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함평수련회 강의 녹취(10-1)
[일반] 함평수련회 강의 녹취(10-1)
이름 : 이근호(IP:)
2006 함평겨울수련회
(강사:이근호 목사)
베드로전후서 강의
제10번
몇 번째 입니까? 열 번째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 단숨에 왔는데 제가 주장하는 이론이 뭐냐 하면은 이 베드로전서의 모든 하라하는 명령은 아무리 하려고 해도 우리는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리고 이 명령은 만약에 우리가 하려고 한다면 내용을 곡해해서 시도하기 때문에 열심히 해봤자 본래의 성경에서 요구하는 그 내용과는 서로 디 아니쌔, 서로 맞지를 않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전혀 못하는구나, 우리 자체적인 능력, 잠재적인 능력 가지고는 성경을 천 번을 봐도 그 하나라도 우리가 지울 수 없구나. 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성경이다. 라는 것이 지금까지 오늘 이번에 강의하면서 줄기차게 주장했던 제 이론입니다. 맞는지 안 맞는지 여러분들이 판단을 열심히 하고 있을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가 못 지킬 것 같으면 이 말씀을 만약에 지킬 능력도 없고 못 지키고 지킨다면 곡해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 이 성경은 우리하고 상관없는 그냥 안 봐도 되고, 관심 두지 않아도 될 책이 아니냐? 이론이, 논리에 따르면 그래, 하나님 잘해보소. 던져놓고 나는 돈 벌고 살기에 바쁘니까 이렇게 신경 안 써도 봐도 못 지키는 것, 뭣 때문에 보느냐 말이에요. 봐도 안 되는 걸.
이중에서 리투아니아 언어라든지 러시아 언어하시는 분, 계십니까? 없지요. 그러면 여기서 러시아 책을 쭉 나눠주면 러시아 언어도 모르는데 책을 왜 주느냐 말이죠. 그러면 팽개쳐 버리고 간식이나 까먹지. 귤이나 까먹고. 그러면 되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이라는 것은 거룩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순종하세요. 아무리 얘기해도 내던져도 무방한 책이 아니냐는 그런 논리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제 이론이 맞는지 베드로후서로 한 번 넘어가 봅시다.
1장 2절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절에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외부능력입니다. 외부능력. 제 말이 맞지요. 지금 고린도전서. 베드로전서.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죄송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에 나오는 이 이야기, 그러니까 베드로전서에서 쭉 줄기차게 달리면서 이 책은 우리가 못 지키며 줘도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강조했는데 베드로후서 1장 3절을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에게는 기이한 능력이 외부에서 주어지게 돼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이한, 이상한 능력이, 그냥 능력이 아니고 생명의 능력이,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우리에게 주셨다고 되어 있단 말이지요.
이것은 외부에서 주입되는 능력입니다. 외부에서 능력이 주어진다는 말은 우리 자체에서 능력으로 이 성경말씀을 지켰다고 우기는 사람 같으면 이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올시다. 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신기한 능력.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길에 갈 때에 당신 예수 믿습니까? 죽으면 천국 갑니까? 예, 갑니다. 어떻게 갑니까? 신기한 생명의 능력을 외부에서 주입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서슴없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당신의 자체적인 선한 능력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무용지물입니다. 아니 성경을 보잖아요. 지킬 의지가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면 의지만 있으면 지키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아닙니다. 아무리 성경을 봐도 지키고 싶어도 신기한 생명의 능력이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이 말씀은 내 속에서 발현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줘야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당신의 능력을 너무 자포자기하는 것 아니오. 너무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닙니까? 이렇게 되는데.
