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함평수련회 강의 녹취 (12-1)
[일반] 함평수련회 강의 녹취 (12-1)
이름 : 이근호(IP:)
열두 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밤에 제가 약간 잠을 설쳤는데요. 잠을 설친 이유가 뭐냐 하면은 어제 우리 서경수 목사님 방에서 이야기 가운데서 제가 약간 쇼크를 받았어요. 어떤 쇼크를 받았느냐 하면 첫 번째 강의 있잖습니까? 서경수 목사님이 첫 번째 강의가 철학적이라서 잘 이해가 안 된다 할 때 그때 약간 멈칫 흔들렸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저는 모든 것을 계속 허물고 모든 것을 다시 세우는 그것이 부활하신 하나님의 작업인 줄 알았는데 일장이 만약에 어렵게 되면 일장에서 한 이야기가 모든 것을 지금 다시 허물어도 괜찮습니다. 하는 쪽으로 제가 이야기했거든요. 모든 것이 허물어도. 이상원 목사님은 일번을 못 들어서 그런데.
예수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 뭐 우리가 공부하는 것, 베드로전후서가 어떠니, 창조가 어떠니, 부활이 어떠니, 십자가가 어떠니, 이런 것을 만약에 우리가 사라지면서 같이 사라져도 외부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채워주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제 이야기의 취지였어요.
그러면 지난 날 믿었던 예수, 지난 날 믿었던 십자가를 오늘까지 붙들고 있다면 이것은 한 마디로 뭐냐 하면 안정성 확보입니다. 안전성을 확보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안전성을 확보해버리면 계속해서 이걸 고수하게 됩니다. 이걸 고수하게 돼버리면 무엇을 믿지 않느냐 하면은 어제 주님 말고 오늘의 주님을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셈이 돼버려요.
그래서 저는 첫 번째 강의를 하면서 여러분들은 다 복음을 알고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충분히 이 정도는 지금도 그렇게 사시고 들 있지요. 라는 투로 이야기했는데 어렵다고 이야기하시니까 그렇게 안 사시는가? 뭔가 언어라는 개념, 신학 개념 이걸 붙들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뭔가 쌓는 식으로 신앙생활 한다면 그것은 참, 차라리 잘됐다, 다시 한번 다 다시 부셔버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라는 겁니다.
베드로전후서에 여러분들이 강의에 참석 했지만 베드로전후서의 본문에 느끼는 감정은 뭐냐 하면 베드로가 논쟁적이에요. 논쟁적입니다. 논쟁적이라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저기에서 이런 소리를 하기 때문에 그냥 두고 보지 말고 나는 공격하겠다. 라는 투가 베드로전후서로 나왔어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체계가 있습니다. 딱딱 기초가 있어요. 아아, 어어,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어떻습니까? 어어, 오오, 딱 맞네. 딱딱 떨어져요.
그런데 베드로전후서는 들쑥날쑥 무슨 소리를 하는지를 몰라요. 이것은 바로 적이 있었어요. 적을 의식하고 적을 겨냥하면서 적어도 적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를 여러분들이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습니다. 라는 투로 베드로전후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들을 의식해서 적들과 가상적인 논쟁을 벌이는 책이 베드로전후서입니다. 그러면 논쟁하면 이기면 될 것 아닙니까? 이기는 것이 아니고 고난 받게 되어 있지요. 안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 받게 되어 있다는 것도 베드로전후서에 나옵니다. 논쟁적이죠. 그런데 어떤 분은 성격상 논쟁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공자님이 그런 분인데 공자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 원수를 적을 두지 말라. 사람에게 적을 두면 본인에게 피곤해진다 이 말이죠. 이게 원효대사의 화쟁의 원리, 이론하고 비슷하지요. 적을 만들지 말라, 자꾸 쓸데없이 적을 만들지 말라. 그러면 네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그런 실용적인 철학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전후서는 자꾸 시비 걸어요. 자꾸 시비 건다고요. 왜 시비 거는가를 나중에 베드로전서는 몰랐고, 후서 이렇게 할 때는 몰랐는데 오늘 본문에 할 3장에 오면 아하, 안전성이구나, 안전성. 사람들은 자꾸 안전성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는구나. 그것이 비로소 드디어 베드로후서 맨 마지막에 와서 비로소 그게 밝혀집니다. 마치 이야기, 드라마의 끝이 마지막 시간에 다 밝혀지듯이. 아아,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그딴 게 뭐가 소용이 있어. 예수, 내 주먹을 믿는다, 나는. 예수 안 믿는다. 라고 그렇게 큰 소리 치는데 그걸 베드로가 공격하면서 여러분, 저렇게 주장할 때는 저렇게 공격하시고,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 오늘 본문 베드로후서 딱 오니까 사람들은 결국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대자연의 안전성을 담보로 해서 거기에 의지하면서 미래까지 설계하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구나 하는 것이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우리는 주님의 적이 아닌데요. 우리는 주님과 한편인데요. 라고 이야기 할 사람도 있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전후서에서 이야기하는 이런 내용이 하나님의 집, 그러니까 교회 내에서 먼저 이 논쟁을 근거로 심판을 감행하고 계시는 분이 지금 우리 주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 편이니까 우릴 건드리지 말고, 불교신자를 건드리세요. 라는 것이 용납이 안 돼요. 너도 마찬가지로 뭔가 안전성을 확보해 가지고 느긋하게 즐기고자 하는 심보가 있지 않느냐 하고 따지고 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베드로전후서를 공부하면서 제일 첫 강의를 한번 지워보자. 지워볼 때까지 한번 지워보자. 예수고, 십자가고, 뭐 복음이고, 우리가 알았던 모든 신학적인 것을 삼위일체고 다 지워보자. 다 지우고 난 뒤에 여러분 마음에 뭐가 남아 있느냐 라고 제가 물었던 겁니다. 첫 강의에서. 그렇게 물었던 거예요.
