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서울 경기(의존교회) 중생,칭의 1-2
Re..서울 경기(의존교회) 중생,칭의 1-2
이름 : 이장우(IP:)
05 서울 경기(의존교회) 중생, 칭의1-2
05. 10. 10 강의 이근호목사
첫째 시간이 어려웠기에 다시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다시 태어난다. 거듭난다는 말씀의 취지는 그것이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서 천국가고 싶다고 하여도 그것은 기껏해야 니고데모 밖에 안 되고, 그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본성에 불과하지 예수님이 그것에 호응하여 그래 내가 다시 태어나게 해줄게! 라는 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에 그들이 원하지도 않는 나라를 일방적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난다는 것은 그 당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하나님이 다시 태어나게 해주면 이유 없이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 된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나의 구세주는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입니다. 그 고백을 어디라도 뛰어다니면서 나의 구세주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한테 얼마나 얻어먹었느냐 얼마나 복을 받았느냐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복 주든 안 주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먹든지 마시든지 나는 주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해 주신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렇지 않고 가짜로 거듭난 사람은 무엇이 남아 있느냐 하면 큰 글자로 씁니다. ‘공포’ 이 공포, 혹시 내가 실패하면 어쩌나 망가지면 어쩌나 하는 이 공포심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내가 예수를 잘 못 믿은 양 또는 내가 예수를 잘못 선택한 양, 혹은 내가 예수를 잘 믿어야 하는데 잘 못 믿었구나! 하는 이런 자책이 있다면 그 공포를 메꾸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 믿었든 잘 못 믿었든 상관없이 나로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지 내가 잘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짜 거듭난 사람은 왜 공포심이 없는가 하면 내 행동에 따라서 구원된 것이 아니고 그냥 애굽에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듯이, 지옥을 향한 넓은 길로 가고 있는 나를 좁을 길로 데리고 왔기에, 이것은 내 속에 예수님의 작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믿어지기에 내 잘잘못과 관계없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내 잘잘못과 상관없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심지어 공포심이 있고 없고 와 상관없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내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선택하여 세웠나니! 라는 말씀이 요한복음에 15장에 나오지요! 그러므로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의 자신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어제 오전 설교에 이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우리 인생의 밑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결부가 되는데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하수구에서 벌레가 기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하수구를 덮어놓았는데 그 구멍사이로 지네 같은 벌레들이 바깥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알게 되는 것은 내가 사는 이 동네의 밑바닥에 또 다른 동네가 있었구나! 이 밑에 벌레들이 사는 동네가 있었구나! 하면서 그 벌레가 기어 나오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 디스 이즈 벌레! 내가 청소하였는데 이 벌레가 어디서 나왔을까? 이 밑에서 나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땅위에서 살아가는데 가끔 하수구처럼 밑에서 무엇이 올라오는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는 것이 나옵니다.
성도는 자기가 잘 믿어서 복 받은 줄 알았는데 자기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나를 장악하고 있는 내가 딛고 있는 밑바닥의 세계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위에서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가끔 십자가의 공로와 고난과 아픔이 하수구에서 기어 올라오듯이 기어 올라와서 성도가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지! 내가 잘난 것과 상관없이 인도받는구나 하는 것을 가끔씩 압니다. 하루에 한 2.5초씩, 가끔은 압니다. 생각 안 나는 것 같은데 가끔 생각이 나고, 나머지기 23시간은 두려움으로 떨면서 있다가 요 순간이 올라오면 갑자기 속이 시원하지요!
바보같이 내 잘잘못이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내가 지난번에 교회에서 저 집사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데,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데 그것 때문에 밤잠을 못 자며 고민을 하고 다음주 저 집사를 만나면 내가 얼굴을 들 수가 없네!
반대로 내가 저 집사와 안수를 하는데 손을 털어버리니 내가 밉다는 말인데 내가 그 교회 갈까 말까! 한번 해볼까 말까?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가 밑에서 십자가가 올라오면 세상에 저런 집사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그것도 모르고 내 자존심을 생각했구나!
