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51220 부산강의-베르그송
Re..20051220 부산강의-베르그송
이름 : 한윤범(IP:)
20051220 부산강의-베르그송
오늘은 베르그송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베르그송에 대해서는 유난히 어렵습니다. 왜 어렵냐 하면, 기존의 노선이 존재에 대해서 쭉 나가다가 이탈이 됐습니다. 칸트부터 해서 인간의 존재, 인간 중심의, 인간의 주체사상에 관한 것이죠. 그렇게 해서 쭉 나가다가 인간이 뭐냐? 인간의 역사가 뭐냐? 앞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는 뭐냐? 신은 인간을 가지고 어디에 부려먹으려느냐? 인간을 통해서 이 사회가 어느 정도 발전할 것인가? 그런데 인간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쭉 나왔습니다.
존재에 대해서 사람이 관심이 뭐냐 하면 이것이 소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가질만한 것은 구미가 당기고 가질만한 것이 아니면 별로 관심이 없어요. 관심을 가질 때에 연구하는 겁니다. 배아줄기 세포도 사람이 관심이 있는 것은 그것은 하나의 돈이 되고 가질 만한 소유될 수 있는 가질 만한 거예요.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연구하자. 이런 것 별로 없어요. 그런데 주님의 사랑도 이것을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소유할 수 있다면 이것도 서로 가지려고 난리를 하지요. 계속 가질 수 있는 대상 같으면 관심이 있고 가질 수 없는 대상은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 당회장은 누구냐? 관심이 굉장히 많아요. 소유할 수 있으니까. 주님을 어떻게 누가 희생할 수 있느냐? 관심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소유를 통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쪽이 이것이 이미 신을 포기한 거죠. 포기한 상태에서 뭔가 옛날에 신에게 부여했던 모든 좋은 것을 이제는 인간 쪽에서 생산을 해야 될 그러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신에게 부여됐던 모든 영광과 찬양을 이제는 인간 쪽으로 전환해서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보기에 감탄할 만한 그러한 영광과 찬양,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지요.
그러한 소유될 만한, 자기가 가질만한 것을 옛날에는 기도해서 신에게 얻고자 했는데 지금은 이 소유될 만한 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자연 속에서 과학이나 기술을 통해서 자연을 가공해서 이것을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인공적인 만든 것을 소유하려고 하지요.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이 손대서 새로 생긴 것을 소유할 때 여기에 비로소 ‘인간이 신이다.’하는 것이 분명히 확인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 신나잖아요. 신난다고.
옛날에는 신에게 그냥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신에게 빌 것이 아니고 지상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만들면 될 것 아닌가? 하는 겁니다. 여기에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 노동이 동원됩니다. 노동이 동원되면 가치 있는 노동과 가치 없는 노동이 뭐로 이렇게 구분이 되느냐 하면, 얼마나 양적인 가치로 측정이 됩니다.
이럴 때 뭐가 날아가 버리나 하면 질적인 것은 양의 영향을 받게 돼요. 무슨 뜻이냐 하면, 양적인 가치를 측정하는 것은 바로 돈이죠. 돈이 되면 질이라 하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그만큼 수요가 많으면 갑자기 돈 가치가 높아지고, 수요가 떨어지면 아무리 자기들 열심히 일해도 가치가 폭락하기 마련이죠.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전에 애써서 만든 기술이 완전히 똥값이 돼버려요.
충남 연기군에 갑자기 보상금 달라고 데모하고 웃기는 사람들이에요. 한 평 얼마나 한다고 그렇게. 이젠 떼돈 벌려고, 팔자 고치려고 나라를 상대로. 갑자기 수요가 있으니까 뭐가 돼요? 그 땅은 가만있는 땅이에요. 수요가 있으니까 갑자기 가만히 있는 땅이 양적인 가치가 확정되었어요. 그럼 거기서 농사지면 쌀가마 한 가마 더 나옵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무서운 일이 벌어졌어요. 뭐냐 하면 돈에 의해서 가치가 정해지니까 인간 자체도, 좀 더 다른 말로 하면 인격 자체도 돈에 의해서 판단이 되어 버리는 그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하다가 오히려 자기가 자신을 학대하는 쪽으로 갔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교회에서는 신을 떠난 인간이 갈 곳이 그것 밖에 뭐가 있느냐?
여기서 분연히 일어난 사람이 인간을 구원하자고 일어선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니체란 사람입니다. 니체가 여기에 대해서 인간이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무슨 조치를 했느냐 하면, 신을 죽이는 조치를 시작하잔 말이지요. 신은 죽었다고 니체가 이야기했지요. 신은 없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가 굉장히 큰 차이입니다.
신이 없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없는 것을 우리가 괜히 호들갑 떤 것이 됩니다. 아이고, 없는 걸 가지고, 모든 자연은 과학으로 다 설명되는 걸 가지고 괜히 호들갑 떨었네. 자 이젠 옛날 신이 있다는 걸 다 잊어버리자. 이렇게 돼버리죠. 신이 없다는 쪽은 주로 대학교 때, 또는 군에 가서 힘들 때, 취직 안됐을 때, 힘들었을 때 교회 나와서 신이 있는 양 여겼던 사람들이 막상 직장에 나와서 바쁘고 관심사가 세상에 관심을 두니까 점차 한 주일에 세 번 나오다가, 두 번 나오다가, 한 번 나오다가, 한 달에 세 번 나오다가, 두 번 나오다가, 한 번 나오다가, 두 달에 한 번 나오다가, 석 달에 한 번 나오다가, 일년에 한 번 나오다가 이렇게 하다가 점차는 그 꼬리를 감추고 어디서 뭘 하는지 사라져 버리죠. 절차가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젊은 아이들. 바쁘다 보니까. 벌써 이런 순서로 나가잖아요. 이럴 때는 그 사람들에게는 신이 있다고 여기나, 없다고 여기나 나한테는 별 차이가 없더라는 뜻에서 안심 푹 놓고 이렇게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신이 죽었다는 말은 신이 없다는 말과 달라요. 신이 죽었다는 것은 누가 죽였느냐 말이죠. 인간이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은 계속해서 라이벌인 신을 죽이는 방향으로 살지 아니하면 인간다움의 가치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하는 뜻이에요. ‘계속 신을 죽이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하는 거예요.
그러면 신을 왜 계속해서 죽여야 하냐면 신은 뭐가지고 인간에게 취급하느냐 하면, 거룩성 그리고 도덕성으로 취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이걸 흔히들 그 바탕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면 양심이라 이야기합니다. 양심을 가지고 취급을 해요. 니체는 신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신이 없다면 뭐도 없어지냐면, 니체 생각에는 그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도덕적인 양심이 없어질 때는 신이 없다고 하는데 이런 젊은 얘들 최근 직장 다니다 보니까 일년에 한 번도 안나오고 이런 사람들도 결국은 마음속에 뭐는 살아있어요? 여전히 양심이라는 것, 착해야 된다는 것, 나쁜 짓하면 벌 받는다는 것, 죽어서 어떻게 할 지 나는 참 암담하다는 것, 술 먹으면 술 먹고 이래서는 안 되는데 어릴 때 한두 번 갔는데 신이 계시다면 나한테 큰 어떤 앞으로 징벌을 내릴 걸, 조금 불안해지네. 이런 것들이 남아 있는 이상 신이 영원히 안 죽는 거예요. 신에 대해서 그동안 잘 돌보지 않았을 뿐이지 신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니체는 인간에게는 신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겁니다. 현대의 코넬리우스 밴틸 같아요.
