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장 6- 7절 제목 : 볼 것이요 일시 : 2006년 3월 5일22.231.1.
계 1 : 6- 7 (볼 것이요)
이름 : 이근호(IP:)
http://222.231.1.74/~woorich1/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03강-계1장,6-7,(볼,것이요)-rev060305.hwp
이근호
11-01-03 09:40
003강-계1장6-7(볼 것이요)-rev060305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 6절-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399페이지입니다.
『 계1:6-7 :6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볼 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혼잣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신 말씀은 십자가로의 능력의 은혜를 입은 사람의 마음속에도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그 사람 속에도 ‘다 이루심으로’ 그대로 전이 되는 겁니다. 옮겨지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건 혼자 이루었다는 게 아니고 이 이룸은 ‘혼자만의 다 이룸’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속과 예수님의 남은 일생 모든 것에도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속속들이 거기에 삽입되게 돼있습니다.
다 이루심이 만약에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의 다 이루심으로 전이된다면, 넘겨온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싸울 필요가 없어요. 이 세상은 싸움판 아닙니까, 완전히 싸움판인데 ‘너 잘났다’ 하고 싸움판이고 서로 가지려고 싸우고 있는데 만약에 다 이루었다가 주어져버리면 안 싸워도 되는 영역 속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알게 되는 겁니다. 안 싸워도 되는.
흰 눈이 내려올 때, 흰 눈을 누가 더 많이 가질 거냐 하는 그 문제는 흰 눈 쏟아지는 폭설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눈을 만들어낸다면 ‘내가 많이 만들어내느냐’ ‘네가 많이 만들어내느냐’ 시합이 되겠지만 하늘에서 그냥 눈이 내려오는 거예요. 하늘에서 눈이 그냥 펑펑 내려온다면, 다 이루어진 폭설이 내려온다면 광야에서 맛나 먹듯이 하늘에서 다 이룬 것을 주워 먹기만 하면 될 문제지, 내 쪽에서 그걸 만들어내려고 아등바등 다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속속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사건사건마다 그 다 이루심이 어떻게 삽입되는가를 우리에게 얘기해주는 겁니다. 역시, 우리 힘으로는 안됐는데 예수님 때문에 모든 근심 걱정할 꺼리가 없네, 남아있지를 않네, 끝난 문제네, 감격하면서 세상을 살도록 해주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감격이죠. 감사와 감격입니다.
몇 해 전에, 십년도 넘었습니다만, 어떤 분과 얘기를 하다가, 교회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 얘기를 하다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께서 고민할 것도 많고 괴로운 것도 많은데 목사님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그렇게 고민하는 것과 관계없이 예수님께서 구름다고 오십니까, 안 오십니까, 물어봤어요. 그분은 목사이기 때문에 그걸 모를 리가 있습니까, 제 물음이 빤하죠. 예수님 구름타고 오시죠.
예수님 구름타고 오신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이 지상에서 인간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처럼 아웅다웅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것에 영향 받지 아니하고, 그냥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자기의 다 이루심을 위에서 그냥 폭설 퍼붓듯이 예수님이 주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구름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초대교회 그 심정으로 돌아간다면, 현재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느끼는 고민거리는 고민꺼리도 아닌 거예요. 이거는.
이것은 개인적인 자존심에 관한 문제지 고민거리도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재림 하신다는데 그러면 됐지, 그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뭐가 더 아쉬워서,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느냐 이 말이죠. 흔히 속된말로 다 이거는 부질없는 거예요. 부질없는 것. 요한계시록은 어떤 사람은 그런 얘길 했어요. 인간이라는 건 ‘자연세계가 만든 혹’이라는 아주 멋진 표현을 했는데, 혹 종기지요. 종기. 종기가 뾰루지니까 이 뾰루지 나는 것 때문에 아파하는데 나중에 전체 위에서 보면, 뾰루지가 고름덩어리에 불과하지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도요한이 귀양살이 했다는 건 여러분 상식적으로 다 압니다. 하나님의 사도요, 신학 박사요, 모른 게 없고, 천하에 복을 받은 사람이 마지막 인생의 끝을 귀양살이로 외롭게 보낸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축복개념과 엉뚱하죠? 이것은 사도요한이 귀양살이 하면서도 귀양살이 하지 않는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는 임금님보다도 더 편안하게, 더 넉넉하게, 더 안정되게, 흔들림이 없이, 당당하게 세상을 살았다 이 말입니다. 왜냐, 주께서 구름타고 오시기 때문에.
