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함평수련회 강의녹취(4-1)
[일반] 함평수련회 강의녹취(4-1)
이름 : 이근호(IP:)
네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다시 쉽게 말씀드리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생각하게 하느냐 하면 나는 속죄되어야 될 나는 죄인이다. 라는 것을 우리 보고 규정하게 하는 겁니다. 아무리 착하고 잘났던 상관없이 너는 용서되어야 될 자야. 라는 것을 규정하는 거죠.
십자가에서 피가 나오고 피 뿌림으로 용서받는다고 했으니까. 첫 번째는 속죄되어야 될 대상이다, 이 점에 대해서 동의를 해야 되는데 이것 동의하기도 상당히 힘들죠. 힘들 땐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가 재밌죠. 사람이 성경 말씀이 있으면 그 성경 말씀대로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그것을 비스무리하게 지키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면 너는 죄인이야. 라고 했을 때 스스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기가 임의로 골라잡아요. 찾아냅니다. 자기의 경험상 모든 자기 행동, 이런 것을 남하고 비교해서 합니다. 하게 되면 어떤 오류에 빠지냐 하면은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일방적으로 자기가 이것은 나쁜 것 아니냐, 이것은 나쁜 짓이야. 자기가 다 추려냅니다. 자기가 추려낼 것은 추려내고, 자기가 정말 이것은 나쁘다 싶은 것은 남겨두고 추리거든요.
그렇게 추려내는 작업을 뭐라 그랬습니까? 성경 재편성,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가 임의로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어디서 잠시 멈추느냐 하면 부활의 영이 오면 잠시 멈춥니다. 왜 잠시 멈추느냐 하면 부활의 영이 오게 되면 부활의 영은 이미 용서받았잖아요. 죄냐, 죄가 아니냐 하는 분류하는 작업이 의미가 없지요.
아, 이것 또 실현해 보이겠는데 여기 지금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은 착하고, 이것은 선하고 라고 이야기하시면서 너는 도둑질하는 것은 나쁘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훌륭한 복 받는 짓이다. 라고 시편에 나왔더란 말이지요. 나왔던 시편 말씀과 도둑질하면 나쁜 짓이라는 것을 가지고 자기가 정리하는 것이에요. 나는 도둑질을 몇 번 했기 때문에 나쁜 짓, 나는 찬양대에 봉사하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착한 짓, 분류하고 있는데 이렇게 분류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 하고 분류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만약에 그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갔다고 한다면, 그러면 지금 분류를 하고 있는 이 작업은 자기가 천국가는 것하고 관계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상관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가고 있으면서도 분류는 하고 있단 이 말이지요.
방금 비참한 말로 죽었다 하지만, 안 죽고도 천국의 맛을 보게 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의 영이 오게 되면 순간적으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내가 이것 도둑질은 나쁜 짓, 이것, 이것 분류한 것 하고 내 구원받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 쓰잘떼기 없는 소리하고. 집어치우자. ( ) 라고 그 하는 것에 대해서 무의미하게 느끼고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죠. 몇 초? 2초. 2초 동안에. 그런데 그 2초 나머지는 뭐냐 하면 이 분류 작업을 하기 위한 성경의 구조의 나름대로의 재편성에 들어갑니다. 히브리서 어느 대목은 못 지켰고, 마태복음의 이것은 지켰고 이렇게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베드로전서 1장 10을 보시면 아, 이것이 어떤 뜻에서 그런가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절은, 이제는 아예 보기도 싫지요.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성경말씀을 보는가 안 보는가. 그런데 그걸 아시고 보라고 안 하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좋지요. 편하죠. 우리 편하게 삽시다.