교회사 열 번째 강의 안 올라있지요? 다 이유가 있어요. 열 번째 강의는 코넬리우스 밴틸을 공격한 거예요. 메이첸의 제자. 강의를 안 올린 이유가, 지금 DVD를 만드는 장비를 사가지고 대식 씨가 판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걱정하는 것이, 혹시 교회사 이것을 두 시간동안 다운받아서 자기가 장사할 사람이 생겨버리면 곤란한 문제가 생겨요. 그래서 그걸 고민하는 중이라서 열 번째를 일단 자물쇠를 약간 채워 놨어요. 어떻게 할지. 엉뚱한 소리, 신이 없는데 ...
니체는 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위선자일 뿐이고, 신은 누구에게나 살아있는데 신을 죽여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모르는 깊은 인간다움을 만개할 수 없다는 겁니다. 터뜨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인간이 신을 찾을 군번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신을 찾아야 되냐면 신이라는 것은 너무나 우리에게 모르는 대상이고 기껏 알아가는 것이 자기 자신인데 어릴 때부터. 인간은 자기 자신도 평가 못 받고 자기 자신의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다 활용도 못하는 주제에 어디 자기 외곽에 눈을 돌려서 신까지 관심을 두느냐 말이죠. 그래서 니체의 철학을 한 마디로 말하면 ‘네 속에 잠자는 신을 깨워라! 네 속에 잠자는 무한한 능력을 깨워라!’ 이 말입니다.
디지털 그래픽 영화기법이 나오기 전에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를 한 30, 40년 전에 봤으면 아마 감독을 신이라 이야기할 거예요. 도저히 그런 장면을 촬영될 수가 없는 거예요. 한 수천 명 동원하는 엑스트라 돈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을 정도로 헉헉거리는데 반지의 제왕이라든지 요새 나오는 이러한 SF영화 보면 수천 명이 뭡니까? 수백만 명이 등장하잖아요. 그것도 실감나게 하나하나 움직이잖아요. 그것 어떻게 촬영합니까? 엑스트라 백만 명 동원합니까? 엑스트라를 백만 명 동원해야 백만 명 찍는다는 그러한 패러다임, 그러한 인식 안에 갇혀 있을 때는 어떤 경우라도 백만 명 동원 못하면 백만 명 동원하는 장면을 못 찍는다는 이런 게 있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반지의 제왕의 그 사람이 한 오십년 푹 뛰어가지고 50년 전에 반지의 제왕을 상영했다면 질겁을 할 거예요.
이것은 바로 니체가 사람들에게 호소한 바가 이런 겁니다. 사람은 다 안 된다, 안 된다 하는 거예요. 니체 철학은 뭐냐 하면 조폭 철학입니다. 하면 된다 이 말에요. 지구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하잖아요. 개그콘서트에 보면 추리닝 입고 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뭐가 있어? 안 되는 일이 있다 하니까 그 다음에 뭘 찾아요? 그 넘어 계시는 전능하신 신을 찾는단 말이죠. 그런데 니체에 의하면 신을 찾게 되면 인간 것에 대해서 더 능력을 부여하는 신이 아니고 소위 쓸데없는 거룩성과 도덕성과 양심을 가지고 현재 인간이 갖고 있는 잠재 능력마저 파고들어서 파괴시켜 버리는 그런 신이 되는 걸 너희들이 왜 모르냐? 이 말이에요.
정말 신을 찾고 싶으면 젊을 때 네 마음대로 살고, 늘그막에 죽어서 모르니까 아무도 안 가봤으니까 천당이라도 있으면 난처한 일이 벌어지니까, 천당 갈 수 있게 교회 나오면 그러면 되지, 젊은 놈이 교회 앉아서 설교 듣고, 그게 무슨 꼴이냐? 그럴 시간 있으면 네 잠재능력이나 키워라. 이 말이죠.
이러한 니체의 철학을 적극적 허무주의라고 합니다. 인간의 허무성은 어떤 신과 대비시키니까 자기가 허무를 느끼는 겁니다. 신을 죽여 버리면 신이 없다고 하면 또다시 허무해요. 사람은 경쟁심이 없으면 미래가 불안해 지거든요. 신을 아예 죽여 버리면 어떻게 죽이든지 이젠 내가 신을 이겼으니까 내 안에 신을 이긴 것이 있으니까 일단은 허무를 적극적으로 허무를 만들어도 내가 만들고 신이 제공에서 만드는 게 아니고 허무를 안 해도 내 힘으로 안 하는 그런 식으로 살면 되는 거란 말이죠. 이 적극적 허무성은 특히 젊은 여자들이 새로운 유행되는 그러한 옷이라든지 그런 것이 화장품이 나오면 쇼핑몰을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사지요. 계속 유행을 바꾸고 젊은 얘들은 차를 바꾸고 오 바꾸는 것은 뭐냐 하면, 나타난 허무를 새로운 것으로 커버하면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니체 철학을 주일 오전에 잠시 이야기했습니다만 인간의 자아 속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하나는 점령하는 자아가 있고, 하나는 점령당하는 자아가 있다. 점령당하는 자아는 뭐냐 하면, 이게 오늘 베르그송 이론에 나옵니다. 점령당하는 자아는 과거의 경험이 만드는 기억이 생산하는 자아, 점령하고자 하는 자아는 미래를 내다보는 현재가 이 과거를 점령하는 데에서 새로운 생성의 기쁨, 삶의 기쁨을 제공해요.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어제 보다 더 나은 내일이 될 때 사람은 비로소 사는 환희와 기쁨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길에 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사람 사는 게 목적이 뭡니까? 물으면 그 사람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은 몰라요. 그냥 살지요.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그 사람들은 목적이 없습니까? 목적이 있어요. 목적이 뭐냐? 어제를 살았기 때문 비로소 목적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어제가 있기 때문에 어제에 해당하는 목적만 있어요. 원대한 목적은 없지만 어제의 기억에서만 오늘이 되었거든요. 오늘 사는 목적이 뭐냐 하면,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그게 자아를 계속해서 점령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신을 찾는 것도 바로 어제 보다 더 나은 내일을 뭔가 노린다는 것은 뭔가 안다는 것을 기초로 해서 노리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뭘 노립니까? 정신박약자들은 목적이 없잖아요. 뭐 아는 게 없으니까. 그런데 정상인들은 아는 게 있기 때문에 그것 플러스알파를 추구하다 보니까 ‘이게 인생의 목적이다.’ 이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어제 설교에 어떤 낯선 분이 두 분 왔어요. 나중에 보니까 연세는 나보다 좀 많은 것 같고, 서울대학 출신이라 하는데 그분이 누구 소개로 와서 설교 들으니까 어때요? 하니까 그분의 평이 걸작이에요. 재미있어요. 이 차원 높은 설교를 이 사람들이 알아듣나요? 복음의 설교를 알아듣는 경우는 한 경우밖에 없습니다. 반드시 인생에 실패해야 알아듣습니다. 안 그러면 지식으로 받아들여요. 주님이 주심을 맛보는 사람은 다 압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목회에 실패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제 베르그송 해봅시다. 베르그송의 글들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베르그송은 뭣을 의식하느냐 하면, 과학적인 성과를 의식합니다. 의식하고 부셔버립니다. 베르그송이 있었던 20세기 초에는 과학이 이런 오만의 도를 넘었어요. 여기 192페이지를 보면 베르그송은 허버트 스펜서의 진화철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죠. 1820-1903을 살았던 허버트의 진화론이 등장하고 난 뒤에 아예 교회 자체가 문을 닫아야 될 판이에요.
