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함평수련회 강의녹취(4-2)
[일반] 함평수련회 강의녹취(4-2)
이름 : 이근호(IP:)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은요. 그런데 선지자들은 달랐더라 이 말이죠. 선지자들 속에 다른 주체자들이 들어와 버려요. 방금 하이데거나, 방금 유식한 척하면서 가다머나 여러 가지 라캉이나 프로이드 이야기했습니다만 그 모든 것은 내가 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내가 진리를 알아서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고 싶다. 라는 그런 뜻에서 이야기했다면 이 선지자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요청하지도 않고, 초대하지도 않은 장차 오실 어떤 미지의 X되시는 분, 이것이 헬라어 유사하게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그리스도네. 크리스마스인데 어떤 사람은 엑스마스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 엑스, 그리스도가 앞당겨서 미리 와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 선지자들의 입을 벌려서 이야기하고 액션, 삶을 살게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십자가 이전에도 그렇다면 십자가 이후에 오신 성령은 바로 십자가 이전에 선지자에게 적용됐던 그 적용의 원칙을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 적용된다. 라는 것이 베드로전후서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편지가. 옛날의 선지자에게 일어났던 그것을 이제는 오늘날 이 편지를 읽는 택한 백성하게 동일하게 적용되니까 기다리세요, 이런 뜻이에요.
이 새로운 주체가 오게 되면 뭐를 아느냐 하면 아까 하이데거 이야기를 해봅시다. 다시 되풀이해야 자꾸 기억이나요. 하이데거는 뭐라고 했어요. 하이데거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어디서 나온다고요. 안 죽으려고 몸부림치는 이유도 없이 죽을 수 없다는 것. 나는 이유없이 죽을 수 없어. 나는 왜 죽는지 싫어. 싫어. 라는 No, Nein. 그러한 아니야, 아니야, 이것은 안돼. 라는 그것이 움츠리지 못하고 발산되는 식으로 나온 것이지요.
거기에 동의한 사람이 하이데거, 니체입니다. 니체는 여기서 두 가지 허무주의를 이야기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소극적 허무주의를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적극적 허무주의를 이야기했습니다. 니체는 적극적 허무주의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소극적 허무주의가 뭐냐 하면 쇼펜하우어예요. 자살, 자살이 가장 큰 행복이다. 자살보다 더 좋은 행복은 없다 해놓고 자기는 자살 안했어요. 아이, 사람이 배반, 야, 얍삽한 사람이에요. 자기는 자살하라 해 놓고. 쇼펜하우어 책보고 많은 젊은이들이 자살했거든요. 우리나라도 자살 많이 했어요. 우리나라도 1930년대, 40년대 모더니즘 나올 때에 이상의 날개, 오감도 그것이 전부 다 폐쇄적인, 염세주의적인 모더니즘에서 나온 것이거든요. 그 작품들이 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심지어 제가 어렸을 때에 형뻘 되는 사람들이 쇼펜하우어의 책보고 전부 다 고민에 잠겨가지고 인생이 무엇이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지요.
이것이 소극적 허무주의라면, 적극적 허무주의가 뭐냐 하면 허무하기에 초인이 되어라. 초인이 뭐냐? 초인은, 인간은 자기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이죠. 다른 말로 하면 긍정적 사고방식. 이것이 놀랍게도 허무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에라, 나중에 어떻게 될지라도 즐기고 보자. 라는 데서 예상치도 못하는 놀라운 능력이 발휘된다는 겁니다.
제가 TV를 거의 안 보는데 옛날에 금요일날 한국을 살리는 기업들의 신화, 뭡니까? 성공시대 아니고, 신화창조라는 것을 봤어요. 그 음악이 누가 부른 음악입니까? 행진 부르는 것 있잖아요. 그 사람들 한 번 큰 건수 건진 사람들은요 깊은 회의에 빠지고, 허무에 빠진다는 것을 다 감추고 있어요. 사람이 큰 건수 터뜨리면 생애에 환희를 느끼죠. 아, 나는 살아야 될 가치가 있구나 느끼지만,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런데 현실은 뭡니까? 죽잖아요. 자기가 쓸데없는 데 죽으면 아깝지 않습니다. 쓸데 있는데 죽으면 아까워 미칩니다. 나 같은 고귀한 인간을 왜 죽여? 그 폭이 길어지니까 허무가 길죠. 자기가 높아지면 수면제 아니고서는, 술 안 먹고는 잠을 이루질 없죠. 시애틀의 잠 못 드는 밤. 허무의 폭이 넓어지면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목회자들 몇 명 안 됩니다만 없으니 하는 소리이지만, 목회자가 언제 잠 못 이루냐 하면은 설교 잘하고 싶을 때 잠이 안 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설교 왜 잘하려고 하는데요. 죽기 싫다는 거예요. 오늘밤 죽기 싫고 내일 설교하고, 죽어도 설교하고 죽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의 가치를 너무 과대평가한 거예요. 우리는 성경을 보고 하면서 나에게는 설교할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철저하게 나는 성경을 해석할 자격도 없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해석을 하다니, 나에게는 황공스러운 사실이야. 라고 이렇게 마음을 낮춰야 되는데 이 해석을 누가해, 나 아니면 누가 하겠어? 이러면 잠 못 이룹니다. 내일 멋진 설교를 터트린다. 한 번 똑똑히 보라! 내가 화려한 제2의 부흥이 일어날 거야! 꼭 누구 이야기하는 것처럼, 남의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주 어색하지요. 그러면 그렇게 설교 준비해 놨는데 김 집사, 최 집사 다 빠져버리면 닭 쫓던 개처럼 짜증나서 설교 못하는데 그것이 녹음돼 보세요. 듣는 사람도 짜증나죠. 그래서 목사님들 녹음 안 하려고 해요. 자기 성격 나온다고. 또 무슨 이야기하다 이렇게.
