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광주 강의 12-1
Re..광주 강의 12-1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12-1 (2006. 2. 24) 이근호 목사
고린도후서를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를 쓰신 분은 사도 바울이지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심정과 동일한 심정이 되어야 고린도후서가 이해됩니다. 우리가 바울의 편지를 보고 동감하기 위해서는 편지를 쓴 바울과 같은 심정이 될 때 편지를 쓴 취지가 드러나겠지요.
이 편지를 쓴 사도바울의 심정은 어떤 것인가 하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도 그렇지만, 성도라는 것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이 말이지요. 성도 되었다는 자체가 전혀 이 세상의 인간으로서는 나타날 수 없는 그러한 종족이어야 한다. 누가 ‘제 3의 종족’이란 말까지 했는데, 분명히 뭔가 달라요.
광주에서 성도로 산다는 것은 광주 다른 시민들과 뭔가 달라야 합니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비교의식이 생깁니다. 성도가 신앙 생활하는데 제일 방해되는 것이 비교입니다. ‘나는 교회 다니는데 왜 저 사람처럼 잘 살지 못하는가?’ 타인이 소유한 것이 부러워지고, 자신의 것과 타인의 그것이 자꾸 비교가 된다면 그것은 뭔가 달라야 한다는 것을 본인이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로 달라야 하는가 하면, 좀 전에 이야기 했지요. 교인 한 명은 있으나 마나한 분이라고 했지요. 이것을 철학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름과 그 대상이 일치되지 않을 때 이것을 있으나 마나한 존재라고 합니다. 학급에서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 이름은 다 불러 주었는데 자기 이름 안 부르고 넘어갈 때, 그 얘는 그 학급에 있으나 마나한 존재입니다. 혹시 실수로 그 아이 이름이 빠졌을 수 있는데, 그럴 때 그 아이는 굉장히 기분 나빠 하지요.
집에 자식들이 10명 되는데, 아무리 부모라도 이름이 기억이 안 날 때가 있어요. 그래서 그 얘가 안 불려질 때에는 그 아이는 이름이 빠졌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한 것입니다.
만약에 광주에 성도가 한 명 있다면 이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광주에서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됩니다. 있으나 마나하다는 것은 없는 것과 같아요. 광주에 있어도 사람들한테는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달라야 하는 특이성입니다.
전 목사님이 광주 계시다가 안양으로 복귀를 하셨는데, 광주 시민들이 가신다고 울고불고 하는 일이 없었지요? 그 사람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고. 그러한 특이성을 본인이 느낄 때 그 사람은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만드셨는데 본인이 이것을 참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해서 “하나님! 왜 사람들이 날 안 알아줍니까? 나는 하나님 잘 믿는데 사람들이 날 왜 못 본 척 합니까?” 이렇게 나온다면 본인은 세상 사람들과 비슷하기를 원하는 사람이지 달라야 된다는 것을 깜박 잊은 사람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런 팔자와 운명을 가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어렵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을 바울은 간단하게 “나는 이미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례를 치렀다”고 했어요. 그리고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관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활동하시면 거기에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물장사 하신다면 거기에 바로 내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 믿는 성도를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과거의 인물입니다. 예수님이 안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그들도 역시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죽는다고 해도 애석해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어디를 간다고 해도 서운해 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과거에 사라진 인물을 아직도 믿고 따르기 때문에 그 사람은 현재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과거에 속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이런 취급 받은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바울이 열심을 내서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배후에서 일하시는 그 은혜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믿습니다.
어떤 분에 제게 물어요. ‘목사님이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그 복음을 믿고 난 후에는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 젖은 스폰지를 짜면 뭐가 나오지요? 물이 나오지요. 이처럼 성도의 행함은 불신자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 나와요. 그것이 뭐냐, ‘은혜’입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은혜입니다. 마치 스펀지에서 물끼가 나오듯이 성도는 주님의 은혜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가짐이 스펀지처럼 폭신폭신해야 됩니다. 만약에 마음이 단단한 대리석 같으면 여기에서 은혜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누르면 뜅기지요. 그래서 은혜대신 불평과 원망이 나옵니다.