심지어 위기를 느낀 교회가 교회 안에서 진화론을 가르치기 시작한 거예요. 신학도, 사도바울의 신학, 예수님의 모든 복음도 진화론적으로 해석한 거예요. 처음의 예수님의 사상과 나중의 사상이 다 달랐다. 사도바울이 처음에는 어떤 사상이었는데 나중에 겪어 보니까 딴 소리를 하더라 이 말이죠. 진화론 자체를 부인하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미신에 빠진 무식한 사람으로 간주해서 어느 철학자도 전부 다 진화론 쪽으로 했는데 헤겔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좀 어려운데 과학적인 성과가 뭐냐 하면, 옛날의 스콜라 철학이라든지 옛날의 신학이라든지, 철학 같은 것도 항상 신과 결부되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결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돌멩이가 결정되어 있지요. 물도 액체 나름대로 결정되어 있어요. 기체도 공기도 나름대로 결정되어 있어요.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그런 것은 없어요. 모든 것이 결정될 때 탐색의 대상이 됩니다. 관찰의 대상이 되지요. 어렵다 하니까 벌써 논리가 상당히 복잡하게 되어서 힘들지 싶은데. 이 글보다 더 쉬운 걸로 합니다.
베르그송은 과학적인 것에 대해서 의식하고 과학적 철학을 부수려고 한건데 왜 부수려고 했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결정체로 있단 말이에요. 하나의 수정 같은 것 있잖아요.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수정만 아니고 인간도 마찬가지고, 선풍기도 마찬가지고, 개도 마찬가지고 결정체가 있다 이 말입니다.
옛날에는 어떻게 해서 이런 결정체를 갖고 있는 존재물이 되었는가? 이것이 굉장히 고민거리였어요. 대표자가 둔스 스코투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자지요. 이런 사람의 경우에 어떻게 신은 하나인데 신이 만든 사물이 왜 그렇게 다양하면서도 하나하나가 결정되어 있느냐? 왜 개는 사람이 될 수 없고, 왜 사람은 개가 될 수 없느냐? 그게 그렇게 고민거리가 되는 겁니다. 신은 하난데 왜 하나에서 그러니까 달, 해 다 모아서 신이 되는 게 아니고, 그러면 걱정할 것 없지요. 떼 내어 줬구나. 떼 내 줬기 때문에 주워 모으면 바로 하나가 되겠구나. 이러면 별 어려움이 없는데 신께서 떼 내어 준 하나하나가 도로 주워 모을 수 없는 성질의 결정체를 갖고 있단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게 복음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런 복잡한 사유하고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관련이 있어요. 왜 관련이 있느냐 하면, 결정의 반대말이 무슨 말이죠? 미결정이죠. 사람이 미결정일 경우에는 아까 니체하는 것처럼 이게 무슨 욕구가 있느냐 하면, 어서 안정된 안정체, 결정체가 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결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신에게 호소하게 되어 있지요.
이제 복음과 관련성을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너무 어렵기 때문에 우선 복음과 관련성부터 말씀드리고 계속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옛날의 인간은 결정되지 않았어요. 왜 안 되었냐 하면, 이것은 캘빈도 그렇고, 루터도 그렇고, 개신교 철학자, 신학자들 다 마찬가지인데 인간 속의 하나님의 형상이 결정된 게 아니에요. 이것은 완성체를 향하여 나아가야 될 하나의 바탕,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따라서 이건 무엇을 요구되느냐 하면, 결정체가 미결정체이기 때문에 나갈 때 뭘 요구하게 됩니까? 신에게 호소하게 되지요. 따라서 교회는 이걸 가지고 밥 먹고 사는 겁니다. 당신은 인간인 것 같지만 인간이 덜 됐습니다. 예수님 닮으려고 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신에게 기도하세요. 그러면 점차 거룩해져서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죄는 그때그때마다 삭제하고 제거해야 됩니다.’라는 식으로 교회가 뭔가 할 말이 있는 거예요. 교회가 존재의 정당성을 여기서부터 파악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과학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상황 속에서 의하면 둔스 스코투스는 결정이라는 것은 신의 솜씨라고 봤는데 둔스 스코투스 이후에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들이 뭐를 만드냐 하면, 결정체들을 만들어 놨어요. 자동차, 자전거, 티브이, 여기 선풍기, 시계. 시계하고 선풍기가 섞입니까? 안 섞이잖아요. 그 말은 뭡니까? 인간적으로 결정체를 만들은 이상은 시계는 시계로서 완성품입니다. 완성품이기 때문에 더 이상 시계 만드는 기도할 필요 없어요.
시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오, 신이시여 더 멋진 시계를 만들어서 더 많이 팔리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는 되지만 시계를 만들어 논 뒤에는 째깍째깍 잘 돌아가잖아요. 그렇다면 그 이상은 시계에 대해서는 더 기도할 것 없고, 기도한다면 시계 잘 팔리게 해달라는 시장조사 잘해서 판촉이 늘어나는 그런 기도나 하겠지요. 하지만 이 시계가 네모가 되게 하옵소서. 시계 네모 만드는 것, 기도할 필요 없어요. 다시 제조공정 바꿔서 네모 모양 짜 가지고 만들면 되는 거예요.
이것은 결국 무슨 뜻이냐면, 결정체를 그전까지는 신께서 고유권한이라고 여겼던 그런 시절이 있었던 반면에 이제는 모든 결정체를 인간이 만들 수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옛날에 둔스 스코투스가 신만이 결정체를 갖고 있다. 신만이 코스모스를 코스모스 되게 하지, 아무리 인간이 해바라기를 가지고 코스모스를 만들어도 만든다, 못 만든다? 만들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게 둔스 스코투스의 이야기입니다. 전부 다 수긍이 가지요. 수긍이 가는데 그것이 깨진다는 거예요.