이런 점에 대해서 그림으로 그리면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무대가 이렇게 있고 관객들이 있다면 베드로전후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의 솜씨를 보이는 무대의 장입니다. 짠짜자아안. 해서 이 베드로전후서에 나오는 신기한 능력이 어떻게 성도의 신체가 하나의 말씀이 발현되는 나타나는 무대로 사용되는가? 그 솜씨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짠짜자아안.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의 무대가 돼있지요. 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그러한 무대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예상치도 못한 기이한 정말 기이한 그런 능력들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중에 하나 쉬운 예를 들면 여기 9절에 보면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이" 자꾸 제가 눈이 어두워서 신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9절에 보면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이죠.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절에 보면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러니까 아까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당나귀가 말을 한다, 홍해가 갈라진다, 천지에 노아홍수가 있었다. 노아홍수가 있었다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됩니다. 아무리 과학적인, 고고학적인 흔적을 찾아도 홍수가 있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합니다. 옛날 고대 전설에 이런 게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증거가 안돼요. 과학적으로 증거하면 빙하시대가 있었다는 것이 나오지 홍수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과학적으로 증거가 되지 않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관객들, 세상적인 악한 세상들 앞에서 이러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간다, 잘 있어라, 뭐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런 이야기가 이들 앞에는 낯설기 짝이 없어요. 저 사람이, 저 배웠다는 사람이 왜 저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 성경 그것도 믿을 만 하다고 믿나, 바보 아냐? 라고 조롱할지라도 그 사람은 신기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열리는 무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절부터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라고 되어 있지요. 이걸 봐서 이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이미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이미 익히 알고 잇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편지를 준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에 대해선 더 이상 깊이 있게 설명을 해나가지를 않지요. 그리고 이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라는 이것도 외부에서 주어진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예수님의 의인데.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만 예수님의 의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잠시 설명이 되어야 그 다음에 4절, 5절, 6절이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예수님의 의가 뭐냐? 예수님의 의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낯선 의입니다. 굉장히 낯선 의로움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예수님의 의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인간이 흉내 낼 수 있는 근접할 수 있는 의가 아닙니다. 낯선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이 의로움이 어떻게 생기느냐 하면은 사람들이 그 의로움은 무가치하다고 갔다버린 그것이 의입니다. 그런 의는 필요 없어. 그런 의로움 같으면 나는 그런 의로움을 안 따라 갈 거야. 그런 의는 수입 안할 거야. 그런 의로움은 관심 안 둘 거야. 라고 내팽개친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이 의로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제가 전번 전번에 이야기했지만 이 의로움은 예수님 본인, 제일 신기한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의로운 행동을 했을 때 어떤 그 의로운 행동을 한 나에게만 해당되는 의가 되는데 예수님의 의는 얼마나 신기한지 의로운 행동은 예수님이 했는데 그 파급효과는 그런 행동을 안 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의가 확산되는 의로움이 예수님의 의로움입니다. 이거는 정말 신기합니다. 이건 참으로 신기한 겁니다.
마태복음 8장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설교마치고 내려오는데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를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는 산상설교에 의하면 절대로 산상설교를 지킬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눈에 있는 티를 뽑을 사람도 아니고, 오른손이 범죄한다고 잘라버릴 사람도 아니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 대줄 사람도 아니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걸 생각하는 사람이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그 나라 의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요, 아무것도 의로울 것이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는 예수님의 의로움 때문에 공짜로 거저, 성경에는 거저로 되어 있는데 공짜로 의인으로 되어서 저주가 풀립니다. 신의 저주가 풀려버립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 중심에서 제일 난해하고 복잡한 이야기가 어떻게 개인적으로 하는 그 의로움이 어떻게 타인에게 그대로 고스란히 거저 전이되느냐, 그게 이전될 수 있는 메커니즘, 그 과정이 뭐냐가 신약성경의 예수님의 기독론을 하는데 이게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엉터리 같은 옛날 신학자들 주장을 한번 들어봅시다. 말은 엉터리 같이 했지만 사실 여기는 토마스 아퀴나스. 어거스틴 같은 잘 나가는 사람들 다 들어있지요. 이 사람들 313년, 325년 이후에 소위 삼위일체라는 것이 있어요. 삼위일체 들어봤습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들어봤습니다. 삼위일체 영어, 삼위일체 수학.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은, 지금 관건이 뭐냐 하면은 어떻게 아무 의로운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라는 어떤 분의 행위가 아무것도 안 한 나에게도 동일한 효과를 줄 수 있느냐? 만약 이것만 가능하다면 예수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믿고 예수를 위해서 내 목숨을 내놓겠다. 정말 논리적으로 딱딱 맞는다면.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정말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선물이다. 이것은 보통 선물이 아니다. 케이크 몇 개 주는 것 이 정도가 아니다. 산타클로스... 최고의 선물은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그저 의인이 되는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이 없고 이것이 바로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이다, 기쁜 소식이다 여기고 여기에 교회 교리의 사활을 겁니다.