제가 어제 우리교회 집사님과 함께 오랜만에 영화를 봤습니다.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이란 영화였는데, 이 영화는 1972년 뮌헨 올림픽 때에 선수촌에 난입한 ‘검은 구월단’이 선수들과 임원들 11명을 살해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검은 구월단은 PLO소속이에요. 이들은 이스라엘 교도소에 갇혀 있는 테러범 200명을 풀어달라는 조건을 걸고 인질극을 벌이다가 이스라엘과 독일군들이 그 테러범을 용서하지 않고 사격하니까 자기들도 인질 11명을 다 사살하는 내용인데, 영화 뒷부분에 보면, 모사드라고 이스라엘 정보부인데 일일이 테러를 주동했든 사람들을 찾는데 온 유럽을 다 헤집고 다니면서 찾아서 기어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죽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이 1979년에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1972년에 사건이 터졌으니까 7년 동안 철저히 복수를 한 사건인데 이것을 영화로 만들었어요.
이 영화에 모드사(이스라엘 정보부)의 요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회의를 느낍니다. 자기는 갓 결혼해서 아내가 임신해 있을 때 정보부로부터 특명을 부여받아서 유럽에 가서 ‘검은 구월단’의 배후를 캐서 관련자를 살해하고 하는 중에 자기 아이는 태어나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회의를 느낀 부분은 가정이냐 국가냐 하는 점입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것이지요.
국가가 부여한 임무를 다 끝내고 나면 틀림없이 상대편이 가족과 자신의 생명을 살해하려고 할 것이 틀림없는데, 이 때 자신이 국가와 하나님을 위해 일한 것이 옳았느냐, 아니면 차라리 가정을 지키는 것이 더 현명했는가 하는 물음을 스필버그 감독은 던진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뭘 느꼈는가 하면, 이 세상은 원한과 원한이 뒤섞여 진흙탕에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원한과 분노인데 이것이 반드시 상징으로 구현됩니다. 그 상징이 뭐냐 하면 ‘국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입니다.
이 영화 이야기를 첫 시간에 하는 것은 제가 고린도후서를 시작하면서 ‘달라야 한다’고 말씀 드렸는데, 어디서부터 달라야 하는가 하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상징’이 뭐냐 하면, 상징은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는 없는데 상징이 있으므로써 사람들은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대학’은 실체가 없어요. 대학교 교정은 있지요. 그리고 교수 있지요. 교직원과 학생은 있어요. 이렇게 있으면 대학 인가를 내 주지요. 캠퍼스와 교수와 학생을 맺어주는 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바로 법입니다.
법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보면, 여기에서 ‘대학’이라는 상징이 생기면서 교수나 교직원이나 학생들은 대학이라는 상징이 만든 법에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수, 교직원, 학생은 실체가 있어요. 몸뚱아리가 있잖아요. 약 200조로 되어 있는 세포가 있어요. 몸이 있어요.
제가 뭘 이야기하는가 하면, 법이 등장하는 것은 교수, 교직원, 학생 개인마다 원한이 있어요. 성경적으로 보면 이 원한과 분노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옵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도 원한이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솔직히 말하기는 곤란합니다만 원한이 있는데, 이 원한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는가 하면, 상징으로 잠재웁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상징으로 잠재웁니다. 가정, 가족이란 실체가 없어요. 세 식구라면 세 식구의 신체가 모인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좋다.” 왜 그런가 하면, 가까이 있는 이웃은 나와 원한 관계가 이미 해소가 된 상태입니다. 나중에 헤어질 때 또 발생하지만. 이사 갈 때 돈 100만월 빌려놓고 갚지도 않고. 하면서.
그러나 멀리 있는 일가친척은 멀리 있는 동시에 원한 관계가 서서히 부각됩니다. 그런데 멀리 있던 친척이 가까이 오게 되면 원한 관계가 서로 법이라는 것에서 서로 해소가 돼요.
법은 반드시 있게 마련인데, 만약 법이 없으면 이 원한 관계를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이야기를 해도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더 어렵게 이야기해 봅시다.
에서하고 야곱은 어떤 사이입니까? 형제간입니다. 그런데 어떤 상징에 매어 있는가 하면, 나는 형이고 너는 동생이라는 그런 상징이 있지요. 그런데 이 상징이 언제 깨어지는가 하면 사냥 갔다 와서 배고팠을 때 팥죽을 제공함으로써 무엇이 우선권을 가지고 있어요? 나의 신체의 배고픔이 나는 가족이라는 상징보다 더 우위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배고픈데 동생이 팥죽 안 주면 거기에서 원한 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사람이 원한이나 분노가 왜 생기는 것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주위에서 호응을 안 해주면 무조건 나의 원수가 되고 적이 됩니다. 아비고 자식이고 없어요. 남편이고 친구고 필요 없어요. 내 세포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지 않으면 원한이 생겨요.
