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교회사 4강 녹취
Re..교회사 4강 녹취
이름 : 정석훈(IP:)
교회사 4강 녹취
이근호 2005-12-29 16:58:36, 조회 : 14,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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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삼위일체의 모든 형성과정이 회의를 해서 결정했다.
그 회의를 할때 그 회의를 주관한 사람은 황제이다.
황제인데, 주로 누구인고 하면 주후 4세기 이후, 로마 황제가 로마를 둘로 쪼개 버린다. 이유는 반란이 많이 감당할 수 없어서, 왕이 통치를 할때, 업무 과중으로 동쪽과 서쪽을 나누어 로마의 위세를 지탱하려고 했다.
동쪽에 있는 나라를 비잔티 나라, 콘스탄티노플이 수도이다.
지도를 그려보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마케도니아, 카스피해, 흑해, 터키, 안디옥, 예루살렘, 카르타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북쪽은 다른 민족이 살고, 동쪽과 서쪽을 나눈다. 동쪽은 콘스탄티노플.
동쪽을 동방신학이라고 한다. 이집트, 카르타고 합쳐서, 서방신학이라고 한다.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이 나누어진다. 이유는 동방신학쪽에서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하고, 서방신학은 예수님의 신성이 인간이 되었다를 강조한다.
서방신학은 예수님께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서방쪽에 로고스 사상이 있었다.
로고스 사상은 보이는 인간속에 들어 있는 신, 신이 안보인다. 신은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신이 인간개개속에 들어 있는 신이 로고스다. 그 로고스가 들어 있는데, 인간은 현실적으로 고통과 아픔과 괴로움속에 있다. 그래서 인간을 고통과 아픔과 괴로움속에서 해방시키려면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이 동방에서 들려 오니, 예수 그리스도가 참 로고스가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로마사람들이 기독교를 흡수한 이유가, 로고스가 하급신이다. 보이지 않는 신이 보이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 서방 로마 사람들은 기쁜소식, 복음으로 받아들였다. 제가 볼 때에는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기독교가 아니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서방신학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동방신학.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신이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동방이나 서방이나 복음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온 것이 아니다.
인간의 종교성을 예수라는 사람을 그럴사 하게
유대교 종파, 예수라는 교가 사도바울의 십자가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되는가?
채워줄 수 있는가?
하나의 종교를 만든 것이 기독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드니, 다급함을 느껴 압박을 가한다. 압박을 가하니 그 때부터 순교의식이 싹텄다.
로마의 정치적 힘에 대해 교회가 자체적으로 단도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교회의 계급화가 나온다.
터툴리안, 한 하나님 밑에는 한 감독, 한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실 때 하나의 감독만 주셨다. 그 감독, 전세계에 하나의 감독을 놓고, 다섯 개 파가, 예루살렘,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로마. 하늘 아래 하나밖에 없는 교회 총감독의 보스를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
조폭이다.
각자 각자 우리가 하늘 아래 하나밖에 없는 주도권을 우리가 쥐어야 한다가 주장했는데.
동방신학은 로마황제의 힘을 빌렸다.
4세기이후 서로마는 날아가 버린다.
게르만족, 독일, 윗동네 전부다 게르만족이다.
덴마크 섹슨족, 바이킹족, 훈족, 고트족, 반달족, 고트족에서 고딕이 나온다. 이 북쪽에 있는 총체적 민족이 게르만족이다.
훈족이 쳐들어 와서 게르만 족이 밀려 밑으로 내려왔다. 훈족은 흉노족에 밀려서 왔다.
서로마는 별볼일 없다.
우리가 관심있는 것은 교회역사이니, 삼위일체 논의하면서 황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동방신학이 주도권을 쥐려고 했다.
서방신학은 베드로의 무덤이 로마에 있다. 예수님께서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으니,
한 하늘 아래 총두목도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뭐 그리 탐이 나는가 하겠지만, 교회가 하나밖에 없다면 교회하급신부들 교직자들의 임명, 파직을 마음대로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도권 쥔 교리를 다른 지역이 따라 가야 한다. 물론 나중에 타협을 한다. 일등 로마, 이등 콘스탄틴 노플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태어난 장소가 아닌가?
그렇다면 주도권을 예루살렘이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데, 역시 주도권은 교인수에 관련되어 있다.
그 당시 경제체제는 봉건사회이다. 농사짓는 것이다. 농사지을 때 재산은 토지가 있으면 된다.
주전 1세기부터, 유대묵시문학에서 연옥설 비슷한 것이 나온다.