선지자들은 구약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그 말입니다. 선지자들의 구약해석과 인간들의 구약해석과 어떻게 다른가? 다릅니다. 목사님 왜 다르다고 함부로 이야기합니까? 다르기 때문에 속죄의 대상이 됩니다. 이들이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속죄의 대상이 된다고 단정을 하느냐? 단정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 또 이야기할까요? 십자가 사건은 뭐라고요? 첫 번째, 어떤 인간이든 속죄의 대상이다. 그것을 그대로 여기다 대입시키는 겁니다. 어떤 인간이든 성경을 해석하든, 성경을 분석하든, 성경을 통째로 다 외우든 간에 그것은 뭡니까? 죄인이 되는 겁니다. 죄인 같으면 죄인 나름대로의 가만있지 않고 뭔가를 발동을 하지요. 발동한 것이 뭐냐면 나름대로의 구약보기, 나름대로의 구약해석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선지들도 마찬가지냐, 아니냐? 마찬가지죠.
그런데 1장 10절에 보시면, 진짜 한 번 봐야 돼요. 선지자 속에 이미 부활의 영이 들어가 있어요. 아까 부활의 영이 뭐라 했습니까? 안 죽어도 무슨 맛을 보는, 천국의 맛을 보는 영이 부활의 영이죠. 장차 일어날 부활의 영이 미리 앞당겨서 선지자의 속에 들어오니까 선지자들도 우리하고 똑같이 바보 등신들이고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한 그 순간, 몇 초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2촌데 아마 2분 더 될 거예요. 그 순간만큼은 부활의 입장에서 성경해석을 해댔더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구약성경이지만 역시 그것을 볼 때는 우리의 일방적인 선악구조 가지고 또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 따로 이야기하면 몇 시간해야 되는데 언어학에서, 다른 말로 하면 기호학에서, 기호와 언어가 다릅니다. 기호학은 하나의 기호가지고 그것에서 변별, 차이성을 이야기한다면, 언어학은 기호학의 한 분야, 또 어떤 사람은 언어학이 기호학보다 더 높다며 의견이 다르지만 의미를 찾아내는 거예요. 의미를 찾아내는데 기호학적으로 의미라는 것은 두 단어 사이의 서로 차이가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소쉬르라는 언어학자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어떤 방에 가는데 '남'이라고 써놨어요. 남쪽에 있는 방인가, 이것이 뭐 하는 줄 몰랐는데 그 옆에 보니까 '여'라고 써놨어요. 아아, 이것이 화장실이구나. 또는 화장실내지는 목욕탕이지요. 남녀 구분되는 것은 화장실 밖에 없잖아요. 남여를 통해서 그냥 남이라는 것을 분석하면 수컷이고, 여자 암컷 이렇게 되는데 남자 여자 함께 붙어 나오니까 여기선 하나의 목욕탕, 또는 화장실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등장하는 거예요.
소쉬르라 하는 것은, 의미라는 것은 단어가 의미를 대신할 수 없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회적인 랭귀지, 언어적인 법칙이 언어를,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한 거예요. 그러데 소쉬르의 이론을 일단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반발했던 후배 언어학자, 기호학자들이 많이 나왔어요.
그 사람들은 뭐냐 하면 기호와 한 단어가 다른 것이 아니고 텍스트, 처음으로 영어 썼지요. 텍스트, 하나의 문헌, 또한 재료, 성경 같으면 원자료, 이런 것이 그러니까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 아니라, 문맥 정도가 아니라 더 넓은 하나의 통째로 한 권의 책, 단절된 하나의 폐쇄적인 지식들 내에서의 하나의 긴긴 스토리들, 그것 전체를 파악해서 의미가 나온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생각은 성경해석학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었는데요. 그것이 뭐냐 프리셉트 성경해석학 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목적어, 주어, 동사 따져서 성경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앞뒤 문맥을 봐야 진짜 그 근원적인 의미가 나온다.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언어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베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더 발전된 해석학이 리꾀르인데, 리꾀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언어란 문맥을 통해서 알아,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그래서는 몰라. 어떻게 아느냐, 모든 언어라는 것은 은유와 환유로 되기 때문에 은유와 환유로 되어있다는 말은 합쳐서 비유죠. 