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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교회사 8강 녹취강의이사야

Re..교회사 8강 녹취

이름 : 정석훈(IP:)

교회사 8강 녹취

이근호 2006-01-11 17:10:47, 조회 : 10,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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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간에는 개신교가 지난시간 이야기 했듯이 개신교가 교리로 정착이 된다.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주장하던 것이 교리로 굳어진다. 교리로 정착되는데 여기에 기여한 것이 바로 여러 가지 신조들이다. 이 신조들이 등장하게 되면, 신조들은 교리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교리를 지적으로 수용하면 신자가 되겠죠. 지적으로 수용하면 신자가 된다는 편리함을 제공한다. 여기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고 하면, 지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신자면, 신자라는 것은 영적으로 완전히 새사람 되어야 되는데, 영적으로 거듭나야 하는 사람인데, 영적으로 거듭나야 하는 사람이 지적인 교리를 합리적으로 수용한다고 해서 그게 과연 신자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교리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성경 내용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웨스터민스트, 성경 내용의 개념들, 정신들을 축약해서 굳힌 것이 신조들이고, 이것들이 교리가 되는데,
그러한 성경내용을 그냥 굳혀서 그것을 지식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과연 신자이겠는가?
성경의 교리가 이렇게 내용이 이렇습니다라고 해서 그게 과연 신자이겠느냐?
진젤돌프등, 여기에서 독일 경건주의 운동이 벌어진다. 경건주의 운동이란 개신교가 교리화, 스콜라화 하니 여기에 반동적으로 18세기에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난다.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 삶 자체의 획기전인 변화, 중생된 경험이 없으면 과연 신자라 볼 수 없다. 이렇게 되니 신조 교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영적인 정신적인 대변혁이 개인에게 일어나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진젤돌프, 모라비안 집단이 미국영국 왔다가는 여객선에서 존 웨슬레를 만나 영국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킨다.
한편으로서는 과학이 발달되었다. 과학발달이유는 그동안 천주교회에 특징, 한분 하나님 밑에 하나의 기독교지도자 감독, 태양이 둘일 수 없다. 정신적 영적으로 하나의 지시를 따라주어야 한다.

1870년대에 교황무류설이 나온다. 교황에겐 오류가 없다.
천주교에 주눅 들어 있든 것이 소위 개신교가 나오니 아하 진리도 반항할 수 있구나. 진리도 반항이 가능하구나. 진리에 대해서 교회가 주장하는 진리 말고, 개신교는 내 속에 성령, 천주교는 내속의 성령이 아니고 굣회의 성만찬 성례식 할때 임재하시는 성령이다. 성령의 모임에 참여해서 성령의 은혜를 받는 것이고, 개신교는 내 속의 성령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는다. 내속의 성령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이 믿음은 교회 주교나, 사제가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개신교의 이 자유주의는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루터가 외쳤지만 인간들은
세상의 모든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개인 주체의식강화.
루터주의보다 칼빈주의 사상이 온 나라, 유럽에, 인기 있었던 이유는 이 칼빈주의 소명론이 교회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소명 있다면 있는 것이다. 칼비주의 예정론은 교회가 너 구원받아, 지옥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정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노동과 일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자부심 하나가 과학과 기술의 축적과 발전으로 이어진다. 인쇄술의 발달.

