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함평수련회 강의 녹취(13-1)
[일반] 함평수련회 강의 녹취(13-1)
이름 : 이근호(IP:)
열세 번째 강의, 마지막 시간하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전후서를 통해서 베드로가 하고 싶었던 것은 고난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교회가 고난에 대해서 뭔가 두려워하고 이것은 정상적인 사태가 아니야. 라고 느낀다면 그렇게 느끼는 너희들이 뭔가 정확하게 주님의 복음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했는가가 의심스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교회의 집부터 시작되는데 하나의 예를 들면 현재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베드로후서 2장에 보면 방탕 하는 자, 호색하는 자들이 있다. 라고 했을 때 우리가 지난번에 했던 공식을 한번 집어넣어 봅시다. 정말 성도라면 뭣과 뭣 사이의 갈등이라고 했습니까? 선과 악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이 자아와 그리고 그것과 상관없이 주님의 속죄 받은 용서받은 그런 자아 사이의 갈등이라고 했지요. 방탕하지 마라는 말이 딱 나왔을 때 왜 하나님 말씀은 방탕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자꾸 방탕 하느냐? 라고 고민한다면 이분은 결국 뭡니까? 전혀 지금 복음을 이해 못한 사람이다 이 말이죠. 여기 방탕하지 말고 이런 자는 호색하지 마라 했는데 왜 자꾸 나는 방탕하고 호색하느냐? 정말 나는 도대체 어떻게 나를 구원해내지. 라고 이렇게 한다면 이것은 이 사실을 모르는 그냥 일반사람들, 선과 악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에 해당된다 이 말이죠.
소위 교회 내에서 이런 점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전서에서 누누이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아주 신기한 능력이 오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죄 씻음을 받았다고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이해 안 되는 이야기를 내가 벌이고 있다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만약에 베드로전서에 의하면 어떤 복음을 갖는다든지 어떤 신학체계를 갖는다 할지라도 이것마저 마지막 때에 다같이 지워버릴 수밖에 없는 당위성, 정당성을 이유를 알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기 안정성에서 비롯된 새로운 여기서 자기 신학을 구축하게 될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구축이 진짜 하나님이 제시하는 몽땅 멸망하는 결국에 가면 이것이 충돌을 일으키는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제가 하나의 예를 들면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재림하신다 해놓고 멸망하신다고 해놓고 왜 아직 멸망 안합니까? 이것 완전히 사기 아닙니까? 라는 의심이 든다는 자체가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엉뚱한 사고방식에서 안정성을 확보했기 때문에 주님이 재림하시고 멸망한다는 것에서 약간의 의심을 품을 수도 있고 에라이, 이것 교회 사기 아니야, 벌써 온다 하고 몇 천년 지나갔어? 라고 그 어떤 반발이 나올 수 있는 그 근거를 찾아가는 겁니다. 이 안정성, 이 안정성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저는 베드로후서 3장을 들어가면서 여러분들이 주의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이 원칙을 항상 제시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선과 악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자꾸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나는 왜 못사느냐? 라는 쪽이라면 성도는 그것조차 날아가 버려야 돼요. 아, 주께서 그냥 주시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내가 선과 악을 싸우든 안 싸우든 상관없이 그냥 주시는 걸로 구원되는구나. 라는 것이 확실하게 있어야 돼요.
3장에 보면 물로써 멸망했다는 이야기를 해요. 이점에 대해서 우리가 한 번 더 해봐야 돼요. 왜 하나님께서는 물로써 그들을 멸망시켰느냐? 시편 119편을 찾아봅시다. 84절인지, 54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나는데. 89절, 시편 119편 89절에 보면, 구약성경892페이지 보시면 제가 읽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말씀으로 창조했고 말씀으로 창조해 놓고 말씀이 거기서 손떼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그 속에 말씀의 원칙이 말씀이 다 충만하게 담긴다 말이에요. 욕조에 물 채우듯이 욕조만 만든 것이 아니고 거기다 물까지 채워 넣는 욕조를 만들듯이 이 세상은 말씀을 담는 욕조로서의 노릇을 하라고 이 세상을 만드는 겁니다. 말씀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 그래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성경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에 응하게 하는 그런 조건을 유지하라고 다한 겁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베드로후서를 생각해 보세요. 왜 물로써 심판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말씀에 의해서 성경에 노아에 의하면 물로써 심판받는다고 이미 사전에 말로서 했습니다. 했어요. 그게 베드로후서에 나옵니다. 세상은 뭐로 만들어졌습니까? 5절에 누가 한번 읽어볼 랍니까?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때 알지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그렇게 만들었겠지요. 그게 아니라 말씀으로 만들었을 때까지만 말씀이 아니라 만들지는 그 안에 말씀이 철철 넘치도록 계속 작용한다는 것을 왜 너희들은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물로써 심판하신 것은 말씀에 의해서 그렇게 물로써 심판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물이냐? 그것은 바로 유다서에 보면 나오는데요. 유다서에 보면 노아가 물로써 심판한다 할 때에 유다나 에녹이나 그것은 단지 물로써 심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에 모든 우주가 다 없어진다는 것을 예고편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앞당겨서 물로써 심판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역사를 볼 때에 압축시켜서 한꺼번에 본 것이지요. 한꺼번에 본 것이라면 우리는 시간이 제한이 있어서 짧은 것, 예를 들어서 짧은 80년, 90년, 짧은 80, 90, 100년, 짧은 1000년 밖에 모르지만 그 말씀에 보면 이게 시간을 영원까지 다 압축시켜서 한꺼번에 다 이야기해주니까 80년, 90년만 사는 인간들이 그것을 짧은 것만 파악하고 나머지는 손을 떼고 모르는 상태에 있죠. 모르는 상태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아니야, 아니야, 불로써 심판 없어. 안돼. 그렇게 심판하지 않아. 자꾸 이렇게들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중심의 안정성을 그렇게 자기중심으로 반경을 넓혔기 때문에 넓혀 봤자 지. 넓혀 봤자 몇 미터, 몇 년밖에 안돼요.
