 사회결집력이 뭐로 바뀌느냐? 한 자, 법으로 바뀌어요. 이게 법치주의에요. 그래서 헤겔은 이 법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정확한 구조라고 봅니다. 법을 지켜야 된다는 겁니다. 왜? 법을 지켜야 된다고. 헤겔은 사회법이고, 칸트는 무슨 법? 도덕법을 지켜야 된다.

전에 함평에서 이야기했잖아요. 강의했잖아요. 착하면 복 받는다가 아니라 착해야 돼야 된다는 거예요. 왜? 복 주고 안 주고 관계없이 그게 신의 법칙이기 때문에. 그게 정언 명령이죠. 가언명령과 반대인 정언명령. 이렇게 하면 뭐 된다는 조건이 붙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착해야 되고, 도둑질 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왜? 그것이 뉴턴의 법칙에 의해서 이 세상에는 물질의 세계에만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 정신세계에도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신께서 내린 고유 법칙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법이라, 법.

그러니까 그 소리 듣고 사람들이 교회 가겠습니까, 안 그러면 칸트 찾겠습니까? 칸트 찾지요. 왜? 칸트가 더 똑똑하니까.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교회 목사들이 칸트한테 다 베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뭐가 빠졌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아무 짝도 소용없어요. 이미 예수님은 어디에 속해 버렸느냐 하면, 이미 예수님은 삼위일체에 의해서 신성으로 이미 삼위일체 논쟁에 가둬 놔 버렸어요. 들어가 버리니까 지금 신의 세계와 교회 또는 인간 세계에는 법이라는 게 있어. 제직회, 노회법, 법 지키면 되는 거예요. 얼마나 쉬우냐 말이죠. 법은 지키기 쉬운 게 법에는 회개도 필요 없고, 은혜도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논리와 합리성만 있으면 돼요. 나쁜 짓 한다, 나쁜 짓 안 하도록 논리적인 규칙만 세우면 돼요. 그것만 지키면 되는 거예요.

제가 주일 오후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율법이 찢어지고 난 뒤에는 교회 돈 한 푼 안 내도 십일조 했다고 창고에 넘치도록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말라기대로. 돈 한 푼 안 내도 십일조 다 했다고 창고에 넘치도록 복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게 아니고 내가 움직일 때 그게 사건이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 말씀을 지킬 때 말씀을 지키면, 지킨다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사건이에요. 자기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낸 거예요.

바로 이 화이트헤드란 이 사람은 신이 뭐가 문제냐 하면, 신은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란 말이죠. 이게 어려워요.

그동안 신은 뭐냐면, 객체로 있었어요. 객체로 있었지만 주체가 있는 이상 있으나 마나에요. 주체의 화신이에요. 주체가 변한 게 객체니까 이것도 아니고. 내부에 있다는 것은 스피노자의 사고방식이에요. 신은 다양한 얼굴을 내민다. 이게 화이트헤드 이전에 기껏 이걸 형이상학을 반대하는 쪽에서의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가 이 양쪽을 반대했는데 화이트헤드 이전에 이 양쪽, 신은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반대한 사람이 라이프니쯔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스피노자를 반대해서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부분은 전체보다 결코 작지 않다." 그러니까 부분 속에 전체가 다 포함이 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빨강색을 내가 좋아한다고 할 때에 내가 빨강색 전체를 다 좋아합니까, 다 갖고 있습니까? 만약에 내가 빨강색을 갖고 있으면 다른 사람은 빨강색을 갖고 있으면 안돼. 빨강색이 큽니까, 내가 큽니까? 빨강색이 클 수도 있지요. 다만 빨강색을 이용할 뿐이지요. 좋아하니까. 이 말 이해되겠지요. 그때 빨강색이 나한테 종속된 겁니까, 포섭된 겁니까? 종속된 게 아니고 포섭된 거죠. 한 부분만 포섭된 거지요.

