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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교회사 10강 녹취강의이사야

Re..교회사 10강 녹취

이름 : 정석훈(IP:)

교회사 10강 녹취

이근호 2006-01-18 09:15:32, 조회 : 10,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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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약간 미진한 것이 남아 있어서
코넬리우스 벤틸에 대해서, 이 사람이 아직 살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는, 코넬리우스 벤틸이라는 사람, 이 분이 그 주위에서나 자칭 오늘날 최고의 정통주의, 칼빈주의 사상을 그대로 함유하고 있는 사상가다라고, 옛날 총신대학 박아름 교수가 이야기 했다. 그래서 칼빈 개혁주의 신학, 칼빈의 진면목을 알려면, 벤틸이 오늘날 무수한 신학들과 마주치면서 아직도 무슨 주장을 하는 지 들어 보아야 합니다.
들어보게 되면 교회사 하면서 많은 신학자들 이야기 했습니다. 벤틸은 전부가 정통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칼빈의 정통주의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벤틸의 사상을 제가 잠시 이야기 하고 과연 성경적으로 맞는가를 검토해야 한다.

지난 시간 잠시 언급했듯이 이 사람은 접촉점을 이야기 했습니다. 모슨 접촉점인가 하면, 모든 인간은 신을 아는 지식이 있다. 이 지식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접촉점으로 사용한다. 선지식, 미리 갖고 있는 지식, 이것을, 접촉점을 출발해서 신을 아는 지식으로 출발해서 여기에 성경을 이야기 하면, 신을 아는 지식과 성경의 내용은 사실 결합이 안 되는데 결합이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성령님이 오시면 성경의 내용지식을 깨닫게 해서 성경을 아는 지식을 완성한다고 본다.
모든 인간은 신을 아는 지식이 있다는 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신을 아는 지식이 접촉점으로 부정되어서는 안되고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성경에 보니 이방인에게 양심이 있고 양심이 이방인들에게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으니, 이 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이 이성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남기신 신적인 모습이다.
이성과 양심이 비록 죄로 인해 왜곡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남겨주신 바탕까지는 부정한다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다.
다만 양심과 이성으로는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에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데,
여기에 성령이 오셔서 성경을 제대로 풀이한 그 사람은 구원을 얻고, 성령이 오시지 않아 성경을 제대로 풀이하지 못하면 지옥간다.

이 사람이 접촉점, 선지식을 주장하는 이유는, 그 사람 말에 의하면, 칼빈이 그렇게 주장했고, 자신도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이유는, 칼 바르트에 의해 초역사적인 계시에 의해서만 구원된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역사하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그 사건으로 인하여 구원하는 능력이 임할 때 그 사람이 구원된다고 주장했다.
벤틸은, 그런데 이렇게 되면 역사라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역사가 되지 못하고, 초역사만 하나님의 계시가 되기 때문에 이 자체가 하나님의 성경에 어긋난다고 본다.
역사 자체도 하나님의 계시인데 만약에 초역사만 하나님의 계시라고 간주 해 버리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를 이끄시는 주체자가 없지 않는가? 역사도 하나님의 일반계시로 인정하고 다만 특별계시로 성경을 여기에다가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게 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자기가 알고 있는 전통주의, 신정통주의를 반대한다. 칼바르트, 고가르텐, 부룬너. 신복음주의 카넬. 신복음주의, 신전통주의 다르다. 근본주의, 복음 주의가 다르다.
복음주의라 해서 부흥사 냄새, 근본주의는 메이첸에 의해, 나이아가라 부흥회, 세대주의적 성향이 있다.
그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진짜 정통주의는 벤틸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이야기가, 이 사람이 칼바르트를 공격하면서, 칼바르트는 예수님 자체를 계시로 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책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께서 성경을 사용할 때 그때 성경은 말씀이 된다. 계시가 된다.
성경은 곧 계시가 아니라 성경은 계시로 변한다.
왜 계시를 예수님으로 이야기 했는가? 반틸은,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인데, 만약 책이라든지 역사적으로 나타나 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숨어계신 분이 아니라, 성경 던져 놓고, 야 너희들 알아서 공부해라. 열심히 해석해라 하고 돌아서 버린다. 숨어계신 것이 아니라 이미 다 공개된 하나님이 되어버린다. 숨어 있는 하나님이 아니면 루터사상, 개혁주의 사상에 어긋난다. 이사야 45장에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능력에 의해 포착이 되는, 인간의 신지식, 접촉점에 의해 포착이 되는 하나님이니.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되지 말고 이미 계시는 성경으로 나타나셨다.
다만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 조차 해석못하니 그 때에는 성령이 와서 해석하는 것이 하나님의 합당한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이다.

이런 벤틸의 사상이 성경적으로 합당한가? 생각해 봅시다.
벤틸의 문제는 하나님의 선지식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우상이다 라고 보았다. 그런데 벤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상은 아닌데, 우상으로 활용된다. 죄로 말미암아 우상으로 활용되고 있다. 만약에 성령이 와서 활동하시면 선지식이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은총, 일반계시의 일종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라고 이야기 한다.

벤틸의 사상이 성경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고 하면,
접촉점부터 시작하면, 신을 아는 지식이 있는데, 이 신이 모든 인간이면 다 알고 있는 지식이다. 그러면 모든 인간이 알고 있는 신지식이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는 지식이냐? 하는 것이다.

죄 지었지만 신지식은 그대로 유효하다. 로마서 일장에서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할 때, 이 지식은 아직까지 건재하다. 신을 아는 지식에서 신은 문제가 있지만, 지식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이것은 버리면 안되고 ,부정해서는 안된다라고 본다.