전에 서울에 오신 정판옥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밥 시키면 반찬도 같이 나옵니다. 너무나 제가 은혜를 받아 가지고 제가 써 먹었습니다. 예수 믿었을 때에는 혼자 예수 믿는 줄 알았는데 교회 와보니 반찬 같은 사람이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밥만 시켰는데,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나만 구원받는 줄 알고 교회 왔는데 와보니 내가 시키지도 않은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반찬들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다 하수구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요 생각이 하루에 몇 초? 2초, 주일날은 몇 초? 6초, 주일날은 설교 듣느라고 조금 늘었다가 예배 마치고 일어서면서 한바탕 싸우고 일어나고, 이런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구원하심이 우리 인생의 전부를 이미 결정하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여기서 공포가 오더라도, 지금 이 지상에서 우리가 공포에 질리더라도 어떤 실수와 실패, 자식 10명이 다 죽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욕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긁는다 할지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욥은 믿었습니다.
무엇을 믿었습니까? 밑바닥의 주님의 은혜로 이 고난이 왔음을 욥이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나한테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도 예수님은 나의 주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 집안에 어떤 파탄이 온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십자가 지신 분은 내가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 지셨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어떤 짓을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지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제 이해가 좀 되셨습니까? 거듭나서 팔자한번 고쳐볼라고 아예 그런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와서 팔자 한번 고쳐 보겠다는 생각을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번 시간에서는 칭의, 의롭다 함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거듭남에 대하여 잘 모르면 나중에 다시 하면 되고, (녹음기 꺼질까봐 두렵네! 이 알 수 없는 공포!)
칭의라는 말이 성경에서는 없는 잘못된 말입니다. 성경에서 칭의란 말이 없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칭의의 칭이란 말은 칭해준다. 죄인인데 의롭다 해줄게! 그런 뜻입니다. 북한을 참칭한다고 할 때 가짜로 칭하여 준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참칭이지요! 사실은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일단 의롭다고 해준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로마서의 칭의라고 하는 것은 재판정의 법정적 용어인데 그 사람의 죄를 다 끄집어 내어놓으면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제 나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때 갑자가 판사가 너를 의인이라고 법적으로 칭하노라고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을 명목상 의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있어서 어려운 말인데 이것을 또는 법정적 칭의라고 합니다. 이런 법정적 칭의를 말하게 될 때 문제점이 무엇이냐 하면, 실제적으로 의인은 아니고 다만 명목상 이름뿐인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 50년대 60년대의 우리 부모님들은 딸은 순해야 시집을 잘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고모의 이름도 순하라고 순자라고 지었습니다. 봄꽃처럼 활짝 피어라고 춘자, 똑똑하라고 영자, 이렇게 이름을 지으며 순자로 지은 것은 순하게 살다가 순하게 시집가서 그냥 남자 하나 잘 만나서 안 굶고 살면 된다고 보았습니다. 옛날에 하도 식구도 많고 굶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순자라고 이름을 하였는데 그런데 그 순자가 순하지 않습니다. 사납고 표독스럽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그 분을 계속 순자라고 불러야 됩니까? 정말 순자라고 부르기 싫지요!
그러면 이름과 내용을 실제 같이 하기 위해서 맹렬하다고 맹자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순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름이 실제 내용과 다르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붙여진 이름이 실제의 내용과 전혀 맞지 않은 명칭을 붙여주게 된 것입니다.