과학자들의 모임, 이제는 우리 속에 있는 인간의 이성으로 대자연의 원리와 원칙을 인간 이성의 힘으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사람, 과학자가 천주교를 믿든 개신교를 믿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종교는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전에는 종교가 문화가 아니라 종교는 그 당시 천주교까지는 운명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신의 운명으로.
지금은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문화 활동으로 전락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무엇을 할 까가 중요하다. 신이 있고, 신의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내 행동 여하에 따라 밝혀 질 수 있다.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설명하면 된다. 전에는 성경을 가지고 세상을 살폈는데,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실험과 실습과 관찰을 통해서, 망원경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달을 바라보면서 성경에 없는 내용을 말하면서 그 관찰력을 어디로 적용하겠는가?
그 전까지는 교회의 압박이 있었지만, 개신교는 성경의 우위, 성경이 우선이다.
성경대로 돌아가자고 할 때, 지난시간 성경의 내용은 간편하다. 교회라는 것은 축적이 된다. 관행과 관습이 축적이 된다. 지킬 것이 많다. 그런데 성경으로 돌아가면 교리를 지적으로 수용하면 된다.
경건주의라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변화되면 그만이다.
그런데 종교자체를 벗어난 사람은 이제는 이성의 눈으로 성경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교회 말 안듣고, 나는 이제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겠어, 성경대로 믿겠어라고 뛰어 나온 사람들이 성경이 무엇인데, 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있다면 전에는 인간이 교회를 통해서 신의 명령을 받고 교회를 통해서 신에게 영광도 돌리고 예배를 드렸다. 일곱가지 성례. 그런데 개신교는 이것을 세례와 성만찬으로 바뀌었다. 나머지는 교리적인 설교, 교리에 복종할 때 구원이 됩니다.라고 했다.
신에게 나아가는 것은 결국 성경을 통해서 나아가는데, 이제는 신에게 내가 바로 나아간다.
바로 나가기 위해서는 성경대로 한다니까, 그러면 성경이 무엇이냐를 분석할 수 있는 자격이 인간에게 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런 자신감은 과학의 발달로 되었다. 과학 발달이라는 것은 예측의 능력이 있다. 예상이 있다. 과학이란 예측하고 달성이 된다. 달성 될 때 진리가 된다. 이렇게 될 거야. 인간 속에 영혼이 없어 해부해 보니 영혼이 없다. 항상 눈으로 관찰하고 되풀이 하고 실험에서 똑같은 결과가 나올 때 그것은 진리가 된다. 그리고 쪼개고 분석하면 원인이 나오고, 그 원인을 분석하면 또 원인이 나오고, 동일한 원인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콧물 나고 기침난다. 감기 걸렸다. 옆사람이 감기 걸렸다. 감기가 옮긴다는 것은 바이러스로 옮긴다.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면 된다. 성경이 무엇이 필요한가? 이것을 신과 연결 시켜 버리면,
신에 의한 바이라스, 성경이라는 것이 불필요 하다. 과학으로 신에게 나아갈 수 있다.
합리주의, 합리적으로 맞으면 진리가 된다.
지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일어난다. 지식의 축적이 발전과 발달, 진화가 된다는 말은 신이 만든 이 대자연의 원동력을 신의 은총으로, 신의 성령으로 했지만 이제는 발전과 발달과 진화의 주체자가 인간이 되어야 된다.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갑자기 들여닥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인식들이 자신만만한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자신 만만하게 펴졌다.
내가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면 되고 내가 이땅에서 만들어 가면 된다. 그러면 천국을 만들어나가는 것, 이것이 과학적 지식으로면 되는가?
아니다. 사회적 불평등도 해소되어야 되고, 이웃사랑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 주인공들이 인간이다.
인간들이 성품과 품성의 발전은 당연하다. 인간들이 정신적 영적으로 발전과 진보하면 곧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의 뜻이다.
발전과 진보란 죄악 된 세계에서 의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들이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그리고 찬란한 미래상과 연관시켜 볼 때 인간 속의 품성이 죄악보다 의로움이 나온다면 윤리 도덕이 인간에게 내장되어 있고 신의 뜻에 의해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다면
개신교에서 교리적으로 이야기하면 죄라는 문제, 대신 용서한다는 문제는 다 버려야 한다. 비합리적이다. 고대적 사고방식이다. 무지, 무식, 몽매에 푹 잠겨 있을 때, 지난 시대의, 너무나
우리 지식이 축적되기 전 공포와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시절의 의식상태에서이다.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이제는 내속에 있는 윤리 도덕성으로 이 사회를 살기좋은 좋은 사회로 만들고, 스스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여력, 저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 천년왕국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 우리 힘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런 시대가 유럽에서 합리주의, 이신론, 이성으로 따지는 합리주의가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시비걸고,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을 다 제거해 나가는 분위기가 18세기 영국 미국에 퍼지기 시작해서, 개척시대 전국민이 교회에 나오다가 나중에 3퍼센트 정도밖에 교회 나오지 않고, 유럽의 개신교 카톨릭이 텅텅빈다.
여기에 카톨릭이 위기를 느끼고 전통을 강화하는 옥스포더 운동을 펼친다.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옛날 카톨릭, 전통으로 돌아가자. 교회가 고객을 모으기 위해서, 교회예배당은 객장이 된다. 객장이란 쳐다보고 지적으로 배우면 된다. 그러한 것을 벗어나 카톨릭은 더욱더 카톨릭이 된다.
타협하다 타협하다 너무 벗어 나니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 사람이 옛날 향수에 젓는다. 다시 보수적인 경향으로 돌아가는 몸부림을 친다. 나중 바틴칸회의에서 날아가 버리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전에는 천주교로부터 해방이라고 했는데, 천주교냐 개신교냐 하다가 이제는 천주교, 개신교 합해서, 종교냐 과학이냐의 대립으로 1700년 초부터 종교와 과학이 대립한다.
과학을 받아 들이면 깨어 있는 사람이고 종교에 매인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과학을 하는 사람이 종교쪽을 공격한다. 거기에 대해 종교는 대꾸할 것이 없다. 대꾸하지 않으니, 여기서 공동체 운동이 일어난다. 너희들 과학을 해보니 행복하드냐?
우리는 진실로 성경에 나오는 참된 신의 뜻, 참된 공동체를
과학과 공동체의 공통점은 지상낙원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은 날마다 발전해야 하는 것이고, 공동체는 언제까지 발전을 기다릴 것이냐, 지금 이 바닥에서 해 버려야지, 지금 행복해야지 나중 행복은 보장이 되지 않다. 지금 내가 행복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사회주의 운동이 벌어진다. 사회주의 운동이란 진짜 성경대로 이상적인 공동체를 과학을 주장하는 너희들이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도록 공동체 운동 실험들이 일어난다.
메시아왕국. 후트파, 메노나이트파, 퀘이크파, 몰몬교, 쉐이크 교도등등.
광야의 여인, 독신공동체, 1694년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만들어짐
이것은 계시록 광야의 연이, 마지막 남은 자가 싸운다. 공동체 운동하는 자들이 항상 요한계시록을 많이 푼다. 광야에 보면 하늘나라, 천년왕국을 하기 위해, 예수님 재림을 보기 위해, 지붕위에 망원경을 놓고 천사들이 언제 오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낡은 수도승 옷을 입고 극히 간소한 생활을 한다. 1920년까지 계속됨. 지적, 음악적인 문화를 거부한 단체도 있고 거부하지 않는 단체도 있다.
19세기 소알파. 창세기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롯의 가족이 소알로 피했다. 롯의 처가 뒤돌아 보아 소금기둥이 되었다. 마지막 때에 피하자.
아마나 공동체. 이런 사람들은 어떤 실험들을 했는냐 하면, 공동체 특징은, 모든 정치 권력, 교회든 국가든 다 가라. 우리는 우리마음대로 살겠다 무정부주의. 사유재산을 없앤다. 공동생산 공동분배. 능력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낟.
에베소2장에 나오는 서로 나눠주고 서로 재것이라 여기지 않는 그것을 이상적으로 펼치는 운동. 그러면 왜 성경 연구를 하지 않는가?
성경연구는 합리적인 쪽에서 다 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는, 개신교 오대교리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계속 밝혀 내고 있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 과수원. 과수원에서 공동생산 공동소비를 한다.
죄악이란 이기심가 소유욕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기심 제거, 소유를 제거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함.