그걸 생각한다면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썼던 사도요한의 이러한 심정과 일치된 심정으로 파고들어가서 우리도 귀양살이 한다고 마음먹고, 여기 대구라면 대구에서 귀양살이 한다고 보고, 그때 우리의 소망과 희망은 뭐겠습니까, 그거는 한 마디로 ‘다 이루었다’는 데에 두어야 되는 겁니다. 교회 다니고 돈 얼마 벌었느냐, 이런 데에 두지 마시고 예수 믿고 난 뒤에 가정이 화평한가 그런 거 보지 마시고, ‘다 이루었다’ 구름타고 오시리라. 6절에 나오죠? 「아멘 볼 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여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도요한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사도요한이에요. 그 정도 돼버리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 말이 이해가 되요. 이해가. 그까짓 목숨 아무것도 아닌데 버리지 뭐, 이해가 되요.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게 이해가 된다고요.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타인의 말이 아니라 내 인생으로서 내 인생 속에 들어오는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이 전혀 어려울 게 없어요. ‘이거, 딱 내이야기네,’ ‘현재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이렇게 밖으로 표현한 것이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되고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구름을 타고 온다는 말은 다른 말로 쉽게 옮겨버리면,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자, 그렇다면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 이유가 뭐냐, 7절에 보니까 이게 어려워요.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그 다음에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모든 사람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주목하는 것은,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창으로 찔렀든 못으로 박았든 찌른 자들도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신다는 것을 볼 터이요.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 대목이 상당히 어려운 대목이에요. 왜 어려우냐 하며는, 우리들의 관심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향상, 질 높은 노동력을 이 땅에 제시해서 그 덕분으로 내가 돈을 얼마나 획득하느냐, 여기에 관심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땀 흘려 노력하느냐, 이것으로 인하여 세상이 내 중심으로 세상이 흘러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식적이고 우리가 매일같이 생각하는 것은 ‘오늘 무슨 일을 하지?’ 그것만 생각하는데 성경에 보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내 노력과, 일과 상관없이 예수님이라는 분이 계셔서 예수님을 찔러 죽인 거예요. 지난 시간에 5절에 보면 「그의 피로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고」라고 돼있죠? ‘그의 피로서’ 피가 나왔다는 것은 뭐를 찔러야 피가 나오는 겁니다. 안 찌르면 피가 안 나오잖아요. 말이 되지요? 목 졸라 죽일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그의 피가 있어야 우리 죄가 용서받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 피가 나오려면 뭔가 창으로든 칼로든 못으로든 찌른 자가 있다는 겁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 하며는, 예수님이 여기 있고, 예수님을 향하여 찌른 자가 있고 서로 대립되는 상, ‘두 개의 대조되는 개념의 상’에 의해서 세상은 모든 것이 결정나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참으로 신기한 이야기죠. 아주 신기한 이야기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사람들이 교회 오면, ‘우리교회’는 전자오르간, 파이프오르간은 없습니다만, 어떤 교회는 커튼도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조명도 번뜩번뜩하고 오르간도 저음을 깔아 신비적인 음파효과를 낸다는 거예요.
독일의 한인교회를 갔더니만 1절 가사를 천~천~히 부르고 1절 2절 부르더니만 3절에서는 빠르게, 빠른 템포로 부르다가 (ㅋ) 반주만 연주되고 또 4절에서는 빠르게 불러 음의 강약을 조절해 사람의 감정을 유도하는 심리적 테크닉을 발휘해서 분위기를 이끈다는 거예요. 여러분, 종교라는 것에서 ‘신비’를 다 걷어내 버리고나면 뭐가 남습니까, 신비적인 요소를 다 걷어내면 그냥 촐삭대는 육체만 남아요.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목사를 볼 때, 신부를 보다가 목사를 볼 때, 신비로움에 장애가 되는 것이 그 목사에게 부인이 있다는 거예요. 부인이 있으면 밤에 뭐하겠습니까. 그들은 그게 생각나는 거예요. -제가 유도하는 건 아닙니다만-(성도님들 폭소) 그게 무슨 신성이냐 하는 거죠. 그게 무슨 거룩됨이냐 말이죠. 그런데 신성한 것, 거룩 된 것은 인간이 조작한 겁니다. 스스로 자기 감정을 신적으로 향상하기 위해서, 고양시키기 위해서. 높여주기 위해서 자기를 때려주는 식으로 자기의 고상함과 거룩함(흉내)과 품위 있는 것과 신비적인 것들을 조작해내는 거예요.
