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함평 수련회 강의 녹취(9-1)
[일반] 함평 수련회 강의 녹취(9-1)
이름 : 이근호(IP:)
2006 함평겨울수련회
(강사:이근호 목사)
베드로전후서 강의
제9번
자, 아홉 번째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아까 보충수업까지 합쳐서 아홉 번째일 거예요.
베드로전서 4장 6절에 보면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라는 말이 나오지요.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 말은 그 뉘앙스가 어떤 뉘앙스냐 하면 너희들이 아무리 농땡이 부리고 아무리 너희들은 하나님이 뭐고 예수고 다 귀찮다. 나는 내 마음대로 내 욕대로 내 신체의 욕망대로 살래. 라고 퍼드러지더라도 하나님은 안 노신다 이 말입니다. 아주 바빠요. 이 분은. 휴식 시간도 없고. 성경에 보면 놀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그렇게 지금 이 작업을 쭉 해오고 있어요. 베드로전서 3장이나 4장에 나오는 이 모든 조항들을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심어주면서 봐라, 네가 이렇게 방탕하지 않는 것도 다 주의 은혜잖아. 라는 것을 깨우치는 일에 지금도 쉬지 않고 하십니다. 지금도.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그러니까 나는 방탕 안 하는 인간이야. 라고 붙잡는 순간, 그것은 자기의 의가 드러나고 주님의 공로가 가려져 버리죠. 그것은 자기가 펄펄 살은 상태가 되어 가지고 역시 나는 훌륭해. 역시 나는 말씀도 왜 이렇게 잘 지키는지 몰라. 하여튼 나는 말씀 맨이야. 라고 이렇게 나서 버리면 성경 전체의 십자가 피 뿌림을 또다시 모독하는 게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위대해져 버리고 나 같은 인간은 하나님, 아껴주셔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또 고집을 부리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냥 비우세요. 여기 성경에도 나오는데 그냥 비우세요. 마음을 비우시면 채워주시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으로 다 채워주십니다. 못 믿겠다, 하시면 십자가와 부활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스스로 취소한 적이 없습니다. 반드시 자기의 약속대로 다 하십니다. 다시 살리라 하면 살게 돼 있습니다. 그뿐 아니고 이 말씀대로 거룩케 하면 거룩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남은 때를 여기 4장 2절에 나오는 대로 사람의 정욕대로 살지 않고 땅의 원리대로 살지 않고 하늘의 원리대로 살도록 조치하신다는 겁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자식을 살린다고 자식의 죄를 용서한다고 아비 되는 내가 나한테 채찍을 때려서 자식을 구원했다 합시다. 했는데 자식이 그것에 대해서 모르고 아버지 참 헛수고했습니다. 백날 해봐도 나는 감동 안 받습니다. 하고 자기 맘대로 도망가도록 방치하게 되면 아이, 나만 손해 봤네. 괜히 나를 때렸잖아. 이런 하나님은 아니시거든요. 이미 자기가 자식 채찍 댈 때부터 그 자식에게 심어줄 거룩을 이미 채찍 맞는 내 쪽에서 나간다는 쪽으로 다 확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 점을 여러분들이 믿어야 돼요. 아, 내가 거룩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거룩되게 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거룩케 하시는데 어떻게 거룩케 하시는가? 그것이 바로 명령을 통해서 거룩케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이해하기가 난처한 경우가 있을 거예요.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은 모르죠.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통해서 이것을 달성하십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에 보면 빛이 있으라, 명령했잖아요. 빛이 있으라, 명령하니까 빛이 생겼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라고 명령했으면 그 명령이 아브람에게 도착하면 아브람은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야곱이 자기 욕심 채울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너는 이제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고 이름 바꿀 때에 이것은 야곱이 거역할 수 없는 사로잡힌 인생을 삽니다. 그 뒤에 야곱이 무수히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상관없어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입니다. 한 번 이스라엘은 영원한 이스라엘, 한 번 아브라함은 영원한 아브라함, 한 번 구원받은 자는 영원히 구원받도록 책임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특기입니다. 너는 거룩한 백성이라 말만 한 것이 아니고 거룩한 백성이니까 거룩하라. 하는 그 명령을 통해서 그 하라는 명령이 우리 속에 도착이 되면 우리는 이러한 그런 현상들이 그야말로 남편보고 주라고 하는 현상들이 예상치도 않은 일들이 꼭 일어나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꼭 말을 주라고 안 해도 다른 것이라도 마음을 낮추는 현상들이 반드시 그렇게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이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잠시 유식의 세계에, 무식에서 벗어나서 유식의 세계로 한 번 넘어가 봅시다. 제가 여기서 들뢰즈의 철학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현대철학자들에서 제일 유명하고 책도 많아 팔리고 그리고 가장 난해한 철학자가 질 들뢰즈란 프랑스 사람인데요. 이 사람 죽을 때 자살해서 죽었어요. 자살한 이유는 더 이상 쓸모없다 싶으면 죽는 것이 났다. 라고 본 거지요.