이런 것은 다 소규모 종교집단이다.

합리주의 쪽에서도 공동체 운동을 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양심과 이성으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로버트 오웰, 프리웨 쌩시몽, 부르돔
오웰은 실제로 공장을 경영한다. 노동자 복지를 위해 일함.
이러면서 청교도를 비웃는다. 청교도는 노동자가 가난한 것은 죄를 짓고 게을러서 가난하다고 본다. 로버트 오웰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인간다움을 부추겨 주면 얼마든지 그들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인간다 베풀어 주면 그들은 더 신나서 일하기 때문에 자본가도 유리하고 노동자도 유리하다.
이것은 청교도 너희들처럼 세상을 죄악으로 보지 말고 인간들의 선한 의지만 잘 부추기면 언제든지 새로운사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룻소 일반적 의지, 인간 속에는 근본적 자연선, 착함이 있다. 이 착함을 교회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갖고 있지 말고, 일반 시민들이 갖고 있는 착함을 개발하면, 이 사회는 교회가 없어도 성경이 없어도 인간의 양심으로서 얼마든지 좋은 사회를 이룰 수 있다.

쌩시몽은 공상적 사회주의.
이 세상 자체가 이제는 교회 갈 필요 없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착한 심성을 가지고 언제든지 그들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인 낙원을 지상에 건설할 수 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계속해서 문제 수정 보완 개선하여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이 세상은 신이 원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일 이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인간이 이렇게 악하다는 것을 , 과학 참된 이성을 주장했지만 공멸하는 결과를 낳았을 때
인간이 무엇이며, 자연은 무엇이며, 신의 뜻은 무엇이며 성경은 무엇이며 다시 한번 반성하면서 되새긴다.
이때 옛날 개신교들이 주장한 인간이 죄인이며 오직 예수님은 구원자이다라는 것.
옛날 개신교에 있던 죄 관념을 반성하면서 현실에 맞는 새로운 정통으로 돌아가자는 신정통주의가 나온다.

왜냐하면 과학이 발달하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자의 재산차가 점점 더 멀어진다.
실제 19세기 자본가들은 600퍼센트 늘었는데 노동자는 소득이 25퍼세트 줄었다.
점점더 벌어진다. 자본주의가 되면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가 점점 더 벌어진다. 그런데 미국 청교도들을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지난 시간 칼빈을 할때 인간이 갖고 있는 재산도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라고 칼빈이 가르쳤다.
토마스아퀴나스는 나눠주는 것이 복이라고 했다. 옛날 영토국가일때에는 대부분 어설픈 공무원이었다.
부자가 되면 될 수록 압박이 온다. 가난한 사람 주어라. 줄때는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 주라. 그러면 교회가 배부르다.
그 당시 큰 예배당 지을 때, 그 당시 진리는 교회가 독점. 큰 예배당 짓고 사제들 대우를 잘했다는 말은. 이웃 사랑의 수단이다. 그래서 부자에게 내어 놓아라. 이것을
가난한 사람 주면 가난한 사람은 계속해서 어디에 매이겠는가? 돈은 부자가 주지만, 실제로 교회에 매달리니, 정신적으로 교회에 예속되도록 하는 조치하는 방편인데, 이제는 칼빈주의 등장으로 내 안의 성령이기 때문에, 잘 사는 것이 축복이기 때문에, 계속 잘살아야 하니 계속 근검 절약해야 한다. 물론 칼빈이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을 축복이라 말하는데 , 가난한 자에게 줄때 어떤 한계가 있는고 하면, 내 재산이 축적되는 한도 하에게 가난한 자에게 줄것이다. 그냥 가난한 자에게 주면 내 재산이 줄어들면 축복이 아니잖아.
부자 되어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 주어 가난하게되면 본인이 저주받은 꼴이 된다.
가난한 사람은 어떤 수단이 되는고 하면 부자를 더욱 부자 되게 하는 구제가 된다. 베풂이 된다.
그러니 공장을 세우면 보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임금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는 임금 단가가 낮아야 한다.
오늘날 기업하는 사람과 똑같다.
몇 사람에게 주는 것 보다 아르바이트 많이 모아 하면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그만큼 베풀었다가 된다. 이렇게 되면 누구의 재산이 늘어나는가?
그러니 미국기득권자들이 누구인가? 청교도.
이것에 대해 교회가 반발을 하지 않고 호응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교회가 돈이 있어야 한다. 돈줄을 놓치는 안 된다. 돈줄이 부자들이다.