오늘날 실험실에서, 황우석의 실험실에서, 배아줄기세포에서 누렁이 나오고, 스누피 나오고 그러잖아요. 황우석 교수가 그걸 만들면 그 다음에 수천억의 돈이 따라오게 되고,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이 시대의 가치는 어디에 가치가 있습니까? 신이든 인간이든 일단은 뭘 거쳐야 됩니까? 돈의 가치를 따져서 가치가 높으면 신의 솜씨고, 가치가 낮으면 신의 솜씨가 아니잖아요. 굉장히 지금 측정기구가 뭡니까? 돈이잖아요. 돈. 실컷 만들어도 돈 한 푼 없다고 한다면 누가 만들겠습니까? 안 만들지요. 노성일 씨가 왜 자꾸 시비 거느냐 하면, 돈 때문에 시비 걸어요. 미즈메디 이사장이 빚이 없겠어요? 엄청난 사업을 벌려놨는데 돈 없으면 안 되잖아요. 전부 다 돈 때문에 그런 거예요.
따라서 오늘날 과학체제에 옛날의 신이 했던 일을 인간이 했다는 말은 아마추어적으로 이야기하면 신이 필요 없다가 되고, 좀더 깊이 따졌던 니체 쪽으로 하면 인간이 계속 신을 죽이고 또 죽이는 거예요. 계속 신을 죽여 나가지 아니하면 ‘인간은 자기가 세상의 인간이 이토록 큰 능력이 있을 줄 몰랐다. 인간 안에 이처럼 신적인 능력이 있는 줄 몰랐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런 장애를 신을 동원해서 장애를 일부러 만들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거죠.
이러한 것을 니체의 권력의지라고 합니다. 인간의 모든 의지는 그냥 의지가 아니고 권력을 추구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신의 자리는 계속 공백이 되는 거예요. 그걸 라지 엑스라고 하는데 라캉의 철학에서 어려운 철학이 나오는데 혹시 라캉할 때 이야기하고, 이번 1월 12일부터 하는 거기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싶어요. 계속해서 인간은 뭔가 공백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공백이 있을 경우에만 거기에서 그 공백을 겨냥해서 비로소 의지가 발생된다고 니체는 봤습니다.
여러분들 고기압, 저기압 있죠.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나갈 때 뭐가 붑니까? 기압 차이에 의해서 바람이 불어요. 바람이라는 것은 공기의 뭉치가 더 압력이 낮은 곳으로 평준화되려는 시도를 가지고 바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그 바람하고 ... 공기가 내려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가 비어있다면 속도가 빠르겠지요. 여기에 많이 있다면 천천히 오겠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이야기하는 이게 과학적 사고방식이에요. 어떤 파티장에 맛있는 특별음식이 있다면, 텅텅 비어 있으면, 백화점 세일할 때 싸게 파는 게 있다면 사람들이 엎어지고 자빠지고 타넘고 해서 막 달려갑니다. 속도가 빨라요. 그런데 이미 다 팔렸으면 천천히 가요. 속도를 빨라지게 하기 위해서 군에서 하는 것이 선착순. 그 선착순 말 듣고 뛰어가는 놈들이 바보지요. 어차피 5시 되면 근무가 끝나는데. 속도를 낼 필요가 없어.
베르그송은 놀라운 사고를 전환합니다. 과학적인 성과가 결정된다는 것을 오히려 미결정으로 봐요. 결정된 것은 모든 사물 안에 있다고 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정말 획기적이고 놀라운 거예요. 그러니까 과학을 억수로 미워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에 의해서 천시 받고 무시당한 또 한 패가 있었으니 바로 교회 아닙니까. 베르그송의 이러한 과학에 대한 공격, 과학에 대한 공격이 무슨 공격이라고요? 인간이 결정체를 만들어낸다는 그 오만함, 자만에 대한 공격에 비해서, 그럼 교회는 개뿔도 무시하니까 하도 철학적으로 뛰어나니까. 왜 무시 하냐니까 하여간 뛰어난 사람은 교회 안 나오니까. 교회를 다니긴 다 다니는데 교회 다 배우고, 복음 다 배우고, 성경 다 배우고, 이것 다 안다하고 그 다음부턴 교회 안 나오잖아요. 똑똑해졌으니까.
그걸 창세기 3장에 나오지요. 눈이 밝을 경우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밖에 없어요. 사람이 똑똑해지게 되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면, ‘왜 나는 인간이어야 하느냐?’하는 이유가 날아가 버려요. ‘나는 똑똑한 인간이다.’만 남고, ‘나는 왜 인간이어야 했어?’라는 그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인데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내 마음대로 해 버리자! 나만 아는 소리할 테니까 알아서 하이소.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할 때 인간은 눈이 밝아져서 된 상태에요. 원래 하나님은 인간과 상관 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서 나오는 거예요. 선악과나 생명나무 하는 것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을 인간이 따먹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이 이제 이것을 치워버린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이 아니고, 신이시여, 나는 어떤 인간이 돼야 됩니까? 새롭게 시작하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창조했다는 원래 인간 조건, 인간이 인간일 수밖에 없는 근본 조건이 그대로 날아가 버린 거예요.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인데 어쩌란 말이에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더 살아야겠다는 거예요. 왜? 나 인간이기 때문에. 어째서 인간인데? 하면, 몰라요. 내가 어째서 인간인지 몰라요.
정답은 뭐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존재기 때문에 인간이란 말이 나와야 되는데 그게 없어요. 그냥 난 인간이니까 더 살아야겠다. 신이시여, 살려내라는 거예요. 신은 뭐 하냐 인간도 안 살리고. 맨 날 하는 소리 아닙니까? 정부는 뭐하냐? 농민을 안 살리고.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네가 어떻게 농민인데, 너 깡패지. 난 무조건 농민이라는 거예요. 국가에 기여하지 않으면 농민이 안 된다는 농민의 조건 같은 것이 있다면 제가 지어냈지만 그 사람 농부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농부기 때문에 국가가 살려내라 이 말이에요. 이것 참 어려운거에요. 어느 신학자도 이걸 아는 신학자가 별로 없어요. 칼 바르트조차도 인간이니까 인간-신 이것만 생각해요.
그래서 인간이 안 되니까 그때 누구에게 오느냐? 혹시 예수님 도움 얻을까 오는 거예요. 뭐인 채? 인간인 채 예수님 십자가가 필요해서 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인간입니까? 그러면 그 예수님은 누굴 위한 인간이에요. 내가 흥분하게 돼있어요. 예수는 누굴 위한 인간입니까? 인간을 살리기 위한 예수님이에요.
지난주에 설교 마치고 식사하는데 우리교회에 연세 70이 넘으신 노 권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저보고 너무 감격스런 말을 했어요. 그분이 옛날에 성경학교 출신이에요. 요새론 전도사 출신인데 지금까지 자기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는 줄 알았다는 거예요. 오늘 설교들을 때까지. 그런데 오늘 설교 듣고 보니까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권사님, 땡 잡은 겁니다. 그걸 아는 것은.
그것 신학자도 모르는 거예요. 그것은 어디로 가는 거냐면, 창조 타락 전으로 돌아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 것은 창조 전으로 돌아갈 때에나 나올 사고방식이에요. 나를 위한 나가 아니라 하나님 위한 이 나머지. 창조하고 난 뒤부터는 항상 나를 위해서 하나님, 예수를 보내든, 누구를 보내든 나를 구원해줘! 이 말이에요. 날 천당 보내 달란 말이야! 이런 쪽이죠. 만약에 나를 위한 주님이 아니라면 그 사람에게 뭐가 없어지냐 하면, 걱정, 근심과 두려움이 다 달아나 버립니다. 인생이 어떤 일이 발생되더라도 그것은 자기하고 상관없는 일이 돼버려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용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가 염려하고 걱정할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되지요.