14세기에 완전히 구축된다.
연옥이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어디에 가는가? 패자부활전.
연옥설이 로고스 사상과 결부되어가지고, 결국 죽고 난 뒤의 토지, 쓸만한 강가의 옥토를 교회에 기증하게 되면, 신자가 자신의 조상이 지옥의 고통에서 면제 되어 천국에서 금의환향 할 수 있다.
재산과 사람숫자만 있으면 파워가 된다. 교회가 크다는 말은 그 교회에서 분위기상 형성된 교리나 신조가, 전혀 다른 쪽 교회에서도 따라야 한다. 자신들의 노림수와 상관없더라도 따라야 한다.
니케야 회의
아리우스, 동방,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지만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신이기 때문에 구약에 의하면, 둘 셋이 아니라 나외에 다른 신이 없다. 신을 둘로 만들면 안된다. 그런데 예수님도 신이라고 하니 신은 신이로되 하급신이고, 예수님은 본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에, 자신을 아들이라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먼저지 아들이 먼저일 수 없다. 아들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아들이 있다.
처음에는 아버지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아들이 있었다.
니케아 회의에서 삼위일체교리를 결정했다는 말은, 그 다음 21차례공의회가 있더라도 그것은 회의가 아니라 니케야 회의를 박수쳐주는 것이다.
하늘아래 하나밖에 없는 교회의 모든 주도권은 수장들은 로마교회가 쥐고 있다.
모든 교회의 아버지, 통수권자가 되는 정치적 승리를 니케아 회의에서 이루었다.
그러니 지난 시간에, 니케아 회의가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그러면 니케아 회의 후, 325년 후, 그러면 로마 교회 중심으로 모든 것이 재편성됨. 신조 확정, 개신교도 니케아 회의에 기초해 있다.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한 것이 삼위일체이론이다.
삼위일체 할 때 위와 체.
성경에 삼위일체, 위라는 개념이 있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모아 놓고, 삼위일체를 가르쳤는가?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라하면 삼위일체가 맞다고 하고, 아니면 이단이라한다.
삼위일체 발상자체가 성경에서,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나 체 용어자체가 예수님께서 용납한 용어가 아니다.
교리라는 것을 만들 필요가 없어요.
교리라는 것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주님의 소유의 교회가 아니라 자기 소유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있다. 집단화 정치화 하기 위해 만들었다.
로마세력의 압박에 힘을 모아야 하고, 적과 동지를 구분하기 위해 신조를 만들어야 했다.
도나투스, 터툴리안은 성찬식을 참석하지 않으면 구원 못받는다. 성찬식은 성직자가 해야 한다. 성직자는 로마 대주교로부터 인정받은 사람의 성찬식을 참여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렇게 나오니까 그러면, 갑자기 로고스 철학과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가 혼합이 되어 이상스러운 복음이 없는 교회로 확산, 사람들이 몰려옴, 몰려운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
초반부터 사람들이 얼마나 복음에서 이탈했는지를 한 번 보세요. 잘못되었는가?
세례를 주든지, 성례식을 할 때, 성찬식을 하든지, 할 때 반드시 사람이 한다.
자격 시비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자격자가 없는 자가 성례식을 행할때, 그 때에 과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자기 백성으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엄청난 심한 박해가 왔을 때 순교자들도 있었다.
너 그리스도 전할래 전하지 않을래 할 때, 변절자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 교인수가 많다. 성직자가 변절한 경험이 있다. 박해가 수그러 드니 .
왜 그리 교인수가 많은가?
농사짓는 사람들, 노예들이 많았다.
로마는 농경시대. 시내 삼분지 일이 노예였다.
사도바울이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것에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이유이다.
그만큰 적었다.
노예들이 죽고 적어진 후 농사지을 사람이 없으니 밑바닥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부구조는 귀족, 사치, 향락, 문화예수를 즐기는 사람들.
하부구조가 무너지니 상부구조가 무너졌다.
살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이 몰려올 때 이들이 몰려온 이유는 자기 영혼에 대한 극정, 스토아 철학, 플라톤 주의, 예수 이야기가 더욱 구체적이다.
떡을 먹는다. 피를 마신다가 얼마나 감격적인가? 피를 믿으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지도자가 인정하는 자가 주는, 교회 총지도가가 인정하는 신부가 주는 성만찬 떡과 살을 먹으면 구원 얻는다.
그렇게 구원얻는다면 나는 맨날 가겠다. 성당.
먹고 마시는 것 얼마나 쉬운가. 먹고 마시면 되지 않는가?