마찬가지로 부분과 전체가 부분이 작고, 전체가 큰 게 아니고 부분 속에 무한이 들어있어요. 전체가 다 들어있어요. 더 쉽게 갑시다. 인간이 신을 논한다는 자체가 신이 큽니까, 인간이 큽니까? 신을 신고 논다는 자체가 신 자체도 인간 속에 안에서 신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분명히 신이 인간을 창조했으니까 신이 커 보이지만 어데 큰 것도 작은 것이 논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작은 인간 속에 큰 신이 다 들어가 있다는 뜻이에요. 그 말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삼켜 버릴 수가 있다는 말이에요.

자, 그러니까 근본적인 문제는 이 세상은 누가 창조했는가? 창조된 자들끼리 모여서 창조를 하는 거예요. 창조자들끼리 모인 것을 신이라고 합니다. 스피노자와 다르죠. 스피노자는 전체가 신이고, 신의 다양한 면, 여러 가지 얼굴이 양태론적이다. 삼위일체에서 양태론 나오잖아요. 그게 아니고 저희들끼리 어울려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듯이 발표한다. 그걸 우리말로 번역하면 창발이라고 해요. 화이트헤드는 창발을 주장해요.

작은 것과 큰 것이 번갈아 가면서 이동할 수 있지요. 신이 우리 안에 우리가 신으로 섞여 가면서 번갈아 가며 나타날 수 있단 말이죠. 내재와 외재를 결합시키는 이런 화이트헤드의 신론은 폴 틸리히의 신관에 그게 나옵니다. 신은 내부에 있으면서 활동을 하는데 나보다 낮아질 수도 있고 클 수도 있고. 그런데 그 신이 객체가 아니고 바로 내가 곧 신으로서 전체 신의 한 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주식회사에 이사가 만약에 10명이라면, 주식회사는 어디 있습니까? 이사 10명이 모여야 주식회사에요. 다들 주식을 갖고 있으니까. 그러면 내가 활동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주식회사를 위해 활동하죠. 내가 활동해서 주식회가가 더 커지잖아요. 그러면 우리 중에 누가 큰 거예요. 내가 크게 활동할 수 없다고 본 겁니다. 왜냐하면 10명이 다같이 활동하니까. 우리 모두가 활동한 거지요. 이제 이해되지요. 우리 모두가, 그래서 뭐냐 하면, 내가 만약에 혼자 잘나서 주식회사 안 됐다 하면, 우리 모두라 하지요. 우리 모두를 뭐라 하냐면, 그걸 신이라 하잔 말이죠. 이 세상은 신이 움직여요. 신이 바로 우리 인간뿐만 아니고 코끼리부터 코스모스까지 다 포함되는 거예요.

아까 진화론에서 뭐가 다윈이 공격을 받는가 하면, 다윈은 지금 과거의 종에서 돌연변이로 새로운 종으로 나왔다 하잖아요.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미래에 나올 것이 사실은 과거에 잠재되어 있어서 나온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잠재되어 있다면 미래는 과거에 종속되는 겁니다. 포섭되는 게 아니고. 종속된다면 그 미래라 하는 것은 아니에요. 과거가 이어진 것뿐이고, 과거가 커진 것뿐이지 결코 미래라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미래라 쓰면 안 된다 그 말이죠.

다윈은 여기서 뭔가 발전한 것이 아니에요. 제자리 뛰기 하니까 호주머니에서 동전들이 나온 거예요. 그게 무슨 발전입니까? 어, 돌연변이네. 또 뛸까?