비유로 되어있다는 말은 실체는 없다는 거죠. 실체는 없는데 의미를 어떻게 아느냐? 누가 이것을 어떤 식으로 의미를 푸느냐? 그 독자가 주시하는, 자기가 주입하는 선입견에 의해서 그것이 예술적으로, 언어적으로 다시 은유적, 비유적으로 파악될 때 독자가 보는 개별적인 본인만의 개성적인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황우석 교수였죠. 이것이 놀랍게도 그 텍스트가, 본문이 본문을 텍스트라고 하는데, 이것이 제가 이렇게 하면 문학적인 인문과학에만 해당되는 줄 알았죠. 과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배아가 배양되기 이전에 그것을 원천기술로 보느냐, 안 보느냐의 문제에요. 그 텍스트를 황우석 교수는 원천기술이 있다고 보고, 서울대학교 조사팀은 없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은 실제 있는 상황을 똑같은, 동일한 상황을 두고서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또 한 예를 들면, 달이 초승달되고 그믐달 되니까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하면 내 인생도 지는구나, 달아 같이 따라 죽을게. 똑같은 달인데 의미를 그렇게 두는 겁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창가에 가을이 되서 나뭇잎이 지는데 이상한 나뭇잎이 하나 있어서 겨울이 다 되도 안 떨어져, 눈 와도 안 떨어져. 이 무슨 고집이 그런 고집이 있나.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논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창가에 있던 환자는 희망을 갖는 거예요, 희망을. 그래 저 나뭇잎에 자기를 투영해서 니 팔자나 내 팔자가 같은데 이제 나는 저것 떨어지면 죽는다. 자자, 내일 되면 떨어지면 나도 죽어야지. 모레 떨어지면. 그래가지고 희망 생겨서 퇴원했다는 것 아닙니까?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그 단편소설이지요.
그런게 또 있어요. 노벨 문학상을 받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있지요. 고도가 없어요. 그것이 프로이드의 미지의 X에요. 우리는 알 수 없는 미지의 X로부터 자꾸 초청받아요. 첫째 강의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첫째 강의가 너무 어려워서 또 늦게 온 사람들이 있어서, 선생님이 늦게 오셔서 안 들었잖아요.
첫째 강의는 이렇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신이 어떻다, 창조가 어떻다 이런 것들이 다 결국은 혼자 노는 게임일 수 있는 지워버릴 수 있다는 거예요. 서른 두 살때 믿다가 사십 때 안 믿을 수 있고. 그러면 지워지는 것은 어디로 사라질 때에 있다가 사라졌다면 그 사라진 것은 어디에 모이느냐 말이죠. 그것이 바로 구멍이죠. 어두운 구멍.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자꾸 잡아당기는 거예요. 똑같이 해놓고 또 추가했죠, 제가. 알 수 없는 구멍으로 사라지는 이것을 무, 심연, 무로 사라지는 모든 인간은 다 인간이든, 코끼리든, 코스모스든 어떤 것도 전부 다 알 수 없는 무로 사라지는 거예요. 사라지면 허무하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알 수 없이 생겨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뭐라 했습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이러한 이상한 도덕적인 것은, 이것은 내가 그것이 옳고 그르다 내가 모르기 전에 내 마음속에 살인해서는 안 돼, 어떤 경우에도 살인해서는 안 돼. 라는 새로운 양심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실천이성이 또 생기더란 말이죠. 그것은 어디서 생기느냐? 그것은 알 수 없는 데에서 생기는 거죠. 그래서 인간은 진정 인간으로 하여금 조정하는 것은 알 수 없는 미지의 라지 X, 라캉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알 수 없는 X가 나를 현혹하고 유혹하고 내가 생판 예상치도 않는 것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을 유비쿼터스라고 하지요.
유비쿼터스는 뭐예요? 예상치도 않은 공간에 돌연 등장하는 거예요. 이것은 붙잡을 수가 없어요. 붙잡으려면 여기서 튀어나오고 저기서 튀어나오고 랜덤, 임의대로 튀어나와 버려요. 유비쿼터스가 상업적으로, 과학적으로 되게 되면 뭐냐 하면 원하는 지점에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터져라, 휴대폰' 이런 것. 어떤 것 지점에도 가능한, 원하는 이것을 유비쿼터스라 하는데 이것은 옛날에는 붙잡아서 훈련시켜서 유용한 기술로 삼자는 그런 시대라면, 이제는 인식이 바꿔서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 무자유적인 것이 결국 하나로 모여지면 하나의 유용할 수 있다는 인식이 바뀌는 카오스 이론이죠. 게오 사다끼의.