세례, 물속에 들어가면 된다.
너무너무 쉽다. 믿음으로가 아니라 교회등록해 그 조직체의 지시를 따르면 구언받는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온다. 어중이 떠중이 다 몰려온다.
이때 터툴리안이 분개했다. 회개조항을 삽입한다. 이렇게 하니 문제가 생긴다.
회개를 했는데 하고난 후 구원을 받는가 받지 않는가?
한번은 봐준다. 회개하고 난 뒤 지은 죄는 회개하면 안되고 참회해야 한다.
그 다음은 안된다.
개가 토한 것을 먹는 것처럼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꾀를 낸다.
회개했다. 죄를 지었다. 무슨 죄인지 몰라. 무조건 자신이 죄를 지었다 하면 죄를 지은 것이다. 참회하겠습니까 안하겠습니까?
2005년도에 참회하면 안된다. 죽을 때까지 참회하지 않는다. 계속미룬다. 죽을 때 딱 참회한다. 그러면 터툴리안에 의하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판입니다. 개판.
313년 콘스탄틴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국가가 보호해 주겠다고 한다. 데시우스왕때에는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버린다. 이 말은 모든 공직자는 기독교인이 되어버린다.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이것에다가 그 다음 국왕이 국교로 선포하니, 출세할려는 자들은 다 교회로 나오라는 것이다. 사시 행시 합격하려면 기독교 신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공직은 기독교신자여야 한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출세할 수 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오니 바빴다. 그래서 강으로 가서 한꺼번에 세례를 주었다.
교회가 남아 있는 재산으로 구제한다. 어중이 떠중이 다 모이니.
신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 아무것도 없다.
다만 교리는 신부들만 알 고 있으면 된다. 이 교리가 주도권 싸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삼위일체, 위, 체라는 개념, 성경에 없는 용어를 동원해 삼원일체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삼위 일체를 예수님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하셨다. 하나님도 예수님안에 계신다. 성령님도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삼위일체는 말이 안된다. 교회안정후 키에르니무스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 암브로시어 유능한 설교가, 그 다음 6세기에 어그스틴이 들어 온다.
이때는 이미 로마 전체에 기독교가 퍼졌다.
서로마, 476년에 나라가 망했다.
서고트가 와 버리고, 동고트(불가리아등), 반달족-잔인하기 그저 없는 자- 로마공격-한때 로마가 유명, 로마공격하면 자신이 최고인줄 알고,
앵글로 섹슨족은, 옛날 영국과 전쟁함.
프랑크족.
망한 후에는 클로비스라는 사람, 프랑스의 단군이다. 클로비스는 아리우스 사람, 로마 황제를 이용하기 위해, 아리우스파에서 로마카톨릭으로 개정한 후,
그 당시에는 왕이 개종하면 백성이 다 개종한다.
여기에서 멜로빙그 왕조, 그 왕가 형성하면서 프랑크 왕조가 세워진다.
독일의 단군 할아버지 오토1세.
초반기 당시에는, 어거스틴 당시 기독교는 형식적 기독교.
펠라기우스
키에르니무스-불가타 성경, 라틴어 번역이 퍼지면서, 성경 보면서 이건 너무 심하다, 너무 개판이다 회의를 느낀 사람이 펠라기우스이다.
이 펠라기우스와 어그스틴의 사상을 다루고 싶은 이유가 이 교회사가 항상 여기에 머물러 있다.
삼위일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중요한 것은, 어그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시간에는 펠라기우스와 어그스친 사상을 중점적으로 보아야 한다.
펠라기우스 어그스틴은 놓치면 안된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교회사가 세상역사가 되어 버린다.
펠라기우스 사상을 먼저 봅시다.
안디옥의 이레니우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예수님이 누구냐에 관심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관심사가 초기 복음이라는 말도 안되는 포장지 안에 들어 왔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사람도 영생불사할 수 있다는 이런 노림수를 가지고 기독교를 이해하고 기독교가 번창하였다.
펠라기우스: 354년 영국출생, 로마로 왔다. 소위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으면서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엉망진창인 세상풍조, 교인, 전 백성이 다 교인, 영주가 교인이기 때문이기 때문. 옛날에 유럽의 농토가 어떻게 관리되었는고 하면, 전쟁을 하다 보니 전쟁을 위한 토지관리이다. 전쟁을 위해 어떻게 토지를 관리하는가? 전쟁하려면 군사가 필요하다. 기사들에서 봉토를 내린다.