그렇게 할 때, 처음 출발점을, 예수님과 사도바울이 벤틸과 동일하게 생각하셨는가?
이게 시작점이다. 예수님이 과연 벤틸과 같은 신학으로 일을 하셨는가?
과연 이 틀에 맞추어서 활동을 하셨겠는가?
벤틸은 무엇에 관심이 있는냐 하면, 이렇게 희미한 신지식이 또렷하게 되는데 유용하라고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통주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렇다면 칼빈주의 전통신학이 복음적이 아니고 성경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런데 벤틸은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이다.
벤틸의 의하면 예수님을 모시는데 인간이 부족해서 예수님이 도와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야 된다는 그러한 인간의 의무조항이나, 그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내 쫓지도 않았을 것이고, 처음부터 약속도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인간에게 예수님을 알게하는 지식을 주셨을 것이다. 선택된 자에게만 아니라, 선택의 의미가 없다. 모든 인간이 다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야 한다.

벤틸 사상은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었으니 인간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느냐라는 의식이 굉장히 강렬하게 깔려 있다. 이것이 만일 칼빈사상이라면 칼빈도 문제가 있게 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위한 피조물을 만드셨는데, 벤틸은 피조물을 위해서 성자가 무언가 노력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인간 없이는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식이 되어 버린다.

논리가 상당히 어렵게 되어 있다.
논리가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창세전에 구원될 자들을 정해 놓았을 때, 창세전 선택하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칼 바르트가 오해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사 구원하셨다는 것은 반드시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인간속에서 무엇이 분류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인간 속에서 모든 인간은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벤틸의 첫 번째 출발점에서 이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문제성이 있지요. 처음부터 모든 인간이 신을 안다는 접촉점에서 시작했다.
선택이란 다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라면 선택이라는 말이 필요 없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은 후에 다는 아니다라고 하셨다. 선택의 의미를 강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선택된 자가 따로 있다면 인간이 신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출발해서는 안 되고, 이렇게 되면 지옥갈 자와 천국갈 자다 구분이 안 된다.

구분되는 기준으로 가야한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선택한 자가 따로 있다고 출발해야 한다.
그렇게 출발할 때에는 신학적으로 어떤 점이 부각되는가 하면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처음부터 분명해 진다. 이것이 인간 중심이 아니고,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아 주님께 영광 돌릴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영광 돌릴자를 어떻게 건져내시고 어떤 식으로 영광돌리게 했느냐라는 그 포인트가 예수님께 가게 되어 있다.

지금 오늘 교회사 마지막시간인데 마지막 시간에 제가 벤틸을 꺼집어 낸 이유는, 지금 교회사 자체가 이런 개신교 교회사이기 때문에, 개신교 정통 칼빈주의 관점에서 교회사를 이러한 관점에서도 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교회사를 보게 되면, 교회사가 벤틸에 의해서 역사가 긍정된다.
칼빈주의 관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면 무엇을 강조하는고 하며 세상이 이렇게 지옥같더라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그 어두운 악마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정통 칼빈주의를 이렇게 보존하니 이것이야 말로 얼마나 감사하냐는 식으로 교회사가 정립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 자체를 계시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교회사 속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하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유일하게 신실한 종으로 남게 한, 원인을 제공한, 십 년 전, 십 년 전, 또 십 년 전, 위대한 선조의 신앙인들의 전통을 찾아서 연결시키는 교회사가 된다. 이렇게 되면 바로 천주교이다. 천주교 제 2 탄이다.

그러니 장자교단이라는 말이 쓰서럼 없이 나온다. 장자교단이 성경에 있으면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웨스터 민스터 믿는다고 했는데, 그 안에 성경이 우선이라고 해 놓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웨스트 민스터 신조 안에 성경이 우선이라고 해 놓고, 외워놓고, 막상 모든 사고 방식은 성경중심이 아니고, 오늘날 전통칼빈주의라고 해서 하나니의 신실한 종으로 남은 것은 웨스트 민스터 신조가 너무 완벽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이 전통을 고수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실한 종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웨스트 민스터를 가르치면 하나님께 복받을 일이다. 구원받을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칼케톤 신조, 니케아 신조 주장하면서 우긴 카톨릭과 무엇이 다른까?

성경한번 찾아봅시다.
마태복음16장18절에 보면 “또 내가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이 땅에 죽음의 권세, 저주의 권세, 악마의 권세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악마의 권세가 딴 것은 자 삼켜도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만큼은 삼키지 못한다.

이것은 영적인 말씀이다. 모든 성경 말씀이 영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이것을 구체적인 실재 사물로 전환하는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의도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붙들려고 하는 그 자체가 음부의 권세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우리교회 최고라는 자체가 음부의 권세 속에 있다.
우리 교회가 최고다, 우리 종파가 최고다. 우리 기독교가 최고다가 된다.

그런데 지난 시간 이야기 했듯이 그런 교단, 교회가 최고다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다 라고 했을 때, 그 출입구 역할 하는 것이 신조이다.
그렇다면 지금 실제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분은 예수님뿐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어떻게 일하시는가 성령을 통해서 일하신다. 이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로 세우셔서 예수님이 주의 권리를 행세하신다. 주의 권세를 행사하는 것은 구약에 보면 여호와로 나타난다.
구약의 여호와를 실행에 옮기다 보니 오늘날 교회가 생긴다. 그 교회 관리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시는데,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떤 눈에 보이는 특정 기관, 특정 교회로 삼았을 때,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영적 활동을 교회지도자들이 머리에 앉아서 사탄의 역할을 한다. 데살로니가 후서에 나오듯이. 거룩한 자리에 앉아 사람을 지옥보내기 위해 유혹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영적인 최고의 자리가 교회마다 교단마다 다 있어요.
스스로 높여서 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다 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은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특정 이름도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동방박사들이 별 따라 왔고, 베드로 후서에 보면 그 별이 우리 마음에 떠 올라야 한다고 하셨다. 이 말씀이 특정 목사를 따라 가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의 별이, 로케트 올라가는 별입니까?
모든 성경은 영적이 이야기이다. 우리 마음에 별이 뜬다는 것이 지금도 북극성 움직여 따라가면 동방박사가 되는 것입니까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합니다. 동방박사가 별 따라 갔습니다. 동방박사가 별 따라 간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이것을 고정시키면 계시입니까 아닙니까 계시가 될 수 없다.
그 별은 어디에 있는가 베드로 사도가 그 별이 우리 마음에 떠 오른다는 것이다.
요새 이렇게 영적으로 해석 하면 혼난다. 역사를 따라 가야지, 우리교회가 어떻게 생겼으면 어느 신조를 따른다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믿는 사람 속에 별이 떠오는 것을 어느 신조가 막으며, 어느 목사에게 허락 받아야 되는가?
주께서 자기 택한 백성을 건지시겠다는는 어느 신학자가 그것을 이단이라 말할 수 있는가?