어린 아기가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을 안 주면 울지요. 그러면 엄마는 먹을 것을 주지요. 어릴 때는 우유나 젖이지만 크면 돈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라는 상징을 만들어놓으면 여기에서 뭐가 생깁니까? 법이 생기지요. 가정에도 법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이것은 옳은 표현이 아니고, “나는 이 법을 지키는데 너는 왜 법을 안 지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법이란 것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원한과 분노가 정의롭게 되지요.
‘우리 가정은 밤 10시 까지는 반드시 귀가해야 한다.’ 라는 법이 아버지가 선포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상징적인 존재지요. 그리고 아버지의 입에서 법이 나오지요. 아버지는 상징이기 때문에 [상징 = 법]이 됩니다. 그런데 이 법이 언제 깨지는가 하면, 아버지가 11시에 들어올 때, 법이 무너집니다. 이 때 이후로는 자식들도 11시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되면 법이 또 수정이 됩니다. 11시까지 귀가해야 한다.
이렇게 법이 바뀌고 난 후 아버지는 11시를 넘기지 않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만약 자식이 11시 10분에 들어왔다. 그러면 난리가 나지요. 왜 너는 가정의 법을 어겼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때 자식이 항변을 하면서 차가 고장이 나서 10분 늦었는데 왜 그렇게 아버지가 화를 냅니까? 하고 핑계를 대면, 아버지는 법을 안 지켰으니까 그렇지. 하면서 화를 냅니다. 그러나 법을 안 지켰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정에 법이 있고 질서가 있다는 것은 결국은 그 가정의 법을 만든 아버지의 가정이 되지 아니하면 나는 분노하겠다는 새로운 원한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자식에 대해서 세월이 가도 너는 몇 살 때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했던 못 된 놈이다. 지금도 내게 도전하는데 그 어릴 적 버릇을 버리지 못했구나. 라고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던 원한과 겹쳐지면서 아버지는 복수를 하게 됩니다. 이 복수가 어떤 것이냐 하면 유산 남길 때 약간 적게 주는 것.
이런 원한과 원한, 복수와 복수가 만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는 뭔가 달라야 된다고 했지요. 뭐가 없어질 때 다르지요. 원한과 복수를 다른 쪽에서 처리하겠다고 약속을 받은 사람은 자기 쪽에서 원한과 복수를 나타내더라도 복수를 감행하지는 않겠지요.
사람은 날 때부터 자기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신에게도 침을 뱉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 싫어하는 이유가 뭔데요? 지금 에덴동산에 있지 않아서 힘들고 화닥질이 나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귀들아 물러가라고 고함치고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원한에 대한 복수를 다른데서 해 주는 것이 고린도후서 1장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환란을 당한 자에게는 환란을 갚아 주기 위해서 내가 재림하겠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1장의 내막입니다.
사도바울은 확실히 다르지요. 바울에게는 원한이 없다는 말입니까? 있지요. 있는데 그 심판하실 분이 따로 존재합니다. 주께서 재림하셔서 원한과 분노를 처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진짜 아는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내가 어떤 집사님께 돈을 1억 5천을 빌려 줬는데, 그 분이 갚아 주겠다고 해 놓고 8년째 연락도 끊고 돈도 한 푼 안 줬다. 그래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갚아 주십니까? 안 해줍니다. 나의 원한과 분노를 주께서 갚아 주신다고 성경에 나와 있지만,
KBS에서 용서하는 프로그램에 그런 것이 나왔어요. 같은 교인끼리 돈 거래를 했어요. 한 사람이 1억 넘게 빌려서 갚지도 않고 종적을 감췄는데, 돈 빌려준 사람은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힘겹게 살았어요. 그런데 뒤늦게 나타나서 울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왔을 때, 용서를 해 줘야 본인이 마음의 짐을(분노를) 내려놓는다고 용서하라고 방송에서 나왔는데, 이런 것은 용서가 아니에요.