조작하는데 있어 다섯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촉각, 미각, 후각, 시각, 마약까지 포함해서.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런 신비로움 다 걷어내면 남는 건 뭐냐 하면 예수라는 정치범과 찔렀던 창과 못 자국 이것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희한한 목사의 모습을 봤든 개인적으로 기도원에서 게거품 물고 자빠져가지고 성령 받았든 어쨌든 간에 그걸 성경에서 묻지 않고 성경에서 일관되게 이끄는 그 중심축은 저도 아니고 여러분 느낌도 아니에요. 여러분 감동도 아니고 저의 감동도 아니에요. 저의 신비체험도 아닙니다.
뭐냐! 예수라는 젊은 청년 한 분과 그분이 국가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사형집행당하는 거 그것뿐입니다. 그것도 오늘날이 아니고 2천 년 전에 일어나 사건이에요. 십자가사건 하나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를 끌고 가는 힘입니다. 능력이에요. 신비로운 것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죽을 때 거의 모든 사람이 동조했습니다.
살인강도를 살려줄까, 너희들이 그렇게 왕이라고 칭송하는 예수를 살려줄까 하고 제안했을 때 사람들은 그 당시의 권력자의 눈치를 보면서 이구동성 집단의식에 들어가서 예수를 죽이고 살인강도를 건져냈습니다. 그리고 찔렀습니다. 그리고 피가 나왔습니다. 성경은 그 피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용서하는 그 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복잡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복잡하게 만든 것은 한국교회가 그렇게 만들어요. 한국교회가!
성만찬하면서! 성찬식하면서! 괜히 사람들 기분을 업그레이드 시킨 거예요. 복잡한 거 하나도 없어요! 성만찬하면서 떡을 떼면서 뭔가 짜릿한 것 느꼈을 거예요. 미각적으로. 포도주스보다 포도주로 성만찬하는 게 짜릿할 겁니다. 알콜 성분 있으니까. 세속과 종교를 대립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교라는 것은 세상의 경제활동을 위한 하나의 ‘상부구조’예요. 마르크스의 상부구조라고요.
다시 말해서, 땀 흘려 노동해서 약간의 여가활동으로 혹처럼 부풀어 오른 것이 뭐냐면, ‘교회 다니기’에요. 그게. 그래서 하부구조가 없으면 돈 벌고 양식이 되는 하부구조가 없으면 상부구조의 종교라든지 정치라든지 없어요. 정치 정당,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가입한 사람들 여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루 먹고 하루 사는 사람들은 당회비도 못내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 교회 나갈 시간이 없어요. 주일날 가게 삿다문 열어야 되요. 장사해야 되요. 그래야 아이들 과외 하나라도 더 시킨다고요.
저쪽은 경제가 일단 바탕이 되니까 옛날 우리나라 조선시대 선비들이 90퍼센트의 농민들이 벌어다 준 그것 가지고 가락을 쳤고 노래를 불렀고 소설을 썼습니다. 선비들은 육체노동 없이 고상한 노동을 한 거예요. 그 사람들 밑바탕에는 땀 흘려 일하는 민중들의 노고가 있었습니다. 그걸 그들은 기생 불러다가 가야금 튕기면서 예술을 발전시키고 문학을 발달시킨 거예요. 광대를 불러다가 한 겁니다. 줄 넘으면서. ‘왕의 남자’에 나오잖아요.
종교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죽어서 좋은데 가보겠다는 거예요. 죽어서 좋은데 가보겠다는 이런 종교는 일본에 가면 종교가 십만 가지예요. 모든 종교는 ‘여유만만’ 또는 희락, 유희 그런 종교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실제로 성경 전체를 보면 예수님께 얘기합니다. ‘당신이 메시야라면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 달라’고.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24장에 보면, 「이 악한 세대가 기적을 원하나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했어요.