그러니까 다윈의 진화론의 문제가 뭐냐 하면, 이 세상 그냥 붕붕 뛰니까 원숭이 나오는 거예요. 원숭이 나오고, 돌연변이로 유인원 나오죠. 그 다음에 크로마뇽인 나오고 나중에 사람 나오는 거예요. 주머니에 뭐가 있는지 몰랐는데 툭툭 뛰니까 자꾸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진화가 아니잖아요. 제자리 뛰기지, 진화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에 발전이 없었습니까? 발전이 없다고 말을 못하는 거예요. 이거는 물질적으로 5층 짓다가 기술이 발달해서 10층 짓는 것, 이것만 발전이 아니라 여기서 부산까지, 서울까지 오는데 10시간 결렸다가 3시간 만에 오는 것, 이것만이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이라든지 기준, 전부다 발전 다 될 수 있는 거예요.

과거에 노예제도 있었잖아요. 노예제도가 합당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노예제도에 대해서 설명해야 되는데 노예제도가 합당한 이유는 로마시대 때에 로마나라가 발전을 해야 되잖아요. 모든 발전하려면 반드시 그 당시는 무슨 시대냐 하면, 토지에서 나오는 힘으로 유지되는 발전을 유지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상공업 이런 게 발달 안 되었거든요. 공장이 없었어. 그냥 토지 농사짓는데 필요한 기구들 만드는 것이 일종의 산업이라면 산업일 수 있어요. 농기구하는 것.

그런데 이 토지에서 나오는데 토지를 가만있으면 쌀이 나옵니까? 누가 갈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노동력이 필요한 거예요. 노동력이 필요하면 노동력에 의해서 나라가 발전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노동력이 필요하면 여기서 많은 곡식이 쌓이지요. 곡식이 쌓이면 이 곡식 가지고 다른 용병들을 채용하고 용병들이 또, 토지라는 게 한번 갈면 똑같은 생산물이 안 나와요. 이게 고물이 되어서 전반부보다 잘 안 나온다고. 더 좋은 기후, 더 좋은 아주 손대지 않은 옥토를 찾아서 전쟁에 나서야 되는 겁니다.

그 토지를 해 줘야 백성들은 역시 우리 왕은 하여튼 하나님의 아들이야, 신의 아들이야. 신의 아들이니까 이렇게 복 받아서 우리나라가 잘 되지. 지금 대통령이요, 경제를 망치는 대통령 필요 없어요. 오직 경제를 위한 대통령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시대가. 이게 뭐냐 하면 잘살아 보세거든요. 옛날에도 마찬가지에요.

만약에 지도자를 세웠는데 옛날에 추장들, 종족의 지도자를 세웠는데 가뭄 들면 그 신하가 필히 그 지도자를 죽여야 됩니다. 죽이지 아니하면 재주 옴 붙어서 다음 또 가뭄 들어요. 그 다음에 친척들 가운데 왕을 삼아요. 가뭄 안 들었다 하면 도망 가버립니다. 죽기 전에 고쳐야 돼요. 왕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맛있는 것만 먹는다고 왕이 아니라 진짜 토지 농사짓는데 도움이 되어야 돼. 신의 아들이 돼야 돼. 그래서 왕은 어떻게 해야 되냐면, 효능이 있는 전쟁을 해야 돼. 그냥 전쟁하면 안돼. 진짜 나라의 발전에 도움 되는 점쟁이들, 조상 기도회 잘 열어주고 뭔가 용기를 주는.

그래서 사립학교의 교목이라든지, 이런 것도 꼭 그 학교에 도움 되는 목사, 병원의 원목도 마찬가지고. 생명운동 이런 것, 골치 아파 안돼. 환자를 더 데려 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그런 원목을 뽑는다고. 왜? 신의 도움을 받아야 자기 목숨이 유지가 돼요. 안 그러면 백성들이 죽여 버려요. 안 죽이면 쿠데타 일으켜 죽여 버리고.

그 당시에 신을 믿었으니까 신에 의해서 점지된 또 특별한 있으면 왕이 하나의 중보자니까, 기름 부은 자니까, 메시아니까 왕에 의해서 계속 하나님의 복이 주어져서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이 옥토며, 그 다음에 옥토로 축적된 양식이 있으면 그것 가지고 뭐 합니까?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그래서 노예가 그립죠.