교회는 무식하지요. 과학한테 천대받고 구제책이 없었는데 여기에 베르그송이 나온 거예요. 베르그송은 전혀 기독교적이 아니에요. 신앙적도 아니고. 하지만 어떤 점에서 호흡이 척척 맞느냐 하면 둘 다 과학을 공격한다는 측면에서 척척 맞는데 도대체 베르그송은 무슨 자신감이 넘쳐서 과학을 공격하느냐? 이 베르그송, 이 사람이 생물학자입니다. 과학자에요. 과학을 빠삭하게 알고 공격하는 거예요. 그냥 과학도 모르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사람은 뭘 보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결정은 미결정이다. 그건 왜냐하면 사람들이 결정으로 본 것은 어떤 오해냐 하면, 공간에 있어서 공간인식 가지고 이만큼 여기까지는 배, 이것은 사과, 이것은 바나나, 바나나하고 배하고 섞이지 않고, 배하고 바나나하고 섞이지 않으니까 이것은 결정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이제 우리 과학의 힘으로 색도 만들고, 재배하고, 새로운 품종을 만들면 된다.’라고 오만을 떠는데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철학자들은 신의 뜻이 아니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진리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현실이 현실적이 아니라고 하는 그걸로 현실적인 것이 진리고, 진리가 현실이고. 따라서 이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같으면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겠지만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실을 잘못 보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공간인식하지 말고 시간인식으로 봐라. 시간인식으로 보면 이 결정됐다는 배가 썩더라 이 말이에요. 이 사과가 이것도 썩어버리더란 말이죠. 썩어서 다른 질소 화합물로, 다른 식물의 비료밖에 안되더란 말이죠. 그러면 결정된 게 뭐냐? 공간적으로 결정된 것처럼 보이지, 사실은 아니다. 시간적으로 봐라. 시간이라 하는 것은, 공간은 끊어짐이 있죠. 배하고 사과하고 끊어지지요. 결정돼서 끊어지지요. 시간은 놀랍게도 끊어진 게 없단 말이죠. 끊어진 게 없는데 이게 현실이냐? 딱딱 끊어져서 잠시 끊어져 보이는 이것이 현실이냐? ‘세상 사람들아, 이 베르그송의 말을 가지고 한번 판단해 보라!’라고 자신만만한 게 베르그송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쭉 철학자를 공부했던 철학적 인식과 완전히 다르죠.
이 베르그송은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지금까지 갖다 논 모든 것은 존재였지만 존재는 무엇 때문에 존재에 관심이 있다 했습니까? 뭘 할 수 있기 때문에?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에 관심이 있는데 베르그송은 여기서 이탈해서 존재도 아니고 변화, 생성 또는 생산에 관심이 있습니다. 생산에 관심이 있다는 말은 이것은 소유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소유될 수 없지요. 그러면 여러분 한번 물어볼게요. 소유할 수 있는 것이 행복합니까, 아예 소유할 필요 없는 게 행복합니까?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게 행복한 거예요. 그냥 묻혀 가면 되니까. 묻어 들어가면 되잖아요. 죽어? 내가 죽을게. 이러면 좋지. 안 죽을래. 이러면 봉생병원에 입원비 갖다 내야 됩니다. 아파? 죽음이 날 기다려. 그냥 죽음에 묻혀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왜? 죽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베르그송 대단하죠.
옛날에는 존재가 있고 소유를 해야 되는데 죽음은 무엇을 뺏어갑니까? 죽음은 내 소유를 뺏어가고 내 존재를 뺏어가니까, 이 소유를 뺏어가고 존재를 뺏어간다는 말은 처자식을 안 본다는 것도 있지만, 내 재산 뺏어간다는 것도 있지만 그동안 얼마나 존재가 소유를 내용으로 했으면 그냥 생명을 잃는다, 잃는다는 말이 뭔 뜻이에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잘 들으세요. 소유란 것은 뭔가 갖고 있었는데 이걸 죽음이 와서 소유 안 되는 쪽으로 했다, 그게 겁나서 끝났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목숨이 소유물입니까? 이걸 베르그송은 탄식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똑똑한 놈들이 한두 놈들도 아니고 피히테, 셸링, 칸트, 헤겔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어쨌든 간에 목숨이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누가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심지어 예수님도 네 목숨을 얻으리라. 이렇게 하지요. 목숨을 뭐로 봅니까? 목숨을 소유물로 보지요. 물론 그 당시에 사고방식이 그러니까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지요. 표현을 해서 그들을 부정하는 방법이니까. 그들이 아는 방법을 이야기해 가지고 그걸 못 알아듣게 만드는 방식이지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리라.
목숨이 소유물입니까? 소유할 수 있습니까? 이게 공간적 인식을 가지니까 죽은 시체와 안 죽은 나와 딱딱 이렇게 결정되어 분리되지요. 사실은 시간적 관념은 누구나 죽잖아요. 그러면 죽음이라는 것이 나한테 마치 겨울에 골목골목 방역할 때 흰 모기약 뿌리죠. 그러면 어릴 때 거기에 묻히려고 하지요. 저는 죽음 속에 묻혀도 괜찮잖아요. 그것은 소유할 필요도 없고 소유 안하려 해도 그냥 죽음이 와서 나를 잡아가는데 그게 언제냐 하면 그게 바로 미래 아닙니까? 그게 시간이거든요, 시간. 시간되면 묻혀서 죽는 걸, 왜 당겨서 고민하냐 이 바보야! 이 말입니다.
과학이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소유했는지 모르지만, 공간적인 결정물들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뭐하고 관계없다? 전혀 현실적인 사고방식은 아니다. 그러면 왜 과학이 현실적이지 않으면서도 소유물을 만들어내는가? 그것은 인간이 자체가 뭔가 소유해야 인간답다고 착각하는 그러한 대중들의 심리와 대중들이 받은 교육 때문에 사람들은 무작정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 더 큰 것, 더 반짝이는 것, 더 값나가는 것, 계속 발명하는 거예요.