그들의 구원문제는, 교리를 가난한 자나 부자나, 교리를 지적으로 배워, 지적으로 배워, 지적으로 머릿속에 담아 놓으면 구원받는다. 구원론, 성령론, 교회론 외우면 된다.
성례 치리, 예배 등을 외우면 된다.
18세기 중반의 웨슬레나 부흥운동, 조나단 에드워드 부흥운동 할 때 사람들의 관심사는 내가 구원받았습니까 하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성경 어느 구절이 나를 구원했는가에 관심을 둔다.

그렇다면 흔히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하는데. 자유주의 신학이 무엇을 공격하는고 하면, 신을,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공격해서 성경을 하나의 책으로 묶이기 전에, 이미 성경 내용이 각자 일반 사람들 마음에 다 담겨 있습니다, 내장되어 있습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확인시키고 까발리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이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성경을 공격한다고 했으니, 사람들은 성경 자체를 공격할 때.
나중에 가면 신약신학, 구약 신약학이 발달한다. 오늘 신약신학 구약신학하면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옛날 천주교에서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약은 삼위일체로 끝나 버렸다.
니케아 회의 때 칼케톤 신조로,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다 나왔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 지적으로 수용하고 나머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은 일곱가지 성례를 행하면 된다.

왜냐하면 성경의 내용은 교회가 독점하기 때문에 ,교회가 제대로 알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그런데 신약신학, 구약신학이 나왔다는 이 말은 내 똑똑한 머리로 내가 성경을 분석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 선두주자가 바로 스피노자이다. 천재이다.
모세가 과연 모세오경을 썼겠는가?
과연 모세가 흔히 모세 오경을 썼다는데 과연 썼겠는가 안썼다.
왜냐하면 신명기 끝을 보면 모세가 죽은 후에 일어난 일이 있는데 어떻게 썼겠는가?
그전에는 천주교에서 모세가 죽기 전에 앞당겨 계시를 받아 썼다고 주장. 여기에 대해 사람들이 이 주장에 이의를 제의하지 못한다. 이유는 성만찬 없으면 지옥간다. 성만찬을 사제가 주관한다. 이 사제는 교황으로부터 권위를 위임, 교황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니 사제가 시키는 시키는대로 지적으로 수용하면 되지, 어디 성경보고 니가 따지느냐? 혹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사제 신부에게 물어 그 권위에 고개숙이고 복종하면 되지.그래야 성만찬이 효과가 있지.
니가 성만찬 먹으며 하나님이 인정하겠는가? 인정못하지.

그런데 그런 시대가 갔다. 한번 따져보자. 따져보니 스피노자 같은 경우. 이것은, 성경은 하나하나 분석해 볼때 기독교가,
나이마루스-신약을 건드린 사람, 기독교와 예수님은 상관없다. 예수님은 실패했다. 나중에 만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체도 실패했다. 자신이 메시야라고 들고 나오면 호응할 줄 알았는데, 잘 나가다가
막판이 판돈 다 날린 사람이 예수님이다. 그러니 이것은 신에 대한 영광이란 우리 속에 있는 선한 양심으로 충분하지 아직까지 옛날 구닥다리 신화의 개념으로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 된다.

b

스피노자가 구약 모세 율법을 조사하면서, 무엇을 느꼈는고 하면,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 이성, 양심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잠언서를 보니 이것은 특별계시가 필요치 않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라. 여기에 무슨 특별계시가 필요한가?
그러면 구약이란 무엇인가 그 당시 이스라엘 국가를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질서를 잡기 위해 기본적으로 인간속에 자리잡고 있는 법적양심, 윤리도덕에 호소해서 하늘의 신과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이게 나쁜 것이 아니라.
특별계시가 잘못되었다. 이것은, 자연의 심성은 어느 종교든 다 있는데, 기독교만 우수한 종교다고 할 수 없다.
자연법적으로 다 주어진 것이다.
스피노자 이후 다른 종교를 고고학적으로 연구되면서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다른 종교에도 유사한 요소들이 많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성경전체를 하나님의 뜻으로, 그 당시 성경을 신의 계시로 받아 들인 공동체의 음모가 있었다.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코드 같은 것을 밝혀내어야 진짜 사람들에게 성경의 뜻을 제대로 전할 수 있다.
그때부터 성경은 분석용이고, 해부대상이 된다. 해부할 때, 칼로서 사용된 것은, 인간들이 이미 기존에 알고 있다는 양심과 그리고 과학적 인식인 합리성이다.