이 노예는 필수적인 기계입니다. 무슨 기계? 이 모든 건설현장, 그리고 토지개간, 토목, 치수 모든 데 동원되어서, 그것뿐만 아니에요. 로마에는 이발, 음악까지 가정교사까지 통역까지, 통역도 외국사람으로 하니까 방언은 외국 발음이 통역이 되잖아요. 서기, 꼼꼼하게 적는 것, 이런 재주 있는 사람, 그런 소양들을 개발해서 국가의 발전에 원 일군이 하기 위해서 노예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래야 국가가 발전이 돼요.

그래서 어떻게 노예해방, 만약에 노예해방하자고 한다면, 기계 때려 부수는 것과 똑 같아요. 어떻게 거기서 노예해방의 아이디어가 나옵니까?

노예해방 아이디어가 나온 것은 토지 중심의 생산에서 벗어나서 무역과 상공업과 에너지, 지하자원에서 석탄, 석유가 새로운 에너지가 돼요. 폭약개발, 기술자. 이미 산업구조가 토지에서 벗어나서 도시의 상공업 위주로 발전하면서 이제는 미국의 남부지방에서 노예해서 면화 생산하다가, 면화 생산은 수지가 안 맞아. 디트로이트, 북쪽 오대호 근방에 자동차 만드는 게 면화를 생산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영국에 팔아먹는 것이 오히려 미국에선 돼요.

그것을 정당화하는 혁명이고 전쟁이 뭐냐 하면, 노예, 남북 전쟁이죠. 링컨이 노예에서 노동자로 전환하는 법적인 조치를 하는 것이 남북전쟁 아닙니까? 그런데 남북전쟁에서 면화 따 먹고 사는데 가만 보니까 면화, 누가 길러? 지가 딸까? 이 노예 인권의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인권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도대체 인권이란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왜? 이 세상은 신권만 있을 뿐이지. 인권은 없어요. 인간의 존엄성 같은 것 없습니다. 모든 게 신 안에 있어요.

그런데 이러한 인권을 주장하게 된 것은, 노예들이 아닙니다. 농민들이 아닙니다. 인권을 주장하게 된 것은 귀족에 대한 중간 계급의 발달 때문에 그래요. 중간 상공업이 의회제도, 의회들입니다. 귀족들은 토지를 가지고 있어요. 귀족들도 있지만 주교, 이 위에 뭡니까? 왕. 주교 귀족들에 대해서 비로소 인권이란 말을 하는 겁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그전에 미국에서도 그런 것이 나옵니다. 인권, 천부인권. 이게 뭐냐 하면, 토지 있다고 인간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토지 대신 노동력이 있고 지성적인 기술이 있단 말이지요.

지금 농촌 농민들 땅 가져 봐야 누가 존경합니까? 그런데 의사입니다 하면, 존경하죠. 의사는 사람을 고치는 기술이 있으니까 무려 20년 동안 배운 거예요. 어릴 때부터 젊을 때부터 청춘을 바쳐서 의료기술 배운 거예요. 컴퓨터도 마찬가지고, IT산업도 마찬가지고, 생명공학, 배아줄기세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농촌에서 토지 해봐야 잡초만 무성하지 그거 어떻게 합니까? 잡초만 무성한 토지에 트랙터 모는 기술이 도입하면 비로소 농민들은 트랙터 기사 모셔서 거기다 기사비 줘야 돼요. 몰 뿐인데.

이 세상의 모든 산업구조가 바뀌면 사회구조가 바뀌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마르크스는 하부구조가 바뀌면 상부구조가 바뀐다고. 종교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말이죠. 신에게 빌지 말고 내가 갖고 있는 잠재력 개발, 그 시간에 잠재력이나 개발하라.

