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34:19-20 (장자의 대속)
장자의 대속
2006년 2월 12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34:19-20
34:19 무릇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며
34: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찌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보다 “내 놔라”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시면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인간들의 더러운 본성으로 인하여 인간들도 기분 나쁘게 마련입니다. 꼭 하나님이 강제로 빼앗는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못된 양아치들도 힘없는 서민들을 찾아다니면서 돈 뜯고 괴롭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무조건 내놓아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부담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보다 첫 것을 내놓아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나머지 모든 것을 죄 용서해 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마치 열차가 기관차과 그 뒤에 딸려가는 객차로 구성되어서 기관차에서 이끄는 대로 달리게 되어 있는 원리와 같습니다. 아무리 객차가 화려해도 앞에 있는 기관차가 고장나면 철로 위에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첫 것’을 통해서 나머지 모든 것에 죄용서의 혜택을 베풀어주시려는 겁니다. 즉 그냥 빼앗기 위해서 내 놔라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시려고 내놓아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첫 것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기에 첫 것으로 인해 다른 것들이 거룩함을 입는 겁니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으로 되돌아 가야합니다.
출애굽기 13: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에서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애굽에서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가정의 맏이들은 단순히 애굽이라는 인간적인 세력권에서 벗어난 자들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로부터도 살아난 자들이라는 증거를 지니게 됩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도 살아남을 수 있는 종족과 그렇지 못하는 종족으로 인류는 구분됩니다.
그런데 이들 장자들이 살아남은 것은 장자로 출생 되었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발린 ‘어린 양’의 피 덕분에 살아난 것입니다. 어린 양의 희생으로 인하여 이들은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은 마치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대우를 받고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신의 아들의 나라라고 여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쪽에서 계획하시고 실시하는 ‘희생’이 안에 상주해있어야 합니다. 이 희생이 빠지면 이스라엘은 일반적인 이방나라와 다를 바 없고 그렇게 하나님의 저주 앞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정기적으로 유월절을 지켰고 숱하게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의 행위라는 것이 참 묘해서 뭐든지 반복하게 되는 기술적으로 숙달이 되어 버립니다. 숙달이 되면 참 능숙하게 형식적으로 잘 처리하는 것 같지만 이로 인하여 자신의 재능으로 변하고 맙니다. 즉 사람의 행위란 능숙하고 숙련된 기계적 습관에 의해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뭐든지 잘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위험스럽고 통하지 않는 재주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자동적으로 커버해 줄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허용되지 않습니다. 자기 부인이 되지 못한 인간의 행위는 어린 양의 피보다는 자신의 숙달된 종교 재주가 돋보이게 마련이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기 마련입니다.
정기적으로 제사한다고 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받는 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땅에서 얻은 소산물을 정기적으로 십일조로 하나님께 상납한다고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쁘게 받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 즉 어린 양의 희생 앞에서 더욱더 자신의 죄를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정신은 이스라엘 자체를 단결하는 정치적 정략으로 써먹은 것아닙니다. 같은 종교, 같은 의식, 같은 형식으로 되풀이하는 것에서 민족적 일체감을 갖고 긴밀한 단결을 추구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과연 희생정신이 반영되어 있는 신앙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실상 보조연기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 하셔야만 하는 일의 모형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아들 되시는 분의 영을 받은 양자들입니다.
히브리서 2:10-12절을 보면 “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기 형제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서서 죄용서해 주시는 열차의 기관차 역할을 하시겠다고 나서신 겁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지칭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들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형제라고 불러주시는 양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용서받을 수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혜택을 입은 자들입니다. 로마서 8: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양자라면 결코 예수님의 완벽한 공로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용서를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공로를 오직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돌리게 됩니다. 자신의 반복적인 종교 행위를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지사충성하며 키워내듯이 자신의 형제들을 자신의 희생의 능력으로 키우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조각품입니다.
오늘날 자신의 존재를 놓고서 자신에게 찬미와 찬탄을 돌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일정하신 그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덩달아 용서받았음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실상 우리는 하나님께 몽땅 다 빼앗겨도 할 말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예수님의 피가 묻혀서 거룩한 아들로 인정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