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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일반] 함평수련회 강의 녹취(2-1)우리교회[수련회]

[일반] 함평수련회 강의 녹취(2-1)

이름 : 이근호(IP:)

베드로전후서 강의

제2번

지난 시간에 중요한 것 하나했는데 그게 뭐냐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하는 그 내용까지 인간의 이성으로도 믿음을 언제든지 유발할 수 있다.라는 정도까지 사람들은 지금 자신만만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거듭나야하는 현상까지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가능한 인간적인 종교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큐티하고 이러면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까지 인간들이 제조할 수 있고 그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따라서 그걸 만들 수 있으려면 성경에서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가, 그 근원을, 그 정보를 미리 파악해 놓으면 하나님이 하실 일을 인간이 대행해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할 수 있다.라는 거기에 희망을 품고 하는 겁니다.

그들의 주장이 뭐냐면 만약에 인간에게 성경 말씀을 이렇게 지킬 능력이 없다면 미쳤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줬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줬다는 말은 우리가 그 동안 생활에 돈 벌기 위해서 바빠서 그렇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미 우리 속에 잠재해 있기 때문에 그걸 깔짝깔짝 건드리면 성령으로 헷가닥 거듭날 수 있는 모자이크 같은 바탕 같은 것은 우리 속에 내장돼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 가능성이 있단 말입니다. 가능성이 있는데 성령으로 거듭나서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이 엿 먹이고 약 올리는 것밖에 안된다 말입니다.

여자들만 모여 있는데 여기 근육 세 사람 누구 이렇게 나오는 것은 아예 말이 안 되잖아요. 여자들이 무슨 근육이 있습니까? 남자들이 알통 나오지. 여자들은 알통 나오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여자들이 있는데 알통 자랑한다는 것은 뭐냐, 아무리 해도 안 되지? 약 올리는 것밖에 안되니까 설마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엿 먹이려고 약 올리려고 줬겠느냐 우리 가운데서 말씀 듣고, 예를 들어서 '알통 자랑하세요.' 요정도하면 나올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 있습니다.라는 그 말을 빙 둘러서 이야기한 겁니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서 제가 수련회를 위해서 따로 만든 교재가 있습니다. A4용지 60장인데 [성화론의 허구성]이라고. 여기에 보면 성화라는 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가 거룩하라' 이 거룩하라 했으니까 거룩해야 된다, 거룩할 수 있다는 능력이 우리한테 있다는 말을 전제로 깔고 하는 말이니까, 우리는 거룩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된다는 이렇게 보는 것이지요. 거룩하라는 명령 자체는 우리 보고 너는 거룩될 수 있어.라는 말의 다른 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안되는 놈을 보고 거룩하라는 것은 그 말 의미 자체가 무의미하니까 그 명령이 의미있으려면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하나의 주고받고 주고받고하는 하나의 대상이 될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성화론에 나서는 이유가 인간의 행위가 추가로 바르게 실천되지 아니하면 거룩이 생겨날 수 없다. 인간의 추가적 행위가 없다면 결코 거룩은 없다.라는 논리예요. 인간의 추가적 행위가 없다면 우리에게 거룩이라는 것은 아예 없는 줄 알아라. 이놈들아. 이거예요.

두 번째는 인간의 추가적 행위가 없으면 거룩이 없으니까 거룩 단계가 빠져버리면 구원이 성사 안 됨. 인간의 추가적 행위가 없는 어떤 인간도 구원은 물 건너간다, 구원 받을 생각하지 말라. 이게 성화론이죠.

세 번째. 여기서 나온 연결된 논리이죠. 추가적 행위가 없으면 거룩이 없으니까 거룩이 없는 상태에서 구원은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쪽에서.

그 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하면 여러분이 갖고 있는 로이드 존스의 성화론의 문제점에 나와 있습니다. 불가능한 속성을 가능한 속성으로 취급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믿는 자는 뭐도 있느냐하면 성화론 말고, 거룩이라 합시다. 거룩된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고, 이 가능성을 제대로 발휘하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믿는다는 것은 내가 불가능한 일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해진 것이 아니고, 믿는 자에게는 거룩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그 가능성이 어디서 나왔냐하면 믿는 자에게 나왔거든요. 믿음이 주어졌다는 이 말은 인간의 가능성이 새롭게 발생되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끝나면 좋겠는데 그렇게 끝날 수 없는 이유가 뭐냐하면 믿는다는 것이 사물이 아닙니다. 여기 아미노, 물, 시계, 떡 사물이 아니고 믿는다는 것이 뭐냐하면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어떤 액션, 어떤 마음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믿는다고 허거든요.