들뢰즈 이 사람이 지은 것 중에 [유목주의]란 책이 있어요. 이름이 뭐지요?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데 하여튼 유목주의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이 두꺼운 책인데 그것이 합해서 1200페이지 되는 두꺼운 책인데 그 책에 보면 언어를 분석하는데 모든 언어는 다 명령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면 1+1=2다. 수학공식이 있으면, 이것이 명령입니까? 명령이라는 겁니다. 왜 명령이냐면 1+1=2인 줄 알아라. 이놈들아. 명령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3이라 풀면 우리 세계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강한 지시가 들어 있어요. 모든 이야기들은 서술어를 하든 명령을 하든 전부다 명령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명령은 말을 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 말 듣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자기 사람으로 당기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는 명령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명령을 하는 이유가 뭐냐? 결핍 때문에 주어진다는 거예요. 결핍 때문에 주어지는데 그 결핍에서 뭘 보느냐 하면 잉여, 넉넉함을 노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요. 이렇게 명령으로, 명령으로 하는 이유는 언어의 의미라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활용에 있다, 활용에 있다. 라는 비트켄쉬타인의 이론을 이 사람이 그대로 동의합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의미라 하는 것은 활용에 있다. 활용이라는 것은 그 단어가 왜 거기에서 그렇게 활발하게 쓰이느냐, 쓰이는 쓰임새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축구를 할 때 축구 룰이 있잖아요. 그 룰을 보여주기 위해서 축구공의 공이 있습니다. 축구공이 그냥 있을 때는 아무렇게나 차면 되지만 일단 축구공이 게임에 들어가면 이 축구공은 밖에 나갔을 때는 그냥 차면 안돼요. 드로잉을 해야 돼요. 같은 축구공인데 드로잉을 함으로써 거기서 새로운 의미가 발생되면서 드로잉을 하는 사람은 우리 축구동우회에 넣어주고 밖에 나갔을 때 드로잉을 마음대로 밖으로 차 넣으면 축구동우회에 아예 넣어주지도 않는 거예요. 너는 나가 놀아라. 너는 규칙도 모르고 가! 하고 내쫓아버립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자기들만의 게임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바로 언어인데 의사소통이란 말은 누구나 되는 언어소통이 아니라 자기들 룰을 동의하는 사람끼리만 통하는 의사소통입니다.
이러한 들뢰즈의 모든 이야기는 이것이 어디에 정확하게 해당되느냐 하면 바로 언약공동체 이스라엘 내부에는 이것이 정확하게 꽂히게 되어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스라엘 모세가 하나님 산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저런 인간은 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리라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그렇다면 불교 스님한테 스님, 출애굽기에 보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는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답니다. 그렇다면 스님이 뭐라 하겠습니까? 저는요, 생명책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생명책으로 전도하려고 하다가 그만 어떻게 돼버려요? 스님, 생명책에 기록돼야 되고, 생명책에 기록되려면 예수 믿어야 되고, 이렇게 준비된 이야기가 쭉 펼치려고 하는데 저는 생명책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말문이 탁 막히면서 그 다음에 말할 게 없잖아요. 그런 경우 뭐냐 하면 이런 현상들이 이스라엘 가는 곳마다 다 있습니다.