요나의 기적이란 뭐냐 하며는, 쉽게 말하면 그겁니다. 외로움의 기적이고, 배척받은 기적이고, 쓸쓸한, 외톨이 되는 그런 기적을 말합니다. 죽는 거예요, 그냥. ‘예수, 너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이야! 여기가 어느 동넨데 꺼떡거려! 저리 갓!’ 하고 내쫓는 기적이에요. 그걸 요나의 기적이라 했습니다. 너희들이 내쫓은 그분이 구름타고 온다는 거예요.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에 지금 예수 믿는 우리 속에 주님의 기적이 임한다면 저나 여러분에게 어떤 기적을 기다리느냐 하며는, 외로움 당하는 기적, 배척받는 기적, 쓸쓸한 기적, 열심히 일했는데 인정 안 해주는 기적, 교회서 욕 얻어먹는 기적. 실컷 복음 전했는데 ‘너나 잘하세요~’ 조롱받는 기적,(주여!) 이것이 하나의 기적들이에요. 예수이름으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했습니다. 성령이 하는 이게 기적에 해당된다니까요. 우리가 기피대상이지만.
악하고 어두운 세계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증거로서 외로움과 외톨이라는 하나의 기적처럼. 축복이죠. 그런 축복의 기적이 우리 인생의 한 요소로서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신기함을 매일같이 걷어내세요. 자기 신기함에 매료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반하지 마세요!(너무 예리한 조크-녹취자) 그건 나르시스입니다. 자기가 자기 종교에 반하지 마세요.
이것은 걷어내고 다 걷어내면 두 가지밖에 안 남아요. 하나는, ‘찌른 자’가 있고 하나는 ‘찔림을 당한 자’ 그 두 부류밖에 없습니다.(‘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라는 찬송가 생각납니다-녹취자) 그러면 다른 사람은? ‘저는 칼 안 쥐었는데요,’ 그런 자는 그 찌른 자의 동조세력이고. 찔림을 당한 자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 빼고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들은 찌른 자에 동조한 자고 오직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님만이 독특한 분이죠.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도마가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고백한 그 대목에 재미있는 부분이 뭐냐면, 도마라 하는 논리적인 사람이 뭘 보고서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요 나의 구원자요 하나님이라, 는 걸 알았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 도마에게 창자국과 손의 못 자국을 보여줬습니다. 상상해서 마네킹을 예수님으로 만들고 창자국과 손에 못 자국이 있는 마네킹 가지고 저 뒤쪽까지(교회당 안을) 한 바퀴 돌아봅시다.
‘이게 뭔데? 그래서 어쩌란 말이고?’ 비록 마네킹이지만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 자국을 도마처럼 쭉 돌아보게 하신다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지만- 뭐냐 하면, 세상이나 세상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너희 종교도 아니고, 너희 신앙심도 아니고 너의 노동력도 아니고, 세상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을 핍박했던 세상전부가 ‘다 이루었다’로 확정지었다는 겁니다.