허무주의에 있어서 절대적인 성공은, 선이 있는 것에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을 그는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절재적인 성공이 있을 때에는 그 성공을 완전히 일시에 잊어버리고 그 성공을 무가치하게 봐 버리고, 당장 당기는 죽음의 무서운 세력에 그 성공했다는 그 업적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용서 안 되니까 정기적으로 술을 마시는데 그 알콜 중독이 바로 정기적인데서 나옵니다. 맞지요. 많이 먹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정기적으로. 여기 한꺼번에 많이 먹는 사람은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정기적으로 조금씩 먹으면 거기에 내성이 발현되어가지고 나중에는 어지간히 먹어도 잠이 안 오죠. 마약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담배도 마찬가지고. 담배 꼬나 피면서 하는 이야기, 생각이 뭐예요. 왜 나는 가치 있는데 가치를 남들이 안 알아주느냐 이 말이에요. 왜 사회는 나 같은 인간을 자꾸 놓치는가, 바보들. 그렇게 하면서 한다는 거지요. 가만 조용한 것 보니까 다 그렇게 사시는 것 같아요. 뉘앙스 같은데.
선지자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야지요. 선지자들, 몇 번 해놓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선지자들은 어떤 점이냐 하면 마찬가지에요. 나는 선지자기 때문에 훌륭해야 돼, 남보다 덕 스러워야 되고, 모범적 신앙생활을 해야 돼. 라고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서 십자가의 절망적인 상태로 꼴아 박아 버립니다. 완전히. 그런데 여기에 자기 선지자들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일에 동원되는 것이 누구냐 하면 비복음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사람들이 둘러서서 선지자를 억울하게 조지는 거지요. 억울하게 모함하고, 고난 받게 하고. 그 고난의 주제가 베드로전후서입니다.
베드로전후서의 주제는 고난입니다. 그것도 이유 없이 받는 고난. 만약에 예수님 때문에 이유 없이 고난 받거든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물러 있는 줄 알라. 베드로 전서 4장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진 것은 너희로 본을 따라 그 십자가를 따라 오게 하심이라 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2장.
왕 같은 제사장의 뜻이 뭐냐 하면 그냥 제사장이 아니라 왕족입니다. 왕족 중에서 너 제사장해 볼래. 해서 된 것이 왕 같은 제사장이에요. 왕족이니까 통치자에요, 지배자에요. 정말 12고을 다스릴 수 있는 그런 신분에 이미 도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왕족이 애매하게 고난을 받지요. 왜 그래야 됩니까? 그것은 나에게 묻지 말고 과거의 선지자들한테 물어봐라. 선지자들도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이미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산 것 같은 사는 사람, 부활의 천국을 맛본 사람이지만 그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런 고난을 받는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기뻐해야 할 것은 어지간해서는 부활의 영이 없으면 그런 고난 받으면 왜 고난을 주십니까? 나 이제 예수 안 믿는다, 나자빠질 건데 영광이 그들 절망 가운데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영광, 이것 참 어려워요. 십자가 속에 있기에 비로소 부활이 보이는, 다른 장소에 있으면 부활을 느낄 수 없는 깊은 절망 속에 있기에 그것도 이유 없이 절망 속에 있기에 비로소 처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소망이 뭔지를 제대로 맛봤기에 주위에서 어떠한 애매한 고난이 와도 그것은 고난 취급도 않고 웃으면서 넘길 수 있었다 말이에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 가지 선지자가 있습니다만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친구들과 이 네 사람이 무슨 주제를 가지고 얘기했느냐 하면은 하나님은 정의롭다는 주제를 가지고 싸우는 겁니다. 좋겠다 말씀도 안 듣고. 욥은 신은 정의롭다는 겁니다. 네 사람 다 공통점이에요. 그런데 네 사람 다 공통점이 뭐냐면 신은 정의롭다를 나는 안 죽어야 돼. 라는 그러한 하이데거적인 밑바탕 위에서 신의 정의를 논했습니다.
