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함평수련회 강의녹취(3-2)
[일반] 함평수련회 강의녹취(3-2)
이름 : 이근호(IP:)
왜 그런 짓이 나오느냐 하면은, 왜 복음을 모르는 목사들이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면은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이용하자는 거예요. 당신들은 왜 교회에 왔어요? 나쁜 짓을 해서 가정에 우환이 생겼습니까? 아아, 착한 일을 하면 복줄 거야라고 계산했죠? 그러니까 그 계산을 제가 아니까 여러분의 심보를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절에 다녔습니다. 이제 교회로 바꿔보세요. 교회를 바꾸시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여러분들은 교회를 다녔다, 예수 믿었다는 착한 일했기 때문에 착한 일에 대한 후한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고부간의 갈등, 애가 성적이 갑자기 떨어진다, 이유없이 머리가 아프다, 열 가지의 모든 어려움, 이사 날자는 언제냐, 혼인빨은 되느냐 이런 문제들을 여러분들이 복 받게 될 겁니다. 간증집회, 차범근이 나오고, 김제동의 엄마 나오고, 이 사람은 김제동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나, 김제동이 떴잖아요. 에에에 웃으면서 떴잖아요. 김제동의 엄마 나오고, 간증집회하고, 한일전 기도해서 한 골 넣고, 그런 인간들 쭉 해가지고, 아, 나도 목사 시키는 대로 법 지키면 복 받겠구나.
이 전부가 뭐냐 하면 속죄 되어야 할 이유를 십자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악적인 개념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에 목사는 그걸 이용해서 돈 뜯어먹고. 죽이 맞지요. 잘 맞지요, 죽이. 그러면 왜 그 교인들이 십자가 복음 이해 못하느냐?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그 부활의 증거물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남아 있는 것은 이 두 가지가 남아 있거든요. 이 두 가지는 아까 프로이드 이론에 사용되지요. 그러니까 프로이드에 의하면 사람은 착해야 되는데 착한 자에게는 상이 주어지고, 나쁜 짓 한 자에게는 벌이 주어진다 이 말이죠. 지금 내 가정환경이나 내 성장과정에서 내 뜻대로 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꼬이니까 이걸 벌 받은 걸로 보는 겁니다. 벌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니까 이 벌 받은 것은 착하면 이것이 상쇄가 되겠지요. 상쇄가 되기 때문에 이왕 착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종교가들에게 자문을 받아서 이제부터는 나쁜 행동을 버리고, 술, 담배를 끊어버리고 착한 사람이 될 때는 따라서 그동안 놓쳐버린 모든 축복을 한꺼번에 회수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을 칸트는 엄청나게 공격한 것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순수한 실천이성에서 바르게 살아야 될 것을 자기 이기적인 야망과 행복과 어떤 이득을 위해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의 경험상 자기 일방적으로 착하다, 그르다를 자기 살아온 경험상 재조립하는, 재구성하는 일방적인 착오의 착각들의 연속일 뿐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칸트한테 박수 한 번 쳐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남들 보기에 악한데 본인은 이 정도만 해도 선하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선과 악이 어떻게 구분되느냐 하면, 자기가 살아온 자기 나름대로의 폐쇄된 성장과정에서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것에요. 범죄 재구성이 아니고 선과 악의 재구성입니다. 지난 여름에 김광석의 노래 한 번 들었지요. 김광석이 1월 6일 돌아가셨습니다. 10주년 되었어요. 그립다 김광석, 보고 싶다 김광석, 김광석은 살아있다. 뭐, 온갖 것이 다 나오는데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왜 자꾸 서른 살에서 멀어지느냐, 그 사람은 서른 살에서 정체되었어요. 서른 살을 고비로 보고 서른 살에서 내려가면, 실제로 죽은 것은 서른 살에 죽었는가, 서른두 살에 죽었어요. 서른 살에서 멀어지는 것을 마치 행복을 놓친 것으로 보는 거예요. 그 사람의 인식관은 뭐냐, 서른 살에서 스톱된 겁니다.
몇 십 년 전에 독일 사람인지 세계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이 있어요.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 사람이 지은 책 중에 '양철북'이라는 책인데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키가 크지를 않아요. 커지지를 않고 항상 어린아이인데 그 어린아이가 이 세상 모든 권력자들의 위선과 기만을 지적할 수 있는 살아있는 천사처럼 그렇게 묘사하는 것이 그 소설의 테마입니다. 소위 기성세대의 오만과 가식적인 모습들, 정략적인 행동을 하면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는 핑계되는 그 모습. 귄터 그라스
서른 살이 이상적이에요. 뭔가 이상적인 것, 환타지한 이상적인 것이 있다는 자체가 이 사람은 자기 본색을 지금 숨기고 있다는 겁니다. 공중에 나는 새가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것을 손에다가 쥐어 보세요. 똥 싸지요, 더럽지요. 그것이 공중에 멀찍이 있을 때는 그렇게 아름다워요. 눈 오면 생각나는 동화 가운데서 성냥팔이 소녀 있잖아요.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어떤 집에 케이크에 불 켜 놓고, 하하 웃고 그런다고요. 그런데 애는 벌벌 떨고 있잖아요. 왜 나는 무슨 팔자로 태어나서 저처럼 웃음이 없고 나는 슬프냐.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막상 그 아이가 그 집에 살아보지, 그 웃음이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가정이 웃은 것은 그때 곗돈 타가지고 그래요.