세상이 ‘너’중심이 아니고 네가 빡세게 일한 것은 다 아는데, 세상은 너의 중심이 아니고 예수중심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참된 기독교가 뭐냐 하며는, 그냥 예수이야기입니다! 예수이야기예요! ‘The story of Jesus’ 그냥 예수이야기입니다. 예수에게 관심 없는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관심 있는 것밖에 안돼요. 주보 뒤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철저하게 막혀있습니다. 철저하게 막혀있어요.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관심사가 신은 어떤 신이며, 나는 어떤 인간이며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거기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 내용은 그렇게 보시면 안 되고, 성경 전체는 ‘평범한 나사렛 청년’이라는 그 예수라던가 뭔가 그 예수이야기예요. 이게.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그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은 그냥 그가 살아온 그대로 지옥 형벌불에 당한다. 이것이 성경 전체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 하면 약간은 기는 죽지만, ‘예수’라고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맞먹으려고 나오죠. 왜냐면 석가모니가 예수보다 먼저 태어났느니 어떠니 하면서 같은 성자 레벨인데 같이 쳐주자, 이런 농담거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초라한 예수님에 대해서 농담꺼리 또는 술안주, 안주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아시고. 사람들이 그렇게 무시하기 쉬운 예수님을 앞장세워서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할 말을 다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영을 받지 않으면 세상 전체를 모른다는 뜻인데, 쉽게 말하면 이겁니다. 쉽게 말한다 해도 사실은 어려운 얘긴데, 하나님은 ‘죄인 된 하나님’을 앞장세워서 일하십니다. ‘죄인 된 하나님’에서 ‘하나님’ 빼버리면 하나님은 ‘죄인’을 앞장세워서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일하신다 이 말이거든요. 그게 이해가 잘 안 되면, 누가복음16장에 이런 이야기 있습니다. 어떤 분이 게시판에 질문을 하셨는데, ‘불의한 청지기’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직원이 구조조정 당해서 회사 퇴직하기 직전에 ‘에라, 이왕 내쫓아 내는데 나만 손해 보면 병신이지, 그러면 안 돼, 쫓겨날 때를 대비해서 훔칠 건 다 훔쳐놓아야 되겠다,’ 그래서 회사에 빚이 있는 회사에 휴대폰으로 전화 다 해가지고 “내가 자리에 있을 때 편리 봐줄 테니깐 나 퇴직한 뒤에 당신도 내 편리 좀 봐주실랍니까?” “아, 그러지요,” “그러면 장부는 내가 꽉 잡고 있으니까.” “당신 이 회사에 얼마 빌려줬소?” “일억 빌렸습니다.” “그러면 내가 알아서 5천 만 원 면제해주겠다.” “에구, 웬 횡재? 고맙지,” 그걸 불의한 청지기라고 했습니다.
상당히 불의하죠. 나쁘죠. 나쁜데. 예수님은 그러한 불의한 청지기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소위, 정직해야 된다. 바르게 살아야 된다. 윤리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어야 옳은 하나님이다. 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 예수님의 말에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경 자체가, 불의한 청지기가 소위, 성직자들 목사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얘기하신 예수님의 그 이야기를 그들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누가 봐도 그거는 횡령인데, ‘그걸 장려한다면 우리도 교회 다니며 횡령해먹고 예수님이 시킨 대로 했다 하면 책임 없겠네,’ 이럴 수도 있을 것이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우리가 얼마나 지독하게,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랐으면 주님께서 그들이 나쁘다고 여기는 그런 죄인 된 모습. ‘정말 저건 나쁜 거야, 나쁜 짓을 한 거야’라는 그 모양새 안에서 하나님은 구세주 하나님의 모양새가 우리한테 나타났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뻘쭘한 그들) 알아듣지를 못하는 겁니다.
사순절 금식기도기간을 맞아 금식하고 있는데, 목사님이 금요철야에 다 불러내고 이번 부활절에는 일 년치 금식 더 합시다. 해가지고 전부다 불러내 일 년치 금식 다 하고 금요일부터는 돈까스 먹고 만두 먹어도 됩니다.(ㅋ) 해가지고 고난 주일 보내는데 그 중에 어떤 최 집사가 오면서 소주 한 병 품에 숨겨왔는데, ‘우리의 죄를 다 끄집어내어 회개합시다’ 하면 뒤에 있는 최 집사가 ‘끄억~’(ㅋㅋ ) 뒤에서 술 먹고 있다 말이죠.
‘최 집사! 왜 술 먹습니까!’ -대구우리교회 최 집사보고 하는 말 아닙니다.(좌중폭소)- “나는 주님께서 회개하는 의인을 부르러 오는 것이 아니고, 회개할 줄도 모르는 죄인 부르러 왔다.” “여기 회개 못하는 금요철야 다 와! 가는 거야! 오늘 2차로 할까?” 진짜 다 불러낸 거예요. 그럴 때 그 분위기가 어떤 분위기겠습니까. 저 예수라는 사람은 엽기적인 사람이고, 상종 못할 사람이며, 손에 쥐면 빠져버리는 관리 대상이 아닌, 내 맘대로 다룰 수 없는 제거 대상이다. 이렇게 간주할 거다 말입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 「나는, 의사는 병든 자라야 필요하지, 스스로 건강하다 하는 사람은 의사가 필요 없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내가 구원하는 방식은 옛 부대에다 새 술을 담는 식이 아니라,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식으로 구원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새 부대가 뭐냐 하며는, 예수님 자신의 피로만 ‘다 이루었다’가 성사되는 그런 방식입니다. 자신의 피.