그러면 그들의 아이디어가 뭐냐? 지금 제가 소개하는 것은 성경적 잘못 된 것을 이야기하니까 여러분들은 그 점을 미리 예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너무나 먼 거리가 있는데 하나님은 너무 고귀하시고, 인간은 비천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먼 거리를 이어줄 가교, 브릿지, 다리 같은 것을 설치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이런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괜찮게 미끄러지지요, 가지요. 지금 괜찮지요. 사실 괜찮은 게 아닙니다. 방금 한 이야기에 문제가 많아요. 문제가 많은 데 얼른 듣기에는 아주 건전한 신학처럼 보이지요.
이 예수님은, 계속하겠습니다. 쓸데없이 말 안 하고. 이 예수님은 안에 편리하게 두 개의 서로 배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속성이 있는데 하나는 신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는 인성을 갖고 있는데 왜 두 개의 서로 다른 배타적인 속성을 두 개 가지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가진 신성 파트는 하나님을 담당하고 예수님의 인성 파트는 인간을 담당해서 자기 안에서 모든 일이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속성이 두 개가 있다고 본 겁니다. 이영표가 담당하는 것은 앙리를 담당하고, 전담 마크맨이죠. 또 누구 수비수는 어떤 공격수를 담당해서 전담 마크맨이 있듯이 예수님께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오셔야 하나님 쪽에선 자기 나름대로 처리하고 인성은 인성대로 처리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어야 한다고 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활을 걸면서 여기에서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신은 신이지만, 여호와증인 같은 것은 하나님을 신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피조물로 천사의 한 종류로 보거든요. 그런데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은 신 맞는데 이게 하급신이다. 신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 약간 떨어진 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그 사람 대단한 신학자입니다.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주장한 이유가 뭐냐 하면은 기독교라 하는 것은 구약성경을 기본으로 해야 하는데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고 한 분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말은 그것이 지금도 유효해야 되죠. 지금도 하나인데 아, 잘못이다. 세 명이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니까 일관성 있게 여전히 하나님은 한 분이다. 그런데 그 한 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고 최고의 신은 역시 한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된다. 그렇다면 최고의 신이 있다는 말은 그보다 단계가 낮은 신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게 누구냐? 예수님이다. 이렇게 아리우스는 주장했습니다. 왜 아리우스가 예수님을 최고신보다 한 단계 낮은 신으로 봤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아들로 봤거든요.
여러분, 아버지가 높습니까, 아들이 높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가 높지요. 재벌 총수가 높습니까, 재벌 2세가 높아요? 그건 뭐래도 재벌 총수가 높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무시해서 낮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나는 아버지보다 못하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마지막 때는 아들의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라 했으니까 아아, 그게 예수님은 넘버 2구나. 넘버 1은 성부 하나님. 이렇게 우리가 성경을 따라서 낮지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전 교회가 반발하고 나섰지요. 아타나시우스부터 해가지고 나섰는데 왜 나섰느냐 하면 만약에 예수님이 하급신이라면 어떤 논리가 성립되느냐 하면 구원 받은 인간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속성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만약에 예수님이 한 단계 낮은 하급 신이라면 이 하급 신에서 또 다른 신에게까지 넘어가는 또 다른 다리가 또 필요한 거예요. 그러면 구원을 두 번 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합니다. 니케아회의에 보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면 인간은 완전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어야 되고, 완전한 인간이어야 돼요. 왜 또 완전한 인간이어야 되느냐? 만약에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만약에 예수님이 가짜 인간이라면 진짜 인간의 죄를 속죄 위해서는 여기에 진짜 인간이 있고 그 진짜 인간과 가짜 인간 사이에 또 다리를 또 놓아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님의 단번의 구원에 해당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양이 죄를 지었으면 양을 잡고, 돼지가 죄를 지으면 돼지를 잡는 거예요. 같은 동급의 같은 동급을 대신 바칠 때 그 먼저 동급이 지은 죄가 동급에 의해서 상쇄가 되는 것이 이게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귤이 상해서 상인보고 아저씨, 귤이 상했는데 귤 바꿔주세요. 이거는 되는데 한 동급이니까. 귤이 상했는데 와가지고 수박 달라. 이거는 같은 동급이 아니잖아요.