그것 뭐 어떤 분들은 복음을 아는 사람은 아이고,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주님께서 활동하셔서 여전히 똑같은 십자가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그것 내가 과거에 알았던 것 지워버린들 주님 주시면 그만 아닙니까? 라고 하신다면 고맙지요. 저는 고맙지요. 바로 그거다, 바로 그거라. 교회 몇 년 다녔는가, 나는 직분이 목사다, 이런 것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저는 이 대자연을 안 믿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십자가와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만 한다면 제가 꼭 고마워 할 이유는 없지만 주님께서 고마워하고, 이 성경대로 베드로가 고마워하고 다 고마워하지요. 그것이 샛별이 떠오른 사람의 특징이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제부터 마음껏 지워도 되잖아요. 정말 그렇다면 이젠 안심 푹 놓고 마음껏 지워 나가도 상관없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확정될 수가 있는 겁니다.
오늘 베드로후서 3장의 내용은 이 지구가 멸망한다는 겁니다. 무슨 이런 악취미가 다 있습니까? 제가 첫 번째 강의하면서 얼른 지나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툭 던졌지요. 그 손학규 지사는 황우석 교수를 속을 때까지 속아보겠다. 라고 했지요. 그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제가 얼른 툭 던졌는데. 바로 그런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말이에요.
세상의 모든, 그렇다면 만약에 주님이여, 제가 손학규 지사인데 저는 황우석 교수가 아니고 저는 속을 때까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아이고, 장하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래? 그럼 네가 딛고 있는 지구를 한번 멸망시켜봐? 라고 나오는 것이 베드로후서 3장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철저하게 베드로는 너희들한테 안 속아 넘겠다는 거예요. 뭐 믿습니다. 하나님. 할렐루야 해도 안 속아 넘어가겠다는 거예요. 정말 네가 딛고 있는 최후의 보루, 이 지구마저 사그리 불살라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뭔가 믿고 있느냐를 확인하겠다는 것이 베드로전후서의 특징입니다.
그 사람이 지난번에 약간 등장했던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롯이었고요, 노아의 여덟 식구였습니다. 두 사람의 특징은 외로웠다는 겁니다. 두 사람의 특징은 쓸쓸했다는 겁니다.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그런 것을 가지고 인내심을 가지고 경건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 시간에 마음껏 지워볼 랍니다. 마음껏 지워보기 위해서 이 대자연의 안전성에 대해서 이게 왜 무너져야 하는가를 지금부터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4절에 보면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만물은 처음 창조 때와 같이 그냥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등산해 보면 알아요. 산에 높은 등산해 보고 발밑에 허연 구름인지 안개인지 저쪽 세상과 산 위의 세상을 구분 지을 때 그때 우리는 도를 닦은 그런 고승은 아니더라도 저절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대자연 앞에서 나는 한 점의 점이구나. 하나의 흙이고, 먼지에 불과하구나. 그래 대자연은 안정되지만 나는 사라지구나.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그래, 죽자. 이 대자연에 몸을 내던지리라. 이런 식으로 시도 아닌 것을 가지고 진짜 시 나오면 뭐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시 같지도 않는 거예요. 그렇게 운을 떼고 와서는 이제 세상 나가는 버스타고 올라가지요.
대자연은 어머니 같아요. 우리의 보호막입니다. 인생은 짧아도 자연은 길고 예술은 길다. 예술가들은 예술 작품은 하나의 자기 목숨 바쳐서 하는 작품이에요. 자기를 죽이고 예술 작품을 통해서 다시 거듭나기 위해서 예술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예술하는 사람들의 그 복장이 아주 특이한 복장들이 많지요. 예술하는 사람은 기존의 모든 유행에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독창적인 개성에 몰두하면서 수염을 이렇게 기른다든지, 개량 한복을 입는다든지, 환경 운동하는 사람들, 생명 운동하는 사람들, 유기 농법하는 사람들, 딱 보면 특징이 있어요. 수염 기르고, 개량한복입고, 바지 이런 것 있어요. 흙담집에 살고, 그런 식으로 자연에 살고 자연에 죽겠다는데,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그 자연이 불탄다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들 또 어디다가 피신할라 합니까? 피신할 데가 없다는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