교회사를 보게 되면 바로 인간 중심으로, 칼 바르트는 약간 그런 요소가 많이 있어요.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으로 어떤 신학을 만들어, 그 신학에 기초에 어떤 조직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예수님이 구원방식이 아니다.

예수님의 구원방식은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와 마찬가지로, 나는 도무지 신조 만들 자격도 없고, 신조 믿을 자격도 안되는데 단지 그 강도에게는 무엇이 크게 보이는고 하면,
그에게는 옆에 함께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크게 보일 뿐이다. 만일 강도 죽지 않고, 강도가 구사 일생 살았다고 하면, 강도가 십자가에서 다시 내려와 교회를 만들고, 교단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 교회와 교단 완전한 것입니까? 역시 아니다.
본인이 구원받은 것은 맞지만, 강도가 구원받은 것은 맞지만 구원받은 것은 맞지만 구원받은 자가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온전한 교회는 아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른다. 주님이 만들어야지..
지금 벤틸이, 벤틸은 인간이 납득되는 신학을 만들어서, 납득을 접촉점으로 해서 많은 사람을 주님께서 인도하겠다는 것이다.
주님은 노신다. 주님은 노시고 하청 주었든지 그런 것입니다.
왜 이런 발상을 하는가. 이것은 바로 벤틸이 칼빈사상에 충실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구원론에 너무 치중했고, 구원론에 너무 치중했다는 말은, 인간 구원론에 너무 치중했다는 말이고, 이 말은 그 사람 머리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 두 구조의 틀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칼바르트는 예수님중심, 십자가 중심이지만 나 벤틸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이다는 것이다.

아마 벤틸에게 삼위일체 이전에, 인간이 아무 기독교 없이, 성경적인 아이디어나 이미지 없이, 인간들이 타고난 이성으로 삼위일체 만든다고 하면 그 사람은 거부할 것이다.
지금 삼위일체를 성경을 안보고도, 인간의 논리와 철학적으로 따져서 삼위일체 주장하는 교가 한 둘이 아니다.
브라만교 등 삼위일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심지어 불교도 그렇다. 삼위일체이다.

결국 이것은 인간 긍정을 통해서, 벤틸 신학은 인간 긍정을 위한 하나님의 긍정이다.
인간 긍정을 하는 하나님의 긍정입니다. 그러니 벤틸에게는 처음부터 지옥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다보니 안되서 지옥보낸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지옥보내는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지옥 만들때 지옥 갈 사람은 정하지 않고 천당 갈 사람만 정해 놓았다. 지옥 갈 명단은 미리 없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으면 분명히 지옥간다고 하신다.
요한 계시록의 이야기가 천지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다 알 고 있는 생각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들은 유황불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알고 계신 생각이시다.

이것도 모르고 하도 하도 한되니 지옥보냈다는 것이다.

지옥을 언제 만들었는가?
타락전에 만들면 아애 지옥보낼 것이라고 작정한 것이고, 타락 후에 만들었다면 타락하니 얼른 지옥을 만든 것이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처음부터 만들었지만 지옥은 뒤 치다꺼리하기 위해 만들었다.
자동차 회사에서 자동차를 만들어 놓고 고장 나니까 서비스센타를 만든 것과 똑 같습니다.
모든 전통주의가 이렇습니다. 기독교가 이렇습니다.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저자는 어떻게 이야기 합니까? 21페이지 이런 이야기 한다.
인간이 계시를 마음대로 날조한 기독교의 실패.
날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기독교가 날조 되었다는 것이다.
날조 한 이유가 무엇인가? 날조한 이유가 있다. 기독교가 무엇과 결탁했는가? 권력의 맛을 보았다. 권력과 결탁했다.
권력의 맛을 본 이유는 기존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로마의 권력의 맛을 톡톡히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심하게 핍박했던 그 권력의 맛을 기독교는 핍박받으면서 맛을 보았다.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기 치는 사람은 한번 사기 당해본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기를 쳤는데, 오늘 아침에 들었는데, 원룸, 투 룸을 지어놓고, 자신이 신고 한다. 이것이 법보다 더 넓게 지었다고 본인이 신고한다. 본인내지는 본인이 아는 사람. 그러면 자신인 벌금은 내지만, 소문은 저 집은 법보다 더 크게 지었다고 소문난다. 확 팔린다. 이 수법을 어디에서 배웠겠는가? 이것은 자신이 당한 것을 이용해 먹는 것이다.

기독교가 권력 때문에 몹시 고생했고, 쓰라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렇게 미웠던 권력이 그 맛에 톡톡히 물들어서,
자신이 나중에 기독교가 인정되면, 로마 황제가 가졌던 권력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유럽 온 제국을 통치하겠다는 관성의 법칙, 반발성이 강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콘스탄티주의라고 자크 엘룰은 말한다. 43페이지에서.