백화점을 했다, 신에게 기도하지 말고, 백화점의 인테리어를 바꾸면 기도한 효과 있다. 손님 오게 돼 있다. 그렇다면 신에게 기도 안하나? 하지요. 이미 결재하는 자기가 다 짜요. 이렇게 해 달라는 거예요. 지금 쇼윈도우 바뀌었으니까 손님 오게 해 달라 말이죠. 다 해놓고. 신은 뭐냐? 병신, 바보 같이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 그러니까 이신은 뭐냐? 주체가 만든 주체의 소망이 만든 다른 말로 하면, 주체의 의미가 만든 내가 나를 사건화시키는 그 사건에 들러리로 그냥 개념상 딱딱 붙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스로 자기에게 다짐하듯이 신을 믿는다, 또는 예수가 이미 신 되었으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로 요새 교회 다닌다고 그렇게 퍼지고 있습니다. 자기에 대한 자기의 확신, 신념, 신앙이 아니고 신념, 자기의 다짐, 나한테 다짐하는 것, 될 꺼야, 자기한테 최면을 거는 것.

이러한 것이 화이트헤드에 오면 이걸 정교하게 논리적으로 체제를 이룬 겁니다. 부분화 되어 있던 인간이 결국은 신 못지않다는 거예요. 인간과 신은 서로 포섭관계로서 융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좀 더 정교하게 보게 되면, 신과 신성을 나눠요. 인간은 신성에게 종속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 신성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의와 거룩과 양심, 이것은 신이 아니고 신이 갖고 있는 공유적 속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신성에는 종속되어 있지만 신에게는 그냥 포섭이죠. 때로는 신의 역할을 한다 이 말이지요.

마이클 잭슨, 오병이어 설명할 때 이렇게 했잖아요. 뭐냐 하면 신께서는 우리 보고 달라고 할 때에 우리 보고 신께서는 네가 가진 것을 내 놓으면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 그게 신의 세계다 이 말이에요. 위아 더 월드. 우리가 한 행동이 바로 그게 신의 일이다 말이죠. 신의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게 포섭관계다. 신의 일.

그런데 신성이라는 것은 누구나 갖고 있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기분 좋죠. 내가 나한테 종속되니까. 내가 나한테 당해 봐도 그건 괜찮은 거예요. 주체의식을 갖고 있으니까.

바로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모든 세계는 신이 하지만 그 신은 바로 우리가 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전제로 한 신의 세계라. 이것은 바로 마귀가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촉구한 악마의 속성이 나오지요.

악마는 뭐냐 하면, 전체의 미래를 알고 있는 그런 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알파요 오메가는 없다는 거예요. 네가 현재 알파요 오메가로 지금 성취되어 가는 과정, 그래서 과정 신이라니까. 알파요 오메가는 없고 네가 곧 신이고, 네가 곧 신의 이름으로서 과정 신이 돼가고 과정 속에 있다 이 말이지요. 이게 과정신학, 과정철학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알파요 오메가라 하는 거예요. 처음이요 나중이다. 처음이요 나중이면 그 중간은 말할 것도 없지요. 전부다라니까. 묵시의 세계에서는 없는 데서 계속 나와요. 그러니까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이론하고 비슷하지요. 없는 데서 계속 나온다고. 부분에서 전체가 계속 나온다고. 이게 오병이어 아닙니까?

