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27:57-61 (장사 지내심)
Re..마 27:57-61 (장사 지내심)
이름 : 이근호(IP:)
장사지내심
2006년 1월 15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27:57-61
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27: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27: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27: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에 집착합니다. 무슨 뜻으로 집착하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부활의 시선으로 볼 때는, ‘확실히 돌아가셨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즉 부활을 보여주고 믿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얻게 되는 체험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죽으신 분이라는 사실은 모든 이들에게 다 분명한 현실의 일부로 받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나심을 연계시키는 일에 투입시킵니다. 즉 요셉을 통해 확실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서 새무덤에 안장했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겁니다. 이처럼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관심두지 않는 특수한 일에 관심을 갖고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베드로에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이후에 베드로와 그 일단의 무리들은 다시 고기 잡으려 갔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던졌지만 그 그물에는 한 마리의 고기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놀랍게도 그물이 고기가 한 가득입니다.
베드로는 당장 배에게 뛰어내려와서 “예수님이다!”라고 소리칩니다. 마치 전에 처음 예수님을 대했을 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라고 외쳤던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세상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바로 그런 인식을 두고 말합니다. 세상 모든 것은 결코 인간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갑니다.
다윗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간음죄를 짓고, 그 남편 우리아 장군까지 고의로 살해하고 말았지만 그런 다윗이 사는 길은 하나님께서 주선해주셨습니다. 바로 나단 선지자를 그에게 보낸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를 만나고 난 뒤, 다윗을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간음죄나 살인죄를 짓지 전에도 이미 자신의 죄인으로 살아왔다는 겁니다. 따라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한 미래와 꿈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겠노라 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번제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자신이 주체되어 드리는 제사 행위는 하나님께서 거부하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미 ‘상한 심령’으로 살아온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나단 선지자의 오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오늘날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이 죽으심 앞에서 그 누구도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것을 옳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조차 따지고 보면 결국 자기를 믿는 겁니다. 자기 불멸을 위하여 신을 부르고 찾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모두 환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하나님의 뜻은 쉽게 말해서 맨홀 뚜껑 열고 지하 세계로 숨어들어가는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원래 제시한 인간 세계의 미래요 성취였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을 듣고도 그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실제로 죽음이라는 것을 체험하기에는 예수님이 최초였습니다. 그 전에 그 어느 누구도 진정한 ‘하나님이 내리신 죽음’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각자 나름대로 이 세상에 자신의 미래상을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이왕 자신이 탱탱하게 살아있는 이상, 살아있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핑계삼아 역사를 통해서 새로운 미래상을 자꾸만 생산해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예수님의 무덤 위에서나 터지는 탐욕의 열매들입니다.
꿈은, 그리고 미래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무덤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미래가 이루어지면 더 이상 미래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하나님의 뜻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승천, 예수님 재림, 세상에 대한 파멸과 최후 심판, 이 모두는 인간을 위한 미래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뜻의 차원에서 실시될 일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아리마대 요셉처럼, 부활을 예비하는 차원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심 쏟고 살게 만드십니다. 베드로의 경우처럼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히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그 일을 달성하십니까?
여기에 세례의 능력이 주입됩니다. 세례란 ‘연합됨’을 말합니다. 늘 붙어있을 수 밖에 없는 입장에 놓이게 하십니다. 그냥 붙어있는 것이 주도권을 예수님께서 다 쥐고 있는채로 연합되게 하십니다. 로마서 6:3-4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성취 따르는 미래상에 우리를 합류시켜 넣습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날 우리들은 아리마대 요셉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말씀 성취를 증거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2:20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생명은 이미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이제 남은 이 땅에서 세월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간에 주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므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무덤 속에 합류된 자는 결코 ‘우리 중에 누가 더 높으냐?’라는 논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책망을 받을 뿐입니다. “너희가 나의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곧 ‘혼자 노는 게임’에 불과합니다. 이런 놀이를 가지고 구원이라는 이익을 얻고자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것마저 예수님의 무덤 안에서 지워버리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되어진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임을 저희들이 눈치채도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