그런데 베드로후서는 뭐냐 하면은 물 심판을 통해서 너의 반경을 너의 안정성 중심으로 잡지 말고 아예 말씀 속에 들어와 버리란 말이에요. 말씀 속에 들어와 버리면 특징이 뭐냐 하면 거기는 영원이 있어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요. 말씀 속에 들어와 버리면. 옛날의 이런 이야기는 반드시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말이지요. 모든 것이.
말씀에 자기 자리를 잡아야지 말씀의 안정성에다 자기 자리를 잡아야 될 텐데 자기가 살아온 경험이나 경륜이나 여기에다 그걸 자리 잡고 따로 해석하려고 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은 안 오지, 안 올 거야, 안 올 거야. 2000년 지났는데 이건 완전히 보통 사기가 아니지. 다 가짜야, 원천기술 없어. 다 가짜야. 라고 자기중심적으로 그렇게 곡해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경건이 떨어지면서 경건이 떨어진다는 말은 이제 믿을 것 없다는 이 말이거든요. 아무도 안 믿는다, 주도 안 믿고, 나도 인내할 만큼 인내했는데 더 이상 못 참겠다. 그럼 경건은 떨어지고 자기 나름대로 따로 안정성을 확보하다 보니까 결국 그것이 바로 지구상에 터 잡고 사는 거예요. 대대로 자신하고 세상은 영원부터 자연은 영원토록 함께 있었다. 하는 그런 조로 자기의 논리가 정립되기 시작합니다.
제가 하는 이것이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많은 종교인들, 많은 성직자들, 목사들이 연세가 많아지고 에세이 같은 것을 쓰는 것이 나와요. 에세이 쓴 것을 보면 젊은 때는 오직 복음으로 외치던 목사들이 나중에 80 되고, 90 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완전히 도사 되었어요. 도사. 완전히 도사되어 가지고 복음도 없고, 전적타락도 없고, 그냥 불교하고 놀고 천주교하고 놀고 아이, 그거 뭐, 지나가 보니까 하나의 오기였고, 착각이었어. 인생을 오래 살아보니까 그것도 아무 구분도 의미 없는 거야. 라는 식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뭐냐 하면은 말씀에 자기 안정성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 자리를 자기 안정성으로 자기 주체로 안정성을 찾기 때문에 말씀이 지체된다고, 자꾸 지연된다고 그렇게 여기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과 여기서 하나의 생각이, 목사님, 말씀의 안정성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나 중심의 경험 중심의 안정성이 아니고 말씀 속에 영원히 내 자리를 잡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바로 그 점을 위해서 베드로전서부터 꾸준하게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와 부활은 바로 말씀의 완성을 미리 맛보기로 다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일어나 두 번 다시 십자가 사건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튀어나온 뭐라 했습니까? 혹이라 했지요. 혹. 부분이라 했지요. 여기 십자가 본체 덩어리가 있다면 본체 덩어리에서 튀어나온 혹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부활을 뚝 뗄 수가 없어요. 떼버리면 부활이 아니에요. 이 부활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나온 혹이기 때문에 부활을 가져가면 뒤따라 뭐가 반드시 따라오게 됩니까? 한번 밖에 없었던 십자가의 의미가 내용물, 진짜 본질에 해당되는 내용물로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부활은 부활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담긴 말씀의 완성을 적용시키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단회성이 아닙니다. 부활은 계속해서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계속 적용하고 있어요. 뭘 하기 위해서, 부활을 알리기 위해서, 아니, 십자가를 알리기 위해서.
그런데 여기서 좀 어렵습니다만 어려워도 참으세요. 내 중심으로 산다면 내 중심으로 된다면 십자가, 부활 이야기한다면 여기에 자기중심이 고소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하나님? 네 죄를 위해서 죽은 거야. 감사합니다. 그런데 부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부활은 네 죄가 이젠 씻어졌어. 이젠 너, 내 안에서 영원히 사는 거야.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면 내 중심이 되면 십자가가 있는 것 같으면 십자가는 이제 부활 안에 흡수되어서 십자가는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 돼버려요. 그렇지요. 십자가는 거론 안 해도 돼요. 부활이 있는데 십자가를 왜 이야기합니까? 부활은 십자가 그 다음 사건인데, 이러한 사건이 있다는 것은 이 안에 사건을 포함했다는 것이고 이것만 챙기면 십자가는 따라오는 거니까 더 이상 십자가 이야기를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부활을 받아들이면 나는 말씀의 완성 속에 내 자리 잡은 것이 된다 말이죠. 이게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죠.
그런데 이것이 어떤 점에서 어려운가 하면은 십자가를 내가 안다. 라고 했을 때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게 성립되는데 뭐가 어렵냐 하면은 십자가를 알 수가 없게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성령님이 오지 아니하면 십자가는 알 수가 없어요. 이걸 베드로전서에서 뭐라 합니까? 마음속에 떠오르는 샛별이 아니면 이것은 영적이 아니면 십자가 자체가 설명이, 인간적인 보편적인 일반적인 인간의 본성으로는 십자가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보편적인 속성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말은 뭐냐? 부르심 받고, 택하심 받지 아니하면 택하심 받은 자가 아니면 거기서 차단돼 있다 이 말이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부르심 받지 아니하고 택하심 받지 아니하면 그게 차단되게 돼있다 이 말이에요. 보편적인 일반적인 이성을 가지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