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계 1: 4- 6 (그의 피)
Re..계 1: 4- 6 (그의 피)
이름 : 이근호(IP:)
그의 피
2006년 2월 26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4-6
(계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계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신자만이 구원된다고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자란 ‘믿는 자’를 의미합니다. 즉 ‘행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열심히 행하는 자는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란 믿지 않는 자들 속에서도 희한하게 ‘너는 믿는구나’라는 늬앙스를 줍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믿는단 말입니까?
찬송가 88장 2절 가사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와있습니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버려” 사람들은 흔히들, 주위의 사람들이 슬금슬금 떠나가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버린 증거라고 해석해 버리곤 합니다. 그 대신 자신을 호응해주는 팬들이 들끊으면 그것을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굳게 인정해주는 증거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거꾸로 알고 있는 바입니다. 오히려 이 마지막 때에는 주님께서 일부로 친하게 지내고 힘이 되는 사람을 떠나게 만듭니다. 따라서 참된 성도는 무엇을 믿는 사람인고 하니, 그동안 세상적으로 의지할 만한 힘이 된다고 여기는 것을 슬금슬금 철수시킨 그 당사자가 다름아닌 우리 주님이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가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해서 이 세상은 힘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피로만서 구원이 됨을 자기 백성에게만 나타내시고 하는 작업에 열심 내시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무어거리 원한이 많은 지, 이 세상은 온통 사람들이 쉴새없이 내뱉고 있는 원한과 원한이 교차하는 장터입니다.
사람들이 품게 되는 원한이란 자기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힘이 없다는 것 때문에 생겨납니다. 즉 자기에게는 오로지 이 세상에서 당당할 수 있고 뽐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힘이 필요해서 흘러흘러 가다가 보면 교회까지 오게 됩니다. 교회 문을 들어와서는 거기서 말하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을 보고 “힘 주세요”라고 강요하게 됩니다.
이로서 가짜 신자가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가짜 신자는 힘을 요구하게 되고 진짜 신자는 피만 바라보고 삽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체 줄거리 속에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짜 신자인가를 발췌하는 작업도 들어있습니다. 종교와 경제를 정치적인 지배의 힘으로 통합하는 것이 악마의 작업이다는 것도 요한계시록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교회마저 악마의 권력에 잡혀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스스로 저주하고 쳐버립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가짜들이 본색을 드러낼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 ‘피’입니다. 힘과 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힘은 이 세상에서 안 통하는 곳이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힘이란 다른 말로 ‘돈’입니다. 돈 싫다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 예수님의 피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목사의 세습화는 바로 힘의 최종 자리를 남에게 줄 수 없다는 지배 자리에 대한 탐욕으로 발생된 겁니다. 사람들이 힘이 모이는 지배의 자리를 좋아하지 결코 예수님의 희생의 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악마는 알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오직 ‘예수님의 피’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따라서 악마는 자신의 하수인들을 각교회에 지배층으로 집어넣어 어떻게하든지 예수님의 피에 접근되지 못하도록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고 원하는 힘을 주겠노라고 설득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에다 계속해서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그렇게해서 ‘사건으로서의 교회’와 ‘법으로서 지탱하는 교회’로 구분지웁니다.
‘사건으로서의 교회’란 지속적으로 십자가 사건을 발생시키는 교회를 말합니다. 마치 심하게 화상입은 얼굴을 하고 있는 환자에게 냉정한 의사가 거울을 갖다 주면서 자신의 얼굴을 솔직하게 보게 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법 체제로서의 교회’는 그런 거울을 버리고 그 대신 정교한 법질서를 수립하여 그 법을 준수하게 되면 계속 의인으로 유지하게 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겠다는 교회를 말합니다.
자연적으로 여기에는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판을 치겠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피’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거룩한 성전을 성취시키려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보좌가 나오고 그 앞에 7 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옛날 모세 율법에 기재된 거룩한 성전 안에서 거룩을 반복적으로 생산해 내는 배치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의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거룩을 만들어내시는 장치를 구상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의 거룩함을 제공하는 근거는 제단에서 흘린 ‘흠없는 제물의 피’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아니됩니다.
모든 인간들은 힘을 얻기 위한 분노와 원한으로 중무장한채 험난한 세상에 돌진하게 됩니다. 따라서 거룩한 피를 만드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를 못합니다. 인간들이 교회 안에서 아무리 열성적인 종교적인 행위를 말해도 그것들이 모두 스스로 자신을 의롭게 치장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이와같은 술책에 악마가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악마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이 모든 작업은 인간들이 원하거나 해낼 수 있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스스로의 작업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피’로서만 죄에서 해방되는 아이디어도 하나님 혼자만의 아이디어이지 인간들이 관여할 작업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까 보았던 찬송가 가사처럼 ‘온 세상 날 버려도’ 우리 성도는 그것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고 해석해서는 아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가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인가를 보려하여 ‘온 세상이 다 떠나게 하는 일’도 하십니다. 그렇게해서 우리가 평소에 무엇을 믿었고 무엇을 최종 의지했는가를 스스로 알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선별작업을 보여줍니다. 가짜인지 진짜 인지를 말입니다. 자신의 구원이 결코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자신의 구원을 자기 일로 가져 가신 분이 따로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 안에 십자가 사건을 계속해서 터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