봉건 사회, 토지 소유자는 왕이 되고, 봉토를 받은 신하는 임대차 계약이 된다. 세금을 내고 전쟁시 군인으로 봉사한다. 이 밑에 또 봉토, 전문적인 농사꾼이 있다.
왕이 왜 나눠주는가.
전쟁시 군사필요, 양식필요, 병창기, 물자들이 필요하니, 옛날에는 말이나 갑옷들이 비쌌다. 이런 것은 영주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 사람들이 세금내지 않고 도망가면 안되는가? 죽으나 사나 해야 한다. 상공업도 도망못간다. 어떤 사람이 토기를 만든다면 죽자 사자 만들어야 한다.
이런 봉건사회가운데서 영주가 교회를 만든다. 큰 농장에 .
이 교회의 주 감독, 신부를 자신이 아는 사람을 집어 넣는다. 그래야 농꾼들이 한 하나님밑에 결집. 저 영주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한다.
영주에게 질서가 잡힌다.
이런 판국에 너무 엉망이다. 이것은 교리가 잘못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도 전혀 행동 개선의 의지가 없더라.
펠라기우스, 인간은 본성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에 자체적으로 선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펠라기우스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자유의지가 있다고 해야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가 의미가 있지 않는가?
시계, 에어콘, 컴퓨터 보고 바르게 살아라고 하면 의미가 있습니까? 기계인데, 입력하는데로 나올 뿐이다.
반드시 자유의지가 있어서 바르게 살아라는 명령받을 만한 대상자가 된다.
인간은 선하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창조때부터 인간에게 있으면 아담의 죄가 그 능력을, 착할 수 있는 능력을 파기할 수없다. 이게 펠라기우스의 이야기이다.
3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줄,
현재 인간의 상태는 아담의 타락이전과 모든 면에서 지금도 동일하다.
아담때나 지금 우리나 똑같이 마음먹기 달렸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논장을 보면, 교회가 지금이니 그때나 달라진 것이 없다.
교회가 10년이 되어도 100년이 되어도 달라진 것이 없다.
어느 경우든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다 나열한 곳은 없다. 왜냐하면 이단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단이 되었기 때문에 말을 안한다.
그러나 만약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다 들어 보면 세상에 오늘날 교회와 똑 같다.
그래서 오늘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논쟁만 알아 버리면 신학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나왔다. 삼위일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학에서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 전부다 포함한다.
아마 펠라기우스 이야기 듣고 반박하라고 하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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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페이지. 중간. 인간은 선과 악을 일일이 선택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조화를 이룬다는 자유를 강조했다. 그러니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생활에 크게 작용하지 않으며 어거스틴이 주장한 인간의 죄의 필연성이 맞지 않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타락을 인정한다.
아담의 자연적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정신적 죽음이다. 아담은 다른 인류와 단절된 개체이다.
아담 이후 태어난 인간은 아담이 한 죄의 책임에 대해 물려받을 이유가 없다.
만약 아담의 죄를 물려 받으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담의 죄에서 못벗어나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게 살아라늘 말씀이 모순되는 말이다.
그당시 펠라기우스가 통탄하면서 교회가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선한 사람, 바른 인간, 하나님 영광이라고 해야지. 아담이 범죄하여 우리는 날 때 부터 죄인이다. 그러면 우리는 죄인되는데,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짓는데 어쩌란 말인가? 잘못에 대해 반성은 크녕, , 변명으로, 자기 잘못을 하나님께로 돌려버린다.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가 없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란 말이 아니라 다만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죄를 지을 가능성마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 마져 부정하면,
인간이 무얼해도 죄가 되는데. 그러면 상식에 어긋나지.
그렇다면 어거스틴이 주장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죄의 필연성을 부정한 것이다.
아담의 죄가 유전에 의해 후손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본보기에 의해서이다.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본보기이다. 아 저러면 안되는 구나 하는 것이다.
요사이 중보기도가 마찬가지.
예수님의 본보기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것을 물려받습니까?
아담의 죄를 우리가 물려 받는다면,
한사람의 죄가 우리에게 물려준다면,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됩니까 능력이 됩니까? 어때요?
예수님 착하지요, 본받아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가 우리를 완전히 통치하고 지배한다.
마치 아담의 죄가 우리를 지배하듯이. 그러니 아담 전체가 예수님과 우리 관계의 표상이 된다. 이것이 로마서 5장이다.
그런데 펠라기우스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은 그냥 본보기이고, 예수님도 본보기이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펠라기우스같이 어거스틴에게 따지는 사람이 그 당시에도 이런 교리같은 것을 갖도 따지지 않았다.