그런데 엘룰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나라는 내 나라고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 했건마는. 그런데 그런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에게 높은 받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남은 것은 복수밖에 없다.

그리고 쟈크 엘룰이 잘 지적했듯이 종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권력화 시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바리새인의 누룩이라고 하셨다. 오염.
이 누룩은 어디든지 침투할 수 있다. 공팡이지요. 썩어 문더러 지는 것. 그런데 그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던 세상권력과의 결탁 의식이 기독교가 대 환영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누가 핍박받는가? 전에는 로마 세속 권력으로부터 핍박받던 기독교가 이제는 기독교의 적이 예수님이 된다. 얼마나 예리합니까? 제가 교회사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시간에 합니다.

그렇게 된 여러 가지 이유들이 많이 있습니다.
56페이지, 사회가 기독교에 의해 뒤집히기는 커녕 오히려 기독교가 사회를 뒤집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 기독교를 성공이라고 본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바로 걸림돌을 제거, 십자가의 걸림돌을 빼버렸기에 사실 성공이 흡수 통합이다. 혼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자크 엘룰(제일 멋진 부분), 신성화이다. 물질의 신성화, 거룩하게 됨.
원래 자크 엘룰에 의하면 원래 자연 세계 속에는어떠한 거룩함이 없다. 인간이 죄 지은 후에 인간은 자연 세계를 떠나지 않았다. 이유는 자연세계와 그 속의 인간은 함께 후패해져 가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 함께 썩어져가고 후패해져 가기 때문에, 함께 썩다는 말은 거룩하고 신성한 것을 자연세계의 요소로서 조립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함께 후패하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주어 주어 모아 거기에서 어떤 거룩한 것을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에는 이미 어떤 것도 신성하다고 붙잡을 수 있는 신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니 율법자체를 신성시 한다.
그 예들이, 모세가 홍해를 가른 그 지팡이, 사사기 7,8장의 기드온 승리 후의 그가 입었던 에봇, 그리고 언약궤, 홉니와 비느하스, 언약궤 들고 나서면 승리할 줄 알았다. 왜냐하면 언약궤 가는 곳에 승리하니까?
왕직, 제사장 직분, 선지자 직분, 다 썩었다. 이것들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후패한가를 보여주는 역할. 구약성경.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소위 거룩한 이스라엘과 더러운, 속된 이방나라와 전쟁을 붙게 하여 이방나라가 승리케 함으로, 소위 자연 세계를 가지고 거룩을 시도한 이 나라에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는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신성한 것을 만든다. 성전을 만들고, 종사자를 거룩하게 만들고, 제사법에 의해서, 율법에 의해서 그대로 옮겨 놓으면, 복사하면 그 거룩이 복사 되는 줄로 안다.
모세의 돌반이 내려오면 죽는데 이것이 복사되면 거룩한 것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거룩하다고 하시면서 주신 것이, 인간속에 들어가면 그 거룩이 인간속에서 어떻게 탈색되고 달아나는 가를, 어떻게 사라지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맛나가 거룩하지요. 거룩한 맛나를 항아리가 오래 갔습니까?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 살구나무 꽃이 피었다 지팡이가. 얼마나 놀아운 것입니까? 그런데 그 지팡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날아가 버리죠. 없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서 신성한 것을 주신 이유는, 주셔 놓고, 그것이 인간의 더러움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얼마나 고난받고, 얼마나 탈색되고 무가치하게 전락되는 증거물로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건들을 제공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적 인간의 본성들, 즉 무조건 거룩한 것을 붙들어서 그것을 대중들에게 납득시키려는 종교적 행태는 여전히 기독교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 쟈크 엘룰의 신성화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질문-삼위일체가 아니라 사위일체이다. 인간을 집어 넣는다. 왜냐하면 거룩한 인간이 들어간다.
예수님을 선택했다는 말은 칼 바르트 주의이다. 그러나 에베소서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선택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선택 대상이 아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선택했다.

b

옛날 구약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들을 신성화하는 의도가 무엇이냐 하면 곧 자기 자신을 신성한 신적존재로 전환하는 기본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이다.
거룩한 것에 접촉하게 되면 나도 거룩해 진다.
내가 거룩해 진다는 것은 곧 신이 된다. 신과 한통속이 되는 겁니다. 한통속이 되려면 신이 내려 주신 것을 계속 유지하면 된다. 이것을 나에게 적용시킬때 나는 곧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방식이
초라한 나가 거룩한 나라에 합류해서, 이 나가 거룩한 나가 되수 있는 방법은 여기서 제공된 거룩한 물질들을 이용하면 된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면 세례이고 성만찬이다.

성만찬에 대해서 109페이지에서 엘룰이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중세 때에 성찬식 할때 살과 피를, 다른 말로 하면 떡과 잔을 오푸스 오페라툼 이라고 했다. 이것을 번역하면 ‘활동하는 일’ 이라는 뜻이다. 제가 알아서 스스로 활동한다. 무엇이, 떡과 포도주가, 떡과 포도주가 스스로 활동하여 돌아다녀 그 사람들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성만찬 교리가 지금까지 기독교, 천주교에서 그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이다. 세례의 물을 욕조에 담기느냐 어떻게 하느냐 그런 방법에 의해서 그 물에 담긴 사람은
거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다시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립되려면 물질, 즉 물이 거룩한 물질일 경우에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이 더러운 자연 세계를 어떤 신성한 영역으로 따로 나누어서 신성한 물질로 따로 구별하여 그것을 활용해서 자신이 거룩한 사람으로 되 태어 나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이방종교적인 발상을 보여 주는 것이교회사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가. 사람들의 본성자체가 구약성경터, 자신이 신의 세계에 진입하고자 충만충만한 입장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고 종교적 욕구를 충족함으로써 교회 자체가 하나의 제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단락에서 신성화 비신성화 대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단력에 도덕주의가 나옵니다. 계속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뜻을 날조한 이유에 대해 쭉 나오고 있습니다.
도덕주의가 침투함으로 말미암아 그게 또 하나의 복음의 날조로 봅니다.
도덕이라는 것일 얼마나 좋은데 그것을 왜 복음을 날조했다고 보느냐?
여기에서는 쟈크 엘룰은 말하기를 영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가지고 무엇으로 오해했는고 하면, 도덕적으로 사는 것을 영에 따라 사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영에 따라 사는 것은 내가 착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조차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영적인 사람이다. 사람이 무언가 자기 자신에게 집착을 갖고 있을 때에는, 내가 이왕 인간이 된 이상 짐승처럼 살지 말고 도적적으로 살자 라고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이왕 나라는 존재가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참하고, 착하고 선하고, 멋있고, 휼륭하게 아름답게 선하게 진리대로 그 다음에 자기 자신을 꾸밀 수 있다.