그러니까 예수님의 돌방사태는 그냥 술 먹는다고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개판치고 깽판치면 구원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너희들이 아냐!’입니다. 피의 의미를.
너희들이 그렇게 배척하고 무시하고 무관심했던 그분이 결국 너희들 전체가 그분을 향하여 ‘찌른 자’ 찔러야 된다는 거. 저 예수는 별 볼일 없다, 무용지물이야. 저건 찔러야 마땅해! 찌른 것이 하나님의 정의로움이야! 하나님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을 찔렀습니다. 강도를 원하는 식으로 동조했습니다. 찌를 때까지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너희들의 본색이 드러날 때까지, 찌를 수밖에 없을 때까지 주님께서는 ‘양보’를 계속 해온 겁니다.
지금 이러한 이야기가 그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살해 담당한 그 몇 명 주동인물을 두고 얘기한 것이 아니고, 소위 우리 전체를 두고 해당되는 겁니다. 스무 살 때 교회 나왔다. 교회 나올 때 은근히 기대했었다. 목사님의 설교가 뭐냐 하면,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꿈을 이루어주십니다.” “희망이 없는 민족은 죽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꿈꾸는 자를 원합니다.” “꿈을 꾸려면 입을 크게 벌리세요. 벌린 각도만큼 다 채워주십니다.” (ㅋ)
“여러분들은 앞으로 미래를 꿈꾸지 않으면 파멸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누가 많이 가졌느냐의 시합입니다.” “크게 가지면 여러분들을 크게 쓰시고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쓰시고 ‘그냥 이대로 죽치자’ 이러면 여러분을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쓰실만한 그릇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누구 부흥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폭소- 그렇게 설교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설교 듣고, 내가 미쳤다, 교회 너무 안 나왔다, 교회 진작 나왔으면 희망 갖고 의지를 북돋아 세상에서 승리자가 될 텐데, 이제 주여 손들고 옵니다. 하고 나왔거든요. 나와서 시킨 대로 다 해봤는데 실적이 영 신통치 않아요. 주님께서 복 준다 해놓고 복 안 주십니까! 그게 바로, 그때의 칼은 손잡이가 짧은 칼이죠. 찌른 거예요. 계속 찌른 거예요. 그런데 십년 다니고 장로 투표했는데 또 떨어져버렸어요. 아무도 표 안 던진 거예요.
내가 교회에 얼마나 충성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날 장로 안 되게 합니까. 칼이 좀 더 길어졌어요. 또 찔러요. (아, 불편한 진실-녹취자) 또 찌른다고요. 결국은 뭐냐 하면, 우리 속에 아담의 본성을 지닌, 예수님을 궁극적으로 찌를 수밖에 없는, 그 찌르는 칼이 무슨 칼이냐면 방언하는 칼, 기적을 체험하는 칼, 신비를 체험하는 그런 칼, 내가 성경 백독을 한 칼, 개척교회 한 칼, 목사라는 직분의 칼, 온갖 칼을 들고 우리는 수시로, 내 뜻대로 내 소망대로 내 꿈대로 안 해준다고 예수님을 찌른 거예요.
쿡쿡 찌르니깐 하나님께서는 그 찔림 받은 예수님 데리고 우리 주변을 빙 돌아요. 다 도는 겁니다. 피가 우리를 다 이루었다고, 피가 우리를 용서했는데 우리는 날 용서한 피보다도 내가 그동안 예수님께 충성한, 충성도를 더 크게 여긴다는 것은 그게 바로 십자가이 피가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해석하려는 그런 마귀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빠진 채로.