어떤 집에도 웃음이란 계속되지 않습니다. 물론 코미디할 때는 자꾸 웃겠지만. 놀랍게도 웃음은 깊은 절망이 있었기에 비로소 나올 수 있는 것이 웃음이에요. 깊은 절망. 그래도 목사님, 우리는 절망이 있는데 웃음이 없어요. 아직 절망을 덜해서 그래요. 더 깊은 절망이 있어야 웃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상적인 것을 나의 본질로 보는 거예요. 이상적인 것을 그리워하고, 참된 선을 그리워한다고 내가 곧 참된 선한 자라고 일치시키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인간은.
그런데 이것이 언제 깨지냐 하면 배고플 때, 집안에 돈 없을 때. 집안에 돈 없을 때에요, 음악, 예술 다 사치스런 거예요. 음악, 예술, 함평수련회 다 배부른 소리에요. 집에 부도나 보세요, 여기 오는가? 안 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자기의 한 쪽 면을, 한 쪽 면이란, 말이 안돼요. 두 개의 자아에요, 숨기면서 골치 아픈 게 뭐냐 하면 자아가 분열되어서, 주체가 분열되어서 선을 향하는 선 주체와 악 주체가 있는데, 더 골치 아픈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의 주체가 등장하면 다른 주체는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주체가 마치 나와 일치되는 줄 압니다.
그때 어떤 예상치 못한 사건이 나면 이 주체가 깨져버리죠. 깨질 때 분열을 일으키면서 그동안 잠자고 잇던 제2의 주체가 대신해서 등장하지요. IMF가 터지고 나서 자살하려다가 그래도 가족이 있다면 나는 아직 살 만한 능력이 있어. 라고 다른 주체를 대체하지요, 그럼 IMF 터지기 전에 진작 그렇게 하지, 꼭 터지고 난 다음에 그렇게 한다니까요. 그리고 난 뒤 좀 장사 잘 되면 갑자기 가족만 있어도 좋지, 그것 버립니다. 역시 나라는 것은 그 정도로 만족 안 해. 나는 더 큰 사업을 벌이도록 주께서 역사해 주셨어. 이것이 또 다른 것을 삼아요. 가족이 어떻다는 것, 치워버리고.
얼마 전에 KBS2에서 역도산이라는 영화를 했어요. 역도산할 때 미끼도산 그 인간이 어려울 때 일본 아내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습니까? 나중에 미국 가서 성공하고 난 뒤에 자기 아내를 헌 개 취급해서 버렸잖아요. 끝까지 자기의 수준에 맞는 여자를 내가 지금 와서 선택하고 싶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인간성이 사실은 어려울 때도 이미 잠재돼 있었어요. 있었는데 성공이라는 그 계기를 맞이하니까 그 무성진 껍데기가 벗겨지면서 자기의 본래의 악성이 도출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나는 때려 죽여도 도둑질 안한다하는 것은 그것은 뭐냐 도둑질하는 기회를 못 만났기 때문에 도둑질 할 수밖에 없는 자아가 아직 생색을 낼 때가 안 돼서 그래요. 육이오사변과 같은 전쟁이 터지고 하면 그때는 짐승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짐승입니다. 우린 친구아이가라고 좋아하다가. 우리는 서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해놓고는 그런데 보증 서 달라면 다 도망가 버리죠. 동창회 나오는 것은 전부 다 보증 설 사람 대상 구하려고.
그래서 이제 어려운 것 해봅시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증거가 부활인데 부활은 이미 십자가 사건을 떠날 수 없고 여기에 한 파트로서 부활이 삐져나온 거예요. 십자가 상황이 부활의 면면으로 떨어져 나오는데 십자가 사건은 눈에 보이는 사건이고, 부활은 눈에 안 보입니다. 눈에 보이질 않기 때문에 십자가의 의미를 바라보고 아, 내가 죄인이구나 알았다고 해서 성도가 아닙니다.
