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계 1: 1- 3 (예수님의 계시)
Re..계 1: 1- 3 (예수님의 계시)
이름 : 이근호(IP:)
예수님의 계시
2006년 2월 19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1-3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계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흔히 계시라고 한다면 그냥 ‘하나님의 계시’로 알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은 신이 만드셨기에 이 만들어진 이 세상 자체가 신의 계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계시를 납득하고 수용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해주리라 안일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은 모든 종교의 공통점입니다. 이런 신으로 세상 사람들과 대화하면 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계시입니다. 즉 예수님이 개입하십니다. 예수님이 개입은 이유없이 공연히 개입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에 의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실 때, 신이 인간의 행실에 대해서 시비걸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놓고서 심판하시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연약하신 예수님을 우리 각자 앞에 세우십니다. 예수님을 먼저 인간 처분에 맡기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인간 세계는 예수님에 대해서 의견이 두 조각으로 양분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인간의 행함을 부정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위와 나의 행위와 비교해볼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에게 구원될 자격이 안되는 전적 죄인인 것을 알았다. 따라서 이제부터 나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과 공로만 능력만 의지하고자 한다”라고 나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직접 상대하셔서 구원을 하시지 않는 이유는, 처음부터 인간들은 구원되어야 될 대상자로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인간은 하나님보고 ‘나를 구원해주세요’라고 요청한 자격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 여부를 가지고 새삼스럽게 심판하시지 않는 겁니다. 차라리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그 아들에 대한 태도 여부를 가지고 그 인간을 영원히 구원하시기도 하고 저주하시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벌써 작정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심 자체가 진정한 기적입니다. 사람들이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는 예언은 모두 예수님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이 예수님에게 쏠린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중심으로 그동안 진행해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만물이 전부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을 위하여 하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등장시킨 이유는, 예수님이 행함과 인간의 행함을 비교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그 영광을 성취해 낼 수 없습니다. 인간의 거룩과 의로움은 하나님께서 죄악된 것으로 거부하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의인은 없고 죄인들만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님 앞에서 더 이상 자기 행함이 무의미하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만 축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옛 언약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적인 아이디어에 의해서 아브라함이 도입된 것은 아닙니다. 아브람은 그냥 아브람일 뿐이지 결코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에 준해서 나타난 인물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품고 있는 약속은 사람들이 무시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습니다.
이 점에 있어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얼마나 성실하고 착실하냐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앞에 등장하신 예수님을 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이 순교한 것도 하나님의 존재를 따졌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참된 예수님 소식을 싫어하는 이유는, 인간 행함의 가치를 깡그리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졸지에 자신이 뭘해도 죄인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인간들의 기본적 자존심과 자기 의식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행함이 아니라 믿는 자이기를 원하십니다.
즉 자신이 하지 않더라도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하는 겁니다. 그만큼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일체 인정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자신의 존재가 곧 우주 운명의 중심이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식으로도 인간은 예수님과 엮기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보느냐?”라고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만 우선적으로 관심이 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은 자기가 생각할 사항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오로지 자신과 하나님만 생각하면 신앙생활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말하기를,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 라고 하더라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으시고 곧바로 우리 각자 개인의 문제로 돌리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과 우리가 어떤 식으로도 맺어져있는데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어떤 식으로 삐져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라는 겁니다.
그 때 베드로는 자기 개인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이미 수립되어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겁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것을 알게 하신 이는 너나 너의 혈육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주님을 믿게 했다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 중심의 계시가 그저 우리 눈 앞에 신기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 내부가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말씀과 예언을 의심치 않고 다 받아들이게 하는 일까지 주님의 능력으로 작용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앞으로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을 대하게 될텐데 거기에 보면, 항상 마주와서 부딪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들’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행하심의 능력보다 자신의 행함의 능력을 더 신뢰하고 믿고자 하는 자존심이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고요히 주님을 섬기기 보다는 요란스럽게 자신을 섬기는 것에 인생의 의미를 두는 일, 바로 이런 것으로 통해서 인간은 왜 스스로 원될 수 없는 존재인가를 분명히 해둡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 나 할것없이 오기로 똘똘 뭉쳤지만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에는 무관심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