아스트럭- 이 사람은 창세기 1장을 보면서 왜 하나님 이름이 다 틀리는가? 하나님 이름이 왜 틀리는가?
엘로힘 나왔다가, 여호와 나왔다가 왜 틀리는가? 그 때부터 틀린 것을 조사한다.
엘로힘이니 E 문서, 여호와이니 J문서. J문서 E 문서가 섞인 것이 아닌가? 분석, 분해함.
전에 총신 배재민 교수는 말하기를 요새 구약은 가위와 풀만 있으면 된다.
성경 펴놓고 엘로힘 나오는 문단, 여호와 나오는 문단을 따로 만들어 낸다.

비트-문헌 가설
문서설. 엘로힘 문서 모아놓고, 여호와 문서를 모아놓고, 각자의 문서에 나름대로 스토리가 있다.
그 나름대로의 스토리가 맞을까요 맞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야기가 맞지 않다. 옛날 사람들은 맞지 않을때 둘 다 하나님의 뜻이니 에라 모르겠다 둘 다 엎쳐 버리자.
보는 사람이 이해해라고 하면서 둘 다 붙어 놓고 보니 스토리가 되지 않는다. 흔히 논물쓸 때 남의 책 짜깁기 하면 줄거리 되지 않듯이, 목사 설교시 남의 설교를 짜집어 놓으니 하나의 설교에서 두 가지 상반되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면, 왜 신의 이름이 서로 다른냐에 대해서 다른 합리적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누가 거기에 대해 E니까 함께 있어서.라고 합리적 대안을 누가 제시하는 쪽이 없다.
왜냐하면 히브리 언어가 점점 더 발전하고 유대인들 학자들이 등장한다. 유대인들은 자기언어로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유대교의 신비적인 해석법들이 막 학문적으로 많이 나오면서, 성경 자체, 교리란 껍데기에게 시중들 듯이 성경구절을 꺼집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자체가, 어떤 문맥이 있으면 성경자체가 문맥에서 어떤 뜻인가? 원 뜻을 찾으면 지금까지 들은 교리를 다 버리고, 성경자체에서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가 성경자체 분석에 들어간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교리를 버리고 성경자체를 분석이라는 말이 성립되는가?
글쎄요. 교리를 버렸다. 아마 천주교 개신교 교리는 버리지만 인간 이성적인 선입견까지 버릴 수 있는가?
못 버린다.
신이란 착한 사람에게 복주고 사랑하고 나쁜 짓 하는 사람에게 화내시는 신이시다라고 전제를 하고 성경을 보게되면 그 자체가 조직신학이고 자기에게 교리가 된다.
선입관 없이 교리 없이 그냥 연구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니 이들은 교회에서 가르친 교리를 버리고, 삼위일체 다 버리고,

볼테르 라는 사람은 왜 교회가 삼위일체교리 같은 것을 만들어 냈는가?
교회가 세속적인 부귀영화, 세속적인 것에 탐이 나서 그렇다. 맛있는 것 너희들만 먹느냐? 이 말이다.
교회가 그 사회에서 주도권들 쥐고 권력의 맛을 보았기에 권력을 맛을 보면 민중들을 휘어 잡아야 된다. 휘어잡기 위해서 그동안 철저하게 민중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제는 깨어나야 하니(개몽), 교회라는 영적권위, 정치적인 절대권력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계약에 의해서 인민에 의해서, 스스로 자기의 권리는 자기가 찾아야 한다.
이것이 근대사상이고 이것이 의회제도. 요즘말로는 국회제도이다.
1681년도 영국 명예혁명, 왕이란 상징적 존재이고 실재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프랑스에서는 브로조아, 영국에서는 젠틀맨, 차 양보하는 것. 신사도. 이러한 중상층에 의해서 국가의 모든 것을 유지한다는 말은
국가의 모든 진리와 복음을 그들이 만들어 낸다. 자본주의의 시작.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란 자본에 의해서 모든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가치란 있는 것이 가치가 아니고, 교환이 가치가 아니고 얼마나 남기느냐? 남기느냐 하니 마태복음 달란트 비유 생각이 나지요. 잉여, 얼마나 남기느냐가 현재 갖고 있는 축적된 재산가치를 측정하는 것이다.
남기지 못하는 재산은 재산도 아니다. 칼빈주의 의하면 달란트 비유에 의하면 멋지지 않는가?
많이 남기면 남길수록 하나님의 합당한 사람이 된다. 이런 상공인들이 모여서, 상공인 중산층과 그 당시 귀족들, 귀족들은 왜 넣어 주는가? 귀족들은 아직도 여전하다. 대 토지를 갖고 있다. 큰 토지는, 원래 자본주의가 상공인들은 도시를 형성했지만, 도시만 만들어져 자본주의가 만들어 지지 않는다. 길드라 해서 자기끼리 논다. 이렇게 되면 물류가 유통이 되지 않는다.

대토지를 갖고 있는 기존 귀족들이 자본화 시켜서 도시만 시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농촌까지 확대되면서
전체가 잔본주의가 되면서, 이 자본주의가 국가를 넘어서, 세계시장이 형성되면, 시장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아담 스미스) 이것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고, 가격에 따라 얼마나 내가 많은 재산을 남기느냐가 측정된다.