정확한 대류가 세탁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렇게나 한 그런 대류가 정확한 대류보다 2.5배 더 세탁 효과가 더 큰 혜택이 있다는. 지금 여러분 이 이야기 믿습니까? 하여튼 대충 비슷하니까.
항상 우발적인 요소가 등장하면 기대했던 2배가 아니라 3배, 4배도 할 수 있는 그것이 있단 말이에요. 모험이 기대하라가 아니라 모험을 즐기라. 대체 무슨 이야기하다 이렇게 되었었습니다만.
알 수 없는 미지의 X가 내 운명의 사슬을 쥐고 있다면 결국은 내가 예수 믿는다고 붙잡고 있다 할지라도 내일 되어서 스스로 취소할 수 있는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진정한 진리라는 것은 현재 나타난 현상, 진짜 뭔가 있음, 그 있음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 있음이 현재 우리를 있게 한 것이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라는 것이 제가 이야기한 것을 다시 설명해도 또 모르겠지요. 어쨌든 헛갈리지요. 이것이. 지금 무슨 이야기하다 자꾸 ㅎㅎㅎ
그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 번 봅시다. 언어학, 해석학 문제인데,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다머라는 사람은 자신의 선입감이 개입되지 않는 해석은 없다, 이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선입감, 불트만은 선이해라고 했는데 자기의 선이해가 개입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선 이해가 뭐냐 했을 때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인간의 모든 선이해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죽음의 충동에서 나온다. 죽음의 충동이란 뭐냐 하면 안 죽으려고 발버둥치는 그것이 과학을 하든, 예술을 하든, 만화책을 읽든. 성경을 읽든 그것이 다 튀어나온다는 것에요. 안 죽으려고.
지금 철학자들이 제일 풀 수 없는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살아있는 내가 몇 십 년 후에 내가 꼭 죽어야 되느냐 이 문제입니다. 그것에 대해 누가 속 시원하게 해답을 안 해 준다 말이죠. 아무리 건강해도 내가 없는 순간이 오잖아요, 그때 왜 내가 없어져야 되느냐 말이죠. 왜 내가 없어져야 되는지 모르지요. 여러분 모르지요. 안다하면 안 됩니다. 모르잖아요.
그 모르는 것이 뜨개질로 나오는 거예요. 모르는 것이 겨울 63 과학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 모르는 것이 부동산 투기로 나오고, 그 모르는 것이 애들 가르치는 교사로 나오고. 그런 행동이 어떤 사물을 보든 어떤 인생 전체가 본문이라 할 때 그것을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해석으로 튀어나온다 이 말이에요.
그것을 노리는 것이 보험회사이죠. 알리안츠, 생명보험 하나 드시지요. 또 보험회사, 벌서 3가지나 넣었습니다. 그것과는 다릅니다. 5630가지 모든 각종 질병을 하루에 300원, 한달에 이만 육천백 얼마하면 환급받는 것도 있습니다. 건강보조금 오백만원 줍니다. 여성 병원까지 다 해결됩니다. 전부 다 이렇게 할 때 그 보험회사는 그것을 왜 하느냐 하면 보험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한 건수 올려야 집에 있는 가족들이 살아요.
보험을 들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동안 내가 잊어 버렸던 것을 보험회사가 일깨워 주는 겁니다. 그렇지. 이것이 나의 문제점이었는데 그 문제점을 다소나마 완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안심책이 될 거라는 그동안 잠자고 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몸부림을 다소 해결하는 쪽으로 만다는 겁니다. 그것이 둘 다 같이 세상을 죽음이라는 바탕에서 봤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존재자의 이론이에요. 그 어려운 책의 애기가 이겁니다. 죽음이 왜 죽는지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에 대한 몸부림들이 우리 인생의 기반을 이룬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