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27:62-66 (무덤 지키기)
Re..마 27:62-66 (무덤 지키기)
이름 : 이근호(IP:)
무덤 지키기
2006년 1월 22일본문 말씀: 마태복음 27:62-66
27:62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27:63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27:64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하나이다 하니
27:65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27:66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신이 인간의 명령을 들을까요? “부활하지 마”라고 인간들이 신에게 명령한다고해서 신이 그 인간들의 지시에 따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싶어할까요? 그것은 누가뭐래도 예수님이 가짜 메시야 인줄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짜 메시야라고 그들이 확신하는 이유는, 평소에 그들이 알고 있었던 참된 신과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되새겨 봐야 합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과 예수님과 어떤 점에서 차이나는 하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신을 생각할 때, 자신들이 품고 있던 신관념과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열심히 신을 위해 살면 복을 내리고, 신에게 무시하면 인간들에게 화를 내는 심술쟁이 신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신들이 결국 인간들이 만든 것이 됩니다.
실제로 옛날 사람들은 신을 그런 식으로 창안해 내었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치는 것은 제우스 신의 변덕이라고 보았고, 하루의 낮과 밤은 아폴론 신의 여행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다에 풍랑이 이는 것은 포세이돈 신의 분노심의 표현이라고 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자연 현상을 신의 감정과 연결시켰냐 하며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이 대자연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이 자연의 말을 잘 순종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신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들에게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난데없는 감정을 처리하기 위한 조치에 불과합니다. 즉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셈입니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형상을 입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신들이 있다고 이야기들해도 인간들은 그 신을 겁내지 않습니다. 이미 신이 어떤 식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도리어 인간의 손아귀에서 놀아납니다. 신들의 집합이 곧 자연의 전부가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관점에서 확고한 진리라는 것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 진리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에 항상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 그런 원리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진리란 되풀이해도 항상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흘 만에 부활되는 일은 절대로 되풀이 될 수 사항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서 사형을 집행해도 또다시 그 사람이 사흘 째 되는 날 부활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소에 그 되풀이 되지 않는 바를 진리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은 죽었다가 말씀대로 사흘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겁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 뿐만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많이 전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들의 정례적인 종교 의식으로서는 절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과 인간들은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에 일치될 수 없이 저주받아야 될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과 그리고 예수님 본인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아니하면 지옥불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과 특히, 종교 세력가들은, 그동안 반복적인 종교법으로 질서와 안정을 잡아왔기에 그것을 마치 신이 허락하신 진리체제라고 봤는데, 이런 이야기까지 다 악마적인 것으로 예수님으로부터 공격당할 요소라고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즉 졸지에 그들은 예수님의 출현으로 인해 지옥 갈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뿐만 아니라 그 전에 이야기한 모든 세상관과 천국관까지 전부 거짓이라고 되레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서 사람들은 예수님은 밀치고, 또 밀치고 또 밀치게 됩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이라는 벼랑까지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예상하신 바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이 얼마나 저주받을 세상인 것임을 확정지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까지, 가짜 하나님의 메시야임을 보여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풀이했습니다. 즉 “예수는 가짜이니까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예수라는 가짜 메시야를 저렇게 색출하여 처벌했다”는 식으로 백성들에게 유포시켰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찝찝한 일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그것은 바로 과연 예수라는 작자가 실제로 죽었다가 사흘만이 되살아났다는 유언비어가 사회에 확산되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종교국가가 다져놓은 절대적 질서 체제가 문란해져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점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군인들을 시켜서 예수님의 무덤을 큰 돌로 봉인하고 파수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신이란 결코 무덤에서 되살아나와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즉 이 인간 사회에서는 인간의 허락없이 신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오늘날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는 과학시대에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입니다. 이것은 모든 진리는 되풀이해 볼 때 동일한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로만 확정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소에 남기신 말씀이나 일이나 십자가나 부활은 모두 이 사회 안에서 되풀이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변화산에서의 변화를 그 산 위에 올라가면 누구나 동일한 영광을 맛볼 수 있을까요? 결코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지만 다른 사람이 똑같은 바다 위에 걸을 수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반복될 수도 없고, 그리고 누구에게도 동일한 결과가 나올 수 없는 이런 사실이 이 세상에서 유통되고 유포된다면 이 세상의 체계와 토대가 의심스럽다는 판결이 나오고, 또한 참으로 예수님 말씀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행함과 자신의 노동의 열매만을 절대화 시키고 싶어합니다. 여기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을 보고 죄인이라고 규정지은 예수님의 세상관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고개 숙여라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나올 것이고, 거짓된 성도라면 “나를 돈벌게 해주고 죽어서 좋은데 보내준다는 조건하에서는 나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나섭니다. 이렇게 되면 거짓 십자가입니다. 참된 십자가는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밀려도 상관하지 않는 구원의 능력이 나온다고 믿는 십자가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피가 참으로 주님의 십자가 피와 같은 피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뭐래도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빠져나와서 우리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