세 명의 친구가 뭐냐 하면 나는 정의로워.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처럼 죽어야 되는 고난을 안 주신거야. 왜 나는 욥, 너보다 더 착하기 때문에. 이것이 친구들의 이야기에요. 욥은 나는 사실은 너보다 더 착한데도 불구하고 이유를 모르겠어. 왜 죽음에 가까이 와 있는지. 차라리 나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차라리 하나님, 날 죽여주옵소서. 태어나게 말아야 될 것을. 참 만삭되지 못하게 그때 엄마 태중에 있을 때 안 태어나고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우사를 당하지 않고. 왜 하나님은 내가 정의롭고, 정의롭다면 나는 안 아퍼야 되고, 안 다쳐야 되고, 아무 병도 없어야 되는데, 왜 자식 열 명이 한꺼번에 다 한 날에 다 죽어버리고, 또 그 많은 재산이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리는가? 도대체 나는 하나님의 어떤 정의로움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나 이제 따지고 싶다. 곧 죽는데 내가 죽고 난 뒤에 내 몸을 벗은 후에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서 내가 한 번 따져보겠다. 도대체 왜 나에게 고난줍니까? 라고. 이것이 욥기의 전반부와 중반부에 흐르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철딱서니 없는 빌닷이 뭐라고 합니까? 네가 나쁜 짓 했기 때문에 벌 받았다, 착한 일 해 봐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완전히 출산드라예요. 이런 식언 없는 소리를 해대요. 이런 식언 없는 소리를 주의 복음이라고 간판 걸어가지고, 액자해 가지고 팔아먹고. 차라리 네가 신처럼 되리라는 그것을 적어 놓으라고. 선악과를 따 먹으면 신처럼 되리라 이런 것을 적어 놓지 아예. 아마 그것을 적어 놓으면 많이 팔릴 거예요.
정의롭다는 것을 하나님이 출발점이라는 것을 모르고 나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정의로움 했기 때문에 결국은 해답 없이 논쟁은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친구 엘리바스와 다섯 번째 등장하는 하나님은 인간에서 출발한 정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에서 출발한 정의로움이 있어요.
그 정의로움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네가 묘성, 그러니까 행성이죠. 은하계 만들 때 욥아, 네가 얼굴 들고 나한테 이야기해봐. 은하계 만들 때 나의 정의로움을 아느냐? 네가 하마가 애 낳을 때 어떤 정의로움으로써 애 낳는지 아느냐? 그러면 광야에 비 오는 이유를 아느냐? 광야에 왜 비를 내립니까? 밭에 비를 내려야지. 농사 안 되는 광야에 왜 비가 옵니까? 여기 밭에 눈 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밭 아닌데 눈 오는 이유를. 제가 설교 예화 들 때 전라도 눈 왔을 때 걱정은 많이 했지만 전화는 안 했습니다. 잘 감당할 줄 믿고 안 했는데. 이랬어요. 눈이 한 5센티미터 오면 사람은 기분이 참 실제적으로 좋습니다. 라라라라, 날 잡아봐라. 기분 죽인다. 엎어져가지고, 눈이 내리네. 이것이 30센티미터 쯤 오면, 교회를 가기가. 주여, 이것은 자비가 좀 지나치십니다. 아름다운 꽃도 과하면. 1미터쯤 오면 주여, 왜 이러십니까? 우리가 뭘 잘못을 했는데. 1미터 30센티미터 쯤 오면, 에이, 네 마음대로 해라. 나 당신 포기했다. 기도해도 안 되고. 일본은 4미터 왔거든요. 4미터 온 것은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묻습니다. 왜 4미터 왔습니까? 그 4미터 오게 하신 이유를 아십니까? 누구든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욥에게 눈이 4미터 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은 욥으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뭐냐? 우리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하는 겁니다. 입을 다물게 하고 그 뒤에 욥이 있던 이유는 욥은 입을 다물어야 될 입을 다물어서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주어야 될 증거물로 삼기 위해서 욥에게 그런 힘든 절차를 이끌고 오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계속 욥은 노홍철처럼 입을 나불댔어요. 왜 아픕니까? 왜 죽습니까? 자꾸 물었던 거예요. 모든 기호학과 언어학은 밑바탕에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나는 죽어선 안돼. 나는 아직도 죽을 시간이 안 되었어. 나는 더 살아야 될 가치가 있는 거야. 그것을 홍보하기 위해서 대저 알리기 위해서 심지어 신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피알하기 위해서 억지를 쓰면서 기도하는 것이 기도에요. 하나님 절 죽이면 안 됩니다. 인재 하나 버리는 겁니다.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똑 같은데 선지자 속에는 이유 없이 난데없이 주위에 둘러 싸여서 심한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아아, 나의 고난은 내가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의 세 친구 같은 경우에 다니엘의 세 친구가 왜 갑자기 불 속에 들어갑니까? 