예를 들면 촌 할머니가 강원도에서 감자를 깬다. 맛있다. 그런데 얼마나 맛이 있을까요? 그것은 전라도에서 캔 감자와 비교해야 한다. 전라도 감자와 강원도 감자를 비교하려면 시장에 내어 놓아 소비자가 비교해 볼 때 어느 것이 최고인지 드러난다. 전라도 사람은 오만원 받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강원도 할머니는 오만원 생각했는데 팔만원 받아 버리고, 오만원에 팔리지도 않고 삼만원, 아니 만원입니다. 자신은 졸지에 만원에 팔게 된다. 오만원이 만원된다. 그러니 노동의 가치는 시장에서 결판난다.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이미 성경을 떠나 버리고(신은 떠나지 않았다), 종교 교리를 떠나버리고, 신앙생활을 하나의 문화 활동, 여가선용이지, 이것 아니면 지옥 가는 것 아니다. 자기가 착한일, 나중에 천국이 있다면 내 마음의 천국이고 이 땅에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고 천국같이 만들면 그 공적이 쌓여 쌓여 죽어도 좋은데 가겠다는데.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심사하고 있다. 성경에 무엇을 빼내기 위해서.
기존에 있던 교리를 다 빼버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자본주의 윤리 도덕관을 거기에 집어 넣기 위해 거기에 맞춘 성경, 새로운 교리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성경을 완전히 분해한다.

이렇게 나온 것이 벨하우젠.
J 문서란 여호와 문서인데, 문서는 편집되었다. E문서도 편집되었다. 편집이란 목적이 있다. 이것을 편집했다.
편집자가 누구인고 하면, 고대국가에는 왕이 있고 사제계급이 있다. 명목상 사제계급이 왕보다 낮지만 왕은 힘과 권력(폭력)이 있고, 사제는 신의 법이 있다. 옛날 왕은 신의 아들이다. 이방국가도 마찬가지이다. 힘은 왕에게 주고, 법은 사제에게 주었다. 여기 밑에 많은 추장들, 호족들, 부족들이 있다. 부족들이 있다. 이것들도 합치지 않으면 왕이 어느새 목이 날아갈지 모른다. 그러니 많은 부족들, 추장들, 유럽같으면 영주들, 영주들 밑에 백성들. 왜 부족들인가? 자기식구들, 즉 이들은 혈연구조이다. 혈연사회이기 때문에 다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김씨 박씨 최씨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강력한 국가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일어나 포로잡히고, 민족과 민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구약성경에 나오잖아요.

민족과 민족, 너 무슨 종족이야, 반지의 제왕 보면 나오잖아요. 영화보면 민족을 치잖아요.

J문서 편집은 다웟시대 때 편집된 것이다. 다윗시대 이후에 12지파가운데 유다지파가 독보적이다. 거기에 형님 봐 주세요 나온 지파가 베냐민 지파, 두 지파가 합쳐서 강력한 나라가 된다. 처음 출애굽에서 나올때 어느 지파와 어느 지파가 우월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지파 지파간에 계급이 없이
공통으로 모세가 준 법에 의해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다윗 네가 무엇인데 하고 반발하여 나온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잖아요.
따라서 다윗이후에 유다나라에서는 무엇을 해야 통치적으로 안정 되는고 하면,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유대지파를, 원래부터 선택하도록 해서! 야들아! 너희들이 몰라서 그렇지! 라는 것을 정신적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새겨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J 문서는 다윗시대 때 유다 지파를 결속시킬, 다지기 위한 것이다.