암입니까? 죽으면 되는데. 옛날에는 암이라는 말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암이라 하는 것은 진찰해봐야 아는 건데 암을 진찰하는 기계가 없으면 암이 없어요. 암이란 단어가 언제 생겼느냐하면, ‘이것은 암입니다. 나쁜 세포가 무한 증식합니다.’라고 그걸 관찰하고 진찰하는 기계가 나오기 전까지는 암이란 것도 없었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죽을 때는 그냥 자기의 수명대로 죽은 거예요. 옛날 왕들 조사해 보세요. 전부 다 암 걸려 죽었지. 그런데 역사실록에 세종대왕은 당뇨병 걸려 죽었다. 이런 소리 안 나오거든요. 그냥 천수를 다했다 하잖아요. 천수를 다했다는 표현을 쓴들, 당뇨병 걸렸다 쓴들 그게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이냐고 묻는 겁니다. 어느 것이 더 과학적입니까? 당뇨병에 걸려 죽는 게 과학적이죠. 그런데 베르그송에 의하면 어느 것이 더 현실적입니까? 천수를 다한 게 현실적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왜 자꾸 현실 속에 묻히면서도 왜 현실을 이기지도 못한 주제에 왜 자꾸 현실도 아닌 비현실적으로 자기 존재의 극대화로 나가느냐 이 바보들, 나쁜 놈들아! 하고 공격하는 것이 베르그송의 철학입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가만있었겠습니까? 황우석 정도가 아닙니다. 밟아 죽여 버렸어요. 이 인간을 완전히 조져 버렸어요. 완전히 미친놈이라고 욕했고, 대세하고 다른 소리했다고 그렇게 욕을 많이 얻어먹었어요.
이 베르그송이 히트를 치는 것은, 그 시대는 안 알아주고 나중에 화이트헤드가 같은 주장을 하고 사무엘 알렉산더가 나오고, 오늘날 들뢰즈가 나오고 했을 때 그때 ‘아하, 베르그송이 이런 뛰어난 일을 앞당겨서 이야기했구나.’라고 후대에서 그렇게 가치를 인정해 주었어요. 그 당시에는 철학자들도 과학자 편을 안 들면 돈이 안 생기고 철학교수도 못할 주제였어요.
철학교수든 어느 교수든 대학교수가 그냥 자식들 편안하게 유학 보내고 밥 먹고 살려면 그 시대를 뛰어넘는 소리를 해서는 안돼요. 그러면 다른 교수들이 밟아버립니다. 그때는 가만히 교수하고 하려면 골프나 치고 놀려 다니려면 이런이런 사상이 있더라만 까지만 이야기해야지, 그럼 교수님 본인 사상은 뭡니까? 떽 그런 소리하면 안돼. 난 내 생각 없어. 이렇게 해야 돼요. 총신교수를 하든, 사립교수를 하든, 뭘 해도 이게 내 사상이야 하면 큰일 나는 거예요. 그건 사는 요령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베르그송은 그게 현실이냐? 이 말이죠. 그게 네 욕심이지 현실이냐 이 말이죠. 우리말로 하면 ‘그게 주의 뜻이냐?’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적어도 철학을 했으면 철학적 잣대를 가지고 현실을 잘 봐야. 현실은 뭐냐? 차이죠. 베르그송의 철학은 바로 차이에서 반드시 생성이 생긴다. 이 차이는 시간이 만들어내요. 시간이 만들어내기 때문에 시간이 무엇이냐고 묻지를 말란 말이죠. 뭐든지 만들어내는 자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것은 곤란해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들 때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런 소리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냐고 묻는 것은, 그렇게 물음 자체를 위해서 지옥 보낸다고 한 사람들이 어거스틴, 칼 바르트도 그런 이야기했고.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어린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거기에 물론 철학적으로 뭐냐 하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는 그 자체가 결국 주체, 객체의 분위기 속에서 나온 거지요. 인간의 주체가 있으면 자기 빼고 전부 다 객체가 되는 거지요. 객체 속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의 신이겠죠. 이것을 설명해야 되는데.
스피노자 같은 경우에 신은 세상의 원인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스피노자 이전까지는 세상의 토마스 아퀴나스, 안셀무스 같은 경우는 최초의 원인자는 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신이 있어서 신이 세상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봅니다. 이게 성경적으로 올바른 해석이라고 봤거든요.
그런데 스피노자나 베르그송은 신은 원인자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만약에 신이 원인자가 된다면 사물 속에 신이 있어야 되고 그러면 현실은 변화되는 게 현실인데 변한다면 이건 결국 뭣이 변하냐 하면, 사물 속의 신이 어제 신 다르고, 오늘 신 다르고 맨 날 달라져야 될 입장에 있단 말이죠. 그러면 영원한 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물 속에 있는 신을 빼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골치 아픈 논리죠. 그러면 진작 빼낸 자가 누구냐 하면 과학하는 사람입니다. 루터(? 혹 뉴턴) 같은 경우에는 사물이 움직이는 것은 만유인력이지 신이 아니죠. 루터 같은 경우에, 과학자 같은 경우에 신을 인정해도 신은 하청 준 회장님이죠.
현재 피파 회장이 누굽니까?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박지성이 아시아 최고 선수로서 상을 못 받았는데 시상식 참석 안했다고 상 못주는 게 그것이 최고상이냐? 그럼 최고상을 이렇게 해야지. 축구 잘하는 최고상이 아니고 시상식 꼬박꼬박 참여를 최고로 잘하는 사람에게 주는 최고상이지 그게 무슨 최고상이냐? 라고 피파 회장이 비아냥거렸지요. 피파 회장이 비아냥거릴 수는 있어도 아시아축구연맹에서 주는 최고상에 대해서 관여를 못합니다.
지금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경우에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을 이렇게 봅니다. 만약에 피파 회장이 관여해버리면 아시아축구연맹은 자유의지가 날아가 버려요. 회장님, 최고상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법을 만들 자격은 일체 없고, 법을 만드는 자격은 최고자, 피파 회장한테 있는 것을 ( )돼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자유의지라는 것은 있다, 없다는 그냥 말로 해서는 안 되고, 이게 어떤 자체적인 법을 제정할 때 자유의지가 있어요. 법이 나와요. 그러니까 나는 목사님이 뭐라 해도 담배 피웁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목사님이 뭐라 해도 나는 담배 꼭 피울 겁니다.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법을 만든 거예요. 법을 만들 때는 반드시 법에 대해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투로 법을 만들어요. ‘에이, 목사 너만 힘이 있나. 나도 담배 피울 힘이 있단 말이야. 나도 자체적인 힘이 있는데 그 힘은 목사 당신한테 부여받는 것이 아니고 내 자체적으로 나온 힘이 따로 있습니다.’라는 것으로 법을 만들어요.
어제 오후 설교에 그런 소리했는데 어떤 예를 들었냐 하면, 돈 못 버는 남편이 옛날에는 돈 못 벌어도 가부장적 선비기질이라 해서 여자는 돈을 벌어도 ‘이게 다 남편의 은덕입니다.’하고 갖다 바치고 남편은 돈 안 벌어도 큰소리치는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보통 가정의 가훈은 아빠가 정하지 엄마가 안 정하거든요. 아버지의 권위에 의해서. 지금은 뭐냐 하면, 가정의 결정권을 내리고 뭘 해도 아버지가 돈을 못 버는 아버지 같으면 결정을 내려도 아무 힘이 없으면 그 법이 휴지조각이 돼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이 그랬다잖아요.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회의를 해서 결정이 난 뒤에 다음날 가면 자기 마누라한테 다 고쳐가지고 정반대로 결정 난다고. 안에서 다 조종해버려서. 전두환 씨 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비서진들이 다 회의하고 난 뒤에 이순자하고 하루 밤 자고나오면 다 바꿔가지고 나오고. 깨 볶고 나면 안돼. 이렇게 하면 끝나버려요. 비서진들 소용없다는 거예요. 이순자가 다 이야기하면 끝납니다.