그런데 자기를 포기할 때에는 꾸밀 수 없다. 그런데 도덕을 요구한다는 말은 이미 어떤 경우에라도 나는 포기 못하겠다는 의식이 단단해진 그 바탕위에 거기에다가 도덕을 입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발상이 거기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왜 도덕적인 문제가 무엇이 문제인가? 쟈크 엘룰이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크 엘룰은 인간이 선과 악을 나누는 자체가 바로 그것이 죄, 악이라고 본다. 인간이 선악과 따먹은 후 그 다음 부터는 선과 악을 구분지어 악한 것은 버리고 선을 채택하려고 하는데.
쟈크 엘룰 책 뒷부분에 나오는데,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죄를 안다는 것은 그것은 자동적으로 선과 악을 지식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죄를 안다는 겁니다. 무엇이 악이냐 하는 것은 은혜를 받아 볼 때만 비로소 발생되는 의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 받게 되면 어떤 의식이가 하면 도덕적으로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이 일반 모든 인간들의 타고난 본성이다 말이죠. 성령의 은사를 받기 전에 그렇게 되는데.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전에 그런 식으로 선과 악을 나눈 자체가 악한 것이며 그것이 교만이며 그것이 내 의로운 의지로 살려고 하는 욕심에서 나온 타락한 증거다라고 보는 겁니다.
그 한 예로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소경된 자가 나오지요.
소경된 자에 대해 주위에 있는 유대인들이 네 눈을 누가 고쳐 주었는가 똑바로 대 똑 바로 대라 말이야 제대로 대 라고 물을 때,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 아이가 다 컸으니 직접 아이에게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눈 뜬 아이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낫게 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누구든지 소경된 자가 보는 자요. 소경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병 나은 그 청년 보고 하는 말입니다. 제대로 본다고 하는 자는 다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스스로 존립위해 이성과 윤리를 총 동원해도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천국가는 기관이 될 수 없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유주의나 감리교, 요새 장로교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자기 죄와 선과 악에 대해서 심판 받는다고 하는데. 인간이 책임져야 될 선과 악은 없어요. 왜? 이미 다 악인데, 무어가 자기가 책임을 져요, 내가 죄인이구나 내 죄를 책임져야지 이것 자체가 자기 처지를 모르는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반응 자체가.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데.
구원은 생명책에 이미 기록된 자만 구원받아요. 책임지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도덕주의가 인간에게 들어온 것은 이것은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육적으로 보아서 사람들을 설득하려교
사람들을 꼬시려고 하는 작전이다 라고 쟈크 엘룰이 말합니다.

그 다음 쟈크 엘룰이 독특하게 이야기 하는데 이것은 남들이 이야기 하지 않는데, 쟈크 엘룰 이 책에만 있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영향을 말한다. 기독교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느 종교든 그 시대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기독교라는 것도 그 시대 영향을 거부한 것도 영향이다. 이슬람 영향이라고 할 때 기독교 신자가 처형되고, 알라신 부른 것도 아닌데 무슨 영향이라고 하는가 하는데,

이슬람 종교의 내막을 알아야 하는데, 이슬람 종교가 무엇이냐 하면 신의 계시와 자연계시 둘로 나눈다.
신의 계시와 자연 계시 이것은 완전히 갈라진다. 여기에 어떤 연결고리가 없어요.
연결고리가 없다는 말은 신과 인간밖에 없다. 인간은 어디에 속하는가 하면 자연에 속한다. 신과 자연밖에 없다.
자연은 신에게 무조건 굴복해야 한다.

지금 제가 이렇게 하니 기독교, 복음주의 관점이네라고 오해하시겠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무엇이 없느냐 하면 죄라는 것이 없어요. 죄라는 것이 성립 안된다. 아담의 죄가 묻지마 그런 것 없어요.
그냥 자신은 피조물이고 피조물이기에 창조자에게 그냥 굴복해야 한다. 간단한 문제이지요. 연결고리가 없어요.