발람이란 선지자가 원래 이스라엘 선지자가 아니고 모압 선지자인데 모압 왕 이름이 발락입니다. 이름이 비슷하지요. 선지자 이름은 발람, 왕 이름은 발락. 발락이 뇌물, 보물을 줘가지고 저 우리를 쳐 들어오는 이스라엘 나라를 저주해 다오. 신에게 계시 받아서 당신은 점쟁이니까 계시 받아서 한바탕 굿판을 열어서 제물을 받쳐서 저주해다오. 오케이. 그래서 저주하려고 가는데 평소에 말 잘 듣는 당나귀가 갑자기 버티고 서가지고 전진을 하지 않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불교신자나 안 믿는 사람에게 이야기해 보세요. 그들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지금 당나귀가 왜 말하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이 축복한 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이 축복을 회수하면 몰라도 하나님이 축복한 자는 다른 어떤 신이 저주해도 그 축복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딱 그 안 믿는 사람이 뭐라 하느냐 하면 나, 당나귀가 버티고 서고 갑자기 때리니까 주인님, 저를 왜 때리십니까? 당나귀가 말을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저, 교회 다니는 사람, 저는 당나귀가 말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럼 당나귀가 말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축구공이 밖에 나갈 때 이렇게 던지지 말고 그냥 퉁 다시 넣는다. 라는 그 주의입니다. 할 때는 축구 게임하는 것처럼 그냥 그 게임에 편입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성경은 성경말씀에 나오는 그 용어나 게임의 휩쓸리지 않는 사람을 골라내는 작업으로서 성경이 있다는 거예요.
이해 안 됩니까? 당나귀가 왜 이야기합니까? 언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목소리를 가져야 내는데 당나귀를 해부해 볼까요? 거기서 음성이 나오는지. 당나귀는 이성을 가졌습니까? 어떻게 당나귀가 이야기를 해요. 있을 수 없습니다. 홍해바다가 갈라져요? 한일자동펌프 한 번 돌려볼까요? 갈라지는가? 안 갈라지지. 벽이 된다고요. 그것 안 믿습니다. 이렇게 돼 버리면, 그렇습니까? 진짭니까? 진짜 당나귀가 말하는 거 안 믿습니다. 당신이 그 당나귀가 말했는데, 어떤 내용인가 듣기 싫어요. 나는 당나귀가 말하는 그 자체를 인정 못합니다. 진짭니까? 반가워서, 진짭니다. 지옥 갈 사람 또 만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공동체의 할 일이에요.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신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일반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 당신 교회 보내려고 얼마나 밑천 드려가지고 애 공부도 공짜로 가르쳐주고 영어도 가르쳐주고 다 밑천 드려가지고 이쯤하면 꼬시겠지, 이쯤하면 교회 나오겠지. 이렇게 건수 하나 올렸다고 영업사원 건수 올리듯이 건수 올렸는데 나중에 가가지고 아, 안됐습니다. 이래버리면 신이시여, 그동안 드린 밑천이 완전히 손해날 것 같습니다. 완전히 손해 봤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은 일반 교회, 가정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식구들 가운데서 너무너무 자식들한테는 지극정성인데 단 하나 예수 이야기하면 야야, 나는 나 편한대로 살도록 좀 놔둬. 네가 교회 가는 것 안 말렸잖아. 그런데 내가 하나님 안 믿겠다는데 너 자꾸 나한테 압박을 가하면 그것은 엄마, 아빠한테 마음에 부담가니까. 내가 믿고 싶으면 왜 안 믿을까, 내가 안 믿고 싶으니까 안 믿는 거니까 날 좀 괴롭게 하지 마라. 내가 너한테 밥을 안 해 줬나, 공납금을 안 대줬나, 다 해줬잖아. 그런데 네가 왜 자꾸 날 괴롭히나? 어머니, 제가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내가 아는데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거든요. 십자가 대신 받아 ... 야, 그것 많~이 들었다. 들었으니까 나 이제 두 번 듣기 싫다. 어머니 그 이야기는 이번에 함평에 가보니까 어떤 목사님이 강의하는데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악이 있는데 악은 주의 말씀이 들어오면 그걸 반발하는 심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담에서 나왔고 ... 야야, 그 게임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니까, 내 앞에서 그런 소리하지 마라.
그런 현상이 바로 베드로전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내가 돈 못 벌어서, 내가 개척교회 실패해서 고난이 아니라 예수님이 엄연히 살아계시고 다 속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부대끼면서 느끼는 고난이 있을 때 성령이 바로 그렇게 나한테 일부러 시킨 거란 거지요. 왜 분류작업을 하기 위해서 안 믿는 자와 신자와 분류하기 위해서 그 일이 이미 이스라엘에서 계속 해 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온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