의인이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죄인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죄와 의는 서로 반대개념이기 때문에 이런 것은 우리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났지요! 우리는 죄인인 것이 분명한데, 완벽하지 않으니 죄인인 것이 분명한데,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하셨으니 이 죄인이라는 내용이 그 이름과 결부할 것인가 이대로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부하려면 비록 죄인이지만 의인을 지향하며 의인되고자 애쓰는 방법이 하나 있고, 다른 하나는 어차피 죄인인거 죄를 막 짓자는 식으로, 어차피 죄인이 의인되느냐? 죄인이 의인이 되었으니 즐거운 죄짓기 행복한 죄짓기에 나서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 짓은 것이 행복하다는 말이 맞습니다. 사람에게 죄가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한지, 이것은 남이 하지 말라고 하니 더 재미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괴로운 것은 무관심이지 하라 하지마라가 아닙니다. 관심안 주면 괴롭지만 무엇을 하지마라고 하면 반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청개구리처럼!
그러니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든지, 죄인이 의인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겠지요! 죄인이 의인되려고 노력한다면 이제는 점차 의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부끄럽지 않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본인은 죄인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날이 갈수록 나는 아마 의인 쪽에 가까울 거야! 하는 의인 의식이 강렬해지고 이것이 자기 의를 유발하면 이것이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왕 죄인 된 것, 벌써 주님께서 의인으로 인도하여 그 이름으로 구원받지 내 실 내용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에 어떻게 굴러도 영향을 받지 않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굴리자! 라는 쪽으로 나서는 사람은 이 사람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죄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죄라는 것을 모릅니다. 주님께서 너는 죄인이야! 할 때에 막산다고 죄 되고 막살지 않는다고 죄가 안 되고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막살면 죄 되고 반듯하게 살면 죄 안 되는 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과 실제내용이 다르다고 하여도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에 이 전체의 문제점이 무어냐 하면 바로 나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밖에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구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성경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나’를 출발점으로 해서 나는 어떻게 구원될 것인가? 나의 존재가 하나님과 만나면서 일어나는 구원과 은혜와 소명 믿음 칭의 중생 양자됨 성화 영화 그 어떤 이야기를 구원론에 동원하여도 그 개념이 성경적으로 다른 이유는 그 출발점이 ‘나’에서 시작하여 내가 인식이 되고 내가 이해되는 나의 구원론을 따로 챙기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칭의, 하나님이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제대로 성경적으로 알려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어야 하는가 하면 칭의나 은혜나 구원에 손대지 말고 나부터 손대야 하는 것입니다. 나부터 손을 대어서 왜 이런 칭의라는 것이 잘못되었는가를 해명해 나가야 합니다.
칭의 문제가 나라는 의식부터 손을 대야하는데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나부터 손을 대야하는데 이제부터 어려운 것을 해야 하는데 어려운 것을 할수록 쉽게 하겠습니다. 나부터 손을 대야하는데 나라고 하는 이것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가 나를 생각안하면 무엇을 생각하느냐? 아침부터 나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본성인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하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나부터 생각하게 되면 무엇이 나오게 되는가 하면 나의 이름이 나오게 나의 이름이 나오게 되면 나의 영광과 나의 영원함 같은 것들이 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바벨탑 아시지요? 어린이 여러분 바벨탑 아시지요? 탑을 높게 쌓아서 하늘나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벨탑입니다. 동화책에 비슷한 것이 나옵니다. 콩을 심었더니 너무나 높게 자라서 하늘까지 닿은 나무가 있어요! ‘잭과 콩 나무’라는 동화가 있지요!
그것을 타고 하늘까지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라는 것이 그냥 ‘나’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아가 하늘까지 가고자 하는 그 의식이 포함된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나는 하늘까지 높아지리라! 하는 그런 본성이 들어있는 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이야기 했는가 하면 피히테라는 철학자가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칸트 피히테 쉘링 헤겔 죽 나오는데 그 중에 피히테가 연구한 것을 제가 지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까 콩을 심었는데 그 콩 나무가 자라가 그것을 타고 하늘나라까지 가겠다는 것이 바벨탑에 나오지요! 탑을 쌓고 쌓아서 하늘나라까지 가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주선을 타고 올라가겠다는 것입니다.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를 가고 은하계를 생각하고 우주전체의 별들이 몇 개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내가 언젠가는 우주선을 타고 상대성 논리를 뛰어넘어 광속도로 가서 며칠 만에 오리온 좌나 안드로메다 성운까지 가서 ‘엄마 나 여기 왔어 망원경으로 나 보여’ 하면서 손 흔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히테라는 철학자는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무한’으로 봅니다. 끝이 없는 것입니다. 끝이 없는 것을 생각하는 ‘나’이기에 끝없는 것까지를 다 아는 ‘나’라는 것입니다. 이 ‘나’ 속에 무한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키가 몇 센티이고 몸무게가 얼마며, 헐크처럼 커지지도 않고, 배고프고, 아프면 누워야하고 그러므로 무한과 이런 한계가 있는 만남을 피히테는 ‘나’라고 한 것입니다.