죄가 인간을 얼그매는 힘은 죄는 습관, 고치면 고쳐진다. 고치면 고쳐지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원죄 때문에 어쩔수 없다고 한다.
그러지 말고, 고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고친다. 이것이 죄이다.
인간은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범죄하고 죄를 배운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옳은 말만 한다.
성경을 전혀 보지 않아도 고개 끄떡이면 참 이렇게 휼륭한 사람.
4페이지 그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논하기를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하니 착한일 악한일을 행한다는 것을 말하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능성을 주었다.
가능성에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면 윤리와 성화론이다.
만일 가능성이 없으면 인간에게서 윤리도덕이 나오지 않는다.
윤리도덕과 성화론이 되려면 인간에게 무언가 가능성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펠라기우스 가능성.
가능성을 기초로 삼아야 무엇이든지 다 꺼집어 낼 수 있다. 펠라기우스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합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야기 하니 오늘날 천주교 개신교 이야기와 똑같은 것이다. 은총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지심이란 하나의 본보기에요. 구원은 자기 하기 나름이지 예수님주신 선물이 아니에요. 현재 한국교회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주되 기적적 은총이 아니고, 간접적으로 분위기 잡는 것이다.
예를 들면 회식 갔는데 일차 저녁먹고, 이차 노래방갔는데, 수줍은 많은 여 사원에게 불러라 불러라 이것이 은총이다. 불러라 불러라 할때
애라 분위기 따라서 노래 부른다.
이때 노래를 잘 불렀을때, 분위기 띄워 져서인가 아니면 자기 가능성으로, 잘 불렀는가?
여기서 불러라가 은총이다.
그것은 행동의 가능성이지 의지와 행동 자체는 아니다. 분위기 조성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쉽게 이룰 수 있다. 불러라 불러라 할때 쉽게 부른다.
자극을 유발시켜 하게 한다.
이것은 창조의 은총이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인간의지에 새로운 것을 택할 수 있는 특별한 압력을 가해 질 수 있다.
불러라 불러라하고 안불러, 입벌려, 불렀다 하고, 이게 무슨 노래인가? 인형갖고 노는 것이지.
펠라기우스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겨서 선을 행할 수 있는 그런 은총을 주었지 실제로 선을 행하는데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께서 주신 세가지 은총.
이렇게 상식적이고 납득이 잘된다.
펠라기우스. 본래 은총, 창조은총, 계시은총, 가르치는 은총.
노래 불러라도 은총이고, 노래 못불러요 하니, 김과장 한번 불러 주라. 기차게 부른다. 가르친다.
분위기 조성도 은총이고, 계시도 은총이고, 마지막으로 놀랍게도 용서의 은총.
이 은총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게 노력하게 하며,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용서를 해준다. 목적을 지닌 용서이다.
불러라 불러라 , 분위기 파악, 첫 번째 은총, 이렇게 불러라. 두 번째 은총.
노래 못벌러도 월급 줄께. 회사 쫓아내지 않을께. 세 번째 은총.
이 세가지 은총.
노래 잘하고 못하고 모든 것을 용납할 자비가 하나님께 있으니, 이렇게 해 주는데도 너가 바르게 안 살아 분위기를 한껏 띄워 주는데 까지 조성해 준다.
용서란 무엇인고 하면, 행동하지 않았음을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고 미리 가르친다. 너가 이렇게 하면 용서해 줄게 조건부로 거는 것입니다.
완전히 펠라기우스 펜이 된다. 펠아기우스 듣고 난 뒤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유의지를 갖고 ,
첫째 인간에게는 이성적 의지와 함께 원초적으로 부여된 힘으로 인하여 죄없이 살수 있는 능력이 있다.
둘째는 율법과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 계시가 하나님의 은총이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율법이 인간본성과 인간구원에 적합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 어거스틴이 반박한다. 어거스틴 반박전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봅시다.
이 펠라기우스에 대해서, 세 번째 용서.
하나님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너무 잘못되었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으로, 우리는 양심으로, 양심으로 참 잘못되었습니다. 할 때 하나님이 용서안해줘, 하면 너무 무자비하다. 용서의 은총이란 항상 용서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차원에서 은총이다.
엄마가 아이보고 너 잘못되었다고 할때 잘못했읍니다. 할때 용서안해줘 하면 은혜가 아니다.
나중에 회개만 한다면 용서해 줄께.
용서가 조건부 용서이다. 이것이 은총이다.