E문서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에 국한된 하나님이 아니고 영원한 천지창조를 하신 하나님. 엘로힘. 그러니 창세기에 엘로힘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이 같이 등장하는 것은, 이렇게 편집한 것은 다윗이 자기 밑의 백성들을 지배하면서, 유다지파가 왕이 되는 것은 천지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처음부터 작정된 뜻이었다는 것을 다독거리기 위한 조치로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보면 E문서에서 P 문서가 나온다. 또 D 문서가 나온다. 요시아 왕때 제사, 유월절 어떻게 지내는가? 성전 청소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한다. 율법책은 율법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D문서- 신명기 끝에 이스라엘 멸망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명기에 나오는 이 내용이 어떻게 모세가 장래에 대해서 어떻게 깨달았겠는가?
신명기 28장.
재미 있는 것은 1-14절은 복 받는 말씀, 나머지 뒷부분은 저주로 도배를 해 놓았다. 29,30,31장 32장은 아애 저주 받는다고 작정해 놓았다.
마치 이걸 보면 이스라엘 백날 해 봐라. 너희들 쫓겨나지. 너희는 여호와를 안 믿고 다른 신을 쫓게 되어 있어. 이런 이야기가 쭉 나온다.
32장15절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이 여겼도다.
완전히 저주로서.
32장6절.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렇게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희 하나님이 아니시냐?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지금 모세가 이야기 할 때 이 사람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 갔습니까?
들어가지도 않았다.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들어가서 이렇게 망한다까지 이야기 다한 것이 신명기이다.
이것은 나라가 무언가 경각에 달렸고, 나라의 운명이 곧 이방 나라한테, 바벨론에게 망하기 직전에 옛날에 흘러흘러 내려온 전승들, 책이 아니고, 전설 중에서 요시아가 편집했다. 현재 자신이 처한 삶의 정황에 비추어 성경 여러 가지 가운데서 뽑아내 백성들에게 다시 신앙을 북돋어 주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모세의 이름을 부친 것은, 모세 아니면 안 먹어 줍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영웅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모세밖에 없다. 모세의 말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과 똑같다. 그리고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 말 듣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으니 무조건 한다.
그러니 종교적 힘으로 결속케 했던. 그때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때 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서적이 바로 성경이다.
이 말은 그러니 지금은 성경책이 필요치 않다. 스피노자 말대로 구약 성경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신의 뜻이 이것이다는 말은 이러한 구약성경에 나오는 율법적 요소는 이미 우리 속에 다 들어 있다. 로마서 봐라. 로마서 2장 보아라. 이방인에게 양심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구약이 필요없다.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J.E.P.D. 4 문서설을 벨하우젠이 이야기함.
이후에 양식학파가 나온다.
시, 고백, 성경책은 하나의 문학적인 양식이다. 소설, 시, 희곡 등.
그 양식들이 되기 위해서는 양식을 만들어내는 그 당시 사회적 형편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모빙켈, 궁켈. 궁켈은 시편에 나오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니, 그때 원주민들이 매해연초기 되면 신에게 제사하면서 현재 왕을 중심으로 해서 토착 신과 계약을 갱신한다. 일종의 공동의회이다.
올해도 당회장 목사님으로 모시겠습니까? 예 하면 계약 갱신.
위임목사라면 계속가지만. 임시목사라면 갱신해야 한다.
왕이 갱신을 해야 할 이유는 옛날 고대인들은 왕이 신의 호응을 받지 아니하면 그 해악이 백성에게 온다.
왕이 불쌍해요. 왕은 백성들에게 이용당한다. 왕이 좋아 보이지요.
그러나 왕은 백성들에게 배려를 해야 한다. 옛날부터. 어떤 집에 재앙이 오든지 가뭄, 홍수, 기근이 나면 왕이 알아서 신에게 빌어서, 그런 자연 재앙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도록 중간에서 해 주어야, 진짜 그것이 신의 아들 답다는 말이다. 따라서 왕의 입장에서는 백성들이 신의 아들이라고 하니 신의 아들 융내를 내어야 한다. 그 흉내가 무엇인고 하면
신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그때부터 신의 행세를 해야 한다. 그 대신 막대한 재물은, 신
신의 아들인데. 신의 아들이라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지상의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신의 아들답게 무엇인가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광야에서 백성들이 예수님께 당신 만나 내릴 줄 아느냐? 라고 묻는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만나보다 더 귀한 생명 떡을 너희들에게 주겠다고 하셨다. 왕 삼으려고 할때 피하셨다.
이게 무엇인고 하면 왕이라면 왕이 신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을 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시편에 보면 정기적으로 갱신할 때 흘러온 구약 전승들을 모아서 지금 유대왕은 진짜 계약이 갱신된 진짜 하나님이다. 이런 양식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삶의 자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궁켈, 모빙켈. 원주민 양식과 애굽에서 들어왔던 이스라엘 양식이 구약성경에서 부조화스럽게 섞여있는가를 골라 골라내면 우리는 그것을, 혼합된 이전의 분리된 다른 사상들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양식학파가 지나고, 전승사. 폰라드.
폰라드는 신앙고백이 서로서로 그 시대 합당한 신앙고백으로 집권자들, 왕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당시 백성들이 자기 신앙으로 고백한 것을 이어 이어서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성경내용이 일관성이 없다는 말이다.
그냥 다른 잡글들이 서로 얽히고 섞여서 마치 한 책처럼 인정하는데 우리 똑똑한 인간들이 그걸 모르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성경을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의 글인데 왜 지금까지 사람들이 하늘로써 뚝 떨어진 하나님의 글로 보는가? 답답해 미치겠다. 그 사람들의 주장이 답답어 미치겠다는 것이다.
옛날 신,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옛날 구닥다리 신앙으로 되돌아 가느냐? 지금 식대로 이 시대에 맞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 하는 답답함으로 구약성경을 보았다.

신약을 보면 더 가관이다.
라이마누스(17세기) 스트라우스. 부셋트, 리츨, C H 다드, 바이스.
라이마누스는 주장하기를 예수님은 자신이 정치적인 메시야라고 허풍을 떠니 제자들이 그런 줄 알고 따라다니다가 아 아니네. 속았다. 죽은 후 허전하니 조작해서 만든다. 시체를 훔쳐놓고 부활했다고 우긴다.