법이라 하는 것은 그 법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만 법이 되는 거지요. 자유의지도 있고 예정도 만들려고 하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소위 하청 주는 식으로 줬다고 보는 겁니다. 밑에 예하에 자율권을 주어서 최종적으로 거기서 책임을 묻고 심판하는 그걸로 됐다 하는 겁니다.
과학은 뉴턴 같은 경우는 만들기는 신이 만들었지만 신은 전 세계는 시계처럼 스스로 돌아가도록 어떤 법칙을 만들어줬다. 그 법칙이 뭐냐 하면, 시계가 돌아가는 법칙, 만유인력이라는 거예요. 과학이 거기에만 멈추었으면 하나님을 인정하네, 하겠는데 거기에 멈출 과학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인간의 피가 어떻게 도는가? 그런 것이 발견되고 거기다가 인간도 스스로 힘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발견하고 난 뒤에 하비의 혈액순환설 등장하게 되면 이제는 신은 아까 이야기한 니체의 말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것에만 관여하고 이 세상의 모든 관여 안 되고.
그러면 과학은 뭐냐? 과학의 모든 사회원인은 외부에서 오죠. 외부라는 것은 자연세계, 외부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길게 했는데 쉽게 합시다. 짧게 해봅시다.
베르그송과 과학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과학은 그 원인이 외부에서 온다는 거예요. 여기 선풍기가 있는데 선풍기 조립할 수 있어요. 그러면 선풍기란 결정체는 조립된 또 다른 결정체가 있지요. 조립품도 결정체 아닙니까? 이 결정체가 그냥 분산될 때는 바람이 안 나와요. 모아서 전기코드 꼽으니까 바람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그 원인은 외부에서 와요.
그런데 베르그송은 뭐라 합니까? 이 선풍기가 진화하나? 선풍기가 뭐 진화합니까? 가만있는데. 어제 가도 그 선풍기고, 오늘 가도 그 선풍기고. 부서지긴 부서져도 진화하진 않잖아요. 선풍기 살아있어서 춤을 춘다든지 나, 선풍기입니다. 사람 됐다. 이런 거 없잖아요. 그런데 현실은 뭡니까? 허버트 스펜서에 의하면 현실은 미생물에서 원생동물로, 원생동물에서 쭉 되어서 이것이 그 당시의 진화론이라니까요.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은 원숭이에서 인간되었잖아요. 그렇다면 그게 현실이고 이것은 하나의 인간은 인공물이잖아요. 그럼 뭐가 현실입니까? 진화라는 것은 외부요인이 아니고 내부요인에 원인이 됐잖아요. 그 원인 내부에 있으니까 이미 결정적인 것은 내부에 있다는 베르그송의 말이 거기서 나온 겁니다. 모든 결정적인 것은 내부에 있다.
베르그송은 잠재력이 발현하는 그것이 바로 진화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과학은 외부에서 온다고 했는데 과학이 외부에서 오니까 과학을 부수라는 말이 아닙니다. 철학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오해하면 안돼요. 과학의 사고방식이 잘못됐으니까 부셔버려라 하는 말이 아니고 너의 한계를 인정하라 그런 뜻으로 이야기해요. 과학했다고 인간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는 거고. 지금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원인은 그 내부에 있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베르그송의 말은 무엇과 달라요? 옛날의 스콜라철학과 다르지요. 신이 했다는 말이 아니지요. 베르그송이 신을 인정하든 인정 안하든 상관없이 신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신은 이 모든 사물의 원인자라고 했어요, 원인자 아니라고 했습니까? 원인자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원인자가 내부에 들어있으면 내부가 진화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보기에 베르그송의 문제점이 하나밖에 없죠. 뭐냐 하면, 진화한다는 것을 최초로 이걸 현실로 보고 진화하는 입장에서 전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르그송은 내부적으로 진화하는데 그 다음의 문제가 뭐냐 하면, 내부적으로 어떻게 진화하느냐? 잠재력이 어떻게 진화를 이끌어 내느냐? 거기에 대해서 바로 차이성을 두고 있습니다. 차이성이 뭐냐 하면, 힘의 차이에요. 왜 힘의 차이가 나느냐? 힘은 한 가지 힘이, 콩나물 같으면 콩나물 한 가지 힘, 개 같으면 개 한 가지 힘, 다 각자각자 한 가지 힘밖에 없는데?
그게 아니고 힘은 과거에 경험했던 힘들이 여기에 하나의 역량으로 여러 가지 용어들이 있는데, 역량이라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야, 너, 저 역기 들어봐. 너한테는 그만한 역량이 있어. 이럴 때 역량이라 하지요. 이러한 역량이 한두 개 역량이 아니고 여러 가지 역량이 쏟아져 왔기 때문에 그 쏟아진 역량 사이에 미세한 힘의 차이가 있으니까 그 차이가 새로움을 만든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는 헤겔할 때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지요. 헤겔의 정반합에서 현재 정이 있는데 반이 있고 그게 합해서 그 다음에 새로움으로 도약한다. 제가 어렵게 해서 미안한데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촌에서 저희 반에서 일등한다고 까부는 거예요. 그런데 게가 강남으로 이사를 갔는데 저희 반에서 20등 한 얘와 붙은 거예요. 근데 얘가 21등 됐어요. 그런데 얘가 열심히 해서 15등 됐어요. 진화했어요. 도대체 왜 21등에서 15등 했습니까? 뭣 때문에, 어떤 차이? 새로운 힘의 차이를 느끼고 그 차이에서 잠재돼 있던 역량이 발휘되어서 15등 됐지요.
이것을 역량이라 했는데 좋게 말하면 능력이고 사실은 라캉에 의하면 욕심은 아닌데 이게 인간의 욕망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니체의 말, 니체와 베르그송이 너무나 유사한 이야기에요. 사실은 니체와 베르그송이 같은 시대 사람입니다. 베르그송이 약간 뒤인가 그럴 거예요. 니체의 연대표가 나와 있으니까 보면 알 거예요.
그 시대가 어떤 시대에요? 이제는 노골적으로 신을 죽였다고 말할 필요도 없이 자연적으로 신은 여기 들어갈 틈이 없지요. 오늘 우리가 이걸 공부해야 될 가치가 뭐냐 하면, 오늘날 교회 바깥이 아니고 교회 안이 이거에요. 이왕이면 공부 잘하는 얘들이 많이 있는 교회에다 애를 보내요. 그걸 뭐하기 위해서 진화하기 위해서. 왜 진화하는데? 베르그송에 의하면 진화는 인간의 기본적인 신이 내려주신 우리 인간의 잠재된 역량인데, 그걸 왜 부정하냔 말이에요.
헤겔과 베르그송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헤겔은 정반합이잖아요. 정이라 하는 것은 반대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여러 개가 돼요. 단수가 다수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서 새롭게 다수와 같이 휩쓸리는 통합을 이루게 된다 이 말입니다.