자기 돈 안 갚은 타인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이 원한 때문에 누가 죽으셨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당하셨어요. 돈 사기 당해서 너무나 힘들게 삽니다. 하는 이야기는 누가 할 수 있는가 하면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말씀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닌데 이 사람은 자기 돈 사기 친 사람에 대해서 화가 나서 분노는 자기가 내고 스스로 자신이 용서한다고 하고 있고, 여기에서 그 사람은 분노나 용서는 예수님과는 무관하고, 그저 자기 마음이 괴로워서 해본 조치인데, 바로 이러한데 관심을 갖고 있는 자체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이 사람한테 예수님이 천대받는 원인 제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갚아주는 복수는 복음 때문에 당했던 억울함과 희생에 대해서만 갚아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5절 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주님께 위로 받는 경우는 언제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을 경우에만 예수님이 주는 위로를 받게 되지, 돈 1억 5천 날려서 그것 때문에 씩씩거리다가, 주기도문에 나오는 것처럼 ‘주여 주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 같이 내가 형제를 용서했나이다’ 이런 것은 엉터리에요.
돈 1억 5천 때문에 씩씩거린다는 자체가 오히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만약에 집에 불이 나서 온 재산 다 태웠을 때, 예수님에 찾아 오셨다면 예수님 멱살을 잡고 ‘당신이 왜 우리 집에 불나게 했어’ 하고 달려들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다는 것은 특이한 사람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특이한 사람인가 하면, 이상하게 예수님 때문에 같이 고난의 길을 가게 된 독특한 사람에게만 예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좁은 길입니다. 남들이 찾아도 알 수 없는 길입니다. 감춰진 길이지요. 그래서 성도는 감춰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화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이 영화에서 모사드(이스라엘 정보부)가 ‘검은 구월단’을 찾아내서 죽일 때, 늘 격려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 우리 민족을 잔인하게 죽인 놈, 우리 형제를 죽인 놈. 하면서 TV를 통해 형제를 죽이는 장면이 떠올라서 분노를 더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복수를 정당화 시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환란과 정당함은 뭐냐 하면, 욥기를 보면 그런 것이 나옵니다. 욥이 제일 난처한 것이 뭐냐 하면, 왜 정당한데 고난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정당한데 왜 고난 받습니까’하는 것이 정당하냐, 그런 너에게 고난을 준 이 하나님이 정당하냐” 라는 그러한 대비가 욥기의 전체 주제로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성도에게는 이 두개의 길이 나란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시편 73편을 보겠습니다. 1-5절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인데 죽을 때도 건강하다가 죽고 그리고 평소에도 아프지도 않고 만사형통하고 평소에 재앙이란 찾아 볼 수도 없고, 자기는 하나님 믿는데 이런 형통한 사람과 비교해 보니까 뭘 해도 안 되고. 그래서 신앙이 미끄러질뻔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선이가 하면, 자기는 선을 행하면 만사형통하고 평안할 줄 알았는데, 시편을 보니 그것이 아니고, 바로 그렇게 안 하시고 악인에게는 재앙이 없고, 예수 믿는 자에게 고통을 주는 그러한 하나님이 나타난 자체가 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욥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보다 죄 많은 사람은 멀쩡한데, 하나님 잘 믿고 선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자식 10명 다 죽고, 재산 다 불타고, 내 몸은 만신창이 되고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여기에서 원망과 불평이 생겨나지요.
그런데 원망과 불평이 생길 때 그 때 욥 스스로 해결책이 있습니까? 욥은 전혀 해결책이 없어요. 이것이 진리입니다. 해결책이 뭡니까? 그냥 나는 원래부터 그런 하나님 이었어 하고 나타나심 자체가 욥에게는 해결책입니다.
‘내가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았구나. 하늘의 영광스런 하나님만 생각했지 독생자의 영광, 인간들이 보기에 고난당하고 수치당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등장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부자와 권력자를 부러워하다 보니 나도 하나님 믿으면 저렇게 잘 되겠지. 잘 되겠지 ---
자기가 생각한 상징. 상징적 존재의 최후가 바로 신입니다. 자기 신체의 욕구와 욕망이 상징이 되고, 이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이 법의 최고 법은 신입니다. 그런데 이 전체 모두가 다 사기입니다. 몽땅 거짓말이에요.