파울로스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떡을 뗀 기적을 합리적으로 해석한다. 오병이어의 떡을 땐 것은 떡을 뗀 것이 아니라 그 중에 부자가 있었는데, 강의를 듣다 보니 시간을 보지 않았다. 안보고 점심시간 되었습니다. 아이고 점심시간 되었나, 배고프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떡을 줄게 하는 그 소리에 감동받아, 맞아 내가 떡을 갖고 있지. 나누어 주어야지. 부자가 나누어 주었고, 부자가 오천명을 다 감당을 못하잖아요. 사실은 각자 도시락이 있었다. 옛날 강의가 한 두시간이 아니었다. 강의에 너무 도취되다 보니 도시락 먹는 것을 잊어 버렸다. 몇 명이 난로에 얹어 먹었는지 모르지만, 까먹은 것을 가지고
기록한 사람들이 사기를 치기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라고 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은 것은 물위를 걸은 것이 아니고, 물길치는 바닷가에 있으니, 먼곳에서 보니, 한 제자가 예수님께 너무 충성되어 야. 뜬다. 스승에게 신기한 것이 있으면, 곧장 오바되어. 예수님 물위를 걸었다. 우리 선생님 최고야 하니 물위를 걸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스트라우스. 헤겔의 정반합을 주장하여. 예수님이 정이라면, 제자들의 조작들은 반이고, 자신은 다시 합을 내놓는다. 이 사람의 주장은 마가복음은 믿을 것이 있는데 나머지, 마태, 누가, 요한은 완전히 엉터리다. 뒤에 갖다 붙인 것이 많다. 이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왜 주기도문이 틀리는가? 모든 성경에나오는 이야기를
4복음서를 대조해 보니 맞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무엇인가? 예수님 주변의 이야기를 한곳에 끌어 모아 각자 전도 하는데 그것이 유용하도록 써먹었다는 것이다.

바우어-팔레스틴 기독교 따로 있고, 헬라 기독교 따로 있다. 이 두개의 기독교가 다투어 종합적으로 나온 것이 사도바울이다. 그러니 세 가지 다 틀렸다는 말이다. 베드로 사상과 바울 사상이 맞지 않더라.

부세트-예수님은 인자를 주장했고, 제자들은 주로 만들었고 사도바울은 영으로 만들었다.
팔레스틴 기독교에서는 인자,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는 팔레스타인, 땅 끝까지는 안디옥, 팔레스타인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은 인자, 즉 메시아, 제자들에게는 주가 되고, 사도바울은 영으로 조작해 냈다.

슈바이쳐-종말론적으로 보았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곧 임할 줄 알았다. 과대망상이다. 임한다. 임한다. 임한다. 그 과대망상이 실패했다. 진짜 기독교는 사도바울이 기독교를 만들었다.

이들 공통점은 신약성경의 내용들이 서로 충돌되고 서로 융합 될 수 없는 각각의 사상들이 한 곳에 혼합되어 있는 책이 신약 성경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이 그러하다.

바이스- 두 문서설을 주장했다.
마가문서와 Q문서를 주장한다. 마가에 없는 것이 마태복음에 있고, 마가복음에 없는 것이 누가 복음에 있다.

하르락-교회사. 지금까지 교회사는 헬라철학으로 각색되었다. 그 껍데기를 확 제거하면 참된 예수님이 나온다. 기독교를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자. 상당히 무언가 복음적인 것 같죠.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의 정신은 산상설교밖에 없다. 산상설교란 지상에 천국만들기, 윤리도덕이다. 리츨, 하르낙이 주장했다.

불트만- 양식을 신약에 적용시킨 사람이다. 여러 가지 양식들이 섞여 있어 그것을 다시 분석해야 한다.
그러면 기적의 경우는 무엇인가? 기적이 일어났는가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기적은 의미가 중요하다. 실제로 일어난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의미가 중요하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중요하지 않고, 이것이 역사적 사건이냐가 중요하다. 역사적 사건이 될 때 그 의미가 오늘날 신자의 마음에 동일하게 역사한다.
성경의 내용이 진짜인가를 묻지 말고, 현대인에게 맞도록 각색해야 한다. 재해석해야 한다.
기적, 십자가 부활이 중요치 않고, 부활신앙이 중요하지 부활사건은 개뿔도 중요하지 않다.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이 살았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지 실제로 일어난 것은 의미 없다고 본다.

브뢰메- 메시아적 은닉사상. 예수님은 자꾸 메시아 라는 것을 쉬쉬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메시야 쉬쉬한 것을 진짜 메시야라고 후대인들이 곡해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항하는 근본주의자들.
어떻게 대항했는가를 다음시간에 알미니안 아브라함 카이퍼, 신정통주의자.

폴틸리히-하나님 자체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면 하나님을 존재케 하는 존재가 있어야 된다고 하지 말고, 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고 존재의 기반으로 보자.

세속화 신학- 신은 죽었다고 본다. 이 말은 신은 현대에는 의미가 없다.

본회퍼- 지금 이 시대는 성숙된 시대이니 옛날 사람들과 같이 어린아이와 같이 가르치지 말고 성숙된 성인들에게 합당한 그러한 새로운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숙된 것이 무엇인가 사회복음이라해서
라이센푸스- 사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점점 키워나가고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마치 씨앗이 커지는 것처럼, 씨앗이 열매는 맺는 것처럼, 겨자씨 비유, 이 사회 속에 하나님의 이웃 사랑이 퍼지면 점점 사회가 발전한다고 했다. 이것이
일 이차 대전으로 그 허망한 환상이 다 깨어져 버렸다.

여기에서 칼바르트 위기의 신학.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위기를 주신다.
다음 시간에 보수주의가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보겠습니다.
지금 교회밖에 젊은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들은 선배들이 다 한 것이다.
다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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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5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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