안 어렵지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로또 복권을 샀는데 나는 십 만원만 당첨이 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10억이 당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은행에 가서 돈을 찾는데 아저씨 십억이 당첨이 되었네요! 하는데 저는 10억이 필요 없어요! 십 만원만 주세요라고 거절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로또 복권얼마입니까? 사보지를 않아서, 천원입니까? 사보신 모양이지요! 천원주고 산 이유가 천원이라는 유한이 십 만원이라는 무한을 보고 복권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는 복권 최고 당첨 액이 천원이라고 하면 아무도 사지 않습니다.
천원만 투자하시면 더 큰 금액이 나옵니다. 하면서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십 만원만 바랐는데 십억이 되면 십 만원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억을 원하는 것입니다. 무한의 폭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로 몰랐던 ‘나’입니다. 예전에 미처 몰랐네! 노래 가사 같습니다. 예전에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줄 미처 몰랐네! 여자 분들은 지나가다가 쇼윈도 우에 밍크코트가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저 밍크코트 너무 예쁘다 내가 사 입어면 좋겠다! 그런데 곧장 포기합니다.
내가 그것을 입고 나갈 데가 어디에 있다고 그것을 원하나 접자하면서 유한으로 돌아옵니다. 천 원짜리 샀는데 그 사람이 당첨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자살합니까? 천만의 말씀!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행운이 찾아오겠나! 하면서 다시 유한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 유한은 무한이 있다면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태세가 되어있는 채로 엎드려있는 임시적 유한인 것입니다. 항상 무한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피히테는 ‘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피히테는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유한한 키도 작고 천리를 가는 것도 아니고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고 이러한 유한이 어찌하여 무한을 생각하게 되었는가? 여기는 반드시 하나님의 의식, 하나님의 무한한 속성이 인간 속에 들어있기에 인간들만이 무한을 생각한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좀 어렵지요! 사람들이 유한에서 무한을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인 원숭이나 코끼리 같은 이런 동물과 달리 -원숭이나 코끼리가 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이런 것이 없이 원숭이는 그냥 원숭이대로 살아가는데- 유독 인간들만큼은 무한을 추구하며 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을 보니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이랄까 또는 어떤 속성이 들어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유한한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인간은 무한한 신의 일부이지요! 그러니 인간에게는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들어있지요! 그러니까 이 피히테라는 사람은 나라는 것이 만약 나 혼자라면 실컷 나쁜 짓하고 성질난다고 사람을 찔러죽이고 자기 성질대로 하겠지만 인간 속에 무한이 들어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고 싶더라도 무한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심의 소리인데 양심의 소리를 듣고 보다 착하고 바르고 튼튼하게 무슨 학급교훈 같습니다만 진선미를 추구하는 나는 밥만 먹고 잠이나 자는 그런 짐승처럼 살면 안 되고 착하고 바르고 식식하게 신의 모습을 천사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참된 인간답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이의가 있는 사람? 이 피히테라는 철학자의 말에 여러분이 동의를 하십니까? 할렐루야? 아멘? 지금 이런 식으로 나를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나를 그대로 장소를 이동하여 교회로 오게 되면,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여도 부족한 나가 목사님의 말씀을 보다 많이 들어서 바르고 착하고 올바르게 내 속에 있는 신의 소리를 들으면서 살게 되면 나는 유한에서 무한으로 추구하여 의인에 반열에 속한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피히테의 이론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하지 않고 절에 가서 하거나 향교에서 유교 하는 곳에 가거나 윤리도덕을 하는 곳에 가보세요! 전부다 이 공식을 이야기 합니다. 