찜질방에 들어간다면 견딜 만한데 찜질방 정도가 아니에요. 다니엘의 세 친구를 붙들었던 그 사람 불에 타 죽었습니다. 들어갈 때 붙들고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까 불에 타 죽었어요. 자기는 뭔데 자기 세포는 단백질 아닙니까? 세포는 단백질로 되어있고,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되어있고 아미노산이 한 250도면 다 탈걸요. 다 타버려요. 머리카락 대 보세요. 지독한 냄새나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다니엘의 친구들은 머리카락도 안 탔어요. 어디 헐크닙까, 슈퍼맨입니까? 지 머리카락은 무슨 머리타락인지 안 타는 머리카락이에요? 그것 있으면 돈 벌겠다?
아까 얘기했습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안 먹고, 안 마시고, 40일 잠도 안 자고 건강한 모습으로 내려왔습니다. 이것을 인간의 물질을 연구해서 그것을 규명해서 차츰차츰 올라가서 그것을 모방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방법으로서 나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산이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인간은 예상 못하는 거예요.
오병이어. 떡을 뗐는데 또 생기고, 떡을 떼도 또 생겨요. 이것을 해 보세요 되는가? 안 되지요. 용돈 줬는데 또 생기고, 용돈 줬는데 또 생기고. 안 되잖아요. 주님은 그렇게 하셨단 말이에요. 이것은 주님께서 돈줄 능력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아예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 말이죠. 죽은 나사로를 건져냈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죽기 싫어, 죽기 싫어는 선지자도 마찬가진데 막상 그 절망 속에서 죽음 속에서 당겨가지고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미리 맛보게 하니까 이제는 살고 죽는다는 것이 나를 인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주님의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서 산 자도 살고, 죽은 자도 죽고, 죽었다 산 자도 주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등장합니다.
주님에 의해서 가능하다면 나의 주체 분열, 내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하고 라는 이러한 분열된 간격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잖아요. 물론 선지자가 늘상 이렇게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지만 선지자가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구나, 이미 나는 죽어도 살았고, 지금 살아있어도 사는 거구나 라는 것을 그들이 고백했기 때문에 그 고백이 주위의 어떤 모함과 비난이 와도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에 들어갔더니만 거기에 네 번째 사나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함께 춤추고 있었던 말이지요. 그것을 보고 놀랜 사람은 누구냐 바깥에 있는 느부갓네살 왕이 놀래 자빠졌지요. 뭐 이런 것이 있느냐? 느부갓네살 아들이 다리우스 왕이라고 유명한 왕이 있어요. 메대 파사. 완전히 너무 놀랐어요. 그것을 장, 필드. 어떤 새로운 영역이, 부활의 영역이 앞당겨 왔다는 말이죠.
지금 여러분이 과거의 이야기 신나게 듣고 있습니다. 지금 묻는 것은 과거 이야기로 끝이냐 그것은 하나의 십자가 부활의 영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떻게요? 바로 십자가로 다 이루어었음이 새록새록 그것이 느껴지고 믿어진다는 겁니다. 어떻게 살았든 간에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든 상관없이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죽어가면서도 사실은 산 채로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는 것이 느껴지겠지요.
그렇다면 주위에서 남 비난하고 남 그것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잠도 안 자고, 술 먹고, 고민 있다고 담배피우고 인간적으로 행위로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몇 초 동안. 2초 동안. 2초 끝나고 술 먹고. 오래 안 가니까. 오래 가질 않아요. 왜 그것이 오래 안 갈 수밖에 없느냐 하면은 그것이 오래 가면 내가 신이 돼야 돼요. 내가 너무 위대해져. 그러면 신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또 죽으면 또 안돼. 다른 사람이 죽으면 나는 살아남아야 돼. 항상 이런 일이 반복되는 고요한 화이트의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보면서 낯선 세계를 우리가 보게 됩니다. 부활을 통해서 실제로 이것이 현실인 것을 우리가 믿어지게 하여 주시고 그 현실에 이미 우리가 초대받은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