분명히 외부, 껍데기는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나중에 오천 명을 먹이고 한 것 다 계산해 보세요. 빵 숫자 계산해 보세요. 분명히 보리떡 다섯 개보다 많고, 물고기 두 마리보다 더 많아요. 어린애도 그런데 얼마나 배불리 먹었습니까? 물고기 한 열 마리 먹고, 한 사람당 보리떡 스무 개 먹었어요. 오천 명 계산해 보세요. 엄청날 것 아닙니까? 한데 나머지는 거두라 했지요. 열두 바구니에 차고 넘쳤다 이 말이죠.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빵을 나눠 주셨던 모든 그러한 무한이, 결국 무한이 아니라 어떤 원칙에 입각해서 된 것이라는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눠 주셨던 하나님의 자기 백성화, 나의 백성은 내가 알아서 챙긴다. 배고프냐? 목마르냐? 고기가 먹고 싶어? 내가 왕이잖아. 내가 왕이니까 내가 알아서 챙겨준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오병이어 끝난 다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뭐로 삼으려 하냐면, 왕으로 삼으려고 했어요. 이런 병신들이. 왕이 계시는 것하고, 세상 사람들이 왕으로 생각한 것하고 이거는 의미가 다른 계열, 계열이 다르다고. 노는 동네가 다르다고. 예수의 왕 되심은 진실로 주고자 하는 왕의 책임 하에 주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에게 영생이 없다고 했거든요.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고기 먹었고 떡 먹었어요. 고기, 떡은 너희들이 지금까지 기대했던 너희들의 소망이었단 말이지요. 세상에 있는 육을 위하여 너희들이 기대했던 임금님, 저를 만나줘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사고는 바로 내 몸을, 자기 육체를 채운 거지만 내가 주고자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라는 거예요. 아버지의 뜻은 뭐냐 하면, 아버지 뜻을 위해서 죽어야 되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수요일 날 그런 설교했는데 한번 들어 보세요. 사도행전 3장에서 앉은뱅이가 있었잖아요. 앉은뱅이가 아침에 출근할 때 뭘 기대했느냐 하면, 금과 은이 있죠. 금과 은을 의미화시킨 거예요. 오늘 하루는 금과 은을 몇 푼 벌어서 나중에 시장 가서 땅콩 사서 집에 가서 먹고 잔다. 라는 금과 은의 의미 있는 사건과 사건으로 체인된 연결 고리를 가진 그 하루를 생각했단 말이죠.

그런데 사도 두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금과 은은 없다 했거든요. 없다 했으니까 앉은뱅이가 갖고 있는 사건의 계열화 속에 사도 두 사람은 아무 짝도 소용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뭐냐? 앉은뱅이 같으면 금과 은도 없으면 나한테 왜 왔나? 가소 그만. 금과 은도 없으면서. 다시 말해서 내 의미에 의미를 줄 수 없는, 도움을 줄 수 없다면 나하고 상관없다 할 건데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예수의 이름이 들어가 버려요. 금과 은은 사물이고 물질입니다. 돈이고. 그런데 예수님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인격이고 인물이고 주체자입니다. 그러니까 주체의 교환이에요.

앉은뱅이는 나라는 주체는 이제는 나사렛 예수님으로 주체와 뒤바꿔야 됩니다. 그러면 그동안 앉은뱅이 된 것은 누구의 의미 때문에? 예수님 증거하고 앉은뱅이 된 거에요. 그러면 그 사람이 나중에 다시 앉은뱅이는 안 되겠지. 일어나 걸었으니까. 거지꼴, 맨 배운 게 있어야지. 거지하더라도 돈이 들어오더라도 주님의 은혜지요. 주님의 사건이지, 나의 사건이 아니에요.

만약에 그 다음날 건강한 채로 장사하다가 전에는 앉은뱅이라고 동냥하면 하루에 10만원 벌던 걸, 이 멀쩡한 놈이 벌고 있네. 하고 만원 밖에 못 번다면, 그 만원도 은혜가 되는 거예요. 왜냐? 이제는 주님의 돈이니까. 내 인생이 날아가 버렸어요. 나사렛 이름이 내 이름을 교체한 거예요. 그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은 뭘 보느냐 하면, 그 사람이 육체적인 육적인 건강을 회복했다는 그 차원이지만 사도는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그 사람 주인, 이제는 예수님이 그 자리에 들어갔다는 거지요. 그 사람 인생은 예수님의 인생이지요.