다른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집단에 가도 다 이 소리입니다. 인간이 먼저 되어야지 그런 소리하는 것입니다. 가수 협회 가도 가수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한다고 합니다. 목사모임이 가도 목사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에 칭의라는 것이 들어오게 되면, 내가 이렇게 할 가능성, 이렇게 할 실력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냥 의롭다고 하지 않더라도 내가 점차 점차 의인이 되어서 의인답게 살아가야할 책임과 의무가 성도들에게 있습니다하는 이야기를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런 피히테의 이론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시작하고자 합니다. 피히테가 ‘나’라고 한 것은 유한한 ‘나’속에 무한이 들어있다고 하였지요! 그것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만들었습니다. 이 울타리가 에덴동산이라고 봅시다. 이 에덴동산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습니다. 서로 각기 다른 나무가 있습니다. 이 두개의 나무로부터 네 개의 강이 흘러나와서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소생케 합니다.
첫 번째 나무가 선악을 아는 선악과나무입니다. 두 번째 나무는 생명나무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왜 제가 에덴동산을 그림으로 그렸는가 하면, 피히테라는 사람이 무엇을 빼먹었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과 생명나무 사이의 인간이라는 것을 빼먹고 인간이 무엇이냐 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냐에 대하여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선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만 달랑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놓고 그 앞에 인간을 두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이냐 하면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없는 상태에서의 인간은 처음부터 그것을 인간이라고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훌륭한 무엇이 될 거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선악과에 담긴 내용이 무엇이며 생명나무에 담긴 내용이 무어냐를 알려주고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도구가 인간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으면 뭐가 됩니까? 죽지요! 생명나무를 따 먹으면 영생이지요! 맞지요! 그러니까 사람이란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훌륭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죽음이 무엇이며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사람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만들어진 취지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겠습니다. 여기에 하얀 떡이 있고 녹색 떡 쑥떡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떡을 접시에 담아주면 이것을 맛있게 먹으라고 준 것으로 압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미 범죄 한 이후, 타락한 이후, 죄 짓고 난 이후에 내가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물이 있으면 내가 마시라고 주었구나! 떡이 있으면 내가 맛있게 먹으라고 있는 것이구나! 무엇이든지 눈앞에 있으면 전부다 날 위해서, 날~ 위하여 날~ 위하여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런 현상은 갓난아이들에게도 있습니다.
갓난아이들이 어머니가 왜 있으며 아버지와 왜 있는지 모릅니다. 거저 엄마 아빠는 날 위하여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것이 교정이 됩니다. 4~5잘 되면 엄마가 아이를 잘못했다고 때립니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면서 네 친구를 왜 때렸느냐며 혼을 내는 것입니다.
내가 왜 다른 아이를 때리면 안돼? 너는 말이야 아빠 엄마의 얼굴이야! 너는 위대한 이씨 집안의 영광을 위하여 태어났어! 그런데 네가 너보다 약하다고 때려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엄마 아빠를 어떻게 보겠니? 그러므로 너는 때리고 싶더라도 참아야 돼! 우리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참아야 한다면서 수정하고 교정하는 것입니다.
회사에 들어갑니다. 어느 직원이 몸이 아픕니다. 사장에게 오늘 하루 쉬겠습니다. 그러면 사장이 당신이 몸이 아프다고 쉬어버리면 이 회사의 영광을 누가 돌보고 지킵니까? 그러니 나오세요! 그러면 저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이 회사를 위한 로봇입니다. 당신이 아프다고 집에 있고 편하다고 나온다면 어디 회사가 놀이터입니까? 그래가지고 회사 되겠어요! 빨리 나오세요! 하면서 나무라는 것입니다.