이것이 어려워요. 나는 십자가가 내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나는 피 뿌림을 구원받는 것을 믿어. 라고 해서 그 사람이 성도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부활의 영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십자가를 이해해 버리면 이 십자가를 알았다는 것이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 아까 두개의 주체 가운데서 선한 주체에 하나의 업적으로 실적으로 저축이 돼요. 나, 하나님, 저 착하지요. 하나님께서 너 뭐 착한데. 십자가 믿어 줬잖아요. 십자가 믿고 예수 이름 부르면 구원 얻는다면서요. 내 친구는 안 믿는데 교회 나와서 오늘부터 나 십자가 믿기로 했어요. 저 착하지요. 그러니까 이 주체가 봉합되고 없어 사라진 것이 아니고, 이 새로운 착한 일을 쭉 해왔는데 그 중에 하나가 더 예수님 믿어주고, 하나님 믿어주고, 하나님은 창조자십니다, 사도신경 다 외우고, 주기도문 다 외우고, 학습세례 받고, 집사되고, 장로되고, 목사되고 이것이 선한 실적 가운데 하나 들어갑니다.
그래서 위선적인 것은 여전히 있지요. 그리고 하는 말이 이렇게 가정 경제상태가 나아지면 아무 일 없는데 갑자기 불교에서 기독교로 바꿔가지고 예수 믿었는데 갑자기 집안에 우환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예수 믿고, 목사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집안에 우환이 생깁니까? 라고 대들지요. 예수 믿어주는 착한 일을 했는데 왜 착한 일을 한 보상이 약속대로 안 나타납니까? 주님은 부도수표입니까? 왜 간증하는 다른 집사님은 복 받았다는데 왜 그런 복이 우리 집에는 안 옵니까? 나 이제 교회 그만 다닐까보다. 나는 이제 그만 속을래.
경기도지사 있지요? 이름이 뭡니까? 손학규,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황우석 교수한테 끝까지 속아볼 랍니다. 그 말 하기 전에 제가 사석에 이런 말을 했죠. 지금 돈이 있다면 황우석 교수에게 투자해라. 1000억 있다면 1000억만 투자해라. 황우석이 밟힐 때 지금이 호기니 지금 투자해라. 내 말 들었는지 2000명 더 증가했다 하지요. 손학규 지사는 황우석 교수에게 끝까지 속아 볼랍니다. 끝까지. 그것 경기도에서 투자했거든요. 해소 절대 안한 답니다. 투자 더 할 거예요. 그 사람은 과학이 뭔질 아는 거예요. 과학은 천 번의 시행착오가 없으면 과학이 결정될 수가 없습니다. 시행착오 중에 하나가 이런 사건이에요. 앞으로 999번 더 해야 돼요. 황우석 교수는. 이것이 과학이에요. 지난 과학의 발전이 다 그렇게 해서 된 겁니다. 다 미친 소리 듣고, 발명가들 보세요. 집안 다 말아 먹었어요. 발명가들 중에 돈 번 사람들 없습니다. 에디슨 있잖아요? 에디슨의 논문의 2/3가 남의 겁니다. 컨닝한 거예요. 자기 건 몇 개 안돼. 에디슨이 천 몇 개 했는데 그중에 2/3가 남의 거예요. 고소당하고, 고발당하고, 우사 당했습니다. 나중에 죽을 때 돈 다 날려 버렸어요. 그 위대한 에디슨이.
교회 다니고, 목사 말 듣고, 하나님 앞에 예수 믿고 창조주인 것을 고백하고 요한 계시록까지 몽땅 믿었다, 이것이 선한 실적 가운데 포함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만약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항상 이걸 근거로 들이댑니다.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날 배반했습니다. 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는데 주님은 날 배반했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렇게 있다는 것은 아직도 부활이라는 것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놀랍게도 십자가 믿고, 믿었지, 이젠 부활을 믿어야지. 라고 부활에 대해서 부활이 주어지는 이런 갭이 사라지고 예수님 때문에 존재한다는 그것은 인간적인 힘으로 절대로 부활을 그것을 그대로 현실화시킬 수 없다는, 이것이. 그래서 부활다운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택한 자에게만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제 십자가 믿었으니까 부활까지 믿어야지, 이것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인식론에서 지나간 사건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가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난중일기에 나왔다, 나는 믿습니다, 언제든지 믿습니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지금도 살아있다, 미쳤나, 지금 살아? 죽었는데.
부활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을 잡아, 믿어라 이것이 아니고 지금 살아있어서 너에게 이 두 가지의 갭을 죽이는 일을 실제로 줬음을 네가 믿어라. 이렇게 되거든요. 이것은 실제로 살아있단 말이죠. 십자가 사건은 하나의 과거의 단회적 사건이지만 그 증거는 역사 끝날 때까지 계속 가요.