또 하나 불의한 청지기. 보통 문제 아닙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청지기로서 예수님 이야기 끄집어내니까 예수님과 세상 사람은 어떤 대립이 있느냐 하면, 불의한 청지기를 두둔하면 예수님 편이 되고 불의한 청지기 보고 불의하다고 따지는 놈들은 예수님과 반대, 예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이 천하의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장세워서 일해 버려요.

사람은 좋은 사람, 누구나 처음 만난 사람은 잘해 주려고 애써도 예수님한테는 잘해 줄 수가 없어. 왜냐하면 예수님은 내가 그토록 꼬낏꼬낏 싫어하는 것을 겨냥해서 너, 예수 보니까 시시해 보이지. 악하게 보이지. 이런 식으로 다가오니 남의 성질을 건드리면서 온다니까.

주일날 아침에 그렇게 했잖아요. 칼 쥐고 쑤신다고, 찌른 자라고. 우린 다 찌른 자였어요. 찔린 사람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 혼자 찔린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 세상에 모든 구성은 그 찔린 자의 사건의 의미화가 이 세상의 모든 미래와 순간 사건들을 전부다 장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이에요.

지금까지의 모든 소위 신학이나 삼위일체 신학은 전부다 주체가 객체에요. 주체가 객체가 되어서 신을 높이면 그게 영광인 줄 알고 있어요. 객체가 되는 신을 높이면 자기는 영광된 줄 알지요. 주체는 뭡니까? 딱 꼬불쳐 놓는 기라. A는 A이고, B는 B다. A는 B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신은 신이고, 나는 나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내가 신에게 어떻게 행함, 어떻게 주체자로서 어떻게 행하기만 하면 신에게 영광이 된다고 본 거에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말씀이 아니고 내가 지켜서 비로소 나에게 의미가 되어서 그 의미된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건화 된다고 여기고 그 성경 말씀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뭡니까? 객체 되는 신은 조작되어 있으니까 아무 소리 없는데 문제는 서로 잘 지켰다는 주체와 주체 사이의 갈등과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겁니다. 네가 잘 지켰나, 내가 잘 지켰나? 똑같은 말씀을 가지고 누가 해석이 맞나, 주체 간에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마치 제자들과 누가 높으냐고 싸우듯이.

누가 높으냐의 싸움이 언제 끝나느냐 하면,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예수님 없는 상태에서는 너라는 것과 나라는 게 예수 없는 상태에서는 그것은 아까 처음에 얘기 했잖아요. 의미가 없는 거예요. 누가 높으냐, 누가 돈 더 잘 버느냐, 누가 오래 사느냐? 예수님이 속에 없는 상태에서는 그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정몽준이 행복하냐, 내가 행복하냐? 예수가 없는 상태에서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강도가 예수님이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 두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든 안 달리든 십자가 달리기 전에 강도질 하든 안 하든 두 사람은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의미가 발생, 그 가운데 예수님이 달려서 개입해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보니까 비로소 한 강도는 자기가 여기 있는 것이 예수님 때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의미가 생기고, 저쪽에는 네가 그렇게 잘났으면 차라리 나도 구원하라 이런 식으로 욕하고 죽고. 두 사람 다 구원 받지 않는다는 뜻에서 예수님에 속한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거예요.

왜 따로 존재하느냐? 마지막으로 이것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고 따로 존재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할 일이 있어요. 그 할 일은 예수님 뜻은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 뜻인데. 그 뜻이 사실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생명나무가 곧 선악과나무가 아닙니다. 이게 지금 분리되었다고. 에덴동산 자체가. 에덴동산 자체에서 이미 서로 나무 두 개가 분리되어있다 이 말은 이 세상 자체가 뭔가 선과 악으로 분류해야 될 필요를 삼위일체 하나님은 갖고 있었습니다. 분류시킬 필요가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거룩하단 말은 곧 그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이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으로 등장시킴으로 말미암아 자동적으로 이쪽은 죽어 마땅한 저주 받아 마땅한 저주임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 뜻이 로마서 11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1장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공의가 자비가 아니고 자비가 공의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속성, 공의와 자비가 다 드러내기 위해서 삼위일체 세 분이 다 동원한 거예요. 우리는 거기에 들러리 되어 버렸어요.