뭐 먹고 뭐 내논다고 오리발 내논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이 죄 지었으면 그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속죄제물은 완벽한 인간이어야 돼요. 완벽한 인간이어야 되는데 가짜 인간 돼서는 안 된다 말이죠. 어느 인간이 마네킹하고 결혼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마네킹하고 자식 낳을 것도 아니고 말이 안 되잖아요. 마네킹 말고 진짜가 오란 말이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매개체로서 인간, 신성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 끝나면 이거는 초등학교 3학년 수준으로 쉽지요. 여기서 복잡한 게 뭐냐 하면 인간은 죄를 어디서 지었습니까?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는데 육체에서 주로 죄를 짓지요. 제가 아까 인간의 연약한 것은 신체 때문에 욕심을 내서 죄를 짓지요. 인간의 영혼은 어디서 주어지느냐 하면은 이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겁니다. 이 신체 때문에 영혼이 물들어서 영혼도 죄를 짓는 겁니다.
따라서 이 죄지은 육과 영에 대해서 죄지은 육에 대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에 속하는 그러니까 그들은 이야기하기를 영혼은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이라고 하는데 이 영혼을 가지고 그들은 뭐라고 하냐면 이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지요. 그 형상이 뭐냐 하면 이거는 짐승에 없는 요소가 들어갔다고 보는 겁니다. 그 짐승에 없는 요소가 뭐냐 인간의 영혼이라는 거지요.
따라서 이 세상에 살면서 힘들여 밥 먹고 산다고 이렇게 애쓰다 보니까 뭐가 다치나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많이 다치고 많이 피곤하고 죄를 많이 짓게 되는 거지요. 따라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육체의 감각적인 욕심을 줄임으로써 이 영혼을 순수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영혼과 육체를 순수하게 유지하는데 예수님께서 옛날 오병이어처럼 맨 날 예수님께서 오토바이 타고 배달하면서 나, 예수님인데 북경반점에서 왔는데 짜장면 필요하지? 배달해 주고, 이렇게 맨 날 돈 대주고, 짜장면 사주고, 이렇게 옷 사주고, 밴드스타킹 나눠주고 맛나 처럼 그렇게 주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껏 해결한다는 것이 하늘에서 돈다발 내주는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베드로전서에서 봤지요. 욕심을 내지 마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마라. 먹는 게 있는 걸 족하느니라.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 맨 날 영혼에 관한 호소다. 영혼에 관한.
예를 들어서 성경 볼 때마다 만 원짜리 하나 끼워가지고 하나님, 베드로후서 떼었습니다. 어, 웬 만원. 줍고. 하나님, 요한일서도. 어, 수표. 이렇게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후서를 보든, 요한일서를 보든 나오는 것은 거짓말 하지 말고, 바르게 살고,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맨 날 어디다가 집중, 집중해서 호소하냐 하면 우리 육의 만족이 아니라 영적인 요소의 정화에 대해서 깨끗함에 대해서 호소를 하니까 결국은 어떻게 하냐 하면 육의 감각보다 영적인 것에 호소를 하는 거예요. 호소를 하다보면 뭘 느끼느냐 하면 스스로 영적인 정화를 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체력이 필요하듯이 영적인 체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영적인 체력을 보강해 주면 우리는 육을 조절하고 영적으로 정화가 되면서 되는데 이것은 어떤 경우에 그러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자범죄라 하는데 스스로 범죄하는 것에 해당되는데 인간이 기본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그 성깔, 그 성질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원죄라고 합니다. 많이 들어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