펠라기우스 같이 설교할 때 한국교회나 천주교가 대부분의 교회에서 거부감을 나타낼까요?
거부감 보다 환호성을 지런다. 나도 인간답게 살 가능성이 있구나. 이것을 두고,
펠라기우스의 두 번째 은총, 성경말씀의 교훈, 가르치는 것, 이런 가능성을 주면, 사람들이 자기 가능성을 높여 자기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더 성경대로 살기에 정진한다. 신앙의 진보를 나타낸다.
그리고 성경보고 자기 잘못을 알았을 때,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평양오순절운동처럼, 회개 했을때, 용서의 은총이 주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해질 가능성이 있고, 그다음 성경보게 되고, 죄를 아니 회개하니 용서받고,
그러니 구원이야기에 대해, 펠라기우스 말에 대해 너무나 만족해 한다. 고마워한다.
바르게 살도록 인도해 주신 펠라기우스에게 감사.
그런데 펠라기우스가 무엇을 반박했는가?
선할 가능성이 없다, 자유의지가 없다. 아담의 죄책을 그대로 물려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성경보고 노력해도 아담의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치면, 펠라기우스처럼 살고자 하는 종교적 신앙적 의욕이 어떻게 일어나겠는가? 안 일어난다.
참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들이 머리 굴려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안되는 자리에서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논리와 인간의 이성처럼, 펠라기우스처럼 가르쳐야 받아들이지.
그러한 환경속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하신다. 그러니 펠라기우스는 말려든다.
그리고 펠라기우스, 아리우스쪽이 다 그렇다.
이것에 대해 어거스틴은 복음적으로 이야기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 말에 제대로 반박을 하지 못했다. 다만 이단이라고 했다. 윽박지르기만 했다. 펠아기우스 말 하나하나에 반박을 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반박은 영 엉터리이다. 복음적이지 않고 앞뒤가 맞지 않다.
펠라기우스는 논리가 맞는데 어거스틴은 앞뒤가 안맞다.
어거스틴 주장.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든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그 영역을 반영하신 분이 성모마리아이다.
왜 성모마리아가 왜 개입되는가? 왜 개입을 할 수밖에 없는가?
성모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시릴이라는 깡패주장).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가 무슨 하나님의 어머니이고 예수님의 어머니이지, 이렇게 주장해서 이단소리들음.
마리아는 예수님의 인성을 낳았지 어떻게 신성을 낳았는가.
그래서 시릴이 황제에게 뇌물을 주어 재판에서 이겼다. 네스토리우스가 져 버렸다.
왜 성모마리아를 중요시하는가?
예수님으로 구원받는데 인간의 대변자가 없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는 한분 예수님밖에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도 할아버지처럼 살아 있으면 되는데 지금 없다. 하늘로 가버리셨다.
예수님을 대변할 수 있는 분이 필요했다. 그 분은 성모마리아이다.
왜 성모마리아인가.
성모마리아는 다른 사람과 달라 아담에게서 내려오던 죄성이 성모마리아에게서 잠시 중지 되었다.
만일 성모 마리아야 아담의 죄를 갖고 있다면 예수님은 죄를 갖고 때어남.
만일 아담의 죄가 있지만 잉태할 때 죄가 정지 되었다면 예수님은 죄 없는 인간, 죄없는 인간으로 태어남.
예수님의 태어날때부터 죄없이 태어나 죄없는 삶,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나온다. 죄없는 존재에서 죄없는 행동이 나온다. 인간의 행동은 그 사람의 존재에서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플라톤은 인간에게 어떤 사태가 터지만 관계론적으로 자기가 죄 짓고 싶지 않지만 죄가 된다. 약간 플라톤 적이다. 플라톤이 이렇게 이야기 했는지 모르지만.....
인간의 존재에서 행태가 나온다.
다음시간에 교리들 화체설, 예정론 논쟁, 영혼문제를 다룬다.
다 이런 교리들이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가?
사람이 납득이 되는 소리를 해야 그래야 교회 가서 안졸고 듣고, 신으로부터 구원받았다. 그 증거로 선한 행동이 나올 것이 아닌가? 선한 행동이 안나오는데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러려면 선한 행동의 바탕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대식씨 옷이 까맣네, 떼묻은 것이 아닌가 하면 오늘 아침에 새로 입은 것이다라고 해야 하는데, 도배 이야기를 한다. 펠라기우스가 아담의 죄를 그대로 물려 받았기에 인간에서 선한 것이 없다고 했으면, 어거스틴이 그래 없다고 해야 할 것인데 어거스틴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왜 하나님형상이야기를 하는가. 그것은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일부의 것이라고 포함시킨다.