우리는 이 땅에 왜 있느냐? 우리가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가 사건이 의미가 담겨 있어야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알잖아요. 마지막에 천국과 지옥 바뀌는 게 아니잖아요.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을 떠나면 안돼요. 죽을 때까지 자기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외쳐야 되고, 품어야 되고, 그걸 발산해야 되고, 드러내야 된다 말이죠. 왜냐하면 그냥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과 삼위일체가 그 일을 하니까 그렇게 된 거에요. 자연적으로.

예수님 믿는다고 복 받고 그런 거 없어요. 예수 믿는 게 복이에요. 예수님 자체가. 왜 그렇게 했는가? 그것은 예레미야처럼 태어날 때부터 뜻이 있어서 창세전에 예정해서 그렇게 태어난 거예요. 뭐하라고? 분류하라고. 우리가 분류한 게 아니고. 우리가 분류하기 싫어도 가만있으면 분류하게 돼있다고.

교회를 목회를 하고 교회를 봉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방해하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예수님 하시는 일을 방해해요. 예수님한테는 아무 문제도 없는 걸 괜히 자기가 미래를 모르니까, 초등학교 2학년이 소풍 가면서 이 땅에 아파트 설 줄을 모르잖아요. 미래를 모르니까 미래는 자기 나름대로 계열화시켜서 사건을 만들어요. 자기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그걸 과거가 괜찮은 과거 중에서 그걸 골라서 미래에 되풀이하기를 원하거든요. 그러다보니까 그것이 목회현장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거예요. 일어날 때 어떤 사람이 진정한 성도냐 하면, 목회 하면서 그게 죄인 줄 아는. 아, 내가 죄짓고 있구나.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해요. 죄의 반대가 뭡니까? 죄의 반대는 은혜입니까? 은혜가 아니고 죄의 반대는 의가 되고. 죄는 은혜하고 같이 일어나요. 죄를 알았다는 자체가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동시에 자기가 죄인 것을 알고. 몇 초 가지도 않지만. 또다시 죄를 알면 그게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걸 그대로 모아서 말씀을 통해서 근거로 해서 설교를 하는 거예요.

현재 우리가 어디에 어떤 처지에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 어떤 백수도 관계없이 현재 있다는 자체가 어디 있다는 자체가 은혜 위에 있다는 것.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이 어떤 존재 자체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냥 눈밭에 있는 것처럼, 은혜의 밭에, 은혜의 눈밭에 우리가 지금 은혜의 눈사람이 되어서 서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항상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고 늘 주님과 이야기하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지시를 받을 수박에 없는 이유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야.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빠진 상태에서 이 화이트헤드나 이런 사람은 바로 내가 신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 그럼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것 하나만.

그럼 화이트헤드처럼 신을 안 믿으면 어떠냐? 신을 안 믿으면 이 세상에 악이 왜 있으며 왜 우연이 왜 발생하느냐? 이게 설명이 안 돼요. 왜냐하면 내가 하는 것은 사람은 악 하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선하려고 하는데 결과가 악하게 되잖아요. 그 이유를 내가 알고 있는 이 범위 밖에서 찾아야 된다고. 그러면 내가 아직까지 다 정리가 안 된 누락된 그것이 나에게 염장을 지른다고. 그럼 나보다 큰 자가 있다고.

예를 들어서 나는 서울대학 나왔다, 적어도 나는 이화여대, 유학한 여자, 라고 여기고 가다가 우연히 기차간에서 술집 여자하고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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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5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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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