이렇게 내 잘되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법을 잘 지켜서 신에게 복을 받는다는 식의 이 모든 것이 엉터리라고 나타날 때 바로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너는 죽어도 싸지. 너는 나의 함께 십자가에 같이 죽자. 이제 너 속에는 복음만 남겨야해. 하는 식으로 십자가가 나타날 때, 이 십자가 지신 그 하나님이 위이 있고 높이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밟히는 제일 천한 곳, 인간의 원한과 분노를 뒤집어쓰고 거기서 피 흘리고 희생물이 되어버린 연약한 그분이 바로 진짜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발견 못한다면 그런 사람을 평생가야 천당 못갑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죽었다 깨어나도 천당 못갑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한테 반해요. 이것을 ‘나르시스’라고 합니다. 물에 비치는 자기 모습보고 반해서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게 되는 미소년. 그런데 이러한 나르시스는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데 안 그런 척 하고 있을 뿐이지요. 인간은 도망쳐도 자기 속으로 도망가요. 그리고 스스로 독립해서 자기가 법을 만들고, 자기 정당성을 내 세우기 원합니다.
신이란 바로 이미 자기 계략을 다 꾸며놓고 이러한 나의 욕망을 들어줄 때 이 신은 아주 좋은 신이고 착한 신이다.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바로 대표적인 신 아닙니까. 좋은 하나님에 대한 구색을 다 만들어 놓고 일방적으로 끌어당기는 식이지요. 이 신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시내산 밑에서 만들어지지요.
시내산 위에 있는 하나님과 시내산 밑에 있는 하나님이 달라요. 시내산 밑에는 사람들의 금고리나 이런 것들이 모여 사람들의 열심이 만든 가짜 신인데, 이것은 금송아지입니다. 그런데 산 위에 있는 하나님은 형상이 없어요. 그냥 십계명이라는 약속을 주셨어요. 따라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약속으로만 남아 있어요. 그 약속이 몸으로 구체화 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독생자 예수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약속에 의해서만 움직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해도 약속대로만 응답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주여 복음을 위해 돈 76억만 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안 주시지요. 왜? 복음을 핑계로 76억을 소유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도는 들어주십니다. 주여 복음을 위해 죽게 하옵소서. 그러면, 그래 죽어라! 하고 들어주시지요.
어떤 책에 이런 것이 있어요.
있으나 마나한 자기 존재의 이름을 스스로 지우므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는 이러한 새로운 계몽주의적인 아주 고차원적인 시도가 철학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없는 존재로 간주해서 자기를 없애므로 말미암아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부활시키는 방법이지요.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 이 책 본적 있습니까? 참선, 아봐타, 천도교 시천주수련, 원불교 마음공부, 동사섭, 예수살이 공동체 등등.
이것이 뭐냐 하면, 소위 자아를 찾는 것입니다. 세상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깨달으므로 평안을 찾는 것입니다. 비용이 좀 많이 듭니다. 이런 곳들을 찾아가서 수련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수련하게 되면 모든 마음의 근심과 염려들이 다 사라지고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자아를 부인하므로 말미암아 모든 근심,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해탈하는 방식. 이런 방법까지 종교단체에서는 지금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만약에 스스로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모든 근심으로부터 벗어났는데 정말 죽어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하고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아를 죽이면 자아가 구원 된다고 했는데, 진짜 자아가 죽으면 자아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민 되겠지요? 이것이 오늘 두 번째 시간에 강의할 내용입니다.
이들은 약속을 생각 안하고, 약속이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 안 하고, 약속이 나를 위한다고 생각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내가 증거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생각을 안 하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천번을 와도 마지막 최종적으로는 누구를 위하는 것이 됩니까? 나를 위한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제가 “그것이 아닙니다.” 라고 주장을 하면, 거기에서 분노가 생기고, ‘나는 이렇게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고, 기도 열심히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법을 내세우겠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잘 한 욥은 왜 고난을 받습니까? 답해보세요.
그렇다면 왜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사업도 번창하고 큰 소리 치고 잘 먹고 잘 삽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뭐 하고 계십니까? 악인들이 이렇게 횡포를 부려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이런 물음에 그들은 아무 대답을 못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데만 관심 있지 약속이 뭔가 하는 데는 관심 두지 않습니다.
약속은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밟고 상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치는 그 약속. 이 약속이 사람보다 우선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약속의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께 위로가 되지 약속이 빠져버리면 절대로 하나님께서 안 도와주십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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