그런데 쟈크 엘룰은 말하기를
이슬람은 이런 종교지만, 기독교는 이미 여기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성육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미는 영역이 예수님만을 통해서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성육신이 빠져 버리면 어떤 현상이 있는고 하면 두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이 전적으로 신에게 복종하기 위해 이슬람은 어떤 철학을 갖고 왔는고 하면 옛날 헬라 철학을 갖고 왔다. 그 철학자의 대표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원래 유럽에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슬람이 먼저 번역해서 먼저 연구하고 있었어요. 먼저 연구해서 나중에 십자가 운동 과 그 전에도 들어 왔지만, 그 후에 십자가 운동 때 마구 1200년 1300년에, 많은 중세 철학자들, 토마스 아퀴나스가 등장한 것은 이슬람에서 이미 연구해 놓은 플라톤 아리스토 텔레스의 저작들이 번역되어 마구 쏟아져 오니까 자기들이 생각했던 기독교하고, 옛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 했던 것과 똑 같거든요. 똑같으니까 어떤 아이디어가 드느냐 하면, 이야 이것은 성경만 이야기 할 것이 아니고 성경을 납득 시키기 위해서 이런 종교를 들여오면 이것이 하나의 접촉점,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는, 진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접촉점 역할을 할 수 있겠구나 하여 마구 들여 온 겁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자연세계가 피조세계가 전적으로 복종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법적이이야 한다. 율법적.
이 법적이라는 말은 곧 무엇을 뜻 하느냐 하면 법을 만드려면 법이라는 것은 권력이 개입되지 않으면 법이 소용이 없습니다. 시속 80 해놓고, 아무도 속도계 안대면 시속 80이하로 다닐 사람 아무도 없다.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갑니다.그런데 카메라 찍으면 그렇지 않다. 아 80이죠, 죄송합니다. 못 보았습니다. 바빠서 그렇습니다. 벌금을 내고 가지 않습니까?

법이라는 것은 제지 하는 사람이 있고, 법을 안 지녔을 때 추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제지하는 사람이나 추궁하는 사람이나 이것이 다 권력이죠. 법을 시행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삼권분립 입니다.
이 민주주의의 삼권분립 이 사상이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서 나왔다. 바로 헬라철학을 가져온 이슬람의 영향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삼권분립. 곧 법이 있다는 말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말이냐 하면 신앙을 계속 복사해서 찍어 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법적으로 하면.
법을 제시한다는 말은 그 법에만 딱 적합하면 자동적으로 딩동댕 영의 시작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세 철학이 법전이잖아요.
토마스 아퀴나스도 모든게 법전입니다. 천주교의 모든 것이 교회법이 있어서 모세법, 무슨법 무슨 법이 있어서,
교회내에 성물이 있고, 하루에 성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아침스케줄이 다 나온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법적인 것도 영향을 받았고,

또 하나는 쟈크 엘룰이 잘 지적하였듯이 신비주의가 이슬람영향에서 왔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법이 있을 때, 반드시 법이라는 것은 선을 긋는 것이다. 법은 금지이다. 하라 하지 말라는 금지이다. 법은 허용과 금지이다. 사람이 하지 말라고 정해지면 사람의 욕구는 그때부터 작용을 하는데 이 선은 넘어보고 싶어한다.
19세 이상이라고 하면 반듯시 보고 싶어요. 19세 넘은 사람은 이것을 시시하게 봅니다. 그런데
18세 이하는 이것이 오히려 유혹입니다.
몰래 먹는 사과가 맛있다.

하지 말라 하면 넘어 서고 싶습니다. 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방해하죠. 따라서 법보다 법을 뛰어 넘으면, 법이 없는 영역이죠. 법이 없는 영역은 신비영역이다. 그래서 이슬람에서 신을 직접 접촉하려는 신비주의가 법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법을 뛰어 넘는다는 그러한 쾌감과 더불어 신비주의가 퍼졌는데, 그 신비주의가 그대로 기독교에다가 다 투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내부에는 무엇과 무엇이 갈라지는가? 법파가 있고 신비파가 있습니다.
쟈크 엘룰은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복음인가?

이슬람교 영향을 쭉 보면, 172페이지.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 이슬람을 따라 어떤 짓을 했는고 하면, 근신, 진을 빼는 춤, 절대적 침묵, 아마 이 사람이 티벳 불교를 알았으면 세상에 여기도 있네라고 할 것입니다.
절대 침묵, 벽에다 점하나 찍어놓고 삼일동안 밥 먹지 않고 그것을 보면 무어인가 트이도 트인다.
부흥사들이 와서 기도하라고 할 때, 방언기도해야 성령은사 받는다고 하니까 방언기도 할때 방법을 이야기 하고 나름대로 방법을 구사하잖아요.
기도란 것은 속에 담긴 마음이 언어로 입으로 튀어 나와야 기도 아닙니까?
그러면 달리는 말에 엉덩이를 치듯이.
뭐 쳐야 티어 나오지, 때려야 아야가 나올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손바닥을 치던지, 진을 빼야 한다.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것은 언어를 조립하려고 하는데서이다. 이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감정이 기가 죽어 있다 말이죠. 이성만 치워버리면 그때에는 신나게 한바탕 놀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나게 놀 때에는 무슨 소리든 다 할 수 있잖아요. 신나게 노는 방법은
고지식하고 고상하게 노는 이성의 틀을 부수는 것이지요. 부수는 방법은 지가 스스로 미치는 것이다.
박수치고 열광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면 하시시. 마약이다. 이런 것이 하나님 안에 용해 되기 쉽다. 자기를 완전히 없애어 주님안에서 놓아 없게 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쟈크 엘룰은 말하기를, 언제 사도바울이 삼층천 올라가기 위해서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 언제 금식하고 어떻게 그렇게 스스로 진을 빼는 기도 하고, 자기 육체를 때려서 신비적인 것을 언제 했는가?
빌립이 이디오피아 내시 만날려고 스스로 때리니까 성령께서 오셔서 광야로 보냈는가? 안 그랬잖아요.

그리고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지가 지 때려서 성령에 충만했습니까? 그래서 죽을때
날아오는 돌멩이 맞으면서 주여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라고 기도 했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을 때, 자기 열심 각오할 때 자기 열심이 되었어요. 오순절날 기도도 성령오기 위해 기도했지 이러면 성령온다고 요청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상당히 어려운 것인데, 179페이지 하나님의 운명, 필연은 예정과 다르다. 운명과 필연은 다 이슬람영향으로부터 왔다.