너 것도 맞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에는 그렇고 전체에서 볼 때에는 그렇지 않다. 보담아 주는 식으로 해 버린다. 반대한 것을 반대한다고 이야기 해야 할 터인데, 안아주는 식으로 해버린다.
너보다 내가 더 넓게 보는 식으로 이기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 어거스틴은 영성의 본질적 부분, 인간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회복. 이레니우스, 오리겐이 주장한 것이다. 인간의 형상이 있으니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다.
펠라기우스이 말하기를 어거스틴, 너 말이야 인간은 뭘해도 죄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거스틴, 인간아 너가 보기에는 내가 죄를 조장하는 자로 보이느냐?
뭘해도 죄라며 라고 물을때 인간은 신이 될 수 있어.
이게 말이 되냐?
펠라기우스 너는 말이야 사람의 약점만 갖고 말하면 안돼. 물론 세대가 악한 것은 알지만 이 사회가 교회가 아름답게 되는 다른 방식이 있다. 자유의지와 아담의 죄의 단절로 교회를 정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어거스틴 내식으로 하면 정화할 수 있다.
하나님께는 유사성이 있다. 유사성 회복에 예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있다.
어거스틴, 인간속에 하나님의 형상. 이 형상을 회복됨으로써 펠라기우스의 걱정, 나라교회의 개선 비책에 대해,
성경에 보면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면 그 문제가 풀리게 되어 있다. 내가 말하는 인간은 죄만 짓는다는 뜻은
하나님의 형상회복에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이 임해야 회복된다.
5페이지 그러므로 어그스틴은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일체로서의 형상인 인간이 삼위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어떻게 참여하는가에 관심을 갖는데.
인간이 동물을 넘어선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 그것은
이성이란 마음을 지성으로 불릴 수 있다.
6페이지.
중간. 어거스틴에 따르면 사람의 혼에는 세가지 기능 기억과 지각과 의식.
존재를 긍정한다. 긍정하는 이것이 신의 사랑에 참여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의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인간본성이 회복된다.
따라서 인간 본성은 악한 것은 아니다. 비록 종종 타락한 본성이 나오지만,
육체의 본성은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육을 따라 사는 것이 악이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인간이 죄를 짓지는 완전히 악만 행하는 악인이 아니다. 악이나오는 선한사람.
펠라기우스: 선을 행해야지만 선이 된다.
어거스틴: 악을 행해도 선을 추구하면 선이 될 수 있다.
악을 행하면 악인이고 선을 행하면 선인이다. 펠라기우스.
선을 행할 가능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나쁜 놈이다.
어거스틴은 나쁜짓 해도 선한 사람으로 봐주자.본성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죄악이나 나쁜 덕을 육체의 본성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육체의 본성은 선한 것이다.
어거스틴이 모든 존재하는 것을 선으로 보았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완전하게 자유와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지음을 받았다.
인간의 출발점을 창조에서 나온 본성에서 그대로 건져낸다.
아담이 가진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자유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자유이다. 말을 참으로 어렵게 한다.
아담의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자유가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자유이다.
굉장히 심오한 말이 담긴 같기도 하고, 인간은 선을 지향하게 되어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자체가 선이다.
어거스틴은 아담의 타락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아담 이후 인간은 그 원죄에 물들게 되었다. 죄로 인해 근본적 선은 어둡고 악하기에 조명과 치료를 필요로 한다. 이런 잘못은 창조되어 온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의 잘못인 원죄로부터 온 것이다.
아담의 약점은 피조성이다. 이로서 아담은 죄된 의지를 가진 죄인이 되었다.
영혼은 하나님의 도움을 상실했다.
아담의 타락으로 어거스틴은 원죄의 실체를 의심치 않았다. 인류의 대표로 인류전체의 죄가 되었다.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이라서 인류전체의 죄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전제로서 인간의 본성이 인간의 종자상태 하나의 정자 난자의 상태, 종자처럼 나타난다.
개인의 행위의 최초의 죄는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행위였다. 그러나 인간을 집단 공동체로 볼 때 우리 모두가 함께 아담 안에서 죄를 지은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런 원죄가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수단은 불순한 성적욕망과 육체적 출산 행위에 있다.
그러니 결혼 하지 않으면 그 죄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박탈 당했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의지의 사용이 죄를 짓는 의지이다. 그렇게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자유가 없었다.
그러면 인간은 끝없는 죄악의 굴레속에 있는가? 어거스틴은 아니다.
