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강-계1장,6-7,(볼,것이요)-rev06030
Re..계 1: 6- 7 (볼 것이요)
이름 : 이근호(IP:)
003강-계1장,6-7,(볼,것이요)-rev060305
볼 것이요
2006년 3월 5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6-7
(계 1:6)『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 인간이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아웅다웅 다투고 싸우고 더 갖기 위해 목숨걸고 투쟁을 벌리더라도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매사가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이제 인류의 역사는 더 오래 끌어봤자 새로운 핵심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구름타고 오신다’는 말은 정말로 일을 다 끝장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이 오시기를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 본인이 알아서 구름타고 오실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그 어떤 수고와 고민과 걱정을 하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 ‘다 이루심’으로 요한계시록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귀양살이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라하고 처량한 인생 말로가 결코 불행스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구름타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현 처지가 영원히 고정된 자신의 처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당하고 기죽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를 찌른 자’도 그를 본다는 겁니다.
왜 갑자기 예수님 찌른 자가 왜 등장되는 겁니까? 그것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중추적인 토대는 인간의 지혜나 희생과 수고가 아니라 예수님이 당했던 그 일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축이라는 겁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의 코 앞에 보이는 자기 영역의 발전과 번영과 역사 전개에 있어 실제적 힘이 되는 것은 자신의 수고로움과 노력이라고 여깁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이 논리를 다른 모든 사람으로 확대해 보면, 결국 인류의 역사란 인간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지혜를 짜내느냐에 달렸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찔림을 당했던 예수님과 예수님을 찔렸던 그것으로 인해 이미 역사의 진행은 결정나 버렸다는 겁니다.
이 점이나 퍽이나 신기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러한 성경 사실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느냐 하면, 우리는 종교라고 한다면 신비로움으로 가득채워놓아야 멋있어 보인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종교=신비 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신비로움을 한 꺼풀 두 꺼불 걷어내어 보세요. 남은 게 무엇일까요?
남은 것은 전혀 신비롭지 않습니다. 그냥 정치범으로 몰려서 매정하게 사정없이 십자가 형틀에서 죽어버린 예수라는 이름의 한 청년만 달랑 남아 있을 뿐입니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앞장 세워서 우리에게 자신을 뜻을 전달할 줄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를 죄인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해못하고 납득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혹은 엽기적인 분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 대신 우리 인간들은 온갖 신비로움과 경건함으로 무장한 그런 종교로 치장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럴 사 해보이니까요. 사람의 감정과 심리를 흔들 테크닉 같은 것을 종교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고상하고 경건하고 거룩되고 신비로운 면을 유발시켜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소위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으로부터 밉상 받아서 퇴직 직전에 주인 돈을 마치 자기 재산인 것처럼 마구 횡령하여 자기 살 채비에 급급하는 불의한 청지기 말입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가 세상의 성직자보다 더 더 훌륭하다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전혀 납득이 될 수 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간주하게끔 하는 그런 요인을 듬뿍 안고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렇게해서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싫어하고 배격하고 나중에 처형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까지 양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태를 이런 식으로 몰아가시는 이유는, 결국 ‘찌른 자’와 ‘찔림을 받은 자’만이 세상이 최종 굳혀진다는 사실을 나타내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형에서 풀리기를 원치 않고 되레 살인 강도인 바라바를 죄목에서 풀어주었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철저하게 사람들에게 잊혀지기를 원하는 무용지물의 존재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처형하기를 동조하는 자들이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순전히 예수님의 피의 공로만으로 구원되기를 원치 아니하고 자기 잘난 맛으로 구원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올 때는 은근히 그런 기대를 갖고 옵니다. 전능하시다는 그 하나님의 전능의 솜씨의 혜택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적이란 ‘요나의 기적’입니다. 외로움을 당하는 기적, 무관심하게 버림을 당하는 기적,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받는 기적, 그리고 더나아가 결국 사람 손에 죽임을 당하는 기적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기적이 임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의 이상과 소원과 소망이 속히 달성되기를 원하는 기적을 바랍니다.
그래서 그런 쪽으로 열심히 기도하다가 마음먹은대로 안되면 그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자기 안에서 주님의 허리를 찌르는 칼이 자라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도마라는 제자가 예수님의 창자국과 손의 못자국을 보고서 예수님이 메시야 인줄 확신했다는 대목을 유념해 보시기 바랍니다.
즉 창 자국이 나고 못 자국이 생생한 ‘예수님 마네킹’을 여기 보인 분들에게 한 번씩 대면케 해 드릴까요? 예수님의 허리에 난 창 자국과 손에 난 못자국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은 바로 인간들이 자신의 가치를 잃기 싫어하는 그 마음으로 인해 상처받은 상처일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비로소 ‘다 이루심’과 ‘구름타고 오실’ 수 밖에 없는 의미를 압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는 ‘인자 되는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0:32-33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를 생각해보세요. 그는 수제자이면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가까운 자리에서 부인했습니다. 다시는 알 볼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흘린 피로 말미암아 그 베드로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가 만들어졌다면 이 세상은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구름타고 오실 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고 나라인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피의 공로요 능력에만 근거된 결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보이는 세상 권력 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