쟈크 엘룰은 이 책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지금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신다.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사가 열 강의가 끝났는데, 무언가 했는 것 같고 대단한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내일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옛날에 교회사 했는데 이거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소유하지 말라, 이 책에서 이야기 하기를 어떤 경우든 소유하지 말라 하나님은 항상 처음부터 너에게 새로 일을 시작 하려고 하는데 너는 왜 자꾸 종교적 업적 신성함을 소유하려고 하느냐?
교회가 자신이 성령 소유주로 간주한다. 성령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교회가. 성령의 소유주는 주님이시지 교회가 아닙니다.
쟈크 엘룰은 말하기를 성령은 바람 같은데 어느 누가 바람을 잡을 수 있는가? 바람을 소유한 인간이 어디있는가? 흐름을 누가 소유하는가?

하나님의 질서는 결코 조직이나 제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하신다. 우리의 하나님은 시작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인간의 희생이 하나님의 은총을 요구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인간이 희생했기 때문에 은총이 온다는 그런 주고 받는 거래로 생각하지 마라, 인간이 아무리 희생해도 그것을 은총을 받아내는 근거로서 작용하지 못한다.
순교도 죄가 된다.

왜 그러냐 하면 바로 성육신 중심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승천하셨을 때 철수해 가시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을 계속해서, 십자가를 계속해서 새롭게 새롭게 십자가를 발생시키신다.
성도를 인생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여섯 번째 정치적 외곡.
이런 것들을 모르고 끊이없이 교회가 로마 제국흉내를 낸다. 이 땅을 정복하는 제국화 한다.
정치적 외곡, 성경적 근거, 교회가 정치적 운영, 정당으로 운영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성경적 근거는 사단과 예수님이 만나는 시험 대목에서, 마귀가 무어라고 하느냐 하면 세상권력을 예수님께 주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귀가 인간에게 주겠다는 세상 권력의 체계가 무엇인가? 그것은
기존의 인간 정치가 정치를 하는 정치적인 모든 제도와 기능과 행정력을 그대로 교회에 실어 주겠다는 것이다. 요 식대로 하면 무 준다는 것입니다. 요 식대로 하면 교회가 정치적 조직으로 버티어 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악마가 그렇게 사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리드쉽 밑에 모이는 것입니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정치란 힘의 질서 체제, 힘의 질서 운동입니다. 정치란 힘을 어떻게 분배하고 어떻게 모으냐 그것 아닙니까?
조직에 정치를 한다는 것은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줄기 세포에서 황우석인가 노성일인가 주도권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돈되기 때문에, 노성일이는 사업가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앞두고 악마가 인간들에게 심어 준 것은 정치적 힘을 누가 갖느냐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정치적 속성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 힘에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께 고개를 숙이기 위해서 먼저 교회 지도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방법을 이야기 해 준다. 교회에게 머리를 숙이는 방법이 무엇인가? 이것이 정치술이다. 엘룰은 권위의 합법화라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권위의 세습제로 이어진다. 큰 교회 목사가 있으면 그 아들이 있으면 아들에게 목사시켜 대를 이러 충성케 하고, 딸이 있으면 사위가 그 교회를 잇고, 이것이 바로 권위의 세습화, 이것이 바로 악마가 심어준 것이다.

이것은 바로 중세 때 한 영주가 대대로 교회를 물려 주는 것과 똑 같다.

허무주의
허무주의로 인하여 교회가 또 날조 되었다.
허무주의란 도피주의다. 세상 더럽다. 떠나 버린다. 이것은 처음부터 사막에 수도원을 세웠던 사막 수도원에서 시작한다. 교회사에서 조금 보았지요.
세상 권력이 비복음적이라 해서 따로 나와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그것이 처음으로 수도원이 되었고
그 수도원이 자체적으로 개간하니 자본이 생겼다. 자본이라는 뜻은, 돈을 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이라는 것은 축적이 될 때, 자본이라 한다.

축적이 되어서 축적된 돈 자체가 인간을 배제하고 돈 자체가 새로운 어떤 가치를 만드는 시발점이 될 때 이것이 자본이다. 돈을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이제부터는 돈이 인간의 가치를 구분한다. 높은 것도 나누고, 이럴 때 돈이 자본이 된다.

예를 들어서 안경이 만원이라면, 다 만원인데 갑자기 안경이 많이 생산되니, 중고가 오천이라고 하니 요즘 새것도 이천원이다라고 한다. 안경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만원에서 이 천원이 되었나. 그것은 안경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경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자본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가격를 결정하는 것을 자본이라 한다.

이 자본이 수도원에서 처음 생겼다.

그러면 쟈크 엘룰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성경적 핵심은 인간의 선택, 그리고 언약사상이다. 조건 없는 주권의 위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언약이고 선택이다. 이것은 언약을 믿으라 선택을 믿으라가 아니라 지금도 주께서 언약으로 선택으로 일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허무주의 도피주의가 나간다면 이것 자체가 자기가 자신을 구원하는 또 하나의 행위가 되겠지요. 그런 것들이 무엇을 뜻하는고 하면 기존의 교회가 썩었기에 우리가 따로 나가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것도 복음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직업도 없이 아무것도 안하고 오직 산에서 중처럼 도피해서 기도만하고 최소한의 먹을 것만 먹는다고 해서 이것이 기독교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당신이 당신을 통해서 주님의 일하심을 믿는다면 당신이 이 세상에 어떤 구석에 가든지 간에, 탄광구석에 가든지, 어느 구석이 가든지 간에 거기에 대해 놀라지 말라. 지금 이런 것 때문에 신경 쓸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무엇도 포함됩니까?
결혼 문제, 신자와 해야 하는가? 불신자와 해야 하는가. 신자와 해야 된다는 것이 없이 어디든지 간에 무언가 끊고자 한다면 허무주의, 도피주의의 비급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다음 202페이지. 하나님의 성만찬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면,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만찬,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나는 정말 구원받을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다를 또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만찬의 의의이다.
242페이지. 여호와의 언약이 성취 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역사는 가치를 얻는다. 아까 제가 언약이야기를 꺼집어 내었지요.

