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34: 1- 4 (새 돌판 등장)
Re..출 34: 1- 4 (새 돌판 등장)
이름 : 이근호(IP:)
130강-출34장,1-4(새,돌판,등장)-exo060129
새 돌판 등장
2006년 1월 29일
설교 본문: 출애굽기 34:1-4
3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34:2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34: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인적을 금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34: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대로 시내산에 올라가니
원래 돌판이 깨어진 이유는, 다른 신을 섬기고 있음이 확실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계명 내의 계명 안에는, ‘이러이러할 때는 돌판을 가차없이 돌판을 깨어버려라’라는 내용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돌판의 존재 유무가 일단 돌판의 내용에 받아 쥔 인간들의 행동 유무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즉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거짓 증거 하나는 확실히 평생을 두고서도 안 할 자신이 있다. 따라서 십계명이여 오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조항이 내 손에 준수되는 것을 내가 보이리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 조차도 십계명 지키기에 대한 기회는 애초부터 차단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신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계명대로 지키면 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하는 계명이 아니라, 반대로 신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그 어떤 경우라도 절대로 지켜질 수 없고, 또 지킬 자격도 거부하는 계명인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십계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신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자기 주제파악도 못한채 건방지게 십계명 준수에 나서게 되고 또한 약간은 지켜냈다고 우기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거짓 ‘말씀 지킴’이 무엇과 충돌되겠습니까? 본문에서 보면, 십계명의 존속에 대해서 하나님은 추호의 양보할 생각이 없이 원상복귀를 명령합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세상 지배가 이미 이 세상 멸망과 동일시 된다는 점을 아울러 명령하는 바가 됩니다.
마태복음 24:8-14에 보면,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기정 사실화 되었으며, 사람들이 설사 십계명을 잘 지킨다고해서 심판이 취소되거나 유보될 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처럼 십계명은 인간사의 멸망을 이미 결정된 사항임을 통보하는 식으로 전달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에 의해서 이 십계명이 깨어지면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또 다른 면이 추가되어서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뭔고 하니, 십계명 돌판을 재생하는데 있어 하나님은 철저하게 모세와 다른 이들 사이에 차이를 두시는 겁니다. 그 이유는, ‘돌판 재생자’는 처음 돌판이 깨어지는데 있어 관여하지 않는 사람에 의해서 재생되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즉 비록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판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졌지만 그 돌판의 위상은 이 세상 끝까지 계속 가도록 조치하시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 곁에는 ‘돌판 재생자’로서의 모세의 입지가 추가적으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즉 이제부터는 말씀을 못 지키는 자만 죄인 아니라 ‘돌판 재생’의 취지를 무시하는, 스스로 말씀을 완벽하게 지켜냈다고 여기는 그런 시도까지 죄가 되는 상황에 돌입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노아 홍수 때,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쓸어버릴 것이 홍수를 퍼부었지만 결국 노아가 드린 희생의 효력을 새로운 세계의 기반으로 정립시키는데 활용하신 것처럼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 때 이후로 모든 인간들은 날 때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해서 하나님께서 홍수 전이나 후나 기대할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아가 드린 정결한 희생물의 공로로서,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은혜를 내리시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서 새로운 죄가 이 노아 은총에 준해서 검출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만 복을 내리시지 않고 저 악랄한 옆집에도 복을 내리시는가. 참으로 기분 더럽다”라고 여기는 것까지 죄가 됩니다.
모세에 의해서 ‘돌판 재생’에 돌입되고 나면, 인간들의 ‘말씀 지킴’은 날이갈수록 죄의 증가로 이어집니다. 지키지도 못하면서도 지킨다고 우겨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 근거는, 사람에 의한 ‘말씀 지키기’에서 나올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나오게 될까요?
재생된 돌판이 어디에 안치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재생된 돌판은 ‘언약궤’라는 금박으로 된 나무 상자 안에 보관됩니다. 이것은 또 다시 돌판이 인간 세계 안에 들어와서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이상한 현상을 말하는 것도 됩니다. 왜 두 번째 돌판은 인간 세계의 죄악 속에서도 깨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그 언약궤를 덮는 뚜껑에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 뚜껑을 ‘시은좌’라고 합니다. ‘시은좌’란 ‘은혜가 내려앉은 좌석’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그 뚜껑 위에 턱 하니 깔고 앉은 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양상은 일 년에 한 차례씩 정결한 희생제물이 된 소의 피를 시은좌에 바르므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표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돌판의 존재 형국은 돌판 홀로 이스라엘 내부에 있어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 제사의 피와 더불어 동행하는 셈이 됩니다. 즉 모세의 제사법은 심판과 저주의 말씀이 내뿜게 되는 심판과 저주를 자체내에서 해소하는 셈이 됩니다. 이러한 용서의 성과가 가능했던 것은 깨어진 돌판을 재생할 수 있는 재생자가 이스라엘 내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모세와 타인들을 구별하십니다. 그것은 돌판 재생자는 산 위에 올라가지 않는 그 어떤 누구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입니다. 신약 성경에 와서 보면, 예수님은 자칭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힘으로’ 말씀을 준수하고 있다는 세력과 마주치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위들에게 대해서 예수님은 가차없이 그들의 위선을 폭로했고, 그들은 또한 예수님을 밀어낼 때까지 밀어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속죄의 피는, 인간들의 저항 속에서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서 얻어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피만을 근거로 해서 성경을 읽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