마태복음 10장32절,33절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개역개정,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인자’가 우리 운명을 결정합니다. 인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우리 운명이 완전히 결정되는데 이 대목을 보고서 제가 생각한 게 뭐냐면, 베드로를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결국은 세 번씩이나, 그것도 우물쭈물 부인한 것이 아니고 아주 저주를 하면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10장 방금 읽었던 대목에 의하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저를 부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저를 시인할 것이다」하는 이 말씀은 수제자 베드로도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이 성경말씀은요, 누누이 당부합니다만, 이 성경말씀 전체는 예수님께서 혼자서 그걸 다 이루어서, 예수님이 다 이루심을, 그것도 돈도 안 받고 공짜로 우리 속에 우리의 다 이루심으로 넘겨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되어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 시인하는 이 대목도 한 5년은 버틸 수 있어요. 그러나 6년째에 무슨 사건이나 사고가 터져버리면 베드로가 세 번이 아니라 삼백 번 얘기할 수 있어요. ‘예수님을 모른다’ 모른다. 이야기할 수 있다고요.
그리고 공개적으로 않더라도 속으로도 어떤 다급한 시기에는 모른다할 수 있지요. 회사 취직을 하는데, ‘우리 회사는 불교재단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는 안 받습니다.’ ‘여기 기독교신자 손들어보세요. 있습니까?’ ‘주여, 돈 벌어 십일조하려는 것이니 다 좋은데 제가 꼭 밝힐 필요 있습니까,’ 그러면 손들었다면 신자입니까? 손들어서 신자가 아니라, 손 들든 안 들든 간에 그걸 통해서 예수님의 피가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다 이루었다는 거. 구름타고 오신다는 거. 그 찌른 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평소에 찌르고 싶던 자신을 고발하고 자인할 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너무 어려웠나본데, 마지막으로 어렵게 이야기해볼게요. 하나님께서 거룩한 내 백성이고 거룩한 언약이다 할 때, 반드시 거기에는 뭐냐, 모세가 양푼에 있는 피를 뿌려버립니다. 이 피를. 이 피가 있은즉 용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와 잘난 것 업어요. 똑같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마다 이상스럽게 강대국들은 쓰러집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그 피가 동행하고 있었던 겁니다. 동행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멘. 아멘.)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장7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여기에 1장6절에 보면 「아버지께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할 때 여기에 ‘영광’과 ‘능력’이 다른 말로 하면 ‘공로’와 ‘실제적인 효력성’이 예수님에게만 있다 이 말이죠? 5절에 보면 그의 피로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해서 하나님 백성으로 바치신 분이기 때문에. 다 이룬 거예요! 그리고 구름타고 오시면서 자기백성 솎아내죠.
이것은 하늘의 백성 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지 마시고 구약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이방민족을 이겼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같은 홍해를 건넜지만 요한계시록에 보면 피 바다를 건넌다. 피 바다. 피바다를 건너서 어린 양의 피로서 하얗게 씻고 종려나무 들고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내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다는 그것에 의해서 이미 결정난 거예요.
다 이룬 겁니다. 다 이룬 거예요. 우리는 평생 살도록 작은 문제에 얽매여서 ‘너 잘났니, 나 잘났니,’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투든 안 다투든 관심도 없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나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구름타고 와서 너희들이 찔렀던, 너희들이 별 볼일 없다고 여겼던 33살 먹은 나사렛 청년이 바로 죄인으로 왔던 그 하나님! 본인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그 자체다 말입니다.
하나님이 숨어있는 모습으로 왔습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왔습니다. 외롭게 왔고, 쓸쓸했습니다. 누구도 그분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인 줄 몰랐습니다. 베드로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성령이 와서, 도마에게는 못 자국을 보여줄 때 저 못 자국이 날 살리고 저 창 자국이 나를 살렸구나! 저기서 쏟아진 피가! 나의 죄를 씻었구나! 내 피가 아니고! 내 땀방울이 아니고! 내 낙타무릎이 아니라. 교회 봉사 충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다 능력 있게. 놀라운 능력으로. 기적으로. 우리를 백성 되게 했다는 거. 구약의 언약 주는 것처럼 그렇게 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평생토록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이미 다 이루었는데, 끝난 상황, 종료됐는데 아직도 우리 것을 챙기기에 분주합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결부시키고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요청하는 우리를 진작 주님께서 주신 보이지 않는 사랑. 보이지 않는 용서. 보이지 않는 부할. 보이지 않는 영생. 부활을 통해서 증명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늘 자신을 내어보면서 나의 핏방울보다도, 땀방울보다도 주님의 피를 고귀하게 증거 하는 저희들 증인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