제가아침에 오다가 목동의 시티은행에서 번호표를 뽑았는데 바로 앞의 아주머니가 13번이고 제가 14번 이었습니다. 임금 투쟁 데모한다고 초자 행원이 맡아서 일을 하니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하여 13번에서 14번에 되는데 무려 30분이 걸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다가 가버렸습니다. 2~3분에 해결할 것을 아무것도 모르니 20~30분이 걸리는 것입니다.
언니 비밀번호가 뭐야? 신입사원 명찰을 달고서 기계의 비밀번호를 몰라서 묻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데모하러 갔는지 붉은 풍선에 투쟁이라고 써놓고 가버렸습니다. 직원이란 회사를 위하여 있는 것인데 자기 돈벌이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내 속에 있는 무한을 추구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월급을 많이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회사야 망하든지 말든지 나만 돈 챙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사 돈 다 떨어지면 사표내고 나오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 못된 버릇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여기에 떡이 있으면 하얀 떡은 생명나무 검은 떡은 선악과라면 한쪽은 선악과 한쪽은 생명나무라고 어떤 이름을 붙였던 간에 이것은 나보고 먹으라고 준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부르는 선악과가 어떻게 생겼는가 하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먹기 전에는 죽음을 몰랐습니다.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죽기 전에는 죽음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지금 제가하는 말이 너무 어려워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이름이 뭐예요? 이국희! 국희 앞에 떡이 있는데 그 떡을 먹으면 삐비빅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를 알겠어요! 외계인이 내려와 디비디비빅 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를 알겠어요!
이 떡을 먹으면 그 뒤의 말이 알아듣는 말이 아니라 삐비빅 이나 디비디비딕 같은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국희라는 어린이가 떡을 먹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뒤의 삐비빅 이나 디비디비딕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지금 하나님께서 인간에서 말씀하시기를 ‘선악과를 따 먹으면’ 이것 까지는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은 죽음을 압니까? 모릅니까? 그 말은 삐비빅이나 디비디비딕이과 같은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한번도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주체, 자아가 있다면 행동을 하고 안하고는 그 사람의 판단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어릴 때의 약간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의 어린 사촌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에 일곱 살의 사촌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숙모의 아들이고 제가 숙모 집에서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조카가 고추장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어린 애가 고추장을 먹으면 얼마나 울겠어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어떠했느냐 하면 고추장을 먹고 맵다는 것을 알면 먹지 않겠지! 물론 많이 먹으면 안 되겠지만 제가 지켜만 보았어요!
이걸 숙모님이 알고서 달려드는 것입니다. 근호 조카는 사촌 동생이 고추장을 찍어먹으려고 하면 말리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자가 다른 것은 용납이 되어도 자기 자식 해롭게 하는 것은 물불을 안 가립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도 없는 것입니다.
애가 그것을 먹으면 매울 것인데 왜 그것을 방치 하였느냐며 나자빠질 정도로 달려들었습니다. 그 숙모님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내가 치웠으면 좋았겠다. 그런데 내 말도 약간은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자기가 몸소 체험해 보고 맵다 싶으면 두 번 다시 그런 행위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 아니냐! 그게 원초적인 해결책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지요! 아예 그것을 치워버려야 되지요! 자 보세요! 선악과 따 먹으면 해롭습니까? 안 해롭습니까? 해롭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따먹도록 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의 해석은 한번 따먹어보고 죽으면 두 번 다시 안 따먹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나온 해석입니다. 엉터리입니다(탁자를 쾅하고 치는 소리가 들림). 그것은 이근호 조카의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고추장을 찍어 먹어보고 매우면 다시는 안 찍어 먹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정답이라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안 보이는 곳에 치우든지 그렇지 않으면 선악과가 보면 먹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시도록 보기에 흉측하고 기피하고 싶도록 만드시든지 하면 되실 텐데, 오히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만드셔서, 지금 아담이 아니라 어떤 누가 왔더라도 결국은 하루 이틀은 참았을 거예요! 그러나 결국은 따 먹고 말 그런 선악과를 하나님이 그곳에 두게 하셨느냐?