내가 누굴 믿습니다하는 것은 뭘 하나 보고 이게 손수건이지, 믿습니다, 이게 아니잖아요. 손수건입니다, 이렇게 할 땐 이야기가 되는데 예를 들어서 여기다가 ‘믿습니다’ 글자 써가지고 던지죠. 이건 아니란 말이지요. 던질 필요 없이 안 던져도 ‘믿습니다’ 이렇게 할 때는 누가 믿는데요. 제가 믿습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속에 ‘믿습니다’하는 것은 우리가 행동을 결정할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믿습니다’ 이 믿음이 어떤 가능성, 믿음이 성화될 거룩될 가능성이 이미 있는데 그 가능성이 죽은 가능성인데 성령이 역사하니깐 불가능한 가운데에서 이미 잠자고 있던 죽은 가능성이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는 식이 된다 이 말이죠.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어려워요. 이해 안 되면 이해 안 되는대로 할 수 없습니다. 밀어 붙일랍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여러분 아시겠지요. 인간의 추가적 행위를 요구한다면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까 너희도 거룩하라'했단 말입니다. 만약 추가적 행위가 없다면 그 사람은 거룩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백날 믿어도 소용없어요. 왜 추가적 행위, 거룩한 행위가 없으니 그 사람은 구원, 거룩한 단계, 성화 단계가 빠져있기 때문에 성화 단계가 빠진 상태에서 천당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성화론에 의하면.

따라서 성화단계를 거쳐야 구원이 성사되기 때문에 추가적 행위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추가적 행위를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느냐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추가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믿는 자는 네가 알아서 해. 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너에게 가능성을 줬기 때문에 네가 알아서 해 도움 받지 말고. 이렇게 된다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령님에 의해서 성화된다면 그것은 주체자가 누구냐하면, 성령님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님의 성화론이 된다고요. 그런데 성령님은 원래 성화론이 필요 없잖습니까? 왜냐하면 성령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시고, 처음부터 거룩하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점차점차 거룩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성화론이 되려면 성령님을 빼고 이야기해야 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전 목사님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쟁반에 떡이 있는데 전 목사님은 팔이 이상해서 떡을 못 들어요. 그래서 성령님 대신 제가 손가락을 줘 가지고, 줘도 할 수 없어. 당겨주어야 돼요. 그래도 못 잡사요. 입에 집어 넣어줘야 해요. 하나 먹었습니다. 누가 떡을 먹게 했습니까? 전 목사님이 아무리 떡을 먹어도 제가 떡을 먹게 했지요. 그러면 요 행동을 떡 먹는 행동이 아니고, 착한 행동이라고 봅시다. 누가 착한 일했습니까? 성령님이 착한 일했지요.