촌에서 올라와서 취직할 데가 없어서 나이트클럽의 콜보이로, 웨이터로 취직했을 때 굉장히 순수했던 애들이 6개월 안 지나서 거짓말 늘고, 삐끼하는 방법 알고, 손님들 지갑 팁 되는 방법에다가 간사한 그 모든 것을 알았을 때 우린 그걸 좋게 얘기해서 사회에 적응한다고 하지만 이건 뭐냐 하면, 하나의 인간이 누구 친구 하나 잘못 만난 것이 아니고 여러 친구를 잘못 만났지요. 다수를 만나서 그들과 같이 어울렸지요. 어울리는 것을 통합이라고 합니다. 이게 인간이라고 본 거지요. 이걸 현실이라고 본 겁니다. 이걸 나무라면 안 됩니다. 이게 현실이기 때문에.
그냥 실험실에서 연구만 하시던 황우석 박사님, 노성일이라는 깡패 같은 놈 만나서 앞으로 어떻게 변신할지 몰라요. 어떤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성경만 보시던 목사님이 돈까스 집 열고 난 뒤에 옆에 돈까스 집 또 생기니까 거기서 어떻게 붙을 지 또 만나봐야 알겠지요. 이것은 아무도 몰라요. 교회에서 청년회만 열심히 하다가 사회 나가 취직해서 관심사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데 어울려야, 안 어울리면 돈이 안 나오니까 어울려야 왕따 안 시키니까 어울려야 거기서 같이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걸 베르그송은 진화라고 보고 이걸 우리가 좋게 보면 네가 사회를 아는구나. 인간됐구나. 네가 철들었구나. 이렇게 보는 거지요.
교인들이 목사들 보고 하는 말이, 목사들은 철이 없어. 그 말이 융화할 줄 모른다는 말이죠. 물론 목사들도 공부해서 철이 들어야 되는데 제일 나쁜 것은 목사가 교주되는 거예요. 이건 철도 안 들고 공부도 안하고 문제가 있어요. 목사가 공부한다는 것은 자기 겸손을 의미하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거예요. 그렇게 한다고 돈 벌라는 것이 아니고 계속 공부해서 자기 속의 죄를 깨닫기 위해서 공부하고 그래야 되는데 진짜 철 안든 목사들은 공부도 안하고 옛날 똥고집만 주장하고 말이죠. 싫으면 네가 가라, 그러고. 갑자기 내가 화를 내는 이유가 뭔죠. 자기가 비결정적인 존재인데 결정된 존재인 줄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올해 마지막 공부를 하면서 상당히 어려운 논리들을 많이 풀어나 봤습니다. 좀더 나가봅시다.
내부적 차이가 동력을 만든다 이거죠. 이거 베르그송 당신의 이론이구나, 그러면 베르그송이 화나죠. 내 이론이 아니고 이것이 아니고 이게 현실이라니까. 너 성공하고 싶지 않아? 성공하고 싶어요. 봐, 진화하잖아. 그러면 내가 이거 모른다면 진화하는 동기를 얘기해 봐라. 너는 모르면서 내 말을 안 듣나? 네 나름대로 이론도 없으면서. 이게 내부적 차이가 동력을 만들어요. 결국은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은 누구든 간에 열려 있다는 거예요. 마음을 열자 할 것도 없어요. 항상 가만있어도 열려 있어요.
제가 이것 하나 하고 오늘 강의 마치겠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토요일 날 질문을 했어요. 배 집사라는 분인데 질문을 참 잘 했어요. ‘어떤 사람이 즉각적인 구원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데 보니까 점진적 구원이라고 하는데 이 점진적 구원이 뭡니까?’라고 묻기에 점진적 구원이 즉각적 구원입니다. 이렇게 했어요. 성경에서는 모든 구원이 즉각적 구원이에요. 시간이 걸린다 뿐이지 즉각적 구원이에요. 왜냐하면 성령 안에는 시간 안에는 즉각적 구원이에요. 그런데 차영배 교수는 그걸 오해해서 단회성으로 안되고 반복성을 주장해야 이게 보편적이라고 했는데 이게 뭐냐? 인간적으로 자기 구원을 자기가 측정하려고 하니까 즉각적 구원. 그러니까 박옥수 이단이 여기서 튀어나오죠.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고린도후서 2장에 보면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고, 앞으로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지요. 사도바울이 이미 우린 구원받았고, 또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전부다 무슨 소리를 해도 즉각적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는 즉각적 구원밖에 없기 때문에 즉각적 구원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면 즉각적 구원을 이것을 시간을 얼마로 정할까요? 2초, 3초로 정할 까요? 그럼 3초 이후에는 다 점진적이라고 할까요? 말이 안 되잖아요. 이게 3초일 경우도 즉각적이고, 35년 걸려도 즉각적이에요.
문제는 잘못된 것은 이게 점진적 구원이고 즉각적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점차점차 진화한다는 이러한 베르그송 사고방식이 문제에요. 즉각적 구원에서는 진화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 처음이나 끝이나 늘 첫 사랑을 잊지 마라 하니까. 네가 첫 사랑을 놓쳤구나. 초심을 놓쳤구나. 그걸 묻기 때문에 주님이 묻는 기준이 뭐다는 기준을 생각한다면 점차점차 진화한다는 게 의미가 없어요. 마지막에도 처음에도 너 예수 믿나? 이렇게 나온다면 처음에도 예수 믿나? 끝에도 예수 믿나? 주님을 사랑하나? 이렇게 묻는다면 점차점차 증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지.
베드로후서 나오는 그 이야기는 사건, 즉각적 구원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주어집니다. 사건들이 주어지면 그 사건들을 대체하는 반응들이 나오는 게 뭐냐? 바로 인내를 더하고, 사랑을 더하고, 형제우애를 더하고 나오잖아요. 그게 새로운 사건들이 부딪치게 되면 주님께서 구원의 다양성을 우리를 통해서 발현해 내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의 일부와 연결되지요. 베르그송은 이미 신을 버렸지만 신적인 요소가 우리 속에 있어요. 베르그송은 이걸 진화한다고 했거든요. 여러 가지 다양한 차이점이 들어와서. 진화하는 것이 아니고 이게 사건 사건마다 내가 모르는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또 다른 모습으로 외부로 증거 되도록 그렇게 조치하는데 그 증거가 뭐냐?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바로 베드로를 사용하는 방법하고, 사도 요한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 달라요. 똑같은 주님이지만 제자들은 다 다른데 그런데 이거 하나 적어 놓으세요. [하는 일을 달라도 가는 길은 같아요.] 하는 일을 다 달라요. 가는 길은 같으면 여러분은 형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지난 한 해 동안 여러 가지 복음과 철학을 연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모르는 이야기를 불신자들이 복음을 거부한 자들이 이야기해 준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 여기고 그걸 우리 내부에 담아서 왜 십자가 피로만 피의 능력으로만 이 쓰레기 같은 우리가 구원되었는지를 오직 주님의 공로만을 훼방하지 않고 가리지 않고 증거 할 수 있는 그런 또 남아있는 우리들 생애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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