그것은 바로 죽음이 인간 속에 들어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그 증거는 선악과 따 먹고 난 뒤에, 여기 쑥떡을 선악과라고 하였지요! 그리고 하얀 떡은 생명나무라고 하였습니다. 이 쑥떡을 먹고 난 뒤에 하얀 떡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왜 먹으라고 준 떡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 먹으라고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쑥떡 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하얀 떡 생명의 떡을 못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이 두 과실은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람 네가 잘되라고 준 것이 아니고, 반대로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도 따 먹을까 하는 이 과정을 통하여 생명이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인가를 사람을 통하여 전 우주에 하나님의 속성을 증거 하기 위하여 사람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결국 무엇입니까? 들러리였습니다. 죽음과 생명사이에서 그것을 증거 하는 들러리입니다. 여기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골로새서 1:15-18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모든 피조물들은 주를 위하여 즉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를 위하여 즉 예수님을 위하여 인간이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창조될 때부터 이미 거기에는 벌써 무엇이 비치되어 있습니까? 선악과의 죽음의 세력과 생명나무의 생명의 세력이 있어서 그 죽음과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사람이 창조된 것입니다.
이것이 약간 어려운 생각인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이 선악과가 고추장이라면 고추장을 먹고 난 그런 상태에서라도 생명나무를 따 먹게 해서 생명이 무엇입니까? 안 죽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선악과는 죽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선악과를 따 먹고 죽는 자에게 생명나무를 따 먹게 해서 해독이 되어 안 죽도록 될 때에라야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창조하셨구나 하게 될 텐데 성경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반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헉헉거리며 해독제를 찾는 식으로 생명나무를 따먹으려하니 이 놈아 네가 선악과를 따 먹었으니 나가라하면서 쫓아내는 식의 인간이 아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요? 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은퇴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식의 인간은 만든 적이 없다. 네 이름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흙에서 사람이 되었던 적이 있는데 이제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
왜? 인간다움, 인간답다는 것은 네가 선악을 아는 것으로 이미 없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더 이상 선악과나 생명나무와 아무 상관없는 동네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도 상관없고 생명나무와도 상관없는 뚝 떨어진 동네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미 선악과를 따 먹었기에, 이미 선악과와 상관없는 동네에 살고 있으면서도 선악과는 우리 속에 살아있어 가지고 지금도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면 무엇이든지 따먹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다 세상으로부터 왔느니라. 요한일서 2:16절 말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있는 것이 이미 우리 자체가 움직이는 선악 나무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늘나라에 무슨 나무가 없는가 하면 놀랍게도 거기에서는 선악과나무가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 에덴동산에는 두 나무가 있었는데 하늘나라에는 선악과가 없어요! 무엇밖에 없습니까? 12과실을 맺히는 생명나무밖에 없어요!
이제는 마음껏 따 먹으라! 왜? 천국에서는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도구가 우리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에덴동산에서는 죽음이 무엇이며, 죽음이란 저주죠! 생명이 무엇이며, 생명은 영생이죠! 저주와 영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인간을 만들어 놓았다면, 천국에 가서는 이제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는 영원히 살게 됩니다.
어떤 방법으로 사는가 하면 자신의 생명의 면류관을 도로 반납하면서, 이것이 다 주님의 덕이지 제 덕이 아닙니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생명의 면류관까지 반납하면서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인간은 천국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천국에 살든 지상에 살든 어디에 살든, 나를 위한 인간, 내가 잘되기 위한 인간이라는 사고방식은 사람이 범죄 하고 난 뒤에 발생한 악마가 씌워 준 사고방식이지 성경에서는 나를 위한 나,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란 아예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10분간 휴식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녹취 06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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