아홉 번째. 권력과 세력이라는 대목에서, 악마는 인간이 있는데서만 자기를 드러낸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 같습니다. 악마는 인간이 있는데서 자기를 드러낸다.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그러면 악마가 안드러 내는 인간이 있습니까? 없지요.
인간이 있는 곳에 항상 악마는 드러내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그러니 나는 도피했다. 나는 산속에 갔다. 그런다고 악마가 안 따라 오느냐 이 말입니다. 악마는 인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나타나쟎아요.
악마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악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어떤 식으로든 훼방하면, 그것이 악마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쟈크 엘룰은 악마가 지금도 성도를 끊임없이 고소하고 하늘에다가 고발한다. 진짜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기존의 신학자들은 무슨 말을 했습니까?
기존의 신학자들은 성화론을 주장하면서, 성화론과 삼위일체와 결합되면, 인간을 삼위일체 속에 인간을 집어넣어서, 사위일체로 만드는 작업 일환이 성화론이다. 신 너희들 끼리만 노느냐 것이다. 나도 끼어 도.
삼위일체론에서 사위일체로 전환하는 방법론이 성화론이다.
그렇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면, 악마는 지금도 끊임없이 하늘에다가 성도를 고소하고 고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악마가 성도를 고소, 고발하지 말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해도 상관없다고 믿어야 됩니까?
어느 쪽입니까? 악마가 성도를 고소 고발하지 말라고 하나님께 당부해야 됩니까? 상관없다고 해야 합니까? 상관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성도의 신분됨은 성도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를 품어준 분이 있습니다. 이미 긍휼과 자비는 취소되지 않습니다.
긍휼이 무엇이냐 하면 긍휼은 불쌍히 여김입니다. 불쌍히 여김은 처음부터 불쌍히 여겨서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이것은 계속 갑니다. 여기에다 불쌍히 여김받아 구원된 자를 누가 고발합니까? 계속해서 마귀는 계속해서 고발하는데. 여기서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바로
성화론자들이 스스로 양심이라는 것을 통해서 고소 고발을 부추겨 계속해서 고쳐나가면 성화된다는 것이다.
내가 전보다 나아졌구나 지금 이렇게 휼륭해 졌구나. 이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마귀의 고소 고발이 먹혀드는 것이 되는 거에요.

끝이 어려운도 다시 한번 해 봅시다.악마가 지금 성도를 고소 고발하는 것이 누구 뜻입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은 무엇이냐 하면 악마가 성도를 고소고발 하면 성도는 악마를 이기기 위해서 반듯하게 살면 그것은 성도도 신처럼 될 수 있고 악마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악마의 술책에 넘어간 거에요.
왜냐하면 악마는 무엇만 훼방하면 되는 겁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 부셔 버리면 악마는 만세를 부른 겁니다.

성도라면 이래야 돼요. 로마서 8장에 나오듯이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를 고소하리요, 너를 위해 죽으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너를 위해 기도하는데 어떻게 너가 너의 실수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겠는가? 환난이나 핍박이나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것을 믿는 자는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고난 본성으로 자기가 착해져야 하기 때문에 이 능력을 믿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셔야 합니다.

오늘 토요일 공부하면서 좋은 질문을 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뒤부터 자기속에 있는 죄짓는 죄 의식이 사라집니다. 그대로 남아 있습니까 라고 질문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갈 수록 둘 다 또렷해 집니다. 양쪽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은 사탕주면 착한일 한 줄 알고 안주면 나쁜 짓 한 줄 안다. 어릴땐 희미해요. 자립심 강할 수록 둘다 또렷해 진다.. 둘다 또렷해 지기 때문에 악마가 계속 공격하도록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다. 이것이 스가랴 서에 나온다. 여호수아의 옷이 허름하니, 엉망 진창이니 악마나 놀리니 주께서 악마가 지켜 보는 데서 여호수아의 옷을 벗겨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히실 때 악마가 할말이 없다.

지금도 교회에서 교인을 고발하는데, 도대체 교회가 여기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악마의 전당밖에 더 되는가. 이것이 바로 또한 날조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사실 이 대목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데, 앞에도 동의하지 않는 것도 있고, 동의하는 것만 했는데, 좋게 생각하면 되겠지요. 여기 교재를 보면, 교회는 개혁대상이 아니다. 여기서 갈릴레오가 말한 것을 갖고 조그만 낙관론를 꺼집어 내는데, 교회는 개혁할 필요가 없다. 개혁할 교회이면 이미 교회가 아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교회를 억지로 주님의 교회로 끼어 맞추면 안된다.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된다는 것은, 성도 본인들이 너무 잘 알 고 있는 사항이기 때문에, 그 성도에게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 입니다.
문제 있어요. 문제 있냐고요.

자 여기서 마지막 요약하겠습니다.

왜 성도에게 문제가 없는가 하면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당하신 그 수난과 모욕과 무시와 멸시를 지금도 같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게 어려워요. 같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 자체는 역사를 초월합니다. 예수님 당했던 십자가 고난을 함께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어디에 나와 있는고 하면, 베드로 전서 4장. 너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하면 오히려 기뻐하라, 왜 성령이 너희 머리 위에 있다. . 성령님이 머리 위에 있다는 말은 이미 성령께서의 목표점, 성령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확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공로를 증거하기 위해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같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수모에 함께 자꾸 집어 넣는다. 집어 넣는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 다만 아하 주님께서 이런 수모를 당했구나를 아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런 어려움을 당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것으로 교회사를 마치겠습니다.

질문-그렇다면 결국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로 다 만들기 위해서. 아멘입니다. 그러니 강도는 우리와 다른 별난 인간인 줄 아시지요. 강도만 아니라 창녀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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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5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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