이 죄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은 은총이다.
인간의 회복은 은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런은 은총은 상대적 의미에서 분위기 띄우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의미에서 필요하다.
이것은 구원을 필요로 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포착해야 한다.
세례없이는 은총없고, 구원받을 수 없다.
9페이지
펠라기우스는 인간스스로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의 덕분으로 본다.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첫째는 자유의지는 악의 본질과 기원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펠라기우스에 반대한 자유의지론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의 악은 창조후 인간에 의해 이 세상에 들어 왔기 때문에 전적으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죄악의 책임이 인간에게있다.
11페이지
선의 결핍 이론은 이전에 존재했던 개념이다.
펠라기우스가 이야기 했던 것에 대해 제대로 답변을 했는가?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펠라기우스의 반박이 나오니, 사람이 어떻게 착해질 수 있는가에서 좁은 의미에서는 맞는데.
세상 전체가 선하게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유전되는 것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보자.
그걸 가지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 않느냐?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은총으로만 구원받지. 아담은 아담이고 나는 나다라고 시도해 버리면 예수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엇인가 빠졌다, 주저주저 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어느 누구도 어거스틴을 시비걸지 않는다.
칼빈루터가 어거스틴 바탕에서 신학을
어거스친을 부정하면 개신교가 부정된다.
어거스틴에서 바로 칼빈 루터로 끌어당겨왔다.
어거스틴은 사도바울에서.
오직 은총론으로,
제가 보기에는 은총론은 말이 안된다.
이 근거는 우리속에 있는 신적요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와서 회복한다.
왜 ,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게 지었기에, 선한 것을 하나님이 회수해 가신다.
선한 것을 회수하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 형상속에 다가와서 은총으로 건진다.
하나님의 형상을 겨냥해 예수님의 은총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이 죄를 지어도 그 은총 덕분에 선한 행동이 나오고, 선한 사랑들이 나온다.
펠라기우스는 사실이 무엇인가 물었는데.
그러니 설명을, 펠라기우스는 사실이 무엇인가 물었는데. 어거스틴은 딴소리 한다.
성경책이 무엇인고 라고 물으면 글자가 들어 있거든, 책이거든, 식으로 대답한다.
어거스틴은 은총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펠라기우스는 은총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분위기 조성용이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
인간의 결심, 인간이 선을 향한 현재 자유의지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께 선한 영광을 돌리는데 더 중요하다.
어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바라보는 그것이 선한 모습이다.
제가 보기에는 둘 다 십자가 복음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나 어거스틴 둘 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하나님이 사람 되어 , 사람이 신이 된다는, 삼위일체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정도 믿는다. 어거스틴은 예정론을 말한다. 펠라기우스는 믿지 않지만.
예정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고 유기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선택했다. 구원했다. 왜냐하면 악의 책임을,
지옥에 가는 책임을 사람에게 돌리고 하나님께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심 없고 인간 구원론에, 인간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에 굉장히 관심을, 교회의 모든 교리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사람 어떻게 끌어 모으고 얼마나 납득시키는가에 인간적인 전도. 사람 설득 납득을 위해 열심을.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에 둘다 관심이 없다.
이 펠레기우스가 저에게 공격해 왔다면, 질문을 해 왔다면.
어거스틴은 피조물을 약점이라고 말한다.
피조물이 무슨 약점입니까? 그것이 영광스러운 것이지.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
인간이 약한 피조물이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개인적으로 강하다 약하다 따지는 것이냐.
인간이 피조물이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반드시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찾아 와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간다.
인간들은 이것을 종교로 바꾼다. 나 어떻게 구원받고, 신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가?
예수님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으신가, 어떤 작업을 하시는가를 증거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이야기가 아주 예리하다.
사람들이 펠라기우스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펠라기우스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신이 펠라기우스 이야기를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예초부터 보편구원론, 그렇다. 어느 누구나 오라.
위 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다. 그냥 예수님 증거하면 구원이요, 생명인데.
삼위일체를 다듬을 필요가 없다. 다듬는 이유는 신부들 권위가 살고, 그래야 자기말을 듣지, 한 하나님밑에 한교회 한 감독, 어느교회 가야 구원받습니까?
어디 가서 세례받고 누구에게 성만찬 받으면 구원받습니까? 얼마나 쉽습니까? 떡만 먹으면 되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무엇이든지 다 할려고 한다.
진짜 예수님이 와 버리면 하나님 형상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 내가 예수님을 위한 피조물이구나. 예수님 복음을 위해서 태어 났구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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