이 성화론은 하나님이 원래부터 그렇게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그러면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은 해당이 안 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저는 비껴나 버려야 돼요. 떡 먹는 솜씨를 본인이 와서 보여야 됩니다. 떡을 집을 때 어떻게 집었지요? 요렇게 집었다고요. 안 되는데요. 할 수 있어. 가능성이 있는 분이야. 내가 가능성을 주었어. 그 다음에 어떻게 된다고요. 이것은 성령님께서는 직접 그 사람 속에 계시지 않을뿐더러, 그 사람 생각을 지배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리고 도와주지도 않을 뿐더러 언제 도와주느냐 하면은 와서 물을 때 팔장끼고 있다가 기도를 안 하면 도와주지도 않고, 언제 도와주느냐 하면 진심으로 '하나님 도와주세요' 빌면 그때 도와주고, 기도 끝나면 그 다음엔 또 안 도와주고 답답하면 다시 기도하면 그때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잠시 방법만 일러 주고 본인이 와서 하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봅시다.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기도를 한 시간했습니다. 요 한 시간 내용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기도할 때 오늘 오전 12시까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성령님께 기도하니까 성령님께서 알려주기를 알려 줬는지 안 줬는지 모르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거지요. 12시까지 이렇게 하라고 해서 이렇게 살면 이게 바른 거룩된 삶이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언제까지 유효되냐 하면 12시까지만 유효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12시까지 내용을 8시부터 9시까지 한 시간 동안 기도해서 자길 챙기겠다고 했는데 12시 10분에 친구가 찾아와서 기도할 시간을 놓쳐버렸어요. 친구하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3시간 보내버렸네. 친구 가고 난 다음에 허겁지겁 기도해가지고 4시에 기도했는데 기도 내용이 뭐냐 하면 밤 12시까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인도 받기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24시간 가운데 뭐가 빠졌습니까? 12시부터 4시까지의 삶은 거룩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인도함을 받지 못했어요. 왜 친구 때문에. 친구가 찾아와서. 늘 인도를 받아야 될 텐데. 늘 인도 받는 것이 뭡니까? 뒤에 팔짱 끼고 계시는 성령님께 뭘 물어야 될 것 아닙니까? 물어야 되는데 물으려 갈 시간에 친구가 찾아왔다든지, 갑자기 배달이 났다든지 이래 가지고 기도할 시간을 놓쳐 버렸다, 그러면 그 시간은 기도 인도받지 못하고 자기 평소에 한 행세대로 행동을 해 버렸으니까 그 시간만큼은 거룩되지 못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것이 못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라했는데 그만 쉬어버린 겁니다. 그러면 그 1월 9일 오후 12시부터 3시까지 누락한 것이 되어버리고 지난날 과거에 대해선 해결책이 없지요. 그렇다면 그 만큼 누락이 되었으니까 다음날 곱배기로 해야 됩니까? 그런 겁니까? 그렇다면 이 가능성이란 것이 뭐예요? 결국 가능성이란 것은 내 쪽에서 성령에게 자문을 구하는 그런 가능성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바로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것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자기가 성경을 편집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생각대로 하나님의 계시라고 확정지을 때 그것을 칸트는 ‘실천이성’이라고 해요. 기독교에서 그렇게 믿음으로 산다, 성화롭게 산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칸트는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에서 나오는 인간의 이성에 불과하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칸트의 주장에 의하면 실천이성은 이렇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 살인하지 말라는 성경책의 말씀 때문에 살인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나쁘다는 것이 다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이거는 살인하지 말라는 분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타고난 것이니까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하면 ‘종합명제’라고 합니다. 종합명제는 분석명제와 대비되는 것입니다. 딱 보면 딱인 줄 아는 것이 종합명제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사업에 실패했다. 나 개처럼 살래. 나 인간 안 될래.하고 소주 열댓 병 사다가 냉장고에 시원하게 넣어 가지고 마구 퍼마시는 겁니다.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말리지 마. 나 개처럼 살래. 그런데 옆에 있던 개가 들어보니까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지금 방금 아버지가 말하는 개처럼 살래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뭐처럼 살아가나, 돈처럼 살래 이렇게 해당되는데. 왜냐하면 개는 짐승이고 양심도 없고,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개가 주인을 알아보고 항상 딴 집에 가라해도 개는 자기 집에 와요. 너 이제부터 우리 집에 오지 말고 저 옆집에 가라. 거기서 밥 먹고 살아라. 그러면 이건 뭘 뜻합니까? 개 속에도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돌멩이와 다른 뭔가 자기 나름대로의 뚜렷한 고집이 있다는 것을 알지요. 개 같다는 것은 개같이 나쁜 존재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개 입장에서 자기 주인을 알아보고 충성되이 자기 주인에게 복종하는 그런 요소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에 해당되는 어떤 원리 같은 것이 있더란 말입니다. 그 원리가 있다면 아무리 인간이 개처럼 살고, 돈처럼 살고, 소주병 먹고 스스로 방탕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면서도 인간이기에 이것은 개야, 이것은 짐승 같은 짓이야, 이건 나쁜 짓이야. 이것은 가족들에게 누를 끼치는 짓이야라고 느끼는 그 최종의 느낌은 본인의 가능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집어 넣어준 거예요. 그러면 인간답다는 것은 뭐냐 하면 착하게 사는 게 인간다운 것이 아니라, 나쁜 짓 했을 때 이유 없이 그것은 나쁜 짓이라고 느끼는 그것은 본인이 어떻게 거역할 수 없는, 본인이 어떻게 주저할 수 없는 기본적인 양심으로써 이것은 신께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거예요. 지가 소주 먹고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그런 짓을 하는 것 조차도 그 순간에도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정신 차려야지. 내가 왜 이러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게 한 것은 주인은 따로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인간의 실천이성, 인간의 도덕적인 이성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말하기를 어떤 조항을 택하지 말라. 왜 그 조항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핑계이기 때문에 조항을 지키는 것은 합법성인데 합법성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합법성이 아니라 이것은 내 속에 있는 진실된 도덕적인 반드시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신이 주신 명령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유 없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해야 한다는 칸트가 주장하는 실천이성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나오는 거룩과 어떤 차이점이 어디 있느냐를 따지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칸트는 말하기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렸다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은 인간은 어떤 자신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서 도덕을 양심대로 사는데 그건 잘못된 거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는 사고방식이라는. 하나님이 있는 사고방식은 이것이 비록 나한테 손해가 올지라도 신의 명령이 내 속에서 작용한다면 그 신의 명령을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좋은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이라면 나쁜 짓하면서도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래선 안 되는데. 노숙자로 가족을 팽게 치면서도 애가 물에 빠지면 물에서 건져주는 측은지심,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은 비록 자기 자신은 포기했지만 옆에 어떤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본능적으로 집어 당기는 것은 신께서 인간에게 주신 인간다움의 기본이라는 것이죠. 인간다움이라 하는 것은 착한 일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이라 하는 것은 도대체 내 속에 신이 어떤 양심을 부어주었는가를 늘상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진정한 인간다움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칸트의 실천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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