미리 이야기합니다만 베드로후서 3장 한 번 봅시다. 아까 몇 시부터 시작했지요, 전 시간을 지킵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시간을 지켜요.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산 것 같이 살라는 겁니다.
집사님은 혹시 아내와 몇 년 살았습니까? 20년 살았습니까? 그럼 계산을 해 봅시다. 하루가 천년이니까 365*1000=365000년이지요. 365000*20년, 이건 엄청납니다. 이제 헤어져도 괜찮습니다. 이제 그만 사셔도 무리 없어요.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산 것 다 한꺼번에 사는 것처럼 살아라.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도에게 하루라 하는 것은 천년에서 일어난 일을 한꺼번에 하루에 다 일어나게 할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런데 집사님이 이혼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그 다음에 나옵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그러니까 20년을 살았으니까 불과 15분 어치 산거예요. 더 사세요. 하루 정도 살고 헤어져야지. 15분 정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아무리 길게 살아도 주님 앞에서는 길게 산 게 아니에요. 하루치, 어느 인간이 천년을 삽니까? 최고 장수하는 것도 천년을 못 넘기는데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하루살이에 불과해요. 하루살이가 자기가 뭐 진리를 안다고, 인간에 대해서 안다고, 자기가 뭐 안다고. 샛별이 떠올라야 알지 자기 능력으로 어떻게 남의 사정 다 알고, 자기 사정 다 압니까? 기껏 하루밖에 못살 인간이.
그러니까 베드로전후서의 이 신학 실력은 사도 바울을 능가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피 뿌림 받아서 한다는 것이 어디서 나오냐면 바로 히브리서에 나오잖아요. 히브리서 7장에 보면 "피뿌림이 없은즉 사함이 용서함이 없다" 이 말이죠. 베드로가 이미 그 정도는 꿰뚫고 다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의 편지들도 나의 이 편지처럼 영적으로 풀어야 풀리지, 사사로이 풀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이미 베드로가 사도 바울이 어떤 이야기한 것을 다 알고, 다 동의하고 있고 그 정도는 기존 교회에서 성도라면 다 알아 먹는다고 생각하고, 그 위에다가 이 험악한 환난의 시대에서 그럼 어떻게 또 살아야 하는가를 추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책이냐 말이죠. 우리의 기본 모든 것을 모두 초월하자.
조금만 더하고 쉽시다.
부활이라는 것은 나는 왜 악하냐, 나는 왜 선하냐, 곤고하냐? 라고 고백할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위치에 있던지, 어떤 자세에 있던지 간에 어떤 것도 다 예수님의 부활했음, 그것도 그냥 부활했음이 아니라 아까 십자가에서 두 번째 한 것이 뭡니까? 속죄 끝냈음, 속죄 완료했음, 피 뿌림으로써 죄 없어졌음을 증거하는 증거용으로 지금 살아있다. 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능력은 부활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길어요. 그런데 안 길어도 너무 섭섭해 하지 마세요. 1초라도 백년이니. 1초해도 백년짜리고, 10년 해도 1초짜리가 될 수 있어요.
어떤 분이 이런 애기해요. 한경직 목사, 그 유명한 목사가 죽을 때 그 옆에 수종드는 권사님이 목사님 성경보시고, 찬송가 한 번 해보세요. 한경직 목사가 아직도 그런 것 믿나, 아직도 그런 것 믿어. 갖다 버려. 아주 훌륭한 고백을 했어요.
글쎄요. 그걸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연세가 많아 가지고, 인간은 어떤 본성이 있다, 하나님이 말씀 들어오기만 해봐라, 내가 차 버린다는 악한 감정, 신에 대한 반발성,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 하나님이라면 진짜 자다가도 듣기 싫은 귀 막고 싶은 그러한 충동, 그 충동이 그동안 잘 걸러 냈었는데 그동안 윤리, 도덕 훌륭한 성격 때문에 잘 억누르고 있었는데 그 억누름이 노후 되어가지고 스프링이 고장나 버려서 아직 그런 것 아직도 믿나, 미쳤나 집어쳐라. 그래서 내팽겨 칠 수 있는데 그것 가지고 천당갔다, 지옥갔다 할 수 없고 평소에 그분의 그 됨됨이를 봐야 되는데 저는 평소의 됨됨이를 봐도 믿지를 못하겠어요. 도대체 신자인지 구분이 잘 안돼요.
저도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많이 듣고 하지만 설교 들을 때마다 이 사람 신자아닐 것 같은 느낌이 오히려 더 많이 들어요. 돌아가신 분이지만.
저도 내가 죽고 난 뒤 이근호, 그 사람 신자 아니지 싶어. ㅎㅎㅎㅎ.
마찬가지로 할 수 있잖아요. 이상한 소리했는데 쓸데없이.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